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2화. 엄마가 이상하다고 >
82화. 엄마가 이상하다고
다음 날 아침.
세수하던 허준이 어제 일어난 일을 떠올리며 코웃음을 쳤다.
‘그러니까, 다들 사람 없이 편한 설 연휴에 근무하고 싶다 이거지?’
괜히 혼자 울컥했네.
그런 허준의 눈앞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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꽤 많은 포인트가 모여있었다.
진료와 주문 들어온 탕약과 보약들. 그리고 다른 선생님들이 환자를 완치하면서 얻은 포인트까지.
게다가 어제저녁에 탕약을 달일 때도 짧은 텀을 두고 1포인트씩 주르륵 밀려 들어오기도 했다.
그 모습에 허준이 잠시 의문을 품었으나, 이내 그 상황이 어떤 것인지 바로 알아챌 수 있었다.
김정우 선생님께 드릴 공진단을 만들면서 봤던 현상과 비슷했기 때문이다.
‘두 원장님께 알려드리길 잘했어.’
어쨌든 휴무 일정은 어제 대충 정해졌으니.
선생님들 선물로 보약이나 한 재씩 지어드려야겠네.
그렇게 출근한 허준.
오늘도 역시나 한의원에는 김예진 선생과 유도진 선생이 가장 먼저 출근해 기다리고 있었다.
“오셨어요?”
“좋은 아침입니다.”
“참, 오늘 진료 끝나고 선생님들 전부 진료받으러 오시죠.”
이전에도 한 달에 한 번 정도 진료를 받았기에 김예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유도진 선생의 반응은 조금 달랐다.
“저도 포함되는 겁니까?”
“물론이죠. 설 선물로 보약 한재씩 맞춰드리려고요.”
곧이어 선생님들이 하나둘씩 출근하기 시작하고,
당직 근무를 마친 도영철이 퇴근을 위해서 인수인계를 마쳤다.
허준이 도영철 선생을 먼저 불렀다.
“네. 원장님. 따로 하실 말씀이라도?”
“다른 게 아니라, 진료 좀 보려고요.”
“아~ 벌써 그렇게 되었나요? 시간 참 빠르네요.”
도영철이 고개를 끄덕이며 허준의 물음에 답하며 진맥까지 마쳤다.
아무리 젊고 건강한 사람이라도 밤낮이 뒤바뀌어 생활하는 것은 몸에 큰 영향을 미쳤으니,
이는, 밤이 되어 음기가 충만한 시간에 숙면으로 기운이 회복되어야 했는데, 그게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까닭이다.
‘역시, 조짐이 보이네.’
어느새 당직 근무를 서기 시작한 지 3달이 다 되어가는 도영철 선생.
겉보기와는 다르게 그의 몸속이 상해가는 중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 상태가 악화될 것은 뻔한 일.
아무래도 대책을 세워야 할 필요성이 있었다.
허준이 생각을 잠시 정리하고는,
도영철 선생에게 맞는 보약을 확인했다.
음기가 모자라 양기와의 균형이 깨졌으니, 보음에 가장 좋은 육미지향환이 좋겠어.
그렇게 한 명.
오전 진료가 끝나고 점심시간이 시작되기 전에는 2층에 계신 김정우 선생님 차례였다.
공복과 오전에서 오후로 넘어가는 이 시간대가 문헌에서는 가장 진맥을 잡아 진단하기 좋은 때라고 적혀있기 때문이었다.
“선생님. 진료 한 번 봐보시죠.”
김정우도 이미 선생들에게 오늘 이야기를 들었기에, 고개를 끄덕이며 허준의 진료를 받았다.
최근의 증상이나 달라진 점 등의 물음과 이어서 진맥.
진맥을 잡은 허준이 살짝 놀랐다.
기대 이상으로 좋은 박동이 느껴졌기 때문이리라.
“자네가 만든 약들이 효과가 좋더라고. 게다가 요즘에는 진료에 대해 스트레스도 없이 그저 향긋한 한약재들과 지내니 아주 평온해.”
허준이 이해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진료를 보게 되면 환자들에게 조금이라도 신경을 쓰기 마련이었으니까 말이다.
“보약은 그대로 가셔도 될 것 같네요.”
“자네 마음대로 하게.”
그렇게 진료 마감 이후에는 각각의 선생님들이 허준에게 진료를 받았고,
마지막으로 유도진 선생 차례.
“잘 부탁드립니다.”
“피곤하거나 잠을 못 주무신다거나 또는 소화나 컨디션이 안 좋다거나 하는 일은 없으신가요?”
“물론입니다.”
“손가락은요?”
“그거야 원장님께서 치료해주셔서 완치되었습니다. 물론, 그 이후에는 매일 관리하는 중입니다.”
역시 철두철미한 유도진이었다.
공진단만이면 충분하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그런데, 원장님 진료는 누가 봅니까?”
“저요?”
“네. 이왕 한의원 식구들 전부 보약 맞추는 김에, 원장님 것도 하나 하셔야죠.”
“저는 괜찮은데..”
“다른 선생님들이 부담스러워할지도 모릅니다. 제가 봐 드릴 테니 걱정하지 마시죠.”
그렇게 생각지도 못하게 진행된 허준의 진맥.
매일 진맥을 잡다가 이번엔 진맥을 잡히는 입장이 되니 신선했다.
기연을 얻은 뒤에 스스로 진맥을 몇 번 느껴보려 했지만, 집중이라도 하면 심장 소리가 먼저 울려왔으니.
제대로된 진맥을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허준이 머쓱하게 손을 내밀자,
유도진이 맥을 잡았다.
‘이, 이런 맥이 있다니?’
의문과 함께 눈을 뜬 유도진.
생전 처음 느껴보는 강력한 박동.
아니, 생전 처음이라기보다는 너무나 완벽한 맥이라 할 수 있었다.
머릿속에서 여태껏 경험했던 그 어떤 증상도 떠오르지 않았으니까 말이다.
그야말로 건강의 표본이라 할 수 있었으니,
‘이러니 매일 힘이 넘쳐서 지치지를 않지.’
다른 쪽의 맥도 마찬가지였다.
보약을 따로 먹을 필요조차 없이 그냥 이대로 잘 먹고 지내면 충분했다.
유도진이 뜸을 들이자, 이번엔 허준이 물었다.
환자 입장이 되어보니 이 짧은 순간이 굉장히 길게 느껴졌기 때문이리라.
“유도진 선생님.”
“네.”
“어떤 보약으로 하면 좋을 것 같나요?”
과유불급이라 했으니, 보약도 과하면 독이 되는 법.
그때, 유도진의 머리에 허준이 매일 저녁 쌍화탕을 하나씩 먹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 냈다.
그래. 쌍화탕 정도면 충분할거야.
“쌍화탕 정도면 충분 하겠는데요?”
“그래요?”
“네. 그 이상은 과할 것 같습니다.”
유도진 선생이 누구인가.
결코, 아부나 허언을 할 사람이 아니었으니,
허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잘됐네요.”
물론, 허준이 매일같이 쌍화탕을 먹은 효과를 톡톡히 보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유도진이었다.
그렇게 탕전실.
허준이 가장 먼저 만든 것은 공진단이었다.
반죽을 정성스레 치대고 동그랗게 만든 뒤,
재빨리 금박으로 포장을 한다.
그러면,
「포인트를 10 획득하였습니다.」
이렇게 완성된 공진단 한 알에 10포인트라는 짭짤한 수확을 할 수 있었다.
오늘 목표는 200알 정도.
한알 한알 완성될 때마다 올라가는 포인트는 어느새 10000에 도달하고 있었고,
허준은 바로 포인트를 사용했다.
「‘탕제 Lv. 4’에 10000포인트를 사용합니다.」
「‘탕제 Lv. 4’가 ‘탕제 Lv. 5’가 되었습니다.」
[탕제 Lv. 5]
- 탕약의 효과가 꽤 증가한다.
목표로 했던 5단계의 탕제를 익혔으니, 앞으로 탕약의 효과들이 더욱 좋아질 터.
그런데 그때,
「진맥과 탕제술의 요건이 갖추어져 ‘탕제의 감각’이 활성화됩니다.」
‘탕제의 감각?’
생각지도 못한 메시지가 이어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설명조차 나와 있지 않은 그것을 알아보기 위해 허준이 공진단 반죽에 손을 올렸다.
감각이니 당연히 촉감이 먼저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아무 느낌도 없잖아?’
그런데, 새롭게 느껴지는 것은 없었다.
그럼 혹시 후각인가 싶어서 창고로 향한 허준.
한약재들이 담긴 함들을 열어 냄새를 킁킁거리기 시작했다.
역시나 평소대로였다.
대체 뭐가 달라졌다는 거야.
* * *
같은 시각.
유도진과 김정우가 근처에서 저녁을 먹고 나왔다.
정우한의원 시절에는 이렇게 종종 같이 밥을 먹었으나, 그 이후에는 김정우의 사정으로 인해 같이 밥을 먹은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마침, 설 연휴 전이기도 하니 타이밍도 좋았고.
“잘 먹었습니다. 선생님.”
“아니야. 내가 오히려 고맙지. 자네가 아니었으면 지금 내가 이렇게 움직일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 것이 아니었겠는가.”
“아닙니다. 전부 허준 원장 덕분이죠.”
“그 허준 원장에게 찾아간 것은 자네가 아닌가. 인연이란 다 이렇게 사소한 곳에서부터 시작되는 법이라네.”
김정우가 기분 좋게 웃으며 말했다.
“말이 나온 김에, 잠깐 한의원에 들렀다 가볼까? 허준 원장이 남아서 약을 만들고 있을 테니 말이야.”
“괜찮으시겠습니까? 피곤하시지는 않을지.”
“이 정도는 거뜬하네. 충분히 좋아졌어. 그럼, 가지.”
그렇게 도착한 한의원.
김정우와 유도진이 2층의 탕전실로 향했는데,
“선생님 저게...?”
“쉿.”
김정우가 입에 손가락을 올리며 유도진을 바라봤다.
유도진이 의미를 이해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발소리도 죽이고 조금 더 다가가니,
허준이 무언가에 홀리기라도 한 듯이 공진단을 만들고 있는 것이 아닌가.
다만, 그 완성된 공진단의 모습이 미묘하게 차이가 났는데,
워낙 미묘한 차이였기에 김정우만이 그것을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이 사태의 시작은 몇 분 전으로 돌아간다.
허준이 가족과 선생님들에게 선물할 공진단을 만드는데, 어느 순간에 이질적인 차이를 느꼈기 때문이다.
그것은 완성된 공진단의 크기였다.
아주 미묘한 크기.
‘평소 감각대로라면 이렇게 여러 개가 확연히 차이가 날 만큼 만들어지지 않을 터.’
그제야 허준이 무언가를 깨닫고 머릿속에 진료를 본 환자를 떠올리며 공진단을 쥐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이전보다 조금 더 큰 크기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닌가.
머릿속의 환자를 바꿀 때마다,
공진단의 크기가 변화했다.
본능적으로 환자에게서 느낀 감각들이 손과 일체가 되어 약을 만드는 데에 있어서 변화를 주기 때문이었다.
‘이것이 탕제의 감각?’
이 신기한 경험에 흠뻑 취한 허준은 뒤에 사람이 온지도 모른 채, 신나게 공진단을 만들어 내고 있었고,
그런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던 김정우.
유도진을 툭툭 건드리며 밖으로 나가자는 제스처를 취했다.
“선생님. 인사하러 오신 것 아니었습니까?”
“그렇긴 한데, 왠지 지금 방해하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이 들더군. 뭐, 내일 한의원에서 만나면 되겠지.”
* * *
이틀 뒤 치료실.
허준의 손에 들린 도침이 미세하게 움직이다가 뽑혀 나왔다.
당연히 시뻘건 피가 함께 한다.
워낙 깊은 자리인 데다가, 일반 침보다는 굵었기에 미세혈관들에서 흘러나온 피였다.
집중과 함께 치료를 끝낸 허준.
이어서 장침으로 마무리를 했다.
“수고하셨습니다.”
“아닙니다. 김찬용 환자가 더 고생이 많죠. 이대로 설 연휴 때에 푹 쉬다가 연휴 끝나고 바로 오시면 될 것 같습니다.”
진행도와는 별개로 허준의 머릿속에 그려진 김찬용의 허벅지 속에서 환부라 불릴만한 곳은 전부 시술을 마친 상태였다.
이제 남은 것은 기다리며 회복하는 것뿐.
그렇게 설 연휴 전 허준의 마지막 진료가 끝났다.
내일부터 휴가라니,
‘이게 몇 년 만의 휴가인가.’
한의원을 개원한 이래로 연속으로 이어서 3일을 쉰 적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고기도 먹어본 사람이 잘 먹는다는 말이 있듯이, 쉬어본 사람이 잘 쉬는 법.
며칠간 뭘 해야 할지 모르는 허준은 일단 부산으로 내려가는 기차표를 예약해둔 상태였다.
가면 뭐라도 하겠지라는 생각과 함께.
허준이 원장실을 나서는데, 기다리고 있던 유도진과 고요한 그리고 김예진 선생이 보였다.
“왜들 퇴근 안 하시고.”
“혹시 인수인계받을 거 있나 해서 기다렸죠. 인사도 할 겸요.”
허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입원실 신경 써주시고요. 고요한 선생님이 연휴 때 풀로 근무하시니까 선생님들이 잘 보조해 주세요.”
“네.”
“걱정하지 마십쇼. 원장님.”
이어서 허준이 김예진 선생을 바라보며 말했다.
자신과 휴가 타이밍이 엇갈렸기에 꽤 오랜 기간 못 보는 상황.
“김예진 선생님도 설 연휴 잘 보내시고요.”
“원장님도 이참에 푹 쉬다 오세요.”
그리고 마지막.
유도진 선생을 바라보며 허준이 말했다.
“잘 부탁드립니다.”
유도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한의원을 나서는 허준.
뒤를 한 번 돌아보니, 오늘따라 매일 보던 허준한의원 간판이 더욱 신경이 쓰인다.
하지만 한의원 식구들의 얼굴을 떠올리자 금세 든든해지는 마음.
‘원장의 마음이란.’
허준이 서울역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손에는 직접 만든 공진단을 든 채로.
서울역에 도착한 허준이 기차에 앉아서 스마트폰으로 동생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 나 이제 출발. 도착하면 12시쯤.
- 오빠가 직접 말해.
- 왜? 엄마랑 또 싸움?
하여간 우리 집에서 가장 드센 사람은 아빠가 아닌 두 여자다.
누가 엄마 딸 아니랄까 봐.
- 엄마랑 싸우지 좀 마. 나이가 몇인데.
- 이번엔 내 잘못 아니야. 그냥 요즘에 엄마가 조금 이상해.
엄마가 이상하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