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6화. 아주 든든한걸 >
116화. 아주 든든한걸
얼마 전.
허준과 김정우의 대화.
“자네가 직접 두 눈으로 봤다시피, 병원의 규모가 상당할 걸세.”
“네. 확실히 그렇더군요. 그 정도 규모의 한방병원은 국내에서 거의 본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잘 봤네. 그 빌딩에는 일반적인 한방병원이 가진 시설뿐만 아니라, 연구실이나 기록실 등이 추가될 테니 말이야.”
김정우의 답을 들은 허준.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허준도 개원하면서 느낀 가장 중요한 부분.
바로, 직원이 아니던가.
음식점으로 따지면 누가 서빙 하느냐에 따라 효율이 달라지고 손님들의 반응이 달라지기 마련인데, 하물며 병원이야 오죽하리.
“그럼, 병원에서 근무할 선생님들은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그래서 지금 자네를 찾아온 것이 아니겠나.”
“그 말씀은...”
“이전에도 말했듯이 자네가 원장이라네. 즉, 인사에 대한 결정권에 자네의 의견을 충분히 반영하겠다는 이야기지. 자네가 진료를 직접 보면서 현장을 진두지휘하게 될 텐데, 아무래도 자네와 손발이 맞는 식구들이 필요하지 않겠나?”
맞는 이야기였다.
당장 아무리 능력이 뛰어나다고 하더라도, 홀로 진료를 보는 환자의 숫자는 정해져 있는 법.
‘유도진 선생을 비롯해 한의원 식구들이 없었더라면 지금처럼 수월하게 진료를 보지는 못했겠지.’
허준의 머릿속에 한의원 식구들을 비롯해 태용한의원의 선생님들까지 주르륵 차례대로 떠올랐다.
만약, 그들과 함께 호흡을 맞춘다면 지금보다도 더 어마어마한 시너지가 날 테니까 말이다.
“알겠습니다. 그럼, 제가 생각하고 있는 선생님들께 이야기해보도록 하죠.”
“잘 생각했어. 참, 그리고 한 가지 더.”
“또 있습니까?”
“우리가 만드는 한방병원의 궁극적인 목적은 한의학의 현대화라고 할 수 있네만, 그렇다고 적자를 봐가면서까지 운영할 생각은 없네. 운영을 이어나갈 최소한의 매출은 나와줘야 하지.”
허준이 이해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 정도 예상하던 사항이라, 이미 그에 대한 해답도 생각해 둔 허준이었다.
자신이 만나본 사람 중에서 사업적인 감각을 가지고 한의원 운영에 가장 뛰어난 사람.
바로, 지금의 태용한의원이 있기 전의 경희한의원 대표 최인호였다.
‘물론, 시장 골목에 있을 때 조금 얍삽한 짓을 하긴 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신이 기연을 얻고 난 뒤에 벌어진 일종의 자존심 싸움과 같은 것이었다.
그걸 제외하면 그의 능력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으니, 실례로 한의원을 확장하면서 막힐 때마다 그의 도움으로 수월하게 커갈 수 있지 않았던가.
‘게다가 한방병원급 운영에도 익숙할 테고.’
“안 그래도 그 문제에 대해서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다. 제가 진료에만 집중하기 위해서는 꼭 필요할 것같은 사람이 있거든요.”
“그래? 그게 누군가?”
“최인호 대표입니다.”
김정우가 살짝 놀랍다는 듯이 허준을 바라봤다.
그런 해답을 내놓을 줄이야.
‘호오... 이거 재밌게 돌아가는구먼? 최인호라니, 생각도 못 했어.’
문득, 머릿속에 최인호의 모습이 떠올랐다.
욕심과 자존심이 강하면서도 자신의 사람을 버리지 않는 성격.
게다가 허준 선생을 특히 아끼는 모습도 있었지.
“생각지도 못했네. 최인호 그 친구의 이름이 자네의 입에서 나올 줄이야.”
“선생님도 아시다시피, 최 대표가 과거 시장 골목에서 자존심 싸움을 조금 한 적이 있을지 몰라도, 그것을 제외하면 적임자라고 생각합니다.”
김정우가 동의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시장 골목에서 같이 보낸 세월이 있는 만큼, 능력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었으니까 말이다.
“좋아. 그럼, 그 일도 자네가 마무리해 주겠나?”
“물론입니다. 그리고 저도 선생님께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말해보게.”
“사람들을 데려오라고 하셨는데, 직급이나 급여에 관련해서도 제 권한이라고 생각해도 되겠습니까?”
“물론이지. 자네가 선만 지켜준다면 말이야.”
···
“그렇게 말하더군.”
김정우의 대답에 박진석이 헛웃음을 쳤다.
“허...참, 기가 막혀서 말이 나오질 않는군. 그런데, 듣다 보니 틀린 말이 없기도 하고.”
“하여튼 자네가 반대해도 이미 그렇게 결정되었으니, 우리가 거기까지 신경 쓸 필요는 없을 걸세.”
“좋아. 그럼, 우리는 나머지 일을 처리해야겠군.”
* * *
태용한의원.
점심시간이 되었음에도 박용준이 무언가 한참 집중하고 있었다.
그때, 진료실 문이 열리며,
“박 원장. 점심 해야지?”
“아, 잠시만요.”
대답을 하면서 키보드를 마구 두드리고 있는 그의 모습에 김태식이 다가왔다.
“이게 다 뭐야?”
“아~ 이번에 혜민서에 새로 동참하겠다는 선생님들 목록이요.”
“이렇게나 많아?”
김태식이 살짝 놀란 얼굴로 모니터를 바라봤다.
언뜻 보기에도 서울뿐만이 아니라 부산, 대구, 대전, 강원 등. 지방에서 참여한 선생님들이 꽤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 인원이 엄청나게 많은 것은 아니었으나, 당장 전국에서 활동을 하는 것만으로도 꽤 큰 성과가 아니겠는가.
“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아~ 이 중에서 몇 명은 제 동기랑 선후배도 있고요. 실제로 직접 소문이나 활동하는 모습을 보고 참여해주시는 선생님들도 계시고, 온라인 교육 때문에 동참하시는 분들도 계시고요.”
“하긴, 온라인 다운로드 수도 꽤 된다면서?”
“네. 아무래도 직접 한두 번은 올 수 있어도 매주 왔다 갔다 하기에는 시간과 비용이 부담스러우니까요.”
“그런데, 동기랑 선후배는 뭐야?”
김태식의 물음에 박용준이 웃으며 답했다.
“제가 우리 매출 살짝 언급하면서 바람 좀 잡았죠.”
“그거 허준 선생이 알면 화내지 않을까?”
“글쎄요? 생각해보면 서로 좋고 좋은 거 아닐까요? 어차피 허준 선생님이야 혜민서의 이름으로 사람들을 모아 의료사각지대에 놓인 사람들을 진료하자는 것이 첫 번째, 목적이니까요.”
“그런가?... 참, 말 나온 김에 나도 한가지 이야기할 게 있는데 말이야.”
박용준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그건, 밥 먹으면서 이야기하면 안 될까요?”
“그러지. 뭐 먹을래?”
그렇게 둘이 향한 곳은 중국집.
한의원 원장이라고 해서 직장인들의 점심 메뉴와 다를 바 있을까.
“전 간짜장이요.”
“그래? 난 짬뽕 그리고 세트로 탕수육?”
“원장님이 사주시는 거죠? 콜이요.”
그렇게 박용준이 물컵에 물을 따르며,
“그런데, 아까 하시려던 이야기가 뭐에요?”
“아~ 별거는 아니고, 재개발 이야기는 들었지?”
“그럼요. 우리도 슬슬 정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그래서 그 이야기 좀 나눠보려고.”
김 원장의 대답에 박용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사라지는 한의원이었으니,
두 가지의 선택지만이 남아 있었다.
같이 다른 동네에서 지금처럼 함께 개원하거나, 또는 따로 떨어져서 각개전투로 나아가는 것.
‘이왕이면 함께하는 편이 더 좋을 텐데.’
그간 호흡을 맞춰오며 손발이 잘 맞은 둘이었다.
그래서 박용준이 먼저 물었다.
“원장님은 어떻게 하시려고요? 설마, 고향으로 내려가실 생각은 아니죠?”
서울에서 갑자기 김 원장의 고향에 내려가는 것은 아무리 함께하고 싶은 마음이 커도 무리였다.
“그럴 리가. 박 원장. 허준네 이야기는 들었지?”
“그쪽은 아예 다른 동네로 가서 다 함께하기로 했다면서요?”
“반은 맞고 반은 틀렸어.”
김 원장이 씨익 웃으며 답했다.
허준 원장에게 받은 제안 때문이었다.
그리고 지금 이 자리에서 그 이야기를 꺼낼 참이었다.
“짜장면 어느 분이세요?”
“이쪽이요.”
그때, 나온 식사.
그리고 이어진 김 원장의 말.
“허준 선생이 우리도 함께하자더군.”
“네!?”
짜장면을 비비던 박용준이 놀라 젓가락이 뚝 하고 부러졌다.
“정말요?”
“그럼, 정말이지. 거짓말 같아?”
“대, 대박...”
허준한의원 선생님들과 같이 동업을 한다고?
머릿속에 그림이 그려지기 시작한다.
허준 선생님과 그 옆에 유도진 선생님 그리고 김 원장과 자신의 모습.
일주일에 두 번 있는 교육만으로도 엄청나게 발전하고 있는 중이라고 몸소 느낀 그였다.
그런데, 매일같이 같은 공간에서 진료를 볼 수 있다니.
그렇게만 된다면 앞으로 얼마나 더 실력이 늘어날까.
게다가 망할 걱정은 조금도 할 필요가 없었으니,
“자네 생각은 어때?”
“저야 당연히 찬성이죠. 그런 걸 굳이 묻고 그러세요? 아시잖아요. 제가 허준 선생님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지. 그래도 혹시나 해서 물어본 거야. 사람 일은 또 모르는 거니까. 그럼 그렇게 하기로하고. 밥이나 먹어 볼까? 캬~ 오늘따라 국물이 죽이네.”
“그러게요~”
* * *
그날 저녁.
허준한의원의 진료가 끝나고 혜민서 선생님들이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했다.
먼저 찾아온 태용한의원 식구들을 한의사 밥이 맞이했다.
“어서 오세요.”
“안녕하세요. 밥 선생님. 다른 선생님들은요?”
“유도진 선생님은 2층에 가셨고, 고요한 선생님은 오늘 휴가요. 허준 원장님은 안에 계시고요.”
“안에요? 손님이 오셨나 봐요?”
“네. 정형외과 김형서 원장님 오셨거든요.”
“어? 되게 일찍 오셨네요.”
원장실 안.
허준과 김형서가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당연히 재개발에 관련된 이야기였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HS정형외과가 이번 재개발로 인해서 낙동강 오리 알이 된 모양새다.
물론, 버티고 버티다 보면 나중에는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될 수도 있는 자리일 테지만,
거기 건물주 할아버지가 욕심이 많다고 소문이 자자하신데 가만히 내버려 둘 리가 없겠지.
“하아~ 정말 골치 아프네요. 대학병원 나와서 이제 찬용이 등에 업고 펄펄 날 줄 알았더니만.”
“그래서, 선생님께서는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허준이 김형서에게 물었다.
“솔직히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재개발 들어가면 당장에야 매출만 떨어질 테지만, 한쪽 구역 완공되고 나면 보나 마나 건물주와 다툼이 생길 것 같아서요.”
대충 들어보니, 개원할 때 들어간 돈이 한두 푼이 아니던데,
가만, 그러고 보니까.
‘한방병원은 의사가 있어야 하잖아?’
병원에서 일할 사람을 모으는 것은 자신의 역할이었으니,
김형서 원장이라고 안될 게 뭐 있겠나.
게다가 같은 혜민서의 일원인 데다가, 김찬용 선수를 치료할 때를 떠올리면 김형서 원장의 실력은 분명히 진료에 큰 도움이 될 터였다.
“원장님. 그럼, 저와 함께 일해보시지 않겠습니까?”
“네?...”
그저 재개발 진행 상황이나, 고민을 토로하러 왔을 뿐인데, 같이 일하자는 제안이라니.
김형서가 벙찐 얼굴로 허준을 바라봤다.
“자세한 거는 아직 말씀드리기 어려우나, 원장님께 그리 큰 손해는 아닐 거로 생각합니다.”
그 말에 김형서의 벙찐 얼굴에서 눈이 빛났다.
잠깐 잊고 있었는데, 그간 허준이 해낸 일들이 떠올랐기 때문이리라.
‘그래. 정형외과와 이런 엄청난 실력의 한의사가 함께라면 근골격계 질환에서는 그야말로 무적함대와 다름없지 않겠는가.’
여기서 좀 마이너스가 나더라도 금방 메꿀 수 있을 터.
“굉장히 흥미로운 제안이네요. 한 번 이야기해볼까요?”
“좋습니다. 대략적으로...”
그렇게 대충 이야기를 끝내고 나오자,
혜민서 멤버들이 허준을 바라봤다.
“이제 나오셨네요. 바로 시작할까요?”
“네. 바로 시작하죠.”
어느새 자연스럽게 일상이 되어버린 모습.
허준이 그런 그들을 둘러보며 미소 지었다.
‘아주 든든한걸?’
* * *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아파트.
퇴근한 김예진이 문을 열고 들어섰는데,
“이제 왔니?”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엄마? 엄마가 연락도 없이 웬일이야?”
“얘는 말을 이상하게 하네? 엄마가 딸 얼굴 좀 보려고 올 수도 있지. 그게 이상해?”
“아니, 그건 아니고... 그래서 무슨 일이에요?”
“아~ 너 조금 있으면 네 아버지 생신인 거는 알고 있지?”
“알아요. 그날 갈 거예요.”
집안으로 들어서며 대답하는 김예진.
그런 김예진을 보며 여인의 말이 이어졌다.
“네 아버지가 궁금해하더라, 너 요즘에 뭐 하고 지내는지.”
“뭐하긴요? 일 다니죠.”
“그러니까, 무슨 일 하냐고.”
그 말에 김예진이 발끈했다.
늘 저런 식이었으니까 말이다.
“한의원에서 일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