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2화. 좀 재수 없어도 괜찮아 >
102화. 좀 재수 없어도 괜찮아
허준의 모습을 본 윤 선생.
원래부터 밝고 잘 웃는 선한 인상의 허준이었지만, 이렇게까지 환하게 웃는 얼굴은 처음이었다.
그 웃음을 타고 고스란히 전해져 오는 감정.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무언가를 본능적으로 느낀 윤다희.
“원장님...?”
허준이 윤 선생에게 답했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테스트기 한번 사용해 보셔야겠는데요?”
굳이 다른 말이 필요하지도 않았다.
그 한마디에 지금 상황이 전부 압축되어 있었으니까 말이다.
“저, 정말인가요?”
평소 망설임 없이 술술 나오던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말이 떨린다.
허준이 그런 그녀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그래도 사극 드라마나 영화에서처럼 진맥을 잡자마자 바로 ‘회임입니다. 마마.’라고 즉답을 내리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실제 임신과 관련된 경험이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했으니까 말이다.
그런데도 허준이 임신이라고 판단한 이유는, 기연으로 얻은 능력들을 제대로 활용하기 위해서 수없이 해온 공부 때문이었으니,
아무리 감각이 민감해지고 맥을 잘 느낄 수 있다고 하더라도, 머릿속에 그 변화나 맥이 알려주는 정보를 제대로 판단하지 못한다면 무용지물이 될 테니까 말이다.
그중에서는 당연히 맥의 변화에 관련된 공부도 있었는데,
그때 공부한 것이 지금 이순간에 빛을 발한 것이었다.
허준이 흥분해서 안절부절못하는 윤 선생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윤 선생님. 진정하세요.”
“아, 네. 원장님. 너무... 떨려서요.”
“아직 확실한 것도 아닌데, 벌써 그러면 안되죠. 천천히 심호흡하고 나중에 검사결과 나오면 알려주세요.”
다음 날 이른 아침.
체력이 좋아진 윤다희 부부가 모두 일찍 일어나 있었는데,
묘한 긴장감이 흐르고 있었다.
임신테스트기의 특성때문이었다.
호르몬 분비로 임신여부를 판단하는 이 테스트기는 아침의 첫 소변에 가장 정확도가 높았으니까 말이다.
“갔다 올게.”
어제저녁 원장님이 알려준 대로,
크게 심호흡을 하고 마음을 가라앉힌 뒤에 화장실 문을 열고 들어선 윤다희.
그리고 그런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김민준이 아무일도 아니라는 듯이 TV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침 뉴스가 흘러나오며 밤새 벌어진 일들에 관해서 앵커가 설명하고 있었는데, 어디 그런 뉴스들이 귀에 들어가기나 하겠는가.
그렇게 잠시 뒤.
화장실 물이 내려가는 소리가 들려오고, 이어서 굳게 닫혀있던 화장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동시에 벌떡 일어선 김민준.
그의 눈이 재빨리 아내 윤다희를 훑었는데,
그가 뭐라고 묻기 전에 그녀가 테스트기를 들어 보였다.
명확한 선이 두 개.
김민준과 윤다희 부부.
마주 본 두 사람이 서로를 바라보면서, 묘한 눈빛과 표정을 교환하다가 이어서 환하게 미소를 짓더니,
이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흘러내리기 시작한 눈물.
그러고는 서로를 부둥켜안으면서 펑펑 울었다.
그토록 바라왔던 순간.
온갖 감정이 폭발하기에는 충분했다.
그렇게 그날 오전 허준한의원.
여느 때처럼 일찍 출근해 있던 김예진이 윤다희를 반겼는데,
‘어? 뭔가 달라진 느낌이네.’
한눈에 보기에도 어제와 무언가 달라진 그녀였다.
근래 들어 열심히 몸 관리를 하느라 약간의 열정 같은 게 느껴지던 그녀였는데, 지금은 마치 마음의 평안을 얻기라도 한 사람 같았다.
“윤 쌤. 좋은 아침이에요. 무슨 좋은 일 있어요?”
“있죠. 아주 좋은 일이요.”
“그래요? 무슨 일인데요?”
윤다희가 배시시 웃으며 고개를 숙여 배 쪽을 바라봤다.
그 행동에 무슨 일인지 단번에 알아챈 김예진이 환하게 웃었다.
“정말요? 축하드려요. 윤 쌤.”
“감사해요.”
“원장님은 알고 계세요?”
“아직 말씀드리지는 못했는데, 생각해보니 알고 계실 것 같아요. 어제 진료 때, 원장님이 먼저 말씀해주셨거든요.”
“그래요?”
그때, 현관문이 열리며 고요한과 밥이 들어왔다.
어느 조직이든 일종의 암묵적인 규칙처럼 가장 막내인 고요한 선생이 새로 온 밥 선생을 챙기는 모습이었다.
“좋은 아침입니다. 선생님들.”
“굿모닝입니다. 김 쌤, 윤 쌤.”
“안녕하세요 고 쌤, 그리고 밥 쌤.”
“무슨 좋은 일 있어요?”
“있죠. 한의원에 경사가 났어요.”
“경사요?”
밥이 정확한 발음으로 되물었고,
대충 윤다희에게 설명을 들은 그가 중얼거렸다.
“홀리...그거 드라마에서 보던 그거 아닌가요?”
되물음과 함께 한 번 더 현관문이 열리고,
가장 늦게 출근한 허준.
“다들 모여서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하고 계세요?”
밥이 누구보다도 빠르게 소리쳤다.
“허준 선생님. 진짜! 대단해요~”
“그게 갑자기 무슨...?”
의문이 이어지기도 전에,
허준이 식구들의 분위기를 느끼고 무슨 이야기가 오간 것인지 눈치챌 수 있었다.
그들의 중심에 윤 선생이 있었으니까 말이다.
“축하드려요. 윤 선생님.”
“감사해요. 원장님.”
* * *
윤다희 선생님에 관한 이야기가 단골들의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그만큼 그녀가 한의원을 자주 찾아오던 단골 환자들과 친밀했기 때문이었다.
“아이고 잘됐네. 잘됐어. 이거 윤 선생한테 가져다줘.”
“그 비싼걸? 웬일이야 구두쇠 형님이? 약침 비용 아깝다고 그냥 침으로 놔달라던 사람이.”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 잘 먹어야 쑥쑥 큰다니깐?”
“맞는 말이지. 어쨌든. 이거 가져가라 이거지?”
그렇게 여기저기서 받아온 선물.
보통 과일이나 먹을 것들이었다.
너무 많아서 안 받으려고 해도,
“잘 먹어야 한다니까?”
몸소 많은 경험을 하신 할머니들이 저렇게 말하니 거절할 수 있을 리가.
게다가 허준도 딱히 금전이나 고가의 금품이 아니면 이런 먹는 것까지 안받는 것은 아니었다.
“감사합니다. 잘 먹을게요.”
“그래그래. 그거 저기 과일 집 형님이 준 거야. 나중에 보면 고맙다고 인사라도 해. 그리고 이제부터 몸조리 자알~ 해야 하는 거 알지?”
“네. 물론이죠.”
이렇듯 한층 더 활기를 띠기 시작한 한의원.
그런 한의원 원장실에는 허준이 새로운 한의사 밥과 함께 진료를 보고 있었다.
허준이 환자의 증상을 캐묻고,
환부를 직접 확인한 뒤에, 진맥에 이어서 처방을 내리는 모습.
그것을 본 밥이 고개를 끄덕였다.
‘진맥하는 이유는 사람마다 증상도 다르고, 처방도 달라질 수 있으니까 필수라고 하셨지?’
이어서 내린 처방은 간단한 침과 뜸.
언뜻 보기에는 굳이 침이나 뜸 한두 방 놓자고 저렇게 세세하게 묻고 따지면서 진맥까지 보는 게 합리적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눈앞에 있는 원장님은 찾아오는 환자 모두에게 기계처럼 똑같이 행하고 있었다.
그것도 매우 빠르게.
‘이렇게 진료가 빠르다고?’
외국인 한의사라는 특이함 때문에 알게 된 선배들을 찾아갔다가 참관했을 때와는 완전히 다른 느낌.
환자에게 필요한 처방을 빠르고 정확하게 내린다.
게다가 침은 또 어떠한가.
평범하게 오히려 무심하다고 할 만큼 망설임 없이 놓는 듯 보였으나, 침을 맞고 나온 환자들 대부분이 만족한 얼굴로 치료실을 나선다.
그것만으로도 원장님의 침술이 보통이 아님을 알 수 있는 대목.
영상이나 강의 논문 이런 것들은 그저 혜민서 선생님들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을 뿐이었다.
‘이거 정말 배울 게 많겠는걸.’
“밥 선생님.”
“네.”
“치료실로 따라오시죠.”
“아, 넵.”
그렇게 한차례 치료실에 다녀오고,
다시 이어진 진료.
다한증으로 내원한 환자 박초이였다.
그런 그녀의 옆에는 진행도가 나타나 있었는데, 그녀의 밝아진 표정만으로도 완치가 멀지 않음을 알 수 있었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어서 오세요. 박초이 님. 어떻게 좀 괜찮아졌나요?”
“네! 진짜 많이 좋아졌어요. 이젠 여러 가지 색 옷도 입을 수 있을 것 같아요.”
“다행이네요. 치료하시면서 딱히 피곤하다거나, 속이 거북하다거나 하지는 않으셨어요?”
“네. 아주 편안했어요. 잠도 잘 왔고요.”
“좋네요. 그럼 처방은 그대로 가도록 하죠. 치료실로 가실까요?”
“네!”
그렇게 치료실에서 치료를 마치고 나오자,
「퀘스트 ‘감추고 싶은’을 완수하였습니다.」
「포인트를 1000 획득하였습니다.」
메시지가 나타났다.
허준이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그대로 원장실로 향했고, 그렇게 이어진 진료는 마감 시간이 다 되어서야 끝낼 수 있었다.
“오늘 정말 수고하셨습니다. 원장님.”
“선생님도 수고하셨어요. 도움이 많이 되던가요?”
“네. 정말 많이 배웠습니다.”
직접 침을 놓는다거나, 처방을 내린 것은 아니지만,
이렇듯이 옆에서 내원한 환자의 증상과 그에 대한 처방, 그리고 진료하는 과정을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공부가 되는 밥이었다.
“참, 오늘 밥 선생님이 그토록 기다린 혜민서 선생님들 오시는 날인데, 참여 하실 거죠?”
“물론이죠. 선생님.”
밥이 눈을 반짝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어미 새가 된 느낌이네.
그때, 원장실 문을 노크하고는 고요한 선생이 얼굴을 쏘옥 내밀었다.
“무슨 일이세요?”
“아~ 밥 선생 좀 빌려 가려고요.”
“그러세요.”
허준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오늘은 고요한 선생이 2층의 입원실 진료를 보는 날.
아마도 밥 선생을 데리고 다닐 생각인 듯싶었다.
유도진 선생이 그랬듯이.
‘고요한 선생이 홀로 입원실 진료를 다녔던 게 한 달 정도 걸렸던가?’
과연 밥 선생은 얼마나 걸릴지 궁금하긴 하네.
그렇게 홀로 남은 허준.
다시금 문이 열리며 이번엔 윤 선생과 김 선생이 퇴근을 알려왔다.
“원장님. 저희 퇴근해요~ 내일 봬요.”
“네. 조심히 들어가세요.”
그러고 보니,
데스크 쪽에 충원이 필요하겠네.
지금이야 괜찮지만, 윤 선생님 같은 경우에는 나중에 휴식이 필요할 테니까 말이다.
게다가 능수능란한 베테랑 1명과 이제 막 일을 배우기 시작한 선생님 1명이 같을 수는 없는 법.
그전에 미리미리 신경을 써야겠다는 생각이었다.
이어서 허준이 매출을 확인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가 무언가 신기한 것을 발견한 허준.
“대체 매출은 어떻게 이렇게 계속 오르는 거지?”
그때, 한의원 현관문 열리는 소리에 허준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태용한의원 원장님들이 올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원장님들 아마 깜짝 놀라시겠네.’
10여 분 뒤.
허준한의원.
“어...”
박용준 원장이 허준한의원에 새로 온 밥 선생을 보고 말을 잇지 못했다.
물론, 그 옆에 있던 김 원장님은 말조차 내뱉지 못하는 중이었다.
당연히 소문으로는 이미 들어서 알고는 있었는데,
막상 실제로 만나니 생각했던 것과 더 거리가 멀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완벽한 발음의 한국어.
“그러니까...”
“안녕하세요. 정말 만나 뵙고 싶었습니다. 제가 혜민서 선생님들 진짜 팬이거든요.”
“아... 네. 반가워요. 박용준이라고 합니다.”
“저도 반갑습니다. 로버트 킴이에요. 줄여서 밥이라고 불러주세요.”
“그래요. 밥 선생.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밥이 태용한의원의 두 원장과 차례대로 악수했다.
그렇게 어색한 분위기에서 시작된 저녁 식사.
“젓가락질 잘하시네요?”
“그럼요. 저 이래 봬도 한국 생활 10년째입니다.”
“그러시구나.”
박 원장이 놀란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겉모습만 외국인이지 완전히 한국 사람과 다름없잖아?
그 건너편에는 김 원장이 허준을 불렀다.
“허준 선생. 그러고 보니, 윤 선생님 임신하셨다면서?”
“네.”
“잘됐네. 그것 때문에 고생 많이 했다고 하더니. 자네도 고생이 많았겠구먼?”
“아닙니다. 그게 어떻게 제가 한다고 할 수 있는 일이던가요? 하늘이 도와야 하는 일이죠.”
허준의 대답에 김 원장이 코웃음을 쳤다.
이미 그렇게 답하리라고 어느 정도 예상하였기 때문이리라.
“재수 없기는. 그래. 자네 정도면 좀 재수 없어도 괜찮아.”
훈훈한 덕담과 함께 식사가 끝나고 시작된 사례공유와 의견교환.
반복된 내용의 복습으로 찾아왔던 몇몇 선생들은 이미 함께하지 않았지만, 상관 없었다.
그것이 가장 중요한 것임을 몸소 깨달은 선생들이 정성스럽게 임하는 중이었으니까 말이다.
물론, 새롭게 합류한 밥 선생 또한 그 분위기에 흠뻑 빠져드는 중이었고.
그렇게 끝난 활동.
그리고 허준을 찾아온 김 원장.
“원장님. 무슨 하실 말씀이라도?”
“내가 최근에 최 대표에게 이야기를 하나 들었는데.”
김 원장이 허준에게 다가와 속삭였다.
“우리 쪽 구역도 재개발될 거라는 이야기가 있다던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