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이허준 선생님 되시죠
38화. 이허준 선생님 되시죠
직업병이란 것은 하루아침에 생기는 것이 아닌 만큼, 대부분 한 번의 치료로 낫게 할 수 없다.
유도진이 가지고 있는 직업병인 엄지손가락 건염도 이와 마찬가지였으니, 불쾌감이 잠시나마 사라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는 것은 그만큼 허준의 침술이 뛰어나다는 뜻이었다.
‘이건 마치, 김정우 선생님에게 침을 맞은 것 같아.’
김정우 선생님이야 워낙 경험이 많고 실력이 출중하셨으나, 침을 놓은 이허준 선생은 자기와 비슷한 또래였다.
정말로 선생님이 칭찬할 만큼의 천재란 말인가.
지난 5년간 김정우 선생님에게 배워온 자신과 천재라 불리는 허준.
이는 유도진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그때, 치료실을 나서고 있던 유도진의 눈에 원장실로 들어가는 조무사 선생님과 한 여자가 보였다.
“원장님. 면접 보러 오셨대요.”
그러고보니 아까 부원장을 구한다고 했었지.
유도진의 눈이 번뜩였다.
* * *
허준한의원 원장실.
점심시간을 쪼개 면접에 온 한지혜가 의자에 다소곳하게 앉아 있었다.
‘생각보다 규모는 크지 않아서 할 만하겠어.’
부원장으로 경력이 쌓이다 보면 면접을 보러 가서 한의원 규모를 보면 대충 어느 정도 일을 해야 하는지 감이 오기 시작한다.
조금 걸리는 것이 있다면 여기저기에 있는 물품들이 구닥다리느낌이 좀 있다는 것이지만, 그거야 원장의 취향일 수도 있으니.
부원장인 자신은 그저 제대로 된 급여만 받으면 되니 큰 문제는 아니었다.
시장 골목이라 할지라도 시골이 아닌 서울에 있다면 경력을 쌓으려는 부원장들에게는 꽤 인기가 있는 장소.
자신 있는 모습을 보이며 허준과의 면접을 끝낸 한지혜였다.
허준이 원장실에 앉은 한지혜에게 웃으며 말했다.
“수고하셨습니다. 그럼, 제가 따로 연락 드리겠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참, 이거.”
허준이 면접자에게 면접비를 건넸다.
면접비를 꼭 줘야 한다는 법은 없었지만, 많은 한의원에서 통상적으로 이정도는 해줬기에 허준도 준비한 것이었다.
“감사합니다. 수고하세요. 원장님.”
“살펴 들어가세요.”
그렇게 점심시간을 이용한 두 명의 짧은 면접이 끝나고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원장실 문이 열리면서 김 선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원장님.”
“네?”
“선생님께서 면접을 보고 싶으시다고 하셔서...”
“면접이요?”
오늘은 두 명만 오기로 되어있었는데,
대체 누구지?
“제가 여기 계신 선생님께 부탁했습니다.”
원장실 문이 열리며 나타난 사람은 유도진 선생님이었다.
허준이 놀라 눈이 커졌다.
갑자기 유도진 선생님이 왜 오신 거지?
“갑자기 면접을 보시겠다니요? 아까는...”
“침을 맞으면서 생각해보니 생각이 조금 바뀌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성격상 오래 쉬지 못하는 성격이기도 하고요. 아시잖아요, 오래 쉬면 손에 감각 떨어지는 거.”
허준이 유도진의 무표정한 얼굴을 바라봤다.
정우한의원의 유도진 선생님이라면, 지금 상황에서는 그야말로 최고의 선택이라 할 수 있었다.
실력도 실력이거니와, 정우한의원으로부터 넘어온 환자들을 생각하면 환자들의 반발도 없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역시나 가장 큰 문제는 급여가 아니겠는가.
아무리 최근에 환자들이 몰려왔다고 해도, 유도진 선생님 같은 분과 함께하려면 부원장이 원장보다 급여가 더 많아지는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상황이 될지도 몰랐다.
이번에 이전하느라 쓴 돈이 얼마인데.
“제가 선생님 같은 분과 같이 일하기에는 아직 상황이 여유로운 편은 아니라서...”
“괜찮습니다. 어차피 일요일은 쉬는 날이니 주40 시간에 업계 평균만 맞춰주시고, 그 이상은 매출에 따른 인센티브로 가시죠.”
업계 평균에 매출에 따른 인센티브라면 앞서 면접을 본 지원자들에 비해서 그리 큰 부담은 아니다.
이걸 거절하면 바보겠지.
허준이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내밀었다.
“좋습니다. 내일부터 함께 하시죠.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유 선생님.”
“잘 부탁드립니다. 이 선생님.”
허준과 유도진이 손을 맞잡으며 악수했다.
* * *
다음 날 아침.
허준한의원 진료 시작 전.
정우한의원에도 늘 진료시작 30분전에 출근하던 습관으로 유도진이 문을 열었는데,
자신보다 빨리 도착해 있는 선생님이 보였다.
“유도진 선생님?”
“안녕하세요. 유도진입니다.”
“김예진 이라고 해요. 잘 부탁드려요.”
김 선생님이라, 탕약 담당이신가?
정우한의원에서는 퇴근 전에 탕약기를 돌리고 아침 출근과 함께 탕약을 담당하는 간호조무사 선생님들이 계셨다.
“탕약을 담당하고 계시나 보군요?”
“네? 아니요. 우리한의원에서는 원장님이 직접 달이세요.”
“이허준 선생님이요?”
“네.”
유도진이 조금 놀랍다는 눈으로 김 선생을 바라봤다.
그럼 이 선생님은 대체 왜 이렇게 일찍 나온 걸까.
“참, 부원장실로 이쪽을 쓰시면 된다고 하셨거든요.”
구조가 조금 복잡하게 되어있는 것으로 보아, 원장실을 반으로 쪼개 만든 방인 것 같았다.
“알겠습니다.”
역시 급조된 방답게 딱히 뭐가 많지는 않았으나, 그럼에도 최소한으로 있어야할 것은 전부 놓여있었다.
그렇게 짐을 풀은 유도진과 얼마 지나지 않아, 출근한 허준을 필두로 허준한의원의 사람들이 데스크 앞에 모였다.
“유도진이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윤다희입니다. 앞으로 잘해봐요.”
“여기 유 선생님께서는 앞에 정우한의원에 계셨던 선생님이에요. 그러니 오시는 환자분들께 따로 설명 안 하셔도 괜찮을 거예요. 참, 유도진 선생님한테는 추나를 제외하고 바로바로 차트 올려주시면 될 거예요.”
“알겠어요. 원장님.”
허준한의원의 새 멤버와 함께 진료가 시작되었다.
환자들도 처음에는 부원장실로 가라는 안내에 못마땅해하다가 유도진 선생님이라는 것이 알려지자 납득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유도진 선생이 이리로 왔다고?”
“네. 어머님.”
“그 정우한의원의 유 선생 말하는 거지?”
“네, 맞아요.”
“그 선생이 말은 없어도 재주는 확실하지.”
이는 부원장실을 찾는 환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어? 유 선생이 이리로 왔네?”
“반갑습니다.”
“아이고 잘됐네. 여기 허준 선생과 유 선생이 한의원에 모여있다니.”
허준한의원은 유도진 선생님이 오신 뒤로 빠르게 정상화되기 시작했다.
가뜩이나 정우한의원에 다니던 환자들이 넘어왔으니, 유 선생을 아는 이들도 많았을뿐더러, 그의 실력 또한 출중했기 때문이리라.
덕분에 허준을 과도하게 몰아붙이던 살인적인 스케쥴이 조율되었다.
허준한의원을 찾아온 모든 환자가 진료를 받을 수 있게 되었고, 허준도 이전과 같이 남은 시간에 진료에 필요한 공부를 할 수 있게 된 것이었다.
한의사 Lv. 1
[침술 Lv. 5] 필요 포인트 5000
[구술 Lv. 5] 필요 포인트 5000
[탕제 Lv. 3] 필요 포인트 5000
[추나 Lv. 1] 필요 포인트 3000
[진맥 Lv. 0] 잠김
···
보유 포인트 : 897
허준의 첫 번째 목표는 진맥의 잠금 해제.
추나때와 마찬가지로 분명 공부를 하다보면 비밀을 알 수 있을 터.
참, 아직 진료 안끝났지.
그렇게 유도진 선생님과의 첫 출근과 진료 마감.
윤 선생이 무언가를 기대하는 눈빛으로 허준을 바라봤다.
“원장님?”
“죄송한데, 회식은 다음에 하죠.”
“또요?”
허준도 회식이 싫은 것은 아니었으나,
주문받은 다이어트 한약을 달여야 했다.
“그럼, 윤 선생님이 다이어트 한약 달이실래요?”
“아닙니다. 역시 직장인은 칼퇴죠. 선생님들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내일 봬요!”
윤 선생이 가장 먼저 퇴근했고,
“원장님. 청소 끝냈어요. 오늘도 수고하셨어요. 내일 뵐게요.”
그다음이 김 선생.
그리고,
“선생님은 퇴근 안 하십니까?”
유도진이 가방을 들고 탕약실을 방문했다.
탕약실에는 허준이 다이어트 한약을 위해 약재들을 꺼내는 중이었다.
“아, 내일 나갈 탕약을 좀 달여야 해서요.”
“평소에도 이렇게 혼자 남아서 달이시는 겁니까?”
“뭐, 그렇죠?”
허준이 대답을 하면서 손에 쥔 약재들을 장갑 낀 손으로 탕약 보에 넣었다.
그 모습에 유도진이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허준을 바라봤다. 일반적으로 한의원에서는 한의사가 처방을 내리면 조무사 선생님들이 재료들을 비율에 맞춰서 달이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재료들을 저렇게 손으로 넣는다고?
“아, 대략 비율이랑 계량은 다 맞춘 거예요. 달이다 보니까, 이상하게 손으로 하는 게 더 익숙해져서요.”
탕약 업무를 받은 것이 없는 유도진이었기에, 고개를 꾸벅이고는 그대로 몸을 돌려 한의원을 나섰다.
첫 출근임에도 허준한의원은 정우한의원과 비교해서 이상한 점이 많다고 느낀 하루였다.
* * *
시장 골목에 새로운 변화의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경희한의원 가봤어? 거기 이름 바뀌었던데?”
“정말? 그럼, 경희한의원 사라진 거야?”
“아니야, 이름만 태용한의원으로 바뀌고 선생들은 그대로더라고.”
경희한의원의 원장 김태식과 박용준이 경희한의원을 인수한 것이었다.
그리고,
“자기들 소문 들었지? 정우네 있던 유 선생이 허준한의원으로 들어간 거.”
“정말로?”
“응, 내가 어제 가봤는데 진짜더라고.”
“잘됐다. 안 그래도 난 유 선생이랑 잘 맞았는데.”
“유 선생이 실력은 좋은데, 난 아직도 말투가 적응이 안 된다니까?”
“그건 그래. 그래서 난 허준 선생이 더 좋은 것 같아.”
“자기들 내가 갑자기 궁금해서 그러는데.”
“또 뭔데?”
“허준 선생이랑 유 선생 둘 중에 누가 더 침을 잘 놓을까?”
“그걸, 말이라고. 당연히 유 선생아니겠어?”
“그렇겠지? 하긴, 정우 선생님 밑에서 배운 게 몇 년인데.”
이렇듯 사람들은 둘의 진료를 보고 재미난 구경이라도 펼쳐졌다는 듯이 떠들어댔다.
마치 따듯한 불과 차가운 얼음을 보는 듯했기 때문이리라.
“할머니, 조금만 참으세요~ 괜찮아요~ 아이고 다됐다~”
허준이 환자를 달래가며 침을 놓으면,
그 옆의 베드에서는,
“조금 아플 겁니다.”
차가운 목소리가 공간을 메웠으니 말이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유도진 선생을 아는 환자들에게는 익숙한 모습이었기에, 딱히 컴플레인이나 불만이 들어오지는 않았다.
허준한의원 출근 3일 차 토요일.
아침 일찍 나온 유도진이 한의원으로 들어서는데,
“어서 오세요. 유 선생님.”
김 선생 반갑게 인사를 건네왔다.
“좋은 아침입니다. 김 선생님.”
며칠간 지켜본 바에 의하면 김 선생님이란 분은 매일 이렇게 일찍 나와 있었다.
그렇다고 급여를 더 주는 것도 아닐 텐데, 대체 뭐 하는 사람일까.
현관문이 열리며 허준이 나타났다.
“좋은 아침입니다~”
“안녕하세요 허준 선생님.”
미스터리는 이것만이 아니었다.
점심시간이 되면 간혹 태용한의원의 다른 한의사 선생님들과 같이 밥을 먹기도 했다.
뭐 같이 의료봉사팀을 만든 자매결연 사이라니 그러려니 했지만, 이 또한 유도진에게는 굉장히 낯선 일임이 분명했다.
게다가 오늘은 의료봉사를 간다지?
진료가 끝나고 혜민서 멤버들이 차를 타고 이동해 도착한 곳은 한적한 시골 마을이었다.
서울에 살던 사람들이었기에, 읍, 면, 동, 리 중에 리에 해당하는 작은 마을을 직접 본적이 별로 없었으니,
“정말 여기에요?”
“네. 박진석 선생님께서 알려주신 곳이 이곳이 확실한데...”
마을에는 약국과 편의점 그리고 작은 중국집과 치킨집하나가 달랑 있었다.
박진석 선생님은 대체 왜 이곳으로 오라고 한 걸까.
그렇게 주변을 두리번거리는데,
허준의 핸드폰이 울렸다.
“여보세요?”
“의료봉사 팀 혜민서의 이허준 선생님 되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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