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벨업 하는 한의사-28화 (29/230)

28화. 2층에 있었던 한의원 맞죠

28화. 2층에 있었던 한의원 맞죠

퇴근한 허준이 샤워를 했다.

거울에는 살이 조금 빠진 것 같은 몸매가 드러났다.

오늘도 보람찬 하루였어.

이렇게 샤워를 할 때면 늘 그날 한의원으로 찾아온 환자들의 얼굴들이 떠오르는데, 오늘은 단연코 아영이가 가장 먼저 떠올랐다.

그런 허준의 시야 한쪽에는,

한의사 Lv. 1

[침술 Lv. 4] 필요 포인트 1000

[구술 Lv. 4] 필요 포인트 1000

[탕제 Lv. 2] 필요 포인트 1000

[추나 Lv. 0] 잠김

[진맥 Lv. 0] 잠김

···

보유 포인트 : 1043

지난주 봉사활동과 진료, 그리고 저녁때마다 탕약을 달여 모은 포인트가 나타나 있었다.

확실히 봉사활동을 같이 하니까, 포인트 모이는 속도가 혼자 하는 것보다 훨씬 빠르네.

이제는 능력을 고를 차례.

침과 뜸, 그리고 탕제.

이 중에서 무엇을 선택하는 것이 옳을까.

‘지금 당장 급한 것은 아영이겠지.’

현재 아영이는 오전과 오후, 하루에 두 번 침을 맞고 있었다.

침을 맞은 뒤에는 연고를 바르고 나머지 시간을 생활했다.

능력 설명 중에 약의 효능에 대해서는 따로 언급이 없는 것으로 보아, 약 계열은 탕제와 같이 취급된다고 유추할 수 있었으니,

그런 면에서 연고의 효능을 올려주는 탕제술이 지금 아영이에게 가장 도움이 될 터.

다음 단계의 침술이 욕심이 났지만, 허준은 잠시 미뤄두기로 하고 바로 포인트를 사용했다.

「‘탕제 Lv. 2’에 1000포인트를 사용합니다.」

「‘탕제 Lv. 2’이 ‘탕제 Lv. 3’이 되었습니다.」

[탕제 Lv. 3]

- 탕약의 효능이 증가한다.

맙소사.

다음 레벨은 무려 5천 포인트가 필요하네.

그렇게 치료를 시작한 지 셋째 날.

어김없이 엄마 손을 꼭 잡고 허준한의원을 방문한 아영이가 대기실에 앉아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대기실에 앉아 있던 할머니들이 그런 아영이를 기분 좋게 바라봤다.

어릴 적에는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지만 어르신들은 늘 말씀하셨다.

나이가 들면 길가에 뛰노는 아이들을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진다고.

그 말은 이곳 한의원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세상 풍파를 겪으며 살아온 사람들끼리 눈빛을 주고받다가, 순수함을 간직한 아이의 눈을 바라보니 얼마나 이쁠까.

아영이가 자연스럽게 관심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름이 뭐니?”

“아영이라고 해요.”

아영이 대신 엄마 김미영이 짧게 답했다.

“아영아 안녕.”

“안녕하세요. 할머니.”

“아이고, 예의도 바르네~ 아영이는 어디가 아파서 왔니?”

“아영이 손 아야했어요.”

“그랬구나? 걱정하지 말렴. 여기 선생님이 실력이 아주 좋아서 금방 괜찮아 질 거야.”

아영이의 상황을 제대로 모르고 한 소리겠지만, 그 응원만으로도 아영이 엄마 김미영은 힘이 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누군가에게는 아무것도 아닌 툭 던진 한마디가, 다른 누군가에게는 감동을 줄 수도 있는 법이니까 말이다.

‘여기 오길 잘한 것 같아.’

“김 아영 환자분 원장실로 들어가실게요.”

허준이 원장실로 들어오는 아영이와 아영이 어머니에게 인사했다.

“어서 오세요.”

“안녕하세요.”

“선생님. 안녕하세요.”

이어서 아영이를 바라보며 웃으며 말했다.

“아영이 밥은 먹었니?”

“네.”

“잘했네. 선생님이 말했지? 빨리 낫고 싶으면 어떻게 하라고?”

“잘 먹고, 잘 자야 한다고요.”

당연한 이야기였다.

인간의 몸이 회복하려면 많은 에너지와 충분한 휴식이 기본적으로 뒷받침되어야 한다.

아무리 허준의 의술이 뛰어나다고 하더라도 기본적으로 환자의 의지와 체력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뜻이다.

“그래. 잊지 않았네. 그럼, 선생님한테 손 좀 보여 줄래?”

처음에는 조금 망설였던 아영이가 이제는 자연스럽게 손을 쑥하고 건넸다.

허준이 조심스럽게 붕대를 풀고 살폈다.

괴사 당한 피부가 떨어져 나가 처음보다 더 흉측한 모양이 되어 있었다.

그런 허준의 눈앞에는,

* 진행도 : 1%

조금이나마 올라간 진행도가 나타나 있었다.

힘든 싸움이라는 것은 이미 알고 시작했잖아.

치료 방법은 어제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회복을 돕기 위해 침을 놓은 뒤, 연고를 바른다.

“오후에 한 번 더 오세요.”

“네. 선생님.”

하루 두 번.

그렇게 며칠이 지나자, 조금씩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허준한의원도, 아영이에게도.

“아영아 오늘도 왔어? 손은 좀 괜찮아?”

“괜찮아요.”

“아이고 씩씩하네. 이 할미가 아영이한테 선물 하나 줘야겠네?”

“엄마가 모르는 사람한테 뭐 받는 거 아니랬어요.”

“똑똑하기도 하지~ 괜찮아 아영이 이 할미 몰라? 어제도 여기서 만났잖아.”

할머니가 주머니에서 초콜릿 하나를 꺼내자, 아영이가 엄마와 할머니 손을 번갈아 가며 바라봤다.

김미영이 그 모습에,

“감사합니다~ 인사하고 받아도 돼.”

그제야 아영이가 인사를 하고는 초콜릿을 받아 들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대기실 할머니들의 입가에 웃음꽃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   *   *

경희한의원 대표 최인호의 목소리가 스마트폰 너머로 흘러나왔다.

“김 원장. 내가 이진혁 선생도 붙여 줬는데, 매출이 왜 올라갈 기미가 안 보여?”

최인호가 답답하다는 듯이 물었다.

사업적으로 따지면 큰돈을 들여서 투자했는데, 제대로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으니 경영자로서는 당연한 의문이었다.

“그게, 소문이...”

그 물음에 김 원장이 대답했다.

언제나 굽신거리던 이전과는 다르게 당당한 목소리였다.

“소문? 무슨 소문. 이허준 선생 따라서 봉사도 같이 다니기로 했다면서. 혹시 가서 무슨 실수라도 했어?”

“그럴 리가요. 그건 잘하고 있습니다.”

“그럼?”

“이번에 대표님께서 보낸 이진혁 선생님에 대한 안좋은 소문이 시장에서 돌고 있습니다.”

“진혁이? 진혁이가 왜.”

“그게...”

김 원장이 시장에서 들려오는 소문에 대해 최인호에게 보고했다.

환자가 왔는데 피도 눈물도 없이 냉정하게 돌려보냈다더라, 울면서 두 모녀가 한의원에서 나가더라, 붕어빵 파는 아저씨가 너무 딱해 보여서 아이한테 붕어빵을 줘서 울음을 그치게 했다더라. 등등.

당사자인 이진혁이 들으면 기가찰 일이었지만, 소문이란 본래 말이 퍼질수록 살이 붙는 법 아니겠는가.

이야기를 들은 최인호가 끙하고 앓는 소리를 내었다.

가서 인기몰이를 좀 하라고 했더니, 완전히 초를 친 셈이었다.

“알았어. 진혁이랑은 내가 따로 이야기해볼 테니, 당분간 조용히 이허준 선생 따라 다니면서 이미지 회복에 힘쓰도록 해.”

그렇게 끊긴 통화.

박 원장이 김 원장의 표정을 보면서 조심스럽게 물었다.

“원장님. 괜찮으세요?”

“이젠, 뭐 이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지.”

“존경스럽네요. 전 아직 목소리만 들어도 긴장되던데.”

“나도 예전에는 그랬었지. 근데 요즘 들어 문득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

“무슨 생각이요?”

“생각해보니까, 우리가 죽자사자 매달릴 필요가 있나 싶은 거지. 최 대표야 감정이 실려서 이렇게 난리를 치는 거고.”

“감정이요?”

“박 원장은 아직 그 이야기 모르는구나? 체인점 원장들 사이에서는 유명하거든. 여기 최인호 대표가 신경 많이 쓰는 이유가 라이벌 때문이잖아.”

“라이벌이면.. 허준한의원이요?”

“에이, 옛날에 허준한의원이 있기나 했겠어? 당연히 정우한의원 말하는 거지.”

그제야 박 원장이 이해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대표님이 이상하게 여기에 관련된 일만 나오면 민감하다 했더니, 그런 사정이 있었군요.”

“그렇지. 그래서 이 곳에 그렇게 집착하는 거라니까?”

“조금 의외네요. 저는 냉철한 사업가라고 생각했었는데.”

“에이~ 사람이 다들 그런 거 하나씩은 가지고 사는 거 아니겠어? 그러니, 굳이 우리가 가운데 껴서 용쓸 필요는 없지. 어차피 본인 만족을 위해서 벌이는 일인데.”

“맞는 말씀입니다. 원장님.”

“그리고 자네도 이허준 선생이랑 같이 다녀보니 알겠잖아. 그 사람 완전히 대표님과 반대쪽 사람이라는 거.”

“그건 맞죠. 확실히 극과 극이죠.”

박 원장이 이허준을 떠올렸다.

확실히 그와 함께 봉사를 다녀온 뒤부터, 요즘 들어 진료를 볼 때마다 묘하게 변한 자신을 느낄 수 있었다.

이전과 비교해서 크게 달라진 거라고는 없었지만 왠지 모르게 환자분들과 얼굴을 마주하고 진료를 볼 때면, 자신도 모르게 의료봉사에서 이허준 선생의 모습을 따라 하게 되는 것이었다.

말투나 행동 표정들을 말이다.

그래서 그런지, 근 며칠간 환자들의 태도도 사뭇 달라진 느낌이었다.

이는 박 원장뿐 아니라, 김 원장도 같은 느낌이었으니.

“그보다, 내일은 어디로 가려나?”

“원장님. 지금, 기대하시는 거예요?”

“아니, 그 말이 아니고. 좀 쉬엄쉬엄했으면 해서.”

“에이~ 표정을 보니 기대하시는 거 같은데?”

그렇게 금요일이 지나가고 있었다.

*   *   *

고3 학생들은 수능을 보기 전에 마지막 모의고사를 치른다.

이 모의고사는 이번 연도 수능에 출제 유형과 난이도를 유추할 수 있고, 여기서 받은 점수를 토대로 입시전략을 세우거나, 자신의 현재 등급을 알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지표라 할 수 있었다.

“대박. 영수가 이번에 1등을 했다고?”

고등학교 3년 내내 만년 2등으로 머물었던 김영수.

그에게 처음으로 이변이 일어났다.

“리얼?”

“와, 이게 무슨 일이야?”

“처음 아니야?”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가장 기분이 좋은 것은 당연히 김영수 본인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늘 1등을 하던 재윤이는 모든 과목마다 개인과외가 붙어있고, 몸에 좋다는 각종 영양제부터 스트레스가 쌓일 때는 언제든 쇼핑으로 마음껏 풀 수 있는 여유를 가진 부러운 친구였기 때문이다.

친한 친구이자 라이벌. 그것이 영수와 재윤이의 관계였다.

그런 사이에서 3년 내내 단 한 번도 이겨보지 못한 그 녀석을 꺾은 쾌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자동차경주에서야 1등의 뒤를 쫓아가다가 마지막에 역전하는 모습이 흔하게 나온다지만, 공부라는 종목이 어디 자동차경주와 같던가.

“올~ 영수. 너 갑자기 뭐냐?”

재윤이가 등을 찰싹하고 두드리며 물었다.

“그냥, 뭐 운이 좋았지.”

“웩 대답 역겨운 거 봐.”

“야, 그거 교과서만 보고 공부했어요. 이 말이랑 같은 말인 거 알지?”

막상 1등과 2등의 차이라고 해봐야 얼마나 차이가 날까.

그 대답은 다른 학생들의 역겨움을 사기에 충분했다.

그때, 같은 반에 있는 누군가가 말했다.

“야, 저거 혹시 약발 아니야?”

“약?”

“영수 쟤 예전에 비타민도 안 먹던 놈이 요새는 점심 먹고 나서 꼭 한약 챙겨 먹잖아.”

“그러고 보니 그렇네.”

“야, 김영수. 그거 어디서 삼?”

“장난? 너희 진짜 내가 이거 먹어서 이겼다고 생각하는 거?”

그 장난스러운 질문에 김영수가 어처구니 없다는 얼굴로 답했다.

내가 얼마나 열심히 공부했는데.

그런데 생각해보니 이전과 비교하면 책상에 앉아 있는 시간이 조금 늘어난 것 같기도 하다.

“아~ 그래서 어디냐고.”

한 번 더 장난스러운 질문이 이어진다.

이런 장난스러운 상황에서도 결코 장난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도 있는 법.

그들의 귀가 김영수의 대답을 기다렸다.

“너네 옛날 시장 골목 알지? 우리 어렸을 때 불량식품 사 먹던 곳. 엄마랑 거기에 있는 2층 한의원에서 산 거임.”

그렇게 토요일 점심.

마감 시간을 앞둔 허준한의원에 교복을 입은 학생과 학부모 몇이 몰려들었다.

“여기가 2층에 있었던 한의원 맞죠?”

────────────────────────────────────

────────────────────────────────────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