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3화. 묘한 맥박이 느껴져왔다 >
53화. 묘한 맥박이 느껴져왔다
주차장으로 나온 일행들 사이에서 허준이 허공을 응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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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보다 빨리 끝나서 다행이야. 시간은 여유 있겠어.’
혜민서 활동도 중요하지만, 저녁 7시에 한의원으로 오기로 한 동상환자들의 진료도 당연히 중요한 법.
다음 주 중으로 입원실 공사가 마무리되면, 앞으로는 한결 편하게 진료를 볼 수 있을 거다.
“모두들 수고하셨습니다.”
“선생님들도 모두 수고하셨어요.”
“다들 고생많으셨습니다.”
주차장에 모인 선생님들이 서로 인사를 하는데,
“어떻게? 이대로 아쉬운데 다 같이 저녁이라도 먹으러 갈까요?”
태용한의원의 김 원장이 기분 좋다는 얼굴로 제안했다.
혜민서의 사람도 늘었고, 양로원으로 찾아온 봉사도 보람찼으며 마침 시간도 딱 저녁때가 아닌가.
더해서 오랜만에 시외로 나와 맑은 공기를 마시니, 자연스럽게 촐촐함이 몰려오는 것은 당연한 이치.
그 제안에 박 원장이 가장 먼저 답했다.
“원장님. 저는 안돼요. 여자친구 만나러 가야 해서요.”
“알고 있지. 자네 말고 다른 선생님들 말하는 거야.”
김 원장이 옆 동네에서 오신 선생님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그러자 오늘 처음 오신 선생님을 비롯해 다른 선생님들이 동의한다는 듯이 답했다.
“좋죠. 이왕 여기까지 나온 김에 맛있는 거라도 먹고 들어가죠.”
“저도 괜찮아요.”
“이런 기회가 흔치는 않죠?”
이어서 김 원장의 눈이 허준한의원 식구들로 향했다.
“자네들은 어때?”
“좋-”
고요한 선생이 가장 먼저 답하려다가,
“죄송합니다. 저녁에 진료가 있어서요.”
허준의 대답에 가로막혀 버렸다.
“또?”
김 원장이 되묻다가 무언가 떠올랐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그도 허준에게 동상치료에 관하여 배웠기 때문이다.
“아참, 자네 동상환자들 진료 중이라고 했지. 어쩔 수 없지. 그럼 자네들은?”
“좋-”
“죄송합니다.”
동시에 튀어나온 대답.
이번에는 유도진 선생님의 대답으로 인해서 고요한 선생님의 대답이 짤렸다.
“자네도 시간이 안 되나?”
“아무래도 저도 같이 진료를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응?’
생각지도 못한 대답에 허준이 유도진을 바라봤다.
물론, 그의 옆에 서 있는 고요한 선생도 황당한 상황에 같이 바라보고 있었다.
“제가 혼자서 봐도 되요. 오랜만에 나오셨는데 같이 맛있는 거라도 드시죠.”
“아닙니다. 같이 가도록 하겠습니다. 환자 중에는 제 환자도 있을 테니까요.”
유도진 선생님의 성격을 알기에, 허준이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 번 결정한 일을 번복하는 경우는 흔치 않았으니까 말이다.
덕분에, 둘 사이에서 가장 난처해진 것은 고요한 선생이었다.
잠시 머뭇거리던 그는,
“저도 한의원으로 가봐야 할 것 같아요.”
라는 답을 내뱉었고.
그렇게 박 원장의 차에는 올때와는 다른 멤버로 바뀌어 있었다.
“그럼 선생님들은 다들 한의원으로 바로 가시는 거죠?”
“네.”
조수석에 앉은 허준이 답했고,
피곤한 기색을 내비치는 고요한과 그 옆에 앉은 유도진도 고개를 끄덕였다.
완전히 해가 떨어진 저녁이 되어서야 도착한 허준한의원 옆 골목.
“태워주셔서 감사합니다.”
“별말씀을요. 선생님들 모두 수고하셨습니다.”
“즐거운 데이트 하세요.”
“감사합니다.”
박 원장이 인사와 함께 떠나갔다.
골목길에 남은 것은 허준과 유도진 그리고 고요한 선생.
허준이 둘을 보며 말했다.
“그럼 가볼까요?”
그렇게 허준한의원의 치료실에는 세 명의 한의사와 진료를 받으러 온 환자들이 앉아 있었다.
유도진 선생님과 고요한 선생님이 같이 올 줄은 몰랐는데,
‘이왕 이렇게 된 김에 고요한 선생님에게 진료하는 방법을 알려줘야겠네.’
진료를 바로 시작하기에는 무리가 있겠지만, 유도진 선생이 인정하는 실력 있는 한의사인 만큼 금방 보고 배울 것이 분명했다.
당장, 유도진 선생은 치료에 관한 자료만 보고도 금방 따라했으니까 말이다.
“고요한 선생님.”
“네?”
“혹시, 동상환자 진료해 본 적 있으세요?”
“아니요.”
“잘됐네요. 앞으로 종종 진료하게 되실 테니, 옆에서 잘 봐두세요.”
“네.”
허준이 1번 치료실에 앉아 있는 환자에게 다가갔다.
그 옆으로 고요한이 자리했다.
환부는 새끼손가락 한마디.
검게 죽어있었지만, 아주 가벼운 상태였다.
이미 안에서 새살이 돋아나는 촉감이 느껴지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아마도 특별한 일이 없다면 금방 완치될 터.
허준이 망설임 없이 손가락에 침을 찔러 넣었다.
손가락도 꽤 자극적이지만, 발보다야 훨씬 통증이 약했으니 환자의 입에서 흡- 하는 정도의 소리만 들려왔다.
시침을 할 때마다 들려오는 소리와 함께, 약 10여 개의 침이 손가락 위로 오밀조밀하게 박혔다.
“다 됐습니다. 조금있다가 뵐게요.”
“감사합니다. 선생님.”
“뭘요. 빨리 나으셔야죠.”
인사와 함께 1번 치료실의 커텐을 치고 다음 치료실로 향하는 허준.
허준의 진료를 처음으로 가까이서 지켜본 고요한이 그제야 유도진 선배가 한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검게 죽은 환부로 향한 허준의 시침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빠르다.
이는 그만큼 많은 경험에서 우러나온 것일 터.
그런 고요한의 눈에 허준의 반대편에서 진료를 보고 있는 유도진의 모습이 들어왔다.
어느새 그도 능숙하게 동상환자를 진료하고 있었다.
‘이래서 선배가 의료봉사도 다 공부라고 한 것이었구나.’
왜 유도진 선배님이 갑자기 의료봉사를 다니기 시작한 것인지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좋아 그럼 나도 빠질 수는 없지.
허준과 유도진 두 사람이 침과 뜸을 놓고 고요한이 발침을 거들자, 1시간 정도가 지난 8시가 되니 진료를 마칠 수 있었다.
“수고하셨어요.”
“원장님도 수고하셨습니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어차피 입원실 운영에 들어가면 돌아가면서 해야 할 일인걸요.”
유도진의 대답에 허준이 미소지었다.
처음 한의원으로 올 때는 주 40시간을 정확히 지켜서 원리원칙대로 근무할 거라고 하시더니.
역시 사람 일은 모르는 법이다.
그때, 유도진의 스마트폰이 울렸다.
“잠시만요.”
발신자를 본 유도진이 곧바로 전화를 받았다.
“네. 네. 알겠습니다. 바로 가겠습니다.”
* * *
허준과 고요한에게 인사를 하고 유도진이 향한곳은 자신의 스승과 같은 김정우 선생님 집이었다.
그곳에는 김정우 선생님이 앉아 유도진을 기다리고 있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선생님. 자주 찾아봬야 했는데.”
김정우가 유도진을 바라봤다.
얼굴은 그대로였으나 차가웠던 눈빛 사이에 따스함이 들어서기 시작함을 느낄 수 있었다.
그 모습에 기분이 좋아진 김정우가 웃으며 유도진에게 말했다.
“됐어. 환자들 보느라 바쁘다면서? 게다가 허준한의원에서 일하고 있는 자네들 소식은 여기 앉아서도 매일 들리거든.”
농으로 하는 말이 아니라, 실제로 건물을 담당하는 중개사라던가 환자와 한의사로 오랫동안 연을 맺어 이제는 친구처럼 지내는 시장 사람들이 종종 소식을 보내왔기 때문이리라.
덕분에, 둘의 활약은 전부 알고 있는 김정우였다.
“그런데, 갑자기 무슨 일이신지?”
“아, 별거는 아니고 이것들 좀 자네가 처분해줬으면 해서.”
“그건...?”
유도진이 김정우가 가리킨 곳을 바라봤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종이상자. 하지만, 그 상자 안에 담긴 것이 무엇인지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정우한의원의 짐을 정리할 때, 유도진 본인이 직접 싸놓은 것들이었으니까 말이다.
“맞네. 그동안 정우한의원을 다녀간 환자들을 진료하면서 틈틈이 내가 기록한 것들이지.”
“선생님 갑자기 왜 이것을 저에게?”
유도진이 김정우에게 물었다.
김정우가 대답 대신에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그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아...”
유도진의 입에서 탄식이 흘러 나왔다.
은퇴가 없다는 한의사가 은퇴를 결심하는 이유.
“뭐 그리 놀랄 일은 아니지 않은가? 걱정 말게나. 지병이 있는 것은 아니니까. 그저 나이가 든 탓이지.”
“그래도...”
“그래서 자네에게 주려고 하네. 뭐 싫으면 어쩔 수 없고.”
“아닙니다. 감사하게 받겠습니다.”
유도진이 김정우에게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 모습을 본 김정우의 눈에는 따듯함이 서려 있었다.
* * *
일요일 아침.
알람을 듣고 잠에서 깬 허준이 소파에서 내려왔다.
‘아오 허리야.’
소파 주변에는 온갖 책들이 널부러져 있었다.
한의학책을 비롯해 의학책, 그리고 근육과 장기들에 관한 해부학책 등등이 사방으로 굴러다니는 중이었다.
또, 책 보다가 잠들었나 보네.
기연을 얻고 난 뒤, 새로운 감각에 눈을 뜨면서부터 한의학에 더욱 흥미가 생겼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아무리 허준이 날고 긴다고 해봐야 한의대를 졸업한 지 얼마 안 되었으니, 알아봐야 얼마나 알고 있었겠는가.
허준이 기지개를 키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본래라면 쉬는 날이었지만 동상환자의 치료를 위해서는 출근 아닌 출근을 해야 하는 상황.
개원하고 파리 날리면서 매일 대출이자에, 직원 월급에, 월세에 허덕였을 때는 그저 환자가 많이 와서 돈이나 펑펑 벌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는데.
막상 환자들이 늘어나서 돈이 벌리자 무언가 조금씩 달라지고 있음을 느끼고 있는 허준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돈이 싫은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출근 해야지.
주말이다 보니 평소처럼 지하철이 자주다니 지는 않았기에, 조금 더 일찍 나온 허준.
그를 알아본 시장 사람들이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안녕하세요~”
이제는 시장 골목에서도 일요일에 출근하는 허준을 낯설어 하는 사람은 없었다.
허준이 한의원 문을 열고 원장실로 들어가면서 불을 켰다.
김이 올라오는 모닝 커피를 한 잔 마시고 나니, 환자들이 하나둘 찾아와 차례차례 진료를 시작했다.
침 다음에는 뜸.
뜸 냄새가 한의원에서 폴폴 풍길 때쯤에서야 진료가 끝났다.
“저녁에 뵙겠습니다.”
이제는 밀린 탕약 주문을 해결할 차례.
그전에 잠깐 입원실 상태좀 보고 올까나.
허준이 한의원을 나서서 계단으로 향하는데, 저 앞에 정우 선생님이 서 계신 것이 아닌가.
정우선생님은 건물을 관리해주는 소망부동산의 김영득 실장님과 무언가 중요한 이야기를 하는 듯 했다.
어쨌거나 반가운 마음에 허준이 달려가 인사했다.
“정우 선생님. 안녕하세요.”
“허? 자네 일요일에도 진료하나?”
“아, 환자가 있어서요.”
“그렇구만. 여튼 반갑네. 김 실장 통해서 이야기는 들었어. 2층에 입원실을 만든다고?”
“네.”
“그럼, 한 번 구경이라도 해 볼까?”
“물론이죠.”
그렇게 허준과 김정우가 입원실로 올라갔다.
김정우도 입원실을 직접 운영해본 적은 없었지만, 보고 들은 것이 많은 지라 신경이 쓰였던 터였다.
그런 김정우의 눈이 입원실을 훑었다.
“자네. 이 공사 어디다 맡겼나?”
“아, 제 지인이 이런 쪽 일을 해서 맡겼습니다.”
“호오... 그렇군. 훌륭하네. 이렇게 깔끔하게 공사를 해주는 곳이 있다니.”
건물주인 김정우도 인테리어 공사는 꽤 봐왔기에 단번에 알아차렸다.
이곳에 얼마나 신경을 쓴 것인지.
“구경 잘했네. 아마 이 정도면 환자들도 만족할 걸세. 더 많은 환자가 치료받을 수 있으면 좋겠군.”
“감사합니다.”
“그래. 언제 또 볼지 모르겠지만, 악수나 한번 하세.”
그렇게 허준이 김정우 선생님과 악수를 나눴는데,
‘응?’
허준의 손끝에서 묘한 맥박이 느껴져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