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5화. 그런 사람이었다 >
75화. 그런 사람이었다
어릴 적에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골병든다는 이야기를 하신다.
겉보기에는 멀쩡한 것 같은데, 속은 병들어 있다는 의미로 하는 이 단어.
“그래도 골병들었을 때는 한의원이 더 낫지 않아?”
“암, 암, 그렇고말고.”
“나도 알지. 그래도 여기는 기다리지 않고 바로바로 진료받을 수 있으니까? 게다가 한의원에는 없는 기계도 있고, 가끔 도수치료라고 그 한의원에서 하는 거랑 비슷한 것도 있는데 시간도 더 길어.”
“그래?”
···
‘골병이라...’
김찬용이 골병이라는 단어에 꽂혀 잠시 생각에 빠졌다.
그러다가 이내 고개를 흔들었다.
이미 한의원에도 몇 번 다녀봤으니까.
* * *
아침이 밝아올 무렵.
컷-!
감독의 만족스럽다는 호쾌한 외침과 함께, 사람들이 환호를 질렀다.
영화 촬영이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지만, 오늘로써 이 재개발 구역에서 찍어야 할 장면들이 모두 마무리되었기 때문이다.
촉박한 시간 때문에 빡빡하게 진행된 촬영.
거기에 깐깐한 감독의 성격이 더해졌으니, 얼마나 힘들었을지.
“수고하셨습니다!”
“감독님도 정말 수고하셨고, 정말 모두들 고생 많았어요.”
촬영을 마친 주연배우 최우중이 돌아다니면서 사람들과 인사를 했다.
밤샘 촬영으로 얼굴에는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그렇다고 첫날처럼 신경질을 낸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만큼 컨디션이 좋아졌기 때문이리라.
“우리보다 우중씨가 진짜 고생 많았지. 앞으로 남은 장면도 파이팅 하자고!”
“물론입니다. 감독님.”
“빡빡한 일정은 끝났으니, 오늘은 일단 모두 가서 푹 쉬자고.”
총괄 감독의 말에 사람들이 한 차례 더 환호를 지르고, 뒷정리를 시작했다.
그렇게 차로 돌아온 최우중.
“오셨어요?”
최우중과 몇 년을 함께 해온 매니저가 그를 반겼다.
“그래. 너도 그동안 수고 많았다.”
“아니에요. 형님이 고생 많았죠. 그보다, 오늘도 한의원 들렀다 가실 건가요?”
“당연하지.”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에 매니저가 물었다.
그동안 같이 지내오면서 한의원의 협찬을 받아서 간 적은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적극적으로 가려고 하는 곳은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형님 그 한의원이랑 잘 맞나봐요? 예전에 TV에 나온 한의사 있던 한의원도 한두 번 가고는 잘 안 가시더니.”
“아... 그동안 내가 네 생각을 못 했네.”
매니저의 직업 특성상, 배우의 스케줄대로 따라 움직여야 하며 언제고 그에게 연락을 전해줄 수 있어야 한다.
때문에, 최우중이 한의원에서 진료를 받을 때면 언제나 대기실에서 기다리고 있어야 하는 것이 매니저의 숙명이었던 것.
그런 매니저 동생이 이제야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 것이었다.
“야. 너도 진료 한 번 받아 보자.”
“됐어요. 저 아직 팔팔하다고요.”
“아니야 임마, 사람 속은 모르는 거야. 가는 김에 너도 한 번 받아 봐 그냥.”
“그런데, 아직 진료시간 되려면 좀 더 있어야 하는데요?”
“아침 먹고 가면 되지.”
그렇게 둘은 아침을 먹고 진료 시작 전의 허준한의원을 찾았다.
기간은 짧았으나, 매일 아침 출근하듯 얼굴도장을 찍으니 한의원 식구들과 서로 익숙해진 상황이었기에 처음과 같은 분위기는 많이 사라진 모습이었다.
“좋은 아침이네요.”
“안녕하세요. 선생님. 원장님 오셨죠?”
“네. 그런데, 촬영 끝난 거 아니었어요?”
“맞아요. 그래서 이렇게 아침 일찍 진료받으러 오는 것도 오늘이 마지막입니다.”
“아쉽네요. 이제 조금 익숙해진 것 같은데.”
“그래도 종종 찾아올게요.”
김 선생이 고개를 끄덕이며 메시지를 보냈고, 답장을 확인한 뒤에 답했다.
“바로 들어오시래요.”
“아, 그리고 죄송한데... 혹시, 이 친구도 같이 진료 한 번 볼 수 있을까요?”
“그건 원장님께 물어보셔야 할 것 같은데요?”
그렇게 원장실.
허준이 최우중과 그의 매니저를 맞이했다.
* 진행도 : 99%
그의 옆에 나타난 진행도.
역시 회복속도가 엄청나게 빠르네.
“마지막 촬영하셨다면서요?”
“네. 벌써 그렇게 됐네요. 아쉽네요.”
허준도 동의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진료시간보다 15분 정도 일찍 진료를 시작해야 하는 번거로운 일이 생겼지만, 그래도 매일같이 보다 보니 정이 들었던 탓이리라.
“잘 된거죠, 뭐. 촬영장에서 찾아오는 사람들 이야기를 들어보니, 요새 아주 물이 올랐다던데요?”
허준의 물음에 최우중이 웃으며 답했다.
“다 선생님 덕분이죠. 요샌 잠도 바로바로 들고, 체력도 예전보다 더 좋아진 것 같아요. 게다가 연기에서도 뭔가 한 발자국 나아간 느낌이라고 할까요? 영화 장르가 생존 장르이다 보니, 이전에 겪었던 힘든 감정이 연기에 도움이 된 것 같아요. 정말 감사합니다.”
진료 전에 힘들었던 고통마저도 연기로 승화시키다니.
역시 배우는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닌가 보다.
“감사는요 무슨, 그게 제 일인걸요. 그럼, 진료 시작해보죠.”
진행도와 별개로 그의 상태는 최고였다.
더할 나위 없이 건강한 상태.
밤샘 촬영으로 피로해진 몸에 약간의 자극이면 충분해 보였다.
‘침이면 충분하겠네.’
“이제 탕약은 더 안 먹어도 될 것 같고, 침이면 충분할 것 같네요.”
“그래요?”
약을 더 먹지 않아도 된다는 말에 최우중이 눈을 반짝였다.
그러고는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그럼, 바로 보약 맞출 수 있을까요?”
“보약이요?”
“네. 그런 거 있지 않아요? 남자에게 좋은 거.”
허준이 어이가 없다는 듯이 바라봤다.
그제야 최우중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농담이에요. 선생님. 혹시, 시간 되시면 이 친구도 한 번 봐주시겠어요?”
시계를 보니 아직 진료 시작까지는 10분가량이 남은 상황.
진료를 보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그러죠.”
흔쾌히 대답한 허준의 진료가 이어졌고,
둘 모두에게 간단한 처방이 내려졌다.
그렇게 치료실에서 사이좋게 침까지 맞고 한의원을 나선 두 사람이 서로의 얼굴을 바라봤다.
“왜 매일 형님이 웃으면서 나오는지 알 것 같네요.”
“그지? 진짜 좋다니까.”
“예. 특히, 이거 침 맞은 다음에 마시는 따듯한 쌍화탕이 이렇게 좋은 줄 몰랐어요. 피로감이 싹 가시는 게... 이래서 촬영장 삼촌들이 그렇게 극찬을 하셨던 건가. 어? 잠깐, 이러니까 내가 완전 아저씨 된 느낌인데요?”
“됐고, 여기 주소나 잘 기억해둬. 회사 식구들한테 소개 해주게.”
그리고 두 사람의 진료를 끝낸 허준의 눈앞에는,
「퀘스트 ‘뜨거운 배우’를 완수하였습니다.」
「포인트를 2000 획득하였습니다.」
메시지가 나타나 있었다.
* * *
은은한 한약 냄새가 풍기는 사무실.
소파에는 하얀 가운을 입은 남자가 앉아 차를 홀짝이며 앞에 있는 남자를 향해 물었다.
“그래, 김 실장. 좀 알아봤나?”
백 원장이라 불린 남자의 이름은 백준일.
두어 달 전 박진석의 강의에서 침을 놓는 허준을 보고 명함을 건넸던 바로 그 남자였다.
“네. 그 동네에서는 가장 유명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단골 환자들도 많고요. 침 잘 놓는다고 소문도 자자합니다. 게다가 최근에는 동상하고 화상 환자들도 많이 찾아가고, 아토피까지도 치료했다는 이야기에 환자들이 끊이지 않고 이어지는 추세입니다.”
“하아~ 이거 몸값 올라가는 소리가 들리는구먼?”
백준일이 미간에 손을 짚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진즉에 만나 볼 걸 하는 아쉬움이었다.
어쨌거나 지금은 한방병원의 매출을 끌어올리기 위해서 마케팅이 필요한 상황.
그 대상으로 허준을 떠올린 것이었다.
처음 만났을 때도 침술이 뛰어난 데다가, 대중적인 이미지도 좋았으니 마음에 들었는데.
지금은 여러 치료에 좋은 결과를 보여주고 있었으니 그야말로 적임자였다.
“그래도 충분히 메리트가 있다고 판단됩니다. 어떻게... 진행할까요?”
백 원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김 실장이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나서는데 뒤에서 말이 들렸다.
“생각해둔 금액보다 조금 더 써도 되니, 어떻게든 데려오게.
그날 저녁.
허준이 입원실로 올라가 진료를 보고 있었다.
“아흑.. 선생님, 너무 아픈데요.”
“그게 다 피가 되고 살이 되는 과정이에요. 조금만 참으세요.”
“이 정도면 다 나은 거 아닌가요?”
환자가 자신의 발가락을 바라보며 물었다.
실제로 겉보기에는 새살이 자라나 죽은 살이 떨어져 나가 깨끗한 발가락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겉과 속은 다른 법.
“며칠만 더 참으세요. 다음 주에는 퇴원할 수 있을 거예요.”
그때, 허준의 전화가 울렸다.
모르는 전화번호.
‘누구지?’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실례지만, 허준한의원 이허준 선생님 맞으시죠?”
“네. 누구십니까?”
“백 원장님께서 소개해 주셔서 연락 드렸는데요.”
허준이 기억을 더듬었다.
백 원장, 백 원장. 대체 누구였지.
그러다가 문득, 몇 달 전 강의 때 같이 밥이나 한 끼 하자며 받았던 명함을 떠올렸다.
서로 통화를 할 만한 교류는 없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전화를 건 남자가 허준한의원을 찾아왔다.
원장실에 들어선 남자가 명함을 내밀었다.
“백 원장님 아래에서 일하고 있는 김태훈입니다. 김 실장이라고 불러 주십시오.”
“이허준입니다.”
가볍게 인사를 나누자,
김 실장이 자연스럽게 카이로베드에 엉덩이를 걸치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제가 선생님께 연락을 드린 것은 다름이 아니라, 우리 병원에서 허준 선생님같이 능력 있는 선생님을 모시고 싶어서 연락 드렸습니다.”
“저를요?”
허준이 고개를 갸우뚱 거렸다.
다큐멘터리 때 반짝 이슈가 되긴 했으나, 그 이후에는 한의원에 혜민서 활동으로 바쁘지 않았던가.
“예. 저희가 지금 선생님들을 찾아다니는 중인데, 원장님께서 선생님을 마음에 두고 계셔서 말이죠. 그러니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연봉으로 크게 3장,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연봉 3억.
의사와 한의사들의 연봉은 직장인과 다르게 세금을 제하고 통장에 들어오는 금액을 뜻한다.
즉, 직장인 기준으로 따지면 연봉이 훨씬 높아지는 셈.
“...”
대답 없이 망설이는 허준의 모습에 김 실장이 안경을 살짝 고쳐 쓰며 입을 열었다.
파격적인 금액으로 기선을 제압한 뒤, 이번엔 달콤한 제안을 할 차례.
“아, 제가 너무 직접적인 금액만 제시한 것 같네요. 근무 조건도 지금보다 훨씬 좋을 겁니다. 진료도 훨씬 적어질 테고, 게다가 출퇴근 시간도 지금 계신 한의원보다 여유로울 거고요. 휴일도 당연히 많을 겁니다. 게다가 탕전실 직원도 따로 운영 중이니 굳이 지금처럼 남아서 늦게까지 탕약을 달일 일도 없을 겁니다.”
평범한 한의사에게는 그야말로 꿈같은 제안이었다.
돈 많이 주고 일 적게 한다는데 누가 싫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렇지만 허준에게는 아니었다.
진료시간이 줄어들고, 탕약도 못 달인다니.
이건 그야말로 포인트를 얻을 기회가 줄어든다는 이야기였으니까 말이다.
“참, 의료봉사는 꾸준히 하시는 조건입니다. 저희 측에서도 선생님의 이미지는 꽤 중요하니까요. 그래서 오히려 대대적인 홍보도 지원할 생각입니다.”
그 말을 들은 허준이 고민할 필요도 없다는 듯이 답했다.
“김 실장님. 죄송하지만, 저는 안 되겠습니다.”
당연히 승낙할 거로 생각했던 김 실장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한 번 튕겨보겠다 이건가.
“원장님께서 4장까지도 맞춰드릴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이 정도면 충분하지 않을까요?”
“아니요.”
1초의 고민도 없이 거절하는 허준.
그런 허준을 보고 김 실장이 헛기침을 했다.
“아니, 선생님. 지금 이 작은 한의원에서 그 정도면 매출이 얼마나 나와야 하는지는 알고 하시는 말씀이시죠?”
모를 리가 있나.
소득이 높아질수록 세금도 많아지는 법.
때문에, 한의원 규모에서 원장이 벌 수 있는 돈은 상한선이 그어지게 된다.
그이상으로 올라가려면 매출을 이전보다 훨씬 많이 올려야 하기 때문이다.
옛날이었다면 분명 흔들릴 수도 있을지 모르는 제안이었으나,
기연을 얻은 뒤부터 겪은 일들은 허준을 바꾸기에 충분했다.
“저는 지금이 좋습니다. 감사하다고 전해주십시오.”
허준과 눈이 마주친 김 실장이 수긍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사람과는 대화를 더 해봐야 시간 낭비일 뿐.
간혹 그런 사람들이 있잖은가. 확고한 신념을 가진 사람.
김 실장이 보기엔 허준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