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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업 하는 한의사-30화 (31/230)

30화. 당신이 가져온 거나 먹어

30화. 당신이 가져온 거나 먹어

의사와 한의사의 관계는 조금 복잡하다.

작게 보면 같이 공중보건의사로 근무하면서 친구가 되기도 하고, 크게 본다면 서로서로 견제하는 직업군에 속해있기 때문이다.

물론 현대사회에서는 서양의학이라 불리는 현대의학이 훨씬 득세한 상황이지만, 전통의학이라는 한의학 또한 아예 효과가 없는 것은 아니었으니 서로 으르렁거리는 것이 당연했다.

환자를 치료한다는 공통적인 목적을 가진 적과의 동침 같은 느낌이라고 할까.

그런 면에서 허준이 지금 받은 전화는 조금 의외였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아영이에게 절단이라는 진단을 내린 의사였다.

아무래도 신경이 쓰였나 보다.

“저희도 어린아이한테 그런 진단을 전해야 할 때면 정말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거든요. 의사는 환자와 감정을 공유하지 않고 최대한 객관적으로 진단을 해야 한다지만 아직도 쉽게 되지 않더라고요.”

“충분히 이해합니다.”

당연한 말일 것이다.

의사도 사람이었으니까.

“그래서 말인데, 간혹 찾아오시는 환자분들 중에서 다른 방법을 찾으시는 환자들에게 선생님의 한의원을 추천해 드려도 되겠는지요.”

“물론입니다. 찾아오는 건 환자들의 선택이니까요.”

“그럼, 고생하십시오. 이만 끊겠습니다.”

허준이 스마트폰을 넣으며 생각했다.

세상엔 역시 좋은 의사 선생님들이 많다고.

그렇게 아영이의 검사 결과 소식이 전해지자,

허준한의원은 축제 분위기가 되었다.

조금 시끄러웠지만, 윤 선생과 김 선생도 이때만큼은 그 분위기를 즐기는 듯했다.

*   *   *

수능이 한 달도 채 남지 않은 시점.

전교 1등과 전교 2등이 모여있는 3반에서는 묘한 장면이 연출되고 있었다.

“쟤네 단체로 뭐 하는 거야?”

“몰라.”

점심시간에 밥을 먹고 나면 모두가 한날한시에 약속이라도 한 듯 한약을 마시는 것이 아닌가.

며칠간 그 모습이 계속되니, 학생들의 궁금증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게다가 그것을 가장 먼저 시작한 것은 바로, 이번 모의고사 전교 1등.

허준한의원의 총명탕이 유행처럼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 그게 어디 거라고?

- 내가 민수 엄마한테 들었는데 시장 골목 허준한의원이래.

- 거기가 그렇게 효과가 좋았단 말이지?

- 애 말로는 이번에 한 문제 차이로 1등과 2등이 갈렸다던데?

단 한 문제였지만 상위권의 학생들에게는 그 한 문제가 전체적인 점수에 큰 영향을 미치기 마련이다.

그러니 한 문제를 위해서라면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드는 것이 고3 자녀를 둔 어머님들의 마음가짐 아니겠는가.

그렇게 전교 1등 2등을 시작으로 상위권 애들이 던진 돌이 학교라는 연못에 자그마한 파문을 일으키고 있었다.

덕분에,

“또..?”

허준한의원에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드나들기 시작했다.

지난번에 끝난 줄 알았던 총명탕의 여진이 시작된 것이었다.

그것도 훨씬 더 큰.

게다가 아영이에 관한 이야기가 병원에 퍼졌는지,

심심찮게 화상 환자들도 찾아오기 시작했다.

한마디로 허준은 쉴 새 없이 진료를 봐야했다는 말이다.

진료를 끝낸 허준이 홀로 탕약실에 남아 총명탕을 달이며 진지하게 고민했다.

‘이러다가 내가 먼저 쓰러지겠어.’

일 평균 40명가까이 돼버린 한의원의 현 상황.

그만큼 매출은 쭉쭉 상승했지만, 생명력이 깎여나가는 느낌이 든 것이다.

생명력을 선으로 표현한다면 지금은 분명 우하향을 그리고 있을 터.

이러다가 어떤 시점에서 확- 하고 떨어지면 그것이 곧 병이 되는 것이 아니던가.

그렇다고 주말에 있는 의료봉사를 포기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수능이 끝나면 총명탕에 대한 수요도 다시 줄어들 테니. 부원장을 고용하기에도 애매한 상태에서 방법은 역시 하나뿐이었다.

‘김 선생이나 윤 선생에게 탕약을 내리는 법을 알려줘야겠어.’

진료 중간중간에 대신 탕약을 내려주는 것만으로도, 밀려있는 탕약을 일부 소화할 수 있을 테니, 그것만으로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

포인트를 얻기 위해서 매일같이 탕약을 직접 내리던 허준이었지만,

잠깐이라도 숨을 고르기 위한 결정이었다.

그렇게 다음 날.

진료를 마친 허준이 두 선생을 원장실로 불렀다.

“선생님들.”

“네.”

“제가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김 선생과 윤 선생의 눈이 허준에게로 향했다.

이번엔 또 무슨 말을 할까 은근 기대하는 눈치였다.

이렇게 같이 원장실로 호출하는 일은 보통 한의원 이전과 같은 중요한일이 있을 때였기 때문이다.

“이제 슬슬 탕약기 사용법을 알려드려야 할 것 같아서요.”

이럴 때는 보통 간호조무사 선생님들의 반발이 있기 마련이기에, 허준은 최대한 부드럽게 말했다.

“좋아요.”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대답하는 김 선생.

예상한 바였다. 김 선생이야 원래 이상한 사람이니까.

“가뜩이나 요즘에 1층으로 내려온 지 좀 돼서 익숙해진 참이었거든요. 어차피 언젠가는 배워둬야 할 일이기도 하고요.”

김 선생이 윤 선생을 바라보고 말했다.

그러자, 윤 선생도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간호조무사 카페에서 보니까, 원래 한의원에서 일하려면 탕약기 쓰는 법을 배우긴 하더라고요. 배워둬서 나쁠 거야 없죠.”

너무나 쉽게 풀린 일에 허준이 눈을 껌뻑였다.

윤 선생도 저렇게까지 말할 줄이야.

“그럼, 일단 가시죠.”

탕약실에 들어선 허준이 차근차근 순서를 알려주었다.

먼저 쌍화탕에 들어가는 기초적인 3가지 재료들의 위치와 양을 알려주었다. 그리고 그 외에 가감이 되는 재료들의 위치도.

김 선생과 윤 선생이 꼼꼼히 받아 적었다.

이어서 탕약기에 한 명씩 붙어서 사용법과 청소방법까지.

“사실 재료들의 양도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건 청소에요.”

“생각보다 손이 많이 가는 일이었네요?”

“네. 그래도 옛날처럼 불 앞에 몇 시간씩 쪼그려 앉아서 달이지 않아도 되는 것만 해도 어디에요.”

“듣고 보니, 그것도 그렇네요.”

윤 선생이 무언가 떠올랐다는 듯이 대답했다.

보나 마나 사극 드라마의 한 장면이리라.

“자, 이렇게 해서 여기까지 이어주면 바로 포장까지 척척 해서 나오게 됩니다.”

*   *   *

며칠이 지나자 허준은 모인 포인트로 침술의 레벨을 올릴 수 있었다.

「‘침술 Lv. 4’에 1000포인트를 사용합니다.」

「‘침술 Lv. 4’가 ‘침술 Lv. 5’가 되었습니다.」

[침술 Lv. 5]

- 침술의 효능이 꽤 증가한다.

두루뭉술한 설명.

뭐, 직접 느껴보면 알겠지.

그렇게 출근한 허준이 첫 진료환자를 기다렸는데.

한눈에 봐도 험상궂은 인상의 남자가 허준한의원으로 들어섰다.

어울리지 않게 쫙 달라붙은 정장에 몸 곳곳을 채우고 있는 금.

영업 쪽에서 일할 때, 사람을 많이 만나본 윤 선생이 보기엔 영락없이 그쪽 사람이었다.

어두운쪽 일을 하는 사람.

이는 김 선생도 똑같이 느끼고 있었으니,

특전사 출신인 김예진이 경계하는 눈으로 그를 맞이했다.

“어떻게 오셨어요?”

남자가 한의원을 두리번 거리더니 머쓱이며 답했다.

“저... 이허준 선생님을 만나러 왔는데요.”

“원장님이요?”

“네.”

“무슨 관계신데요?”

“처음 보는 사이입니다.”

수상쩍은 대답에 김예진의 경계심이 한층 더 짙어졌다.

최근 한의원을 이전하기 위해서 사채업자한테 돈이라도 빌렸나. 최근 환자들이 오는 것을 보면 그렇게까지 쪼들릴 것 같지는 않은데.

“어깨가 아파서요.”

아프다는 대답에 순식간에 경계가 풀어지는 두 선생.

윤 선생은 작게 한숨까지 내쉬었다.

한의원을 찾는 환자 중에 젊은 환자들은 주로 몸을 쓰는 직업에 종사하고 있었는데, 시장 골목에 있는 한의원이었던 터라 젊은 환자를 만나본 경험이 별로 없었기에 생긴 착각이었다.

물론, 몸을 쓰는 직업에는 저렇게 어두운 쪽 사람들도 속해있다.

그래서 간혹 저 환자들에게 입소문이라도 난다면, 생각보다 많은 환자가 찾아오기도 한다는 소문이 있었다.

“여기에 성함이랑 전화번호 적어 주시겠어요?”

“네.”

그렇게 원장실.

문이 열리며 들어온 사내를 보고 허준이 살짝 놀랐다.

“어서오세요. 어디가 아프셔서 오셨나요?”

“어깨가 이렇게 잘 안올라가서요.”

남자가 어깨를 들어올리는데 확실히 왼쪽과 다르게 오른쪽 어깨가 제대로 올라가지 않는다.

“언제부터 그러셨어요?”

“좀 됐어요. 여기저기 다녀보다가 아는 형님이 여기를 추천하더라고요.”

“형님이요?”

“네. 종규형님이라고. 여기 근처에서 검도장 하시거든요.”

“아? 그분 알죠.”

검도장이란 말을 듣자 누군지 단번에 기억해낸 허준.

요새도 종종 침을 맞으러 오시는 관장님이셨다.

동시에, 좀전까지 위압적으로 보이는 그가 괜스레 가깝게 느껴졌다.

그저 한 다리 건너왔다는 이유만으로.

“잠시 재킷하고 셔츠 좀 벗어 주시겠어요.”

“넵.”

그렇게 시작된 진료.

셔츠를 벗은 그의 등에는 동해를 지켜야 할 것 같은 용 한 마리가 살고 있었다.

허준이 용의 코털 부분부터 시작해 여기저기를 누르며 진찰했다.

검도장 관장님보다 훨씬 상태가 심하네.

아무래도 그걸 써야 겠어.

“도침을 놓으려 하는데 괜찮으실까요?”

“도침이요? 그게 뭔데요?”

허준이 손에 평소에 놓던 호침과 도침을 들어 보였다.

한눈에 봐도 길이와 두께부터가 다르다.

게다가,

“도침이라고 쉽게 말로 풀어쓰면 칼날을 침에 붙인 거로 생각하면 돼요. 이쪽이 도침인데, 보시면 침 끝에 이렇게 날카롭게 칼날처럼 있거든요.”

“그러니까. 조그마한 칼침이라 이 말이죠?”

“비, 비슷하긴 하죠.”

“아픈가요?”

“아무래도 두께가 있다 보니 일반 침보다는 조금 아플 거예요.”

“알겠습니다. 한 번 맞아보죠.”

사내의 찢어진 눈이 번뜩이며 답한다.

그 모습에 괜히 긴장이 되는 허준.

치료실에서 허준이 도침을 손에 들었다.

도침은 한의학적인 침구학에 현대의학의 수술개념이 더해진 치료법으로 뼈와 근육, 힘줄 등을 날카로운 칼날로 붙어있는 환부를 떼거나 자르는 치료였다.

때문에, 이전에는 차마 자신이 없어서 사용하지 못했었는데 그동안의 경험과 올라간 손의 감각 그리고 틈틈이 공부를 통해 자신감을 찾은 허준이었다.

용의 얼굴을 시뻘건 용액으로 세수시켜주고,

수염 끝을 겨냥한 도침이 뽁- 소리와 함께 들어갔다.

허준이 침감을 느끼고 정확하게 들어갔다는 느낌이 드는 순간, 도침을 좌우로 조금씩 흔들고는 빼냈다.

단순하게 흔든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도침의 칼끝이 안쪽 이곳저곳을 난도질한 모양새였다.

이어서 몇 번의 도침이 들어갔다 나오고, 그 주변으로는 약침을 함께 처방했다.

‘휴, 해냈어.’

그렇게 치료가 모두 끝낸 남자가 구두를 신고 뚜벅뚜벅 걸어 나오는데,

“어...?”

어깨를 돌려보더니 중얼거렸다.

“형님 말씀대로 잘 찾아왔네. 이거 동생들한테도 말해줘야겠는데.”

*   *   *

허준한의원이 한바탕 난리가 나는 동안, 반대로 경희한의원의 분위기는 침울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대표 최인호의 분위기만 침울한 것이었지만.

“진혁아, 우리가 할 수도 있었잖아. 그러게 왜 그런 일을 벌여서.”

“전 억울하다니까요? 제가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그분이 그냥 진료실을 나갔다고요. 제 말 못 믿겠으면 CCTV라도 확인해 보시던가요.”

꼼꼼한 최인호가 CCTV도 확인하지 않았을까.

이미 확인을 했음에도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는 하나였다.

“어쨌든, 타격이 좀 있네. 어떻게 할래?”

“지금 저한테 눈치 주시는 거죠? 알겠습니다. 다시는 연락하지 마세요.”

끊긴 전화를 들고 최인호가 머리를 흔들었다.

스트레스가 몰려온다.

자리에서 일어나 수험생인 아들을 위해 만들어 놓은 총명탕을 하나 꺼냈다.

잔에 따라 전자레인지에 돌려 따듯하게 데워 한 모금 마시니, 그제야 머리가 상쾌해지는 느낌이다.

‘아, 역시 내가 만들었지만, 잘 만들었네.’

그런데 이게 웬걸. 총명탕을 다 마시고나니, 경희한의원 로고가 없는 포장지가 아닌가.

이 여편네가 어디서 또 이런걸 사 온 거야?

“여보? 이거 뭐야? 내가 가져온 거는 다 어디 갔어?”

“그걸 왜 당신이 먹고 있어? 내가 시장골목 까지 직접 가서 사온건데.”

“시장 골목? 거기 이름이 뭔데?”

“허준한의원이라고 요즘 엄마들 사이에서 유명해. 당신 그거 먹지 말고 당신이 가져온 거나 먹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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