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4화. 팔물군자탕 >
74화. 팔물군자탕
허준한의원 원장실.
“하윽.”
카이로베드 위에 있는 남자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긴 촬영으로 인해 제대로 씻지 못해서인지 머리는 떡져 있는 모습이다.
허준이 그를 내려다보면서 말했다.
“일어나셔서 천천히 한 번 움직여 볼게요.”
그 말대로 자리에서 일어난 그가 머리를 천천히 한 바퀴 돌리자,
“어떠세요?”
“와... 진짜 편해진 것 같아요. 요새 촬영장에서 소문이 자자한데, 괜히 그런 게 아니었네요. 같은 팀 형님이 추천해주셔서 왔는데, 진작 올 걸 그랬어요.”
한의원 건너편에 있는 영화촬영장에서 허준한의원에 대한 입소문이 나면서부터 촬영장 사람들이 하나둘 찾아오더니, 이제는 그 수가 꽤 많아 진 상태였다.
촬영팀부터 소품팀, 분장팀에 화면 안에서는 보지 못한 생소한 직업의 사람들까지.
그래도 다행인 것은, 찾아온 사람들 대부분이 간단한 증상들이라는 것이었다.
허준이 목을 돌리면서 신기해하는 환자에게 말했다.
“침 맞으시면 조금 더 좋아질 겁니다. 치료실에서 뵙죠. 나가시면 데스크 선생님이 안내해 주실 거예요.”
“알겠습니다.”
이어서 다음 환자.
차트를 보니 초진 환자다.
증상은 간단한 소화불량.
진맥을 잡고, 소화에 도움이 되는 위경락의 양곡혈과 해계혈에 침을 놓는다.
젊은 환자였다면 기운을 빼기 위해 함곡과 족임읍의 혈 자리에도 침을 놓았을 테지만, 이것만으로도 충분했다.
「포인트를 1 획득하였습니다.」
[침술 Lv. 6] 필요 포인트 10000
[구술 Lv. 5] 필요 포인트 5000
[탕제 Lv. 3] 필요 포인트 5000
[추나 Lv. 2] 필요 포인트 5000
[진맥 Lv. 2] 필요 포인트 20000
···
보유 포인트 : 5327
퀘스트 완료 이후에 진료와 탕약으로 모아온 포인트가 어느새 5천 점이 넘은 상황.
욕심 같아서는 조금 더 기다렸다가 침술을 올리고 싶은 허준이었지만, 이제 곧 보약 주문이 밀려오는 시기가 다가온다.
‘이 좋은 기회를 놓칠 수 없지.’
전통적으로 추석 연휴와 설 연휴 때, 탕약과 보약이 가장 많은 주문이 이뤄졌으니, 조금이나마 약의 효능을 올리는 것이 약을 짓는 사람도, 자신에게도 좋은 거라고 생각하는 허준이었다.
‘4레벨에서 5레벨로 올라갈 때 효능이 꽤 많이 올라간다고 했었지.’
침술의 레벨이 올라갈 때도 4레벨 이후부터 효과의 증가가 큰 폭으로 이루어진다고 쓰여있었던 것을 떠올린 허준은 설 연휴가 오기 전에 탕제술을 5레벨까지 먼저 올리겠다는 목표를 잡았다.
게다가 최근 좋은 약재를 구한 뒤부터, 탕약을 달이는 것만으로도 얻을 수 있는 포인트가 쏠쏠했으니 조금만 열심히 하면 가능할 터.
결론을 내린 허준이 망설임 없이 포인트를 사용했다.
「‘탕제 Lv. 3’에 5000포인트를 사용합니다.」
「‘탕제 Lv. 3’이 ‘탕제 Lv. 4’가 되었습니다.」
[탕제 Lv. 4]
- 탕약의 효능이 증가한다.
그렇게 다음 날 찾아온 남승연 환자.
그녀의 모습은 처음 이곳에 들어올 때와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생기가 도네.’
이전이 차가운 도시 여자 같았다면 지금은 따듯한 봄을 맞이한 얼굴이었다.
“어서 오세요.”
“안녕하세요.”
“소개해 드린 곳은 어때요? 힘들지 않으세요?”
“아니에요. 정말 좋은 곳을 소개해주셔서 감사해요. 관장님이 좀 무섭게 생기긴 했는데, 되게 꼼꼼하고 친절하게 설명해주셨어요. 그동안 제가 얼마나 무리하게 해왔는지... 이제야 알겠더라고요.”
“잘됐네요.”
허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만만하게 맡겨만 걱정하지 말라던 김명훈 관장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그럼, 진맥 한 번 잡아볼까요?”
허준이 남승연의 진맥을 잡았다.
첫 진료 때의 차가웠던 손에서는 따듯함이 전해져 온다.
몸에 제대로 활기가 돌고 있다는 뜻.
그녀의 옆으로 보이는 진행도에는 그리 큰 변화가 나타나지 않았지만, 탄력을 받기 시작하면 앞으로 빠르게 올라갈 것이 분명할 터.
이제 남은 것은 그녀의 피로를 줄여 줄 만한 쌍화탕 정도면 충분할 것이다.
허준이 웃으며 말했다.
“간단하게 뜸이랑, 쌍화탕 정도면 될 것 같아요.”
* * *
정우한의원에서 일하시던 조무사 선생님 한 분이 허준한의원으로 오셨다.
“김정우 선생님 추천으로 온 남복희라고 해요. 잘 부탁드립니다.”
“저희가 더 잘 부탁드려요.”
그렇게 간호조무사가 한 명 더 늘어난 데스크.
이미 김 선생과 윤 선생이 최적화된 동선을 짜둔 상황에서 베테랑 선생님 한 분이 추가되자,
‘치료실 정리가 금방금방 되네.’
식그들 중 누구나 느낄 만큼 능률이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자, 이제는 한 몸처럼 움직이게 된 데스크 팀.
게다가 남 선생님이 합류한 허준한의원의 분위기가 한층 부드러워졌다.
남 선생과 환자들이 서로 익숙했을뿐더러, 김 선생과 윤 선생이 아무리 노력해봐야 살아온 세월과 시대가 달라 공감하지 못했던 부분들이 해소되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한의원을 찾아온 한 중년의 여인.
한눈에 봐도 비싸 보이는 밍크코트를 입은 그녀가 한의원을 두리번거리더니 데스크에 있는 윤 선생에게 물었다.
“여기가 유도진 선생님 계시는 한의원 맞죠?”
“네. 무슨 일이신가요?”
“보약 좀 맞추러 왔는데요.”
“그럼, 접수해 드릴게요. 이거 써주시고 조금만 앉아서 기다려 주시겠어요?”
“네.”
이름은 박소정.
정우한의원에서 보약을 지어 먹던 환자로, 동네에서 최미라와는 언니 동생 하는 사이였다.
‘유도진 선생님이라면 믿을 만하지. 정우 선생님도 가끔 진료를 보러 온다고 했으니.’
그렇게 대기실에 앉아 있는데.
귓가에 환자들의 이야기가 들리기 시작했다.
“그래? 정우 선생님이 유도진 선생이 아니라 허준 선생에게 진료를 받는다고?”
“그렇다니까? 소문에는 글쎄 허준 선생이 달인 보약 먹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더라고.”
박소정이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유도진 선생님이 아니라 다른 선생님에게 보약을 맞추셨다고?
“그럼, 그 소문이 사실이었나 보네.”
“무슨 소문?”
“왜, 그 한의원 그만둔다고 했을 때, 혹시 아픈 거 아니냐고 동네에서 이야기 많았잖아. 연세가 있으시니까.”
“지금은 멀쩡하시잖아. 가끔 여기 나와서 환자들도 봐주고 한다더라고.”
“그래?”
이쯤 되자, 박소정의 마음이 갈등을 일으켰다.
여태까지 믿으면서 보약을 지어왔던 유도진 선생이냐, 소문의 주인공인 새로운 선생이냐.
“여기 윤 선생이 그러는데, 그 보약 받는 조건으로 가끔 와서 한의원 일 도와주는 거라고 하더라고.”
“그거 비싼가?”
“비싸겠지. 녹용이랑 뭐랑 들어가는 보약이라고 하니까.”
“그래도 소문이 사실이면 이참에 나도 한 번 마셔볼까? 조금 있으면 설이니까 세일 하지 않겠어?”
“그거 좋은 생각이네. 나도 애들한테 설 선물로 쓸데없는 거 보내지 말고, 그거나 한 재 지어달라고 해야겠어.”
박소정이 자리에서 일어나 데스크로 향했다.
“아직 조금 더 기다려 주셔야 해요.”
남 선생이 박소정을 기억하고는 앞에 남은 환자들의 숫자를 헤아렸다.
“그게 아니라, 유도진 선생님 말고, 다른 선생님이 한 분 더 계신다면서요?”
“허준 원장님이요?”
“네. 그분 맞아요. 허준 선생님. 그 선생님으로 진료 바꿔주실 수 있을까요?”
“그러면 시간이 조금 더 걸릴 것 같은데, 괜찮으실까요?”
진료 접수 취소 이후 다시 넣는 것은 줄 서는 것과 같았으니, 중간에 옆줄로 바꿔 달라고 해서 그대로 바꿔줄 수는 없는 법.
박소정이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물론이죠.”
그렇게 박소정의 이름이 불리고,
허준이 박소정을 맞이했다.
‘이 동네에서는 흔치 않은 복장이네.’
유도진 선생에게서 이미 정우한의원에서 보약을 맞추던 환자들이 새해를 맞이하여 찾아오기 시작할 거라는 이야기를 들었던 터라 어느 정도 인지하고 있는 상태였지만, 그래도 막상 환자들이 직접 찾아오니 낯선 느낌이 드는 허준이었다.
“어서 오세요.”
“안녕하세요. 선생님.”
“보약 맞추러 오셨다고요?”
“네.”
“일단 이쪽으로 앉아 주시겠어요.”
박소정이 의자에 앉았다.
유도진 선생님 보다 더 젊은 선생님이네.
그렇게 진료 시작.
허준이 간단한 질문들을 건넸다.
지병이라던가, 가족력, 요즘의 컨디션과 사소한 불편한 것들까지도.
‘들은 대로라면 특별히 아픈 곳은 없네.’
그렇다면 이제 진맥으로 오장육부의 실허와 어울리는 약재들을 선별할 차례.
“진맥 잡아볼게요.”
허준이 박소정의 맥을 짚었다.
다른 장기들에 비해서 유달리 비장과 위장의 맥이 약하다.
‘소음인 체질의 전형적인 특징이지.’
ⓚ②②
소음인은 이제마의 네 개의 체질 중에서도 가장 체력이 약하고 기운이 약한 체질로, 비와 위장이 약한 것이 특징이다.
때문에, 소화력이 약하며 네 체질 중에서 잔병치레가 많았다.
몇 가지 보약들이 떠오르지만, 그중에서 허준이 선택한 것은 소음인에게 가장 좋은 약재인 인삼 함유량이 높은 팔물군자탕.
결론을 내린 허준이 입을 열었다.
“팔물군자탕이 좋겠네요. 팔물군자탕은 십전대보탕에서 체질에 맞춰서 인삼 함유량을 높이고 다른 약재들의···”
이어진 설명에 박소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굳이 듣지 않아도 이미 알고 있는 이름의 보약이다.
정우 선생님이 처방해주신 보약과 같았으니까 말이다.
“··· 그런 보약으로, 내일 모레 찾으러 오시면 됩니다.”
* * *
축구 경기장.
관중석에는 꽤 많은 사람이 각자의 팀을 응원하고 있었다.
후반전 시작을 알리는 휘슬 소리와 함께, 빠르게 패스로 이어져 나가는 공.
그리고 숫자 13번과 김찬용이란 이름을 등에 달고 있는 선수가 갑자기 앞으로 달려나가기 시작했다.
그가 달려나가자, 관중석에서는 응원의 소리가 커지기 시작했다.
김찬용! 김찬용!
동시에, 절묘하게 날아와 김찬용의 앞에 떨어진 공.
그 공을 낚아채고는 재빨리 드리블하면서 상대 팀의 골문을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다.
“아 김찬용 선수가 달립니다~ 쭉 쭉 뚫고 나갑니다~ 한 명, 두 명, 세 명!!! 제치고 슛~!”
“골인! 골인입니다!! 정말 두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는 대단한 돌파력입니다~”
“어? 그런데 저게 뭔가요? 골을 넣은 김찬용 선수가 허벅지를 부여잡고 쓰러져서 일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큰일이 아니어야 할 텐데요.”
“의료진들이 들어가는데요. 아무래도 상황을 지켜봐야 할 것 같습니다.”
···
[속보] 김찬용 선수 심각한 부상으로 당분간 출전 불가.
김찬용 선수의 해외 진출길 이대로 무산되나.
완치 후 첫 출전에서 또다시 부상.
···
김찬용이 HS 정형외과라 적힌 건물의 문으로 들어섰다.
이곳의 원장이자, 삼촌 김형서에게 진료를 받아온 지가 벌써 1년째.
“어서 오세요.”
“원장님 만나러 왔는데요.”
“지인 분이신가요?”
“네. 김찬용이라고 하면 아실 겁니다.”
그렇게 얼마 지나지 않아서 김찬용이 진료실로 들어갔다.
진료실에는 김형서가 앉아 반갑게 맞이했다.
“어서 와. 찬용아.”
“삼촌. 개원 축하드려요. 병원이 아주 깨끗하고 좋네요.”
“고맙다. 다리는 어때? 좀 괜찮아 졌어?”
김찬용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직 제대로 돌아오지 못했다는 뜻이었다.
첫 부상 이후 이어진 반복된 부상.
덕분에, 한때 팬을 꽤 거느리고 있던 그는 어느새 벤치멤버가 되어있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최근에는 팀에서 방출에 관한 이야기도 슬슬 들려오고 있는 상황이었으니, 김찬용의 표정이 좋을리가.
그것을 본 김형서가 헛기침하더니 말을 이었다.
“삼촌이랑 같이 조금만 더 재활치료 하다 보면 분명히 좋아질 거야.”
“그렇겠죠...”
김찬용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그럴 것이 다른 병원에도 여러 번 가봤지만, 결과는 여기와 다름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재활치료를 마치고 나온 김찬용이 인사를 하고는 병원을 나서는데 한 무리의 노인들이 정형외과로 들어서며 수군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