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6화. 이럴 때도 도움이 되는구나 >
46화. 이럴 때도 도움이 되는구나
다음날.
아침 9시 시장을 지나는 허준.
“어? 선생님 오늘 진료 쉬는 날 아니세요?”
허준한의원 건너편의 작은 횟집 총각 강진구였다.
“안녕하세요. 오늘은 잠깐 일이 있어서 들렸어요. 요즘 날씨 추운데 몸은 괜찮으시죠?”
“아~ 그럼요. 하루에 쌍화탕 하나씩 꼬박꼬박 챙겨 먹잖아요.”
횟집 사람들은 어느새 쌍화탕 단골이 되어 있었다.
“그런데, 그 친구는 좀 괜찮아요?”
강진구가 말하는 그 친구는 당연히 박상준이었다.
붕대를 감고 쩔뚝이며 며칠간 한의원을 들락날락했으니, 시장에서 그에 대한 소문이 나는 것은 당연했다.
허준이 대답 대신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한의원으로 들어섰다.
아직 치료가 끝난 것도 아닌데, 섣부른 대답은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그렇게 얼마 지나지 않아서,
“으윽-”
허준의 앞에는 이를 꽉 다문 채,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있는 박상준이 앉아 있었다.
당연히 발가락에 고슴도치 처럼 꽂힌 침도 함께였다.
“잘 참으시네요.”
그 모습에 허준이 박상준을 다독였다.
지금은 세개의 발가락 중에서 중지 발가락만 감각이 돌아온 상태지만, 박상준 씨는 등산으로 단련된 육체를 가진 사람이다.
그 말인즉슨, 일반인보다 훨씬 회복력이 빠르니 앞으로 남은 두 발가락의 감각이 돌아오기 시작하면 지금보다 더 큰 고통을 느낄 수 있게 될 터.
박상준이 눈가에서 눈물을 훔치며 답했다.
아래에서 올라오는 통증에 반사적으로 흐른 눈물이었다.
“어제보다 더 아픈 것 같아요.”
“우리한테는 좋은 징조죠.”
그렇게 침 치료를 끝내고, 허준이 쑥을 조그마하게 뭉쳐서 발가락 곳곳에 올려놨다.
뜸치료는 침만큼 아프지 않았기에 박상준이 한층 여유로운 얼굴로 허준과 이야기를 나눴다.
처음에는 그저 치료에 대한 방식이나 아영이의 치료과정 같은 것을 물어오다가, 이제는 자연스럽게 자신에 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만큼 허준을 신뢰하기 시작했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 진행도 : 3%
그렇게 이야기를 하는 박상준의 옆으로 올라간 진행도가 나타난다.
아영이때도 눈으로 보기에 괴사한 조직이 사라지고 새 살이 돋아나기까지 대략 60% 전후쯤부터 확연한 차이를 보였으니,
‘갈길은 아직 멀었지만, 회복속도는 아영이 보다 더 빠른 것 같아.’
어쩌면 침술의 능력이 올라가서 일지도 모른다는 생각과 함께 오전의 치료도 끝이 났다.
“저녁때에 한 번 더 들리세요.”
“네. 저녁에 뵙겠습니다.”
“참, 이거. 드시고 가세요.”
허준이 따끈하게 덥혀온 쌍화탕을 건넸다.
천천히 쌍화탕을 마시고 박상준을 보내고 원장실에서 쑥뜸의 향기가 익숙해질 때 즈음, 박진석 선생님에게서 전화가 울렸다.
“한의원 옆에 있는 주차장으로 나오시게.”
* * *
허준이 시장의 공영주차장으로 향하자, B 사의 고급 외제차 한 대가 깜빡이를 켜고 있었다.
이거 엄청 비싼데..
운전석에는 박진석 선생님이 보였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허준이 다가가 고개숙여 인사하자, 창문이 열리며 박진석이 말했다.
“일단 타게.”
그렇게 보조석에 탑승한 허준.
차량은 그대로 시장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고급 차라 그런지 승차감이 아주 안락한 느낌이었다.
어느새 한강 변을 달리기 시작한 차 안에서는 생각지도 못한 아이돌 노래가 은은하게 들려왔다.
박 선생님 생각보다 감각이 젊으시구나.
“요새 좋은 일이 있나 봐?”
“네? 저야 뭐. 늘 똑같죠. 진료 보고, 탕약 달이고.”
“그래? 그런데, 어째 자네 얼굴은 갈수록 좋아지는 것 같은데?”
“그, 그런가요.”
딱히 건강을 위해서 뭔가 하는 것도 아닌데, 칭찬을 듣자 허준이 살짝 머쓱해졌다.
매일 챙겨먹는 쌍화탕 때문인가.
박진석이 허준의 얼굴을 한번 쓱- 바라보더니 말을 이었다.
“요새 한의원이 잘돼나 봐? 얼굴이 아주 반들반들한 게 복이 있어 보여. 어르신들한테 아주 사랑받겠어. 그래도 조심해. 자네도 알지? 환자만큼이나 우리 건강도 중요하다는 거.”
“네. 잘 알고 있습니다.”
“젊다고 너무 일만 열심히 하지 말고, 적당히 운동도 하고 스트레스도 풀고 알겠지? 최근에 은퇴한 내 친구가 떠올라서 그래.”
박진석의 말에 허준이 동의한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옛날에 비해 훨씬 발달하여 살기 좋아진 현대 시대에서 만병의 근원은 스트레스라 할정도로 막대한 영향을 끼치지 않던가.
그러고 보니 집에 내려갔다 왔을 때도, 운동 좀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마침 김명훈 씨의 체육관도 있으니,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운동을 다녀봐야겠네.
‘박 선생님은 괜찮으신 건가?’
“그런데, 선생님은 안 피곤하십니까? 봉사도 다니시고 일요일에 강의도 하시는 거면.”
“피곤하지, 대신에 난 평일에 자네처럼 열심히 진료를 보지는 않거든. 내 한의원에 부원장이 몇 명인데.”
“아...?”
깊은 깨달음과 함께, 한강 옆을 달리던 차는 어느새 목적지에 도착해 있었다.
여의도에 있는 작은 빌딩 지하 주차장.
주차를 끝낸 박진석이 허준에게 말했다.
“자네가 오늘 특별히 할 건 없고, 실습시간에 돌아다니면서 제대로 자침했는지, 한 번씩 체크만 해주면 되네. 어때? 간단하지?”
“네. 알겠습니다.”
시대가 시대인 터라 한의사 중에서는 이렇게 일요일마다 강의를 들으러 오는 경우가 흔했다.
당장, 한의대를 졸업한다고 해도 경험이 적을뿐더러, 요즘 시대에는 한의원이 워낙 경쟁이 치열해지다 보니, 아예 특화로 밀고 나가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었다.
때문에, 트렌드에 따라서 그때그때 마다 유행하는 치료법이나 유명한 선생님들의 강의에는 사람들이 몰리는 것이 당연했다.
박진석 선생님을 따라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강의장에 도착하니, 이미 40여 명의 한의사가 강의를 듣기 위해 모여 있었다.
‘굉장히 많네.’
허준도 이런 강의를 몇 번 와본터라, 맨 앞자리에 가서 자리에 앉았다.
그렇게 시작된 강의.
“안녕하세요. 박진석이라고 합니다.”
간단하게 박진석 선생님의 프로필이 스크린에 나타났다.
허준이 스크린에 나타난 박진석 선생님의 프로필을 보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뭐야, 생각보다 더 유명한 분이셨잖아?
이어진 강의 내용은 특별하지 않았다.
침의 과학적 이론부터 시작해 명문, 신유, 대장유의 위치 찾는 법과 임상경험을 풀어내며 환자들의 케이스에 따라서 분류된 것 등등.
이어서 강의를 들으러 온 한의사들 중에서 지원자를 받고, 박 선생님이 직접 자침으로 시범을 보여주며 설명이 이어졌다.
“어때요?”
“오? 매우 부드러워진 것 같습니다.”
그 모습을 본 사람들이 이해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 실습은 점심먹고 하도록 하죠.”
“수고하셨습니다!”
그렇게 순식간에 2시간의 강의가 끝나고 점심시간이 되었다.
“다 아는 거라서 지루했지?”
“아닙니다. 저도 도움 많이 됐어요.”
“점심 먹은 뒤에는 실습시간이라서 덜 지루할거야.”
“네.”
“자, 가지.”
그렇게 맛있는 불고기 정식과 커피까지 마신 뒤에 이어진 강의.
“자, 이제부터 두 명씩 파트너를 이뤄서 실습에 들어갈게요. 그리고 이쪽은 오늘 실습을 도와줄 이허준 선생입니다.”
“안녕하세요 이허준입니다.”
무덤덤한 박수소리와 함께 이허준이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했다.
강의장에 온 대부분은 젊은 이허준을 보며 그저 도우미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다.
젊은 한의사인 데다가 앳돼 보이는 얼굴이 더욱 선입견을 불러 일으켰다.
짝을 이룬 사람들이 각각 순서를 정해 서로의 허리에 침을 놓았다.
박진석 선생님과 눈빛을 주고받은 허준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반대편부터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지나가는 허준의 앞에서 침을 놓은 사람이 엎드려 있는 사람에게 물었다.
“어떠세요?”
“글쎄요. 잘 모르겠는데요?”
“그래요? 제가 잘 못 놓은 것 같은데. 한번 다시 놔봐도 될까요?”
“네. 그러세요.”
그렇게 침을 뽑고 새 침을 손에 든 남자.
그의 손에 들린 침이 다시 허리로 향했다.
“이번엔 어때요?”
“어...”
여전히 자극이 없는지 대답을 망설였다.
그때, 허준이 다가와,
“잠시만요.”
꽂혀있는 침을 잡았다.
동시에 손끝의 감각이 살아나며,
‘방향이 잘못 되었어.’
단번에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허준이 침의 방향을 살짝 돌려 그대로 밀어 넣었다.
“어?”
그러자 엎드려 있던 남자의 입에서 의문이 터져 나왔다.
좀 전까지 느껴지지 않았던 침감이 제대로 느껴졌기 때문이리라.
“어때요?”
“제대로 온 것 같아요.”
“정말요?”
“네. 이런 느낌이었군요.”
파트너의 만족스럽다는 대답에 남자가 허준에게 물었다.
“대체 어떻게 한 겁니까?”
“아, 방향이 살짝 잘못되었더라고요.”
별거 아니라는 듯이 말하는 허준을 본 남자의 눈이 커졌다.
들어갈 때 방향을 본것도 아니고, 이미 들어가 있는 침의 방향을 느꼈다고?
이거야말로 엄청난 감각이 아니던가.
‘그냥 도우미로 데리고 온 사람이 아니었어?’
그가 그렇게 놀라거나 말거나, 허준은 자리를 옮겨 또 다른 사람들의 실습을 도와주기 시작했다.
그럴 때마다, 강의장 여기저기에서 탄성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어느새 한의사들이 돌아다니는 허준을 보며 수군댔다.
“저런 선생 하나 우리 한의원으로 데려가면 장난 아니겠는데?”
“그러게 말이야.”
한의원을 직접 운영중인 원장들과,
“저 사람 누구지 대체? 혹시, 강의는 안 하시려나.”
“나중에 가서 한번 물어볼까?”
젊은 한의사들.
그렇게 강의가 끝나고,
“오늘 수고 많았어. 허준 선생.”
“아닙니다. 선생님께서 수고 많으셨죠.”
강의장을 벗어나려는데,
몇몇 한의사들이 허준에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아무래도 자네 인기인이 된 것 같은데?”
허준의 침을 직접 체감한 한의사들이 몰려든 것이었다.
“선생님께서는 혹시, 따로 강의 안 하시나요?”
“강의요?”
“네.”
“제가 아직 강의할 실력은 아니라서...”
“아, 그러시구나.”
그렇게 젊은 한의사 무리가 강의장을 벗어났고,
또 다른 한의사가 다가와 박 선생님에게 말을 걸었다.
“오늘 강의도 수고하셨습니다. 박 선생님.”
“수고는 무슨, 다 돈 받고 하는 건데.”
“그런데, 이 친구는 누굽니까? 아까 보니 침 실력이 예사롭지 않던데.”
“어쩌다 만난 친구야. 자네는 신경 쓰지 말게.”
“그렇군요.”
남자가 허준을 바라보더니 악수를 청했다.
“백준일입니다.”
“이허준이라고 합니다.”
“혹시, 명함 하나 받아갈 수 있을까요?”
“아, 네.”
허준이 주머니에서 명함을 꺼내 건넸다.
“허준한의원이라. 이름 좋네요. 우리 언제 같이 밥이나 한 끼 하죠.”
백준일이 그대로 강의장을 벗어났다.
그런 백준일을 바라보며 박진석이 혀를 찼다.
“쯧쯧, 저 친구 또 시작이구먼.”
“어떤 분이신데요?”
“이번에 한의원 좀 크게 한다는데, 아마 자네가 마음에 들었나 보지.”
“그렇군요.”
“일단 가세. 자네 내려주고 나도 좀 쉬어야겠어. 참, 이거.”
박진석이 봉투를 하나 건넸다.
“그게 뭡니까?”
“뭐긴? 오늘 자네 일당이지.”
“감사합니다.”
허준이 거절없이 냉큼 봉투를 받았다.
돈 싫어하는 사람이 어디 있던가. 게다가 주말에 일까지 했는데.
봉투를 받아든 손에서 꽤 두툼한 촉감이 느껴졌다.
침술이 이럴 때도 도움이 되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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