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1화. 환하게 웃으며 바라봤다 >
101화. 환하게 웃으며 바라봤다
“아...네. 맞아요.”
“제가 잘 찾아왔나 보군요.”
윤 선생이 너무나 자연스러운 말에 넋을 놓았다.
이렇게 자연스러운 존댓말이라니.
‘참, 이럴 때가 아니지.’
“무슨 일 때문에 그러시는지요?”
“아, 제가 선생님들을 직접 만나서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죄송하지만, 지금 아직 진료 중이시라... 기다리고 계시는 환자분들도 계시고요.”
윤다희의 대답에 전혀 걱정 없다는 얼굴의 밥.
그가 손가락으로 OK를 만들며,
“걱정하지 마세요. 끝날 때까지 기다릴게요.”
“그럼, 그래 주시겠어요? 저쪽에 앉아서 기다리시면 되세요.”
그렇게 밥이 대기실 한쪽에 앉아 흥미롭다는 듯이 한의원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물론, 그런 밥을 사람들이 흘깃흘깃 훔쳐보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 상황에서 윤다희가 치료실로 들어가 허준을 찾았다.
치료실을 담당하고 있던 김예진이 당황한 얼굴의 윤다희를 보고 물었다.
혹시, 밖에서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가.
“윤 쌤. 밖에 무슨 일 있어요?”
“아, 아니요. 손님이 오셨는데, 원장님한테 전할 말이 있다고 해서요.”
“아~ 원장님은 지금 6번 치료실에 계세요.”
6번 치료실.
허준이 앉아 있는 환자의 어깨에 침을 뽑아 들었다.
조금 전까지 오십견으로 굳은 어깨 안쪽을 자극하기 위해서 춤을 추던 장침이었다.
가볍게 장침으로 자극을 준 뒤에,
이번엔 옆에 준비해 온 약침을 이용해 치료하는 허준.
그렇게 치료가 끝난 환자가 팔을 조금 들어 보더니,
“아이구, 한결 좋아진 것 같어. 동네 할멈들이 침 잘 놓는다고 그렇게 자랑하더니, 진짠가 벼. 이제야 좀 살겠네.”
“그렇게 무리해서 움직이시면 안 돼요. 그러면 오히려 더 나빠질 수 있거든요.”
허준이 환자의 어깨 근육을 만져보며 말을 이었다.
이 정도 느낌이면 한, 이틀 뒤에 오시면 될 것 같네.
“이틀 뒤에 한 번 더 오셔서 진료받으시죠.”
“왜? 내일이 아니고?”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우리 몸도 회복하는 시간이 필요하거든요.”
“아~ 참, 그렇다고 했지? 알았어.”
“네. 그럼.”
그렇게 커튼을 걷고 치료실에서 나오는데,
윤 선생과 마주친 허준.
“무슨 일이에요 윤 선생님?”
윤 선생이 벌어졌던 일을 허준에게 말했고,
그것을 들은 허준이 잠깐 놀란 눈을 했지만,
‘일단은 진료부터 끝내야지.’
어차피 기다린다고 했으니,
이따가 제대로 이야기를 나눠보면 될 터.
시간을 보니 어느새 6시가 되어가고 있었고,
허준한의원의 진료는 마감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 * *
진료가 끝난 허준한의원.
원장실에서 허준과 혜민서 선생님들을 찾아왔다는 밥이라는 외국인이 마주 앉았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밥이라고 합니다. 이허준 선생님 맞으시죠?”
너무나 완벽한 한국말.
그리고 심지어 먼저 고개까지 숙여 인사하는 예절까지 지킨다.
이거 완전히 한국 사람 아니야?
“아, 네. 제가 이허준입니다만.”
“진료 보느라 바쁘셨을 텐데, 죄송합니다. 제가 만나 뵙고 싶어서 이렇게 불쑥 찾아왔습니다.”
“아닙니다. 오래 기다리셨을 텐데.”
대체 여기까지 왜 찾아온 걸까.
그러다가 자연스럽게 환자 보듯이 살피는 허준.
동양인과 확실히 다른 면모가 있을지라도 장부가 안 좋거나 병으로 인해 나타나는 징후들은 비슷한 법.
그래서 살펴봤는데, 보기에는 너무나 멀쩡했다.
‘하긴, 진료받으러 온 거라면 접수를 했겠지.’
게다가 자신이 아닌 혜민서란 이름을 찾아온 것이 아니던가.
그렇다면 아무래도 봉사나 기부 또는 협력 같은 연유로 찾아왔을 거라는 생각이 든 허준이었다.
“괜찮습니다. 무슨 이유로 찾아오셨는지?”
“그게... 사실 저도 한의사입니다. 혜민서 선생님들이 발표하신 논문과 자료들을 보자마자 느낌이 왔습니다. 선생님 같은 분들과 함께 진료를 보고 싶다고.”
허준의 눈이 커졌다.
한의사라고?
물론, 외국에도 한의사는 있다.
정확히 말하면 중의사라고 불리는.
애초에 중의학과 한의학의 뿌리가 같으니 결국은 같은 길을 걸어간다고 볼 수도 있었지만, 엄밀히 따지면 한의사와는 차이가 있었다.
외국의 면허와 국내의 한의사 면허에는 큰 차이가 있었으니까 말이다.
한국에서는 오로지 한의사 면허만이 법적 효력을 가지며 진료를 볼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진다.
방법 또한 한의대에 입학하여 시험을 통과해서 얻는 방법 하나뿐이었으니,
‘한때, 한국에서도 인정되는 면허라고 속아서 유학 간 사람들이 나중에 돌아와서는 낙동강 오리 알이 된 적도 있었지.’
어찌 됐건, 결론적으로 같이 진료를 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이야기였다.
“죄송하지만, 그건 아무래도 불법이라서...”
“아, 잠시만요. 선생님.”
밥이 가방을 뒤적여 무언가를 꺼냈다.
그리고 그것을 본 허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뭐야? 왜 저게 저기서 나와?...’
왜 한의사 면허가 저 가방에서 나오는 걸까.
게다가 면허에 박힌 사진도 눈앞에 있는 밥의 모습이 확실했다.
“아무래도 오해가 있으셨나 봅니다. 작년에 국가고시를 통과하고, 올해 한의대를 졸업해서 한의사가 된 로버트 김이라고 합니다. 밥은 로버트의 애칭이죠.”
실제 면허에도 로버트 김이라는 이름이 대문짝만하게 박혀있었다.
그렇다면 진료에는 아무 문제가 없다는 이야기네?
이러면 또 이야기가 달라지지.
혜민서에 가입하기 위해 찾아온 거라면 언제든지 환영인 허준이었다.
“아, 제가 오해했네요. 한의사 일 줄은 몰랐어요.”
“아닙니다. 제가 미리 설명해 드렸어야 했는데...”
밥이 허준에게 잠시 고개를 꾸벅 숙였다.
“어쨌든, 반가워요. 여하튼 혜민서에 참여하고 싶어서 오셨다는 거죠?”
"네. 맞습니다."
언젠가는 벌어질 일이라고 했었던, 온라인이나 논문으로는 충족하지 못하는 한의학의 열정을 가진 선생이 직접 찾아오게 될 거라는 말대로 한의사가 찾아온 것이었다.
물론, 외국인 한의사일 줄은 몰랐지만.
“그리고 선생님들과 함께 일해보고 싶습니다. 이왕이면 매일같이 진료를 함께 보면서 배우고 싶어서요.”
이어진 밥의 대답에 허준이 살짝 놀랐다.
그러니까 지금 한의원에서 같이 일하고 싶다는 이야기가 아닌가.
허준이 밥을 바라봤다.
안 그래도 한의사 선생님을 한 분 모셔볼까 했는데,
마침, 잘 된 것 같기도 하네.
한의원의 매출이 마구 늘어난 것은 아니었지만,
지금 시기가 한의사 선생님을 구하기에는 최적의 시즌.
면허를 가지고 한의대를 갓 졸업한 한의사들이 시장에 나오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경력이 없었기에 급여도 맞추기 쉬운 편이었으니,
‘이렇게 찾아온 것도 인연이겠지.’
가뜩이나 요즘 환자들이 많아지고 있는 데다가 선생님들의 휴식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언젠가는 거쳐야 할 일이기도 했다.
처음에야 당연히 1인분을 제대로 해내지 못할지 몰라도, 경험이 쌓이면 분명히 고요한 선생처럼 제 역할을 할 것이라는 게 허준의 생각이었다.
‘물론, 열정이 기본이 되어야 할 테지만.’
그런 면에서 밥은 어떻게 보면 허준이 찾는 조건에 부합하는 한의사라고 할 수 있었다.
이곳까지 직접 찾아온 첫 번째 한의사인 데다가, 다른 사람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고 한의사란 직업을 택한 외국인이었으니까 말이다.
“한 가지만 물어봐도 될까요?”
“물론입니다.”
“외국에서 사셨을 텐데, 한국에까지 와서 한의사가 된 이유가 뭔가요?”
“조국에서는 비싼 의료보험을 제대로 들지 않으면 한국에서처럼 병원의 혜택을 제대로 받기 어렵거든요. 그래서 많은 사람이 그저 쉽게 구할 수 있는 진통제나 해열제 등으로 버팁니다.”
밥이 그때의 일을 떠올리기라도 하듯,
초롱초롱해진 눈으로 말을 이었다.
“그러다가 어느 날, 한의학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보게 되었는데, 그냥 침과 뜸 같은 거로 사람들을 치료하더군요. 그때 느꼈습니다. 저런 사람이 우리 동네에도 있었으면 좋겠다고. 그래서 제가 직접 도전한 겁니다.”
이야기를 듣고 나니, 그에 대한 의문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았다.
기연을 얻고 나서야 느꼈던 것들을 이미 어릴 적에 느꼈다고 하는데, 무슨 말이 더 필요하랴.
“내일부터 출근하시죠.”
* * *
다음 날.
허준한의원.
출근한 선생님들을 모두 불러모은 허준이 말했다.
“오늘부터 우리 한의원에서 근무하게 된 새로운 선생님입니다. 박수로 맞이해 주세요.”
데스크의 윤 선생 그리고 남 선생이 당황스러운 얼굴로 밥과 허준을 번갈아 바라봤다.
김 선생은 어제 얼핏 퇴근 전에 들었기에 멀쩡한 모습이었다.
물론, 유도진 선생 또한 멀쩡했고, 휴무 날이었던 고요한 선생이 가장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어서 허준의 옆에 서 있던 밥이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로버트 킴이라고 합니다. 편하게 밥이라고 불러주시면 됩니다.”
“아... 네.”
“그럴게요. 밥 선생님.”
윤다희가 김예진에게 속삭였다.
“어제 왔던 외국인인데, 한의사 선생님이셨어?”
“네. 그렇다네요.”
“어떻게 외국인이 한의사가 될 수 있지?”
“똑같이 한의대 졸업하고 면허시험 보면 될 수 있다던데요?”
“그래...?”
당황스러워하는 고요한과 낯설어하는 선생님들을 향해 유도진이 말했다.
“선생님들 케이한방병원 아시죠?”
“그럼요. 거기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거기에 제 동기가 근무 중인데, 거기 원장 중에도 외국인 원장님이 한 분 계시다고 합니다.”
“정말요?”
“심지어 진료 잘 보기로 유명하다고도 합니다.”
충격적인 발언이었지만, 선생들의 시각을 한순간에 바꿔놓기에는 충분했다.
차갑고 딱딱한 유도진 선생의 말이 과장이 없다는 것을 알기에 같이 지낸 시간이 충분했고,
무엇보다 대한민국에서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알만한 규모의 케이한방병원이라는 이름까지 들리자, 그대로 납득해 버린 것이었다.
“어쨌든. 그렇게 됐으니 오늘부터 잘 부탁해요.”
“알겠습니다. 원장님.”
그리고 2층의 탕전실에 있던 김정우도 그 소식을 듣고는 허준에게 내심 감탄했다.
의도적인지는 모르겠으나, 당장에라도 보듯이 사람들에게 미치는 여파가 그만큼 커다랬으니까 말이다.
‘재밌어지는구먼.’
외국인 한의사라니.
어떻게 보면 파격적이라고 할 수 있을 테고, 어찌 보면 악수가 될 수도 있을 터였다.
그만큼 선입견은 무서운 것이었으니까 말이다.
어쨌든, 무언가 있다는 뜻이겠지.
그래서 받아들인 걸 테고.
옛말에 이런 말도 있지 않던가.
작은일에 최선을 다하면 정성스럽게 되고, 그 정성스러움이 자연스럽게 배어나오면 겉으로 드러나게 된다.
겉으로 드러나게 되면 이내 밝아지고, 밝아지면 남을 감동시킨다는 말.
‘아마 그 빛을 따라온 것일 터.’
김정우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그렇게 허준한의원에 새로운 한의사가 들어왔다는 이야기는 매우 빠르게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그것도 무려 외국인 한의사가 말이다.
“아니, 무슨 외국인이 침을 다 놓는데?”
“그러게. 믿을 수가 있어야지.”
“한약재나 제대로 알겠어? 괜히 잘못 된거 먹다가 탈나는 거 아닌가 몰라.”
이렇듯 선입견을 가진 사람과,
“그래도 허준네 식구라면 기본은 하겠지.”
“하긴, 허준 선생이 아무 생각 없이 그 외국인 선생님을 받았겠어? 뭔가 이유가 있겠지.”
“의외로 손재주가 좋아서 제자 삼으려고 받은 거 아닐까?”
“에이~ 제자는 무슨, 허준 선생도 나이가 어린데.”
“나이가 대수인가? 실력이 최고잖아.”
“그렇게 따지면 말 되네?”
이렇게 허준의 안목과 새로운 밥이 기대된다는 평으로 갈렸다.
또다시 새로운 바람이 불어오며 앞으로 나가기 시작하는 허준한의원.
그리고 그 사이에서,
어김없이 한의원 식구들의 진료를 보던 허준.
손끝에서 느껴지는 무언가에 눈을 살며시 떴다.
‘이건...’
촌관척의 맥중에서 척맥이 강하게 전해지면서 촌맥이 미약하게 느껴진다.
물론, 이것만으로는 여러 가지 지병을 추측할 수 있겠지만,
눈앞에 있는 윤 선생님에게는 거의 해당하는 질환이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여태껏 꾸준히 운동과 보약으로 관리를 해오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허준이 눈을 뜨고는 윤 선생을 환하게 웃으며 바라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