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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업 하는 한의사-55화 (56/230)

< 55화. 반대일지도 모르잖아 >

55화. 반대일지도 모르잖아

원장실에서 허준이 눈앞에 앉아 있는 환자를 바라봤다.

손목만 내밀고 증상을 맞춰보라던 수수께끼의 주인공 최은정 환자였다.

그녀의 모습은 한의원을 처음 찾아왔을 때와는 완전히 달라져 있었는데, 그중에서 가장 큰 변화는 당연히 눈빛이었다.

탁하고 흐리멍덩해 보였던 눈빛은 어느새 또래의 젊은 친구들처럼 활력을 띄고 있었다.

* 진행도 : 89%

게다가 허준의 눈앞에 나타난 진행도가 무려 89%.

허준한의원을 찾아온 첫 정신질환 환자였던 만큼, 진료에 있어서 살짝 걱정된 허준이었으나 빠르게 올라가는 진행도와 진료 때마다 변해가는 그녀의 태도는 허준의 걱정을 무색게 했다.

허준이 최은정에게 물었다.

“어서 오세요. 잘 지냈죠?”

“물론이죠.”

“요즘에는 어때요? 이전과 비교하면.”

“완전 살맛 나요. 요새는 잠도 푹 자고, 입맛도 돌아와서 밥도 잘 먹거든요. 덕분에 몸무게가 4kg 나 불었다니까요? 선생님, 이러다가 저 돼지 되면 어쩌죠?”

대답을 들은 허준이 피식 웃었다.

당연히 좋은 징조였다.

잘 먹고, 잘 자는 것이야말로 모든 회복의 밑바탕이 아니던가.

침과 뜸 그리고 보약으로 허했던 심장의 기운을 보하고, 머리의 화를 내리고 심장에 따듯함을 불어넣자, 그녀의 몸이 빠르게 선순환구조를 받아들여 회복되어 가는 중이었다.

아마, 얼마 지나지 않아서 언제 그랬냐는 듯이 건강을 되찾게 될 테지.

그런 그녀에게 허준이 웃으며 답했다.

“그럼 다이어트 한약을 드시면 되죠? 제가 싸게 해드릴게요.”

“허? 선생님은 다 계획이 있으셨구나...”

그 모습에 어이없다는 듯이 허준을 바라보며 답하는 최은정.

이제는 밝아진 얼굴로 농담을 하는 그녀를 본 허준의 입가에는 어느새 미소가 지어져 있었다.

지금의 이 순간이 너무나 기분이 좋았다.

질환으로 잃어버린 환자의 일상을 되찾아주는 것.

행복이 뭐 별거 있나.

자연스럽게 나오는 행복한 미소와 함께 허준이 말했다.

“치료실에서 뵙죠.”

그렇게 허준이 최은정에게 침을 놓고 타이머를 맞췄다.

뒤는 선생님들이 맡아 주시겠지.

*   *   *

“어서 오세요~ 처음 오셨으면 이리로 오셔서 접수증을 적어 주시겠어요?”

데스크에서 최서윤을 맞이한 것은 김예진도 윤다희도 아닌 간호사 도영철이었다.

원래는 입원실에서 당직으로 근무하기로 되어 있었지만, 아직 입원실에 기구들이 다 들어오지 않은 데다가, 그래도 기본적으로 한의원이 돌아가는 것 정도는 알아야 했기에 데스크 업무를 교육받던 중이었다.

그런 도영철에게 옆에서 교육을 맡은 김예진이 속삭였다.

“조금 더 친절하게.”

“알겠습니다.”

김예진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데스크를 나섰다.

알람 여러개가 동시에 울렸기 때문이었다.

물론, 저 정도는 윤 쌤 혼자서도 충분하겠지만, 도영철에게 이미 데스크 업무에 대해서 전부 알려준 김예진이었다.

이제는 혼자 업무를 맡는 것만큼 빠르게 익숙해지는 법은 없겠지.

“치료실 지원갔다 올게.”

“네.”

“혼자 접수 할 수 있지?”

“그럼요.”

그렇게 김예진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좀 전에 들어온 환자의 곁을 지나 치료실로 향하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디선가 본 것 같은 얼굴이었기 때문이다.

‘분명히 어디서 본 것 같은데...’

연예인은 아닌 것 같고, 대체 어디서 봤더라.

생각이 이어지기도 전에 귓가에 알람소리가 이어졌다.

그래. 일단 일이 먼저지.

최서윤이 접수증에 이름과 전화번호 그리고 진료를 바라는 부위를 적은 뒤에 데스크의 도영철에게 내밀며 말했다.

“여기요. 그런데, 혹시 여기에 정우한의원에서 근무하셨던 선생님이 계신다던데 맞나요?”

“어... 네.”

도영철이 망설이다가 답했다.

자세히는 모르지만, 오늘 데스크 업무를 맡으면서 얼핏 환자들의 이야기 중에서 정우한의원 대신에 이곳에 왔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때, 분명 어떤 할머니가 정우한의원에서 근무하던 제자가 여기에 있다고 했으니,

‘아마도 다른 데서 찾아올 만큼 유명한 한의원의 제자라면...’

당연히 실력이 가장 좋은 선생님일 터.

도영철이 머릿속에 자연스럽게 허준이 떠올랐다.

게다가 마침, 환자에게 건네받은 접수증에도 손가락이라 적혀 있었으니.

오늘 아침부터 데스크에서 지켜본 결과, 관절 관련 환자는 허준 원장님을 찾았지 않던가.

도영철이 확신을 하고는 허준 원장님 쪽으로 최서윤의 차트를 올렸다.

그때, 김예진과 윤 선생이 치료실 업무를 전부 처리하고 데스크로 돌아왔다.

“어때, 접수는 잘 끝냈어?”

“네. 선배님.”

“그래? 그럼, 한 번 볼까?”

김예진이 새로 등록된 환자를 확인했다.

‘최서윤’이라 적힌 이름.

어디선가 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던 이유를 바로 알 수 있었다.

김예진 자신도 어릴 적 부모님의 권유로 피아노를 오래 쳤던 과거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국내의 무슨 콩쿨에도 몇 번은 나갔었지.

그때, 들었던 이름이 바로 최서윤이란 피아니스트였다.

- 작은 거인 피아니스트 최서윤. 쇼팽 콩쿨 예선 진출.

- 그녀의 선택은 야마하를 재치고 스타인웨이 결정. 과연 어떤 연주를 보여줄지.

- 본선진출 이후 잦은 실수로 인한 탈락. 치명적인 질환이 의심 돼.

···

비록 당시에는 억지로 다니며 익힌 피아노였지만, 그랬기에 김예진의 머릿속에는 눈앞의 여인을 확실히 떠올릴 수 있었다.

이어서 차트에 올라간 환부를 확인했다.

손가락이라 기록된 차트를 본 김예진은 확신했다.

“도 쌤.”

“네?”

“혹시, 좀 전에 접수한 환자분. 다른 이야기는 없었나요?”

“정우한의원에서 근무하셨던 선생님을 찾으셨던 것 같아요.”

“정우한의원?”

“네.”

“그럼, 유도진 부원장님에게 보냈어야지. 왜 원장님에게로 보냈어?”

“아?... 유도진 선생님이 정우한의원에서 오신 분이였어요?”

“그걸 아직도 몰랐어?”

도영철이 말이 이어지기도 전에, 이미 모니터에 나타난 허준의 OK사인.

“최서윤 환자님. 원장실로 가실게요~”

윤 선생이 이미 최서윤을 데리고 원장실의 문을 열었다.

*   *   *

원장실 문이 열리고, 최서윤 환자가 들어왔다.

그녀를 본 허준이 침을 꿀꺽 삼켰다.

<피아노의 숲>

* 진행도 : 0%

* 보상 : 포인트 5000

차트상에 진료희망 부위가 손가락이라고 했었지?

보상으로 적혀있는 포인트가 무려 5천 점이다.

여태 만났던 환자중에서 가장 많은 포인트.

그 말인 즉슨, 그만큼 병세가 어렵다는 뜻이었다.

허준이 들어오는 최서윤에게 인사했다.

“어서 오세요. 최서윤 환자님.”

“안녕하세요.”

허준의 인사에 최서윤도 원장실로 들어오며 답했다.

“손가락 때문에 오셨다고요? 일단 이리로 앉으시죠.”

최서윤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리에 앉으면서 허준에게 물었다.

애초에 그녀는 정우한의원의 김정우 선생님을 찾아온 것이었으니,

“선생님. 혹시, 정우한의원의 김정우 선생님을 아시나요?”

허준이 최서윤의 입에서 나온 뜻밖의 이름에 잠시 망설이다 답했다.

이 시장에서 김정우 선생님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김정우 선생님을 찾아오신 분인가?’

“그럼요. 여기 골목에서 정우 선생님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걸요.”

그러자, 허준의 예상대로 그녀의 말이 이어졌다.

“사실은 제가 정우한의원의 김정우 선생님을 찾아왔는데, 물어보니까 은퇴하셨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그런데 혹시, 실례가 되지 않다면 연락처를 좀 알 수 있을까요? 제가 꼭 좀 진료를 봤으면 해서요.”

“그러시군요. 혹시, 왜 선생님을 찾으시는지 알 수 있을까요?”

“사실은 제가 피아노를 치는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과거형이다.

그말은 지금은 치지 못하고 있다는 뜻일 터.

“그러다가 드퀘르뱅 병이라는 질환을 앓게 되었죠.”

드퀘르뱅 병은 피아노와 관련된 직업을 가진 사람에게 가장 흔한 직업병이다.

요즘에는 키보드와 마우스를 자주 사용하는 편집자나 개발자들에게도 자주 생기는 질환이기도 하다.

원인은 손가락과 손목을 무리하게 사용하여 힘줄을 감싸고 있는 활액막의 내부공간이 줄어들면서 염증과 함께 시작된다.

“정확한 병명을 알고 계신 것을 보니, 다른 곳에서도 치료를 받아 보신 적이 있으신가 보군요?”

“병원도 다녀보고, 한의원도 몇 군데 다녀보고 다 했었죠.”

“그런데도 호전되지 않았나요?”

“아니요. 치료 때에는 괜찮았어요. 그런데, 피아노를 다시 치기 시작하면 얼마 지나지 않아서 다시 시작돼요. 엄지에서 중지까지 손가락의 숫자도 늘어가고요. 정말 끔찍한 경험이에요. 벌써 몇 년 동안을 이렇게 지냈으니.”

그녀의 대답에서 씁쓸함이 느껴져 왔다.

동시에 허준은 몇 가지 힌트를 얻을 수 있었다.

보통 이 질환은 몇 번의 진료로 증상에 금방 호전이 생기고, 관리까지 더해지면 완치에 가까워지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김정우 선생님을 직접 찾아오기까지 한 것은 일반적이지 않은 경우라는 이야기 겠지.

“그래서 한국에 있는 친척분이 추천해주신 정우한의원을 찾아오게 되었어요.”

“그러셨군요. 그럼,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어요? 사실, 저희 부원장 선생님이 김정우 선생님의 제자와 같은 사이신데, 지금 진료 중이시 거든요.”

“그럼요. 그 정도는 충분히 기다릴 수 있어요.”

얼마 지나지 않아 유도진 선생님이 원장실로 들어왔다.

“무슨 일이십니까 원장님?”

“아, 별일은 아니고 환자분께서 김정우 선생님을 찾아오셨다고 해서요.”

“정우선생님을요?”

최서윤이 유도진을 바라보며 말했다.

“제가 꼭 김정우 선생님을 만나 진료를 받아야 할 사정이 있어요. 실례가 되지 않으시다면 선생님 연락처를 알려주실 수 있을까요?”

유도진의 표정을 본 허준이 유도진에게 속삭였다.

‘만성 드퀘르뱅 환자에요.’

유도진도 알고 있는 질환이었다.

그 병이라면 굳이 김정우 선생님을 만날 필요가 있을까.

당장, 자신의 건초염도 완치시킨 한의사가 옆에 서있지 않던가.

체질이나 순환계 등의 질환이라면 잠시 망설였을 테지만, 근골격계만큼은 허준에게 무한 신뢰를 보내고 있는 유도진이었다.

‘게다가 어차피 정우 선생님께서는 지금 진료를 보지 못하시니.’

“선생님께서는 아쉽게도 현재 진료를 보실 수 없는 상황이십니다.”

“그, 그런가요?”

최서윤이 실망한 얼굴로 유도진을 바라봤다.

“이런 말씀 드리기에는 조금 부끄럽지만, 옆에 계신 원장님에게 진료를 한 번 받아 보심이 어떠신지요.”

“원장님이요?”

“네. 제 직업병도 고쳐주신 분입니다. 저도 만성 건초염으로 꽤 오래 고생했거든요.”

“정말 만성 건초염을 치료하셨다고요?”

유도진의 대답에 최서윤이 되물었다.

만성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알았기 때문이었다.

“네. 물론입니다. 환자 앞에서 거짓말은 안 합니다.”

유도진의 대답을 들은 최서윤이 결심한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알겠어요. 원장님께 진료받도록 하죠.”

그렇게 상황 정리가 된 원장실.

허준이 최서윤에게 말했다.

“우선 손부터 한 번 줘보시겠어요?”

문진은 아까의 질의응답으로도 충분했다.

이젠 직접 알아내 볼 차례.

한의학에서 만성질환의 이유 중 하나로 근본 원인을 제대로 치료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본다.

그래서 치료 후에도 계속해서 같은 병이 찾아온다는 것.

몇 년간 이어졌다고 한다면, 분명히 그녀의 몸 어딘가에 문제가 있다는 뜻이다.

허준이 집중하여 진맥을 잡았다.

‘대장의 기운이 허하다. 아니, 대장뿐만이 아니네. 스트레스가 심한지 심장은 오히려 불끈거리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만성의 원인이라 볼 수 없었다.

회복 이후에 다시 시작되는 만성질환.

어쩌면 협착성 건초염이 전부가 아닐 수도 있었다.

그녀에게 들었던 이야기 중에서는 엄지손가락뿐만 아니라 검지와 중지로도 통증이 온다고 했으니.

엄지손가락으로 어깨까지 이어진 경락은 수태음폐경.

폐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경락이며 검지로 이어지는 대장 경락인 수양명대장경과 합쳐져 흐른다. 그래서 짝궁이라고 보는데,

그럼 중지는 무얼까.

그러다가 문득, 한가지 가능성을 생각해냈다.

다른 사람들이 엄지손가락을 우선시하여 만성 드퀘르뱅 병이라 했지만,

‘어쩌면 그 반대일지도 모르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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