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8화. 걱정할 필요도 없겠네 >
98화. 걱정할 필요도 없겠네
허준이 윤 선생 부부를 위해 새로운 탕약을 위해 약재 창고로 향해,
두 사람에게서 느껴진 맥과 감각들을 떠올렸다.
이미 두 사람은 체력적으로 아주 건강한 수준까지 올라온 상태.
따라서 마지막 단계는 그 상태에서 보약을 이용해 몸의 컨디션을 한 단계 더 높게 끌어올리는 작업이었다.
남편 김민준 씨에게는,
‘동의보감에도 가장 많이 나온 육미지황원이 정석이겠지.’
거기에 체질적으로 가장 효과가 좋은 녹용을 조금 더하면 될 터.
이번엔 윤 선생님의 차례였다.
역시나 보통 난임 치료로 많이 쓰이는 가미소요산, 여신산, 통도산, 궁귀조혈음 등등이 떠올랐지만,
그것보다는 보약이 더 낫다고 판단한 허준.
‘윤 선생은 소음인이니 인삼을 좀 더 가미한 십전대보탕이 좋겠어.’
결정을 내린 허준이 한약재들을 찾아 탕약기 앞으로 향했다.
* * *
다음 날. 여느 때와 다름없이 진료를 마친 저녁,
허준한의원에 태용한의원 식구들이 찾아왔다.
이제는 주 1회를 정해서 모이는 이 일이 일상처럼 느껴질 정도.
모두 모여서 간단하게 도시락으로 식사를 하니 같은 한의원 사람이라도 된 듯이 자연스럽게 대화가 시작되었다.
뭐, 늘 그렇듯이 이야기 대부분은 환자들과의 에피소드나 소문에 관한 이야기다.
“참, 허준 자네 그거 아나?”
김 원장이 포문을 열었다.
“어떤 거 말씀이신지요?”
“이 시장 골목에서 사람들이 용하다고 하면 김정우 선생님과 유도진 선생 그리고 자네. 마지막으로 아기보살을 꼽거든.”
허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야기조차 해본 적은 없었지만, 이미 알고 있었고 며칠 전에는 잠깐이나마 마주친 적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재미난 이야기가 돌더라고. 그 아기보살이 자네만 보이면 도망간다는 거야.”
여기에 반응을 보인 것은 유도진이었다.
정우한의원 시절에 종종 진료를 본 적이 있어서 관심이 갔기 때문이었다.
“아기보살이라면 시장 골목에 계신 김숙자 씨 말하는 겁니까?”
“나도 이름은 모르지. 사람들 전부 그냥 아기보살이라고 부르니까. 여하튼 그 아기보살이 허준을 피해 다닌다는 이야기가 돌더라고. 오죽하면 뛰어서까지 피한다고 하던데?. 그래서 사람들이 허준 자네에게 귀신이라도 붙은 게 아닌가 하더군.”
“귀신이요?”
허준이 어이없는 얼굴로 되묻자,
“네. 저도 들었어요. 허준한의원 단골분들 중에 바쁠때에는 이쪽으로도 진료받으러 자주 오시는 분들이 많거든요. 아무래도 워낙 허준한의원이 바쁘니까요.”
이건 이미 알고 있는 이야기였다.
그렇다고 아예 안 온다는 이야기는 아니었고.
“한 할머니가 그러시더라고요. 허준 선생이 침 잘 놓는 이유가 침 귀신이 붙어서 그런 거 아니냐고. 아기보살이 그걸 보고 침 맞기 싫어서 도망 다니는 거라고 하던데요?”
허준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갑자기 귀신이라니,
물론, 그 이야기를 들은 유도진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침 귀신은 확실히 아니지. 침만 잘 놓는 것도 아닌데...’
그렇게 이야기를 하다 보니 어느새 다들 비어있는 도시락.
“밥도 먹었으니, 바로 시작할까요?”
허준의 말에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이번에 허준이 새로 준비한 주제는 당연히 비염과 축농증에 관한 자료들로, 임상경험과 치료사례 그리고 치료법등이었다.
계절적인 요인에다가 초반에 찾아온 비염 환자들로 인해 최근 비염 환자들이 많이 늘어났기 때문이다.
이는 환자들이 대부분 젊은 편이어서, 이전과는 다르게 블로그나 게시판에 적극적으로 허준한의원의 이름이 오르내리면서 내원하는 환자들이 늘어나게 된 탓도 있었다.
“여기 계신 선생님들 모두 비염 종류는 아시죠?”
“그럼요.”
“일단 급성은 생각보다 굉장히 빠르게 치료가 되고요, 만성은 환자에 따라 시간이 조금 걸립니다.”
굳이 증상에 대해서는 길게 설명할 필요도 없었다.
이미 이곳에 있는 선생님들 전부가 알고 있는 이야기였으니까.
때문에 간단하고 중요한 포인트만 요약한 뒤 이어진 실습.
평소 비염이 있었다는 박용준 원장을 앉히고 허준이 얼굴 양쪽의 양형 혈에 침을 살짝 꽂았다.
“오우... 묵직한데요?”
“네. 이 자리가 가장 주요한 혈 자리라고 보시면 됩니다. 다만, 얼굴에 있다 보니 그만큼 조심스럽게 해주셔야 하고-”
그렇게 이어진 이야기는 탕약과 연고까지 오게 되었다.
허준이 면봉에 살짝 연고를 바르고 박 원장의 콧속으로 쏘옥 밀어 넣은 뒤, 종이컵을 건넸다.
그러자, 콧물과 농이 주르륵 흘러나오는 것이 아닌가.
“헌행님. 행장히 히헌해요.”
대충 알아들은 허준이 고개를 끄덕였고,
10여 분간 그 모습과 함께 설명이 이어진 뒤, 치료가 끝난 박 원장.
“와... 이거 장난 아니네요. 예전에 아는 동기가 근무하던 한의원에도 배농 치료했었다고 해서 받아봤는데, 그때는 사실 이렇게까지 시원하지는 않았거든요. 오히려 조금 강한 느낌도 들었고요. 그런데 이건 완전히 다른 세상 같네요. 이거 유도진 선생님이 만드신 거죠?”
당연하다는 듯이 거론되는 유도진의 이름.
유도진이 무미건조하게 답했다.
“허준 선생님과 함께 만들었습니다.”
“역시...”
박용준이 감탄을 마지못해 감격스러운 눈으로 둘을 바라봤다.
그만큼 시원했기 때문이리라.
그렇게 이어진 허준의 발표에는 당연하다는 듯이 연고를 만드는 법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휴, 수고하셨습니다.”
“선생님 수고하셨어요.”
“고생 많았어. 자네 덕분에 비염 환자들이 금방 좋아지겠구만?”
“아닙니다. 김 원장님도 워낙 내공이 있으셔서.”
“원, 이 사람이 자네가 그렇게 말하면 쪼-금 재수 없는 거 알고 있나?”
김 원장의 대답에 사람들이 피식거리며 웃었다.
언제나처럼 화기애애하게 끝난 활동.
앞에 허준이 한 교육들은 전부 박용준이 설치한 카메라에도 담기고 있었다.
“참, 선생님. 드릴 말씀이 있는데요?”
“말씀하세요. 박 원장님.”
“저번에 고영웅 선생님 계시잖아요? 고영우 선생님께서 저희 혜민서에 참여하고 싶다고 연락이 왔어요.”
허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안 그래도 며칠 전에 연락을 받은 터였다.
그때, 허준이 깨운 할아버지의 일로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말이다.
‘할아버지는 멀쩡해지셨다고 했지. 그리고 그쪽 지역에서 우리 이름으로 활동하고 싶다고 하셨고.’
지방은 아니었으나,
같은 서울이면 어떠한가.
고영웅 같은 선생님이 계시다면 든든함이 더할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부산 쪽에서도 연락이 왔어요.”
“부산이요?”
“네. 거기에서 활동하는 단체가 있는데, 저희와 함께 하고 싶다고 하시더라고요.”
“저희야 좋죠.”
뜻밖의 소식에 허준이 환하게 웃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요. 최근에 후배들로부터 연락이 왔는데, 한의대생들도 토요일 행사에는 지원해도 되냐고 묻던데 어떻게 할까요?”
“뭐, 박 원장님도 아시다시피 인원수가 많으면 일단 좋겠죠.”
“알겠습니다. 그렇게 전할께요.”
이렇게 혜민서 쪽 일도 다 끝내고 마무리가 되려는 찰나,
조용히 자리에 앉아 있던 유도진이 손을 들었다.
“말씀하세요. 유도진 선생님.”
“다름이 아니라, 이제 곧 5월이 되잖아요.”
“그렇죠?”
되묻는 박용준 원장과
이해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는 허준과 김 원장.
‘벌써 계절이 또 바뀌는구나.’
언제부턴가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사계절이 봄, 여어어어름, 가을, 겨어어어울이 되었으니.
갑자기 더워지는 날씨 탓에 사람들의 컨디션이 무너지고, 온갖 질환이 생겨날 터.
게다가 거기에 더해서 예전보다 빨리 가동되기 시작하는 에어컨과 그로 인해 생겨난 냉방병까지.
“그러게요. 미리 준비해야겠네요.”
* * *
사람 대부분은 나이를 먹어가면서 자연스레 눈치가 빨라지게 된다.
그동안 살아오면서 직간접적으로 보고들은 수많은 경험이,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것인지 알게 해주기 때문이다.
특히, 시장 골목이나 아파트가 아닌 작은 동네에서 오래 지내다 보면 그 눈치는 더욱 빨라지기 마련,
덕분에 허준한의원에서는 의도치 않은 동네 중년 남성들의 방문이 잦아지고 있었다.
“여기가 그 금술 좋게 만들어 준 곳이라면서?”
“그렇다니까? 여편네가 여기 단골인데 글쎄, 이혼 직전까지 갔던 부부를 재결합시켰다더라고.”
“그래? 그럼 역시...”
“그렇지. 바로 그거지!”
대기실에서 속삭이는 두 남성.
이런 식으로 윤 선생 부부에 대한 소문이 와전되면서 찾아온 환자들이었다.
원장실에서는 허준이 눈앞에 앉아 있는 중년 남성을 바라봤다.
‘또...?’
대체 소문이 어떻게 난 거야?
그렇다고 찾아온 환자를 무시할 수도 없는 법.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렇게 찾아온 중년 남성들 대부분이 건강한 편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아무래도 한 가족의 가장으로서 돈을 벌기 위해 일해야하고,
그러다가 스트레스라도 받으면 그걸 풀기 위해서 술이나 담배 등을 하다 보면 자연스레 노쇠한 육체의 균형은 깨지기 마련.
‘옛말에 사필귀정이라 했지.’
결국에는 모든 일은 제대로 돌아가게 된다는 고사성어로, 이는 건강에도 해당되는 말이었으니.
환자의 목적과 허준의 목적은 달랐으나, 어찌됐건 제대로 된 진료로 몸의 건강을 되찾으면 결국에는 환자들이 원하는 바로 이어지게 되는 지금의 상황에 딱 들어맞는 말이었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소문 듣고 왔습니다.”
“네. 잘 오셨습니다.”
허준이 웃으며 화답했다.
“음... 그런데, 진료목록에 따로 항목을 적어주시지는 않으셨네요?”
“네. 아무래도 그것이... 밖에 계신 여선생한테 말하기에는 쬐끔 부끄러운 면도 있어서...”
“이해합니다. 여기서 편하게 말씀해주세요.”
“뭐, 보니까. 선생님께서 이혼까지 갔던 부부를 다시 잉꼬부부로 만드셨다고 소문이 자자하더라고요. 그래서 저도 같은 처방을 한번 받아볼까 해서요. 그 보약이 그렇게 남자한테 좋다던데.”
중년 남성이 헛기침을 하면서 답했다.
이렇게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주면 오히려 진료는 편하지.
허준이 중년 남성을 천천히 살폈다.
윤기가 나지 않는 머리카락, 건조한 피부, 그리고 눈 아래의 눈그늘, 게다가 담배 냄새까지.
‘종합적이군.’
“술 좋아하시죠?”
“아? 네... 그걸 어떻게...”
“담배도 피우시고요.”
“네. 워낙 금연도 하려 했는데, 습관이 되어서...”
“진맥 한번 잡아볼게요.”
그 말에 남자가 두 손을 올렸다.
허준이 두 손으로 맥을 잡고 정신을 집중했다.
뛰는 맥들이 정보를 보내오고,
손끝을 따라 느끼는 기감은 중간중간에 가늘어지는 느낌이 있다.
게다가,
전체적으로 몸 온도도 미세하게 낮은 느낌.
최근에 자주 느껴본 맥과 기감이었다.
큰 지병은 아니지만, 제대로 된 관리를 하지 않았기에 나타나는 증상들.
허준이 눈을 뜨면서 말했다.
“약 드시게 되면, 술하고 담배 당분간 하시면 안 되는데 괜찮으시겠어요?”
“물론이죠. 며칠쯤이야.”
중년인이 자신만만하게 대답하더니,
급하게 되물었다.
“그런데, 얼마나요?”
“그야 당연히... 해결될 때까지겠죠?”
그 물음에 허준이 씨익 웃으며 답했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잘 먹히는 네 가지.
‘고3, 아기, 탈모 그리고 정력제.’
그것을 위해서라면 모두가 물불 안 가리는 편이었으니,
바꿔말하면 환자의 의지가 굉장히 강하다고 할 수 있었다.
“처방은 가미쌍화탕으로, 출근 전에 매일 드시면 효과가 있을 겁니다. 약은 내일모레 찾으러 오시면 되고요. 한약 드시는 동안에는 절대로 술, 담배 금지입니다. 그리고 여기...”
허준이 김명훈 관장이 운영하는 체육관의 전단지를 건넸다.
아무리 약이 좋아도 운동은 필수일 터.
“한의원에서 왔다고 하면, 잘해드릴 겁니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별말씀을요. 다음에 뵙죠.”
그렇게 진료 마감.
오늘의 마지막 진료는 윤 선생님 부부였다.
‘사실 굳이 진료를 볼 필요도 없지.’
왜냐면 이미 며칠 전에 퀘스트가 완료되었다는 메시지와 함께,
포인트를 얻었으니까 말이다.
그 말인즉슨, 한의학적으로 허준이 할 수 있는 일은 전부 했다는 뜻.
이제 남은 것은 둘이서 해결해 나가야 할 일뿐이었다.
다만, 그런데도 허준이 진료를 보는 이유는 하나였다.
대뜸 더는 진료를 보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면 누가 봐도 상황이 이상해지지 않겠는가.
“진료 안 봐주시겠다고요? 왜요?”
라던가,
“대체 이유가 뭡니까?”
같은 물음에 마땅히 떠오르는 답이 없었기 때문이다.
거기에다가 대고 ‘제가 할 일은 전부 끝냈습니다.’라고 할 수는 없을 테니까.
그때, 원장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윤 선생님 부부.
그들을 본 허준은 확신할 수 있었다.
‘이제는 걱정할 필요도 없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