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9화. 당분간 우리끼리만 아는 비밀로 하세나 >
89화. 당분간 우리끼리만 아는 비밀로 하세나
한의원에서 가장 자주 쓰이는 호침의 굵기는 0.2mm 정도이다.
그리고 그 0.2의 굵기에서 손잡이의 반대쪽인 뾰족한 부분은 0.2mm보다 더 가늘기 마련이었으니.
즉, 날카로운 부분이 두루마리 휴지를 꿰뚫고 가는 것은 매우 손쉬운 일이라는 뜻이다.
살짝만 힘을 줘도 그대로 뚫어 버리니까 말이다.
내기에서 제시된 겹 수는 13겹.
이름을 최승원이라 밝힌 한의대생이 호침을 들고는 집중한 채, 두루마리 휴지를 향해 천천히 찔러 넣기 시작했다.
손끝에서 느껴지는 한겹 한겹의 감각을 느끼며.
하나, 둘, ··· 열셋.
‘여기다.’
이윽고 찔러 넣던 호침에서 손을 떼고는,
크게 호흡을 내쉬었다.
그러자, 옆에 있던 두 한의대생이 휴지를 풀어가며 겹 수를 세기 시작했다.
“하나, 둘, 셋, ··· 아홉, 열, 열하나, 열둘, 열셋!”
동시에 툭- 하고 두루마리 휴지에서 떨어진 호침.
그것을 보며 두 한의대생이 최승원의 어깨를 두드렸다.
“역시 승원이!”
“우리 한의대 에이스!”
친구들의 환호에 최승원이 별거 아니라는 듯이 웃으며 두 손을 펼쳤다.
그러고는,
“받으시죠. 그쪽 차례에요.”
호침을 건넸다.
허준이 그것을 받아 들고는 이어서 건넨 두루마리 휴지를 내려놨다.
이어서 일말의 망설임조차 없이 그대로 톡- 하고 찔러 넣자,
“어? 뭐야?”
“저걸 저렇게 한다고?”
지켜보던 최승원과 그 일행이 당황했다.
일반적으로 침을 놓을 때는 저렇게 가볍게 톡 하고 찔러 넣는 것도 크게 상관은 없었지만, 지금은 어디까지나 내기가 걸린 게임 중이 아니던가.
날카로운 침과 13장의 얇은 휴지.
침을 잡은 손끝으로 휴지의 겹을 뚫고 갈 때 느껴지는 미세한 감각을 느껴가면서 천천히 찔러 넣어야 하는 것이 정석이었다.
그런데, 저렇게 막무가내로 찔러 넣을 줄이야.
그 모습에 최승원을 비롯한 두 한의대생의 생각은 하나였다.
‘포기구나.’
최승원은 한의대에서도 이미 이 게임으로 동기들뿐만이 아니라, 선배들 사이에서도 무패에 가까운 전적을 자랑하는 괴물이었다.
때문에, 최승원이 가끔 이렇게 게임을 하자고 할 때면 몇몇 선배들은 그냥 술 마시고 싶으면 말로 하라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
“졌다고, 너무 대충하시는 거 아니에요?”
“대충? 대충 한 거 아닌데.”
“에이~ 누가 봐도 대충이던데요.”
최승원이 이미 볼 것도 없다는 듯이 말하는데.
그때,
“어?...”
툭- 하는 소리와 함께,
휴지에 박혀있던 호침이 떨어져 내리는 것이 아닌가.
“뭐야?”
“열세 겹 맞네?”
“확실해?”
“당연하지.”
최승원이 허준을 노려봤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저렇게 대충 찔렀는데, 성공했다고?’
그래. 그저 운이 좋았을 뿐이다.
고장 난 시계도 하루 두 번은 맞는다는 이야기가 있지 않던가.
“아쉽네요. 한 판 더해야 겠는데요.”
어느새 강의시간이 다가오고 있었기에, 강의실에는 하나둘 늘어난 학생들이 있었고,
그들도 이 흥미로운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아직 시간은 조금 있으니.’
게다가 한의대 에이스라고 했지.
아마 그렇게 불릴 정도면 눈앞에 있는 최승원이라는 친구가 꽤 유명한가 보다.
고집도 강하고, 승부욕도 강할 터.
허준이 방법을 바꾸자고 제안했다.
“우리 곧 강의 시작하는데, 시간 낭비 그만하고 이번엔 침으로 먼저 찌르고 각자 느낀 숫자를 말하기로 하는 게 어때? 물론, 둘 다 성공할 때는 숫자가 높은 사람이 이기는 거로.”
“그거 좋네요. 단판으로 승부를 내자 이거죠?”
최승원이 자신만만하게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먼저 침을 들고는 아까보다 더욱 집중하면서 숨을 들이마시고 천천히 찔러넣기 시작했다.
‘내가 여태까지 해본 최대치는 약 이십 오 전후.’
최승원의 손끝에 들려있는 침이 서서히 움직이다가 어느새 멈춰서더니,
“삼십. 확인해 봐.”
이어서 숫자를 세어가며 둘둘 풀리던 휴지에 박혀있던 호침이 정확하게 삼십에서 떨어져 내렸다.
강의실에 있던 학생들이 수군거렸다.
그의 최고 기록이었기 때문이리라.
숫자를 들은 최승원도 자신에게 뿌듯했는지,
환하게 웃으며 허준에게 침을 건넸다.
‘귀엽네.’
허준이 그 침을 받아들고는,
이번에 아까처럼 가볍게 톡- 하고 찌르는 것이 아니라, 손끝에 감각을 집중하면서 천천히 찔러 넣기 시작했다.
숫자가 높아질수록 난이도는 어려워지기 마련.
하지만 허준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도 않았으니.
손끝을 타고 겹겹이 지날때마다 정확하게 느껴지는 감각.
그리고 그 모습을 보고 있던 강의실 사람들의 눈이 서서히 커지고,
입도 벌어지기 시작했다.
침이 멈추지 않고 계속 들어갔기 때문이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손잡이 바로 앞자리 언저리에서 멈춘 허준의 침.
‘여기가 끝이군.’
“오십 삼.”
이어진 검증의 시간.
하나, 둘-부터 시작한 숫자가 삼십을 넘어서 사십, 그리고 오십에 가까워질수록 강의실에서 들려오던 소리들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꼴깍- 하고 침 넘어가는 소리가 크게 들릴 때쯤에,
툭- 하고 떨어진 침.
“오십 삼이 맞네요...”
“말도 안 돼.”
믿을 수 없는 눈으로 허준을 바라보는 최승원과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학생들의 감탄 소리.
그 사이에 허준이 말을 이었다.
“그럼, 강의 끝나고 최승원 학생이 술 사는 거로.”
결코 술을 마실 생각은 없었지만,
그래도 승리의 기쁨은 만끽한 허준이었다.
그때, 강의실에 있던 누군가의 말이 들려왔다.
“어? 나 저분 알아.”
“누군데?”
“그분이잖아. 다큐멘터리 나오셨던 분.”
그 이야기와 함께 다시 소리를 찾아가기 시작한 강의실.
허준이 대학생들의 웅성거리는 소리를 뒤로하고 강의실 앞으로 나갔다.
최승원이 그 모습을 보며 되물었다.
“저분이 그분이라고?”
허준은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방송 당시에 한의대를 다니던 학생들에게는 꽤 큰 감동의 울림을 선사했었으니,
강의실 앞에 나가 마이크를 손에든 허준에게 모든 이목이 집중되기에 충분했다.
허준이 자신을 바라보는 학생들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오늘 강의를 맡게 된 이허준이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와아-!”
그리고 그런 허준의 눈앞에,
<널리 퍼져 이롭게 하라. 1>
* 보상 : 포인트 1000
퀘스트가 나타났다.
* * *
허준이 준비해 온 강의를 시작했다.
‘강의자료 준비에 큰 도움이 되었어.’
한의원 식구들을 비롯한 태용한의원 선생님들까지.
혜민서 식구들 모두가 함께 준비해준 강의자료는 학생들을 만족시키기에 충분했다.
그도 그럴 것이 압도적인 이론의 강자인 유도진 선생과 사소한 것까지 전부 기록하는 고요한 선생.
이 두 선생의 활약에 더해서 허준의 실제 경험과 사례들이 합쳐지니, 이제 본과에서 한의학을 배우기 시작하는 학생들에게는 무용담과 마찬가지였을 터.
게다가 허준도 한의대를 다닐 때, 지루하고 재미없는 강의를 꽤 들었던 기억에 최대한 자신의 경험에 재미를 녹여 강의를 이어나간 탓도 있었다.
그렇게 끝난 강의와 함께 이어진 질문시간.
질문이 너무 많아 허준이 앞에서부터 하나씩 차례차례 질문을 받기 시작했다.
“저.. 선생님이 생각하시기에는 한의학으로 모든 병을 고칠 수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질문을 들은 허준이 이해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작 허준 본인도 학생 때에는 저런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리라.
‘뭐, 어느 정도는 사실이기도 하지.’
완전하게 증명할 수 있지는 않았으나, 한의학적 이론상으로는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물론, 병을 고친다기보다는 예방한다는 차원에 더 가깝겠지만 말이다.
“이론상으로는 가능한 일입니다. 물론, 예방의 차원이 더 크겠지만 말이죠.”
“선생님. 선생님 아까 침을 놓을 때 봤는데, 어떻게 해야 그렇게 잘 할수 있을까요?”
내기에 져서 분한 것인지, 또는 열정인지 눈이 번뜩인 채 묻는 최승원.
그런 그에게 허준은 누구나 알만한 답으로 답했다.
“침 잘 놓는 법이 따로 있을까요? 많이 놓을수록 잘 놓겠죠.”
“하지만, 선생님. 재능에 따라 차이도 있잖아요. 손의 감각이 민감하다던가, 둔하다든가 하면...”
“그건 당연한 겁니다. 우리 한의학에서도 잘 알려주고 있잖아요. 간의 기운이 강하고 폐가 약하게 태어난 사람이 있듯, 누구는 위가 튼튼하고 대신에 심장이 약할 수도 있으니까요. 그러니 누구는 침을 좀 잘 놓을 수도 있는 거고, 또 누구는 침 대신에 약재를 잘 쓸 수도 있겠죠. 그리고 또 누군가는 환자의 진단을 잘할 수 있을 테고요.”
허준의 말에 학생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다른 사람의 재능을 부러워하지 말고, 묵묵히 자신의 길을 쭈욱 걸어 나가면 됩니다. 그럼 오늘은 이 정도로 강의를 끝내도록 하죠.”
그렇게 끝난 강의.
학생들이 인사를 하면서 강의실을 벗어났고,
게임을 했던 최승원이 허준에게 다가와 꾸벅 인사를 했다.
“아까는 죄송했습니다. 제가 몰라뵈고.. 복학한 선배님인 줄 알고 장난 좀 치려다가.”
“괜찮아요. 덕분에 재밌었어요.”
연신 사과하면서 강의실을 벗어난 최승원.
절친인 두 친구와 함께 걸으며 입을 열었다.
“허준 선생님 좀 대단하지 않냐? 나 진짜 깜짝 놀랐다니까...”
“그러게...”
모두가 동의하는 상황.
그 상황에서 갑자기 최승원이 무언가 결심했다는 듯이 두 주먹을 불끈 쥐며 말했다.
“야, 결심했다. 나 허준 선생님한테 배우러 가야겠어.”
“뭐?”
그리고 그 시각.
강의실에서 전부 정리를 끝낸 허준.
「퀘스트 ‘널리 퍼져 이롭게 하라. 1’을 완수하였습니다.」
「포인트를 1000 획득하였습니다.」
보유 포인트 : 15721
‘이거 쏠쏠하네?’
강의에도 퀘스트가 나타날 줄이야.
그리고는 뭔가 이해했다는 듯이 읊조렸다.
“그러니까, 나보고 환자도 치료하고 다른 한의사들도 가르쳐서 더 많은 환자를 치료해라 뭐 이런 뜻이다. 이거지?”
* * *
김정우의 집.
저녁 식사 이후에 허준이 만들어준 녹용대보탕을 손에 든 그의 앞에는, 절친 박진석이 앉아 차를 우리고 있었다.
“그래서 허준. 그 친구를 결국엔 강의실로 보냈구만?”
“그랬지. 준비도 많이 해서 갔더라고. 자네도 알지? 혜민서라고 그 시장에서 같이 활동하는 친구들. 유 선생뿐만 아니라, 유선생 후배 그리고 태용한의원 선생들까지 전부 합쳐서 강의 준비를 하더라고.”
“준비하면서도 서로 공부도 많이 됐겠구먼.”
“그럴걸세. 아무래도 이론적으로 다시 하나씩 찾아봐야 했을 테니까 말이야.”
박진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의대에서 제안이 들어온 강의를 김정우에게 주로 양보한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런 실전과 이론의 차이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 보자고 한 이유가 뭔가? 중요한 이야기가 있다면서.”
“아, 있지. 일이 시작될 것 같네.”
김정우의 답변에 박진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예전부터 이야기를 들어왔던 일이었기 때문이다.
“시작이라.. 자네가 생각한 대로 그렇게 되는구먼?”
“당연한 수순이겠지.”
“그래서 기간은 얼마나 걸릴 것 같나?”
이번엔 김정우가 잠시 생각을 한 뒤에 입을 열었다.
“글세, 아무리 빨라도 올해는 지나야 진행될 걸세. 그래서 말인데, 우리가 진행하던 일은 어디까지 되었나?”
“아, 일단 법인 설립절차를 밟고 있네. 시설은 아직이고, 아마 거기도 내년쯤이면 완공은 되겠지. 그런데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인재들이 아니겠나?”
“그건 걱정하지 말게. 나는 허준, 그 친구에게 맡길 생각이야.”
“정말 그거로 괜찮겠나?”
“충분할 걸세. 그보다 이 일은 당분간 우리끼리만 아는 비밀로 하세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