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0화. 테스트부터 해보죠 >
90화. 테스트부터 해보죠
태용한의원의 점심시간.
김태식 원장과 박용준 원장 둘이 점심을 위해 식당에 앉았다.
“이모, 저희 늘 먹던 거로 주세요~”
그렇게 주문을 하고는,
물을 따르며 시작된 이야기.
주제는 당연히 대학교에서 강의한 허준에 관한 이야기였다.
본인들도 일종의 지분은 있었으니까 말이다.
“원장님. 제가 후배들한테 들었는데, 요즘 강의가 애들 사이에서는 아주 난리래요.”
“그래? 당연히 그래야지. 우리가 전부 달라붙었는데.”
“게다가 허준 선생님도 은근 말빨이 좀 되시잖아요.”
“그런가?..”
김 원장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모르셨어요? 그 특유의 착해 보이는 얼굴로 되게 별거 아니라는 듯이 말하는데, 막상 듣고 나서 보면 엄청난 일이잖아요.”
“듣고 보니 그렇네?”
맞는 말이었다.
아무렇지도 않은 순한 얼굴로 덤덤히 말해서 오히려 더 믿음이 가지 않던가.
“아마, 환자들 진료 볼 때도 똑같이 그럴걸요? 되게 차근차근 친절하게 설명하다가 마지막에는 덤덤하게 이렇게, 이렇게 처방하겠다고. 막 과장하고 그러면 오히려 부담스럽거나 의심하는데, 그래서 오히려 믿음이 가잖아요.”
“하긴, 맞는 말이야.”
“그래서 초진 환자들도 허준 선생님이 진료하고 나면 바라보는 눈빛이 완전히 달라진다니까요?”
동의한다는 듯이 김 원장도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새 자신도 허준의 말투나 제스처를 은연중에 따라 하는 중이었으니까 말이다.
혜민서 초창기 때부터 같이 활동을 해오며 본 허준의 모습이,
스스로 생각하기에 지극히 현실적이면서도, 이상적인 모습을 갖춘 그런 모습이었기 때문이었다.
드라마나 영화에서처럼 말도 안 되게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해가면서 아낌없이 주는 나무도 아니었으며,
그렇다고 현실적으로 돈만을 밝히는 속물적인 스타일도 아니었으니.
‘현실과의 괴리가 적은 이상적인 한의사.’
이것이 김 원장이 생각하는 허준의 모습이자, 본인이 원하는 지향점으로 자리 잡은 터였다.
그때, 박용준이 김 원장에게 물었다.
“그런데, 아직 좀 이해가 안 가는 게 있어요.”
“뭔데?”
“허준 선생님이 강의하는 거요. 김정우 선생님의 부탁이라고는 하지만, 거절할 수도 있었잖아요. 환자 보는 거 좋아하시는 줄 알았는데...”
그 물음에 김원장이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왠지 여태까지 자신이 봐온 허준이라면 이렇게 생각하고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난 왠지 알 것 같은데?”
“뭔데요?”
“당연히 혜민서 때문이지.”
“혜민서요?”
“그래. 생각해 봐. 허준 선생이 그동안 어떤 일들을 해왔는지. 처음에 혼자서 봉사활동 하다가 한계를 느낀 거지. 아무리 허준 그 친구라도 몸은 하나요, 시간은 한정되어 있으니까 말이야.”
“그건 그렇죠. 그때 허준 선생님의 모습을 보고 매료되어 우리가 합류하면서 혜민서가 탄생하게 됐으니까요.”
“그래. 바로 그거야. 올해 들어서 혜민서 규모가 상당히 커졌잖아? 새로운 선생들도 많이 들어오고.”
“그렇죠.”
“그런데 거기에다가 지금 허준 선생의 강의를 듣고 매료된 한의대생들이 졸업하면 어떻게 되겠어? 당연히 혜민서로 찾아올 거 아니야.”
“아~”
박용준이 그제야 무언가 이해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허준 선생님이 혜민서를 본격적으로 키우고 싶으셨구나.
‘좋아. 그렇다면 나도 조금 더 본격적으로 도와드려야겠어.’
마침, 아주 좋은 방법을 떠올린 박용준이었다.
그렇게 그날 저녁. 허준한의원.
진료를 마친 허준한의원 식구들이 태용한의원의 두 원장을 맞이했다.
“어서 오세요. 원장님들.”
“허준 선생. 볼 때마다 얼굴이 좋아~”
“요즘에 대학교에서 하시는 강의가 장난 아니라고 후배들 사이에서 소문이 자자하던데요?”
“에이~ 다 선생님들 덕분이죠. 저 혼자 준비했으면 그런 좋은 강의를 하지는 못했을 겁니다. 그래서 강의 마지막에 도움을 주신 선생님들 이름도 같이 넣고 있어요.”
허준의 대답에 선생들 모두가 흐뭇한 표정이 되었다.
다들 조금씩이라도 각자만의 지분이 있었기 때문이리라.
그때, 박용준이 허준을 불렀다.
“허준 선생님.”
“네?”
“제가 혜민서 활동에 대해서 한 가지 의견이 있는데요.”
허준이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상 실무담당자로서 대부분의 일처리를 해온 그가 아니던가.
‘게다가 대부분이 좋은 아이디어였지.’
“마침 강의도 시작했는데, 우리 혜민서 이름 걸고 강의를 제작해서 만드는 건 어떻게 생각하세요?”
“강의를요?”
“네. 실제로 제가 참여하고 싶다는 문의를 꽤 받았는데, 지방에 있는 한의사 선생님들 같은 경우에는 시간이 도저히 맞질 않아서 제한이 있었거든요.”
박용준의 이야기가 이어지기도 전에 허준이 무슨 말이 이어질지 바로 알아챌 수 있었다.
그래. 그거 정말 괜찮은 생각인데.
“그러니까 박 원장님 이야기는 거리가 먼 지방 같은 경우에는 그쪽에서 마음이 맞는 선생님들끼리 혜민서 이름으로 활동을 하고, 교육은 이 녹화된 강의로 대체를 하자는 그런 말인 거죠?”
“네. 바로 그거에요. 아무래도 우리가 직접 행사를 하는 데에서도 시간과 거리의 한계는 있으니까요. 그런 곳을 그쪽 지방의 선생님들께서 해결해 주시는 거죠. 그럼 저희도 좋고, 의료사각지대에 있는 환자들도 좋고 모두가 좋아지니까요.”
그때, 조용히 무언가를 끄적이던 고요한 선생이 손을 들면서 말했다.
“그런데, 만약에 그 강의들이 유출이라도 되면 어떻게 하실 겁니까?”
“어... 그건-”
박 원장이 답하지 못하고 말을 얼버무리면서 허준을 바라봤다.
허준이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덤덤하게 말했다.
“뭐, 유출되도 큰 상관은 없을 것 같은데요? 어차피 일부만 유출될 테고, 또 그걸 보고 익힌 선생님들이 환자를 치료하는 데 있어서 도움이 될지도 모르잖아요. 우리가 돈 벌자고 하는 활동은 아니니까요.”
“역시 자네라면 그렇게 대답할 줄 알았어.”
김 원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고,
그 옆에서 팔짱을 끼고 듣고있던 유도진 선생도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게다가 어차피 백문이 불여일견에 백견이 불여일행이라 했으니,
몸소 체험해보고 싶은 사람들은 직접 찾아오기 마련일 터.
‘그리고 조금 궁금한 부분도 있고.’
허준이 혜민서 사람들을 한 바퀴 둘러보면서 말했다.
“돈은 한의원에서 벌고 있잖아요. 그러니 혜민서 이름 앞에서만큼은 계산 없이 가죠. 게다가 기록으로 남겨져 있으면 언제든 다시 돌려 볼 수도 있으니고, 치료법의 발전에도 분명 큰 도움이 될 거에요.”
“죄송합니다. 그런 의미의 질문은 아니었는데...”
고요한 선생이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저 기록에 있어서 민감한 성격이었기에 생겨난 헤프닝이었다.
“괜찮아요. 그럼, 다른 의견은 없으시죠?”
“네.”
“저도 좋은 생각인 거 같습니다.”
“나도 좋다고 봐. 안 그래도 1박 2일로 행사하러 간다거나 하는 건 너무 하다고 생각했거든. 우리도 좀 쉬어야지.”
“그럼요. 그럼 그렇게 진행해 주세요. 박 원장님.”
“네. 준비되는 대로 진행하도록 할게요.”
* * *
아직 쌀쌀한 날씨였지만,
햇볕에는 제법 따스한 기운이 스며들어 있었다.
그 덕분인지, 봄이 오는 풋풋한 냄새를 맡은 이민주가 손에는 커피를 든 채 히죽거렸다.
지긋지긋한 비염을 치료하자, 정말로 오랜만에 이 봄이 오는 냄새를 맡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그녀의 옆에는 직장 동료이자,
친한 동기인 박유진이 거닐고 있었는데,
“민주~ 요즘에 점심시간만 되면 길거리에서 히죽거린다? 썸남이라도 생겼어?”
“썸남? 아니, 그거보다 더 좋은 거.”
“뭔데 그래? 설마.. 로또?”
“그것도 아니지요~”
“그럼.. 너 저번에 주식 샀다고 하더니, 올랐구나!?”
박유진의 말에 이민주가 피식 웃으며 답했다.
“아냐. 잘 봐봐 나 뭐 달라진 거 없어?”
“야. 그런 건 썸남한테 물으라고.”
“그거 있잖아 그거. 네 손에 들린 거.”
박유진이 한 손에 들린 커피를 들어 올리며,
“이거?”
“말고 반대쪽.”
“스프레이?”
“어. 나 이제 그거 필요 없거든.”
“너 나랑 같이 비염있었잖아?”
이민주가 눈이 휘둥그레진 박유진에게 답했다.
“거의 다 나았지. 그래서 아주 상쾌해.”
“어떻게 된 일이야? 너 봄만 되면 죽어 가더니..”
“내가 괜찮은 곳을 찾았거든. 그래서 말인데, 너도 같이 가볼래? 너 그거 달고 살잖아.”
그렇게 퇴근과 함께 둘이 찾아온 허준한의원.
진료 접수를 마친 박유진이 두리번거리며 말했다.
“여기오니까 더 심해진 거 같아.”
실제로 한의원으로 향해 는 한쪽 골목은 건물을 부수느라 먼지가 많이 날렸기 때문이었다.
물론, 이미 완치에 가깝게 치료가 된 이민주는 그러거나 말거나 그저 향긋한 한의원 냄새를 맡고 있을 뿐.
“이민주 님, 원장실로 들어가실 게요.”
이름이 불리고 원장실로 들어간 이민주.
그런 그녀를 허준이 반겼다.
“어서 오세요.”
“안녕하세요. 선생님.”
“언뜻 보기에도 많이 좋아진 것 같네요.”
허준이 그녀 옆에 나타난 96이라 적힌 진행도를 보고 답했다.
물론, 그녀의 얼굴색과 표정 또한 처음과는 달랐다.
“그럼요. 요즘에 완전히 살맛 난다니까요.”
“다행이네요. 오늘도 똑같이 치료하도록 하죠.”
“네. 참, 그리고 다음 진료가 제 회사 동료인데, 잘 봐주세요.”
“걱정하지 마세요. 그럼, 치료실에서 뵙죠.”
그렇게 허준이 가져온 연고.
처음엔 단 하나의 연고를 사용했지만, 사용하다보니 환자의 치료과정에 따라서 약의 배분이 달라진 업그레이르 버전이었다.
조금 더 쉽게 설명하자면, 처음에 가장 자극이 강하게 만든 연고였다면, 완치를 눈앞에 둔 상황에서는 부드러움과 촉촉함을 유지하는 데에 중점을 둔 연고란 뜻이다.
면봉을 쏘옥 넣자,
화한 느낌이라기 보다는 이젠 시원한 느낌을 받으며 치료 시작.
허준이 타이머를 누르고, 원장실로 향했다.
뒤이어 들어온 환자의 이름은 박유진.
‘이민주 씨 친구라고 하셨지.’
“안녕하세요. 선생님.”
“안녕하세요. 비염 때문에 오셨다고요?”
“네. 제가 이거 없으면 1년 내내 살지를 못하거든요.”
박유진이 가방에서 스프레이를 꺼내 보였다.
비염 스프레이는 보통 스테로이드 성분이 함유되어 있어서 코의 점막 혈관을 빠르게 수축시켜준다.
덕분에, 염증으로 부어있던 점막이 순간적으로 가라앉으면서 코가 뻥 뚫린 효과를 만끽하게 해주지만,
시간이 지나면 다시 부풀어오르면서 오히려 콧속은 건조해지게 되기도 한다.
‘그걸 1년 내내라면 만성이라는 이야기군.’
이민주 환자의 경우와는 다르게 만성 비염은 몇 번의 치료만으로 완치할 수는 없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그 치료의 근간은 같았으니.
“혹시, 병원에는 가보셨나요?”
“물론이죠. 병원에서 추천한 게 이거로 불편감을 느낄 때마다 사용하라고 처방해준 것이거든요.”
이럴 때마다 확실히 한의학과 현대의학의 관점의 차이가 드러난다.
“구조적인 문제에 대해서도 말이 없었나요?”
“이미 예전에 비중격만곡 수술도 한번 했어요.”
“그래요?”
이로써 확실해졌다.
구조적인 문제를 해결했음에도 재발했다는 뜻이었으니,
보다 근본적인 치료가 필요할 터.
모든 질환 중 만성이라는 단어가 포함된 것은, 그 치료법이 대부분 원인을 찾아서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야 한다.
이는 비염도 마찬가지.
콧속의 점막이 부어올라 코가 막히면 막힌 코를 뚫기 위해 코를 삼킨다거나, 심하게 푸는 등의 자극적인 행동을 하게 되고, 잠을 잘 때는 입을 벌려 숨을 쉬게 된다.
이 과정에서 콧속이 또 마르면서 촉촉한 점막이 건조하게 되는 악순환이 반복되는 것이다.
치료방법은 부어 있는 비강을 원상복귀 시키고, 몸의 건강을 되찾아 촉촉한 점막을 유지시켜 주는 것.
시작해 볼까.
“알겠습니다. 진맥부터 한번 잡아볼게요.”
허준이 박유진의 맥을 잡았다.
민감한 손끝에서 처음 느낀 감각은 몸이 조금 차갑다는 것이었다.
‘몸이 조금 차갑네.’
이어서 손끝을 타고 전해지는 장부들의 맥.
그리고 그것을 해석해 허준의 머릿속으로 정보를 전달하기 시작한다.
‘전체적으로 몸의 기운이 약하다. 일단은 몸의 기운부터 끌어 올리고 시작해야겠군.’
우선 배농 치료와 얼굴의 영향혈에는 약침이나 봉침, 그리고 폐경락의 소상혈과 척택혈에는 뜸으로 기운을 북돋아 줘야겠군.
우선 간단한 쌍화탕으로 차가운 몸에 활력을 넣고 보자.
생각을 마친 허준이 처방을 내렸다.
“혹시, 한의원에서 봉침 맞아본 적 있나요?”
“봉침이요?”
“네.”
“아니요. 한의원에는 발목 삐었을 때 밖에는 안 와봐서요..”
“잠시만요.”
허준이 봉독이 담긴 약과 주사기를 가져왔다.
“그럼, 일단은 테스트부터 해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