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벨업 하는 한의사-24화 (25/230)

24화. 커피 맛 좋네

24화. 커피 맛 좋네

“민수 엄마는 그래도 좋겠네.”

“좋기는, 내가 할 줄 아는 게 뭐가 있어? 다른 동네로 가서 또 이거 하고 있겠지.”

구역에 포함된 사람들과 아닌 사람들 사이에는 알게 모르게 신경전이 펼쳐졌다.

이미 재개발이 진행되고 있었기에 언젠가는 벌어질 일이라고 다들 예상은 했겠지만, 막상 닥쳐오니 배가 아픈 탓이리라.

그리고 이 중에서 가장 인상을 쓰고 있는 것은,

“아니, 이게 왜 갑자기 걸려있데? 참, 어이가 없어서.”

“그러게 말입니다. 원래 이번 달 말은 돼야지 건다고 했던 거 같은데..”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할 거야? 2층 한의사 양반은 아침마다 인사하면서 찾아올 생각도 안 하는 것 같은데. 순철이는 뭐래?”

“순철이는 어떻게든 빠르게 팔려고 하나 봐요.”

과일가게 박용순이 머리를 움켜쥐었다.

정육점 순철이 말대로라면 분명히 2층 한의사 선생이 내려오고 싶어 한다고 했는데, 왜 찾아오지 않는 걸까.

관심이라도 있으면 가격이라도 물어봐야 하는 게 정상이 아닐까.

아니야, 어쩌면 요즘에 늘어난 사람들 때문에 바빠서 못 온 걸지도 모르잖아.

···

온갖 생각들이 떠오르다가 결국 한가지 결론에 도달했다.

지금, 불똥이 떨어진 것은 자기 발등이라는 것을.

“누님. 아무래도 우리가 먼저 찾아가 보는 게 어때요.”

“우리가? 네가 쫄리는 놈이 지는 거라면서?”

“어쩔 수 있나요. 지금 상황이 이런데. 물불 가릴 처지가 아니잖아요. 더 좋은 생각이 있으면 말해 봐봐요.”

*   *   *

허준한의원의 금요일 점심시간.

오랜만에 다 같이 짜장면을 시켜 먹었다.

“원장님. 잘 먹었습니다.”

“맛있게 먹었어요. 원장님.”

“별거 아닌데요. 뭐.”

“커피 드실 거죠? 커피는 저희가 사 올게요.”

그러면서 문을 열고 나가는 두 선생 앞에 한 남녀가 찾아 왔다.

김 선생이 그들을 알아보고 인사했다.

“어? 안녕하세요 1층 과일가게랑 떡집 사장님이시죠?”

“맞아요.”

“그런데, 저희 지금 점심시간이라 진료 보시려면 조금 기다리셔야 할 것 같은데..”

“아파서 온 게 아니라, 원장님이랑 이야기 좀 할 게 있어서요.”

“아~ 그러시구나. 들어가세요. 원장님 안에 계세요.”

그렇게 한의원 안으로 들어온 박용순과 김말자.

어지간히 급했나 보다.

“사장님들. 커피라도 한잔 드릴까요?”

“괜찮아요.”

“어쩐 일로 오셨어요?”

“그게...”

박용순 말을 잇지 못했다.

막상 찾아오기까지는 했는데, 말하려니 말문이 막힌 탓이었다.

옆에 앉아있던 김말자가 대신 답했다.

“선생님. 아래 정육점 하는 순철이 아시죠?”

“김순철 사장님이요?”

“네. 순철이가 그러는데, 선생님이 1층으로 한의원 이전하고 싶으시다고 하셨다면서요.”

“제가요? 아무래도 김순철 사장님이 뭔가 오해하신 거 같은데요?”

“네?”

허준의 대답에 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제가 어쩌다가 요 아래 정육점을 내놓으셨다는 소리를 들었던 기억이 나서, 마침 출근하는 중에 사장님이 보이시길래 가격이 얼마나 되나 하고 궁금해서 물어본 거예요.”

“그게 그 말 아니에요?”

“아니죠. 사장님들도 장사하시면서 자주 겪으시지 않나요? 그냥 지나가는 손님이 이거 얼마에요 하고 묻고 그대로 가는 그런 경우이었던 거죠.”

박용순이 머리를 망치에라도 맞은 듯이 눈을 껌뻑였다.

허준이 말한 비유가 몸에 와닿기 때문이었다.

박용순이 헛기침을 하더니 입을 열었다.

“선생님. 그래서 어떻게, 아예 내려오실 생각은 없으신 건가요?”

둘의 시선이 허준의 입으로 향했다.

허준이 잠시 머뭇거리며 시간을 두고 답했다.

“뭐, 사실 생각 같아서는 가격만 괜찮으면 내려가고 싶기도 한데, 아직은 잘 모르겠어요. 공사 시작하면 보나 마나 시장에 찾아오는 사람들도 줄어들 테고, 한의원에도 어떤 영향을 미칠지 아직 알 수 없어서 긴가민가하거든요. 그래서 일단 기다려보려고요. 어차피 사람들 줄어들면 권리금은 시간이 지날수록 내려갈 테니까요.”

두 당사자 앞에서 마치 남의 일이라도 되는 양 말하는 허준.

그 모습에 둘은 속이 부글부글 끓었지만, 맞는 말이었기에 반박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이어진 허준의 말이 마지막을 장식했다.

“게다가, 어차피 여기 공사하기 시작하면 이제 여기도 더는 사거리가 아니잖아요. 그러면 뭐... 아 참, 죄송해요. 제가 너무 제 입장으로만 생각했죠? 2년 전에 여기에 들어올 때 당한 게 아직도 가슴에 맺혔나 봐요.”

“아니에요. 그럼, 저.. 선생님은 얼마 정도 생각하시고 계시는데요?”

“과일가게 내놓으시려고요? 저야, 뭐 싸면 쌀수록 좋죠. 제가 부자도 아닌데.”

“끙..”

박용순이 앓는 소리를 하면서 고민에 빠졌다.

그때, 옆에 앉아있던 김말자가 말했다.

“선생님. 저는 그냥 주변 시세만 맞춰주시면 돼요.”

“누님?”

그동안 견고했던 둘의 동맹이 깨지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허준은 대답 대신에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요즘 시세가 어느 정도 인지 제가 잘..”

“1층에 시장 중심 사거리라서 예전에 5천 정도에 거래됐었거든요? 그 정도만 맞춰 주시면..”

“5천이요..? 어우~ 생각보다 더 비싸네요.”

“그럼..”

그때, 박용순이 답했다.

“선생님. 저는 3천, 딱 3천이면 됩니다.”

허준이 생각하고 있던 적절한 권리금이었다.

그런데, 지금 모습을 보니 조금 더 질러봐도 괜찮을 것 같은데?

“3천이면 확실히 흥미가 조금 생기긴 하네요. 그런데 정육점 사장님은 인터넷에 2천에 올려두셨던데..”

“2천이요?”

“네. 그래서 제가 궁금해서 물어보려고 간 거였거든요. 물론, 더 깎아 줄 의향도 있다고 말씀하셨고요.”

2천이면 이 시장에서 장사를 처음 시작할 때 들인 권리금과 비슷한 금액이었다.

박용순이 잠시 머뭇거리는 사이에 김말자가 무언가 결심한 듯이 먼저 답했다.

“좋아요. 2천.”

“그, 그럼 저도 2천에..”

그 모습에 박용순도 얼떨결에 같이 대답했고,

“음... 확실히 고민되는 가격이네요. 일단은 나중에 연락 드려도 될까요? 이제 곧 진료시간이라서.”

“네. 물론이죠.”

“그럼요.”

“조심히 내려가세요. 두 사장님의 생각은 잘 들었으니까, 제가 고민 좀 해볼게요.”

그렇게 둘은 한의원을 나섰고,

김 선생이 원장실로 커피를 들고 들어왔다.

“원장님.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하셨어요? 뭔가 기분이 좋은 일이 있으신 거 같네요?”

“그래 보여요?”

“네. 그런데, 덕분에 커피는 좀 녹았어요.”

김 선생이 얼음이 녹아 양이 많아진 아이스아메리카노를 건넸다.

허준이 그걸 받아들면서 답했다.

“아마도 한의원 이전할 것 같아요.”

“이전이요? 어디로요?”

“바로 아래 1층으로요.”

“잘됐네요. 축하드려요. 원장님.”

“축하는요 무슨, 일단은 윤 선생님한테도 전해주세요.”

“그럼요. 당연하죠.”

허준이 창가를 내려다보면서 손에 든 커피를 쭈욱 한번 들이켰다.

“오늘따라 커피 맛 좋네.”

*   *   *

그날 저녁.

5일간의 진료와 탕약을 달인 끝에 허준은,

보유 포인트 : 577

500포인트가 넘는 포인트를 모을 수 있었다.

침술이 4레벨부터 환자들이 느끼기에 차이가 큰 것을 보니, 뜸도 마찬가지일 터.

「‘구술 Lv. 3’에 500포인트를 사용합니다.」

「‘구술 Lv. 3’이 ‘구술 Lv. 4’가 되었습니다.」

[구술 Lv. 4]

- 구술의 효능이 증가한다.

뜸의 효능을 높이고, 탕약을 달인 뒤에 한의원을 나섰다.

목적지는 1층의 과일가게와 떡집.

너무 시간을 끌어서 좋을 것도 없지.

재개발 이주기간은 보통 짧게는 4개월, 길게는 반년까지도 걸리기에 공사를 시작하기까지는 아직 충분한 시간이 있었다.

하지만 괜히 너무 값싸게 들어가려고 시간을 끌다가는, 반대로 시장에 찾아오는 유동인구에서 단골을 만들 시간이 그만큼 반비례했다.

쇠뿔도 단김에 빼라고 했으니.

밤 10시가 되어가는 시각.

슬슬 가게들 문이 하나 둘 닫히고 과일가게 사장 박용순도 길에 내놨던 과일을 안으로 옮기고 있었다.

허준이 다가가자, 박용순이 부리나케 달려왔다.

“선생님. 퇴근하시는 중이신가요?”

“네. 그리고 제가 생각을 좀 해봤는데요.”

꿀꺽- 박용순의 목젖이 오르내렸다.

“사장님들이 저를 생각해주셔서 가격을 많이 낮춰 주시니, 아무래도 이 자리가 저와 인연이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제야 긴장했던 박용순의 얼굴에 화색이 돈다.

“그럼요. 본래 자리잡는 게 다 인연이 있어야 하는 거죠. 그래서 계약은 어떻게 할까요?”

“내일 오전에 바로 하시죠.”

“알겠습니다. 그럼, 혹시 가게 빼는 날짜는 언제까지로 생각하시는지?”

“그야 빠르면 빠를수록 좋죠.”

그렇게 1층 계약 완료.

다음날 떡집과 정육점, 과일가게 세군데는 계약서를 작성하고 아침부터 재고정리를 위해 파격 세일에 들어갔다.

그리고 토요일 진료가 끝난 허준한의원 원장실.

“오늘 아침에 벌써 계약을 끝내셨다고요?”

“네. 이번 주말까지 재고정리 다 하시고 빼준다고 하셨거든요. 다음 주부터 아마 공사할 수 있을 거예요.”

“잘됐네요. 그럼 이제, 어르신들 힘들게 계단으로 안 올라오셔도 되겠네요.”

“그렇죠.”

“참, 이거 원장님이 부탁하신 건데, 이건 왜 필요하신 거예요?”

김 선생이 메일로 전달받은 명단을 허준에게 건넸다.

인근에 있는 복지원과 쉼터의 연락처와 주소였다.

“지난주에 영등포에 갔을 때, 좀 느낀 게 있어서요.”

“그럼, 오늘은 서울역으로 안 가시려고요?”

“네. 어차피 서울역에는 저 말고도 환자들을 돌봐줄 사람들이 많이 있잖아요.”

‘그리고 확인하고 싶은 것도 있고.’

허준이 뒷말을 삼켰다.

처음에 기연을 얻은 뒤로 한꺼번에 여러 일이 겹치면서 그것들을 해결하느라 정신이 없었으나, 언젠가부터 방향성이 있지 않을까 의문이 든 터였다.

처음에는 퀘스트가 그냥 환자의 숫자를 제시하다가, 이제는 퀘스트에 직접적으로 환자가 있는 장소를 명시까지 해주니 말이다.

흔히 말하는 인술.

다른 사람을 돕고 사랑하는 일.

왠지 모르게 기연이 자신을 그리로 이끄는 것 같았다.

마치, 많은 사람을 돌봐주라는 듯이 말이다.

그리고 기연은 그 대가로 능력을 준다.

이것이 허준이 내린 결론이었다.

‘그러니 확인해 봐야겠지.’

허준이 침과 뜸, 그리고 쌍화탕을 챙겨 원장실을 나섰다.

이거 생각보다 무겁네.

그렇게 한의원을 나서려는데,

뒤에서 김 선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원장님. 그거 혼자서 다 들고 가시려고요?”

허준의 등에는 등산용 배낭과 양손에는 각각 쌍화탕 박스가 들려있었다.

“제가 태워드릴게요.”

“김 선생님 운전도 하실 줄 아세요?”

“그럼요. 윤 샘, 잠깐만 마감 해주고 계세요. 제가 원장님 금방 태워드리고 올 테니까.”

“네. 걱정하지 말고 다녀오세요. 김 샘.”

허준의 손에 들린 쌍화탕을 낚아챈 김 선생.

저걸 저렇게 가볍게 든다고?

그렇게 김 선생의 차 앞에 도착했는데,

“이게 김 선생님 차에요?”

허준의 입이 벌어졌다.

대체 김 선생님은 왜 여기서 일하고 계신 걸까.

*   *   *

소문 빠른 시장 골목은 재개발로 인해 더욱 소문에 가속이 붙기 시작했고,

허준한의원이 1층의 상가를 계약했다는 소문도 금세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허준한의원에 자주 다니던 사람들은.

“그동안 고생한 보람이 있으시네.”

“그 선생님이 젊은데 실력이 끝내준다니까? 내가 이렇게 될 줄 알았다니까.”

“그런데, 여기 재개발 공사 들어가면 사람들 확 줄어들 텐데 그게 괜찮으려나.”

응원과 격려, 그리고 칭찬과 우려를 표했고,

“뭐? 1층으로 내려온다고?”

“네. 대표님.”

“이주 시작됐다며.”

“맞습니다.”

서 선생이 CCTV에 찍히는 바람에 한동안 조용히 지내던 최인호에게도 그 소식이 들어갔다.

“그래? 우리 인근에 있는 대학생 친구들은 얼마나 오고 있지?”

“다이어트약이랑 피부 등으로 꽤 됩니다.”

“좋아. 수고했어. 김 원장.”

전화를 끊은 최인호가 능글맞게 웃으며 나직이 읊조렸다.

“겁도 없이 도전장을 내밀어? 이제 정면승부 해보자 이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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