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5화. 내가 가야 할 길은 여기야 >
95화. 내가 가야 할 길은 여기야
“당연하죠. 선생님. 제가 지금은 비록 한의사의 길을 걷고 있지만, 이래 봬도 한때는 축구선수가 꿈이었다고요.”
김형서가 자신 있게 답하는 학생을 위아래로 훑었다.
체격은 훌륭한데, 축구선수와는 거리가 좀 먼 것 같은데...?
“아, 이건 공부하느라 야식 먹어서 좀 붙어서 그런 거예요.”
“하긴, 처음에 입학할 때는 거의 육상선수인 줄 알았지. 시커멓게 타가지고는.”
최승원이 기억났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찌 됐건,
김찬용을 알아본 학생이 이렇게 반가울 줄이야.
김형서가 기분 좋다는 듯이 눈웃음을 쳤다.
띵-
그때, 도착한 엘리베이터.
이어서 1층으로 올라간 뒤, 네 명의 남자가 태용한의원으로 향하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자신의 이름이 윤형섭이라 밝힌 학생이 물 만난 고기 마냥 이야기를 주도했다.
평소에도 종종 축구에 관한 이야기를 했지만, 그래 봐야 친구들과의 대화에서는 한국 선수가 활약하는 프리미어 리그나 챔피언스 리그의 유명 선수들에 관한 이야기 정도로 좁혀졌기 때문이었다.
“진짜 제가 그날 과제 하면서 축구경기를 틀어놨는데, 누군가 혼자서 공을 딱 잡더니 달려들어서 돌파하는데, 그 느낌 아시죠? 막 심장이 두근거리고, 소름이 쫘악 끼치는 거. 그래서 그때, 등 번호를 보고 이름을 찾아봤죠. 그게 김찬용 선수였어요.”
“그.. 그래?”
김형서가 머뭇거리며 답했다.
사실 매우 친한 사촌지간은 맞았지만, 그렇다고 모든 경기를 찾아볼 수는 없는 일이 아니겠는가.
더군다나 그 시절에는 대학병원에서 일했던 시절이었으니, 눈코 뜰 새 없이 바빴기에 더욱 그러했다.
어찌 됐건 정형외과도 외과였으니까 말이다.
“네. 그 김찬용 선수 특유의 느낌이 있거든요. 진짜 보자마자 느낌이 딱 오더라고요. 이야 이 선수 장난 아니구나. 그런데, 부상당한 뒤로 경기 출전을 못 하면서 얼마나 아쉬웠다고요.”
윤형섭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러더니,
“그런데, 이번에 보니까 다시 주전으로 뛰던데, 완전히 날아 다니더라고요. 물론, 그 덕분에 HS정형외과란 이름도 들어봤죠. 정말, 감사합니다. 선생님이 고쳐 주신 거죠?”
갑자기 훅 들어오는 질문에,
김형서가 사레들려 헛기침을 했다.
‘어떻게 할까. 있는 그대로 답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잠시 고민하던 김형서,
하지만, 이내 이 고민이 부질없는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는 없는 법이 아니겠는가.
어차피, 의료업계와 한의업계 둘 다 소문은 빠르다.
언젠가는 다 알려질 일이라는 뜻이다.
허준한의원에도 허준 선생은 아무 생각 없을지 몰라도, 당장에 다른 선생님들이 있었으니,
친한 선후배 또는 동료 선생들을 만나서 이야기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알려질 테고,
그럴 바에야 확실하게 하고 가는 편이 좋겠지.
“크-흠, 인터뷰 보면 알겠지만, 내가 김찬용 선수 친척인 것은 알고 있지?”
“그럼요.”
윤형섭이 당연하다는 듯이 답했고,
전혀 모르던 최승원과 다른 학생이 흥미로운 얼굴로 김형서를 바라봤다.
“사실 찬용이의 상태를 치료하는 데에는 허준 선생님의 도움이 컸어. 아니, 도움이 큰 정도가 아니라 결정적인 활약을 해주셨지.”
“정말요?”
이번엔 최승원이 되물었다.
축구는 몰랐으나, 허준의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아마 두 눈으로 보고도 믿지 못했을걸? 나도 처음에는 믿지 못했으니까 말이야.”
그러자 학생들의 눈이 초롱초롱해졌다.
마치 먹이를 갈구하는 아기 새 같은 눈빛들이었다.
“원래는 내가 찬용이한테 수술을 권유했거든, 물론 찬용이는 거부했지만.”
“아무래도 그랬겠죠. 수술하고 폼이 제대로 안 나오는 선수들이 많으니까요.”
축구광인 윤형섭이 이해한다는 듯이 추임새를 넣었다.
“그래도 사실, 축구선수가 아닌 일상생활에는 전혀 문제없었어. 그런데 어디 밥 먹고 공만 찬 녀석의 눈에 다른 게 들어오겠어? 그러다가 내가 이곳에서 개원하게 되었는데, 허준한의원의 소문을 들은 거지. 침 잘 놓는 용한 한의사가 있다더라. 같은 이야기 말이야.”
“그래서요?”
“뭐 일단은 확인차 먼저 만나봤지. 마침, 동네도 같았고 이렇게 오늘처럼 주말마다 의료봉사를 하러 나간다고 하니, 같이 참여했거든. 인사도 할 겸 해서 말이야.”
김형서가 그때의 일을 떠올리며 말을 이었다.
“그러다가 군대로 갔었는데, 군대에서 축구를 하다가 햄스트링에 문제가 생긴 친구가 있는 거야. 그런데, 허준 선생이 장침을 가지고 오더니 고민도 없이 찌르더라고. 그러더니, 그 군인이 벌~떡 하고 일어나지 뭐야? 그래서 혹시나 해서 찬용이를 보내봤는데···.”
이야기가 이어질수록 학생들의 눈이 커졌다.
특히, 침술이라면 나름대로 자신 있던 최승원의 표정은 가관이었다.
‘그러니까, 지금 침으로 수술을 한 것과 똑같은 일을 했다는 거잖아?’
애초에 도침이 한의학적 수술이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들은 이야기는 이미 자신이 알고 있던 지식의 한계를 뛰어넘은 셈이었으니,
그저 헛웃음이 나올 뿐이었다.
‘내가 그런 사람을 상대로 내기를 했으니.’
어느새 일행이 태용한의원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최승원이 그 뒤를 따라갔다.
* * *
허준이 태용한의원으로 들어온 김형서 원장을 확인했다.
그 뒤로 최승원의 일행도 함께였다.
‘다 온 건가?’
대략 스무 명 가까이 되는 선생님들.
그리고 한쪽에서 카메라를 만지작거리고 있는 박용준 원장이 보였다.
박용준 원장이 허준을 보며 손으로 오케이 사인을 보냈다.
촬영 준비가 되었다는 표시였다.
허준이 남아있는 사람들의 얼굴을 한번 스윽 훑고 나서 입을 열었다.
당연히 시작은 추나치료에 관한 사례와 실습부터.
‘이미 배운 거네.’
처음에 설명을 듣는 최승원의 일행은 조금 진부하다고 느꼈다.
예전에야 추나 강의가 교과에 포함되어 있지 않아서 지금처럼 따로 배워야 했지만, 요즘에는 대학교 때부터 대부분 교과로 인정받아 배우는 분위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허준의 설명이 끝나고 실제 치료사례들을 가져오자 생각이 바뀌기 시작했다.
‘이게 추나치료가 맞아?’
물론, 단순히 추나치료 하나만으로 환자를 치료한 것은 아니었지만, 허준이 쉽게 풀이해주는 한의학적 근거와 자신의 경험 그리고 생각으로 이어진 결론은 추나치료의 효용성을 제대로 말해주고 있었다.
“애초에, 본 환자를 진료 보았을 때는, 딱히 별다른 증상이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손가락이 계속 붓는다는데 무시할 수도 없었죠.”
허준이 근래에 찾아온 환자 중 한 명의 사례를 꼽았다.
경추가 삐뚤어지면서 경혈의 흐름을 방해하면서 벌어진 희귀한 사례였다.
“그래서 저는 추나치료와 침을 병행하여 치료에 성공하였습니다. 그때, 사용한 것이 오늘 실습에 들어갈 부위로-”
설명이 끝나고 이어진 실습.
허준이 지원자를 받으려 하는데, 최승원이 손을 번쩍 들었다.
젊음의 힘이었는지, 또는 열정의 힘이었는지는 모르나 누구보다 빨랐던 그의 반응에 허준이 최승원에게 말했다.
“마침, 잘됐네요. 아까 진료 때에도 저와 짝꿍이었던 학생분이 나오시겠어요?”
그렇게 시작된 허준의 추나.
최승원이 내심 긴장했다.
일종의 기대감이었다.
적어도 추나에 대해서는 어쩌면 자신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는.
허준이 그런 최승원의 몸을 잡고 자세를 잡은 뒤에,
“숨 내쉬고~ 깊게 들이마시고~ 다시 편하게~”
뚜둑- 하는 경쾌한 소리와 함께 최승원의 입에서 자연스럽게 후욱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동시에 최승원의 눈이 동그랗게 떠져 있었는데,
‘뭐, 뭐야? 침만 잘 놓는 게 아니었어?’
척추를 타고 올라오는 이 시원한 느낌에 놀랐기 때문이리라.
추나치료가 대학교의 교과목으로 지정된 이상, 실습도 많이 해보고 이론적으로도 꽤 많이 경험한 그였기에 어느정도 익숙하다고 할 수 있었는데.
이 말도 안 되는 느낌은 무엇일까.
말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마치 오늘 봉사에 참여해서 온종일 언덕을 오르내리며 보조를 한 피로가 한순간에 날아간 것 같은 기분이다.
“한 번 더 갈게요. 편하게 숨 내쉬고~ 깊게 들이마시고~ 한 번 더 내쉬고~”
이번엔 아까보다는 조금 약한 도독-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나 소리만 작을 뿐, 시원함은 아까의 배가 되었으니,
최승원의 표정은 더는 놀란 표정이 아니게 되었다.
그저 눈을 감은 채, 모든 것을 잊고 지금, 이 순간만을 느끼는 것.
‘좋다.’
굳이 다른 말이 필요 없었다.
이 한마디면 충분했으니까.
그때,
“자, 그럼 돌아가면서 실습 시작해볼까요?”
허준의 말과 함께 깨어진 상념.
최승원이 허준을 바라보자,
“빨리 일어나요. 선생님들 기다리시잖아요.”
그제야 현실로 돌아온 최승원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고개 숙여 인사했다.
“죄송합니다. 선생님들.”
그렇게 추나에 이어서 침과 여러 사례의 교육이 끝나고,
촬영도 끝났다.
이곳저곳에서 온 선생님 중에는 서로 마음이 맞거나, 선후배 또는 동문 등의 이유로 각자 친목을 다지러 사라졌고.
허준과 박 원장 그리고 최승원 일행만이 남아있었다.
허준이 최승원 일행에게 다가갔다.
대학생인데 늦게까지 행사에 참여하다니,
‘대견하네.’
나는 대학생 때 토요일만 되면 놀기 바빴는데 말이야.
그렇게 맨 앞에 있는 최승원에게 손을 내밀었다.
“늦게까지 고생 많았어.”
“아닙니다. 선생님이야말로 고생 많으셨죠.”
“오늘 정말 많이 배운 것 같아요.”
“다음에 또 와도 될까요?”
“물론이지.”
허준이 답하고,
촬영 뒷정리를 하던 박용준 원장이 이어 말했다.
“제가 애들 데려다주고 올게요.”
“그래도 괜찮겠어요?”
“물론이죠. 허준 선생님도 오늘 고생 많으셨습니다. 들어가서 푹 쉬세요.”
“알겠습니다. 그럼 부탁드릴게요.”
그러면서,
최승원 일행을 데리고 나서는 박용준.
한의원 밖으로 나서자, 지갑을 열어 5만 원권 석 장을 꺼내 들었다.
“후배님들 뭐, 딱히 줄 건 없고. 늦었으니까 택시 타고 가라고.”
“감사합니다. 선배님.”
“오늘 수고 많으셨습니다. 선배님.”
그렇게 인사가 오가는 와중에,
최승원이 물었다.
“선배님. 저.. 한가지 궁금한 게 있는데요?”
“응? 뭐?”
“허준 선생님 말이에요. 아까 정형외과 선생님이 그러셨는데, 그 축구선수 치료하셨다면서요?”
“아~ 그거? 들었어?”
“네. 선생님이 전부 말해주셨거든요. 그런데, 그거 진짠가요?”
“궁금하면 아까 허준 선생님에게 직접 물어보지 그랬어.”
박용준의 대답에 최승원이 고개를 저었다.
“인터뷰에 안 나온 걸 보니, 혹시 저희가 모르는 무언가가 있을까 봐서요.”
그 대답에 박용준이 피식 웃었다.
“있지. 그거 허준 선생님이 직접 인터뷰에서 빼달라고 한거야. 가뜩이나 환자 보느라 바쁜데 귀찮은 일 생기는 건 질색이라고 해서 말이야.”
“아...”
생각지도 못한 대답에 세 학생의 동공이 흔들렸다.
애초에 그들도 한의사가 꿈이었다기 보다는, 돈 잘 벌어서, 전문직이어서, 피 안 봐서 등등의 이유로 한의대에 왔으니,
“그럼, 난 이만. 마저 끝내야 할 일이 있어서 말이야. 조심히들 들어가.”
“네. 들어가십시오.”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그렇게 남은 세친구.
그중에서 최승원이 무언가 결심했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정했어.”
“뭘?”
“졸업하고 허준 선생님 아래에서 배우기로.”
“진짜? 너 대학병원가서 침구 전문의 따러 간다면서?”
“아니. 오늘부로 생각이 바뀌었어. 내가 가야 할 길은 여기야.”
최승원이 불 꺼진 시커먼 시장 골목을 가리키며 답했다.
그리고 그 시각.
한의원으로 돌아가던 허준.
“완전히 싹 밀어버렸네.”
한쪽이 날아간 골목을 바라보며 중얼거리며 길을 걸어가는데,
누군가 소리쳤다.
“히익!”
허준이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려보니, 골목에 한복을 입은 중년의 여인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깜짝이야! 놀랐잖아.’
“저 나쁜 사람 아니에요~”
“오지마!”
그러자, 그녀가 갑자기 소리를 지르며 도망가더니 그대로 문을 걸어 잠갔다.
조용하던 골목에서 울린 소리 때문이었을까.
창문을 열고 내다본 한 사람이 허준을 알아보고는 인사했다.
“어? 난 또 누군가 했는데, 허준 선생님이시네.”
“안녕하세요.”
“놀랐겠수. 저 여편네가 여기 동네에서 오래된 보살인데, 가끔 밤에 이렇게 나왔다가 사람이라도 마주치면 저렇게 놀라서 소리치면서 도망간다우. 선생이 이해 좀 해주셔.”
“아, 저분이 그 유명한 분 맞죠?”
“맞아 그 아이.”
허준도 아는 사람이었다.
아니, 허준뿐만 아니라 이 동네의 유명인사다.
신내림을 받아 가끔 집을 벗어나 돌아다닌다는 소문의 그녀.
예전에 한의원에 파리만 날렸을 때, 용한 집이 있으니 가서 살풀이라도 한 번 해보는 게 어떻겠냐던 사람도 있었지.
‘혹시, 병이 있는 것은 아닐까?’
그랬으면 진즉에 소문이 났을 거다.
한의원에도 한 번쯤은 찾아왔을 테고.
드르륵- 소리와 함께 창문이 닫히고,
허준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한의원으로 향했다.
‘일단 돌아가서 정산부터 해야겠다.’
어느새 선생님들 월급날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