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1화. 말씀만 하세요 >
61화. 말씀만 하세요
지훈이 엄마의 대답에 김예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그럼, 그러시겠어요? 알겠어요. 바로 접수해 드릴게요.”
그렇게 원장실.
허준이 올라온 차트를 확인했다.
초진 환자가아니라 재진환자인데, 낯선 이름이었다.
유도진 선생님 환자인가 보네.
증상은 아토피 피부염.
‘아토피는 처음인데.’
허준이 퀘스트의 발생조건을 떠올렸다.
한 번도 진료해본 적 없는 질환과의 첫 만남.
그런데 이번에는 재진이다.
어떻게 될까.
OK 사인과 함께,
문이 열리며 안으로 들어온 지훈이와 그의 어머니.
허준이 그 중에 어머니 쪽을 알아봤다.
지난번에 대기실에서 자초지종을 듣고 유도진 선생님도 훌륭하신 분이라고 직접 설명했던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린 아이>
* 진행도 : 87%
* 보상 : 포인트 2000
그 옆에 손을 잡고 들어온 지훈이를 바라본 허준의 눈에 퀘스트가 나타났다.
여기까지는 익숙한 상황이었으나,
‘어?’
퀘스트를 살펴본 허준의 머리에 의문이 생겨났다.
항상 0에서 시작하던 진행도가 이미 87까지 올라가 있었으니 당연한 일.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상당히 파격적이라 할 수 있었다.
모든 질환의 환자를 홀로 치료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었으니까 말이다.
‘그러고 보니...’
의료봉사 때에도 다 같이 진행도를 올릴 수 있지 않던가.
게다가 동상환자들을 다른 선생님들이 치료해도 포인트를 얻을 수 있었지.
허준의 의문이 이어지기 전에,
지훈이 엄마 박수진이 먼저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아, 네. 어서 오세요. 지훈이 어머님. 아토피 때문에 오셨죠?”
“네.”
“일단, 한번 볼까요?”
허준의 말에 박수진이 지훈이의 팔꿈치 안쪽을 보여줬다.
예전에 짓무르고 딱지가 있던 자리에는 어느새 뽀얀 살결이 자리하고 있었다.
“음~ 많이 좋아졌네요?”
“네. 원래 봐주시던 유도진 선생님이 처방해주신 약 먹으면서, 생활습관도 많이 바꿨 거든요.”
“아토피란 것이 면역질환이라 옆에서 관리하기가 어려우셨을 텐데, 어머님이 고생 많으셨겠어요.”
“아니에요. 낫기만 한다면 이런 것쯤은 별거 아니죠. 근데 사실 걱정이 조금 되는 게, 예전에도 이렇게 깨끗하게 나았다가 재발했거든요. 요즘에도 가끔 자기 전에 간지럽다고 긁기도 하고...”
“그렇군요. 제가 진맥 한번 잡아 볼게요.”
허준이 손을 내밀자,
지훈이가 자연스럽게 두 손을 내밀었다.
“착하네.”
그렇게 허준이 지훈이의 진맥을 잡았다.
아이인 만큼 맥에서부터 힘이 넘쳐흐른다.
반대쪽 손의 진맥을 잡아도 마찬가지.
오장육부의 맥들이 굉장히 조화가 잘 되어있고 활기 찼다.
‘유도진 선생님의 탕약이 도움이 많이 된 것 같네.’
그런데도 아직 완치되지 않았다면 남은 것은 하나뿐.
아마도 만성이었던 탓에, 염증을 유발하는 환부의 화기가 덜 빠졌기 때문일 터.
침으로 열기를 빼내는 치료를 해준다면 금방 좋아질 것이다.
강화(降火)에 좋은 족삼리혈과 곡지혈, 그리고 환부의 아시혈에 침을 놓는 것으로 충분하다.
진단을 마친 허준이 입을 열었다.
“약은 아직 남으셨죠?”
“네.”
“그럼 간단하게 침만 맞으시면 될 것 같아요.”
무언가를 기대하던 박수진의 눈에 살짝 실망스럽다는 기색이 돌았다.
내심 새로운 처방이나 약을 말해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 때문이었다.
허준이 그 눈빛에 스쳐 간 그것을 캐치했다.
최근 들어서 한의원에 찾아오는 환자 중에서 가끔 볼 수 있는 눈빛이었기 때문이다.
보통은 아이가 화상을 입고 찾아온 어머님들에게 많이 볼 수 있는 것으로, 반복된 치료와 더딘 과정에 지쳤을 때에 나오는 그런 눈빛이었다.
허준도 그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으나, 과유불급이라는 말은 치료에도 통용되는 말이었으니,
이미 완치가 코앞에 있는 상황에서 굳이 과한 치료를 할 생각은 없었다.
“어머님.”
“네?”
“어머님이 여태 고생하신 것도 알고 초조해하시는 것도 알지만, 그렇다고 제 처방이 달라질 수는 없습니다. 지금 내린 처방이 지훈이에게 있어서 최선이기 때문입니다.”
“아...네.”
속마음을 들킨 박수진이 얼굴을 살짝 붉히며 대답했다.
동시에 허준의 말에 초조하고 불안했던 마음이 사그러 들기 시작했다.
“그럼, 치료실로 가시죠.”
그렇게 치료실.
허준이 침을 뽑아 들었다.
워낙 침을 자주 맞아서였을까.
지훈이가 눈을 똘망똘망하게 뜬 채, 허준의 손을 바라봤다.
“지훈이 용감하네?”
“그럼요. 아영이가 조금만 참으면 된다고 했어요.”
“아영이랑 친구구나?”
“친구는 아니고...”
지훈이의 귀가 달라올랐다.
그 모습이 귀여워 허준이 미소지었다.
“조금 짜릿해도 참을 수 있지?”
“그럼요!”
그렇게 허준의 침이 족삼리 혈로 향했다.
그러자,
“쓰읍-”
하는 소리가 귓가에 들렸다.
지훈이가 내뱉은 소리였다.
“아프니?”
“아니요. 하나도 안 아파요. 뭔가 우물우물한 것 같아요.”
“우물우물?”
“네. 막 이렇게 잡아당기는?”
허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대로 된 표현은 아니겠지만, 침이 제대로 들어가서 생긴 자극이리라.
“금방 낫게 해줄게.”
그렇게 침 치료가 끝나고,
“조금만 그대로 있으면, 간호사 선생님이 오셔서 이거 빼줄거야. 그때까지 가만히 있을 수 있지?”
“네.”
“착하네.”
허준이 지훈이의 머리를 쓰다듬고는 원장실로 향했다.
지훈이가 족삼리와 곡지 그리고 팔꿈치에 박힌 침을 보며 중얼거렸다.
“왜 오늘은 우물우물거리지?”
* * *
지훈이 이후로 몇 명의 환자를 더 본 뒤에야 진료가 마감되었다.
그리고,
“원장님. 준비 하셔야죠.”
원장실로 들어온 김 선생이 눈을 빛냈다.
오늘은 토요일.
진료 이후에는 혜민서 활동이 예정된 날이다.
평소라면 허준을 비롯한 한의사 선생님들과 태용한의원의 두 원장님 그리고 다른 동네에서 함께 하러 오시는 선생님들이 전부였다면 오늘은 조금 달랐다.
바로, 김 선생과 윤 선생이 함께가겠다고 나선 것이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오늘 가는 곳에서는 자신들이 더 도움이 될 거라나?
게다가 목적지는 비밀이란다. 때문에 박 원장과 두 선생님만이 알고 있는 상황.
‘뭐, 사람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으니까.’
게다가 김 선생과 윤 선생같은 베테랑 선생님들이 함께라면 진료의 속도는 더욱 빨라질 터.
유도진 선생님의 빈자리를 채우기에는 모자람이 없을 거라고 생각한 허준이었다.
그렇게 허준한의원의 식구는 혜민서 사람들의 차를 함께 타고 목적지에 도착했다.
한 수녀님이 마중 나와 계셨다.
“어서 오세요. 선생님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인사를 건넨 수녀님의 얼굴이 너무나 밝았다.
여태까지 갔던 곳중에서도 가장 밝은 얼굴이었다고 할 수 있었다.
‘여기는 대체 뭐하는 곳이지?’
“저는 이곳을 담당하고 있는 엘리사벳이라고 해요.”
“안녕하십니까. 저는 김태식이라고 하고, 이쪽부터 이허준 선생, 유도진 선생, 박용준 선생···.”
“와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인사를 끝내자, 고요한 선생이 기다렸다는 듯이 물었다.
“수녀님. 그런데... 여기는 뭐하는 곳인가요?”
조금 오래된 듯했지만, 보기에는 그냥 평범한 옛날 빌라.
심지어 여태까지 갔던 곳과는 다르게 그 흔한 간판이나 명패조차 없었다.
‘혹시, 은퇴하신 수녀님들이 계시는 곳인가?’
얼핏 들었던 이야기를 떠올린 허준.
그러나 눈앞에 나타난 퀘스트를 확인하고는 고개를 저었다.
<책임과 용기>
* 진행도 : 0%
* 보상 : 포인트 1000
* 남은시간 : 8시간 16분
“뭐 하는 곳인지 궁금하시죠? 따라오세요.”
엘리사벳 수녀님이 물음에 대한 답 대신에 앞장서서 빌라로 향했다.
1층의 101호.
능숙하게 비밀번호를 누르고 문을 열자,
그 소리에 방문이 열리며 한 여인이 나왔다.
“수녀님?”
‘아...’
그녀를 본 허준이 바로 알아챌 수 있었다.
이는 비단 허준뿐만이 아니었으니,
그 표정을 본 박 원장이 말을 덧붙였다.
“언젠가 한 번쯤은 이런 곳에 와서 봉사했으면 싶었거든요.”
“박 원장...”
김 원장이 대견하다는 듯이 박 원장의 어깨를 두드렸다.
“오늘 봐주러 오신 선생님들이야.”
“안녕하세요. 김예림이에요. 보시다시피 제가 몸이 좀 불편해서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화장기 없는 얼굴의 그녀.
얼핏 봐도 학생처럼 보이는 앳된 얼굴의 그녀는 불룩한 배를 가지고 있었다.
어린 나이에 엄마의 책임을 안고 있는 것이었다.
‘이래서 퀘스트가 책임과 용기 였던 것인가.’
그렇게 시작된 진료.
빌라를 통째로 쓰는 만큼 인원들이 흩어져 진료를 보기로 했다.
어디에는 이미 아기와 함께 생활하는 곳도 있었고, 어디에는 배가 별로 부어오르지도 않은 초기도 있었다.
허준이 담당한 곳은 101호.
만삭의 임산부들이 모여있는 곳이었다.
눈앞에 앉아 있는 김예림의 진맥을 잡았다.
건강했다. 너무나 건강한 그녀의 모습이 대견하기까지 하다.
진맥을 마친 허준이 조금 조심스럽게 물었다.
“힘들지 않아요?”
“당연히 힘들죠... 몸도 힘들고, 마음도 힘들고. 그래도 포기하고 싶지 않아요. 제 아이니까요.”
대답에서 강한 의지가 느껴진다.
우울증에 대해 걱정을 하던 허준이 괜한 걱정임을 깨달았다.
“그 외에 따로 불편한 곳은 없나요?”
“허리가 조금...”
허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임산부에게서는 자주 나타나는 증상이다.
“이렇게 옆으로 돌아서 누워주시겠어요?”
원래대로라면 엎드려서 진료를 봤겠지만, 임산부는 그럴 수 없다.
허준의 말에 김예림이 옆으로 누운 자세를 취했다.
손으로 허리를 눌러서 통증이 느껴지는 환부를 먼저 찾았다.
굳이 대답을 듣지 않아도 될 만큼, 뭉쳐진 부분을 느낄 수 있었다.
“거기, 거기요.”
갑자기 늘어난 몸무게와 달라진 체형으로 허리를 지탱하고 있는 근육에 무리가 가서 생긴 통증.
허준이 침을 꺼내 들었다.
그러고는 좀 전에 느껴진 부위에 침을 찔러 넣었다.
“잠시만 가만히 그러고 계세요.”
“네. 선생님.”
그렇게 하나 둘, 방을 돌면서 임산부들의 진료를 시작한 허준.
다행스럽게도 대부분 큰 지병 없이 허리나 무릎 등의 통증이었기에 치료에 어려운 점은 없었다.
뒤에서는 김 선생이 침을 뽑으면서 예림이를 비롯한 임산부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무엇이 그리 즐거운지 깔깔대며 웃는 그녀들.
‘저래서 도움이 된다고 했던 건가.’
그때, 엘리사벳 수녀님이 다가오더니 웃으며 말했다.
“보기 좋죠?”
“아, 네.”
“다들 어린 학생들인데, 친구들과 학교도 포기하고 책임지겠다는 일념 하나로 버티고 있는 애들이에요.”
허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것 같네요.”
“오늘 이렇게 와주셔서 정말 감사드려요. 정말 많은 도움이 됐습니다.”
“아닙니다. 혹시, 괜찮으시다면 저희가 종종 들려서 진료해도 될까요?”
허준이 물었다.
한의원에서도 그다지 멀지 않은 거리인 데다가, 진료도 간단하고.
무엇보다 그녀들의 용기에 조금이나마 도움을 주고 싶었다.
“물론이죠.”
엘리사벳 수녀님이 웃으며 대답했다.
그렇게 끝난 의료봉사.
「퀘스트 ‘책임과 용기’를 완수하였습니다.」
「포인트를 1000 획득하였습니다.」
보유 포인트 : 2347
가끔 생각해 본적이 있었다.
왜 하필 나처럼 평범한 인간이 이런 기연을 얻게 된 것일까.
‘책임과 용기라...’
하지만 오늘로써 한가지는 확실히 알 것 같았다.
자신에게도 책임이 뒤따른다는 것을.
허준이 달리는 차 안에서 혜민서의 실무를 담당하고 있는 박 원장을 불렀다.
“박 원장님.”
“네?”
“혹시, 혜민서 활동 키워보실 생각 없으세요?”
“혜민서를요? 지금도 여기저기 연락해오는 곳들이 늘어나고 있는데요.”
“그게 아니라, 제 말은 아예 혜민서의 활동을 다각화하고 싶어서요.”
“다각화라면 어떤 것을 말씀하시는 건지...?”
“치료 자료들과 경험 그리고 교육을 혜민서 활동에 참여하는 선생님들에게 전부 공개하고 싶어요.”
“어? 그거 정말 좋은 생각이긴 한데,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박 원장이 허준에게 되물었다.
“네. 다른 선생님들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해서요.”
“허준 선생님이라면 그렇게 대답할 줄 알았어요. 제가 도와드릴게요. 말씀만 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