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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업 하는 한의사-29화 (30/230)

29화. 기뻐서 그래

29화. 기뻐서 그래

대한민국에서 고3과 고3자녀를 둔 어머니의 영향력은 실로 어마어마하다.

가족들끼리의 큰 연례행사에서조차도 ‘올해 아들이 고3이라서.’라는 말 한마디면 모두가 이해하며 고개를 끄덕이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오히려 열심히 하라고 각종 선물부터 용돈까지 보내는 경우도 흔했으니까 말이다.

그런 고3과 고3의 어머님이 원장실에 허준과 마주 앉아 있었다.

허준의 눈이 학생이 입고 있는 교복을 알아봤다.

“선생님. 저희 아들이 이번에 수능이 있어서요. 총명탕을 좀 주문하려고요. 영수가 가져간 거랑 똑같은 거로 가능할까요?”

아무래도 지난번에 왔던 그 학생의 이름이 영수인가 보다.

들어오는 어머님마다 영수를 찾아댔으니 말이다.

‘이거야 원, 총명탕이 연예인 패션 따라 하기도 아니고.’

총명탕은 ‘꾸준히 복용하면 하루 천 마디를 외울 수 있다’라고 동의보감에 나오는 대표적인 탕약으로, 뇌의 피로를 풀어주고 스트레스를 낮춰 집중력과 기억력에 도움을 주는 탕약이다.

바꿔말하면, 체질에 안 맞으면 역효과가 날 수도 있다는 뜻이다.

“어머님. 사람마다 체질이 달라서 그럴 수는 없습니다.”

“그래요?”

“네. 그래서 복용하는 사람마다 이렇게 진료를 통해서 미리 체크를 해야 합니다. 일단 진맥을 먼저 잡아 볼게요.”

허준이 학생의 진맥을 잡아 살폈다.

고3답게 눈밑이 퀭하기는 하나, 지난 번 학생보다 상태가 훨씬 좋았다.

가감없이 일반적인 총명탕으로도 충분할 것 같네.

그런데 그때,

“선생님. 제일 좋은 거로 해주세요. 가장 비싼 거로.”

수능을 앞둔 고3의 어머니께서 친절하게 주문을 하신다.

자기 자식 앞길가는데에 무엇이든 해주고 싶은 것이 부모마음 아니던가.

그 마음을 모르는 바가 아니었기에,

허준은 ‘총명탕 먹는다고 갑자기 점수가 확 오르는 일은 없습니다.’라는 말을 씹어 삼켰다.

그래. 좋은 게 좋은 거지.

몸에 나쁘지만 않으면야.

허준이 영업용 미소를 날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언제쯤에 찾으러 올 수 있을까요? 이거 이야기 들어보니까 하루 이틀 먹는 거로는 크게 효과를 보기 힘들다면서요.”

“네. 꾸준히 드셔야 효과가 더욱 좋습니다.”

“그럼, 최대한 빨리 마시는 게 좋겠네요. 당장 수능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알겠습니다. 그럼 월요일 저녁에 찾으러 오시겠어요?”

그렇게 총명탕을 주문해 간 고3이 무려 6명. 그것도 모두 여태 팔아본 적 없는 비싼 약재가 들어간 주문이었다.

덕분에 허준한의원의 일 매출 최대기록도 경신되는 날이었다.

“자기는 어때? 원장님이 뭐로 해주신 데?”

“나도 모르지. 그래서 일단 제일 좋은 거로 해달라고 했어.”

“잘했어. 재수 안 시키려면 최대한 좋은 거 먹여야지. 참,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야. 애들 독서실 갈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잖아.”

“맞네. 밥도 먹여야 하는데, 어서 움직이자.”

스터디그룹, 맘카페, 또는 같은 학원에서 만난 사이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들어올 때도 단체로 오더니 나갈 때도 그렇게 단체로 사라졌다.

물론, 한의원을 이전하느라 지출이 컸던 허준에게 이는 더할 나위 없이 고마운 상황이었다.

허준이 원장실에서 나오는데, 한의원 문을 닫고있는 윤 선생이 문 앞에서 두 주먹을 가볍게 움켜쥐었다.

마치, 무언가를 해냈다는 듯한 제스처였다.

“원장님. 저희 입소문 탔나 봐요. 제가 좀 전에 오신 어머님들과 이야기를 나눠봤는데, 지난번에 총명탕 사간 학생이 이번 모의고사에서 전교 1등을 했다더라고요.”

붙임성 좋은 수다쟁이 성격이라 그런지, 그새 찾아온 어머님들과 이야기를 나눴나 보다.

확실히 과묵한 김 선생과는 완전히 다른 스타일이네.

허준이 예상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왠지, 그럴 것 같았어요.”

“그렇죠? 저 잘한 거 맞죠?”

“네. 잘하셨어요.”

옆에서 가만히 이야기를 듣던 김 선생이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궁금하다는 얼굴로 물었다.

“그런데 원장님. 그 총명탕이라는 거 정말로 시험점수를 높이는 데에 효과가 있나요?”

“당연하죠.”

허준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물론, 열심히 공부한다는 전제조건이 필요하겠지만요.’

*   *   *

「퀘스트 ‘돌봄의 집’을 완수하였습니다.」

「포인트를 150 획득하였습니다.」

세 명의 한의사가 커다란 달이 보이는 길거리로 걸어 나왔다.

허준과 경희한의원의 두 원장 김태식과 박용준이었다.

“어우 그 할머니 성격이 아주 대단하시네.”

“그러게 말이에요. 그래도 재밌는게 꼭 침 맞고 나면 웃으시더라.”

“많이들 그러세요. 그분들이 몸이 아픈 분들도 계시지만, 실제로는 몸 보다는 마음이 아픈 분들도 꽤 많으시거든요.”

“아~ 그렇구나.”

허준의 설명에 박 원장이 눈을 반짝이며 대답했다.

그러더니 무언가가 생각났다는 듯이 주머니를 뒤적였다.

“참, 이거 제가 우리 봉사단체 명찰 만들어 왔거든요.”

“명찰이요?”

“네.”

“좀 유치한 것 같지만, 언젠가는 이 이름을 한 번쯤은 써보고 싶었어요. 마침, 허준 선생님도 있고 하니.”

비장한 각오로 말하는 박 원장.

그의 손에는 ‘혜민서’라 적힌 명찰이 들려 있었다.

이 친구도 드라마에 낚여서 뛰어든 거 아니야?

그런 생각과 함께 허준은,

보유 포인트 : 673

두 원장과 함께 봉사하며 모은 포인트를 확인했다.

무려 400점. 그리고 이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당연히도,

“이허준 선생님. 오늘은 여기까지 하신다고 하셨죠?”

“네. 모두 수고 많으셨어요. 어떻게 다 같이 고생했는데 저녁이라도 함께할까요?”

“아니요. 그냥 집에 가서 빨리 씻은 뒤에 눕고 싶은 생각뿐이에요.”

“저는 여자친구 만나러 가야 하는데 벌써 걱정이에요.”

허준의 제안에 김 원장과 박 원장이 각각 대답했다.

두 원장의 대답을 들으니 피식 웃음이 흘러나왔다.

처음 서울역으로 갔던 그 날의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나도 처음에는 집에 가서 그냥 눕고 싶었었지.

하지만 그런 그들의 얼굴에는 피곤함에 쩔은 그림자 사이로 웃음이 피어나 있었다.

다른 사람이 나를 봤을 때도 이런 느낌이었을까.

‘그러고 보니 언제 한번 서울역에도 나가봐야겠네.’

“알겠습니다. 그럼, 다음 주에 뵙도록 하죠.”

“네. 조심히 들어가세요. 선생님.”

“원장님이랑 선생님도요.”

“모두 고생하셨어요.”

그렇게 헤어지려는 찰나,

김원장이 무언가 생각이라도 난 듯 허준을 불렀다.

“아 참, 이허준 선생님.”

“네?”

“혹시 오해하실까 봐 말하는 건데요. 선생님도 시장에 도는 소문 들으셨죠? 우리 한의원에서 환자 내쫓았다고 하는 소문이요.”

“아~ 그거라면 걱정하지 마세요. 안 그래도 제가 찾아오는 환자분들에게 그럴 리가 없다고 설명하고 있어요. 원래 이 시장이란 곳에 소문이 나면 다 그렇게 와전되잖아요. 저는 개원 1년 차 때에 한동안 건물주 아들이라고 소문났다니까요?”

“정말, 감사합니다.”

“좀 있으면 괜찮아질 거예요.”

김 원장이 머리를 긁적였다.

“그런데, 그 아이는 좀 괜찮아졌나요?”

“아영이 말씀하시는 건가요?”

“네. 제가 직접 보지는 못하고 듣기만 했는데, 굉장히 심각한 상황이었다면서요.”

“좋아지고 있습니다. 아마, 더 좋아질 거고요.”

“다행이네요. 아무쪼록 잘 부탁드려요. 선생님.”

허준이 김 원장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신경이 쓰였나 보다.

그렇게 일요일 아침.

본래라면 한의원이 문을 닫는 날이었지만, 허준은 아침 일찍부터 나와서 탕약을 달이는 중이었다.

물론, 이는 어제 주문받은 총명탕이었다.

몇몇 어머님들의 부탁도 있었지만, 누구는 월요일에 누구는 화요일에 준다면 보나 마나 무슨 일이 벌어질 것이 분명하다는 예감이 들었다.

더해서, 이왕이면 하루라도 빨리 먹기 시작해서 조금이라도 효과를 더 봤으면 하는 마음도 함께였다.

“이거 먹고 다들 좋은 결과 있길 바란다. 그렇다고 한의대는 오지 말고...”

텅 빈 탕약실에서 혼잣말을 하며 탕약을 달이던 허준이 어딘가로 향했다.

향한 곳은 약재를 보관해두는 약재함.

화상 치료에 도움이 될만한 약재로 연고를 만들어볼 생각이었다.

분명히 탕제술의 능력이 더해져서 지금 사용하는 연고보다 조금이라도 더 효과를 좋게 만들어 줄 테니.

염증에 좋은 황기와 백지, 황련, 금은화 그리고 자초 등등의 10여 가지의 약재를 배합하여 연고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렇게 완성된 연고는,

“선생님. 정말 감사드려요. 일요일에 원래 쉬는 날이잖아요.”

“괜찮아요. 어차피 일이 있어서 나온 김에 말씀드린 거니까요.”

“그래도...”

아영이 엄마 김미영이 고개를 푹 숙였다.

허준이 김미영에게 바로 나온 따듯한 총명탕을 건넸다.

“이건?”

“총명탕이에요. 스트레스 많이 받을 때 도움이 꽤 되거든요. 따듯할 때 드세요.”

그런 허준의 앞에는 침을 맞고 있는 아영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라보고 있었다.

“아영이도 마셔볼래?”

한약 냄새를 맡은 아영이가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이럴 때 보면 애는 애네.

그리고 그런 아영이의 손은 어느새,

* 진행도 : 4%

올라간 진행도가 나타나 있었다.

아직 눈으로 식별될 만큼 큰 변화가 있지는 않았지만, 확실한 것은 이전보다 훨씬 빠르게 진행도가 올라가고 있다는 것이었다.

침을 뽑고, 새로운 연고를 바른 뒤 연고가 담긴 통을 김미영에게 건넸다.

“이전과 똑같이 하시면 돼요. 한의원에서 두 번, 그리고 집에서 한 번이요.”

*   *   *

사람이 살다 보면 10대와 20대 그리고 30대에서 나이를 들어간다는 사실이 가장 크게 와닿는 부분은 바로 체력적인 문제일 것이다.

10대와 20대에는 몇 날 며칠 밤을 새워도 푹 자고 나면 평소와 다름없는 생활을 할 수 있지만, 막상 30대가 되면 하루만으로 그 피로가 회복되지 않으니까 말이다.

이는 긁힌 상처에서도 마찬가지였으니, 어린 아영이의 상황에서는 더욱 티가 났다.

아영이의 손이 탄력을 받아 빠르게 진행도가 올라가기 시작한 것이다.

3%에서 5%로.

5%에서 10%로.

그리고 10%에서 20%까지.

하루가 지날수록 빨라지는 회복은, 눈으로 보기에도 죽었던 살이 떨어져 나간 자리를 새로운 살이 채우는 것이 보일 정도였다.

“아영이 어머님. 혹시 모르니, 병원에 가서 검사를 한번 받아보심이 어떨까요.”

아영이에게 침을 놓은 허준이 조심스럽게 검사를 권했다.

한의원에는 엑스레이라던가 기타 검사장비들이 없었으니, 혹시라도 자신이 눈치채지 못한 것들이 있을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한번 다녀올게요.”

그렇게 병원에 예약한 김미영.

병원 의자에 앉아서 전광판에 아영이의 이름이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초조함, 기대감 온갖 감정이 섞인 상황에서 시간은 더욱 느리게 흘러가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렇게, 전광판에 나타난 이름. 김아영.

“아영아, 가자.”

딸의 손을 꼭 잡고 1번 진료실로 향했다.

앉아있는 의사 선생님이 모니터를 한참 보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영이 어머님,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선생님.”

“보자...”

꼴깍- 김미영이 자신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절단... 안 하셔도 되겠는데요?”

“정말요?”

“네. 지금 검사 결과를 보면 필요 없을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연신 감사하다는 인사와 함께 진료실을 나선 김미영.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엄마? 울어?”

“아니야. 좋아서, 기뻐서 그래.”

“울지 마. 엄마 울면 나도 슬퍼.”

두 모녀는 그렇게 제자리에 주저앉아 한동안 눈물을 흘렸다.

‘이게 전부 허준 선생님 덕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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