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3화. 난 이제 조율이 끝났는데 >
63화. 난 이제 조율이 끝났는데
최서윤이 방 하나를 통째로 차지하고 있는 그랜드피아노 위에 덮여 있던 새하얀 천을 천천히 걷어냈다.
그런 그녀의 뒤로는 여기저기에서 받은 상과 트로피들이 놓여 있었다.
오랜만에 빛을 받은 피아노는 묘한 광택을 뿜어냈다.
꿈과 열정, 그리고 시련까지 함께 안겨준 애증의 대상.
최서윤이 천천히 의자를 꺼내 앉은 뒤, 건반 위로 손을 올렸다.
그러고는 가볍게 힘을 주어 건반 하나하나를 눌러본다.
오랜만에 주인을 만난 탓일까.
피아노가 반갑다는 듯이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도부터 그다음 도까지.
양손으로 번갈아 가며 퍼져가는 피아노의 소리.
최서윤의 귓가에 간혹 둔한 소리나 탁한 소리가 들렸지만, 지금은 그것마저도 선율로 느껴진다.
‘오랜만이야.’
넌 조율이 좀 필요하겠구나.
난 이제 조율이 끝났는데, 우리 같이 다시 한번 처음부터 시작해 보자.
즉흥적으로 치고 싶은 건반을 하나하나 누르기 시작했다.
그냥 지금 느끼는 감정 그대로를.
기승전결로 나뉘어 표현된 피아노 소리.
순수함과 열정 그리고 이어진 위기.
그 위기를 극복하는 절정 부분에서는 오히려 박자가 느려지며 평온한 음이 흘러나왔다.
자연스레 허준한의원의 따듯한 분위기가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친절하게 진료를 해주는 선생님들뿐만 아니라, 언제나 응원해주는 데스크의 선생님들 그리고 대기실에 앉아 있는 환자들까지도.
그 얼굴들이 하나하나 떠오르며 완성된 따스한 노래가 허준한의원에 울려 퍼졌다.
* * *
“김 대리, 정말 괜찮아? 엊그제 차 사고 났었다면서.”
운전대를 잡은 김성호에게 보조석에 앉아있던 남자가 물었다.
영업 3팀장. 백현수.
둘은 신규 거래처의 미팅에 참여하기 위해 이동하는 중이었다.
“괜찮습니다. 팀장님.”
“그래? 어제 병원은 갔다 왔지?”
“네. 다녀왔죠.”
“뭐래? 별말은 없었어?”
“뭐, 엑스레이부터 이것저것 다 검사해봤는데, 이상 없다던데요? 멀쩡하대요. 그냥 당분간 과로하지는 말라고 하더라고요.”
“다행이네. 그럼, 내가 운전할까?”
“에이 팀장님도~ 여기 고속도로 한가운데인데. 걱정하지 마세요. 저 진짜 괜찮아요.”
김성호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웃으며 답했다.
그렇게 도착한 거래처.
이런저런 이야기가 미팅에서 오갔고, 길어진 미팅의 끝은 좋은 결실을 맺을 수 있었다.
물론, 그로 인해 저녁은 자연스럽게 거래처와의 술자리.
“감사합니다. 부장님.”
“감사는 무슨, 자자, 한잔하지. 이렇게 좋은 날에 마시는 술은 술이 아니라 약이야.”
“아, 그렇죠. 제가 따라드리겠습니다.”
다음 날,
어제 술을 많이 마셔서 그런 걸까.
왠지 모르게 컨디션이 안 좋았다.
게다가 묘하게 느껴지는 불쾌감.
‘에이, 주말 동안 푹 쉬면 괜찮아지겠지.’
그런 안일한 생각과 함께 일요일까지 푹 쉬었지만, 딱히 달라진 것은 없었다.
“성호야 밥 먹어라~”
“네. 지금 갈게요.”
마주 앉은 식탁에는 어머니와 아버지가 함께했다.
“너 얼굴이 영 아닌데?”
은퇴 후, 식사때마다 반주를 즐기시는 아버지가 아들의 얼굴을 보며 말했다.
“아 엊그제, 거래처와 술자리가 있었어요.”
“그래? 그럼, 뭐 그럴 수 있지.”
대답을 듣고는 바로 이해한다는 얼굴로 끄덕이는 아버지.
하지만, 어머니의 표정은 조금 달랐다.
“요즘 너무 무리해서 그런거 아니야? 보약이라도 하나 지어올까?”
“보약이요? 됐어요. 여기 영양제 많잖아요. 이거 먹으면 돼요. 그 돈으로 저보다는 아버지나 맞춰 주세요. 저렇게 매일 반주 하시는데.”
“너 어디 아픈 거는 아니지?”
“네. 엄마. 저 병원 가서 검사도 끝냈고, 결과도 아무 이상 없다고 했거든요. 걱정하지 마세요.”
그렇게 저녁 식사가 끝나고,
김성호가 어머니를 도와 식탁을 치우고 방으로 들어가려는데,
어머니가 한 번 더 김성호를 불렀다. 여전히 뭔가 탐탁지 않다는 듯한 얼굴로.
“성호야. 옆 동네 시장 골목 알지?”
“재개발하는 곳이요?”
“그래. 거기.”
“왜요?”
“거기에 허준한의원이라고 있는데, 가서 진료라도 한 번 받아봐. 거기가 아주 용하다고 하더라.”
“에이, 한의원은 무슨. 병원에서 괜찮다고 했다니까요.”
“엄마 말 들으면 자다가도 떡이 나온다니까? 그러지 말고 한 번만 가봐. 너는 모를지 몰라도 엄마는 알 수 있거든. 걱정돼서 그래.”
“알겠어요. 내일 들려볼게요.”
김성호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평생 같이 살아오면서 어머니의 성격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내일 아침에도 별로 안 좋으면 한 번 들려 봐야겠네.’
그렇게 허준한의원을 찾아가게 된 김성호.
한쪽에는 이제 텅 비어 버린 가게들과 반대편에는 대조적으로 좌판을 늘어놓은 가게들이 보인다.
‘이 동네가 개발될 줄이야.’
어릴 적에 시장에서 쌓였던 추억은 잠시, 30대인 그는 현실적인 바람을 떠올렸다.
이거 어쩌면 우리 동네도 재개발되는 거 아니야?
그런 생각과 함께 눈앞에 [허준한의원]이란 간판이 나타났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대기실에 앉아있는 환자들이 가장 먼저 보였다.
‘뭐야, 사람이 많네?’
이어서 느껴진 것은 한의원의 한약재 냄새.
그리고 피아노 소리였다.
“어서 오세요. 처음 오셨죠?”
이어서 데스크의 윤 선생이 방긋 웃으며 맞이했다.
머쓱해진 김성호가 꾸벅 인사를 하며 답했다.
“네.”
“그러면, 이것 좀 적어주시겠어요?”
김성호가 다 적은 종이를 내밀었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네.”
대기실 의자에 앉아 스윽 한번 둘러보니, 전혀 일관성 없는 남녀노소 환자들이 눈에 들어온다.
심지어 그중에는 어린 애도 있었다.
‘저렇게 어린 애가 한의원에 올 일이 있나?’
아, 보약때문인가.
김성호가 어제저녁에 어머니가 말한 보약 이야기를 떠올리자 이해가 되었다.
자신도 어릴 적에 보약을 먹었던 기억이 있기 때문이었다.
참 더럽게 맛없었는데, 그때 사탕만 아니었어도.
“김성호 환자분, 원장실로 들어가실게요.”
“네.”
드디어 김성호의 이름이 불렸고 원장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러자 눈앞에 젊은 한의사가 앉아 웃으며 인사했다.
“어서 오세요. 김성호 님.”
허준의 눈에 퀘스트가 나타났다.
치료해 본 적 없는 병이란 뜻이다.
<옆 동네 효자>
* 진행도 : 0%
* 보상 : 포인트 2000
차트를 보니 교통사고 이후 컨디션이 안좋아서 진료를 보러 왔다고 적혀있었다.
교통사고라.
‘요즘 가장 핫한 진료과목이네.’
“선생님. 안녕하세요.”
“이쪽으로 앉으시죠.”
허준이 김성호의 안색을 먼저 살폈다.
살짝 푸른빛이 돈다. 그리고 피부는 거칠다.
보통은 술을 자주 마시는 사람에게 나타나는 증상으로, 간이나 심장에 이상이 있을 때 나타났다.
“최근에 교통사고를 당하셨다면서요?”
“네. 크게 난거는 아니고, 그냥 가볍게 살짝 쿵? 하는 정도요. 수리비도 안나올 정도였어요.”
“그렇군요. 최근에 이상하게 피곤하다고 적어주셨는데, 이게 교통사고 이후인 거죠?”
“아, 네.”
“조금 자세하게 말씀해 주시겠어요? 교통사고 이후 언제부터 이렇게 피로감이 느껴지셨는지.”
“그러니까 그게...”
허준이 김성호의 이야기를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교통사고 이후에 병원에서 검사를 받았고, 그 이후에 거래처와 술자리가 있어서 과음을 조금 했다고 정리할 수 있었다.
“진맥 좀 잡아 볼게요.”
허준의 말에 김성호가 손을 내밀었다.
눈을 감고 머리를 비운 뒤에, 손으로 맥을 잡았다.
심장과 간장 둘이 약하다.
폐와 비장은 그에 비해서 건강했으나,
가장 큰 문제는.
손끝에서 느껴지는 감각이 마치, 구슬이 굴러가듯이 뛰는 것 같은 맥이었다.
‘활맥?’
활맥은 몸에 담이 많을 때 나타나며, 이 때문에 여성의 경우에는 월경과 밀접한 관계였다.
하지만, 김성호 환자는 남자였으니 결국 담이 많다는 뜻일 터.
한의학에는 십병구담이라는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열 개의 병중에서 아홉 개는 담 때문에 발생한다는 이야기다.
허준이 자리에서 일어나 김성호의 목부분을 손으로 어루만졌다.
손끝에서 단단하게 뭉친 근육들이 느껴진다.
그러다가,
“억-!”
하는 소리와 함께, 김성호가 어깨를 움츠렸다가 폈다.
갑자기 느껴진 자극 때문이었다.
“선생님, 거기가 왜 아프죠?”
“아마 교통사고 때, 여기가 충격을 받은 것 같아요.”
“그래요?”
김성호가 허준을 바라봤다.
어머니가 용하다고 하더니, 진짠가 보네.
허준이 좀전의 상황에 생각에 잠겼다.
살짝 만지기만 했을 뿐인데, 이렇게 반응하는 이유는 교통사고로 인해 생긴 후유증이라 볼 수 있었다.
교통사고 같은 외상으로는 주로 미세 혈관 또는 근육 사이에 피가 뭉치면서 어혈이 발생한다.
비록 아주 작은 충격이지만, 실제로 김성호 환자의 몸에 가해진 충격이 생각보다 강했기 때문에 생긴 것이었다.
이는, 사람이 인지하고 있을 때의 충격과 인지 하지 못할 때의 충격에 따른 차이 때문이다.
사람은 위험을 인지하는 순간 본능적으로 몸 안의 신경부터 근육들이 반사적으로 방어태세를 취하지만, 인지하지 못한 충격에는 이렇게 작은 충격으로도 손상을 입게 되는 것이다.
‘우선 간과 심장을 보하고, 추나와 약침으로 충격을 받은 근육과 신경을 풀어줘야겠어. 그리고 어혈 치료를 위해 탕약으로는 당귀수산을 처방하면 되겠네.’
입원까지는 굳이 필요 없는 듯해 보였다.
허준이 김성호에게 말했다.
“침하고 약침, 그리고 추나랑 탕약 정도면 금방 괜찮아 질 겁니다.”
“그게 전부인가요?”
“네. 혹시 어디 또 아프신 곳이라도 있으신가요?”
“아니요. 사실 입원하라고 하실 것 같았거든요.”
김성호가 오면서 본 2층의 입원실을 떠올리며 답했다.
게다가 요즘 교통사고가 나면 한의원에서 일주일간 푹 쉬다 나오는 경우가 많지 않던가.
물론, 김성호도 쉬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았지만, 엊그제 계약을 맺고 아직 마무리하지 못한 뒷일이 남아 있었다.
괜히 입원한다고 했다가 다른 사람에게 넘어가기라도 한다면, 재주 내가 부리고 실적은 다른 사람이 챙겨갈 테니, 그럴 수는 없지.
“뭐, 빨리 회복하려면 입원 치료가 가장 좋기는 합니다만, 꼭 하실 필요는 없을 것 같아요. 다만, 당분간은 무리하게 일을 하거나 음주는 금지입니다.”
“물론이죠. 선생님.”
허준의 대답에 김성호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그럼, 우선 이리로 누워 보시죠.”
* * *
그 시각.
허준 한의원의 문을 열고 한 여자가 들어왔다.
그녀는 주변을 한 바퀴 둘러보더니,
“흠... 별로네?”
라고 중얼거리며 데스크 앞으로 걸어갔다.
윤 선생이 특유의 편안한 말투로 그녀를 맞이했다.
“어서 오세요. 처음 오시는 거죠?”
“음~ 여기 정우한의원에 계시던 유 선생님 계시죠?”
“유도진 부원장님 말씀하시는 건가요?”
“네. 최미라가 찾아왔다고 전해주세요. 그럼 알 거예요.”
“알겠습니다.”
그렇게 부원장실.
유도진이 최미라를 맞이했다.
“어서 오세요. 사모님.”
“유 선생님. 오랜만이에요.”
자리에 앉은 최미라가 두리번거리더니 유도진에게 말했다.
“그런데, 의외네요? 이런 작은 한의원으로 오실 줄은 몰랐는데.”
“그렇습니까?”
“정우 선생님께서 은퇴하신다는 연락은 받았어요. 그래서 유도진 선생님이 계신 곳을 추천해주셔서 왔는데, 좀 아쉽네요. 유도진 선생님쯤 되면 여기 말고 좀 강 아래로 내려오셔도 충분하실 텐데. 왜 이런 곳에서 계시는 거예요?”
“과찬이십니다. 아직 익혀야 할 게 많습니다.”
“정우 선생님도 아니고, 여기 원장님 젊은 분이라면서요?”
“네. 이허준 원장님이라고. 실력이 아주 좋은 분입니다.”
“그래 봐야 얼마나 좋겠어요?”
최미라의 대답에 유도진의 눈썹이 살짝 꿈틀거렸다.
자신이 인정한 사람이 무시당하자, 기분이 상한 탓이었다.
그 바뀐 분위기에 최미라가 웃으며 말을 이었다.
“농담이에요. 나중에 한 번 진료 받아봐야겠네. 어쨌든, 늘 먹던 거로 부탁해요.”
“진맥부터 잡아 보죠.”
그렇게 진료를 마치고 나온 최미라.
데스크에서 진료비를 결제하고 돌아서 나가려는데,
그때, 한의원 문을 열고 들어온 김정우와 마주쳤다.
“선생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