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4화. 검사장비라도 있는 건가 >
84화. 검사장비라도 있는 건가
설 연휴 넷째 날.
한적한 한의원을 찾은 남자가 진료를 접수했다.
이름은 김민준.
평소보다 한적한 한의원이었지만, 그런데도 기본적으로 환자들이 있었기에 텅텅 비어있는 모습은 아니었다.
김민준이 대기실에 앉아 안경을 벗고는 미간을 꾹-하고 눌렀다.
‘어쩌다 여기까지 왔네.’
남들만큼 열심히 살았고, 이름만 들으면 바로 알 수 있는 IT 기업에 다니면서 우연히 여자친구를 만났다.
쾌활하고 수다스러운 그녀의 모습은 조용하고 과묵한 성격이었던 자신과 정반대였으니, 자연스럽게 서로에게 끌렸고.
그렇게 무난하게 결혼까지 하면서 누구나 고개를 끄덕일만한 행복한 삶을 살고 있었다. 유일한 한가지 문제가 생기기 전까지는.
바로, 아이가 생기지 않는다는 것.
처음에는 당연히 서로를 격려하고 다독이며 파이팅을 외쳤지만,
언제나 그렇듯이 시간이 지날수록 열정은 식어가기 마련이었으니.
그쯤 되면,
“다시 검사해봐.”
“검사했잖아. 아무 문제 없다고. 혹시, 당신이 문제인 거 아니야?”
“지금 내 탓을 하는 거야?”
봉우리가 높을수록 골이 깊은 법.
뜨거웠던 둘 사이에 어느새 깊은 골이 생겨나기 시작하고 있었던 것이다.
급기야, 나중에는 대화마저 줄어들기 시작했고.
이제는 그저 서로의 안부만을 확인하는 상황.
새해가 되어 가족들을 찾아뵈고 이야기를 들으니, 다시 한번 마음을 다잡고 새롭게 시작하고자 이곳까지 찾아온 그였다.
그렇게 원장실.
허준이 원장실로 들어온 김민준을 맞이했다.
“어서 오세요. 김민준 님.”
“안녕하세요 선생님.”
“네, 이쪽으로 앉으시겠어요?”
허준이 안내하며 김민준을 살폈다.
살짝 과체중이시네.
“어디가 어떻게 아프신지 말씀해 주시겠어요?”
“사실, 제가 여기에 온 이유는 선생님께 따로 드릴 말씀이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한의원에 근무하는 간호조무사 윤 선생님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윤 선생님 때문에 오셨다고요?”
“네.”
“죄송한데, 두 분이 어떤 관계이신 거죠?”
“남편입니다.”
‘남편?’
생각지도 못한 답변에 허준이 눈을 끔뻑였다.
윤 선생님이 결혼하셨었구나?
그런데 남편분이 대체 한의원에는 왜 찾아오신 거지.
그것도 설 연휴에.
“조금 놀랍네요. 윤 선생님이 결혼하신 줄은 몰랐거든요.”
간호조무사 선생님들을 채용할 때에 기혼과 미혼의 여부를 물어본 적이 없던 허준은 김 선생과 친구처럼 지내는 모습에 당연히 미혼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차였다.
“아마, 이야기를 잘 안 했을 겁니다. 저희 사이가 예전처럼 좋지 않거든요.”
허준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공과 사의 구별은 확실히 해야 하는 법. 더군다나 부부 사이에까지 참견할 수는 없는 일이었으니,
“그래서 한의원에 찾아오신 용건이 뭔지 알 수 있을까요?”
“제 와이프를 해고해 주십시오.”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말 그대로입니다. 일을 그만두게 하고 싶습니다.”
생각지도 못한 대답에 허준이 헛기침을 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그의 부탁일 뿐, 꼭 들어줄 필요는 없지 않겠는가.
게다가 이렇게 찾아와서 부탁하는 것을 보면, 당사자인 윤 선생의 입장은 포함되지 않은 이야기일 터.
“윤 선생님 본인의 의견이 포함된 겁니까?”
“그건.. 아닙니다.”
“죄송하지만, 그럼 못 들은 거로 하겠습니다.”
“선생님...”
그때 허준의 눈앞에 나타난 메시지.
「현재 능력으로 완수하기 어려운 퀘스트가 진행되려 합니다. 받아들이시겠습니까?」
‘뭐?’
이런 장문의 메시지는 처음이었다.
게다가 지금의 엄청난 능력으로도 어려운 퀘스트라니, 대체 어떤 일이길래.
허준은 망설이지 않고 수락했다.
그러자,
<씨앗을 피워라>
* 진행도 : X
* 보상 : 능력치 포인트 +1
김민준의 옆으로 퀘스트가 나타났다.
그것도 진행도가 아예 존재하질 않는 모습으로.
허준이 말없이 다른 곳을 바라보는 모습을 본 김민준이 말을 이었다.
이곳에서 나가라는 제스처라고 느껴졌기 때문이리라.
“제가 나쁜 의도로 부탁드리는 게 아닙니다. 사실은-...”
그렇게 이어진 김민준의 사정을 들은 허준이 이해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현대에 들어서 흔하게 보이는 난임 부부였다.
“그러니까 임신이 안 되어서 지금의 상황까지 왔는데, 다시 한번 잘 해보고 싶으시다 이 말씀 이신 거죠?”
“네. 맞습니다. 아무래도 일을 안 하고 몸과 마음을 편안하게 하면서 관리를 하는 것이 큰 도움이 된다고 해서요.”
어느 정도는 맞는 이야기였다.
다만, 허준이 설 연휴가 시작하기 전에 진료한 윤 선생을 떠올리며 답했다.
그녀의 상태는 아주 건강했기 때문이다.
“제 생각은 조금 다릅니다. 며칠 전에 윤 선생님의 진료를 봤습니다. 이미 충분히 건강하신 상태였거든요. 아마 보약이나 운동을 조금만 더 하면 완벽해질 테죠. 오히려 제 생각에 문제는 김민준 님한테 있는 게 아닐까 생각됩니다만.”
“저요? 그럴 리가요. 병원에서 검사도 받아 봤습니다. 아무 이상 없다고...”
“두 분 모두 병원에서 검사도 해보고 이것저것 해봤는데, 결국 해결하지 못해서 이렇게까지 온 것이 아닙니까?”
“그건 그렇지만...”
난임의 원인은 한두 가지로 볼 수 없는 질환이지만,
치료법은 두 사람을 최고로 건강한 상태로 만들면 자연스럽게 해결될 일일 터.
‘게다가 윤 선생이 한의원에 있으면 오히려 더 자주 진료를 볼 수 있을 테니.’
허준이 김민준을 바라봤다.
둘의 사이가 안 좋다고 말은 했지만, 다시 잘해보고 싶다고 이곳까지 찾아온 사람이다.
그러니 이 상황에서 직접 진료를 권유하기보다는 차라리 윤 선생님과 이야기를 통해 진료로 이어지도록 하는 것이 좋겠네.
“사정은 잘 알겠습니다. 그 부탁 들어드리죠.”
“감사합니다. 선생님.”
그렇게 다음 날.
출근과 동시에 허준이 윤 선생을 호출했다.
“윤 선생님.”
“네?”
“드릴 말씀이 있는데요.”
허준은 어제 있었던 일을 차근차근 이야기했다.
그러자 윤 선생의 표정이 복잡 미묘해졌다.
여러 감정이 섞였기 때문이리라.
“선생님. 그래서 말인데, 제가 사정을 몰랐으면 모를까 알게 되었는데, 차라리 두 분이 함께 진료를 받아 보는 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원장님한테 진료를요?”
허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윤다희가 잠시 망설였으나, 머릿속에 여태까지 허준이 해온 일들이 떠오르자.
“좋아요.”
“참, 진료비도 직원 할인되는 거 아시죠?”
윤다희가 미소지으며 씩씩하게 답했다.
벌써 문제가 해결되기라도 한 듯이.
“그럼요!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원장님.”
“저야말로 잘 부탁드려요. 가서 남편분 잘 설득해 주시고요.”
“맡겨만 주세요. 그건 제 전문이니까요.”
* * *
그 시각.
설 연휴임에도 갈 곳 없는 김정우를 위해 박진석이 찾아왔다.
두 사람은 찻잔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아,
“새해 복 많이 받으시게.”
“자네도 새해 복 많이 받아. 건강하고.”
“건강이야 나보다 자네가 조심해야지. 이제 조금 좋아졌다고 그새를 못 참고 탕전실로 달려나갔을 줄이야 쯧쯧.”
“우리 나이에 번호순이라도 정해 놨던가? 게다가 조금이 아니라, 아주 팔팔해 졌네만?”
“팔팔해 봐야 얼마나 팔팔하다고.”
박진석이 못마땅한 얼굴로 김정우를 바라봤다.
그 모습에 김정우가 피식 웃으며 차를 마셨다.
그러고는,
“자네. 그런 거 본 적 있나?”
“어떤 거?”
“단약을 만드는데, 그 크기가 미세하게 다른 거야.”
“그거야 당연한 거 아닌가. 사람이 기계도 아니고.”
“아니, 그런 다름이 아니라, 30여 개는 똑같고 또 다른 30여 개는 다르다는 거지. 같은 재료로 만드는데 말이야.”
박진석이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물었다.
“왜 그렇게 복잡하게 만드는 거지?”
“하여간 누가 침쟁이 아니랄까 봐.”
“그래서 본론이 뭔데? 답답하게 하지 말고 시원하게 말해주게.”
“나도 짐작하는 건데, 아마 환자에 따라서 본능적으로 용량을 조정하는 것 같네. 육감으로 말이야.”
“그게 가능한 일인가?”
“나도 해보지는 않아서 모르지. 다만, 얼마나 집중을 한 건지 내가 뒤에 서 있는데도 눈치채지를 못하더라 이 말이야.”
김정우의 말에 박진석이 코웃음을 쳤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는 의미였다.
‘이 친구 이런 농담도 할 정도로 기운을 차렸나 보군.’
“됐고, 우리한테 대학에서 강의 제안이 하나 들어왔는데, 나는 도저히 시간이 나질 않아서 말이야. 자네는 어떤가?”
“대학강의라...”
“허? 별일일세. 자네가 망설이다니. 냉큼 받아들일 줄 알고 이렇게 찾아왔는데.”
이전까지 종종 이렇게 강의 제안이 들어오면 언제든지 달려가던 김정우였다.
“나 대신에 다른 선생을 추천해주고 싶네.”
“호오? 유도진 선생? 좋은 기회지. 강의 준비를 하면서 깨닫는 것도 있을 테고 말이야.”
김정우가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아니. 유도진 선생 말고, 이허준 선생이 좋겠네.”
“그 친구가 받아들이겠나?”
“그거야 직접 물어보면 될 것이 아닌가?”
“하긴. 좋아, 자네 말대로 한 번 물어나 봐야겠구만."
* * *
유난히 시끌벅적한 집.
요즘이야 예전처럼 친척 집을 전부 돌면서 인사하는 것 대신에 해외여행이라던가 국내 여행을 가는 사람들도 많았지만,
그런데도 여전히 이렇게 가족들이 모이는 집도 있었으니,
“이모.”
“찬용아 다리는 어때?”
“많이 좋아졌어요.”
“그래? 빨리 나았으면 좋겠다.”
“감사해요.”
제대로 뛰지 못한 기간이 길어진 탓일까.
처음과는 완전히 다른 친척들의 태도.
이제는 그저 가식적으로 주고받는 일상적인 인사가 전부였다.
그때, 김형서가 도착했고.
김찬용을 불러 따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슬슬 이야기해봄 직한때가 되었다는 판단에서였다.
“찬용아.”
“네, 삼촌.”
“한의원은 잘 다니고 있어?”
“아주 좋아요. 그런 곳은 처음 봤어요. 정말 감사해요.”
“감사는 무슨. 그 한의사 선생이 동네에서 진짜 유명하거든. 그런데 말이야...이제 한의원 그만 다니고 다시 병원으로 돌아오는 게 어떻겠어. 거기 계속 다녀도 그거 절대로 못 고친다.”
“그게 갑자기 무슨 말씀이세요?”
“네 다리 말이야. 수술밖에 방법이 없다고.”
김형서가 담배 연기를 한번 내뿜고는 말을 이었다.
“게다가 너 곧 시즌 시작한다면서.”
“연휴 끝나고 며칠 뒤에 평가전이 있긴 하죠.”
“그러니까, 지금이라도 생각 바꾸고 수술해서 잘 관리하는 게 낫지 않겠어?”
김찬용이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아니요. 지금 충분해요. 굉장히 좋아지고 있거든요. 느낄 수 있어요.”
“야. 그거 다 착각이라니까? 너 그러다가 저번에도 또 다쳤잖아.”
“아니라니까요. 이번엔 진짜로 뭔가 달라요.”
“그런 이야기는 검사해보고 나서 해도 늦지 않아.”
“마침, 잘됐네요. 안 그래도 궁금했는데, 검사 한 번 받아 보죠.”
그렇게 설 연휴가 끝난 뒤.
검사결과를 본 김형서.
얼핏 보기에 큰 차이는 없었다.
다만, 수술을 해야 할 거로 생각한 부분들의 모습이 조금씩 달라져 있었는데,
‘이게 어떻게?’
한의학으로 이런 일이 가능하단 말인가.
그때,
“어때요?”
김형서의 앞에 서 있던 김찬용이 물었다.
“그, 그게.”
“빨리 말해주세요. 삼촌. 저도 굉장히 궁금하니까요.”
허준 선생님한테도 이미 이야기는 해둔 터였다.
오히려 허준 선생님은 적극적으로 검사를 받아 보라고까지 답장이 온 상황.
“너. 요즘에 훈련은 제대로 하고 있어?”
“설 연휴 전에는 기본 체력훈련과 스트레칭 정도만 했어요.”
“그럼, 제대로 뛰어본 적은?”
“아직 없는데, 오늘 진료 보고 왔더니, 이제부터는 슬슬 강도를 높이라고 하시더라고요.”
“그래?”
김찬용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이야기에 김형서의 머리가 복잡해졌다.
‘마치 결과를 알고 있기라도 한 것 같은 대답이 아닌가.’
혹시 한의원에 검사장비라도 있는 건가.
아무래도 직접 한번 가봐야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