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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업 하는 한의사-2화 (3/230)

2화. 기연을 얻다

2화. 기연을 얻다

<환자를 진맥하라. 1>

* 진행도 : 0 / 10

* 보상 : [침술 Lv. 1]

헛것이 눈앞에 아른거린다.

게다가,

“아오.. 머리야.”

머리는 쪼개질 듯이 아프다.

오랜만에 술을 마셔서 그런가.

동시에, 카페에서 뒤돌아서서 나가던 전 여자친구의 뒷모습과 그녀의 입에서 나온 이별의 말이 머릿속에서 맴돈다.

아직 술이 덜 깼나 보다.

대체, 어제 얼마나 마신 거지?

허준이 고개를 돌려 주변을 둘러보니, 온갖 종류의 술병들이 한의원 탁자 위에서 굴러다니고 있었다.

분명 편의점에서 맥주만 몇 캔 사 왔던 것 같은데, 탁자 위에는 막걸리와 소주를 비롯해 양주에 와인까지, 온갖 종류의 술병들이 굴러다니는 중이었다.

‘이러니 머리가 안 아플 리가..’

허준은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정수기에 다가가 찬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으, 이제야 좀 살 것 같네.

<환자를 진맥하라. 1>

* 진행도 : 0 / 10

* 보상 : [침술 Lv. 1]

그런데, 이건 왜 안 사라지는 거야?

떠나가는 여자친구의 뒷모습도, 그녀의 입에서 나온 이별의 말도 사라졌는데, 이 헛것은 그대로였다.

그것을 본 허준이 볼을 꼬집었다.

얼얼한 볼의 감촉과 함께 벌어진 입 사이로, 뱃속에서 뒤섞인 알코올 냄새가 화악 하고 올라와 구역질이 났다.

아직 술이 덜 깼구나.

일단 집에 가서 한숨 푹 자고 일어나자.

*   *   *

월요일 오전. 8시 20분.

한의원 진료 시작 전에 출근하기 위해서 일어난 허준은 세수를 마쳤다.

어제 오후에 쪼개질 것 같은 머리로 택시를 타고 집에 도착하자마자 그대로 쓰러진 뒤. 이제야 정상으로 돌아온 상태였다.

두통도, 환청도, 헛것도 더는 없는 완벽한 컨디션.

물론, 그렇다고 이별의 아픔까지 완전히 사라졌다는 것은 아니었다.

여전히 가슴 한편에 남아 따끔하게 찔러대고 있었지만, 어쩌겠는가. 그건 그거고 할 일은 해야지.

그렇게 허준은 한의원에 도착했다.

“어머~ 원장님 일찍 나오셨네요?”

“아, 서 선생님. 좋은 아침입니다. 가셨던 일은 잘 해결되셨어요?”

“아휴, 말도 마세요. 딸년이라고 오냐오냐 키웠더니. 대체 누굴 닮아서 성질머리가 그렇게 더러운 건지 쯧쯧.”

‘그야 서 선생님 닮은 거 아닐까요?’

허준은 속으로 튀어나올 법한 대답을 삼키고는, 웃으며 답했다.

“한창 그럴 나이잖아요.”

“참, 토요일에 별일 없으셨죠? 서울에 비 많이 왔다던데.”

“뭐.. 별일은 없었죠.”

그렇게 간단히 아침 인사를 마치고,

9시 20분.

똑, 똑.

“원장님. 초진 환자분 오셨어요. 차트 올려둘게요.”

초진 환자라니.

오랜만에 반가운 소식이었다.

남녀가 하는 소개팅에서도, 대기업 면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첫인상이 아니던가.

그것은 한의원에서 환자와 만나는 순간에도 마찬가지였다.

‘얼마만에 온 초진환자야? 꼭 단골로 만들고 말겠어.’

이제 남은 것은 한의원 뿐인 허준은 굳게 다짐하면서, 서 선생님이 올려둔 차트를 확인하고 카운터로 메시지를 보냈다.

그러자, 얼마 지나지 않아 원장실 문이 열리며 서 선생님이 할머니 한 분을 부축해 들어왔다.

“어서 오세요. 발목을 접질리셨다고요?”

“네.”

“이쪽으로 앉으셔서 잠시 보여주시겠어요?”

할머니는 허준의 부축을 받아 천천히 의료용 침대에 앉더니, 한쪽 바지를 걷어 올렸다.

그러자 조금 부어오른 발목이 보였다.

‘다행이다. 그리 심한 편은 아니시네. 이 정도면 금방 괜찮아지시겠는걸.’

이래 봬도 나름 한의원 2년 차 경력의 원장이다.

시장 골목에서 가장 많은 진료를 본 것 중 하나가 바로 이 발목을 접질린 발목염좌.

“접질리신 지는 얼마나 되셨어요?”

“엊그제 문턱을 밟는 바람에 그만...”

“저런, 그래도 다행이에요. 그리 심한 편은 아니시거든요. 오늘 치료받으시고 한 두어 번 정도만 더 오시면 금방 괜찮아지실 거예요.”

“감사합니다. 선생님.”

“우선..”

사람들은 서비스를 좋아하는 법.

이왕이면 다홍치마라고, 뭐라도 조금 더 해주는 것을 싫어할 사람은 없었다.

“손목 한 번 줘보시겠어요?”

“손, 손목이요?”

할머니가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되물었다.

발목을 접질려 왔는데 손목을 달라니.

“아, 별건 아니고, 이왕 오신 김에 진맥도 한번 잡아 보시면 좋잖아요? 제가 진맥 잡아 본다고 돈 더 받거나 그런 거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시고.”

그제야 할머니가 순순히 손목을 내미셨다.

시장 골목 상권이란 것이 이렇다. 돈이 많고 적고를 떠나서, 단돈 천 원, 오백 원에도 민감한 곳.

허준은 할머니의 손목을 잡고 지그시 눈을 감았다.

적절한 박자로 뛰는 박동 감이 손끝을 타고 느껴져 온다.

‘건강하시네.’

그리고 눈을 뜨자,

<환자를 진맥하라. 1>

* 진행도 : 1 / 10

* 보상 : [침술 Lv. 1]

사라졌었던 헛것이 눈앞에 다시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게다가 더욱 놀라운 것은,

‘숫자가 올랐어?’

진행도라 적힌 곳에 표기되어 있던 숫자가 1로 바뀌어 있는 것이었다.

분명 0이었던 것 같은데.

설마, 좀 전에 할머니의 진맥을 잡음으로써 실시간으로 숫자가 바뀌기라도 했다는 말인가.

“이, 이게 대체..?”

이 당혹스러운 상황에 허준이 말을 더듬자,

“선생님. 무, 무슨 큰 병이라도?”

“아니에요. 너무 건강하셔서요.”

“휴~ 난 또 무슨 큰일이라도 난 줄 알았잖아요?”

“제가 서 선생님 불러드릴 테니까, 안내에 따라서 같이 치료실로 가시면 돼요. 곧 따라갈게요.”

허준은 아무렇지도 않은 척, 서 선생님을 호출했고,

호출을 받은 서 선생님이 할머니를 부축해 치료실로 향했다.

그렇게 혼자 남은 허준은 쿵쾅거리는 심장을 가라앉히며 생각에 잠겼다.

그러니까 지금 눈앞에 나타난 이게 진짜라고?

<환자를 진맥하라. 1>

* 진행도 : 1 / 10

* 보상 : [침술 Lv. 1]

무시하기에는 너무나 선명하게 보이는 퀘스트.

그것을 본 허준의 머리에는 오로지 한가지 생각뿐이었다.

바로 보상이라 적힌 곳에 있는 ‘침술’.

저걸 얻게 된다면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걸까.

아 참, 일단은 치료실부터 다녀와야지.

*   *   *

해가 떨어지고, 북적북적하던 시장 골목의 가게들이 하나둘씩 펼쳤던 물건들을 접어갈 무렵.

허준한의원 원장실 모니터에는 오늘 다녀간 환자의 수가 나타나 있었다.

9명.

가장 환자가 많이 오는 월요일 치고는 역시나 형편없이 초라한 성적.

그것을 본 평소의 허준이었다면, 분명히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을 테지만,

지금 허준의 관심사는 오로지 눈앞에 나타나 있는 퀘스트에 쏠려 있었다.

‘이건 다른 사람에게 보이지는 않나 보네.’

온종일 환자들을 비롯한 서 선생님의 반응을 살펴본 뒤에 알아낸 결론이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지금까지 9명의 환자가 온 덕분에 이 퀘스트를 끝내고 보상을 확인해 볼 수 있다는 것이었다.

“원장님~ 김명자 할머니 오셨어요. 1번 치료실이요.”

때마침, 원장실 문을 열고 서 선생님이 10번째 환자의 방문을 알려왔다.

매주 월요일과 목요일. 늘 7시 30분 전후에 오시는 할머니로, 이 시장 골목에서 조그마한 술집을 하는 시장의 터줏대감이셨다.

이곳에 정착하신 지는 이제 십 년 정도 되었다고 하셨는데, 술집을 운영하시면서 얻은 관절의 통증을 관리하기 위해 방문하시는 이 한의원의 유일한 단골이기도 하셨다.

허준이 1번 치료실로 들어가 반갑게 인사를 했다.

“어서 오세요. 할머니.”

“아이고~ 몸은 좀 괜찮나? 엊그제 얼큰하게 취해서 막걸리 두 병만 싸달라고 와서는 비틀비틀 걸어 가더만.”

“제, 제가요?”

“그래. 그 비 많이 왔던 날 있잖어. 속이 많이 상했는지 웬일로 술을 달라고 하더라고.”

제대로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할머니의 설명을 들은 허준의 머릿속에 얼핏 그런 장면들이 떠올랐다. 탁자 위에 있던 막걸리병은 여기서 사 왔던 거구나.

“속상하겠지만 어쩌겠어. 시장통 늙은이들 사이에서는 아무래도 젊은 한의사보다는 시장과 함께해온 정우네가 믿음직스러운 게지. 그래도 난 정우네보다 여기가 더 좋아.”

한의사는 대학교에 붙어있는 한방병원이 아니고서야, 인턴과 레지 펠로우 같은 수련 기간이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때문에, 환자들의 높은 평균 연령은 경험이 적은 젊은 한의사들에게 선입견을 품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괜히 ‘한의사는 나이가 많은 게 깡패다.’라는 말이 있는 것이 아니란 뜻이다.

특히나 이런 시장 골목에서는 더더욱.

오죽하면 한의사 카페에조차 이런 우스갯소리가 올라오겠는가.

- 초보 원장들을 위한 팁.

나이 많으신 환자분들이 많이 찾아오는 자리는 무조건 어려 보이지 않는 것이 우선입니다. 특히나 골목, 시장상권은 무조건 필수. 머리도 유행하는 거 말고 옛날식으로 하고, 옷도 좀 펑퍼짐한 거 사 입고, 특히 촌스러운 금테 안경 같은 템으로 어떻게든 노안으로 만드십시오.

그래서 허준도 이 한의원을 인수한 뒤, 처음 몇 달 동안은 출근할 때면 쌍팔년도 영화에서 나올법한 우스꽝스러운 2:8 가르마를 만들었고, 시장 골목 안경원에서 땡처리로 사 온 도수 없는 금테 안경도 썼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역부족이었다.

정우한의원은 이 시장 골목과 평생을 함께해온 터줏대감. 단순하게 한의사의 나이가 많고, 적고의 문제만이 아니라, 이 시장과 함께하며 쌓아온 신뢰라는 튼튼한 울타리가 놓여있었다.

“멍허니 있지 말고, 어서 침이나 놔줘.”

“아, 네. 그전에 진맥 한번 잡아봐도 될까요?”

“진맥? 침맞으러 온 사람한테 진맥은 왜 자꾸 잡는겨? 정들게.”

“에이~ 제가 그래도 2주에 한 번씩은 꼬박꼬박 진맥 잡아 드렸잖아요. 그 나이쯤 되시면, 본인도 모르게 아플 수 있으니까요?”

할머니는 툴툴대면서 손목을 내미셨다.

허준이 그 손목을 잡고 눈을 감아 진맥을 살폈다.

‘역시나 건강하시네.’

그리고 눈을 뜬 순간,

<환자를 진맥하라. 1>

* 진행도 : 10 / 10

* 보상 : [침술 Lv. 1]

「‘환자를 진맥하라. 1’ 퀘스트를 완수하였습니다.」

「보상으로 ‘침술 Lv. 1’을 습득하였습니다.」

[침술 Lv. 1]

* 침의 효과를 미약하게 상승시켜준다.

주르륵 나타나는 메시지를 확인하는 허준.

“어뗘? 아직 팔팔하지?”

그런 그의 귓가에 할머니의 물음이 들려와 허준이 퍼뜩 정신을 차리고 답했다.

“네. 아주 건강하세요.”

“그럼 어서 침이나 놔줘. 오늘 정육점 윤가 놈이 일찍 온다고 해서 빨리 가봐야 하니까.”

허준은 할머니의 주문대로 침을 꺼내 들었다.

그러다가 문득 좀 전에 본 메시지를 떠올렸다.

진짜로 ‘침술’이란 것이 어떤 영향을 준다면,

그 효과에 대한 검증이 우선되어야 하지 않을까.

그래서 허준은 들고 있던 침을 누워있는 할머니의 등 대신에, 자신의 왼손 엄지와 검지 사이에 있는 합곡혈에 먼저 꽂았다.

스트레스나 소화불량, 폐병 등등에 쓰이는 혈 자리로 그나마 스스로 가장 많이 침을 놓았던 자리였다.

그런데,

‘뭐야? 그렇게 큰 차이가 느껴지지는 않는 것 같은데?’

실망스러워 하던 허준이 피식 웃었다.

내가 지금 뭘 기대하고 있는 거야?

그때, 할머니의 재촉이 다시 들려왔다.

“멍하니 뭐하고 있는겨? 나 오늘 바쁘다니까?”

“아, 죄송해요. 바로 놔드릴게요.”

확인을 끝낸 허준은 할머니의 등과 허리에 침을 꽂았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침을 뽑은 뒤, 알코올 솜으로 소독까지 마치자,

“뭐여? 단골이라고 오늘은 약침이라도 놔준 게야?”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어라? 그냥 평범한 침이네? 거 참 이상하네. 분명, 오늘 묘하게 평소보다 조금 더 개운해진 느낌인데. 여튼 수고혔어. 목요일 날 또 올게.”

할머니께서 만족스럽다는 듯이 말하며 치료실을 나서는 것이 아닌가.

그 모습을 본 허준은 직감적으로 ‘침술’이 어떤 영향을 줬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중도 제 머리를 못 깎는다는 말이 있듯이, 침도 자주 맞아 본 사람이 더 잘 아는 법.

주기적으로 침을 맞으러 오시는 할머니였기에, 그 미묘한 차이를 곧바로 알아챈 것이었다.

‘진짜 효과가 있었어! 그럼, 퀘스트를 깨면 이런 보상을 더 얻을 수 있다는 건가?’

한의원이 어떤 곳이던가.

용하다고 소문만 나면, 지방에서도 진료를 받기 위해 모여드는 곳이다.

실제로 인기가 많은 한의원은 한두 달 전에 예약해야 겨우 진료를 받을 수 있을 정도였으니까.

그런 면에서 지금 눈앞에 나타난 퀘스트는 죽어가는 이 한의원을 되살릴 뿐만 아니라,

든든한 국밥처럼 인생 편하게 살고 싶던 꿈도, 나아가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게 만들어 줄 그야말로,

‘엄청난 기연!’

허준은 그 어느 때 보다 빛나는 눈으로,

눈앞에 나타난 새로운 퀘스트를 바라봤다.

<탕약을 달여라. 1>

* 진행도 : 0 / 10

* 보상 : [탕제술 Lv.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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