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또 당할 줄 알고
22화. 또 당할 줄 알고
토요일.
진료를 마친 허준은 박 선생님이 알려준 장소로 향했다.
영등포역에서 내려 지도를 보고 도착한 허준은 눈앞에 있는 건물을 보고 발걸음을 멈춰섰다.
‘여기가 맞나? 생각보다 더 작잖아?’
[민들레 쉼터]라는 조그만 간판이 제대로 찾아왔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당연히 서울역에 있는 쉼터보다는 작을 거로 생각했었는데, 이 정도 일 줄은 예상치 못한 허준이었다.
이는 센터라는 느낌보다는, 집을 개조한 형태에 가까웠다. 마치, 대학교 인근의 고시원처럼.
문을 열고 들어선 허준.
한 중년인이 다가와 물었다.
“어떻게 오셨어요?”
“박진석 선생님 소개로 왔는데요.”
“아! 이허준 선생님이시죠? 어제 연락받았습니다. 반갑습니다, 진호인이라고 합니다.”
“이허준입니다.”
진호인이 내민 손을 허준이 마주 잡았다.
“박 선생님에게 오늘 오신다는 이야기를 듣기는 했는데, 생각보다 젊은 분이 오셔서 놀랐습니다. 일단 이쪽으로 들어오시죠. 시원한 주스를 드릴까요? 커피를 드릴까요?”
“커피로 할게요.”
“알겠습니다. 거기 앉아서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진호인이 커피를 건네면서 두리번거리고 있는 허준에게 말했다.
“놀라셨죠? 서울역과 비교하면 규모가 작아서.”
“아닙니다.”
“저희는 국가에서 운영하는 단체가 아니라 민간에서 운영 중이라 아무래도 규모가 작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도 다행이 여기저기서 도움을 많이 주셔서 아직까지는 잘 유지되고 있는 편이죠.”
허준이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는 답했다.
“그렇군요. 저는 그럼 이 쉼터에 있는 분들만 진료를 보면 되는 건가요? 박 선생님이 자세히 말씀을 안 해주셔서.”
“아 여기 계시는 분 외에도 밖에도 몇 분 계시거든요. 일단은 쉼터에 계신 분들을 먼저 봐주시고 끝날 즈음에 제가 불러올게요.”
“연락이요?”
“그럼요, 요즘 노숙자분들도 대부분 스마트폰 있어요.”
“진료는 어디에서 보면 될까요?”
“지금 이 자리에서요.”
의료용 베드는 없어도, 사람이 누울만한 소파 몇 개가 눈에 들어왔다.
뭐 이 정도면 충분하려나.
허준이 남은 커피를 한 번에 털어 넣고 진호인이 안내해주는 방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중년부터 노년의 여성분들이 앉아서 기다리고 계셨다.
“안녕하세요. 오늘 박 선생님 대신에 온 이허준 이라고 합니다. 아픈 곳 있으시면 편하게 말씀 해주세요.”
진료 시작.
첫 번째 환자는 나이 지긋하신 할머니셨다.
“불편하신 곳은 없으세요?”
“우리야 괜찮지 뭐. 그냥 가끔 몸이 결리는 정도 말고는.”
음, 역시 쉼터 안에 있는 사람들의 상태는 양호하네.
잠자리와 음식, 그리고 청결이 유지되니 이전까지 보던 노숙자들과의 차이가 컸다.
허준이 환자들의 얼굴과 몸 그리고 진맥을 잡아 도움이 될만한 자리에 침과 뜸을 놓았다.
이 정도면 충분했다.
간혹 담이 걸렸다거나, 관절의 노화로 통증이 오신 분들에게는 그에 따른 처방을 내리렸다.
그러기를 2시간 째.
쉼터 안에 있는 환자들의 진료를 끝마칠 수 있었다.
* 진행도 : 17%
0%에서 17%로 올라간 진행도.
이거 생각보다 쉬울지도?
한숨 돌리고 로비로 내려오자,
익숙한 모습의 사람들이 줄지어 기다리고 있었다.
허준이 화장실에서 찬물로 세수를 하고는, 두 손으로 볼을 가볍게 찰싹 두드렸다.
그렇게 이어진 진료.
“불편하신 곳은 없으세요?”
“엊그제 자고 일어났는데 여기가 이렇게 퉁퉁 부었지 뭐에요.”
남자가 바지를 걷어 발목을 보여줬다.
“어디 넘어지거나, 부딪치시지는 않으셨죠?”
“네.”
“그럼, 제가 한번 봐볼게요.”
허준이 남자의 부어오른 발목에 손을 가져다 댔다.
따듯함이 느껴져 온다.
부어오른 발목과 미열감, 전형적인 염좌의 증상이다.
허준이 준비된 알콜 솜으로 환부를 소독하고 침을 놓았다.
손끝으로 전해지는 침 감. 손쉬운 치료다.
허준이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가 다음 환자를 맞았다.
인상이 찐하고, 골격이 거대하다.
남자가 경계하는 눈빛으로 허준을 바라봤다.
서울역 첫 의료봉사 때 만난 얼굴의 흉터가 있는 노숙자가 떠 오른다.
그분도 처음에는 저런 눈빛으로 바라보셨었지.
“어디가 아프셔서 오셨어요?”
···
2시부터 시작된 진료가 7시가 채 되기도 전에 싱겁게 끝이나 버렸다.
뭐야, 벌써 끝이라고?
허준의 진료가 빨라진 탓도 있었지만,
서울역에 비해서 그 숫자가 훨씬 적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정작 당황스러운 것은 허준이었다.
* 진행도 : 72%
그럼 남은 28%는 어떻게 하라는 건가.
허준이 머리를 아무리 굴려봐도 도저히 답이 나오지 않는다.
쉼터에 있는 환자들은 전부 진료가 끝났고, 찾아오는 사람들의 진료도 전부 끝냈다.
환자가 없는 것이었다.
‘큰일이다.’
그렇다고 지금 서울역으로 간다고 해도 이미 끝이났을지도 모를 뿐더러, 진행도가 올라간다는 보장이 있는 것도 아닌 상황.
그때, 진호인이 겉옷을 챙겨 입으며 말을 건넸다.
“선생님. 나가시죠. 준비는 되셨죠?”
“준비요?”
“아, 박 선생님이 이것도 말씀 안 해주셨나 봐요? 저희가 이렇게 의료봉사할 때에 동네 쪽방촌에 계시는 거동이 불편하신 분들은 직접 찾아가야 하거든요.”
허준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두 주먹을 불끈 쥐고는 말했다.
“다행이다. 저는 여기서 의료봉사가 끝난 줄 알았거든요.”
“네? 그게 무슨..”
진호인이 의아하다는 얼굴로 되물었다.
“아, 혼잣말이에요. 금방 준비해서 나갈게요.”
“네. 밖에서 기다리겠습니다.”
그렇게 둘은 영등포에 있는 쪽방촌을 누비기 시작했다.
“여기 완전히 영화에서나 나올 것 같은 동네네요.”
“그럼요. 실제로 여기에서 영화도 꽤 촬영했을걸요?”
“아직도 서울에 이런 곳이 남아 있다니.”
“예전에는 여기가 여인숙이랑 집창촌이 있던 그런 곳이었는데, 거기가 이제 시간이 지나면서 사라지고 이렇게 쪽방촌으로 바뀌기 시작한 거죠.”
“그렇군요.”
“덕분에 노숙자분들 중에는 종종 이곳에서 며칠씩 지내다 밖에서도 지내고 하시는 분들도 많고요.”
허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서울역에 다니면서 알게 된 바로는 노숙자들도 두 부류가 있다는 것이었다.
바로, 생계비 지원을 받는 노숙자와 아닌 사람.
매달 20일에 지급되는 생계비로 이런 쪽방촌 같은 곳에서 지내는 것일 터.
“어떻게 보면, 아이러니해요. 이거 전부 다 불법 개조인데, 덕분에 집 없이 길거리에서 지내는 사람들은 따스한 밤을 맞게 해주는 곳이기도 하니 말이에요.”
“듣고 보니 그렇네요.”
“여깁니다.”
진호인과 도착한 조그만 방.
쪽방이라 불릴 만큼 좁은 방안에 한 노인 누워 있었다.
“아이고, 진 선생님 오셨네.”
“잘 지내셨죠. 식사는 하셨고요? 오늘 진료 보는 날이잖아요.”
“진료는 무슨, 여기서 이렇게 살다가 그냥 가는 거지 뭐.”
“어르신, 여기 한의사 선생님도 오셨는데 무슨 그런 말씀을 하세요.”
진호인이 허준을 바라보며 무안하다는 눈빛을 흘렸다.
그러나 허준은 아랑곳하지 않고 준비해 온 침과 뜸을 꺼내며 말했다.
언뜻 듣기에는 세상 통달하여 삶에 미련이 없는 것 같이 들릴지 모르지만,
이미 여러 노숙자와 이야기를 나눠본 허준은 단번에 그 의중을 파악할 수 있었다.
“어르신, 진맥 한번 잡아 볼게요.”
슬그머니 내놓는 손을 허준이 잡아 맥을 느꼈다.
맥이 약하다. 본인 스스로도 알고 있는 거다. 죽어 가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런 노인을 향해 허준이 웃으며 말했다.
“건강하시네요.”
“정말?”
노인의 목소리가 밝아지며 되묻는다.
“네. 아주 좋으세요. 어디 또 불편하신 곳은 없으세요?”
···
그렇게 20여 군데를 더 돌고서야 오늘의 봉사를 끝낼 수 있었다.
그리고,
「퀘스트 ‘길거리의 환자들. 1’을 완수하였습니다.」
「포인트를 500 획득하였습니다.」
* 보유 포인트 : 803
퀘스트도 끝이 났다.
진호인이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고 있는 허준을 불렀다.
“수고하셨습니다. 이허준 선생님. 많이 피곤하시죠?”
“아, 괜찮아요. 진 선생님이 더 고생하셨죠.”
“별말씀을요. 저야 늘 하던 일인걸요. 박 선생님이 이허준 선생님을 대신 보낸 이유를 조금은 알겠네요.”
“그래요?”
“네. 쪽방촌에 계신 분들이 그렇게 환하게 웃는 모습은 오랜만에 보거든요.”
“그야.. 제가 어려서 그런 거 아닐까요?”
“그런가요? 이거, 제가 뭐라도 더 해드리고 싶은데, 뭘 해드릴 수가 없네요.”
“괜찮습니다. 마음만 받을게요. 이만, 가 보겠습니다.”
허준이 그대로 지하철 역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진호인이 떠나가는 허준의 뒷모습을 보며 피식 웃었다.
왠지 모르게 같이 있다 보니 기분이 좋아진 탓이었다.
‘박 선생님이 좋아하실 만한 분이시네.’
길을 걷던 허준이 갑자기 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
문득, 부모님이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어? 아들?”
“엄마. 별일 없죠?”
“그럼, 참, 너가 뜸 놓으라고 자리 알려주고 갔다면서?”
“그래서 아빠는 괜찮으세요?”
“아주 좋아졌어. 들어볼래?”
“뭘요?”
스마트폰 너머로 탕- 탕- 하고 경쾌한 소리가 들려온다.
허준이 그 소리의 정체를 금세 깨달을 수 있었다.
“다행이에요. 그래도 무리하지 마시고 술 적당히 드시라고 하세요.”
“알았어. 그런데, 웬일이야? 너가 먼저 전화를 다하고?”
“그냥 다들 아프지 말고 건강하시라고요.”
* * *
일요일 오전.
커피를 마시는 허준의 머릿속.
‘야, 한의원 1층으로 이전하려면 돈이 필요하잖아? 너 돈 많아? 돈을 벌려면 포인트 조금만 더 모아서 탕약의 효능을 올려야지.’
‘무슨 소리. 일침이구삼약이라는 말 못 들어 봤어? 침이 가장 먼저요, 그다음이 뜸이고 마지막이 약이라고 적혀있거늘. 당연히 침이 먼저지.’
‘그건 환자의 병세에 대한 처방의 우선 순위지. 맨 앞에 있다고 침이 먼저겠어? 얼마 되지 않은 병세에 침이 좋더라. 이런 뜻이지.’
‘웃기는 소리. 예부터 값비싼 약을 사용하지 못해서 많은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걸로는 침과 뜸을 꼽았거늘.’
‘너, 자꾸 그러다 한의원 쫄딱 말아먹는 수가 있다?’
‘히히. 아무거나 올려. 어차피 난 아니잖아.’
천사와 악마가 서로 말싸움을 벌이는 중이었다.
이는 퀘스트를 해결하고 얻은 대량의 포인트로 침이나 뜸의 효능을 올릴 수 있는 상황에서 생겨난 고민이었다.
탕약을 올리기에는 포인트가 조금 부족한 상황.
며칠만 더 지나면 올릴 수 있을 테니, 1층으로 내려가고 싶어 하던 허준의 욕심이 투과된 결과였다.
그런 허준의 결정은.
「‘침술 Lv. 3’에 500포인트를 사용합니다.」
「‘침술 Lv. 3’이 ‘침술 Lv. 4’가 되었습니다.」
[침술 Lv. 4]
- 침술의 효능이 증가한다.
보유 포인트 : 304
침술로 기울었다.
다른 이유는 없었다.
그저 지금 한의원에 찾아오는 환자들의 얼굴을 떠올리니, 대부분이 침을 맞으러 오시는 분들이었기 때문이다.
‘됐어. 이미 끝난 일이야. 후회하지 말자.’
그때, 전화가 울렸다.
모르는 전화번호.
“여보세요?”
“아, 선생님?”
목소리를 듣자마자 바로 알 수 있었다.
“저, 김순철입니다.”
“안녕하세요. 사장님. 무슨 일이세요?”
김순철이 허준에게 옆의 집들과 대화해 봤지만, 좁혀지지 않은 의견에 대해서 말했다.
“선생님이 엄청나게 대박 나신줄 아시더라고요.”
듣고나니, 괘씸하네?
확장도 아니고 이전인데, 1층 상가가 어디 거기에만 있는 줄 아나.
“어쨌든 이야기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참, 그리고 이건 어제 들은 비밀인데, 한 달 내로 이주기한 공표한다고 합니다.”
그 말을 들은 허준의 입꼬리가 사악하게 올라갔다.
2년 전에는 내가 바보처럼 당했겠지만, 또 당할 줄 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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