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박하사탕으로 주시지
16화. 박하사탕으로 주시지
원장실 문이 열리고 환자가 들어온다.
허준은 머리를 흔들어 잡념을 떨쳐내고 진료에 집중했다.
“어서 오세요. 어디가 아프셔서 오셨어요?”
증상을 듣고, 진단을 마친 후에, 처방을 낸다.
환자는 치료실로 향하고 또 다른 환자가 들어오기까지 주어지는 찰나의 휴식 시간.
아침에 벌어진 일이 자꾸 신경이 쓰였다.
그러나 진료를 하면서 내색할 수는 없는 일.
후우- 천천히 깊게 호흡을 하고 언제나처럼 웃는 얼굴로, 다음 환자를 맞이한다.
그렇게 반복하다 보니 7시가 조금 넘은 시각.
모니터에 환자의 접수가 더는 올라오지 않았다.
‘환자가 벌써 끊어졌나?’
방송 이후 지난 며칠간, 진료 마감 시간까지 빡빡하게 환자가 찾아왔었는데.
슬슬 환자가 줄어들 징조가 보이는 것 같았다.
어쩌면 불금이니 당연한 이야기 일지도.
그때, 원장실 밖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어서 오세요. 처음 오셨으면-”
“어? 새로 온겨? 서 선생은 어디가고?”
허준한의원의 단골, 김명자 할머니였다.
‘추석 때문에 오랜만에 오셨네.’
원장실.
“할머니 추석 잘 보내셨어요?”
“그럼~ 나야 아주 잘 보냈지. 선생은 무쟈게 바빴다믄서? 내 어제부터 다시 장사 시작했는데, 문 열 때 보니까 사람들이 들락날락하더라고? 또, 술 마시러 온 사람들이 선생 이야기를 그렇게 하더만.”
허준이 쑥스럽다는 듯이 머리를 긁적이며 답했다.
“하하, 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어요.”
그런 허준을 보며 김명자 할머니가 되물었다.
“근데 이상하단 말이여. 기쁜 일 아닌가? 사람도 늘고, 돈도 좀 벌었을 텐데, 얼굴은 영 기뻐하는 모습이 아니네?”
“오늘 좀, 피곤해서 그런가 봐요.”
하루 이틀도 아니고, 주 2회씩 2년 가까이 얼굴을 마주했으니,
아침에 있었던 일로 스트레스를 받는 모습이 드러난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서 선생이 안 보인데? 어디간겨? 이럴 때, 우리 이 선생 안 도와주고.”
“아, 서 선생님은 그만 두셨어요.”
“그랴? 왜?”
“그게...”
온종일 스트레스를 받아서였을까.
또는 지난 2년간 김명자 할머니와 종종 수다를 떨어서였을까.
허준이 서정숙 선생과의 일을 김명자 할머니에게 털어놨다.
“그러니까, 저 밖에 돈 세는 곳에서 몰래 무언가를 찍어갔다는 거지?”
“네. 그게.. 법적으로는 굉장히 문제가 될 수 있거든요. 뭘 가져갔는지 알 수가 없어서 신고하기도 애매하고...”
“아이고, 복잡하구먼 복잡해. 우리 이 선생이 그래서 죽상이었구먼?”
“저도 서 선생님이 이러실 줄은 몰랐어요.”
“에잉 쯧쯧, 나쁜 년 같으니라고, 그래도 너무 걱정허진 마. 내가 살다 보니까, 이렇게 복잡한 일은 시간이 좀 지나면 어련히 풀리더라고.”
“말씀만이라도 감사해요. 할머니.”
“그려그려. 그럼 오랜만에 우리 이 선생한테 시원허게 침이나 맞아 볼까.”
“네. 바로 갈게요.”
한결 가벼워진 얼굴로 대답하는 허준을 뒤로하고 김명자 할머니가 원장실을 나섰다.
조용해진 원장실에서 허준은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 것을 느꼈다.
누군가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큰 도움이 될 수 있구나.
그렇게 치료실.
치료복을 입고 베드 위에 드러누운 김명자 할머니의 허리에, 허준이 침을 놓았다.
퀘스트를 깨고 침술을 얻고 나서 달라진 점이 있다면, 손을 타고 미묘한 감각이 느껴진다는 것이었다.
마치, 드라이버로 나사를 조였을 때처럼 딱 하고 맞아떨어지는 기분이랄까.
15분 뒤,
침 치료가 모두 끝난 김명자 할머니가 옷을 갈아입고는 데스크로 향했다.
“계산하시려고요? 이천 원입니다. 할머니.”
“김 선생이라고 했던가?”
“네, 맞아요.”
“우리 김 선생이 이 선생 좀 잘 도와줘. 그리고 이건 선물. 하나씩 먹어. 이게 피곤할 때는 최고거든. 이 선생 얼굴을 보니까 아주 병 나겄어.”
주머니에서 천 원짜리 지폐 두 장과 누룽지 맛 사탕 두 개를 꺼내 건넸다.
“네. 잘 전해드릴게요.”
* * *
김명자 할머니를 마지막으로, 금요일 진료가 끝났다.
귓가에는 청소기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허준은 탕약실에서 탕약기의 레버를 돌리는 중이었다.
위이이잉-
모터 돌아가는 소리와 함께, 새로 설치한 탕약기의 호스에서 거무튀튀한 액체가 포장기로 움직이기 시작한다.
이어서 포장기 위의 투명한 유리 안에는 뿌옇게 김이 서리면서 쌍화탕이 고였다.
허준이 그 모습을 흡족하다는 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탕약을 달여라. 2>
* 진행도 : 49 / 50
* 보상 : [탕제술 Lv. 2]
* 남은시간 : 1일
‘돈을 쓴 보람이 있네.’
퀘스트를 해결하기 위해서 한 번에 탕약기를 3대나 주문한 허준은 탕약실 한쪽에서 위잉- 거리면서 돌아가고 있는 오늘의 마지막 탕약을 바라봤다.
최근 돈쭐을 내주겠다며 찾아온 환자들이 예약한 쌍화탕을 만들면서, 솔직하게 욕심이 생겼던 적도 있었다.
어차피 나중에는 찾아올지도 모르는 환자들이 대부분이었으니, 이참에 쌍화탕 가격을 올린다던가, 다른 고가의 보약을 추천한다던가 하는 마음이 조금도 없었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하지만, 다들 한 번쯤은 경험해 보지 않았는가.
자주 가던 식당이 어느 날 TV에 맛집이라고 소개되면서부터, 갑자기 음식값을 올리면 얼마나 정이 떨어지던지.
게다가 찾아온 사람들 대부분이 딱히 어디가 아파서 온 환자들이 아니었다. 그저 ‘좋은 일 하는데 힘내세요.’라고 직접적인 말 대신에 찾아옴으로써 표현을 한 것뿐.
‘굳이 그럴 필요까진 없지. 그나저나..’
방송 이후로 사람들이 찾아오기 시작한 지 이제 4일째.
슬슬 약발이 떨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당장, 오늘 7시쯤부터 환자가 끊어지지 않았던가.
우리나라는 세계 그 어떤 나라보다 빠른 나라다.
더군다나 건강한 사람들이 한의원을 일부러 오는 것도 한계가 있는 법.
그런 측면에서 지금 가장 많이 신경을 써야 하는 부분은, 찾아오는 사람들을 따라 유입된 시장의 유동인구 중에서 얼마나 단골로 만들 수 있냐일 것이다.
‘사실 이게 모든 한의원 원장의 고민이겠지.’
허준은 쌍화탕이 포장기로 모두 옮겨간 것을 확인하고, 탕약기 뚜껑에 달린 밸브를 열었다.
피시식- 소리와 함께 약재들을 눌러 짜주던 고무풍선의 압력이 빠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 효과음이 마치 지금의 상황을 나타내는 것 같아서 피식 웃음이 나왔다.
이어서, 천천히 뚜껑을 열어서 포에 담긴 약재들을 꺼내 쓰레기봉투에 담았다. 마지막으로 물을 뿌려 청소까지 해주면 끝.
그때, 탕약실 문이 열리며 김 선생이 들어왔다.
“원장님. 청소 끝났어요.”
“아, 수고하셨어요. 김 선생님.”
“아직 다 안 끝나셨나 봐요?”
“네. 마지막 하나가 남았거든요.”
“제가 뭐 도와드릴 건 없나요. 원래 한의원에서 일하면 이렇게 탕약 내리는 것도 배워야 한다면서요?”
한의원 중에는 한의사가 처방을 내리면 간호조무사가 탕약을 내리는 곳도 많았다.
하지만, 허준한의원은 아니었다.
이전까지는 탕약이 많이 팔리는 것도 아니었을뿐더러, 지금에 와서는 퀘스트를 깨야 했기 때문이다.
“아, 특별한 일이 없으면 제가 다 달일 거예요. 걱정하지 마세요.”
“그래도, 혹시 모르니 언제 한번 알려주세요. 언젠가는 제가 해야 할 날이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그럼, 나중에 한 번 날 잡아서 알려드릴게요.”
“네. 저 먼저 퇴근할게요. 아 참, 이거요.”
김 선생이 다가와 바스락거리는 무언가를 건넸다.
누룽지 맛 사탕이었다.
“이게 뭐예요?”
“이거 김명자 할머니가 원장님이 너무 피곤해 보인다고 주시고 가셨어요. 피곤할 땐 이게 최고라나?”
허준이 누룽지 사탕을 건네받자, 김 선생이 꾸벅 인사를 하고 퇴근했다.
홀로 탕약실에 남은 허준이 누룽지 사탕을 입에 물었다.
“이왕이면 박하사탕으로 주시지.”
달곰한 사탕에서 누룽지 향이 느껴질 때 즈음, 허준의 귓가에 마지막 남은 탕약기의 알람이 울렸다.
그리고,
「‘탕약을 달여라. 2’ 퀘스트를 완수하였습니다.」
「보상으로 ‘탕제술 Lv. 1’이 ‘탕제술 Lv. 2’가 되었습니다.」
[탕제술 Lv. 2]
* 탕제술의 효능이 소폭 증가한다.
퀘스트도 끝이 났다.
동시에,
「자격을 갖추어 ‘한의사 Lv. 1’이 되었습니다.」
한의사 Lv. 1
[침술 Lv. 3] 필요 포인트 500
[구술 Lv. 1] 필요 포인트 50
[탕제 Lv. 2] 필요 포인트 1000
[추나 Lv. 0] 잠김
[진맥 Lv. 0] 잠김
···
보유 포인트 : 0
* * *
다음 날 아침.
허준이 새롭게 달라진 퀘스트, 아니 상태창을 확인했다.
게임과 너무나도 흡사한 모습.
게임이었다면 힘, 민첩, 지능, 체력, 뭐 이런 능력치들이 있어야 할 자리에 한의학적 능력인 침이나 뜸 탕약을 만드는 것이 자리하고 있는 게 차이였지만.
게다가 몇가지 잠김이라 적혀있는 새로운 능력들도 생겨났다.
추나라니? 이거 요즘에 가장 돈벌이가 된다는 기술이잖아?
만약에 이 능력들을 전부 다 올릴 수 있다면,
정말 엄청난 명의라던가, 내 이름을 건 대한민국 최고의 한방병원도 가능하지 않을까.
그리고 그런 생각 중에 지금 당장에 확실한 것은.
시간제한이 사라졌다는 것이었다.
이제는 쫓기듯이 무리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며, 그것만으로도 그동안 고생하느라 쌓여있던 허준에게 웃음을 되찾아 주기에는 충분했다.
덕분에, 콧노래와 함께 출근한 허준.
그리고 그런 모습을 본 김예진이 무슨 일인가 싶어 의문스러운 눈빛으로 인사했다.
“좋은 아침입니다, 원장님.”
“김 선생님, 좋은 아침이에요.”
“무슨, 좋은 일 있으신가 봐요?”
김 선생의 질문에, 허준이 대답 없이 어깨만 으쓱하고는 원장실로 향했다.
세상이 아름다워 보인다.
그렇게 진료가 시작되고,
진료를 볼 때마다, 「포인트를 1 획득하였습니다.」라는 메시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
9시부터 1시까지 4시간의 토요일 진료시간 동안 19명의 환자가 다녀갔고,
허준은 총 19포인트를 얻은 채, 습관처럼 짐을 챙겨 원장실을 나섰다.
시간제한이 없어졌기에 굳이 의료봉사를 하러 갈 필요가 있을까? 라는 생각도 잠시 들긴 했지만, 어느새 정이든 탓인지 몇몇 환자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특히, 젊은 구안와사 환자를 시작으로 혹시 재발하지는 않았을까, 괜찮아졌을까, 술 마시면 안 될 텐데 등등 몰려드는 생각에 자연스럽게 발걸음을 옮기는 허준.
그런 허준의 옆으로, 김예진 선생이 나란히 걷고 있었다.
“김 선생님. 집이 이쪽이신가 보네요?”
“아니에요. 가야 할 곳이 있어서요.”
“약속 있으시구나?”
“네. 의료 봉사하러 가야 하거든요.”
“그렇군- 네? 의료봉사요?”
답 없이 고개만 끄덕이는 김 선생.
허준이 그런 김 선생에게 답답하다는 듯이 되물었다.
“아니 그럼, 지금 서울역으로 가는 중이었어요?”
“그렇죠. 2시까지라던데요?”
“선생님이 왜요?”
허준이 묻자, 이번엔 김예진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되물었다.
“의료봉사하러 간다는데 이유가 필요한가요? 오늘 노숙자쉼터에서 의료봉사가 있고, 저는 자격증도 가지고 있고, 퇴근도 했고. 제가 가면 안 될 이유라도 있나요?”
“아니.. 그건 아니지만..”
논리적인 대답에 허준의 말문이 막혔다.
그녀의 말대로 사실 의료봉사를 하러 가는데 무슨 이유가 필요하랴. 말 그대로 힘들고 어려운 사람 돕고 싶다는데.
오히려 칭찬해야 마땅할 일이었다.
‘그래도, 아는 사람과 같이 가는 건 좀 껄끄러운데.’
벌거숭이 임금님이 된 것 같은 허준이었다.
그렇게 둘은 각자 창문밖에 보이는 한강을 바라본 채, 서울역 노숙자쉼터에 도착했다.
그런데,
이전과는 완전히 달라진 분위기의 쉼터가 눈에 들어왔다.
먼저 봉사하러 나온 사람들이 이전의 몇 배는 되어 보인다는 것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기다리고 있는 노숙자들에게 제공하기 위해 후원해준 여러 물품이 한쪽으로 쌓여있었다.
그리고 그걸 바라보고 있는 허준을 발견한 쉼터 직원 김영하가 해맑게 웃으며 뛰어왔다.
“선생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