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몸짱이라도 되어야 하나
33화. 몸짱이라도 되어야 하나
“허-”
쌍화탕을 마신 최인호의 입에서 짧은 탄식이 흘러나왔다.
좀 전까지 온몸이 무겁게 느껴질 만큼 피로한 느낌이었는데, 지금은 어느 정도 움직일 의욕이 생긴 탓이었다.
이거 이전보다 훨씬 좋잖아.
대체 뭐로 만든 거지? 성분분석이라도 의뢰해 봐야 하나.
잠시간의 고민은 결국 한가지 결론으로 좁혀졌다.
그래. 그것보다는 비밀을 캐서 사용하는 편이 좋겠지.
한의사로 활동한 지 무려 10년이 넘은 최인호다.
탕약실에 들어가서 탕약기 안에 있는 재료들만 한번 싹 보면 바로 정체를 알 수 있을 터.
좀 더 적극적으로 친분을 다져봐야겠군.
몸은 좀 피곤하지만, 그것이 대수랴.
* * *
일요일 아침.
* 진행도 : 67%
허준의 앞에 침을 맞고 있는 아영이의 손이 놓여있었다.
가속이 붙어서 빠르게 올라가던 진행도는 65% 전후로 다시 느리게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회복이 멈췄다는 것은 아니었다.
이미 괴사하였던 조직은 전부 재생되었고, 손을 움직일 수 있을 정도로 회복되어있었다.
다만, 아직은 화상의 흉터가 남아 있는 수준이었다.
“선생님. 주말마다 정말 감사드려요.”
“별말씀을요. 어차피 일이 있어서 한의원에 나온 김에 겸사겸사하는 거죠.”
월요일까지 달여야 할 총명탕 때문에 이른 아침부터 한의원에 들른 허준이었다.
“그래도 선생님이 신경 많이 써주셔서 이렇게 아영이가 회복할 수 있었어요.”
“아닙니다. 아영이와 어머님이 잘 따라와 주신 덕분이죠.”
“제가 뭐라도 해 드리고 싶은데...”
“괜찮습니다. 진료비는 이미 다 받았으니까요. 혹시. 괜찮으시다면 카톡에서 주고받은 사진들을 사용해도 될까요?”
“물론이죠.”
김미영이 흔쾌히 대답했다.
어떤 용도로 사용할지는 모르겠으나, 그것이 대수겠는가.
그런 김미영의 눈에 허준의 옷차림이 평소와 다른 것을 보고 물었다.
“선생님 그런데 오늘 중요한 약속이 있으신가 봐요?”
“아, 점심때 친구 결혼식이 있어서요.”
“아~”
일요일에 정장을 입고 돌아다니는 사람은 보통 교회에 가거나, 결혼식 둘 중 하나가 아니던가.
김미영이 단번에 납득했다.
그렇게 아영이의 진료와 총명탕까지 한번 달이고 난 뒤, 강남에 있는 호텔의 결혼식장으로 향한 허준.
‘4층이라고 했지?’
4층으로 올라가자,
저 멀리 한의대 동기 김재현의 이름 석 자가 적혀 있었다.
허준이 그리로 가니, 김재현이 허준을 알아보고 손을 흔들었다.
“와줘서 고마워.”
“당연히 와야지. 결혼 축하한다.”
“고마워.”
“애들은?”
“아마 안쪽에 있을걸?”
“그래? 있다가 보자.”
“오케이.”
가뜩이나 정신없는 신랑의 시간을 뺏을 수 없는 일.
허준이 축의금을 내고 식장 안으로 향했다.
‘오랜만에 애들 얼굴 좀 보겠네.’
안으로 들어서자, 한쪽에 낯익은 얼굴들이 모여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었다.
허준의 한의대 동기 친구들이었다.
통통하고 안경을 쓴 최재민, 잘생긴 김영훈 그리고 피곤함에 쩔어 있는 박수민까지.
“어? 야 허준이 왔다.”
“오~ 왔어?”
“오랜만~”
세 명의 각양각색의 친구들.
“뭘 그렇게 이야기 하고 있었어?”
“우리가 모여서 할 이야기가 뭐가 있겠어.”
그랬다.
20대 때까지만 하더라도 여행이나 게임, 스포츠 또는 여자친구 등의 주제가 주를
이뤘다면, 이제 30대가 넘어선 우리들의 이야기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그래서 요즘 넌 어때?”
“그냥 뭐 이제 겨우 자리 잡았지.”
“올~ 팁 없냐? 나도 슬슬 개원 준비해야 하는데.”
“야, 너가 몰라서 그렇지. 그냥 월급 받는 게 속 편하다니까?”
재민이의 부모님도 한의사로, 아버지 아래에서 일하다가 1년 전쯤에 독립해 나와서 한의원을 운영 중이었다.
재민이가 영훈이를 위아래로 훑더니 답했다.
“딱 보니까, 너는 다이어트 특화로 밀고 나가야겠다.”
“다이어트?”
“응. 이게 요즘에는 한의원도 아예 컨셉을 잡아야 하거든. 넌 우리 중에서 그래도 기럭지가 좀 되는 편이잖아? 개원 자리 알아보러 다니면서 PT 끊고 운동 다녀서 몸짱으로 밀고 나가는 거지.”
“몸짱? 그게 진짜 효과가 있어?”
“당연하지. 봐봐. 다이어트 한약을 파는데 내가 설명한다고 생각해봐. 한약 지으러 온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겠어? 너 같으면 믿음이 가?”
김영훈이 토실토실한 재민이를 위아래로 훑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오~ 맞네. 이해가 쏙쏙 되네?”
“그치? 그리고 요즘에는 기본적으로 광고를 많이 때려야 해.”
“광고?”
“응. 괜히 여기저기서 영상도 찍고, 블로그도 올리고 그러는 게 아니라니까.”
“그게 그렇게 차이가 커?”
“아니지. 차이가 크고 안 크고가 아니라, 살아남느냐 못 남느냐 차이야.”
이는 비단 한의원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사람들은 대부분 광고를 보고 접하게 되고, 그 광고에서 밀리기 시작하면 아예 사람들의 선택지에 포함조차 되지도 않게 된다는 이야기였다.
“수민아 넌 어때?”
“내 얼굴 안 보여? 난 요새 죽을 맛이야.”
“또? 야, 그러니까 넌 그 성격 좀 고치라니까.”
굳이 설명하지 않았음에도 앉아있던 모두가 수민이에게 어떤 일이 벌어진 것인지 단번에 이해했다.
수민이는 일명 365 한의원의 원장으로, 말 그대로 연중무휴 진료를 보는 한의원을 운영 중이다.
보통은 원장 이외에 부원장을 둬서 돌아가며 휴일을 가지지만, 수민의 까칠한 성격을 버티지 못한 부원장들이 들어온 뒤, 며칠을 버티지 못하고 그만두기 일쑤였다.
“아, 죽겠어. 하루라도 제대로 푹 쉬고 싶다.”
“넌 성격 고치기 전에는 절대 못 쉴걸? 요즘 애들이 얼마나 정보가 빠른데, 아마 벌써 블랙리스트에 올라가 있을 듯.”
“허준아 넌 요즘에 어때?”
“그래. 너 좀 괜찮아졌어? TV도 나왔었잖아.”
동기들이 기억하는 허준의 모습은 지난 2년간 한의원을 양도받아 개원한 이후에 빌빌거리며 고민을 토로하던 허준의 모습이었다.
허준이 친구들의 얼굴을 둘러보며 환하게 웃으며 답했다.
“나 얼마 전에 1층으로 이전했어.”
“어? 진짜? 어쩐지 얼굴이 좋아 보이더라니.”
“대박. 역시 TV에 나오는 게 효과가 짱이라니까.”
“야, 이참에 우리도 의료봉사 좀 다닐래? 혹시 알아? 우리도 카메라에 찍힐지.”
“난 빼줘. 오늘도 겨우 대진구해서 나왔으니까.”
이런저런 이야기가 오가던 중에,
드디어 오늘의 주인공인 신랑과 신부가 입장했다.
축가, 축사, 인사, 사진 촬영까지.
그리고 대망의 부케를 끝냈다.
식장에서 나가기 시작하는데, 허준의 눈에 어디서 자주 본 발걸음이 들어왔다.
왠지 모르게 당당한 발걸음. 어? 설마 김 선생인가.
그 시선을 느꼈는지, 김예진이 고개를 돌렸는데 허준과 눈이 마주쳤다.
“어? 원장님? 원장님이 여기는 어떻게?”
김 선생이 아는체하자, 그녀 주변에 있던 친구들이 수군거렸다.
같은 결혼식에 초대받은 것도 아니고, 호텔 결혼식장에서 아는 사람을 만나는 경우가 흔치는 않지 않겠는가.
“아, 내가 말했지? 우리 한의원 원장님이셔.”
“아~ 그분이셔?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허준도 얼떨결에 인사했다.
허준의 뒤에 있는 친구들도 속닥였다.
“야 누구야? 아는 사람이야?”
“우리 한의원 김 선생님.”
허준이 짧게 대답하고, 김 선생에게 물었다.
“여기는 어떻게?”
“원장님과 같은 이유로 왔죠. 아는 선배 중에 한 분이 오늘 결혼하셨거든요”
세상 좁다더니, 이런 곳에서 마주칠 줄이야.
“아~ 세상 참 좁네요.”
“그러게요. 일주일에 무려 7일을 볼 줄이야.”
“그러게 말이에요. 친구들이 기다리고 있어서 저 먼저 가볼게요.”
“네, 내일 봬요.”
각자의 일행이 있기에 더 이상의 대화는 이어지지 않았다.
허준과 친구들은 그렇게 결혼식장을 나왔다.
“재현이도 이렇게 가는구나~”
“잘 가라. 재현아. 멀리 안 나간다.”
“안 그래도 우리 엄마도 슬슬 혜정이랑 날짜 잡으라고 하던데...”
“나도 요즘에 고민이 많다.”
“참, 허준아 넌 언제 할 거냐. 너 여자친구랑 꽤 오래 사귀었잖아.”
갑작스럽게 들어온 질문에 허준이 무덤덤하게 대답했다.
“헤어졌어.”
“어? 아 그래? 미안...”
친구들이 재빨리 사과했다.
“미안은 무슨.”
“우리 이왕 이렇게 오랜만에 모였는데, 한잔하는 건 어때?”
“좋지. 우리 요즘엔 다 같이 모이기도 힘들잖아.”
“난 찬성.”
대진을 맡겼다는 수민이 가장 먼저 찬성했다.
매일 한의원에 있느라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닌가 보다.
그렇게 모두의 시선이 허준에게로 향했는데,
“난 안돼.”
“왜?”
“총명탕 달이러 가야 하거든. 다음에 같이 마시자.”
허준도 내심 술 한잔쯤 걸치고 싶었으나, 기연을 얻게 된 계기도 술이 아니던가.
충분히 경계해야 할 필요성이 있었다.
그렇게 사라져간 허준의 모습을 지켜보던 친구들이 눈이 꿈뻑였다.
* * *
강남의 한 와인바.
허준과는 다르게 김예진과 친구들은 오랜만에 모여서 와인을 마셨다.
“야, 아까 그 선생님이 너희 한의원 원장님이셔?”
“맞아.”
“네가 그렇게 사람 좋다고 하던?”
부케를 받은 주인공이자 김예진의 친구 이소연이 묻자,
김예진이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답했다.
“나도 처음엔 사람만 좋은 줄 알았는데, 요즘엔 실력도 보통이 아닌 것 같아.”
“그래?”
김예진이 최근에 허준을 찾아온 환자들을 떠올리며 답했다.
“동네 어르신들뿐만 아니라, 여기저기서 화상 환자들도 찾아오고, 요즘엔 고3 학부모님들이 찾아와서 총명탕을 사 가느라 난리거든.”
설명을 들은 이소연의 눈이 번뜩였다.
고3 어머니들이 어떤 사람들인가, 조금이라도 더 좋은 것을 먹이기 위해 사방팔방으로 뛰어다니는 분들임을 모르는 그녀가 아니었다.
“오~ 너희 원장님 진짜 실력 좋으신가 본데?”
게다가 어릴때부터 친구인 김예진의 성격은 거짓말도 못 하지만, 그렇다고 칭찬이 후한 편도 아니다.
그런 김예진이 저렇게 좋게 말할 정도라면,
“왜? 너도 어디 아파? 건강해 보이는데?”
“얘는 요즘에 한의원에 아픈 사람만 가? 너야 관심 없어서 잘 모르겠지만, 요즘엔 결혼식 전에 다이어트가 필수잖아. 웨딩 화보도 찍고 드레스도 입어야 하니까.”
이소연의 오른편에는 결혼식에서 받은 부케가 들려 있었다.
그녀의 말에 앉아있던 친구들 몇이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가 동의한다는 뜻이리라.
“우리 예진이 입에서 실력이 좋다는 이야기가 나왔으면 한번 가봐야지.”
* * *
그 시각 허준은 홀로 주문받은 총명탕을 달이며 한곳을 응시했다.
한의사 Lv. 1
[침술 Lv. 5] 필요 포인트 5000
[구술 Lv. 5] 필요 포인트 5000
[탕제 Lv. 3] 필요 포인트 5000
[추나 Lv. 0] 잠김
[진맥 Lv. 0] 잠김
···
보유 포인트 : 452
무언가 벽에 가로막힌 느낌 때문이었다.
이전까지만 해도 1000포인트면 능력을 올릴 수 있었는데, 이제는 무려 그 5배가 되었으니 단순계산만으로도 5배의 시간이 필요해진다는 뜻이었으니까 말이다.
한의원의 매출은 안정세가 되었는데, 성장이 멈춰버린 느낌이었다.
탕약을 달이면 10포인트, 진료를 보면 1포인트 그리고 의료봉사나 가끔 발생하는 퀘스트를 깨면 대량의 포인트를 얻을 수 있지만,
퀘스트는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이 주체가 되어 진행하는 봉사에는 발생하지 않았다.
이는 허준이 직접 확인해본 결과로, 참여자의 입장으로는 평범하게 진료를 볼 때와 마찬가지로 1포인트만 추가되었다.
결국, 방법은 한의원을 확장시켜 환자를 더 많이 보던가, 탕약 주문을 아예 많이 받던가, 또는 봉사의 규모를 키워서 대량의 포인트를 얻는 방법들인데.
이 중에서 당장 할 수 있는 것은 역시 탕약뿐이었다.
나도 몸짱이라도 되어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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