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긴 여정이 될 겁니다
27화. 긴 여정이 될 겁니다
5분여간 이어진 실랑이 끝에, 신경질 부리던 할머니와 허준이 사이좋게 손을 잡고 방에서 나왔다.
“저 봐, 어차피 나올 거 좋게좋게 나오지 왜 성을 내고 있어?”
“그러게 선생님들 고생하시는 데 말이야.”
할머니들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코웃음을 쳤다.
“할머니들 너무 그러지들 마세요. 이렇게 튕기는 것도 매력 있잖아요.”
허준의 대답에 할머니들이 깔깔거리며 웃었다.
그런 허준의 눈에는 뜸에 불을 붙이고 있는 두 원장이 들어왔다.
그리고,
* 진행도 : 15%
진료를 보지 않았음에도 알아서 올라간 진행도와 함께.
‘예상대로다.’
인제 보니, 여럿이서 해도 가능한 거였잖아.
퀘스트가 사라지지 않고 그대로 진행되어서 혹시나 했었는데, 자신이 직접 진료를 하지 않아도 올라간 진행도가 그것을 증명해주고 있었다.
이는, 앞으로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나타냈다.
혼자서 아무리 많은 환자를 봐봐야 얼마나 보겠는가.
진료를 보는 사람들이 많을수록 더 많은 환자를 진료할 수 있는 것이 당연한 법.
환자가 많은 곳일수록 보상이 좋다.
여럿이 같이 진료해도 보상을 얻을 수 있다.
그러므로 홀로 하는 거보다는 다른 사람과 함께 하는 것이 효율적이었다.
기연에 대해 또 하나의 비밀을 푼 것 같은 허준이 히죽 웃었다.
그 모습을 본 두 원장이 속삭였다.
“원장님. 대체 뭐가 좋아서 저렇게 웃고 있는 걸까요?”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저게 마케팅 비법인지도 모르지. 우리는 일단 하던 일이나 끝내고 어서 가자고.”
“네.”
그렇게 이어진 진료.
총 환자의 수는 23명.
진료를 보는 한의사가 3명이었기에 허준 혼자 진료를 보던 시간보다 훨씬 빠르게 끝낼 수 있었다.
“이거 받으세요. 따듯하게 덥혀 드세요.”
김 원장이 한 박자 빠르게 경희한의원 로고가 박힌 박스를 건네며 말했다.
“이런 것까지 다.. 정말 감사드립니다. 세 선생님 모두.”
“선생님들 감사합니다.”
“사랑해요~”
“드릴 건 없고, 가시는 길에 이거라도 하나씩 드시면서 가세요.”
빈 손에 박카스 세 개가 쥐어진다.
김 원장이 그것을 받아들고 나가려는데, 손을 흔드는 할머니들이 눈에 들어왔다.
밝아진 표정으로 웃는 행복한 모습.
입가에 자연스럽게 웃음이 지어졌다.
이런 감정을 느껴본 것이 얼마만이던가.
어쩌면, 이렇게 조금씩 봉사를 하러 다니는 것도 생각보다 괜찮을지도?
박 원장도 비슷한 감정을 느꼈는지, 길가에 나오는 내내 눈빛이 초롱초롱했다.
그렇게 각자 손에 박카스 하나씩을 들고나온 세 사람.
「퀘스트 ‘행복한 집’을 완수하였습니다.」
「포인트를 50 획득하였습니다.」
허준이 메시지를 확인하고는 기지개를 켜는 김 원장에게 말을 걸었다.
“어우~ 선생님들 수고하셨습니다.”
“선생님도 수고하셨습니다.”
“경희한의원에서도 종종 이렇게 다니시나 봐요?”
“아, 네. 그럼요. 저희 한의원도 동네에서 오래 됐잖아요.”
김 원장이 머리를 긁적이며 순발력있게 답했다.
“역시 봉사를 하고 나오니 보람차네요.”
“저도 보람찼습니다.”
박 원장도 동의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둘의 표정을 본 허준이 말을 이었다.
“그래서 말인데, 제가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우리 시장 골목에서 이렇게 토요일마다 모여서 같이 의료봉사를 다니는 건 어떨까 하고요. 어떠세요? 괜찮은 생각 같죠.”
“네..? 아, 네.”
생각지도 못한 말에 김 원장이 말을 더듬었다.
“이왕이면 이렇게 같이 하면 더 보람차고, 좋잖아요.”
김 원장과 박 원장이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다.
거절하자니 거절할 이유도 애매하고, 같이 다니자니 그것도 눈치가 보이는 상황이기 때문이었다.
그래. 어차피 대표님이 당분간 봉사를 다니라 하셨으니, 한동안은 같이 다니는 게 도움이 될지도.
빠르게 생각을 마친 김태식이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저희도 좋죠. 사람들이 더 좋아할 거예요.”
“잘 생각하셨어요. 그럼, 같이 가실까요?”
“어디를요?”
“아직 시간 많이 남았잖아요. 출발하시죠. 제 쌍화탕도 좀 들어주시고요.”
···
그렇게 월요일 아침.
출근한 김태식과 박용준이 퀭한 눈으로 서로를 바라봤다.
“괜찮으세요?”
“아주 죽겄어..”
“대체, 그 사람은 뭐 하는 사람일까요?”
허준과 함께한 토요일, 장장 7시간에 걸친 강행군의 여파였다.
그렇다고 같이 다니자고 해놓고 중간에 그만하자고도 말할 수 없는 일이었으니.
“나도 몰라. 지난번에 봤을 때부터 좀 이상하긴 했어.”
“그러니까, 왜 그때같이 하겠다고 하셔서..”
“그럼, 어떻게 해? 그 상황에서 각자 알아서 하자고 하기도 모호하잖아. 대표님 지시도 있었는데..”
“그건, 그렇죠.”
그렇게 말하던 박용준이 갑자기 피식 웃었다.
그날의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오랜만에 보람차긴 했어요. 피가 뜨거워지는 기분이랄까? 이런 느낌도 썩 나쁘지는 않네요.”
“젊어서 그래. 젊어서. 참, 오늘부터지? 이진혁 선생님이 오시기로 한 거.”
“네. 오면서 보니까, 벌써 홍보도 나갔더라고요.”
“좋아. 그럼 우리도 정신 차리고 시작하자고.”
* * *
아이들은 호기심이 많다.
세상 모든 것이 궁금하고, 재밌다.
그래서였을까.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사고는.
“어머님. 죄송하지만, 아영이.. 손가락 절단해야 할 것 같습니다.”
청천벽력같은 소리였다.
그저 아주 잠깐 한눈을 판 것뿐인데, 그 대가치고는 너무나 가혹했다.
“어떻게 다른 방법은 없을까요?”
“네, 이쪽을 보시면 이미 괴사가 진행되어가고 있어서.. 이게 최선입니다.”
“그럼.. 얼마나?”
“아무래도 이 정도까지는 생각을..”
친절한 의사선생님이 이 순간만큼은 악마처럼 느껴진다.
손가락 두 마디라니.
생명에는 지장이 없다지만, 딸이 어떤 삶을 살아갈지 생각하자 아찔했다.
“힘든 결정이시겠지만-”
김미영은 뒷말이 이어지기도 전에,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나 진료실을 나섰다.
그래. 아직 모르잖아. 세상은 넓고 병원은 많아.
하지만, 여러 군데를 돌아다녀 봐도 결과는 바뀌지 않았다.
환자끼리는 통한다고 했던가. 여기저기 병원을 돌다가 환자들의 대화 속에서 한의원에서도 간혹 낫는 경우가 있다더라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그래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한의원들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들려온 답변은 변함이 없었다. 아무래도 화상의 정도가 너무 심해 치료가 어려울 것 같다는 답변뿐이었으니까 말이다.
그렇게 돌고 돌다가 도착한 곳.
혹시 TV에 나오는 선생님이라면 방법을 알고 계시지 않을까? 라는 막연한 기대감에 경희한의원까지 찾아오게 된 것이었다.
“진료실로 들어가실게요~”
TV와 똑같이 생긴 이진혁 선생님이 앉아 계셨다.
“어서오세요. 화상 때문에 오셨다고 하셨죠. 한 번 보여주시겠어요?”
“아영아 선생님께 손.”
이진혁이 조심스럽게 붕대를 풀고는, 눈앞에 나타난 작은 손을 바라봤다.
이렇게까지 심각할 줄이야.
“이거.. 병원에 들렸다 오신거죠?”
“물론이죠.”
“병원에서는 뭐라고 하던가요?”
“그게, 절단..”
김미영이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이진혁의 눈치만 살폈다.
여러 곳의 병원과 한의원을 다닌 탓일까. 눈앞에 앉아있는 선생님의 표정만으로도 이미 그 답을 예상할 수 있게 되었다.
풀린 붕대를 다시 딸의 손에 조심스럽게 감았다.
그러고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선생님. 가자, 아영아.”
“안녕히 계세요. 선생님.”
“죄송합니다.”
예의 바르게 인사하는 아영이를 본 이진혁이 씁쓸하게 입맛을 다셨다.
이미 손끝이 살짝 검게 변해있지 않았던가. 자신이 내릴 수 있는 진단은 수지 접합병원으로 의뢰서를 써주는 것뿐이었다.
그렇게 경희한의원을 나선 모녀.
아영이가 손가락으로 붕어빵을 가리킨다.
“어서 오세요~ 몇 개 드릴까?”
“1000원어치만 주세요.”
“알겠습니다. 자 여기, 뜨거우니까 조심하시고~”
따듯한 붕어빵을 아영이 손에 하나 쥐여주자, 그 어린 것이 환하게 웃는다.
그것이 더욱 김미영의 가슴을 미어지게 했다.
그때, 시장골목에서 수다를 떠는 할머니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렇다니까? 내가 아침에 TV에 나온 양반이라고 해서 벌써 갔다 왔지. 아주 인물이 훤 한게 잘생겼어.”
“인물이라면 허준네도 나쁘지는 않지.”
“그보다 그 이야기 들었어?”
“뭐?”
“이제 허준네랑 경희한의원이랑 손잡고 같이 봉사활동 다닌다던데?”
“그래?”
“응. 아무래도 허준 선생한테 물들었나 봐.”
“잘됐네, 잘됐어. 그 선생이 다른 건 몰라도 환자들 생각하는 마음 하나만은 끔찍하지.”
“암, 그렇고말고. 오죽하면 권 여사도 조용해 졌겠어. 그래도 얼굴은 이진혁 선생이여~”
이어서 저 멀리 허준한의원이라 적힌 한의원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혹시나 하는 막연한 기대감.
그렇게 김미영은 딸의 손을 잡고 허준한의원으로 향했다.
* * *
한의원에 찾아오는 환자들은 크게 세 부류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일상생활에 불편함을 느끼는 급성 또는 만성 질환들.
둘째는 침이나 한약을 먹고 만족스러운 효과를 본 경험자들.
그리고 마지막으로 여기저기 돌고 돌다가 혹시나 해서 찾아오는 환자들.
지금, 허준의 눈앞에 앉아있는 작은 아이가 그 마지막에 해당하는 셈이었다.
“그러니까, 전기 콘센트 사고가 나서 이렇게 되었다는 거죠?”
“네. 선생님. 제가 잠시 한눈을 판 사이에..”
“엄마, 이건 뭐에요?”
“아영아 가만히 있어. 죄송해요. 애가 호기심이 많거든요.”
여기가 유명한 한의원도 아니고, 시장 골목에 있는 한의원까지 찾아올 정도라면 대체 얼마나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다 온 것일까.
‘그래. 이게 괜히 나타난 것은 아닐 거야.’
<그림을 좋아하는 아이>
* 진행도 : 0%
* 보상 : 포인트 1000
아이와 함께 나타난 퀘스트.
상처가 심하다고 두려워 할 필요없다.
아이의 회복력을 믿고, 얻은 능력으로 도움을 주면 된다.
결론을 내린 허준이 입을 열었다.
“사실대로 말씀드리면 확답은 못 드리겠습니다. 치료 중에 악화가 될 수도 있고, 그렇게 된다면 결국에는 말씀하신 것처럼 절단도 각오하셔야 합니다.”
“괜찮아요. 이미 어느 정도 마음의 각오는 하고 있어요. 그러니, 치료라도 한 번 해주세요.”
“알겠습니다. 그러면 치료 시작하죠.”
“감사합니다. 선생님. 정말, 감사합니다.”
김미영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저 치료를 시작하자는 이야기뿐이었음에도, 여태까지 옭아매던 아이에 대한 죄책감이 조금은 덜어졌기 때문이리라.
“아닙니다. 저보다는 앞으로 어머님이 더 힘드실 거예요.”
그렇게 시작된 치료.
침을 든 허준이 그 어느 때보다 집중하기 시작했다.
아이의 손가락은 성인보다 훨씬 작았다.
그리고 화상으로 인해 두꺼웠다.
침이 들어가자, 어느 순간 아영이가 움찔한다.
자극이 있다는 뜻이다.
이는 곧 신경이 살아있다는 뜻이고. 좋은 징조다.
들어가던 침이 어느 순간 여기까지라 말한다.
평소 들어간 깊이의 반도 안되었지만, 당연한 일이었다.
손 끝에 감각을 느끼며 천천히 자극한다.
급할 필요 없다.
그렇게 하나하나씩 집중해서 침을 놓기 시작했다.
따스한 햇볕 때문인지, 집중해서인지 허준의 이마에 땀이 한 방울 맺혔다.
“휴-”
침을 다 놓은 허준이 숨을 몰아쉬었다.
“아영이는 참 용감하구나?”
"이 정도는 참을 수 있어요."
대답을 들은 허준이 장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선생님 오늘은 끝나셨나요?”
“아니요. 조금 있다가 침 뽑고, 연고를 바를 겁니다.”
“아, 네..”
“어머님. 마음 굳게 드세요. 긴 여정이 될 겁니다.”
그렇게 아영이의 첫 치료가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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