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3화. 달라져 있었다 (유료화 시작입니다.) >
43화. 달라져 있었다
내가 처음으로 산에 간 것은 초등학생 때였다.
아빠의 꾐에 넘어가 따라서 간 지리산.
당연하게도 다 큰 성인도 힘든 그 등산이 어렸던 나에게 절대 쉬울 리 없었다.
얼마나 힘이 들던지, 길을 걷다 보이는 온갖 곤충과 민달팽이가 눈에 띌 때마다 저게 뭐냐고 물을 정도였으니까 말이다.
그나마 나에게 힘을 준 것은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들었던 ‘씩씩하네.’ ‘용감하다’, ‘장하다’ 같은 응원이었다.
참, 산장이라 불리는 퀴퀴한 냄새가 나는 곳에서 끓여 먹은 라면도 꿀맛이었지.
그렇게 정상.
“어때, 여기 올라오니까 기분 좋지?”
아빠의 물음에는 끝내 답하지 않았던 거로 기억한다.
정상까지의 여정이 당시의 나에게는 결코 좋은 기억이 아니었으니 당연했다.
그렇게 중학교, 고등학교.
산이 싫었던 나는 그 이후로 다시는 아빠와 산을 가지 않았었는데, 운명의 장난이었던 걸까.
학교에서 등산하러 가기로 한 것은.
한 걸음 한 걸음 발걸음을 옮겨 정상에 다다르니, 자연스럽게 턱밑까지 차올라 있는 호흡과 할리 데이비드슨처럼 쿵쾅거리며 뛰는 심장의 떨림.
그리고 잠시 멈춰 선 사이, 흐르는 땀을 골짜기에서 올라온 시원한 바람이 스쳐 지나갈 때마다 느껴지는 상쾌함.
이 느낌을 한마디로 설명하자면,
‘살아있다.’
여기에 차오르는 갈증을 해결해줄 시원한 물이라도 한잔하면, 그제야 정상에서 보이는 풍경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는데,
그 높아 보이던 빌딩들이 어찌나 이리 작아 보이던지.
이때부터였다.
내가 다시 산에 흥미를 보이기 시작한 것이.
한국에 있는 산이란 산은 전부 돌아다니기 시작했고, 그것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다.
“산이 있기에 오른다.”
등산가 조지말로리의 유명한 말.
그 말처럼 어느새 나는 산에 오르고 있었다.
그렇게 도전한 곳은 초오유.
세계에서 가장 높은 에베레스트의 봉우리 중 하나.
그곳에서 난 잠시나마 세상을 다 가질 수 있었고,
그 대가로 지불한 것이 오른발이었다.
“엄마, 정말 여기가 맞아요?”
박상준의 물음에 김영심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서울에 있는 작은 시장 골목.
그것도 한쪽은 재개발한다며 스프레이로 X 표시를 해둔 빈 점포들이 눈에 들어왔다.
‘정말 여기가 맞나?’
휠체어를 밀고 조금 더 나아가자, 조잡하게 만들어진 [허준한의원]이란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딸랑딸랑-
현관문에 달린 종소리가 울리자, 김예진이 반사적으로 인사를 내뱉었다.
“어서 오세요. 아직 진료 시간이...”
그녀의 앞에 휠체어에 앉아있는 남자와 그 휠체어를 미는 아줌마가 보였다.
한의원을 찾아오는 사람중에서 휠체어를 타고 등장하는 경우가 얼마나 될까.
“여기가 이허준 선생님이 계신 한의원 맞죠?”
“네. 저희 원장님이세요.”
그제야 김예진이 오늘 아침 허준에게 자신을 찾아올 환자가 있을 거라고 언질을 받았던 것을 떠올리고는, 눈앞의 일행이 그 환자임을 눈치챘다.
“이쪽으로 오시겠어요?”
김예진이 앞장서서 원장실 문을 노크했다.
“네~”
“원장님. 아침에 말씀하셨던 분 오셨어요.”
“아, 이쪽으로 바로 안내해 주세요.”
“네.”
그렇게 원장실.
허준이 들어온 두 사람을 향해 밝게 인사했다.
“어서 오세요. 이허준이라고 합니다. 연락은 받았습니다.”
허준이 휠체어 위에 앉아있는 박상준을 바라봤다.
박상준과 함께 나타난 퀘스트와 함께.
<꿈을 잃은 등산가>
* 진행도 : 0%
* 보상 : 포인트 3000
아영이는 1000포인트인데 반해, 3000포인트나 되는 막대한 보상.
이는 곧 난이도를 나타내고 있다는 것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안녕하세요.”
박상준이 그런 허준을 바라보며 무미건조하게 인사했다.
허준이 그에게서 느껴지는 분위기를 날카롭게 읽었다.
시작이 반이라는 말이 있듯이, 모든 일에는 의지가 중요한 법인데, 휠체어에 앉아있는 환자는 이미 의지가 꺾인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에 반해 오히려 휠체어를 밀고 계시는 어머니의 의지가 확고해 보였다.
“선생님께 한번 가보라고 하셔서 찾아왔습니다. 한번 봐주시겠어요?”
“알겠습니다.”
허준이 붕대를 풀어 박상준의 오른발을 확인했다.
발가락 세 개가 벌써 시커멓게 괴사한 모습이었다.
아영이를 처음 봤을 때도 심하다고 느꼈지만, 지금 눈앞에 있는 환자의 발가락은 그에 비해 훨씬 심한 상태였다.
아영이 어머니 김미영 씨에게 찾아갔던 병원마다 ‘절단해야 한다.'라고 들었다고 했는데, 이 정도면 굳이 되물을 필요도 없어 보이네.
과연 내가 치료할 수 있을까.
아니 애초에 이곳까지 찾아온 것을 보면 그야말로 웬만한 곳은 다 돌아다니다 왔다고 보는 것이 맞을 터.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결론은 같다는 뜻이다.
결론을 내린 허준이 고개를 드니, 여전히 무미건조한 눈의 박상준이 자신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이제야 이 청년의 눈빛이 저렇게 된 이유를 헤아릴 수 있었다.
그것은 이미 나름대로의 각오를 한 모습이었다.
“엄마, 이제 그만 가요.”
“좀 기다려봐. 선생님이 아직 아무 말도 안 하셨잖아.”
“에이, 기다릴 필요가 뭐 있어요. 이 작은 한의원에서 뭐 달라지겠어요? 어차피 대학병원에서도 안 된다는데. 저 정말 괜찮다니까요?”
“그래도...”
모자의 대화를 들은 허준은 이 진료의 시작이 환자인 박상준의 마음에서부터 시작이라는 것을 느끼고,
“어머님. 잠시만 제가 환자분과 둘이서 이야기를 좀 할 수 있을까요?”
“물론이죠.”
그렇게 보호자가 나가고 허준과 박상준 단둘이 남은 원장실.
“박상준 님. 등산 중에 다치신 거라고 하던데.”
“네...”
등산이라는 말에 박상준이 움찔거리며 대답했다.
비록 지금 상황이 이렇게 되었지만, 어디까지나 스스로 관리가 미흡해서 이렇게 된 것이지, 단 한번도 등산 때문이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저도 산에 가본적이 있는데, 어찌나 올라가기가 싫던지. 그런데, 이게 또 묘하더라고요. 막상 올라갈 때는 싫은데, 정상에 오르면 또 시원한 상쾌함이 있잖아요.”
“그렇죠.”
박상준이 공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눈앞에 앉아 있는 한의사 선생님보다 그 맛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리라.
“아직도 산 좋아하시죠?”
허준의 물음에 박상준이 잠시 망설였다.
산을 좋아하냐고? 당연했다. 좋아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어쩌면 사랑할지도 몰랐다.
아직도 눈을 감으면 정상에서 내려다본 그 모습이 생생하게 떠오르니까 말이다.
“네.”
대답을 들은 허준이 원장실에 놓인 책상의 서랍을 열어 박상준에게 무언가를 건넸다.
아영이의 치료기록을 모아둔 파일이었다.
“한번 보시겠어요?”
박상준이 허준이 기록해 놓은 아영이의 치료 일지와 사진을 무심하게 한 장 한 장 살피다가 어느 순간부터 눈이 커지면서 서서히 넘기는 속도가 빨라지기 시작했다.
“이게... 정말 가능한 일인가요?”
“장담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가능성은 있죠. 박상준 님이 좋아하는 산에 다시 갈 수 있는.”
그 대답을 들은 박상준의 무미건조했던 눈에 처음으로 생기가 돌았다.
어차피 수술 예약은 되어있었으니, 낮은 확률이라도 만약에 다시 한번 더 그곳에 갈 수 있다면.
“치료... 해보죠.”
* * *
허준한의원의 진료 시작이 되어가는 와중에 데스크의 윤 선생이 치료실을 정리하고 나온 김 선생을 불러 세웠다.
당연히 박상준 때문이었다.
“김 쌤, 지금 원장실에 있는 환자 뭐예요? 휠체어 타고 왔던데?”
“글쎄요. 저도 잘 모르죠.”
“휠체어 타고 한의원에 오는 모습은 처음인데, 괜찮으려나?”
이런 생각은 윤 선생뿐만이 아니었다.
좀 전에 있었던 일을 가장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부원장실에 있던 유도진 선생이었다.
잠시 정수기로 물을 뜨러 나온 사이에 원장실 문틈 사이로 흘러나오는 이야기를 얼핏 들었기 때문이었다.
‘대체 무슨 사이길래, 저렇게 설득까지 하는 걸까?’
유도진의 입장에서는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한의원이란 특성상, 생명이 위급한 상황의 환자는 평생에 한 번 볼까 말까 할 정도다.
그것도 다른 질환으로 한의원을 방문했다가 갑자기 합병증으로 인해 벌어지는 불행한 사고 등에서나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유도진에게는 치료를 받을 생각이 없는 환자를 굳이 저렇게까지 설득하여 치료하려는 허준의 행동이 이해되지 않을 뿐이었다.
생명의 위협이 있는 것도 아니고 요즘 한의원 매출이 낮은 것도 아닌데 말이다.
그때, 허준이 원장실에서 나왔다.
“김 선생님. 박상준 님 진료 접수 해주세요.”
“네. 원장님.”
유도진이 허준을 불렀다.
“원장님.”
“네?”
“혹시, 원장실에 있는 환자와 무슨 관계입니까?”
“관계요?”
“네. 아시는 사이인가 해서요.”
“아니에요. 그냥 동상 환자예요.”
“동상이요?”
“네. 병원에서 수술을 예약했는데, 그 전까지 시간이 조금 남아서 혹시나 해서 찾아왔다고 하더군요.”
유도진이 허준이 말한 수술이 무엇인지 단번에 알아차렸다.
그리고 가장 먼저 든 생각은,
“그래서 치료하시기로 한 겁니까?”
“네.”
“당연히 동의서는 받으셨죠?”
“동의서요? 아니요.”
“원장님. 그러다가 소송이라도 당하면 꽤 골치 아파질 겁니다.”
허준도 유도진이 하는말이 무엇인지 알았기에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괜찮아요. 전 환자를 믿거든요.”
그 말과 함께 유유히 원장실로 걸어가는 허준.
유도진이 그 뒷모습을 빤히 바라봤다.
* * *
허준도 아영이를 치료하면서 화상 환자를 꽤 봐왔지만, 동상환자는 처음이었다.
다만, 극과 극은 통한다고 했던가.
동상과 화상으로 인한 괴사의 치료법은 비슷할 터.
허준이 손에 감각을 집중시키고 침을 꺼내 들었다.
엄지발가락부터 중지 발가락까지 시커멓게 괴사한 모습.
조심스럽게 침을 꽂아 넣었다.
간혹 운동선수나 직업으로 인해 손이나 발에 굳은살이 배긴 곳에다 침을 놓는 경우가 있었는데, 지금 느껴지는 침의 감각과 엇비슷했다.
들어가지만 무언가 둔한 감각.
그러다가 어느 순간 딱딱함이 느껴져왔다. 침이 엄지발가락의 뼈까지 닿은 것이었다.
허준이 고개를 들어 박상준을 바라보니, 박상준이 아무렇지 않다는 듯 그저 자신의 발가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무 느낌 없어요?”
“네.”
‘확실히 심각하네.’
본래 발에 맞는 침은 상당히 아픈 편인데.
아무렇지도 않으니 침을 놓는 허준도 조금 낯선 느낌이었다.
그렇게 허준이 침을 들어 하나 둘 더 꽂기 시작했고, 어느새 발가락 3개에 꽂힌 침이 40개 가까이 되었다.
고슴도치와 같은 모습임에도 박상준은 여전히 아무 느낌도 없다는 듯이 그저 그 모습을 신기하게 바라볼 뿐이었다.
* 진행도 : 0%
혹시나 해서 허준이 진행도도 확인해 봤지만, 역시나다.
하긴, 처음부터 성과를 거두려고 하는 것은 욕심이겠지.
“이렇게 매일같이 하루에 두 번씩 침 치료를 할 겁니다.”
“이게 전부인가요?”
“그럴 리가요. 좀 이따가 침 뽑고 나면 뜸도 뜰 겁니다. 그리고 침과 뜸 치료가 끝나면 우리 선생님들의 안내에 따라서 뜨끈하게 덥힌 쌍화탕도 한 잔씩 마시고 가세요.”
“아, 감사합니다.”
“참, 그리고 이 근처에서 지내신다고 하셨죠?”
“네. 당분간 동네에 계신 친척 집에서 머무르기로 했어요.”
“그러면 통풍 잘되는 신발 신고, 천천히 조금씩 자주 걸어 다니는 것도 회복에 도움이 될 거에요.”
“알겠습니다.”
그렇게 박상준의 첫 진료가 끝났다.
처음 왔을 때와는 분위기가 사뭇 달라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