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화. 끼워주시겠습니까
41화. 끼워주시겠습니까
툭.
통화를 끝낸 김정우가 스마트폰을 내렸다.
그의 건너편에는 도자기로 만들어진 찻잔을 입에 가져다 대고 호로록 소리와 함께 단숨에 차를 털어 넣는 박진석이 앉아있었다.
“차 맛이 좋네.”
그 모습을 본 김정우가 어이가 없다는 듯이 혀를 찼다.
박진석과 알고 지낸 지가 어언 30여 년. 강산이 세 번이 바뀔 만큼 세상은 많이 변했건만, 그의 성격은 처음 만났던 그대로였기 때문이었다.
“쯧쯧, 예나 지금이나 성격하고는, 그리해서 어디 차 맛이나 제대로 느끼겠나?”
“남이야 어떻게 먹든 무슨 상관인가? 맛있게 먹기만 하면 되지.”
“하긴, 그것도 맞는 말이지.”
“그보다 자네는 누구랑 통화했길래 그리 기분이 좋아 보이나? 은퇴하고 새로운 여자친구라도 사귄 건가?”
말도 안 되는 이야기인 줄은 서로 알고 있다만, 이렇게 쓸데없는 이야기로 히죽대는 것도 오랜 친구이기에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유도진 선생에게 걸려온 전화야.”
유도진이란 이름을 듣자 박진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실제로 본 적은 없지만, 벗인 김정우의 입을 통해서 이미 여러 번 이야기를 전해 들은 친구였기 때문이었다.
한의학이란 것은 사실상 한의학적 이론에 근거하여 개개인의 치료와 경험이 더해져서 빛을 발하는 학문인 터라 스승과 제자의 관계가 중요하기 마련인데, 시대가 시대인지라 예전처럼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5년간이나 김정우와 함께 일을 하며 배웠으니, 김정우가 유도진을 제자처럼 생각하는 것은 당연했다.
“무슨 문제라도 있다고 하던가? 자네, 표정을 보니 안 좋은 소식은 아닌 것 같은데.”
“허준한의원에서 일한다고 하더군.”
“이허준 선생이 있는 한의원 말인가?”
“거기밖에 더 있겠나.”
“유도진이란 친구를 보면 자네의 옛날을 보는 것 같다면서?”
“그렇지. 그것도 내가 자네를 만나기 전의 모습 말이야.”
“호~ 차가운 녀석이 따듯한 녀석을 만나겠구먼.”
박진석이 흥미롭다는 눈으로 김정우를 바라봤다.
“그보다, 우리 아까 어디까지 이야기했더라?”
“한방병원.”
“아, 한방병원 이야기하다가 말았지.”
* * *
월요일 아침.
한의원 문을 열자, 김예진 선생이 반갑게 맞이해줬다.
“좋은 아침입니다. 원장님.”
“안녕하세요. 김 선생님,”
“주말 잘 보내셨어요?”
“네.”
“이번에 보니까 의료봉사를 재미난 곳으로 다녀오셔더라고요?”
“어? 그걸 어떻게 아셨어요?”
허준의 물음에 김예진 선생이 스마트폰을 들어 화면을 보였다.
팀 혜민서라 적힌 SNS 계정과 아래에 적힌 댓글들.
- 와 선생님들 감사합니다.
- 여기 후원하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하죠?
- 진짜 애들아 아프지 마라.
···
군부대 특성상 이전과 다르게 사진이 올라와 있지는 않았지만,
댓글 위로 모처의 군부대를 방문했다고 적혀있었다.
‘박 원장인가?’
평소 SNS를 전혀 하지 않던 허준이었기에, 그나마 가장 젊은 나이인 박 원장이 자연스럽게 의심이 되었다.
“원장님 정말 잘하신 것 같아요.”
김 선생이 약간 흥분된 톤으로 말했다.
아참, 김 선생님 예전에 군인이셨다고 했었지.
그래서인지 날카롭다고 생각했던 김 선생의 눈이 그 어느때보다 초롱초롱하게 빛나는 것처럼 보였다.
“이게 군대에 있다 보면, 아파도 아프다고 못 하는 경우가 진짜 많거든요. 그때는 정말 얼마나 서럽던지.”
“그러셨구나, 안 그래도 이번에 가서 저희한테 미리 요청해주시면 종종 가기로 했어요.”
“다행이네요. 저도 한번 불러주세요.”
“그런데, 김 선생님 이건 뭐죠?”
허준이 가리킨 것은 김 선생의 친구 이소연에게 온 메시지였다.
줄임말로 되어있어서 자세한 내용을 확인할 수는 없었는데, 언뜻 보기에도 꽤 화가 나 있는 것으로 보였다.
“아, 죄송해요. 원장님도 제 친구 소연이 아시죠?”
“그때 다이어트 한약 맞춰가신 분 아니신가요.”
“맞아요. 소연이가 나름 SNS 셀럽이라고 폼잡고 있는 중인데, 이번에 다이어트 한약 먹고서 매일매일 몸무게를 재서 올렸거든요.”
“아~ 어쩐지 그래서 몇 분이 찾아오셨구나.”
허준의 머릿속에 최근에 다이어트 한약을 구매해 간 몇몇 환자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SNS를 보고 찾아왔다고 하더니, 이래서였나 보다.
“네. 근데, 그중 몇이 DM으로 욕을 했다나 봐요.”
“왜요?”
“살이 안 빠진다고요.”
허준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다이어트 한약은 모두 제대로 처방했는데, 시장 골목에서는 그리 흔하지 않은 주문이었기에 지금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분명히 알려준 대로 했다면 살이 안 빠질 리가 없을 텐데?
“그래서 소연이가 좀 찾아봤는데, 글쎄, SNS에 스트레스 받는다고 떡볶이먹고, 누구는 치맥 먹고 이런 거 올려놓고 있었대요.”
혹시나 했는데, 역시 나다.
아니, 오히려 몸에는 더 안 좋았다. 다이어트 한약을 먹을 때 술을 마시면 간에 큰 부담을 주게 되니까 말이다.
‘이거 아무래도 조치가 필요하겠는데?’
허준이 다이어트 한약에 대해서 좀 더 체계적인 관리가 필요하다고 느꼈다.
지금이야 레벨이 낮아도 나중에는 결국 올라갈 테니까 말이다.
그것이 찾아온 환자를 위한 일이자, 한의원을 위하는 일이었다.
김예진이 허준의 표정을 살폈다.
무언가 골똘히 생각 중인 모습. 자신의 스마트폰에서 시작된 일이었음을 알았기에,
“원장님께서 별로 신경 쓰지 않으셔도 돼요. 오히려 소연이는 효과 좋다고 약 다 먹기 전에 또 맞추러 온다고 했거든요. 그리고 참, 이건 비밀인데, 주말에 드디어 43kg까지 찍었다고 했어요.”
뜻하지 않게 이소연의 몸무게를 알게 된 허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처음 봤을 때부터 굳이 다이어트 한약을 먹을 필요가 없어 보이더니, 43kg 면 오히려 위험한 수준이 아닌가.
좋아할 거로 생각했던 허준의 표정을 본 김 선생이 재빨리 문제를 인식하고 답했다.
“아, 원장님은 잘 모르시겠지만, SNS 셀럽을 하고 그러려면 사진빨이 중요해서... 원장님도 아시잖아요. 사진 찍으면 옆으로 퍼지는 거. 게다가 이번에 결혼사진 촬영 때는 그야말로 인생을 걸었다나?”
“아~”
그제야 이해했다는 듯이 풀린 허준의 얼굴.
하긴 연예인도 40kg대가 많다고 하니, SNS 셀럽이라고 하는 것도 여간 힘든 일이 아니라 생각하는 허준이었다.
그때, 이제 막 출근을 한 윤 선생이 인사했다.
“어, 원장님, 김 쌤. 안녕하세요~ 일찍 나오셨네요?”
“좋은 아침입니다. 윤 선생님.”
“어서 오세요. 윤 쌤.”
그리고 그 뒤로 유도진 선생님까지 출근.
이렇게 월요일의 진료가 시작되었다.
아영이도 치료하고, 권 여사님도 치료하고, 화상으로 찾아온 초진 환자와 시장의 단골들을 치료하다 보니, 어느새 눈앞에 앉아있는 김명훈.
“안녕하세요. 선생님.”
“어서 오세요. 좋아 보이시네요?”
“어우~ 말도 마세요. 요즘에 아주 바빴어요.”
“다행이네요. 오늘도 허리 치료 받으실거죠?”
“네. 참, 선생님. 이거...”
김명훈이 쑥스럽다는 듯이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체육관 전단지였다.
“제가 이 근처에다가 체육관을 차렸거든요. 마침, 대학교도 근처에 있고 그래서 다이어트 컨셉으로 밀고 나가려고요. 선생님도 언제 한번 오세요. 제가 또 자세 하나는 기가 막히게 볼 줄 압니다. 맘 편하게 들려주세요.”
“잘됐네요.”
대답을 하던 허준의 머리가 번뜩였다.
다이어트 한약을 팔고, 식단 관리는 이곳에서 대신 해주면 어떨까 하는 아이디어였다.
“잠깐, 혹시 그럼 다이어트 프로그램도 따로 진행하시나요? 식단이라던가.”
“물론이죠. 다이어트는 일단 식단이 필수니까요.”
굳이 식단을 따로 관리하지 않아도, 그날그날 먹은 것을 찍어서 올리는 관리만으로도 아침과 같은 일은 벌어지지 않을 터.
“혹시...”
굳이 복잡하게 몇 마디 더 할 필요도 없이 김명훈이 흔쾌히 제안을 받아들였다.
제2의 인생을 살게 해준 데다가, 사업적으로도 서로 윈-윈하는 아이디어였기 때문이다.
그렇게, 허준한의원의 다이어트 한약이 재정비되었다.
* * *
김명훈의 체육관과 연계된 이벤트의 호응은 꽤 좋았다.
부작용과 요요 없이 살을 뺄 수 있다는 점과, 다른 한의원에 비해서 괜찮은 가격 경쟁력.
그리고 무엇보다 매일 사진을 찍어 올리는 식단 케어까지.
이 사소한 것이 별거 아닌 거 같아 보이지만,
본인의 식단을 직접 찍어 올리고 그것을 누군가 관리해준다는 사실만으로도 더욱 열심히 하게 되는 것이 사람의 마음이다.
때문에, 인근 대학교에 다니는 여대생들을 상대로 호응을 얻기 시작했다.
특히, 이제 곧 졸업하고 취업 준비 전선에 뛰어들어야 하는 사람들에게는 더더욱.
“이거, 정말로 효과 있어요?”
“그럼요. 다이어트 하실 때에 진짜 좋거든요. 그거랑 저희 이렇게 간단하게 유산소 프로그램 등록하시면 장담합니다.”
다이어트의 가장 큰 적인 식욕.
이럴 때, 허준의 다이어트 한약이 식욕을 낮춰주니, 유산소 운동과 금상첨화였다.
총명탕 때처럼 하루에 몇십 명씩 폭발적으로 늘어난 것은 아니었으나, 조금이라도 환자 수가 늘어났다는 사실만으로도 허준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이런 상황 속에서 유도진의 눈이 허준을 지켜보고 있었다.
‘환자가 늘어났는데도 여유롭다.’
이윽고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었다.
허준의 진료속도가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빠르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진료를 설렁설렁하는 것도 아니었으니,
대체 저런 경험은 어디서 쌓은 걸까.
그렇게 진료 마감.
조무사 선생님들이 퇴근한 한의원에서 머뭇거리던 유도진이 이허준이 있는 원장실을 찾았다.
‘제대로 확인해 보는 거다.’
같이 근무하는 한의사들끼리 침을 놔주는 것은 흔한 일이었기에 유도진은 허준에게 한 번더 침을 부탁했다.
“오셨어요?”
“네. 잘 부탁드립니다.”
“이리로 오시죠.”
환자라면 응당 치료실로 갔겠지만,
원장실에 있는 탁자 위로 유도진이 손을 올렸다.
지칠 법도 한 허준의 손은 여전히 망설임 없이 침을 꺼내 들고 유도진의 엄지손가락으로 향했다.
그 모습을 놓칠세라 유도진이 두 눈을 부릅뜨고 바라봤다.
그러나 침이 들어가는 것은 순식간.
물론, 허준의 입장에서는 감각을 집중하느라 꽤 오랜시간이 걸린 것 같았지만, 맞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달랐다.
침을 놓은 허준이 유도진의 시선을 느꼈다.
무슨 하실 말씀이라도 있는 걸까.
“유도진 선생님?”
“아, 네.”
“혹시, 무슨 하실 말씀이라도...?”
유도진이 이허준을 바라보며 망설였다.
침을 잘 놓는 법, 즉, 침감을 얻을 수 있는 법을 알려달라고 말해야 했는데, 마음과는 다르게 쉽사리 입이 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뿐, 손에서 느껴지는 이 감각은 유도진에게 빠른 판단을 내리게 하기에 충분했다.
“이허준 선생님.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말씀하세요.”
“침감을 어떻게 얻으신 겁니까?”
생각지도 못한 질문이었다.
물론 이전보다 침을 더 잘 놓게 된 것은 사실이었지만, 자신보다 몇 년은 더 경험이 많은 유도진 선생님이 이런 질문을 할 줄은 생각도 못했다.
그리고 그에 대한 답을 선뜻 말할 수도 없었다.
사실 제가 시스템이 보입니다. 퀘스트를 깨면 레벨을 올릴 수 있거든요. 같은 허무맹랑한 소리로 답해봐야 며칠동안 같이 일하며 쌓아온 호감만 날아갈 터.
“그게...”
그런데 잠깐,
생각해보니 퀘스트는 결국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의료봉사를 하는 것이었으니.
“의료봉사를 하다 보니까 침감을 얻은 것 같습니다.”
대답을 들은 유도진의 머릿속에 ‘환자가 길을 알려 줄 걸세.’라는 김정우 선생님의 말이 겹쳐 지나갔다.
이래서 선생님께서 이허준 선생에게 직접 물어보라고 하신 건가.
이어서 무언가 결심이라도 한 듯 유도진이 입을 열었다.
“그 혜민서라는 팀에 저도 끼워주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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