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화. 진행시켜
31화. 진행시켜
금요일 저녁.
동네의 작은 치킨집에서 오랜만에 세 남자가 모여 앉았다.
남자들의 복장이 조금 독특했는데, 한 남자는 짧은 머리에 정장이요, 또 한 남자는 시커먼 추리닝을 입고 마지막 남자는 도복을 입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여기에 모인 이유는 오랜만에 만나 이야기도 할 겸, 선배인 관장 최종규에게 체육관에 대한 현실적인 조언을 듣고 싶어서였다.
호프집에 들어오는 사람들마다 도복을 입고 앉아 있는 최종규를 힐끔힐끔 쳐다보는 시선에,
“선배님. 아무리 그래도 도복은 좀...”
“왜? 이게 창피해?”
“그런 말이 아니라... 네. 사실은 조금 창피합니다.”
“명훈이 너도?”
최종규의 맞은편에 앉아 있던 김명훈이 대답 대신에 동의한다는 의미로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 모습에 최종규가 고개를 저으며 한심하다는 듯이 말했다.
“이래서 너희 체육관 차릴 수 있겠냐? 잘 봐봐.”
최종규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나 뒤로 돌았다. 그러자, 그의 도복 뒤에 노란색으로 적혀있는 ‘최종규의 검도교실’이라는 문구가 확 드러났다.
“이거야말로 걸어 다니는 광고판이지 뭐겠어? 안 그래? 너희 이정도 각오도 없이 체육관 차리려는 거였어?”
“선배님. 꼭 그렇게까지 해야 하나요?”
“그럼, 인마 이건 기본이지. 여기 들어올 때 못봤어? 사장님도 바로 알아보시잖아.”
“그건 선배님이 여기 단골이라서...”
“아무튼, 너희 체육관 차리고 싶다면서. 이런 거로 부끄러워하면 안 되지.”
“네. 새겨듣겠습니다.”
“그래, 그래서 체육관은 어디에다가 차리게?”
“이제 슬슬 알아보는 중입니다. 명훈이 이 녀석이 은퇴시합 끝나고 같이 하기로 했거든요.”
“시합? 왜 또 힘들게 은퇴시합까지 하려고 해? 그냥 은퇴하면 되지.”
최종규가 답답하다는 듯이 으휴- 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한심하다는 느낌이 아니라 김명훈이 안쓰러워서 나온 행동이었다.
과묵하게 앉아 있던 김명훈이 눈을 빛내며 대답했다.
“제 자존심이 걸린 싸움이라서요.”
“그래. 나도 알지 그 마음, 그런데 어떻게 하겠어. 몸이 그런걸.”
김명훈은 3년 전 데뷔 때만 하더라도 격투계에서 주목받던 신인 중의 한 명이었다.
길쭉한 팔과 유연한 몸. 그리고 레슬링을 베이스로 한 피지컬에 타격기까지 갖춰지면서 날아오를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던 그에게 커다란 시련이 닥쳤으니,
“아, 김명훈 선수 쓰러져서 일어서지 못합니다.”
“이게 무슨 일인가요? 부디 큰 부상은 아니었으면 하는데요.”
경기중에 허리에 큰 부상을 입은 것이었다.
병원의 진단은 외상으로 인한 허리디스크.
“수술 하셔야 합니다.”
“완치는 가능할까요? 제 선수 생활은...”
“재활 훈련까지 마치시면 괜찮을 것 같습니다.”
그렇게 수술까지 받고 재활 훈련으로 완전히 회복을 마친 뒤, 다시 경기장에 올라섰는데,
허벅지에 꽂힌 상대 선수의 로우킥 몇 번에, 허리에서 찌릿하는 느낌과 함께 균형을 잃고 다운돼 버린 것이었다.
이것이 시작이었다.
“김명훈? 허벅지만 조져. 그럼 끝나.”
현대의 모든 스포츠가 그러하듯 상대 선수의 전략과 장단점에 대한 분석은 기본이 되어버린 시대.
그런 시대에서 김명훈이 입은 허리 부상은 치명적인 약점이 되었고, 결국엔 은퇴를 앞둔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이었다.
김명훈을 안쓰럽게 바라보던 최종규가 눈을 번뜩였다.
혹시나 하는 기대감이었다. 자신의 어깨에서 이물감을 없앤 침. 어쩌면 명훈이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명훈아, 너 한의원 한번 가볼래?”
“한의원이요? 에이~ 저 이미 여기저기 유명한 데는 다 다녀봤죠. 그렇게 큰 도움은 안 되더라고요.”
“형 한번 믿어봐라. 너 예전에 내 어깨 어땠는지 알지? 내가 요즘에 거기서 치료받고 많이 좋아졌거든.”
김명훈이 영혼 없이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뭐 그럴 수도 있다는 듯한 표정.
그때, 옆에서 조용히 닭다리를 뜯고 있던 남자가 입을 열었다.
찢어진 눈의 남자는 쪼옥 소리와 함께 닭 다리를 빨더니,
“나도 엊그제 선배 소개로 다녀왔는데, 뭔가 좀 달라.”
옛말에 세 사람이 말하면 없던 호랑이도 생겨난다고 하지 않던가.
그중 벌써 둘이 말해버리니 귀가 솔깃해진 김명훈이었다.
그래? 그럼 한 번 가볼까. 어차피 밑져봐야 본전이지.
“거기가 어디인데요?”
“가까워. 요 옆 동네 시장 골목.”
* * *
토요일 아침.
평상시와 다름없이 한의원으로 걸어가고 있는 허준의 눈에 뭄 닫힌 점포 몇 개가 들어왔다.
스프레이로 X라 크게 표시된 모습.
‘벌써 몇 군데는 나가셨네.’
그 비어버린 가게들을 보자, 이전까지 막연하게 생각했던 재개발이 진짜로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아직은 시장의 분위기를 유지하고 있었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하나둘 늘어날 터.
‘나도 대비를 해야겠지.’
그렇게 사거리를 지나서 허준이 한의원 문을 여니,
쌍화탕 향기가 콧속으로 훅-하고 들어왔다.
“좋은 아침입니다. 원장님.”
“안녕하세요 김 선생님. 혹시 쌍화탕 달이셨어요?”
“네. 어제 원장님께서 알려주셨잖아요.”
“그래서 달이셨다고요?”
“아침에 달여놓으라고 하시는 거 아니었어요?”
“네. 제가 나중에 따로 부탁을 드리겠다고...”
허준의 대답에 김 선생이 무안한 듯 머리를 긁적였다.
군대에서 생활하던 습관으로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인수인계해준다는 것은, 그다음부터 바로바로 적용하라는 뜻이라고 배웠기에 벌어진 일이었다.
원래 조직 생활이 이렇게 하는 거 아니었나.
“뭐, 일단은 잘하셨어요. 한 번 볼까요?”
그렇게 두 사람은 탕약실로 향했다.
허준이 탕약기를 먼저 살폈다. 확실히 김 선생이 일 하나는 끝내주게 잘한다.
가르쳐준 대로 탕약기 청소까지 완벽하게 마무리되어 있었다.
‘제대로 하셨네.’
그럼 포인트는 어떨까.
허준이 포인트를 확인해봤지만, 변화는 없었다.
역시 직접 달이는 것만 해당하는군.
그렇게 쉽게 주지는 않겠다. 이 말이지?
의료봉사의 퀘스트를 해결할 때에는 진행도가 같이 올라가 혹시나 하는 마음도 있었지만, 아무래도 욕심이었나 보다.
허준이 자동포장기 안에 담겨있는 쌍화탕을 종이컵에 조금 따랐다.
달인 지 얼마 되지 않아 손에서 따듯함이 느껴졌다.
그렇게 한 모금.
음, 괜찮은 쌍화탕이다.
하지만, 자신이 달인 것과 비교하자면 역시 묵직한 느낌이 부족한 맛이었다.
분명 같은 제조법으로 달인 탕약인데, 이렇게까지 차이가 날 줄이야.
그때, 그 모습을 옆에서 조심스럽게 지켜보던 김 선생이 허준에게 물었다.
“원장님. 어떠세요?”
“괜찮네요.”
“정말요?”
“네.”
“와~ 다행이다. 제가 아침에 마셔봤는데, 평소에 원장님이 챙겨주셔서 마시던 거랑 좀 다르더라고요. 그래서 실수한 줄 알고 긴장했었는데.”
“아니에요. 이정도면 훌륭해요.”
결코, 겉치레로 하는 말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같은 가격을 받고 팔기에는 차이가 있었으니.
‘나눠서 팔아야겠어.’
한의원이 확장해 가다 보면 결국 언젠가는 겪어야 할 일이었다.
부원장을 구한다고 하더라도, 탕약의 효과가 올라가지는 않을 테니까 말이다.
본인이 직접 달이는 프리미엄과 일반 제품으로 나눠서 판매하는 법.
이것이 오늘 아침의 일을 겪고 난 뒤에 허준이 내린 결론이었다.
허준이 달인 쌍화탕과 다른 맛에, 김 선생은 못마땅하다는 얼굴로 수첩을 꺼내 들고 쭉 따져보며 중얼거렸다.
“백작약, 숙지황, 황기,··· 비율이 10:4:4,···, 물은 생수에다가 온도도 제대로 확인했고 시간도 제대로 했는데, 대체 뭐가 다른 거지?”
김 선생님. 그 제조법 맞아요.
미안해요. 그 이상은 저도 설명할 수가 없어요.
허준이 말을 삼키며 김 선생을 불렀다.
“김 선생님.”
“네?”
“달이다 보면 더 잘하실 수 있을 거예요.”
"네!"
힘차게 대답하는 김 선생이었다.
* * *
아침부터 주말을 맞이한 시장 골목은 활기찼다.
한쪽에서 나물을 다듬는 아줌마들의 수다도 불타오르고 있었다.
“이젠 날씨가 제법 쌀쌀하네.”
“그말 할 줄 알고 내가 가져왔지. 짜자잔~”
한 아줌마가 쌍화탕을 꺼냈다.
아무 로고도 없는 허준한의원의 쌍화탕이었다.
“많이도 모았네. 예전에는 그렇게 흉을 보더니 요새 자주 갔다 왔나 봐?”
“그럼 어떻게 해? 나랑 궁합이 맞아 버린걸. 게다가 거기 매일 찾아오는 꼬마도 얼마나 이쁜데. 마치 나 어렸을 때를 보는 것 같다니까?”
“아주 신이 났구만 신이 났어.”
그때, 한쪽에서 도라지 껍질을 벗기던 아줌마가 도라지 든 손을 한 바퀴 휘두르며 좌중을 휘어잡았다.
일종의 발언을 하겠다는 사인이었다.
“그런데, 자기들 그거 알지?”
“또 뭔데?”
“허준네랑 경희네랑 합쳐서 봉사팀 만들었다는데?”
“아예 팀을 만들었다고?”
“그렇다니까? 혜민서라나, 이제는 아예 작정하고 같이 다니려나 봐.”
“잘됐네. 잘됐어.”
“아니지 이 양반아, 이거 그러다가 둘이서 쌍화탕 이벤트 끝내버리려고 하는 걸 수도 있잖아.”
“어? 듣고 보니 일리가 있네.”
그때, 대답한 아줌마의 머리 위로 그림자가 졌다.
고개를 돌려보니 안경을 쓴 중년인이 내려다보고 서 있었다.
시장에서 장사 좀 한 사람들에게는 낯익은 얼굴.
경희한의원의 대표 최인호였다.
“어, 최 원장님? 오랜만에 오셨네요. 여기는 어쩐 일이세요?”
“지금 그 이야기 좀 자세하게 말씀해 주시겠어요?”
소문을 들은 최인호의 속이 부글부글 끓어 올랐다.
가뜩이나 어젯밤 일로 자존심이 상한 상태에서 이런저런 소문까지 전부 들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대체 허준한의원에서 무슨 짓을 했길래. 그렇게 고3 엄마들이 열광하는 걸까.
기회가 되면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해봐야겠어.
“아이고, 대표님 오셨습니까.”
최인호는 인사하는 김 원장을 한심한 눈으로 바라봤다.
“김 원장.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그게 갑자기 무슨 말씀이신지...?”
“내가 이허준 선생 따라다니면서 조용히 봉사활동 하고 있으라고 했잖나. 그런데, 의료봉사 팀을 만들면 어쩌자는 거야?”
“네? 그게 왜요? 저희 열심히 봉사하러 다니고 있는데...”
“내가 그걸 몰라서 하는 말이야? 그렇다고 가서 진짜로 봉사만 하고 다니니까 하는 말이잖아. 우리 경희한의원의 이름을 알리는 일종의 마케팅이라고는 생각 안 해본 거야?”
김 원장이 이해가 안 된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물론 진짜로 이해를 하지 못한 것은 아니다. 다만 이미 여러 해 동안 최 대표를 겪은 터라, 무슨 대답을 하건 결론은 비슷할 것을 알았기에 빠른 쪽을 택한 것뿐이었다.
이럴땐 그냥 무조건 모르겠다는 바보의 마음가짐이 최고였다.
“참, 답답한 친구 같으니. 내가 일일이 다 설명을 해 줘야 해? 자네는 다 좋은데, 사업적인 감각이 너무 떨어져. 게다가 팀 이름이 혜민서는 또 뭐야. 이거 완전 허준한의원 좋은 일만 시켜주는 꼴이잖아. 으이구~ 박 원장이라면 바로 알아 들었을 텐데.”
최 대표의 한숨에 김 원장이 고개를 숙인 채 피식 웃었다.
대표님 그거 박 원장이 만든 건데요.
그때, 최인호가 무언가 좋은 생각이라도 난 듯 김 원장에게 물었다.
“김 원장. 오늘도 혜민서인가 뭔가 이허준 원장과 의료봉사같이 하기로 한 거 맞지?”
“예. 오늘도 진료 끝나면 같이 가기로 했습니다.”
“그래? 좋아. 나도 참석하지.”
“대표님이요?”
“왜 그렇게 놀라? 내가 가면 안될 이유라도 있나?”
의외의 대답에 김 원장이 내심 놀랐다.
이 사람 입에서 봉사활동을 가겠다는 말이 나오다니.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분 거지.
“없습니다. 그런데,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저희가 봉사 때, 한군데가 아니라 꽤 많이 돌 거든요. 굉장히 힘드실 겁니다.”
김 원장이 어제저녁 단톡방에 올라온 목록들을 떠올렸다.
이번에 계획된 곳이 꽤 많던데.
게다가 인근 몇몇 의원에서도 혜민서의 활동에 동참하겠다는 의사를 밝혀온 찰나였다.
이미지를 중요시하는 최 대표의 성격이라면 중간에 나가지도 못할 텐데.
잠깐, 내가 지금 최 대표 걱정을 하고 있는 거야?
최인호가 눈을 빛내며 답했다.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굴로 들어가야 하는 법.
“김 원장. 날, 너무 우습게 보는 거 아니야? 진행시켜.”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