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4화. 이름을 안 말해 줬네 >
54화. 이름을 안 말해 줬네
“왜 그러나?”
“아, 아닙니다.”
허준이 악수한 손을 놓으며 답했다.
김정우가 그런 허준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싱겁기는. 어쨌든, 수고하게.”
“들어가십시오, 선생님.”
그렇게 김정우가 돌아서는데,
“혹시, 어디 편찮으시면 한의원에 한 번 들려주십시오. 언제나 환영입니다.”
뒤에서 허준의 말이 이어졌다.
그것을 들은 김정우가 계단을 내려가며 답했다.
“조만간 한 번 들리도록 하지. 이전할 때 화환도 못 보냈으니 말이야.”
* * *
월요일 꽉꽉 들어찬 출근 시간의 지하철 안.
허준의 눈이 지하철에 타고 있는 사람들에게로 향했다.
출근하는 남자와 여자, 그 사이로 등산복을 입은 노부부, 대학생으로 보이는 아이들까지.
이들을 살펴보는 것도 책을 보며 하는 공부와 다를 게 없었다.
키가 크고 하체가 발달했으며 그에 반해 상체는 빈약하다.
이는 아마 대장과 폐가 약한 체질일 확률이 높고, 술과 고기를 좋아하며 반대로 어패류를 잘못 먹으면 배탈이 날 확률이 높겠지.
그렇다고 이 내용이 절대적인 것은 아니었으니, 사소한 것까지 다 알아차리는 것은 보는 것만으로는 불가능한 영역이었다.
그런데도 소방관이 어딘가에 가게 되면 소방 장비들부터 눈에 들어오는 것처럼, 지금의 허준이 보는 세상이 그러했다.
그런 허준의 머릿속에 어제 느낀 김정우 선생님의 맥이 떠올랐다.
선생님의 손이 작았기 때문에 손가락 끝이 살짝 걸치며 느껴진 맥의 박동.
너무나 단편적이고 짧은 순간이었기에 제대로 된 진맥이라고 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악수한 뒤 손의 미묘한 떨림.’
허준의 눈이 그것을 놓치지 않고 캐치한 것이었다.
이는 지금처럼 출퇴근길의 사람들을 관찰하다 보니, 자연스레 몸에 밴 습관과 같은 것이었다.
‘뭐 큰일은 아니시겠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 유도진 선생님과 미리 상의해봐야겠군.’
그렇게 출근과 함께,
진료 시작 전 허준이 유도진 선생님을 불렀다.
이례적인 일이었기에 유도진이 먼저 물었다.
“원장님.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십니까?”
“아, 다른 건 아니고 혹시, 유도진 선생님께서도 알고 계셨습니까?”
“갑자기 무슨 말씀이신지?”
“김정우 선생님 말입니다. 제가 어제 진료 때문에 한의원에 나왔다가 오랜만에 김정우 선생님을 만나게 되었는데. 어디 아프신 게 아닌가 해서요.”
허준의 말에 유도진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당장 본인도 토요일 저녁에 찾아뵙고서야 알았는데 대체 어떻게 그것을 안 것일까.
유도진의 표정을 확인한 허준이 역시 무언가를 알고 있다고 판단했다.
무표정한 얼굴이 특징인 그의 얼굴에 잠시나마 놀라움이 스쳤기 때문이리라.
“김정우 선생님께서 입원실을 보시고 열심히 하라는 의미에서 악수하게 되었는데, 손이 조금 떨리시더라고요. 그래서 혹시 유도진 선생님은 알고 계시는가 해서요.”
굳이 맥에 관해 이야기를 할 필요는 없었다.
어차피 믿지도 않을 테니까 말이다.
유도진이 고개를 살며시 끄덕였다.
“역시 그러셨군요. 큰 병은 아니신 거죠?”
“네. 저도 엊그제야 들었습니다. 선생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검사결과는 딱히 나온 것이 없다고 하시더군요.”
“그렇군요. 다행이네요. 그럼 직업병 중의 하나인 터널증후군 같은 것일 수도 있을까요?”
“그럴 수도 있으시겠죠. 워낙 오랫동안 진료를 봐오셨으니.”
“그러면 유도진 선생님께서 한번 모셔오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제가 도움이 될 수 있으면 좋을 것 같아서요.”
유도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실제로 이곳에서 허준에게 침을 맞기 시작하면서 자신을 괴롭혀오던 엄지손가락의 병이 씻은 듯이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알겠습니다. 제가 한번 말씀드려 보도록 하죠.”
* * *
며칠 뒤,
한의원 진료가 끝난 시각.
“흠... 여기가 맞나?”
혼자 중얼거린 것은 건장한 체격의 남자이자 김예진의 후배 도영철 간호사였다.
그는 허준한의원 입구 쪽 벽에 붙은 진료들을 스윽 하고 훑었다.
한약, 보약, 체질 개선, 노환, 관절 통증, 추나요법 등등이 적힌 스티커들.
겉으로 보기에는 그냥 흔한 동네 한의원 같은 모습이네.
그렇게 문을 열고 한의원으로 들어서자, 따듯한 공기를 타고 한약재 냄새가 코를 찔러왔다.
“왔어?”
“네.”
“오늘은 안 늦었네?”
“당연하죠.”
김예진이 도영철을 반갑게 맞이해줬다.
“잠시만, 기다려. 내가 원장님께 전달하고 올게.”
“알겠습니다.”
그렇게 김예진이 원장실로 사라지자, 도영철이 한의원을 둘러봤다.
한의원에서는 근무한 적이 없으나, 확실한 것은 생각했던 깨끗하고 밝은 느낌의 한의원은 아니란 것이었다.
그때, 탕약실에서 유도진이 나왔다.
도영철이 유도진을 보고 재빨리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유도진도 김 선생에게 오늘 간호사 선생님이 온다고 들었기에 자연스럽게 인사했다.
그때, 원장실 문이 열리며 김예진이 나타났다.
“영철아. 들어가면 돼.”
“네.”
원장실에 들어서자 자신과 비슷해 보이는 키에 하얀 가운을 입은 선생님이 서서 손을 내밀었다.
“이허준입니다. 도영철 간호사님 맞으시죠?”
“네. 도영철이라고 합니다.”
“김 선생님에게 이야기는 많이 들었어요. 이쪽으로 앉으시죠.”
그렇게 시작된 면담.
면담 내용은 딱히 특별한 것도 없었다.
주 업무는 입원실 근무이며 김예진의 말대로 연봉은 후한 편이었다.
인센티브 조건 또한 훌륭했다.
‘웬만한 병원만큼 조건이 좋네?’
보통은 한의원이 병원보다는 급여가 낮은 경우가 많았다.
한의원 입원실의 특성상, 병원처럼 응급환자는 발생하지 않을 테니 업무 난이도는 훨씬 쉬운 상황.
물론, 당직이라는 밤낮이 바뀌는 일을 해야 하지만, 당직이야 도영철에게는 그리 큰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오히려 지금 도영철의 관심을 끈 것은 이 한의원의 원장 이허준이었다.
김예진에게 이야기를 들었을 때부터 이미 조사는 끝낸 상황.
과거 뉴스에서 다큐멘터리에 나온 인터뷰 등등을 확인하고, 이 허준한의원이란 곳의 별점부터 리뷰까지 모두 꼼꼼하게 체크한 도영철이었다.
리뷰 내용의 대부분은 다이어트 한약에 대한 것으로,
아무래도 나이가 드신 분 중에서 리뷰를 쓰는 사람이 워낙 적었으니 다른 질환들에 대한 리뷰가 거의 없는 것이 당연했다.
‘여기도 보나 마나 입원실에 추나 치료로 교통사고 환자를 받아 돈을 벌 심산이겠지.’
한의원에서 근무한 적은 없지만, 간호사 생활을 하다 보면 커뮤니티부터 지인까지 돌고 도는 이야기가 있었으니.
TV에 나와 인기를 끌고 돈을 벌기 위해 확장하는 중이라는 것이 도영철의 판단이었다.
‘어쨌든, 선배 부탁도 있고 하니 기간만 채우고 구급대로 가면 되겠지.’
그나저나 아직도 이해가 안 되네.
대체 선배는 왜 이런 곳에서 일을 하는 걸까.
그때, 허준이 도영철을 불렀다.
“그런데, 도영철 선생님.”
“네?”
“듣자 하니, 예전에 사고 있으셨다면서요?”
“아, 네... 덕분에 조금 빨리 전역했죠.”
“그러셨구나. 수술하신 건가요?”
“네.”
“그럼, 후유증은 없으세요? 보통 후유증을 많이 겪으시던데.”
디스크 수술은 흔히 사고나 과체중 또는 무리한 노동 등으로 인해 디스크(추간판)가 탈출해 신경을 압박하여 통증 또는 신경의 마비를 시키는 증상을 뜻한다.
현대의학적으로의 치료는 수술로 탈출한 디스크를 잘라내는 것.
여기서 몇 가지 문제가 발생하게 되니, 탈출한 디스크는 잘라냈지만 눌린 신경에 의한 근육위축이 제대로 회복되지 않던가, 또는 수술 시에 훼손된 인대나 근육이 제대로 회복되지 않아 후유증이 남는 경우가 많다.
“다행히도 가끔 무리하면 통증이 조금 있기는 한데, 업무에 지장이 갈 정도는 아니라서 괜찮습니다.”
“앞으로 같이 일하게 될 식구인데, 제가 한 번 봐 드릴까요?”
허준의 제안에 도영철이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원장님께서 직접 해주겠다는데 굳이 싫다고 할 필요는 없겠지.
“일단 손목부터 한 번 줘보시겠어요?”
“손목이요?”
“네.”
도영철이 손목을 내밀었다.
허준이 진맥을 잡고 빠르게 판단을 내렸다.
‘신체는 더할 나위 없이 건강하네.’
허준이 한의원을 운영하면서부터 주기적으로 식구들의 건강을 관리하고 있었으니, 도영철 선생은 그중 김 선생과 같은 과라고 봐도 무방했다.
이런 느낌이라면 회복도 당연히 빠를 터. 후유증과 회복의 무게추에 살짝만 힘을 실어주면 될 뿐이었다.
치료는 약침과 추나면 충분하겠군.
“이쪽으로 누워주시겠어요?”
그 말에 따라서 도영철이 카이로베드 위에 누웠다.
허준이 도영철의 골반과 허리를 잡아 무게를 실어 눌렀다.
손끝에서 느껴지는 두둑 거리는 소리와 함께 도영철의 신음이 들려왔다.
“허윽-”
“한 번 더 갈게요. 제가 만져보니 허리가 이쪽으로 조금 틀어진 것 같거든요?”
“네.”
그렇게 10분가량 추나를 마치고 도영철의 눈이 반짝였다.
기분이 좋아졌기 때문이었다.
‘몸이 가볍다.’
“이건 약침인데, 아프지는 않고 살짝 이물감이 느껴질 거에요.”
허준의 말에 자연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며, 도영철이 어느새 자연스럽게 허준을 따라서 치료실로 향했다.
* * *
검은 무대 위.
조명이 켜지고 피아노에 앉아 있는 한 여자를 향한다.
동시에, 첫 건반 소리와 함께 음이 이어지며 부드럽고 아름다운 선율을 만들어 내기 시작하였다.
아름다운 선율은 때로는 과격하고 끊어졌다가도, 다시 이어지면서 풍부해지기도 하는 변화를 보이다가 마침내, 절정을 향하여 치닫고 폭발하듯이 결론을 맺었다.
그러자, 사람들의 환호하는 소리와 함께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
여자는 피아노 의자에서 일어나 관객들에게 인사했다.
그녀도 곡을 치면서 올라온 감정을 삭이며 환하게 웃었다.
그렇게 녹화된 영상은 끝이 났다.
스마트폰으로 그것을 바라보고 있던 여인.
그녀의 손가락이 앞에 있는 건반으로 올라갔다.
시작은 같았다.
부드럽고 아름다운 선율.
곧이어 변화가 시작되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박자를 놓치고 변화는 이어지지 못한 채 멈춰버렸다.
이것이 언제나 문제였다.
피아니스트의 고질병이라 불리는 드퀘르뱅 병.
치료 기간에는 잠시 괜찮아졌지만.
끊임없이 재발하는 이 병과의 싸움.
이 싸움에서 피아니스트 최서윤은 지쳐가고 있었다.
어릴 때부터 피아노를 쳐왔기에 싸움이 길어질수록 손의 움직임이 둔해지고 있다는 것을 몸소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종종 연 단위로도 휴식을 취해봤지만, 이렇듯 다시 시작하려고 연습이라도 하려 하면 얼마 지나지 않아서 어김없이 이 지긋지긋한 녀석이 찾아온다.
그렇게 피아노와 애증의 관계가 되었을 즈음에, 한국에 있는 지인에게 혹시 모르니 정우한의원에 가보라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그래서 정우한의원을 찾아왔는데.
X 표시만 남긴 채, 텅 비어버린 건물만이 남아있는 것이 아닌가.
“저기요~”
최서윤이 건너편에 남아있는 횟집 총각에게 물었다.
오래된 한의원이라고 했으니, 당연히 주변 사람들이 알 거라는 생각에서였다.
“네?”
“혹시, 여기에 정우한의원이라고 있지 않았어요?”
“아~ 정우한의원이요, 있었죠.”
“지금은 다른 곳으로 이전한 건가요?”
“아니요. 김정우 선생님이 은퇴하시면서 사라졌어요.”
“은퇴요!?”
“네.”
생각지도 못한 답변이었다.
기껏 여기까지 찾아왔는데 사라져 버렸다니.
“혹시, 연락처라도 알 수 없을까요? 제가 정말 만나야 하거든요.”
“글쎄요... 아! 시장에서 김정우 선생님 제자라고 불리는 선생님이 저기 한의원으로 가셨는데, 그리로 한 번 가보세요.”
남자가 가리킨 곳에는 [허준한의원]이라는 간판이 적혀 있었다.
“허준한의원이요?”
“네. 가셔서 물어보시면 대답해 주실 거예요.”
“감사해요!”
최서윤이 허준한의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횟집 총각 김진구가 그걸 보며 중얼거렸다.
“아차, 이름을 안 말해 줬네. 뭐, 허준 선생님도 전화번호쯤은 알고 계시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