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1화. 그럼 저는 출근 하겠습니다 >
81화. 그럼 저는 출근 하겠습니다
설 연휴가 가까워지자 지난해 동안 허준한의원을 찾아 왔던 많은 사람이 안부를 전해왔다.
전화와 카카오톡, 그리고 직접 방문까지.
한의원 문이 열리며 들어온 아이를 한눈에 알아본 김예진이 달려나갔다.
“와~ 아영이 오랜만이네? 어머님도 안녕하셨어요? 어쩐 일이세요?”
김예진이 아영이를 살피며 물었다.
반가웠지만, 혹시나 어디가 또 아파서 한의원에 찾아온 것은 아닐까 하는 걱정에서였다.
“아, 지나가는 길에 잠깐 들렸어요. 새해 복 많이 받으시라고 인사하려고요.”
“감사합니다. 어머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아니에요. 오히려 제가 더 감사하죠. 그런데, 원장님은요?”
“지금 진료 중이세요.”
“그럴 줄 알았어요.”
김예진이 대답 대신에 고개를 끄덕여 답했다.
“참, 여기 이거.”
“이게 뭔가요?”
“아~ 별거는 아니고, 선생님들 생각나서 가져왔어요. 상큼하게 하나씩 드시라고요.”
그녀가 건넨 봉지 안에는 잘 익은 귤이 들어있었다.
김예진이 그것을 웃으며 받아들었다.
‘이 정도면 원장님도 뭐라고 안 하시겠지.’
꽤 많은 환자가 치료 이후에 찾아와 이것저것 건네었지만, 한 번도 그것을 받은 적이 없던 허준이었다.
그저 간단한 붕어빵이나 호떡, 커피 정도의 간식을 제외하면 말이다.
“잘 먹을게요.”
“아니에요. 바쁘실 텐데, 이만 가볼게요. 아영이도 인사해야지?”
아영이가 김예진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뽀얗게 멀쩡해진 손을 확인한 김예진이 웃으며 손을 들어 같이 흔들어 주었다.
다음날 찾아온 반가운 얼굴은 박상준이었다.
파격적으로 머리를 빡빡 민 상태로.
“어!?”
하지만, 눈썰미 좋은 데스크 선생들을 속일 수는 없는 법.
단번에 그를 알아볼 수 있었다.
“선생님들. 잘 지내셨어요?”
“그럼요. 그런데, 여기까지 웬일이세요?”
“아~ 저 서울로 올라왔거든요. 올라온 김에 겸사겸사 인사하러 왔죠.”
“그래요? 다행이다. 또 어디 아파서 온줄 알았잖아요.”
“전혀요. 걱정하지 마세요. 오히려 너무 건강해서 탈이니까요.”
“원장님 뵈러 오신 거죠?”
“그렇긴 한데, 아쉽게도 안 될 것으로 보이네요.”
박상준이 한의원을 슥 둘러보고는 대답했다.
그때, 윤다희가 물었다.
“그런데, 이 추운 날씨에 머리는 갑자기 왜 그렇게 짧게 자르신건지...?”
“아~ 이거요? 학원 다니려고요.”
“학원이요?”
“네. 대학교 갈 생각이거든요.”
대답을 들은 데스크의 두 선생이 파이팅을 외쳤다.
아마 그의 근성이라면 원하는 대학에 가는 데 문제는 없을 거다.
“다음에 다시 올게요.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다른 선생님들한테도 전해주세요.”
박상준이 들어오는 환자들을 보며 인사했다.
몇십일만에 찾아온 한의원이었지만, 향긋한 한약재 냄새와 데스크 선생님들의 모습.
자신이 기억하던 그때의 그 모습 그대로였다.
‘여전히 따듯한 곳이네.’
그렇게 자신의 꿈을 향해 상경한 박상준이 다녀가고,
하루하루가 지날수록 찾아오는 반가운 얼굴들.
대부분이 허준을 직접 만나보지는 못하고 돌아갔지만, 충분히 이해하는 얼굴들이었다.
그들도 한때는 아픈 환자였으니까 말이다.
그러다 정말 오랜만에 그녀가 한의원을 찾았다.
김명자 할머니였다.
“어...?”
김예진이 할머니를 알아보고 인사했다.
“할머니. 진짜 오랜만에 오셨네요? 어쩐 일이세요.”
“어쩐 일이긴, 한의원에 왜 오겠어?”
“접수 바로 해드릴까요?”
“당연하지~”
그렇게 원장실.
치료실에서 치료를 마치고 돌아온 허준이 모니터를 확인하는데,
‘어 김명자 할머니?’
낯익은, 아니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할머니가 오신 것이 아닌가.
허준이 바로 사인을 보냈다.
원장실이 열리고 들어온 할머니를 맞이한 허준.
“할머니!”
“아이고 깜짝이야. 왜 이리 크게 말해?”
“아, 아니에요. 너무 오랜만이라서 반가워서요.”
김명자가 자연스럽게 걸어들어오며 원장실을 한 바퀴 스윽 훑었다.
“이제 제법 티가 좀 나네?”
“그럼요~ 할머니께서 잘 모르시겠지만, 그동안 많은 일이 있었거든요.”
“쯧쯧, 아직 멀었어.”
“그보다 왜 이리 오랜만에 오셨어요? 1층으로 이전하기 전에 들리시고 여기는 처음 오셨죠?”
“살다 보면 서로 어긋나고 그럴 때도 있는 거지.”
허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고집스러운 말투에 정정하신 목소리, 건강에는 이상이 없어 보였다.
“앞으로 자주자주 좀 오세요. 어디 아프신 곳은 없으세요?”
“됐고, 보니까 환자들 기다리던데. 늘 맞던 대로 해줘.”
“그래도 오랜만인데, 진료 한 번 보셔야 하지 않겠어요? 간단하게 진맥만 잡아볼게요.”
허준의 말에 김명자가 손을 내밀었다.
그렇게 잡은 진맥.
‘역시나 건강하시네.’
다행이었다.
이어서 치료실.
“치료실도 아주 깨끗하니 좋네.”
“그렇죠?”
“그럼 오랜만에 한 번 시원하게 놔봐.”
“네.”
허준이 침을 꺼내 들고 엎드려 있는 김명자 할머니의 등에 망설임 없이 찔러 넣었다.
20분 뒤,
발침을 마치고 치료실에서 나온 김명자.
“여기 치료비.”
천 원짜리 몇 개를 김 선생에게 건네면서 기분 좋게 한의원을 떠나며 중얼거렸다.
“역시, 내가 사람 보는 눈이 있다니까.”
* * *
김찬용이 매일같이 허준한의원을 찾아온 지 며칠째.
그를 알아보는 사람은 없었다.
많은 사람이 세계에서 유명한 리그에는 관심을 두지만, 작은 한국 리그까지 챙겨보는 사람은 흔치 않았으니까 말이다.
물론, 월드컵이나 올림픽 등의 국가대항전이 되면 또 다르게 작용했지만.
그런 와중에 유일하게 김찬용을 알아본 사람이 있었으니,
태용한의원의 탕전실.
김 원장과 박 원장 둘이 불 꺼진 한의원에 남아 야근을 하는 중이었다.
“아~ 원장님. 그거 너무 크게 만든 거 아니에요?”
“아니야, 우리 지난번에 허준 원장에게 배웠잖아. 이 정도가 좋다고 했어. 날 믿어.”
그들이 만들고 있는 것은 설날 이벤트로 판매할 제품들.
이전 같았으면 여기저기 수소문하여 약 공장에서 떼다가 팔았을지도 몰랐으나,
“우리도 이제 예전 체인 한의원이 아니잖아. 단골 환자분들이 사가실 건데, 직접 만들어야 하지 않겠어?”
김 원장이 직접 제조하자고 하면서 벌어진 일이었다.
물론, 이 의견에 박 원장도 흔쾌히 동의했다.
찾아오는 환자들의 얼굴이 머릿속에 떠올랐기 때문이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일주일에 최소 두 번 이상씩 마주치는 얼굴들이 신경 쓰였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게다가 요즘에는 주변에서 태용한의원도 용하다는 이야기가 슬슬 들려오고 있었으니,
두 원장이 퀭한 얼굴로 며칠 동안 남아서 추가 근무를 하면서도 행복한 표정을 짓는 까닭이었다.
“원장님.”
“왜? 또, 힘들다고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자고 말하려고?”
“아니요. 그게 아니라, 그 왜 며칠 전에 허준한의원에 들렸을 때, 막 진료받고 나간 환자 있잖아요?”
“그 추리닝 입었던 환자?”
김태식이 누군지 이해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허준에게서 공진단 만드는 법을 직접 배워온 날이었으니까 말이다.
그날 배운 방법으로 값비싼 공진단을 대신해서 지금은 침향환을 만드는 중이었지만.
“아무리 봐도 그 사람. 제가 분명 어디서 본 것 같거든요? TV에서 봤나?”
“이젠 놀랍지도 않아. 왜 지난번에는 김우중 배우도 진료받으러 다녔으니, 연예인이 찾아 왔을 수도 있겠지.”
“그렇긴 하죠... 아! 기억났다.”
박용준이 박수를 치며 말했다.
“김찬용 선수!”
“그게 누군데?”
“아마, 원장님은 잘 모르시겠지만, 축구선수예요. 한때 잘나갔었는데 부상 때문에 아예 벤치멤버로 전락했거든요.”
“그래? 얼마나 잘하는데?”
“아마 부상 없었으면 지금쯤 외국에서 뛰고 있었을 걸요?”
김태식이 흥미롭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박 원장이 스포츠를 워낙 좋아해서 가끔 해외 축구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선수들과 팀에 대한 평가도 꽤 잘 분석하는 편이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술값이 꽤 많이 나간 것은 비밀.
“그 정도야?”
“네. 진짜 가능성이 있는 선수였거든요.”
···
그 시각 허준한의원을 찾아온 김찬용.
아무도 없는 한가한 시간대로 굳이 시간을 맞춘 것은 허준의 요청이었다.
그야말로 조금의 실수도 없이 집중하기 위해서였다.
치료실에는 허준과 김찬용 둘이 앉아 있었는데,
그런 허준의 눈에는 김찬용의 진행도를 확인할 수 있었다.
* 진행도 : 81%
설 연휴 시작까지 앞으로 3일.
“선생님. 설 연휴가 끝나고 며칠 뒤에 평가전이 열릴 겁니다. 그때에는 제가 뛸 수 있을까요?”
최근 들어서 자신의 허벅지에 변화가 생기고 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낀 김찬용이 허준에게 물었다.
그만큼 신뢰를 얻었기 때문이리라.
“네. 그러니 제가 부탁드린 것만 잘 지켜주십시오.”
“알겠습니다. 부탁드리겠습니다.”
* * *
다음 날 아침.
허준이 미리 말한 대로 허준한의원의 모든 선생님이 모였다.
설 연휴가 시작되기 전에 휴무에 관해서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서였다.
“안녕하세요, 원장님.”
“우와 우리 이렇게 모이니까 생각보다 굉장히 많네요?”
“반갑습니다.”
“오랜만이에요. 선생님.”
각자 아침 인사를 나누고 난 뒤에,
허준이 자신이 생각해온 휴가에 관해 이야기를 시작했다.
“간단히 말해서, 저희가 입원실도 있고 하니 365일 중에 하루도 쉴 수는 없거든요. 그렇다고 쉬지 않고 일하다가 선생님들이 쓰러지기라도 하면 더 큰 일이고요. 그래서 이번 설 연휴부터 순서를 정해서 선생님들이 휴식시간을 가졌으면 합니다. 여태 쉬지 않고 너무 앞만 보고 달려온 것 같은데, 선생님들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좋은 생각이네요.”
“저도 찬성이요!”
“물론 좋죠.”
한의원 모든 식구가 동의했다.
역시 말은 안 했어도 휴식이 필요한 시점이었나보다.
“모두 동의하셨으니, 제가 생각한 대로 먼저 말씀 드릴게요. 기간은 일주일. 물론, 이 일주일을 한 번에 사용하셔도 되고, 2번으로 나눠서 사용하셔도 되고요. 선생님들끼리 일정이 겹치지 않게만 해주시면 될 것 같아요.”
“와! 일주일이나?”
“오우...예스!”
갑자기 생겨난 공짜휴가에 사람들이 각자의 방식대로 기뻐했다.
가장 격하게 직접적인 표현을 한 것은 활발한 성격의 도영철 선생과 윤다희 선생이었고,
그 뒤로는 조용히 고요한 선생이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있었다.
무표정한 유도진 선생 또한 팔짱을 낀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남 선생님과 김예진 선생도 들뜬 표정으로 허준을 바라봤다.
이렇게 모아놓고 지켜보니 각자의 성격이 드러나네.
“그럼, 선생님들께서 각자 날짜를 정하셔서 알려주시겠어요?”
허준의 말에 김예진이 손을 들었다.
“김 선생님? 무슨 하실 말씀이라도.”
“제 생각에는 원장님이 먼저 날짜를 말씀해주셔야 할 것 같은데요? 그래야 선생님들이 편하게 날짜를 잡을 것 같아서요.”
허준과 눈이 마주친 몇몇 선생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저는 설 연휴 중에 하루만 쉬면 될 것 같아요.”
허준이 가족들을 만날 생각에 하루 쉰다고 말했는데, 선생님들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
대체 이 묘한 분위기는 뭐지?
“원장님. 그동안 쉬지 않고 매일같이 한의원에 출근하셨잖아요. 그러니 하루가 아니라 며칠 정도는 푹 쉬는 편이 좋지 않을까요?”
이어진 김예진 선생의 대답.
그녀는 쉼 없이 진료를 봐온 허준을 걱정해서 한 말이었으나, 몇몇 선생들의 생각은 달랐다.
이어서 유도진이 입을 열었다.
“제 생각도 같습니다. 설 연휴에는 원장님이 쉬는 게 좋을 것 같군요.”
허준이 고개를 돌려 다른 선생님들을 바라보자,
모두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동의한다는 뜻이리라.
‘선생님들께서 날 이렇게 생각해주시고 계시다니.’
감격스러운 장면.
그런데, 그 사이에서 눈치가 없던 고요한 선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설 연휴에 환자 없을 테니, 그럼 저는 출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