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2화. 갈래 말래 >
92화. 갈래 말래
“그럼, 묻겠습니다. 어르신. 혹시, 생활하는 데 불편함은 없으십니까? 식사라던가, 잠잘 때라던가 말이죠.”
“내가 뭐, 불편할 일이 있나? 밥이야 적당히 조율해서 잘 먹고 있고, 잠도 아주 푹 자고 있지.”
“당연히 술은 안 드시겠고요.”
허준이 예전에 갔을 때 본 집을 떠올리며 물었다.
보통 그 정도 규모의 집이라면 선물을 받았건, 구매했건 어디 하나 술병이라도 보일법했는데 도무지 찾을 수가 없었으니까 말이다.
“물론이지. 애석하게도 커피도 조심해서 마시는 신세라서 말이야.”
“알겠습니다. 그럼 진맥 한 번 잡아 보죠.”
허준이 박용찬의 맥을 잡은 뒤, 눈을 감았다.
위암 수술로 인해 손끝에서 느껴지는 위장의 맥이 매우 약하다.
‘처음 만났을 때도 느꼈지만, 역시 어렵다.’
이렇듯 수술을 한 환자의 맥은 허준도 경험이 별로 없었으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위장은 음식을 소화해 모든 장기에 영양을 공급하는 기능적인 역할의 선봉을 맡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니 당연히도 다른 장부들의 기운도 허약하기 마련.
대신에, 정우 선생님이 처방한 보약과 현대의학의 영양제 및 수액 등으로 그 허약한 부분을 보충하고 있는 그림이었다.
허준이 손끝에서 느껴지는 맥과 환자의 나이 그리고 체질과 병환들을 조립하여 결론을 도출하기 시작했다.
‘일단 위장이 사라진 만큼, 위장에 무리가 가는 모든 약재는 제외한다.’
먼저 마황.
다이어트 한약재로 많이 알려진 이것은, 사실 요즘 같은 때에 쉽게 걸릴 수 있는 감기에도 좋은 효과를 지닌다.
땀을 흘리게 하여 한기를 없애고, 폐 기능을 개선해 준다.
그리고 숙지황.
워낙 여기저기에 많이 들어가는 이 약재는 자양강장의 효능과 해독 효과 당뇨, 항산화 등에 도움이 되지만, 기름기와 영양분이 풍부해 소화가 쉽지 않다.
등등···
이런 약재들은 모두 위에 부담을 줄 터.
이어서 허준이 머릿속에서 약재들을 선택한다.
차가운 체질이지만, 소화하기 어려운 녹용보다는 쉬운 인삼이 좋겠군.
그렇다면 역시,
‘십전대보탕.’
인삼과 백출, 백복령, 감초, 숙지황을 비롯해 천궁, 당귀 등등이 들어가니,
그중에서 숙지황을 덜어내고 인삼의 양을 늘려 탕약을 달인다.
그러면 위장에도 무리가 없으면서 몸에 활기를 띄우기에는 제격이었다.
한 차례 생각을 마친 허준.
그런데, 무언가 놓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이질적인 느낌은 무엇일까.
그러다가 무언가를 깨달은 허준.
눈을 뜨고 박용찬에게 물었다.
이미 한차례 문진을 끝냈지만,
그때에는 미처 묻지 않았던 것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어르신. 화장실은 어떻게 보십니까?”
“뭐, 내 나이쯤 되면 다들 힘겨운 신세 아니겠나?”
‘이거다!’
놓치고 있던 중요한 부분.
환자는 이미 위암이라는 큰 지병을 얻고 수술까지 한 상태다.
한의학적으로 따지면, 이 수술로 인해서 가장 큰 영향을 받는 장기는 짝궁인 비장이겠지만, 여기에 한 발자국 나아가 해부학적인 시각을 더하면 비장보다는 오히려 영양분 흡수의 역할을 담당하는 대장과 소장일 것이다.
소화를 시키는 위장의 역할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니, 흡수를 하는 대장에 무리가 많이 가는 것이 당연했을 터.
그렇다면 답은 달라진다.
부자탕.
부자탕은 과거 사약으로도 사용했을 만큼 독성이 있지만, 몸을 따듯하게 하고 소화기관을 보호해주는 효능을 지녔다.
‘여기에 인삼과 부자를 적절히 가감하고 위장에 도움이 되는 약재들 몇 개를 더 넣어서 만든.’
가감부자탕.
이것이 허준이 내린 결론이었다.
“가감부자탕이 좋겠습니다.”
“호오~ 부자탕이라? 의외로구만, 녹용이나 사향이 들어간 보약을 말할 줄 알았는데 말이야.”
“물론, 그 약재들이 귀한 만큼 도움이 되겠지만, 지금 어르신에게는 부자탕이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거기에다가 부자와 인삼 그리고 위를 보해주는 몇 가지 약재들을 추가해 달일 생각입니다.”
“자네, 부자탕의 독성은 알고 있지?”
박용찬도 약재의 전문가는 아니었으나, 약재를 유통하는 일을 겸했으니 당연히 어느 정도 지식은 있기 마련.
그러니, 부자탕이란 약에 대해서 모를 리가 없었다.
“물론입니다. 하지만, 걱정하지 마십시오.”
확고한 허준의 대답.
그리고 그 대답을 들은 박용찬이 마음에 들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김정우. 그 친구하고 처방이 똑같구먼.”
박용찬의 대답에 허준이 되물었다.
“그렇습니까?”
“그래. 그 친구도 자네와 같은 이야기를 하더군.”
그제야 마음이 한결 놓인 허준.
역시 김정우 선생님이시네.
동시에 무언가를 또 한 가지 깨달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역시 한의학이란 보면 볼수록 흥미롭고 어려웠다.
“이제야 자네를 추천해준 이유를 알겠네. 좋아. 그거로 하도록 하지.”
“알겠습니다. 약은 이틀 뒤에 찾으러 오시면 될 것 같습니다.”
“그래. 잘 부탁하네.”
대답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나는 박용찬.
그리고 그런 박용찬을 허준이 뒤따르며 배웅했다.
그렇게 귀갓길에 오른 박용찬.
백미러로 승용차의 뒷자리에서 오랜만에 웃고 있는 그의 모습을 발견한 운전기사가 물었다.
“무슨 좋은 일 있으셨나 봅니다?”
“아니. 오랜만에 제대로 된 한의사를 만나서 말이야.”
그러면서 박용찬이 창밖을 바라봤다.
보통 한의사였다면 보약을 팔기 위해서 비싼 약재들이 들어간 것들을 제시하기 마련인데,
‘가격보다는 환자를 위한 처방을 했다 이거지?’
주판을 튕기는 데에는 재주가 없을지 몰라도, 하나만큼은 확실했다.
적어도 자신이 가져다주는 약재들이 허투루 쓰이는 일은 없으리라는 것을.
그리고 그거면 족했다.
* * *
다음 날.
허준한의원의 아침.
여느 때와 다를 바 없이 출근한 사람들이 인사를 나누고,
“좋은 아침이에요~ 원장님.”
“굿모닝입니다. 원장님.”
데스크에서 인사하는 두 선생에게 허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 좋은 아침입니다. 그런데, 윤 선생님. 오늘 일찍 나오셨네요?”
“요즘 따라서 피로감이 줄어든 것 같아요. 그래서 남편 출근하는 김에 같이 나왔죠.”
허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매일 운동으로 인해 체력이 늘어나고, 거기에 더해서 보약까지 더해지니 슬슬 체력이 올라오고 있나 보다.
게다가 같이 출근할 정도로 사이도 돈독해지고 있고.
“그런데, 유도진 선생님이 안 보이네요?”
“아~ 아침 일찍 오셔서 탕전실 잠깐 올라가셨어요.”
“탕전실이요?”
“네. 금방 내려오신다고 하셨어요.”
‘아침부터 탕전실이라니, 약을 달이기에는 시간이 부족할 텐데, 환약이나 단약을 만들러 갔나 보군.’
이번엔 허준이 묻지도 않았는데,
김 선생이 먼저 답했다.
“그리고 고요한 선생님은 진료 보러 가셨고요.”
“그렇군요.”
알아서 척척 돌아가는 한의원의 모습.
허준이 원장실로 향해 가운을 걸치며 스트레칭을 시작했다.
고개를 돌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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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관처럼 한번 확인해 주고.
호흡을 깊게 들이마시고 내쉬면서 자리에 앉았다.
그러고는 곧바로 데스크로 보낸 메시지.
원장실 : 김 선생님. 진료 바로 받아주세요. 시작할게요.
데스크 : 네. 원장님.
그렇게 시작된 진료.
한의원 안에는 아침부터 기다리는 환자들로 시장통을 연상케 했다.
남녀노소, 각양각색의 질환들.
그리고 단골들까지.
모르는 사람이 보면 시장통도 이런 시장통이 없어 보였지만,
김 선생의 지휘 아래에 기다리던 환자들이 한 명, 한 명씩 빠르게 교통정리가 되어가기 시작했다.
“부원장실로 가실게요~”
“김미숙 씨, 원장실로요~”
···
그러다 보니 어느새 12시.
허준한의원의 점심시간.
한의원 식구들이 모두 모여서 도시락을 꺼내 들고 식사를 하려는데,
켜져 있는 TV에서 스포츠뉴스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김찬용 선수. 계속된 부상으로 무려 일 년 만에 제대로 된 복귀전을 치렀는데요. 오늘 경기에서 3골을 넣는 엄청난 활약으로 그동안의 울분을 푼 것 같은 모습이었어요. 한 말씀 해주시죠.”
“에.. 먼저 너무 좋네요. 그리고 그동안 저를 믿고 기다려 주신 팬분들과 저희 감독님과 코치 및 여러 관계자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김찬용이 카메라를 보며 고개를 한 번 더 꾸벅 숙였다.
“제 삼촌이자, 저를 치료해 주신 HS정형외과 김형서 원장님과 병원 선생님들께 이 영광을 돌리고 싶습니다.”···
같은 내용을 TV로 보고 있던 김형서와 그의 후배이자 동료 유재원.
“이야~ 선배님. 김찬용 선수 화면빨 잘 받네요~?”
“그럼, 찬용이가 누군데. 우리 외가 쪽이 다들 저렇게 생겼어.”
“이러다가 이거 K리그 아니라 해외리그로 나가겠는데요? 제가 저 경기 실시간으로 봤는데, 거의 외국 선수 같더라고요. 이거 이러다가 우리 병원 대박 나는 거 아니에요?”
유재원이 웃으면서 답했다.
게다가 타이밍 좋게도 최근에 인터넷에 광고와 지하철역 광고가 올라갔으니 더할나위 없었다.
“그런데, 선배. 저 인터뷰 한의원 쪽과 미리 이야기된 거죠?”
어떤 질문인지 이해한 김형서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며칠 전 허준과 나눈 대화를 떠올렸다.
김형서도 도리가 없는 사람은 아니었기에, 이번 일에 관해서 따로 이야기해야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물론, 협진이라는 모양새를 갖췄지만,
아무래도 직접적인 치료 대부분은 허준 원장이 도맡았으니까 말이다.
그래서 김형서는 김찬용이 자신의 병원 광고모델로 계약이 되어 있다는 점과 한의원에서도 같이 광고효과를 얻고자 한다면 최대한 협조할 생각이었는데,
“괜찮습니다. 마음만 감사히 받도록 하죠.”
단칼에 거절하는 것이 아닌가.
더욱이 이유도 간단했다.
어차피 협력관계인 만큼, 정형외과에 환자들이 늘어나면 당연히 그중에서 한의원을 찾아올 환자도 있을 거라는 것.
그리고 이미 지금으로서도 쉴 틈 없이 바쁘다는 것 등의 이유였다.
말은 그렇게 했으나,
여태 그가 보여준 일을 보면 아마 돈에 대한 욕심이 그리 크지 않은 것이겠지.
대학병원에서 근무하던 시절에도 이런 사람이 가끔 있었기에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김형서가 유재원의 물음에 답했다.
“당연하지. 마음만 받겠다고 하더라.”
“정말요? TV에 나가는 건데, 그것도 이름이 딱 나가는 순간 매출 많이 늘어날 텐데... 그걸 거절했다고요?”
“왜 우리 쪽에도 그런 사람 있잖아? 사람 살리는 것만 생각해서 수술실에서 인생 보내는 사람. 허준 원장이 그런 부류야.”
다시 허준한의원.
TV를 보고 있던 선생들이 허준을 불렀다.
“원장님. 저 사람 여기서 치료받은 사람 아니에요?”
“맞아요.”
“와~ 축구선수라더니 진짜였네.”
“그러게요. TV에 나오는 선수일 줄은 생각도 못 했는데, 잘됐네요. 저렇게 건강해져서 팔팔 뛰어다니는 걸 보니까.”
“어? 그런데 왜 우리한의원은 언급을 안 해주지?”
고요한의 물음에 유도진이 대신 답했다.
“고요한 선생. 지금보다 환자 늘어나면 휴일 반납해야 할 텐데요?”
“아?... 그건 조금...”
그렇게 화기애애하게 점심시간이 지나가고 있었다.
* * *
토요일.
허준에게 강의를 듣던 학생 중 하나인 최승원.
그가 무언가를 발견했다는 듯이 친구들을 불렀다.
“야, 이것 좀 봐봐.”
“이게 뭔데?”
“혜민서? 이름부터 영...”
“잘 봐봐. 아래 대표가 이허준 선생님이셔.”
“뭐?!”
최승원이 스마트폰 화면을 내리면서 말을 이었다.
“진짜네?”
“뭐 하는 곳인데?”
“여기 하는 일들이 봉사활동이랑 후원인데, 재밌는 게 뭔지 알아? 봉사활동 끝나면 교육도 한대.”
“교육? 강의처럼?”
“그건 나도 모르지.”
그때, 다른 친구가 뭔가를 발견하고는 목소리를 높였다.
혜민서 멤버들의 간략한 소개란이었다.
“야, 여기 한의사 선생님들 말고 정형외과 선생님도 있는데? HS정형외과?”
“어! 나 거기 어디서 들어봤는데? 어디였더라...”
“야 됐고. 그래서 갈래 말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