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돈쭐내주고 싶네
12화. 돈쭐내주고 싶네
토요일 오전 진료가 끝난 뒤.
허준은 짐을 챙겨서 원장실을 나서며 서 선생님을 호출했다.
그러고는 그녀에게 엊그제 달여둔 보약 한 첩과 서랍에서 봉투를 꺼내 건넸다.
그것을 받아든 서 선생님의 표정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가, 순식간에 다시 표정을 고쳤다.
아무래도 최근에 줄어들어 한가해진 한의원 분위기 때문이리라.
“추석 잘 보내세요.”
“원장님도 추석 잘 보내세요. 그런데 이렇게 챙겨 주셔도 괜찮은 거예요?”
서 선생님이 포장된 보약과 살짝 두툼한 촉감의 봉투를 들고서 물었다.
허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어쨌든 월요일에 고생하셨잖아요. 게다가, 탕약 이벤트 때도 도움 많이 주셨고요.”
“그건 그렇지만, 요즘 다시..”
“에이~ 걱정하지 마세요. 열심히 하다 보면 괜찮아질 거예요.”
“그럼, 잘 먹을게요. 그런데 이번에도 괜찮으시겠어요?”
“그럼요. 작년 추석에도 저 혼자 진료 봤었잖아요.”
허준이 작년 추석을 떠올리며 답했다.
추석 연휴에 다른 한의원들이 전부 쉬었지만, 허준한의원은 당일만 쉰다.
허준이 직접 생각해서 짠 것은 아니고, 옛날부터 이렇게 만들어 놓은 것을 그대로 지키다 보니 그냥 하게 된 것이었다.
어차피 시장도 연휴라고 전부 쉬는 것은 아니었으니, 하나둘 찾아오는 환자들도 있었고 말이다.
“그래도 도움이 필요하시면 연락해주세요. 바로 달려올게요.”
“네. 그럼 연휴 끝나고 봬요.”
그렇게 허준이 의료봉사를 하러 한의원을 나섰는데,
허준을 본 시장 사람들이 이전과는 달리 친근하게 먼저 인사를 건넸다.
“선생님. 추석 잘 보내세요~”
“오늘도 봉사하러 가시는 거예요?”
등등의 인사들.
촬영으로 인해 허준의 선행이 알려지면서 평가가 달라진 까닭이었다.
허준도 이 달라진 반응이 싫지는 않았던 터라,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면서 시장 골목을 벗어났다.
그렇게 도착한 서울역 노숙자쉼터.
“어? 선생님 오셨어요!”
“안녕하세요.”
“박 선생님께서 오늘 못 오신다고 하셔서 오늘 혼자신데 괜찮으시겠어요?”
“그럼요. 저라도 와야죠.”
허준이 이제는 익숙한 발걸음으로 자연스럽게 쉼터 안으로 향했다.
안에서 봉사자들 몇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역시나 그 숫자가 생각보다 적었다.
그 시선을 느낀 쉼터 직원이 빠르게 답했다.
“추석 연휴라 그런지, 봉사에 지원하신 분들이 많이 없더라고요.”
“그럴 수밖에요. 아무래도 명절 연휴니까요.”
“그래도 선생님 같은 분이 계셔서 참 다행이에요. 추석에 갈 곳 없는 사람들도 저렇게나 많은데.”
그렇게 자리로 온 허준이 가운을 입으면서 퀘스트를 확인했다.
<침을 놓아라. 3>
* 진행도 : 208 / 300
* 보상 : [침술 Lv. 3]
* 남은시간 : 1일
앞으로 92명.
이제는 익숙해진 탓일까. 혼자서 100에 가까운 환자를 볼 생각에 몸이 근질거리기 시작한 허준이었다.
* * *
같은 시각.
경희한의원에는 선물세트를 예약한 사람들이 몰려와 줄서서 받아가고 있었다.
근 며칠간 수백 상자가 팔려나간 결과였다.
이는 당장 추석에 나오는 성과급으로 직결되는 매출이었으니, 퇴근 시간이 진즉에 지난 두 원장의 얼굴에도 불만하나 없이 웃음꽃이 피어 있었다.
“우리 최 대표님 정말 무서운 분이셨네. 어떻게 그 순간에 바로 이런 판단을 하실 수가 있지? 내가 말했지? 월요일에 허준한의원 앞에 사람들 서 있는 거 보고 전화하자마자 바로 이벤트 시작하라고 딱 지시하신 거.”
“이미 여러 번 하셨죠. 덕분에 우리가 지금까지 퇴근 못 하는 거 아닙니까.”
“진짜 대단하다는 말밖에 안 나오는 양반이라니까? 가끔 보면 무서울 정도야.”
“그러게요, 저도 이런 공격적인 이벤트를 이렇게까지 하실 줄은 몰랐어요. 정우한의원이야 워낙 시장 골목에서 든든한 포지션이라 추석 연휴가 끝나도 매출에 큰 영향이 없겠지만, 허준한의원은 거의 직격탄 수준으로 떨어질걸요?”
“그렇겠지. 쌍화탕 이벤트만 해도 버거울 텐데, 그러기에 왜 무리해서 이벤트를 해가지고 쯧쯧.”
김 원장이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는 말을 이었다.
”생각해볼수록 진료를 봐야 추석 선물을 예약할 수 있다고 한 게, 정말 신의 한 수라니까? 명분도 좋잖아. 체질적으로 안 맞을 수 있으니, 미리 진료를 받아 확인해 봐야 한다는.”
“최 대표님이 성질이 불같아서 그렇지, 학교 선배님들 사이에서는 유명하시더라고요. 이런쪽으로는.”
“그래? 그것까지는 몰랐네. 그보다 박 원장. 혹시 지금 들어오는 공진단이랑 경옥고. 어디서 끌어온 건지 알아? 이정도면 거의 원가 수준 같은데.”
“글쎄요. 저도 자세히는 모르겠는데, 선배님 중에 개원 안 하고 이렇게 한방 공장 쪽으로 가신 분이 몇 분 계신다고 들었거든요. 아마 그쪽에서 땡겨오신 것 아닐까요?”
대답을 들은 김 원장이 아쉽다는 듯이 입맛을 다셨다.
같은 대학교의 선후배 사이였다면 몇 다리 건너서라도 어떻게 알아볼 수 있었겠지만, 학교도 다른 데다가 최 대표 성격상 자신에게 이 루트를 소개해줄 리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역시, 인맥이 중요해.”
“에이~ 뭘요. 우리 학교 나온다고 다 이렇게 할 수 있는 것도 아닌데요, 그보다 김 원장님은 벌써 여기서 세 번째 추석이시라면서요? 슬슬 지점 하나 인수하실 때 되지 않았어요?”
“인수? 혹시 대표님이 어디에다가 또 하나 내신다고 하셨어?”
“그건 잘 모르겠는데, 저한테는 여기서 명절 세 번쯤 보내면 지점 하나 인수해 가라고 하시더라고요.”
박 원장의 말을 들은 김 원장의 얼굴이 굳어졌다.
염병. 자신이 이곳에서 일한 지 벌써 3년이 넘어갔지만, 저런 제안은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안 그래도 슬슬 모아둔 돈으로 틈틈이 개원 자리를 알아보고 다니는 중이었는데, 마침 박 원장의 입에서 저런 말을 들으니 기분이 팍 상했다.
그 심각한 표정에, 박 원장이 물었다.
“무슨 일 있으세요?”
“아, 아니. 그냥 오늘따라 커피가 좀 쓰네. 우리도 이만 퇴근하지. 추석 연휴 잘 보내고.”
“김 원장님도 잘 보내세요. 저는 여자친구랑 해외로 여행이나 다녀오려고요.”
“좋겠네. 나는 오랜만에 고향에 내려 갔다 와야겠어.”
그렇게 길을 나선 김 원장. 아니 김태식.
고향에 가기 위해 서울역으로 향했는데, 겨우겨우 구한 기차표 시간이 저녁 7시.
서울역에 도착했을 때는 이제 고작 5시가 되어 있었다.
대충 점심 겸 저녁을 먹고도 시간이 남던 그의 머릿속에, 문득 허준한의원의 원장 이허준이 떠올랐다.
'서울역 쉼터라고 했던가?'
의료봉사를 다녔다는 소문과 함께 최근 시장에서 평가가 급격하게 올라간 사람.
그런데 조금 알아보니 막상 봉사는 이제 고작 두 번밖에 참여하지 않았다고 한다.
뒤로 자빠져도 코가 깨진다는 말처럼 운 나쁜 사람이 있는 반면에,
의료봉사 고작 두 번 가놓고는 촬영까지 하는 운 좋은 놈이 있다니 세상은 역시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였을까.
이곳으로 오는 길에 얼핏 시장 사람들이 오늘도 의료봉사를 하러 가는 것 같더라는 말이 떠오른 것은.
‘한번 가볼까?’
추석 연휴에 의료봉사를 하는 사람이 어딨겠어.
만약에 갔는데 없다면? 오히려 좋았다.
찾아오는 환자들한테 이야기를 살짝살짝 흘리기만 해도 그의 민낯이 드러날 터.
김태식은 스마트폰 위로 나타난 쉼터의 위치를 보면서 빠르게 발걸음을 옮겼다.
왠지 모르게 신난 이 기분은 일종의 승리감이었다.
얼마 걷지 않아, 눈앞에 노숙자들의 쉼터라는 작은 간판이 들어오고,
노숙자로 보이는 몇몇이 김태식을 경계하는 눈빛으로 쳐다봤다.
날카로운 눈빛에 김태식이 살짝 움찔거렸으나,
쉼터라 적힌 조끼를 입은 한 남자가 다가와 살갑게 인사했다.
“어떻게 오셨어요?”
“안녕하세요. 오늘도 의료봉사 있나요?”
“물론이죠. 저희는 매주 토요일마다 의료봉사를 진행하거든요.”
김태식이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오늘도 의료봉사가 있는 것은 사실이었나보다.
“그럼 혹시, 오늘 오신 선생님 중에 이허준 선생님이라고 계시는지?”
“글쎄요? 제가 이번 주부터 여기로 출근했거든요. 그래서 이름까지는 아직 잘 모르겠는데, 직접 확인해 보시겠어요? 저 안쪽으로 가셔서 끝에 있는 방으로 들어가시면 돼요”
“그래도 될까요?”
“물론이죠.”
직원이 설명해준 대로 도착한 장소는 안쪽에 있는 넓은 방이었다.
방 한쪽으로 작은 책상이 놓여있었고, 그 앞으로 노숙자들이 죽 앉아서 기다리고 있었다.
김태식이 방 안으로 들어가 이허준을 찾아보려 했는데, 등 뒤에서 누군가 말을 걸어왔다.
얼굴 한쪽에 큰 흉터가 있어 거친 인상을 풍기는 노숙자였다.
“댁은 뭐요?”
“아, 저는..”
“꼴을 보아하니, 여기 있을 사람은 아닌 것 같은데. 진료를 보러 온 거면 저기 저 뒤로 가서 줄 서쇼. 아까부터 기다리던 사람들 안 보이쇼?”
“그게 아니라, 이허준 선생님을 찾아 왔습니다.”
이허준이란 이름에 남자의 눈이 대번에 경계심이 풀리면서 말을 이었다.
“이허준 선생님이요? 진작에 말씀하시지. 저기 저 끝이 이허준 선생님 자리요.”
그가 가리킨 곳을 바라보자, 하얀 가운을 입고 마스크를 쓴 남자가 엎드린 노숙자의 등에다가 침을 놓는 중이었다.
‘저자가 이허준?’
김태식의 눈이 커졌다.
진짜로 여기에 있을 줄이야.
게다가 더욱 놀란 것은, 노숙자를 대함에 있어서 그의 행동에 전혀 머뭇거림이 없다는 것이었다.
당장 자신은 아까부터 한 손으로 입과 코를 가리고 있었으니까.
“요즘에도 저런 사람이 있다니 대단하지요? 저 양반 덕에 많은 사람이 도움받고 있지요. 게다가 우리 같은 사람들을 아무 거리낌 없이 환자로만 대하기도 하고.”
김태식은 노숙자의 설명을 들은 채 만 채,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멍하니 이허준을 바라봤다.
그저 그 모습이 너무나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기에.
* * *
추석 연휴 첫날.
최은진 PD가 완성한 다큐멘터리가 드디어 전국으로 방영되었다.
[서울역에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
[그리고 그 사람들이 살아가는 법.]
이라는 자막과 함께 시작된 다큐멘터리는, 몇몇 노숙자들의 이야기로 시작되었고, 그들 각자가 짊어지고 살아가는 사연들이 흘러나왔다.
이제는 아무런 의욕도 없이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노인부터, 어릴 때 버려진 채로 이제 갓 30대가 된 젊은 청년 노숙자의 이야기까지.
그들의 삶에 대한 밀착취재로 살아가는 방법에 대해서도 가감 없이 방송에 나오기 시작했다.
노숙자들을 위한 무료 급식을 하는 곳들과 그곳에서 밥을 먹기 위해 모여드는 노숙자의 모습들.
비가 오거나 추울 때는 공중화장실과 같은 곳에서 생활하는 모습 등.
그리고 그들이 제대로 된 생활을 조금이나마 할 수 있게 해주는 노숙자쉼터의 모습에 이어서 의료봉사 장면이 나오기 시작했다.
누가 봐도 협소하고, 대충 만들어진 부족한 현장.
길게 늘어선 줄은 의료봉사 시간이 끝나자 쓸쓸한 표정으로 돌아서는 그들의 모습도 텔레비전을 통해 흘러나왔다.
그때,
“아직 떠나지 마십시오! 진료를 더 보고 싶으신 분은 저에게 오십시오!”
한 남자의 외침에, 발걸음을 옮기던 노숙자들이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뒤도는 모습에 이어서 얼굴 반이 마비되어 제대로 말을 못 한 채 뛰어오는 노숙자의 모습이 한데 어우러진다.
그 젊은 노숙자에게 침을 놓자, 움직이지 않던 입으로 울먹이면서 감사하다고 연신 고개를 숙이는 모습들이 짧고 굵게 편집되어 흘러나왔다.
이어진 한의사의 인터뷰.
화면 하단에는 의료봉사에 여러분들의 많은 관심과 참여를 부탁한다고 적혀 있었고,
"원장님께서는 왜 토요일마다 서울역 쉼터로 오시나요?"
“그곳에.. 환자가 있으니까요.”
멋쩍은 듯이 웃으며 답하는 허준의 모습으로 다큐멘터리는 끝이 났다.
그리고,
- 와 ㄹㅇ 감동적이네 저 한의원 어딘지 아시는 분? 돈쭐내주고 싶네
- ㄹㅇㅋㅋ 추석 지나고 돈쭐내주러 갈 파티원 모집함
- 음식점이 아니라 한의원은 첨인데 침 안맞아도 되면 나도 감
- 2222
···
박제된 채, 온라인 곳곳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