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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업 하는 한의사-15화 (16/230)

15화. 잘 부탁드려요

15화. 잘 부탁드려요

한 남자가 어두운 시장 골목을 지나서 경희한의원으로 들어갔다.

이미 진료시간이 끝나 문이 닫힌 시간이었음에도,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는 이유는 하나였다.

그가 이 경희한의원의 대표기 때문이었다.

원장 최인호.

10여 년 전 이곳에다 한의원을 개원한 이후, 현재 4개의 한의원을 운영 중인 수완 좋은 사업가.

지금의 허준한의원과 비교도 안 될 만큼의 성공을 이룬 그였지만, 그런 그가 이곳에 집착하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그에게 이 시장 골목은 첫 개원으로 지금의 자신을 있게 만들어준 곳이자, 당시 시장 골목 사거리에 있는 정우한의원이라는 벽을 넘지 못하고 다른 동네로 도망가야만 했던 애증의 장소. 일종의 역린.

그런 그의 귓가에 어느 날 재미난 소식이 들려왔다.

우습게도 온갖 노력으로도 넘어설 수 없었던 정우한의원이 재개발 구역에 포함되어 사라진다는 소식이었다.

누군가 그러지 않았던가.

끝까지 살아남은 놈이 이기는 거라고.

그리고 승자에게는 응당 전리품이 주어지는 법이다.

재개발로 정우한의원과 함께 시장의 반이 사라지더라도, 동네의 남은 반쪽은 건재한 상황.

더해서, 자신의 경희한의원은 시장 입구인 대로변에 있었기에 인근 대학교의 대학생들이나 직장인들도 종종 찾아오는 곳에 있었다.

한마디로, 정우한의원이 사라지면서 붕- 떠버린 환자를 흡수할 수 있다면, 그야말로 이 동네에 유일무이한 포지션을 갖게 되는 셈.

이는 재개발이 끝나고 아파트가 들어서면 더욱 빛을 발하게 될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

‘허준한의원.’

정우한의원 대각선에 있는 2층짜리 작은 상가에 있는, 아무런 존재감 없던 한의원이 어느 날부터 시장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것이 아닌가.

워낙 자주 원장이 바뀌는지라 신경조차 쓰지 않고 있던 곳이었는데, 최근에 탕약 이벤트를 시작으로 방송까지 타면서 발돋움을 시작한 것이었다.

물론, 방송으로 얻은 효과는 곧 꺼질 거품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그였다.

그렇다고 마냥 무시할 수도 없는 것이, 방송으로 몰려든 사람들이 허준한의원을 오가며 시장이 활기를 띠다 보니, 시장 사람들의 인식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이다.

굴지의 대기업들이 왜 길거리 전광판에 브랜드 마크 하나만 달랑 달아놓고 광고를 하겠는가.

지하철 안에는 왜 온갖 병원들이 우스꽝스러운 이름으로 광고할까.

이와 같은 맥락이었다.

자주 보다 보면 익숙해지고, 자주 듣다 보면 친숙해진다.

작은 돌이 호수에 큰 파문을 일으킬 수도 있는 법.

그것을 가만히 내버려 둘 최인호가 아니었다.

딸랑-

문이 열리면서, 한의원 안으로 한 인물이 들어왔다.

앉아 있던 최인호가 자리에서 일어서면서 반갑게 맞이했다.

“오랜만입니다. 서 선생님.”

“어머~ 오랜만에 뵙네요~ 최 원장님.”

“그러게 말입니다. 여기서 같이 일했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시간이 이렇게 지나버렸네요. 참, 가정에는 별일 없으시죠? 그때 중학생이었던 딸아이가 이제는 벌써 대학생이 되었겠네.”

“그럼요. 머리 좀 컸다고, 아주 이제는 틈만 나면 대드는걸요. 원장님 가족분들도 별일 없으시죠?”

“저도 뭐 별일이야 있겠습니까?”

“다행이네요.”

“일단 이쪽으로 앉아서 이야기하실까요?”

최인호의 권유에 서정숙이 소파에 앉았다.

“놀랐어요. 오랜만에 연락하셔서.”

서정숙이 최인호에게 가식적인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한의사가 다른 한의원의 간호조무사를 만나서 할 이야기는 뻔하지 않겠는가.

“하하, 갑자기 전화로 그런 부탁을 드려서 죄송하지만, 또 제가 부탁을 드릴만 한 사람이 서 선생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그런가요? 일단은 제가 흔적이 안 남게 사진으로 보내긴 했는데.”

“아유~ 아주 잘하셨어요.”

“정말로 원장님이 책임지시는 거 맞죠?”

서정숙의 질문에, 최인호가 싱긋 웃었다.

오랜만에 연락을 한 최인호가 부탁한 것은, 방송 이전에 허준한의원을 다닌 단골 환자들의 연락처였다.

“그럼요. 그런데, 누가 알기나 하겠어요? 우리 둘밖에 모르는 일을. 그보다 연휴 끝나고 출근하셨는데 어떠셨어요? 시장에 사람이 많아졌다고 하던데.”

“아우~ 말도 마세요. 다큐멘터리 나갔다고 사람들 찾아오고 아주 난리도 아니에요. 게다가, 오늘 원장이 아르바이트라고 어디서 한 명 데려온 애가 있는데, 요즘 애들이라 그런지 성질이 아주 싸가지가 없더라고요.”

“그래요? 그 친구. 일은 잘하던가요?”

최인호의 질문에 서정숙이 김예진의 일하는 모습을 떠올리고는 아주 잠깐 망설이다가 답했다.

“일이라도 잘했으면, 제가 이렇게까지 한탄하겠어요? 일도 못 하는데, 눈만 치켜뜨면서 아주~”

“그래요?”

“네. 완전 초짜예요. 그것도 자격증 따고 처음 일하는 초짜.”

서정숙의 대답에 최인호가 만족스러운 답을 얻었다는 듯이 결론을 말했다.

“서 선생님. 2년 동안 있었으면, 이제 슬슬 옮기실 때도 되지 않았어요?”

“어디 좋은 자리라도 나왔나 봐요?”

“마침, 제 한의원 중에 자리가 하나 나서요. 여기서 거리는 좀 있지만, 일은 훨씬 쉬울 거예요.”

“에이~ 원장님도. 그러다가 여기 사람들한테 소문이라도 나면 욕 바가지로 먹을걸요?”

“서 선생님, 어차피 곧 이사하실 거잖아요? 그러면 사람들이 뭐 신경이나 쓰겠어요? 어차피 남인데.”

서정숙 선생님의 집은 재개발 구역에 포함된 오래된 빌라로, 이주기간이 확정되면 이사를 해야 했다.

“게다가, 서 선생님같이 능력 있는 분은 더 좋은 대우를 받으셔야죠. 연차가 있으신데. 지금보다 이십 퍼센트 올려 드리죠. 물론, 인센티브는 따로 있고요.”

이십 퍼센트라는 말에, 사람들 눈치를 볼 생각하던 서정숙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간호조무사의 급여가 그리 높지 않았으니. 이십 퍼센트가 올라간다는 것은, 그야말로 굉장히 드문 일이기 때문이었다.

이윽고, 결심을 마친 서정숙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그럼, 이제부터 어떻게 할까요?”

“일단은, 내일 휴가부터 다녀오겠다고 하세요.”

“휴가요?”

“네. 그만두기 전에 미리 휴가도 다녀오시고 하셔야죠. 게다가 한의원에 아르바이트도 있다면서요? 이때 아니면 또 언제 다녀오겠어요?”

새로운 아르바이트 김예진이 떠오르자,

“듣고 보니 그래야겠네요. 한번 내가 없어 봐야 힘든 걸 알지.”

“그리고, 한 가지 더 부탁드릴 게 있는데.”

“뭔가요? 원장님.”

“허준한의원에서 나가는 쌍화탕 있잖아요? 거기에 뭐가 들어가는지 확인해 주시겠어요?”

“아, 그건 지금도 알아요. 제가 퇴근하면서 몇 번 달이는 걸 봤거든요. 뭐 딱히 특별한 재료를 넣지는 않아요. 그냥 평범한 쌍화탕처럼 작약, 당귀, 감초, 계피···.”

어디에서나 볼법한 재료들이 나열되자,

최인호가 되물었다.

“정말 그게 전부에요?”

“네. 게다가 물도 생수고요.”

*   *   *

금요일 오전.

잠에서 깨어난 허준은 출근을 위해 세수를 마쳤다.

그리고 이제는 습관처럼 확인하는 퀘스트.

<탕약을 달여라. 2>

* 진행도 : 44 / 50

* 보상 : [탕제술 Lv. 2]

* 남은시간 : 1일

주문 들어온 탕약을 달이다 보니, 어느새 완수를 목전에 두고 있었다.

퀘스트는 오늘 안으로 여유롭게 끝낼 수 있겠네.

‘그보다 문제는..’

허준은 어젯밤 탕약을 달이며 CCTV를 돌려보다가, 서 선생님이 무언가를 찍어가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화질이 그렇게까지 좋은 편은 아니나, 이는 엄연한 불법행위였다.

그것도 아주 큰.

대체, 왜 그러신 거지?

그렇게 출근을 한 허준.

“네?! 뭐라고요?”

허준의 목소리가 한의원 안에 울려 퍼졌다.

출근하자마자 기다리고 있던 서 선생님에게 청천벽력같은 소리를 들었기 때문이었다.

“갑자기 말씀드려서 죄송해요. 원장님.”

원장실로 들어온 서 선생님이 갑자기 오늘 쉬겠다고 말한 것이었다.

물론, 예전 같았으면 네, 다녀오세요 하고 가볍게 넘길 수 있는 일이었을지 몰라도, 방송 이후에 늘어난 환자들로 가뜩이나 복잡한 상황에서 이렇게 일방적인 통보라니.

아무리 성격이 좋은 허준이라도 그냥 넘어갈 수는 없는 일이었다.

“서 선생님. 너무하신 거 아니에요? 미리 말씀해 주신 것도 아니고, 아침에 오자마자 갑자기 쉬겠다니요.”

“에이~ 원장님답지 않게 왜 그러세요?”

젊은 나이에 개원한 원장은 환자들뿐만 아니라, 경력이 많은 간호조무사도 우습게 보는 경우가 종종 있다.

나이도 어린 데다가, 실무에 대한 경험이 적으니, 함부로 대하지 못한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특히나 이런 동네에서는 간호조무사들로 인해 유입되는 환자도 일부 있다 보니 그 정도가 더욱 심한 편이었다.

물론, 허준도 개원 전부터 알고 있던 터라, 최대한 서로 부딪히지 않고 선을 지키며 같이 일을 해왔던 것인데,

결국에는 오늘 그것이 터져버리고 만 것이었다.

“그때랑 지금은 상황이 다르잖아요!”

서정숙은 자신에게 처음으로 큰 소리를 내는 허준을 보고 내심 깜짝 놀랐으나, 연륜이 있다는 것은 그만큼 많은 경험을 거쳤다는 이야기다.

때문에, 서정숙은 자신을 노려보는 허준에게 눈을 치켜뜨면서 말했다.

“지금 저한테 화내시는 거예요? 사람이 돈을 벌면 달라진다더니, 예전에는 이렇게 화도 내시지 않았는데, 원장님도 결국 그런 분이셨네요.”

“허..”

적반하장의 모습에 어이가 없어진 허준.

그런 허준의 입에서 어제 있었던 일이 나왔다.

“좋아요. 서 선생님. 그럼, 어제 데스크에서는 뭘 찍어 간 겁니까?”

“네!? 제, 제가요?”

생각지도 못한 허준의 질문에 당황한 서정숙이 말을 더듬었다.

“CCTV에 고대로 찍혔더군요.”

“아.. 그게..”

“그거 의료법 위반인 거는 알고 계시죠? 환자의 정보 유출하는 거.”

기세등등하던 서정숙의 표정이 구겨지며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답했다.

“죄, 죄송해요.”

그 모습을 본 허준이 크게 숨을 내뱉으며 화를 가라앉혔다.

의료법 위반은 간호조무사뿐만 아니라, 원장인 자신에게도 법적인 책임이 부과될 수 있었으니, 이 상황에서 아무리 화가 나도 서로 좋게좋게 끝내는 것이 최선이었다.

‘이제야 한의원이 조금씩 자리를 잡으려 하고 있었는데.’

“서 선생님.”

“네..?”

“한의원에서 나가 주세요.”

*   *   *

한강 변에 있는 고층 아파트.

아침 일찍 일어난 김예진이 창밖으로 내려다보이는 한강을 바라보면서 가볍게 화장을 했다.

옷차림은 최대한 활동하기 편하고 단정하게.

추석 다음 날부터 출근하기 시작해서 일하다 보니, 어느새 3일째가 되는 날이었다.

“다됐다. 이제 출근해 볼까?”

운동화를 신으며 현관의 거울에 비친 모습에 김예진이 피식 웃음이 나왔다.

아마 지금 이 모습을 엄마가 본다면, 귀에 딱지가 안도록 잔소리를 들어야 할 것이 분명했을 것이다.

“뭐? 시장 골목에 있는 한의원으로 출근을 한다고? 너 미쳤어? 엄마가 그렇게 말렸던 특전사를 가더니, 이젠 한의원에서 알바를 하겠다고?”

“예진아, 너 대체 왜 이러니? 엄마가 너 편하게 살라고 다 해 주겠다는데, 왜 자꾸 이상한 일을 벌이고 다니는 거야?”

···

하지만 어쩌겠는가.

이게 내 팔자인걸.

그렇게 출근을 한 김예진은 곧바로 허준의 호출을 받았다.

“좋은 아침이에요! 원장님.”

“저.. 할 이야기가 있는데, 잠시 시간 괜찮으시겠어요?”

“물론이죠. 그런데 서 선생님은 아직 안 오셨어요? 밖에 안 계시던데.”

“안 그래도 지금 말하려던 게 그거였어요.”

허준은 김예진에게 서 선생님이 갑작스럽게 그만두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전했다.

물론, 자세한 이야기까지 할 필요는 없었다.

“혹시, 저 때문인가요?”

“그럴 리가요. 그냥 개인적인 사정이 있으셔서 갑자기 그만두시게 되었어요. 그래서 제가 김 선생님과 함께 일해보고 싶은데, 혹시 생각 있으시다면-”

“좋습니다! 아, 아니 좋아요!”

“그, 그럼, 여기 계약서에 일단 사인을 해 주시고.”

씩씩하게 답하는 김예진에게 허준이 준비해 둔 계약서를 건넸다.

그런데, 김예진이 계약서를 펼쳐보지도 않은 채, 그대로 사인을 하는 것이 아닌가.

“여기요.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씩씩하게 대답하며 계약서를 내미는 김예진.

그런 김예진을 보자, 서 선생님의 일로 조금 심란했던 마음이 조금은 편해진 것 같았다.

“앞으로 저도 잘 부탁드려요. 김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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