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아침 일찍 와주세요
9화. 아침 일찍 와주세요
세상에 사연 없는 인생은 없다고 한다.
이곳 서울역 인근에 머무는 노숙자들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커서 노숙자로 살겠어!’라고 꿈꿔온 사람은 없을 테니까 말이다.
태어날 때부터 장애가 있어서 어릴 적에 버림을 받았다거나, 한순간의 잘못된 선택으로 이 곳에 왔다는 등, 각각의 사정으로 노숙자로 지내고 있는 사람들.
김태현도 그중 하나였다. 노숙자라고 하기에는 생각보다 젊은 30대.
비록 그가 노숙의 길에 들어서기까지는 많은 망설임과 고민이 뒤따랐지만, 막상 이곳에 와보니 자신과 비슷한 30대의 노숙자들도 꽤 볼 수 있었다.
그것이 조금의 위안이 된 것일까, 아니면 적응해 버린 것일까.
서울역 근처의 길바닥에 드러누워 생활하는 이 생활이 이제는 그다지 부끄럽게 느껴지지도 않았다.
그래서 김태현은 오늘도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구걸을 했다.
“조금만 도와줍쇼.”
그리고 그렇게 백 원, 오백 원, 천 원. 이렇게 모은 돈으로는 근처 편의점으로 가서 술을 구매한다.
아르바이트로 보이는 청년이 멸시하는 눈빛이 느껴지지만 상관없다.
초저녁인데도 술에 취해서 기분 좋게 자리에 눕자, 세상 안락함을 느끼며 눈이 슬슬 감긴다.
그러다가 소변이 마려워 잠에서 깬 김태현이 화장실에서 시원하게 오줌을 갈기고는, 수돗물을 한 모금 마시려는데 얼굴 한쪽에서 물이 주르륵 흘러내리는 것이 아닌가.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
“으게 므슨?”
내뱉은 혼잣말의 발음이 뭉개진다. 김태현이 놀라 거울을 보니 그 원인을 금세 알아차릴 수 있었다.
왼쪽 입이 움직이지 않아 소리가 뭉개지는 것이었다.
비록 노숙자 신세였지만, 신체 건강하던 그였기에 공포가 온몸을 엄습했다.
손으로 꾹꾹 눌러보기도 하고 움직이지 않는 입을 억지로 벌려보려고도 했으나 효과는 없었다.
그때, 화장실에 들어온 또 다른 노숙자가 오줌을 싸며 말했다.
“어이 김 씨. 오늘 진료받으러 안 갈래? 지금 박 씨가 그러는데, 지난주에 밤늦게까지 진료 봐준 선생님들이 아직 진료 보고 있다는데?”
그 이야기를 들은 김태현이 화장실에서 뛰쳐나가더니 쉼터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그 반응에 말을 걸었던 노숙자가 당황해서 외쳤다.
“어? 어? 같이 가~”
* * *
“수고하셨습니다!”
“모두 수고들 하셨습니다!”
봉사자들과 의료진들이 손뼉을 치면서 화기애애하게 의료봉사가 마무리되었다.
2시부터 시작한 의료봉사가 7시간이 조금 넘은 이제야 끝이 난 것이었다.
지난번에 늦게까지 환자를 진료했다는 이야기 때문이었는지 진료를 보기 위해 쉼터를 찾은 환자의 숫자는 훨씬 많았다.
그나마 다행스럽게도 오늘은 의료진들 모두가 의기투합하여 진료를 본 상황.
덕분에 지난주보다 환자가 더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비슷한 시각에 마칠 수 있었다.
녹초가 된 허준의 초췌한 얼굴이 멍하니 허공을 응시했다.
<침을 놓아라. 3>
* 진행도 : 73 / 300
* 보상 : [침술 Lv. 3]
* 남은시간 : 7일
‘하얗게 불태웠어.’
흔히 인터넷에서만 보던 그 문장이 자연스레 떠올랐다.
새로운 퀘스트가 생기자마자 꽤 많이 진행했다는 점에서는 두 손 들고 환영할만한 이야기겠지만. 그만큼 체력소모도 심했다.
하지만, 허준의 머리는 자연스럽게 퀘스트를 완수하기 위한 계산 끝에 ‘다음 주에 의료봉사를 나와도 완수하기에는 빠듯하네.’라는 결론을 내렸다.
대충 계산해도 다음 주 의료봉사 전까지 주어진 5일 동안 120명의 환자를 봐야하는 상황이기 때문이었다.
이는, 지난 일주일간 한의원을 찾아온 환자 수를 거뜬히 넘어서고 있었다.
그때, 옆자리에서 진료를 봐주던 박진석이 짐을 챙기면서 말했다.
“이허준 선생. 오늘도 수고 많았네. 자네가 와서 참 다행이었어. 만일, 오늘 자네가 안 왔으면 나 혼자 이 많은 환자를 봐야 했을 테니까 말이야.”
“선생님도 수고하셨습니다.”
“컨디션은 좀 어떤가? 나는 지난주에 자네랑 늦게까지 의료봉사하고는 주말 내내 몸살을 앓았지 뭔가, 덕분에 마누라에게 바가지도 긁혔다네.”
“저도 일요일 내내 피곤해서 잠만 잤어요.”
“쯧쯧, 젊은 친구가 말이야. 내가 그 나이때에는 이 정도는 가뿐하게 아주 그냥··· 뭐 그건 됐고, 그래도 저들을 좀 보게나. 자네에게 따듯한 눈길을 보내고 있지 않은가?”
박진석의 말에 허준이 의료봉사 뒷정리를 하고 있던 노숙자들을 바라보자, 눈이 마주친 노숙자들 몇이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며 고마움을 표했다.
“확실히 그런 것 같네요.”
“다들 고마워 하고 있는 게지. 그래서 말인데 자네 다음 주에도 올 생각이지?”
“와야죠...”
퀘스트가 떠오른 허준이 반사적으로 답했다.
대답을 들은 박진석이 그럴 줄 알았다는 얼굴로 허준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내가 사람 보는 눈은 정확하다니까? 자네가 있어서 참 다행이야. 다음 주에는 내가 일이 있어서 아무래도 참석하지 못할 것 같거든. 그럼 나는 이만 마누라한테 긁히기 전에 들어가 보겠네.”
박진석은 사람 좋은 얼굴로 웃으며 그렇게 쉼터를 벗어났다.
그가 사라져 가는 뒷모습을 보며 허준이 헛웃음을 지었다.
‘선생님. 저는 퀘스트를 깨야 한다고요.’
허준도 집에 가기 위해서 짐을 챙기고는 가운을 벗으려는 찰나,
누군가 어깨를 툭 하고 건드렸다.
“어? 안녕하세요. 저번 주에 오셨던 분 맞으시죠?”
허준이 노숙자를 알아보고는 반갑다는 듯이 인사했다.
지난주에 딱 한 번 봤을 뿐이지만, 젊은 노숙자가 흔하지는 않았기에 기억해낼 수 있었다.
그런데 그의 모습이 조금 이상했다.
왼손으로 왼쪽 얼굴을 감싸고 있는 것이었다.
“무슨 일 있으세요?”
“헌행님. 읍이 앙 음지겨요. 저 좀 바주헤요.”
게다가 뭉개진 발음으로 말을 하는 것이 아닌가.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한 허준이 그를 의자에 먼저 앉혔다.
“천천히 손을 떼고, 한 번 더 말씀해 보시겠어요?”
“읜적 읍이 앙 음지겨여.”
“언제부터 이러셨어요?”
김태현이 손가락 두 개를 펼치며 답했다.
“스간 즈네 즈고 일으났더니...”
“두 시간 전에 자고 일어났더니 입이 움직이지 않는 다고요?
그가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허준이 그의 얼굴 여기저기를 살폈다.
특별한 외상의 흔적은 없는 상황.
단지, 약간의 술 냄새가 풍겨올 뿐이었다.
‘구안와사?’
안면신경이 마비되어 얼굴이 틀어져 보이는 증상의 질환으로 드라마나 영화에서 자주 보이는 질환이었다.
하지만 구안와사라고 하기엔 그 정도가 약한 상태.
보통, 구안와사는 입만이 아니라 이마까지 한쪽 얼굴 전체가 마비되기 때문이었다.
급작스럽게 진료를 보는 허준과 제대로 말을 못 하는 김태현의 모습은 뒷정리하던 노숙자들의 관심을 끌기에는 충분했다.
“저거 풍 온 거 아니여?”
“재수없는 소리 하지 말어. 김 씨가 그래도 젊은인데 벌써 풍이 왔을라고?”
“에이~ 우리처럼 사는 사람은 또 모르지.”
일부가 마비되는 이런 증상은, 보통 중풍 환자들에게서 나타나는 증상이기도 했는데, 그렇다고 중풍이라고 보기에도 무리가 있었다.
중풍은 뇌와 관련된 질환이기에 움직임이 이상하다는 특징이 있는 데 반해서, 그가 움직이는 모습은 너무나 정상적이기 때문이었다.
허준은 지금 눈앞에 있는 환자가 아직 구안와사가 완전히 오지 않은, 안면 마비가 이제 갓 시작된 초기라고 진단을 내렸다.
지금이라면 생각보다 간단한 치료로 큰 효과를 거둘 수 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과 함께.
“이제부터 제가 좌측 얼굴에 침을 놓을 텐데, 혹시 자극이 느껴지시면 오른손을 위로 들어 주세요. 아시겠죠?”
허준이 침을 꺼내 들며 말을 이었다.
그 말을 알아들은 김태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침을 든 허준의 손이 김태현의 눈과 귀 중간의 하관혈로 향했다.
그곳에 침을 꽂은 뒤에 허준이 손으로 침을 살짝살짝 돌리자, 짜릿하게 느껴진 자극에 김태현이 오른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좋아. 생각대로 역시 심한 마비가 아니라 다행이다.’
이어서 예풍혈부터, 태양혈까지 쭈욱 구안와사에 쓰이는 자리에 침을 꽂고는 돌리기를 반복했다.
그리고는 잠시 뒤, 하나하나씩 침을 다 뽑은 허준이 김태현에게 물었다.
“이제 한번 말해보시겠어요?”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노숙자들의 눈이 모두 김태현의 입으로 쏠렸다.
꿀꺽- 누군가의 침 넘어가는 소리와 동시에,
“아, 아, 선생님? 어?”
평소와 같이 제대로 된 발음으로 말을 하는 김태현.
그리고 그 모습을 실시간으로 지켜보던 사람들이 탄성을 자아냈다.
와-
“저게 침으로 고쳐지는 거였어?”
“그러게. 젊은 선생님이 손재주가 아주 기가막히는구먼.”
“다음 주에도 오시려나? 다음 주엔 나도 저 선생님에게 한방진료 한번 받아보고 싶어지네.”
'해냈어!'
그 상황에 허준은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뜨거운 무언가를 느꼈다.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이 뜨거움.
온종일 진료를 보느라 쌓여있던 피로가 순식간에 사라진 것 같았다.
그런 허준에게 김태현이 눈물을 흘리면서 인사했다.
“선생님 정말 감사드립니다. 저 진짜 무서웠거든요. 이제 어떻게 사나하고...”
허준은 그런 김태현의 어깨를 토닥토닥 두들기면서 말을 이었다.
“당분간 술 드시지 마시고, 차가운 바닥 위에서 절대로 주무시지도 마시고요. 잘못하면 또 이렇게 될 수 있거든요.”
“암요, 암요. 당연히 그래야죠. 진짜 진짜 감사합니다. 선생님. 선생님은 제 은인이세요.”
그리고 이 모든 장면을 지켜보고 있던 것은 비단 이들뿐만이 아니었다.
다큐멘터리를 완성하기 위해 오늘도 쉼터 여기저기를 돌면서 촬영하던 카메라맨과 PD 최은진.
“이건 대박이야.. 이런 장면이 얻어걸릴 줄이야. 좋아, 정했어!”
그녀가 눈을 빛내며 허준에게 다가와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오늘도 수고하셨어요.”
“아, 네. 수고하셨습니다. 그런데 누구신지?”
처음 보는 낯선 얼굴.
노숙자도 아니고, 의료봉사에 나온 봉사자도 아니었으며, 쉼터의 직원도 아닌 그녀에게 허준이 물었다.
“아, 저는 이런 사람이에요.”
그녀는 주머니에서 명함을 하나 꺼내 건넸다.
명함에는 KBC PD 최은진이라 적혀 있었다.
최은진은 허준이 명함을 확인하는 모습을 보면서 말을 이었다.
“사실 저희가 이번 추석에 방영될 특선 다큐멘터리를 제작 중이거든요.”
“아, 그러시군요.”
허준의 머리에, 지난주에 김진수가 말했던 말이 떠올랐다.
촬영하고 있다던 프로그램이 바로 이거였구나.
“이번에 ‘서울역의 사람들’이라는 다큐멘터리를 제작중인데, 뭐 제목처럼 서울역에 있는 노숙자들의 사연과 그들의 삶. 그리고 그들을 도와주는 사회적인 시스템 등등이 주제에요. 그래서 말인데, 저희가 선생님이 찍힌 장면과 인터뷰를 찍어서 사용하고 싶은데 괜찮으실까요?”
“저를요?”
“네, 시청자들이 좋아할 만한 장면을 몇 개 건져서요. 물론 공짜는 아닐 거예요. 저희 다큐멘터리가 그래도 시청률이 완전 쓰레기는 아니라서 광고효과도 꽤 있을테니까요.”
생각지도 못한 제의에 허준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TV에 나온다는 것이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는 한의사 카페에 있는 글들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걸 거절하면 바보지.’
“저야 좋죠. 인터뷰는 어떤 식으로 진행하면 되나요?”
“간단해요. 저희가 질문을 몇 개 준비해서 대본 없이 찍을 겁니다.”
“지금 바로 시작하나요?”
“아뇨, 따로 스케줄을 잡아야겠죠. 아무래도 장소부터 섭외해야 하니까요.”
최은진의 대답에 허준이 눈을 빛냈다.
머릿속에서 좋은 아이디어가 번뜩였기 때문이었다.
작디작은 시장 골목.
그곳에 방송국에서 촬영이 온다면?
보나 마나 며칠간 환자들이 몇 배는 늘어날 터. 그렇게 된다면 퀘스트를 완수하는 데 있어서 큰 도움이 된다는 계산이었다.
“장소가 애매하시면, 혹시 제 한의원에서 찍는 것은 어떨까요?”
“한의원이요?”
“네. 제가 작은 한의원을 운영 중이거든요.”
“아~ 좋아요. 그럼, 거기에서 하도록 하죠. 시간은 돌아오는 월요일 괜찮으실까요? 진료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진료가 끝난 저녁에-”
“아니요. 아침 일찍 와주세요. 저녁에는 제가 좀 바쁘거든요.”
“아침에요? 저희야 감사하죠. 그럼, 주소랑 연락처 좀 찍어주시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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