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5화. 허준 선생이 직접 추천하더군 >
115화. 허준 선생이 직접 추천하더군
김정남. 82세.
건장한 육체는 쪼그라들었고, 매끄럽던 피부가 주름이 지기에 충분한 세월이 흘러있었다.
물론, 그가 살아가면서 잃은 것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사랑하는 가족을 얻었고, 아들과 딸도 얻었으며 그 아들과 딸이 가정을 이뤄 손주까지 본 그였으니까 말이다.
이 정도면 잘 살았다고 할 수 있겠지.
라는 안일한 마음 때문이었을까.
어느 날 소화가 잘 안 되는 느낌이 들기 시작해서 소화제를 달고 살다가,
건강검진을 받으면서 발견된 악성종양. 위암이었다.
화목하고 평범한 인생에 내리친 마른하늘의 날벼락.
그나마 정밀 검사결과 초기란 것과 전이가 그렇게까지 많이 이뤄지지 않았다는 점은 다행이었다.
“수술하시면 완치될 겁니다. 이쪽으로 보시면 여기 이렇게 부분적으로 위를 조금 잘라내야 할 테지만, 보통 이런 케이스의 경우에는 생존율이 95% 정도 되거든요.”
“정말입니까?”
“네. 수술이 끝나고 아마, 항암 치료를 할 필요도 없을 것 같네요. 다만...”
의사가 말끝을 흐렸다.
80세 이상의 고령 환자.
아무리 간단한 수술이라 할지라도 몸에 칼을 대어 무언가 잘라낸다는 것은 엄청난 데미지를 주게 되는 법이었으니, 어떤 후유증이 나타날지는 모르는 것이 당연했다.
“아무래도 환자분께서 연세가 있으셔서, 후유증이 아예 없다고 장담하기에는 무리가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도 현재로서는 이게 최선입니다.”
“그렇군요... 그럼, 수술을 안 하면 얼마나 살 수 있는 겁니까?”
“글쎄요. 최근 연구결과에는 1기에서 2기로의 진행이 34개월, 2기에서 3기로의 진행이 19개월 그리고 3기에서 4기가 2개월 정도 걸린다고 봅니다. 환자분 같은 경우에는 아직 시간의 여유가 있다고 볼 수 있겠네요.”
김정남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 나이쯤 되다 보면 보고 듣는 게 많은 법.
당장에 알고 지내던 사람들도 하나둘 떠나가기 시작하는 나이가 아니던가.
그중에서는 당연히 암으로 세상을 떠난 이들의 이야기도 있었으니,
그런 그들의 이야기가 자연스레 떠오르는 것이 당연했다.
수술 이후에 치매를 얻었다던가, 제대로 밥을 먹지 못해 삐쩍 말랐다든가 하는 그런 이야기들 말이다.
“아이고 저 친구가 저렇게 갔네. 차라리, 수술 안 했으면 한 1년, 운 좋으면 2년 하고 싶은 거 다 하다가 갔을 텐데.”
“그러게 말이야. 어떻게 보면 힘없이 누워만 있다가 가는 것보다는 그게 나을지도 모르지. 만약에, 우리도 그 상황이라면 한 번쯤은 생각해봐야겠지?”
장례식장에서 들린 친구들의 이야기.
그 말대로였다.
사람이 언제 죽는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평균수명을 기준으로, 앞으로 남은 기대수명과 삶의 질을 저울대에 올려 비교하는 것이었다.
때문에, 김정남은 수술을 거부했고,
가족들은 그런 그의 결정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렇게 티격태격하다가 찾은 대안이 바로 이곳. 허준한의원이었다.
김정남의 딸 최점순이 이곳의 단골이었으니까.
완강하게 수술을 안하겠다고 하시니, 수술없이 치료할 방법이 한의학밖에 더 있겠는가.
허준이 들어오는 환자를 바라봤다.
83세의 노인.
그 노인의 옆에 가족으로 보이는 여인이 따라 들어왔다.
낯익은 얼굴이다.
‘최점순 씨가 오셨네.’
“안녕하세요. 원장님.”
“어서 오세요. 이리로 앉으시죠.”
최점순과 김정남 부녀가 마주 앉았다.
“저희 아버지세요.”
“그러시군요. 그럼, 오늘 진료 보실 분이?”
“네. 맞아요. 아버지 진료를 좀 보고 싶어서요.”
“알겠습니다.”
그때, 과묵해 보이는 김정남의 입이 열렸다.
“진료는 무슨, 난 괜찮다니까?”
“아휴, 알았어요. 그래도 어젯밤에 여기 오는 거로 이야기 끝났잖아요. 그러니 조용히 좀 계세요.”
투덜거림과 함께 시작된 진료.
허준이 최점순의 이야기를 대충 듣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수술을 안 하겠다고 하신 거죠?”
“네. 맞아요.”
“내가 수술을 뭐 하려고 해? 수술하고 비실대면서 5년 살다 죽는 거보다는 이렇게 마음 가는 대로 움직이면서 살다 가는 게 낫지.”
“아빠 쫌! 그런 말씀 좀 하지 마세요.”
최점순의 다그침에 김정남이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허준이 그 모습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충분히 이해가 가는 이야기였기 때문이리라.
어떤 치료든 환자의 의지가 가장 중요한 법이었으니,
환자 본인의 선택을 존중하는 것이 맞을 터.
‘저 고집이라면 설득은 물 건너 갔다고 봐야겠지. 하지만, 그렇게 되지는 않을 것 같네요.’
허준이 김정남 씨의 옆에 나타난 퀘스트를 바라봤다.
<인생의 마지막을 위하여>
* 진행도 : 0%
* 보상 : 포인트 10000
‘퀘스트가 나타난 환자들은 완치할 수 있었어.’
그 말인즉슨, 눈앞에 있는 김정남 환자도 완치할 수 있다는 이야기.
진료에 대한 의욕이 불타오르며 허준의 머릿속이 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암. 한의학적으로 암을 완치한 사례는 없다고 한다.
암이란 암세포가 몸 안에 퍼져 본래 신체의 세포를 좀먹어 가는 것.
때문에, 현대의학에서도 암의 완치는 수술이나 화학적인 항암치료인 약 또는 방사선 치료로 암세포를 죽이는 방법이다.
그래서 항암치료의 경우에는 환자들이 엄청난 고통을 겪게 되기도 하지.
바꿔말하면 한약이나 뜸, 침을 사용하는 한의학으로 암을 완치할 수 없는 것은 당연했다.
암세포를 직접적으로 타격하는 것이 불가능했으니까 말이다.
그런 데도 불구하고 왜 과거의 서적에 이 암에 관한 치료방법들이 나와 있는 것일까.
이는 조금만 생각의 각도를 바꾸면 된다.
암이 무서운 것은 서서히 정상적인 신체 세포로 전이되면서 확장해 나간다는 것.
반대로 말하면 전이되지 않고 현상을 유지하기만 해도,
초기 암의 경우에는 완치와 같은 효과라 볼 수 있다는 뜻이다.
즉, 한의학적인 치료가 추구해야 할 길도 그것과 같은 맥락이었으니,
인체의 면역력을 끌어올려 암세포의 전이를 막는 것.
‘그것이 내가 가야 할 길이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환자의 식습관부터 사소한 생활습관까지 전부 바꿔야 했다.
특히 위장은 각 장부에 힘을 불어넣는 기운을 흡수하는 곳이었으니,
“병원에서 식습관이나 생활습관에 관해서 이야기를 들으셨겠죠?”
“물론이죠. 자극적인 것과 인스턴트 음식 그리고 술과 담배를 최소화해달라고요.”
“맞습니다. 그 부분은 정말 중요해서 꼭 신경 써주셔야 해요. 보다 자세한 것은 진료가 끝나고 따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일단 진맥부터 잡아 볼까요?”
김정남이 얌전히 두 손을 내밀었다.
허준이 그 두 손을 잡아 맥을 느꼈다.
‘역시나 몸이 허하다.’
위는 장부에 힘을 불어넣는 장부.
당연히 다른 장부들이 맥아리가 없는 것이 당연했다.
게다가 나이도 있으시고.
다만, 그런데도 그중에서 특히 위장은 더욱 약했다.
이어서,
손끝에서 퍼져나가는 감각은 김정남의 위안에 자리 잡은 덩어리를 캐치해냈다.
‘이런 느낌이로군.’
위 담적 때와는 조금 다른 감각.
허준이 그 감각을 느끼며 머릿속으로 처방을 내리기 시작했다.
일단 첫 번째 스텝은 현재 환자의 상태에 따라서 탕약을 처방하는 것.
소화불량, 더부룩함.
반하사심탕이 가장 효과적이라 볼 수 있었지만, 위허증에는 차라리 반하백출천마탕이나 보중익기탕이 좋을 터.
그때, 허준의 머릿속에 언젠가 본 논문이 떠올랐다.
위암 세포의 전이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사간탕.
‘탕약은 사간탕이 좋겠어.’
속의 더부룩함과 소화불량은 침으로 충분할 터.
침으로 비장 경락의 정격 혈 자리인 소부혈과 대도혈을 보하고 대돈과 은백혈을 사할 생각이다.
그리고 면역력과 순환에 도움을 주는 왕뜸을 이용해 조금씩 키워나가면 될 터.
그런데도 평소와는 다르게 왠지 모자란 느낌.
그만큼 암이란 병이 가진 악명 때문이리라.
‘일단 부딪혀 보자.’
허준이 눈을 뜨고 처방을 하나씩 차근차근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럴 때마다 여전히 시큰둥하게 반응하는 김정남 환자.
“죄, 죄송해요. 선생님. 원래 이런 분이 아니셨는데...”
최점순이 사과를 했고,
허준은 별거 아니라는 듯이 답했다.
“괜찮아요. 치료실로 가시죠.”
* * *
지하 연습실.
대표 김강현과 그 옆으로 지영희 팀장이 함께했다.
그런 그들의 앞에는 힘차게 군무를 맞추며 노래하는 연습생들이 있었으니,
허준한의원에 들락날락하는 유민정과 아이들이었다.
아, 이제는 어엿한 팀 이름이 있었지.
이름하여 비행소녀단.
무대 위에서 힘차게 날고 싶은 소녀들이라나?
김강현이 처음부터 끝까지 비행소녀단의 모습을 날카롭게 관찰하다가 노래가 끝나자,
손뼉을 치며 말했다.
“아~ 좋아, 좋아. 아주 잘했어.”
“감사합니다!”
“애들아 잠깐 쉬고 있어. 대표님과 이야기 좀 나누고 올 테니.”
그렇게 자리를 옮긴 두 사람.
격한 안무와 노래를 하면서도 호흡조차 흐트러지지 않고 무대 위에서 연기하는 아이들의 모습은 김강현을 만족시키기에 충분했다.
그것도 한 곡이 아니라 연속으로 두 곡이나 말이다.
게다가 춤 선은 또 어떤가.
개개인 파트의 안무는 물론이요, 단체로 움직이는 군무 또한 잘 살렸으니.
‘이거는 된다.’
김강현이 준비된 그녀들의 모습을 보고 본능적으로 느낀 감각이었다.
그때, 옆에 서 있던 지영희가 물었다.
“대표님. 어때요? 괜찮았죠?”
“아주 좋아. 이전과는 완전히 느낌이 다른걸? 지금은 멤버 하나하나가 다 살아있는 느낌이야.”
“제 생각도 그래요. 요즘 들어 애들이 끼가 살아나고 있거든요. 아마 이런 상태면 조만간 포텐이 터질 것도 같아요.”
김강현이 동의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수고했어. 지 팀장. 그런데,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이렇게 단시간에 바뀔 줄 생각도 못 했는데 말이야.”
“에이~ 제가 뭘 한 게 있나요. 저는 평소처럼 했는데, 아이들이 잘 따라와 준 덕분이죠.”
“애들 얼굴은 그렇다 치고, 춤 선도 완전히 달라졌던데?”
“아, 그건 허준 선생님의 도움을 좀 받았죠.”
“허준 선생님?”
“네. 대표님이 승인하셨잖아요. 한의원에 갈 때, 애들 다 같이 데려가라고. 그래서 데려갔더니 애들 하나하나씩 보자마자, 바로 척척 잡아내시더라고요.”
“그래?”
김강현의 물음에, 지영희 팀장이 말을 이었다.
“네. 민정이야 뭐 아까 보셨다시피 완전히 다른사람이 되었고, 다른 애들도 체형교정부터 얼굴 느낌까지 변했어요.”
“허... 그 선생 대단한 양반인 줄은 알고 있었는데, 이 정도 일 줄이야.”
“게다가 그거 아시죠? 보약 맞춘 거. 그거 먹은 다음부터 애들이 연습하는 데 힘이 넘치는 것 같더라고요. 덕분에, 이렇게 완전히 다른 팀이 되었죠.”
김강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안 그래도 자신을 괴롭혀오던 만성 염증의 통증을 서서히 잊어가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좋아. 애들 멤버교체 없이 이대로 데뷔 준비시켜.”
“정말요?”
“내가 한 입으로 두말하는 거 봤어?”
“알겠어요. 애들이 좋아하겠네요.”
“지 팀장이 앞으로도 신경 좀 많이 써주고.”
“네. 걱정하지 마세요.”
역시, 운이 좋았다.
운 좋으면 뒷걸음질 치다가도 쥐를 잡는다고 하지 않던가.
지난번에 봤을 때는 사실 실망감이 조금 있던 터라, 대대적으로 멤버교체를 할까 생각했었는데, 어쩌다가 가보게 된 한의원의 도움으로 이게 이렇게 풀릴 줄이야.
김강현이 기분 좋게 웃다가 문득, 눈앞에 서 있는 지영희 팀장을 바라봤다.
그러고 보니,
“지 팀장.”
“네?”
“혹시, 자네...?”
* * *
그 시각.
김정우의 집에 찾아온 박진석.
“그래서 허준네 식구들 전부 병원으로 들어오기로 했다고?”
“그렇게 들었어.”
“잘됐네. 거기 있는 선생들 몇은 정말 탐나는 친구들이었는데.”
“거봐, 내가 뭐라고 했어. 허준 그 친구에게 맡기면 알아서 다 데려올 거라고 했지?”
“아니 그게 아니라, 그 친구 침술보고 나는 친구가 침밖에 없는 줄 알았지.”
박진석이 능청맞게 답했다.
그러고는,
“그런데, 진료는 허준에게 맡긴다 치고, VIP 환자는 유도진에게 맡긴다 치면. 전반적인 병원 운영은 누구에게 맡기려고? 혹시, 마음에 두고 있는 친구라도 있나?”
“그 문제도 이미 해결했어. 안 그래도 허준 선생이 직접 추천하더군.”
“그 친구가? 대체 누구를?”
김정우가 피식 웃으며 답했다.
“최인호.”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