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언제 쓰겠어요
17화. 언제 쓰겠어요
“안녕하세요, 김영하 씨. 연휴는 잘 보내셨어요?”
“그럼요~ 선생님도 잘 보내셨죠?”
“네. 저도 그럭저럭 보냈습니다.”
“그런데, 이분은?”
“아, 한의원에서 같이 일하시는 선생님이세요.”
“아, 그러시구나? 반갑습니다. 김영하라고 합니다.”
“김예진이에요.”
“그럼, 오늘 두 분이 같이 오신 거예요?”
“아니요.”
“아니에요.”
동시에 대답하는 허준과 김예진.
김영하가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보다 이게 다 무슨 일이에요? 쉼터 분위기가 조금 많이 바뀐 것 같네요. 사람들도 많아진 것 같고.”
허준의 물음에 김영하가 밝게 웃으며 답했다.
“방송이 나간 뒤에 여기저기서 후원금도 들어오고, 저렇게 필요한 물품을 보내주신 분들도 있고, 봉사 신청을 참여하시는 분들도 이전보다 배는 늘었더라고요.”
“그래요? 정말, 잘됐네요.”
“그럼요. 덕분에 제가 할 일은 많아졌지만요.”
김영하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 모습을 본 허준이 지난 며칠간 찾아온 사람들을 떠올리며 이해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방송의 혜택을 본 것은 자신만이 아니었나 보다.
“힘드셨겠어요.”
“뭘요~ 부족해서 해주고 싶어도 못 해줘서 마음 아픈 거보다는 차라리 몸이 힘든 게 낫죠. 덕분에 요즘에는 쉼터 직원들 전부 일하는 보람을 느끼고 있어요. 게다가 저희보다는 선생님들께서 고생해주신 덕분이죠. 일하시느라 피곤하실 텐데 주말에 쉬지도 않고 오셔서 진료까지 해주시니까요.”
“별말씀을요. 매일 노숙자분들을 챙겨주시는 분들이 고생이 크시죠.”
“선생님이 그렇게 말해주시니 힘이 마구마구 솟는 기분이네요.”
그때, 허준의 눈에 김영하의 뒤편으로 누군가가 들어왔다.
“어? 저 분..”
허준의 눈이 향한 방향을 살펴본 김영하가 누구를 지칭하는지 단번에 알아맞혔다.
“아~ 태현 씨요?”
“저분. 그분 맞죠?”
“네, 맞아요. 놀라셨죠?”
허준이 바라본 곳에는, 마비된 얼굴로 자신을 찾아왔던 청년이 서 있었다.
그것도 이전처럼 찌들었다거나, 얼굴이 어두웠었던 과거와는 완전히 다른 길거리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청년의 모습으로.
그는 행복한 표정으로 노숙자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후원으로 들어온 물품을 나눠주고 있었다.
“태현 씨가 선생님에게 치료받고 난 뒤에, 뭔가 큰 결심을 한 것인지 더는 노숙자로 살고 싶지 않다고 찾아와 말하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일자리를 소개해 드렸죠. 이제는 거리에서 벗어날 용기가 생기셨나 봐요.”
바라보고 있던 허준과 김태현이 눈을 마주친 것은 그때였다.
김태현이 쑥스럽다는 듯이 한 손으로는 머리를 만지며 다가왔다.
“선생님. 오셨네요.”
“태현 씨라고 했죠? 정말 사람이 이렇게 달라 보일 줄 몰랐네요. 몰라볼 뻔했어요.”
“그런가요? 이게 다 선생님 덕분이죠. 그날 선생님이 저를 치료해주시지 않았더라면, 어휴, 지금쯤 어떻게 살고 있을지 상상조차 하기 싫네요.”
“다행히 우리 둘 다 운이 좋았죠.”
“너무 겸손하신 거 아니에요? 인터넷에 찾아보니까 이게 굉장히 드문 일이라고 하던데.”
“그러니 운이 좋은 거죠. 혹시, 그 이후로 또 자극이 온다거나, 증상이 나타나거나 하는 일은 없었나요?”
“네. 그 이후에는 한 번도 없었어요. 게다가 선생님께서 술도 마시지 말라고 하셔서, 술도 아예 끊었고요.”
“정말요? 잘하셨어요.”
“그런 일을 직접 한번 겪고 나니까. 세상이 달라 보이더라고요. 그래서 여기 계신 김영하 선생님께 부탁해서 취직도 하고, 선생님이 돈도 빌려주셔서 고시원 방도 하나 얻었어요. 거기서부터 다시 시작해보려고요.”
김영하가 쑥스러운지 헛기침을 했다.
“그리고 이렇게 시간 날 때마다 노숙자들 도우려고요. 혹시, 또 모르잖아요? 나 같은 사람이 도움을 원하고 있을지. 이만, 가봐야겠어요. 혹시, 연락처 좀 알 수 있을까요? 나중에 뭐라도 도움이 필요하면 연락해주세요. 선생님이 부르시면 언제든지 달려갈 테니까요.”
허준이 김태현이 내민 스마트폰에 연락처를 찍어 건넸다.
그걸 받아든 김태현이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다시 자리로 돌아갔다.
그 모습을 보며 허준이 환한 미소를 지었다.
그저 찾아온 환자의 병환을 치료하기 위해 침을 놨을 뿐인데, 그 작은 침이 한 사람의 삶에 큰 영향을 미쳤다는 것.
나아가 그 사람이 또다시 좋은 영향을 주변으로 미치고 있는 모습을 보고,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생소한 감정이 에워쌌다.
“슬슬 들어갈까요?”
허준이 가볍게 발걸음을 옮겼다.
* * *
사람들의 관심으로 달라진 것은 외부만이 아니었다.
진료를 보는 장소에도 이전에는 못 보던 박스들이 놓여 있었으며, 더 많은 의료진이 참석해 있었다.
그리고 그들 한가운데에는,
신나게 이야기를 하는 박진석과 그 이야기를 들으며 깔깔거리는 의사들이 서 있었다.
“그렇게 해서 이허준이란 친구가 인터뷰를 찍게 된 거라 이 말이야.”
“아~ 어쩐지. 그러니까 선생님 말씀은 그거네요? 인물에서 밀렸다?”
“그래. 이제야 알아듣는구먼. 내가 30년만 젊었어도 당연히 인터뷰는 내 것이었다니까 그러네.”
그중 한 남자가 궁금하다는 듯이 물었다.
“선생님. 그런데, 그건 정말인가요? 그 침으로 안면 마비 환자 고친 거요. 선생님은 진짜로 보셨을 거 아니에요?”
그 물음에 시선이 박진석에게로 쏠렸다.
“내가 봤어야 했는데, 아쉽게도 그 모습을 직접 보지는 못했어. 우리 마누라가 빨리 들어오라고 해서.”
“선생님이었으면 어떻게 하셨을 것 같아요? 사실 한의학적으로도 그게 거의 불가능한 일이라고 많이 그러던데, 애초에 정밀한 진단도 없이 너무 위험한 판단 아니었나요?”
“자네 뭔가 착각하고 있나 본데, 주변을 둘러보게. 뭐가 보이나?”
“그야..”
“여기에 비싼 검사장비가 있으면 당연히 사용했겠지. 그런데 이를 어째, 어디에도 안 보이네?”
질문을 한 사람이 무안하다는 듯이 헛기침을 했다.
“그리고 정 궁금하면 직접 물어보게나, 마침 주인공이 도착했으니.”
허준이 자신을 향해 손을 흔드는 박진석에게 고개를 꾸벅 숙였다.
“안녕하세요. 박진석 선생님. 추석은 잘 보내셨죠?”
“오~ 왔는가? 나야 자네 덕분에 잘 보냈지. 안 그래도 지금 자네에 관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네.”
“제 이야기를요?”
“그럼, 자네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하는 사람이 꽤 많은 모양이야. 특히, 구안와사 환자 치료하는 모습에.”
“아, 그건..”
허준이 잠시 망설였다.
뭐라고 답해야 할지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건 그저..
“운이 좋았죠. 사실, 환자분의 상태가 워낙 좋았거든요.”
일반적인 구안와사 환자의 경우에는 짧게는 몇 주, 길게는 몇 달 운이 나쁘면 더 길게 가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이는 허준이 기연으로 얻은 능력과는 별개로, 환자마다 경중이 다르고 회복속도가 다른 것 때문이기도 했다.
“방송에서는 짧고 임팩트있게 편집되어서 그렇게 보이는 건데, 사실 제가 처음 봤을 때는 풍이라고 하기에도, 구안와사라 하기에도 모호한 상황이었습니다. 오히려 급성으로 찾아온 단순 안면 마비에 가까웠다고 할까요?”
허준의 설명을 들은 박진석이 허준의 어깨를 두드렸다.
“뭐가 됐든, 환자가 만족했으면 된 거 아니겠나?”
“그건 그렇죠.”
“그럼, 이제 이야기는 이쯤하고 슬슬 진료를 봐야 할 시간 같은데?”
그렇게 진료 시작.
자리에 앉은 허준의 눈에 저 멀리 김 선생이 눈에 들어왔다.
그나마 다행이네. 멀리 떨어져서.
마스크를 쓰자,
눈앞에 환자가 들어왔다.
“허준 선생님.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어디가 아프셔서 오셨어요?”
“제가 요즘에 여기가 좀 아프고, 이쪽도 좀 아프고···.”
···
「포인트를 1 획득하였습니다.」
···
다음 환자가 들어왔다.
깨끗한 옷에 깨끗한 모습은 아니나, 표정만큼은 밝았다.
“감사합니다. 선생님이 계셔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어요. 선생님 때문에 이것저것 많이 들어와서 요즘 저희가 살맛 나거든요.”
“저보다는 여기 계시는 직원분들에게 감사해하셔야죠. 저야 일주일에 하루 오는 것이지만, 그분들은 매일같이 계시잖아요.”
“그, 그렇죠. 그분들에게도 항상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고 있습니다.”
“건강하게 사시려면 술도 좀 줄이시고요.”
“노력해 볼게요. 저희 같은 사람들한테 그것도 없으면 삶의 낙이 없어서..”
진한 쑥 냄새가 뜸의 불꽃과 함께 올라오며 진료 끝.
이렇게 이어지던 의료봉사는 예정시간보다 조금 더 일찍 끝낼 수 있었다.
그만큼 지원자도 많았고 참여한 의료진의 숫자도 늘어난 탓이었다.
보유 포인트 : 68
그리고 허준도 적잖은 포인트를 모을 수 있었다.
이걸 지금 사용해 볼까 말까
‘잠깐, 내가 왜 고민을 하는 거지.’
침, 뜸, 탕제.
당장 환자에게 도움이 되는 것은, 당연히 뜸의 능력을 향상하는 것이 아닌가.
「‘구술Lv. 1’에 50포인트를 사용합니다.」
「‘구술Lv. 1’이 ‘구술 Lv. 2’가 되었습니다.」
[구술 Lv. 2]
- 구술의 효능이 소폭 증가한다.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는 허준을 보고, 박진석이 등짝을 찰싹 두드렸다.
허준이 뒤를 돌아보니 박진석이 히죽 웃었다.
“뭘 그리 멍하니 서 있어?”
“아닙니다. 그보다 수고하셨어요. 선생님.”
“자네도 수고했어. 처음 왔을 때는 아주 죽상이더니 이제는 아주 표정이 여유롭네?”
“그거 칭찬이시죠?”
“당연히 칭찬이지. 처음에는 그저 환자들 몰려오니 허둥지둥거리면서 침놓기에 바빠 보이더니, 이제는 자세가 좀 나오는 것 같아.”
“아무래도 의료봉사에 나오면서 실력이 조금은 늘었나 봐요.”
허준의 대답에 박진석이 만족스럽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보다 오늘 오랜만에 일찍 끝난 김에, 사람들과 다 같이 저녁이나 할까 하는데 어떤가?”
“저녁이요?”
“그래. 이럴 때 마누라 몰래 한 잔씩 해야지 언제 또 하겠나.”
허준이 잠시 고민하다가 답했다.
“죄송한데, 저는 다음에 갈게요.”
“그래? 왜? 바쁜 일이라도 있나?”
“제가 추석 때 집에 못 내려갔다 와서요. 오늘 일찍 끝난 김에, 내려갔다 오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그래? 자네 당일만 쉬었나 보구만? 알았네. 그럼, 아쉽지만 다음에 같이 먹자고.”
박진석이 이해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뒤로 의료진들이 수고하셨다는 인사와 함께 떠나갔다.
허준도 짐을 챙기면서 부산으로 내려가는 기차표를 끊고는, 쉼터를 벗어났다.
가는 길에 마주치는 사람들 모두와 인사를 하면서.
* * *
허준의 고향은 서울이다.
그것도 누구나 알만한 동네.
그러다 아버지가 운영하시던 사업이 망하고, 가정형편이 어려워지면서 서울에서 성남으로, 성남에서 용인으로, 용인에서 평택으로 서서히 거리가 멀어지기 시작했다.
마침표를 찍은 곳은 부산. 허준이 보건의로 근무할 때였다.
마지막으로 남은 돈을 끌어모아 부산 야구장 근처에다가 작은 치킨집을 차리신 것이었다.
촤르르르륵-
튀김기에 들어간 치킨이 튀겨지는 소리가 들려오고,
지정된 타이머가 울리면 곧바로 꺼내 체를 탕탕거리며 기름을 털어낸다.
이렇게 완성된 치킨을 박스에 담고 소스와 무를 한데 넣어 비닐로 포장한 뒤에, 오토바이에 시동을 걸고 주소를 확인하며 스로틀을 당긴다.
금요일과 토요일. 배달주문이 가장 많은 날.
수없이 당겨댄 스로틀로 손목이 아파올 때가 되면, 그제야 튀김기 앞에 서 있던 부인이 말을 꺼낸다.
“마감해요.”
“여보, 오늘 토요일이니까 한잔해도 되지? 딱 한 잔만~”
30여 년쯤 같이 살다 보면 부탁이 아니라 이미 결론이 나 있다는 것을 알기에는 충분한 시간.
부인 이선영, 허준의 엄마가 한숨을 내쉬며 답한다.
“요즘 손목이 시큰거린다면서? 술 마시지 말고, 병원에 가보라니까.”
“에헤~ 이거 별거 아니야. 시원하게 한잔하고 나면 괜찮아진다니까?”
“하여간 내가 저 인간이 뭐가 좋다-”
그때, 가게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엄마, 저 왔어요.”
“아들?”
“아이구~ 우리 잘난 아들이 왔구나~”
아빠가 호들갑 떠는 모습에 허준이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예전부터 느꼈지만, 우리 집은 엄마와 아빠 성격이 조금 바뀐 것 같다.
“잘 지내셨어요?”
“어. 우리야 잘 지내지. 그보다 웬일이야 연락도 없이?”
“원래는 시간이 안 맞아서 못 올 줄 알았는데, 마침 오늘 운 좋게 일찍 끝났거든요. 그런 김에 내려왔죠.”
“밥은?”
“밥이요? 아직요.”
“치킨이라도 먹을래?”
“좋죠.”
그렇게 오랜만에 내려온 허준은 가족과 마주 앉아 김이 올라오는 다리를 집어 입으로 넣었다.
30살이 넘는 아들이 치킨 먹는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는 엄마.
“많이 먹어.”
“그보다 별일 없으시죠?”
“별일은 없고. 들어오면서 벽에 봤어? 너희 아버지가 너 동생에게 부탁해서 만들어 붙이더라.”
엄마가 가리킨 곳에는 조그마하게 다큐멘터리에 나온 허준의 얼굴이 사진처럼 인화되어 있었다.
사례가 들려 헛기침을 한 허준이 되물었다.
“아프신 곳은 없고요?”
“나야 아주 건강하지. 나보단 너네 아빠가 문제야.”
“왜요? 어디 아프세요?”
“아냐. 내가 아프긴 어디가 아프다 그래?”
허준이 아빠를 바라보다가 엄마를 바라보니,
“저 양반이 예전에는 안 그랬는데, 요즘엔 손목이 시큰거린다더라.”
“에이 아니라니까 자꾸 그러네. 이거 별거 아냐. 찾아보니까 그냥 내 나이쯤 되면 다들 그러는 거라고 그러더만.”
세상 어떤 아빠가 자식에게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어 할까.
허준이 별일 아니라는 듯이 무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제가 집에 가서 한번 봐 드릴게요. 아들이 한의사인데 이럴 때 써야지 언제 쓰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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