< 119화. 입원 치료하시죠 >
119화. 입원 치료하시죠
밖에서는 카리스마 넘치는 경영자이자, 능력 있는 한의원 대표 최인호.
그가 아내 이미란의 말에 꼼짝도 못 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첫째로 아내가 힘든 시절부터 자신을 뒷바라지 해왔던 것이요, 둘째는 시장 골목에서 첫 개원 때, 모자란 돈을 아내의 도움으로 해결할 수 있었기 때문이리라.
'아마, 아내가 없었다면 지금과 완전히 다른 삶을 살고 있었겠지.'
때문에, 예전의 한창 패기 넘치던 시절에는 자신의 의지가 선택에 가장 중요한 요소였지만, 가정을 꾸리고 가장이 되면서부터는 생각해야 할 것이 많아지는 법.
그런 최인호에게서 대략적인 설명을 들은 아내가 되물었다.
“그럼, 우리 호진이는? 잘 키워서 호진이한테 물려줄 거라면서?”
솔직히 조건은 생각보다 좋았다.
다만, 자신의 사업체를 가지고 있는 것과 다른 사람의 사업체에 소속되어 일하는 것에는 큰 차이가 나기 마련.
아내의 말에 최인호의 말문이 막혔다.
최호진. 사랑스러운 아들.
의대에 갔으면 좋았겠으나,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는 말이 있듯이.
“아빠. 전 아빠 같은 한의사가 되고 싶어요.”
어릴 적의 기억이 큰 영향을 미쳐서였을까.
의대에 가면 좋겠다고 여러 번 설득했지만, 쿨하게 무시한 채 결국 한의대로 지원했고, 그렇게 한의대 1학년생이 되어 있었다.
사실 내가 그렇게 좋은 한의사라고 할 수는 없었는데.
어렸을 적의 아들이 보기에는 그게 그렇게 멋져 보였나 보다.
‘하긴, 어릴 때 아빠는 언제나 멋있는 법이니까.’
반면, 실제 지금의 내 모습은 그렇게 근사한 한의사가 아닌, 이미 닳고 닳은 한의사일 뿐.
의사나 한의사가 시간이 지나다 보면 대부분 이렇게 변하기 마련이었으니.
반복되는 일상에서, 심장이 뛰는 일이 적어진다는 것.
처음 진료를 봤을 때처럼.
자신의 진료가 환자에게 정확하게 들어맞았을 때처럼.
그리고 환자를 성공적으로 치료했을 때처럼.
이렇듯 한 때는 심장이 뛰는 순간을 겪지만,
반대로 진상 환자나, 예후가 나빠 잘못된 환자 등도 당연히 겪게 되는 법이었으니.
열정을 다해 진료를 봤는데, ‘감사하다’ ‘고맙다’라고 인사는 못 들을망정, 욕을 듣는다던가, 멱살을 잡힌다던가, 또는 가족들에게 고소를 당하는 일이 반복되다 보면 자연스레 무감각해지지 않겠는가.
때문에, 어느 정도 경력이 있는 의료인들은 겉으로는 친절할 수 있어도 진심이 우러나오기 힘든 법이다.
그래서 종종 환자들의 불만을 사기도 하지.
그들이 보기엔 의료행위를 그저 돈을 벌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는 것처럼 보일 테니까 말이다.
그러던 어느 날.
처음 허준의 꼬드김에 넘어가 혜민서란 우스꽝스러운 활동에 참여했을 때 받은 두근거림.
진료를 받은 환자들의 진심이 담긴 고맙다는 말은 듣자, 정말 오랜만에 심장이 쿵쾅거리지 않았던가.
‘그래서 함께 하고 싶었는데. 아무래도 인연이 아닌가 보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란 말이 있듯이,
이 나이쯤 되면 인연이 아니라는 느낌도 제법 알기 시작할 때다.
“알았어. 이 이야기는 없었던 거로 해줘.”
최인호가 빠르게 수긍했다.
그때,
현관에서 스윽- 하고 나타난 아들 최호진.
워낙 심각한 이야기여서였을까.
부부가 대화하는 중에 현관문을 열고 들어왔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이어진 대화는 최호진이 듣기에도 충분했다.
“어머~ 아들 언제 왔어?”
“다녀왔습니다. 그보다 아빠.”
“응?”
“아까 하신 말씀 다 들었는데요.”
“그, 그래?”
“네. 전 아빠가 하고 싶은 대로 하셨으면 좋겠어요.”
최호진의 말에 놀란 것은 최인호뿐만이 아니었다.
가장 놀란 것은 당연히,
“호진아?”
“엄마. 아까 아빠 표정 못 봤어요? 저 그런 표정 진짜 오랜만에 봤거든요. 어렸을 때 아빠 얼굴이었는데.”
“그건...”
“게다가 엄마는 모르겠지만, 아빠가 같이 일한다고 하는 허준 선생님이란 분이 얼마나 유명한 분인데요. 요즘 한의대에서 가장 인기인이라고요.”
잠시간의 정적.
그 정적을 깨며 최호진의 말이 이어졌다.
“그리고 아빠가 속해있는 혜민서란 단체.”
“혜민서? 그건 또 뭔데?”
“의료 사각지대에 놓인 사람들을 진료해주고 한의학 지식을 나누는 단체에요.”
그러자 언뜻 남편이 의료봉사에 갔다 왔다면서 코를 골며 기절했던 기억이 났다.
“그게 요즘 한의사 선배들 사이에서 가장 핫한 단체거든요. 거기에 보면 설립 멤버에 아빠 이름 올라가 있는 거는 아세요? 제가 그거 볼 때마다 얼마나 뿌듯한데요.”
“당신, 저 말이 다 사실이야?”
최인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설립멤버일 뿐만 아니라, 종종 익명으로 후원금도 넣었지.
“엄마. 그러니 그냥 아빠 하고싶은대로 하시라고 하세요. 저는 지금으로도 충분히 만족하니까요.”
아들의 대답에 최인호의 눈가에 눈물이 핑하고 돌았다.
아무래도 이 나이쯤 되니 여성호르몬 분비가 왕성해졌나 보다.
‘내가 아들 하나는 잘 키운 것 같아. 보람이 있어.’
“우리 아들... 다 컸네. 아빠보다 낫다.”
“제가 좀 그런 편이죠.”
그 모습을 지켜보던 이미란이 둘을 빤히 바라보다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래. 누가 아빠와 아들 아니랄까 봐 아주 똑같네! 똑같아. 알았어. 당신, 하고 싶은 대로 해.”
“정말?”
* * *
국내 포털사이트 N 사.
시대의 흐름에 맞춰 대기업의 반열에 올라선 이곳이 바로 윤다희의 남편, 김민준의 직장이었다.
여느 때처럼 개발 3팀장 김민준이 출근했고,
그를 알아본 팀원들이 인사했다.
“팀장님. 좋은 아침이에요.”
“일찍 오셨네요~”
“모두 좋은 아침~”
“오늘 무슨 좋은 일 있으신가 봐요?”
“그러게요. 오늘따라 얼굴이 아주 환한데요?”
몇 달 전과는 완전히 바뀐 개발 3팀의 분위기.
어둡고 칙칙했던 팀의 분위기는 온데간데없어졌고, 이제는 완전히 다른 팀인 것처럼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돌고 있었다.
이는 팀장인 김민준의 변화에서부터 시작된 것으로,
일 처리는 뛰어났지만, 까다로운 성격으로 팀원들이 자주 바뀌기 일쑤였던 과거의 모습과는 다르게, 어느 날부터 사람이 완전히 바뀌어 버린 것이었다.
날카롭고 짜증스럽던 성격 대신에 잘 웃고 팀원들의 고충을 들어주면서 팀을 이끌어 나가는 이상적인 팀장의 모습.
처음에는 적응하지 못했던 그 모습이 지금의 김민준에게는 평소의 모습이 되어 있었다.
게다가 외모는 또 어떠한가.
예전에는 누가 봐도 얼굴에 ‘개발자입니다.’라고 쓰여있는 사람 같은 모습이었다면, 지금은 살이 빠지고 단단하게 드러난 라인에 드러난 턱선은 영화나 드라마에서 나올법한 개발자의 모습.
이런 엄청난 변화는 회사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에도 충분했다.
간혹 엘리베이터에서 부장님을 만나기라도 하면,
“어? 김 팀장. 좋은 아침이야.”
“안녕하십니까, 박 부장님.”
“지난번 개발 건 아주 매출 성장이 잘 나오고 있다면서?”
“전부 팀원들 덕분이죠.”
“겸손하기는, 자네가 잘 이끌어 나가니 팀원들도 잘 따라오는 것 아니겠나. 앞으로도 이렇게만 쭉 해주게. 자네가 우리 부서에 있어서 아주 마음이 놓여.”
이렇듯 허준한의원에서 처방받은 약과 운동이 가져온 변화는 과거의 김민준을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만들어 새로운 인생을 선사해주고 있었다.
그렇게 출근한 김민준이 점심시간에 2팀 팀장이자 동기인 친구와 커피를 마시는데,
“민준아. 너 오늘 기분 좋아 보인다? 아침부터 싱글벙글하다고 소문났던데?”
“그래? 티 났어?”
“어. 아마 너 빼고 회사 사람들 다 알고 있을걸? 무슨 좋은 일 있어? 혹시, 로또?”
김민준이 밝게 웃으며 답했다.
“아쉽지만, 로또는 아니고 와이프가 이제 안정기에 접어들었거든.”
“진짜? 야~ 축하한다. 진짜 축하해야 해 이건. 어떻게, 오늘 동기 애들이라도 싹 다 모을까?”
“안돼. 와이프 데리러 가야 해.”
그날 저녁.
허준의 진료실.
허준이 윤다희 선생의 맥을 잡았다.
‘좋네.’
맥박도 손끝에 느껴지는 감각도 어느 것 하나 할 것 없이 조화로웠다.
위험한 임신 초기를 무사히 넘기고 바야흐로 안정기에 접어든 것이었다.
허준이 눈을 뜨자,
“어때요?”
윤다희가 다급히 물었다.
이미 병원에서 검사를 마쳤기에, 안정기에 접어든 것은 알고 있었으나.
자신의 임신 소식을 가장 먼저 알게 해준 것도 허준이었으며, 지금껏 옆에서 꼼꼼하게 챙겨준 것도 허준이었으니, 혹시나 평소와 다를까 싶어서 물은 질문이었다.
물론, 그 바탕에는 지금까지 허준에게 진료를 받으며 완전히 신뢰하게 된 무한신뢰가 함께했다.
윤다희의 질문에 허준이 답했다.
“아주 좋네요.”
“정말요? 휴~ 다행이네요. 원장님한테 그 말을 들으니 이제야 안심이 되는 것 같아요.”
“이게 다 윤 선생님이 열심히 노력해 주신 덕분이죠.”
“아니에요. 원장님이 고생 많으셨죠. 원장님 덕분에 그 지독하다는 입덧의 입도 경험해보지 못했잖아요.”
“안정기에 접어 들었으니, 이제부터는 운동량을 슬슬 늘리셔도 됩니다. 물론, 운동은 유튜브에 찾아보면 이것저것 많으니 따라 하시면 될 것 같아요.”
“알겠어요.”
“참, 그리고 배 속의 아이가 소리도 들을 수 있으니, 아시죠? 태교에 신경써주셔야 한다는 거.”
“물론이죠!”
윤 선생이 자신의 배를 쓰다듬으며 답했다.
이렇게 임신 이후 첫 번째 고비인 초기를 무사히 넘겼다.
이제 안정기에는 체력과 충분한 영양소를 확보해 후반전을 위해 체력을 비축할 차례.
윤 선생님의 배 속에 아이가 빠르게 자라나면서 몸은 무거워지고, 그로 인해 관절과 근육들이 힘들어질 테지만, 그걸 위해서 그동안 미리미리 준비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모자랄 수 있을 터.
“윤 선생님. 앞으로 아이가 지금보다 빠르게 자랄 겁니다. 혹시, 근무 중에 조금이라도 불편하시거나 피로감이 느껴지시면 바로 말씀해주세요.”
“알겠어요. 원장님. 걱정하지 마세요. 안 그래도 김 선생도 그러더라고요. 요즘 배 나오기 시작했는데, 힘들면 이야기하라고.”
허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듯 착착 진행되어 나아가는 사람도 있는 반면에,
“안녕하세요. 선생님.”
“이리로 오시죠.”
허준이 진료를 받으러 온 환자를 안내했다.
암으로 한의원에 방문한 김정남 환자.
그런 그의 옆으로 보이는 퀘스트에는 진행도가 20에서 머물러 있었다.
‘엊그제에도 20이었지.’
벌써 며칠째.
20에서 머물러 더는 올라가지 않는 상황.
즉, 정체되어 있다는 뜻이다.
“진맥 잡아볼게요.”
허준이 진맥을 잡았고,
여전히 달라진 것은 없었다.
몸은 쇠약했고,
특히, 위장이 가장 허하다.
‘치료법이 잘못된 것일까.’
마치 거대한 벽이라도 만난 것 같은 느낌.
퀘스트가 나타났다면 분명 돌파구가 있다는 뜻일 터.
차근차근 다시 퍼즐을 맞춰나가기 시작했다.
환자의 의지.
처음에는 치료에 대한 의지가 약했으나, 몇 번 진료 이후 떨어졌던 소화력이 올라오면서 식욕이 돌아와 제대로 밥을 먹게 되자, 요즘에는 스스로 먼저 찾아올 만큼 의지가 충만해진 상태다.
‘그렇다면 치료법.’
침과 뜸 그리고 탕약을 이용한 치료법.
다시 한번 생각해봐도 지금의 치료법이 가장 적절하다.
머리뿐만이 아니라 육감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그럼 대체 뭘까... 설마?’
왜 진작 그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허준이 무언가 깨닫고는 눈을 떴다.
횟수와 주기.
당장 동상이나 화상같이 위급한 환자의 경우에는 매일 하루 두 번씩 치료하지 않던가.
암이 과연 동상이나 화상보다 약한 지병일까.
이 물음에 더하면 더했지 그렇다고 동의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당장, 생명과 직관 되는 병이었으니까 말이다.
‘쉽게 설명하자면.’
0의 상태에서 치료로 +1을 만들면 병이 다시 –1을 만드는 것.
즉, 좋아진 만큼 나빠져서 원상 복귀가 되고 있다는 것이었다.
현재 진료는 이틀에 한 번꼴.
횟수를 늘려야 한다.
“김정남 씨. 입원 치료하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