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8화. 발걸음을 옮겼다 >
58화. 발걸음을 옮겼다
사람은 누구에게나 똑같은 시간이 주어진다.
하루, 24시간.
허준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그 시간 동안 혼자서 아무리 발버둥을 쳐봐야 진료를 볼 수 있는 환자의 숫자가 제한된 것이 당연했다.
일 평균 40~50명 사이.
그나마 이것도 허준의 진료가 능숙해지고, 환자가 늘어나면서부터 한의원에서 제공하던 핫팩 같은 서비스 개념의 치료를 최소화했기 때문에 가능한 숫자였다.
아무리 노력해도 진료로 얻을 수 있는 포인트에는 한계가 존재한다는 뜻이다.
여기에 더해서 주말의 혜민서 활동과 가끔 한의원을 찾아오는 환자로 인해 발생하는 퀘스트가 전부였는데,
‘지금 이것은...’
그야말로 엄청난 발견이었다.
아니, 엄청나다고만 하기에는 그 표현이 모자랐다.
무한한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스승과 제자 같은 복잡한 관계나 굳이 애먼 돈을 들여서 한의원을 확장시킬 필요도 없었다.
그저 다른 한의사 선생님들에게 치료법을 알려주고, 그 치료로 인해 환자가 질환에서 벗어나면 포인트를 얻을 수 있으니까 말이다.
‘일단은 확인이 먼저겠지.’
방법은 간단했다.
한의원의 화상이나 동상 환자 중에서 완치되는 순간을 확인해 보면 될 터.
한 발자국 나아가서는 같이 치료법을 공유한 혜민서 선생님들이 같은 증상의 환자를 완치할 경우까지 생각하면 됐다.
마침, 오늘 혜민서 멤버들이 모이는 날이기도 하니.
“원장님. 식사 안 하세요?”
그때, 들려오는 김 선생의 목소리.
“아, 죄송해요. 제가 잠시 딴생각을 하느라, 모두 맛있게 드세요.”
“무슨 좋은 일 있으신가봐요?”
“첫 퇴원 환자잖아요. 그냥 조금 더 한의원이 성장한 것 같아서요.”
허준의 말에 옆에 앉아 도시락을 까던 유도진이 답했다.
“앞으로 더 많은 환자들이 도움을 받을 겁니다.”
“그렇겠죠.”
허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유도진 선생님도 앞으로 더욱 열심히 해주시고요.’
그렇게 그날 저녁.
허준한의원에 혜민서 멤버들이 모였다.
“안녕하세요~”
“어서 오세요 선생님들.”
“이거 요새 입원실 생기고 나서부터 같이 점심을 먹질 못하니, 괜히 섭섭하네~”
김 원장이 허준에게 농을 건넸다.
워낙 친하게 지내다 보니 축하한다는 의미를 담은 농담이었다.
“죄송해요. 아직 입원 환자가 적어서 어쩔 수 없어요. 그렇다고 도시락을 버릴 수는 없으니까요.”
“에헤이~ 이 사람이. 뭘, 또 말을 그렇게 해서 나를 나쁜 사람으로 만드나? 입원할 환자가 없으면 그만큼 좋은 거지. 아픈 사람이 적다는 뜻인데.”
“그러게 말이에요. 가끔 허준 선생님을 보면, 다 알면서도 일부러 저렇게 말하는 것 같다니까요?”
박 원장이 김 원장의 대답에 사족을 달았다.
그 말에 허준이 머리를 긁적였다.
“농담이에요. 허준 선생님. 그보다, 고요한 선생님도 계시네요?”
“네. 저도 혜민서 활동에 참여하고 싶어서요.”
“저희야 선생님들이 많으면 많아질수록 좋죠. 그런데 휴무 날에는 어쩌시게요?”
“뭐, 그거는 그때 봐서 생각을 좀 해봐야...”
고요한이 유도진의 눈치를 보며 답했다.
“그래요. 어쨌든 환영합니다. 잠시만요, 어디있더라-”
박 원장이 가방을 뒤져서 뱃지 하나를 건넸다.
혜민서 멤버들이 옷에 달고 다니는 뱃지였다.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선생님.”
“나도 잘 부탁하네.”
“저도 잘 부탁드립니다. 선생님들.”
그렇게 고요한이 혜민서에 정식으로 합류하게 되고 이어서 시작된 교육.
첫 교육은 역시 허준이 맡았다.
그의 보조로는 유도진 선생이 참여했다.
“정말요?”
“네.”
박 원장이 눈을 빛내며 물었다.
유도진 선생님이 맡았던 동상 환자가 오늘 퇴원했다는 말 때문이었다.
“허, 대단하네. 보통 근골격계와 외상 쪽은 허준 선생이 도맡아 하는 줄 알았더니, 유 선생도 장난이 아니구만?”
“그러게요. 원장님 저희도 할 수 있을까요? 배우긴 다 배운 것 같은데...”
그 물음에 허준이 냉큼 끼어들었다.
“물론이죠. 원장님들도 이미 이론적으로는 다 아시잖아요. 진료 과목에 넣어 보시고, 한번 해보세요. 저와 유도진 선생님이 힘껏 돕겠습니다.”
“허준 선생이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우리도 한번 시작해 보도록 하지 뭐. 다음 주부터 광고에 포함할게.”
“그러시죠.”
허준이 만족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 * *
며칠 뒤,
「포인트를 7 획득하였습니다.」
원장실에 앉아있는 허준의 눈에 또다시 메시지가 나타났다.
어제는 12포인트였는데, 오늘은 7포인트다.
허준이 차트를 확인하니, 찾아오는 환자 중에서 유도진 선생님이 가벼운 화상 환자의 진료를 끝낸 참이었다.
이렇듯 포인트가 다른 것은 아마 치료의 난이도에 따라 나뉘는 듯했다.
‘일단 하나는 확실해졌군.’
유도진 선생님과 고요한 선생님이 서로 번갈아 가면서 맡았던 환자였기에, 이로써 둘 중에 누가 치료를 끝냄과 상관없이 포인트를 얻을 수 있다는 것도 확인할 수 있었다.
이제 남은 것은 태용한의원 쪽이었다.
일단은 진료부터 끝내고 생각하자.
허준이 모니터에 올라온 차트를 확인했다.
OK사인과 함께 원장실 문이 열리며 들어온 환자는 최서윤이었다.
* 진행도 : 77%
그녀의 등장과 함께 허준의 눈앞에 진행도가 나타났다.
그런데 문제는,
‘어제는 분명 79%였던 것 같은데?’
엄지와 검지, 중지 손가락의 염증은 진료를 시작한 지 며칠 만에 금세 좋아졌다.
약침과 침 그리고 보약의 효과 때문이리라.
여기까지는 아마 다른 병원에서도 비슷했을 거다.
문제는 여기서부터인데, 진행도가 떨어졌다는 것은 아마도 악영향을 미치는 원인이 제대로 치료되지 않고 있다는 것일 터.
“선생님. 안녕하세요.”
“손은 좀 어때요?”
“많이 좋아졌어요. 통증도 많이 가라앉은 것 같고요. 열도 사라졌고요.”
“혹시, 어제 피아노를 치셨다던가, 오른손을 사용하신 적이 있나요?”
“아니요. 그럴 리가요. 제가 한두 번 겪은 것도 아닌데.”
“그렇군요. 우선 진맥부터 잡아볼게요.”
최서윤이 내민 손을 허준이 번갈아 잡아가며 진맥했다.
손가락 끝에서 느껴져 오는 맥박의 감각.
전체적으로 맥들이 이전보다 활기를 띤다.
보약이 허했던 장기들에 활력을 불어넣었기 때문이었다.
눈을 뜬 허준이 최서윤을 바라봤다.
당연히 그녀의 얼굴도 처음 한의원에 내원했을 때보다 생기가 돌았다.
그런데도 오히려 진행도는 내려가 버렸으니,
그녀가 허리를 곧게 펴고 앉은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아직도 좌우의 균형이 한쪽으로 무너져 있는 모습이 신경이 쓰였다.
중지 손가락과 관련이 있는 수궐음 경락을 위해 흉추의 비틀림을 교정하는 추나 치료도 병행하는 중인데, 아직 자세가 돌아오지 않았다.
“혹시, 치료를 시작한 이후부터 등은 불편하지 않으셨어요?”
“등이요?”
“네. 추나로 인해 어떤 자극이나 열 또는 시원함이라던가요.”
“글쎄요. 아직...”
보통 저정도 상태에서 추나로 교정을 하면 분명히 어떤 반응이 있어야 한다.
습관으로 인해 익숙한 자세를 교정을 한답시고 갑자기 반대로 돌리니 당연한 과정이 필요했다.
근육과 관절 그리고 뼈는 기계처럼 분해했다가 조립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지금 그 과정이 빠져있었다.
추나 치료의 효과가 미약하다는 뜻이리라.
‘아무래도 치료를 위해서라면 욕심을 버려야 할 것 같네.’
“오늘도 그대로 치료하도록 하죠.”
“네.”
이제는 자연스럽게 카이로 베드위로 올라가는 최서윤.
그리고 그런 최서윤을 보는 허준은,
「‘추나 Lv. 1’에 3000포인트를 사용합니다.」
「‘추나 Lv. 1’이 ‘추나 Lv. 2’가 되었습니다.」
[추나 Lv. 2]
- 추나의 효능이 증가한다.
여태까지 봉사와 진료로 모아왔던 포인트를 사용했다.
사실 침술과 진맥을 얻은 뒤로 엄청난 경험을 했기에, 포인트를 모아서 둘 중에 하나에 사용하려고 생각중이던 허준이었다.
침술은 그야말로 진료에 있어서 한 걸음 더 확실하게 나아가는 느낌을 받게 해줬고,
진맥은 여태까지 느껴보지 못한 것들을 느끼게 해주었으니, 어찌 욕심이 나지 않겠는가.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신의 욕심일 뿐, 눈앞에 환자가 더 중요했으니.
[침술 Lv. 6] 필요 포인트 10000
[구술 Lv. 5] 필요 포인트 5000
[탕제 Lv. 3] 필요 포인트 5000
[추나 Lv. 2] 필요 포인트 5000
[진맥 Lv. 1] 필요 포인트 10000
···
보유 포인트 : 1921
‘어차피 언젠가는 다 올려야 하니, 아쉬워 할 필요는 없다.’
이젠 치료에 집중할 차례.
허준이 카이로베드위에 누워있는 최서윤을 향해 말했다.
“이쪽으로 이렇게 누워주세요.”
“네~”
허준의 지시에 따라 최서윤이 자세를 잡았고, 허준이 그대로 손끝의 감각과 적절한 힘 그리고 무게를 실어 힘을 가했다.
덜커덕-
소리와 함께 카이로베드가 움찔거렸다.
손끝에서는 가벼운 도독 거리는 소리가 느껴진다.
‘느낌이 좋네.’
그렇게 이어진 마지막 자세는 앉아서 깍지를 낀 채, 머리 위로 올린 자세.
영화에서 강도가 인질들에게 총을 겨눴을 때 하는 그런 자세였다.
허준이 오른손을 최서윤의 오른팔을 지나 접힌 왼팔의 이두근 상완을 잡았다.
그리고는 앞쪽으로 살짝 구부리고 오른발을 고정시켰다.
“자 하셨던 대로 준비하시고, 숨 내쉬면서 제가 하나 둘 셋 하면 왼쪽 위로 올라와 주세요.”
최서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여러 번 경험이 있던 동작이었다.
“하나, 둘, 셋!”
동시에 허준이 왼손에 힘을 주어 밀었다.
그러자,
우드득-
소리와 함께 손끝에서 느껴지던 최서윤의 단단했던 근육이 한층 느슨해졌다.
그리고,
* 진행도 : 79%
내려갔던 진행도가 다시 올라간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역시 이곳이 정답이었나 보다.
“저... 선생님, 지금 왠지 몸이 나른하면서 힘이 안 들어가는 것 같아요.”
“정상적인 반응입니다. 뒤틀려 있는 곳이 조금씩 돌아오고 있다는 증거거든요. 몇 번만 더 하시면 금방 좋아지실 겁니다. 그래도 평소에 습관이 중요하니 자세에 신경 많이 써주시고요. 그럼 남은 치료를 위해 치료실에서 뵙겠습니다.”
* * *
고급 승용차가 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차 안에서는 흥겨운 아이돌 노래가 흘러나왔고, 보조석에 앉은 김정우가 운전대를 잡고 있는 박진석을 못마땅하다는 듯이 바라봤다.
“무슨 이런 노래를...?”
“허? 자네 이 노래 모르나?”
“내가 이런 노래를 어찌 알겠어? 오늘따라 더욱 자네가 주책처럼 보이는군.”
“사람 참, 또 사연은 모르면서 막말은.”
사연이란 단어를 들은 김정우가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이 말했다.
“설마, 이거 옛날에 자네가 고쳐준 아이가 부른 건가?”
“맞아 그 아이야.”
“그럼, 진작 말을 해줘야지 알지. 그보다 대체 그 병을 어떻게 고친겐가?”
“운이 좋았지. 그래 봐야 뭐하겠나, 다 옛날 일이고 지금은 자네 병 하나 제대로 못 고치는데.”
“이 사람이, 병이 아니라니까 그러네.”
“아니긴, 자네가 할만했으면 한의원을 쉽게 포기했을 리가 있나?”
박진석의 물음에 김정우가 답을 하지 못했다.
“그런데, 자네 무슨 바람이 불어서 갑자기 허준한의원에 가겠다고 한 거야? 나한테 진료 받으러 잘 안 오는 친구가.”
“엊그제 연락을 받았거든.”
“무슨 연락?”
“유도진 선생이 동상 환자를 고쳤다고 말이야.”
“동상? 자네한테 배웠을 리는 없을 텐데.”
“그렇지. 아마 같이 일하는 허준 선생에게 배웠을 거야. 이제야 한 껍질 깨고 나아가기 시작하고 있다는 거겠지. 그래서 겸사겸사 축하도 해줄 겸, 허준 선생 얼굴도 보려고.”
“그 친구는 왜?”
“그래도 내가 시장 터줏대감인데, 화환을 보낸다는 것을 깜빡했거든.”
“에이~ 이 친구가 요즘 친구들이 화환 같은 거 좋아하겠어? 그냥 제일 비싼 보약이라도 한 첩 딱 사주면 되는 거지.”
그렇게 멈춰선 자동차.
차에서 내리는 김정우의 눈에 휑해진 시장 골목이 들어왔다.
“잘 가고 다음에 보세나.”
뒤에서는 인사와 함께 박진석이 떠나갔고,
김정우는 허준한의원이라 적힌 간판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