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한의사 이허준
1화. 한의사 이허준
어릴 적 우리 집은 화목했다.
대궐 같은 집은 아니었지만, 식탁에 모여서 밥을 먹을 때에는 언제나 웃음소리가 들려오던, 그런 유복한 가정이었다.
그러다 1997년, 내 머리가 조금 커졌을 때 즈음에 터진 외환위기에 모든 것이 바뀌기 시작했다.
언제나 따듯했었던 집안 분위기는 차갑게 식어갔고, 식탁에서 들려오던 웃음소리도 점점 사라져 갔다.
무언가 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당시 학생이던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많지 않았다.
열심히 공부하면 돈을 많이 번다는 어른들의 말에 열심히 공부를 했다.
다행스럽게도 내 머리가 그리 나쁘지는 않았는지 성적은 빠르게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고1, 고2, 고3을 보내고,
이어진 수학능력시험에서 운 좋게 평소에 받던 점수보다 높은 점수를 받을 수 있었다.
덕분에 나는 의대, 치대, 한의대, 흔히 ‘의, 치, 한’이라 불리는 전문직으로 가는 길을 눈앞에 두고 행복한 고민을 할 수 있었다.
“의대에 가면 인턴에 레지도 한다는데, 들어보니까 그때는 잠도 하루에 2, 3시간 밖에 못 잔다고 그러더라.”
“너 치과 가봤지? 그 기계로 이빨 갈 때 들리는 소리, 생각만 해도 소름 끼치지 않냐? 그걸 날마다 들어야 해. 게다가 치과는 직업병으로 목에 디스크도 달고 산다더라고.”
“요즘엔 한의사가 대세라는데? 피 볼일도 별로 없는 데다가 은퇴도 늦게 한다는데.”
···
한의대는 의대와 비교하면 전문의 과정이 필수가 아니라, 학교를 6년만 다녀도 되고, 생명이 걸린 위중한 수술도 할 필요가 없다.
그리고 가장 빨리 사회에 나와서 돈을 벌 수 있으며, 은퇴는 가장 늦다.
게다가 드라마 ‘허준’의 열풍에 이어서 요즘 유행하고 있는 ‘웰빙’은 그야말로 한의사의 등에 날개를 달아준 셈.
즉, 개원해서 자리만 잡으면 인생 국밥처럼 든든하게 살 수 있다는 말이었다.
이보다 더 완벽한 선택지는 없었다.
그래서였을까, 내 이름 ‘이 허준’이 동의보감의 저자 ‘허준’과 겹치며 마치 운명처럼 느껴진 것은.
물론, 그때의 이 선택이 가져온 결과는,
“은퇴를 안 해...”
원장실 창밖으로 보이는, 길 건너 1층의 정우한의원.
허준은 그리로 들어가는 한 무리의 노인들을 보며 중얼거렸다.
“74세이시면 좀 쉬셔도 되잖아요.”
길 건너 원장님은 연세가 벌써 74세이신데 은퇴할 생각이 조금도 없나 보다.
소문에는 강남에 빌딩도 2채나 가지고 계신다는데, 대체, 왜, 쉬지를 않으시는 걸까···.
이렇듯, 한의사의 은퇴가 늦다는 장점은 나와 같은 후발주자보다는 이미 앞서 나간 선발주자들에게 돌아가는 혜택이었다.
똑. 똑.
원장실 문을 노크하는 소리에 허준은 잽싸게 의자에 앉아 헛기침으로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네~ 들어오세요.”
“원장니임~”
문이 열리며, 의원에서 일하고 있는 간호조무사 서정숙 선생님이 눈웃음을 지으며 들어왔다.
김이 올라오는 종이컵을 들고서.
“따듯한 커피 한잔 드세요~”
“아, 예. 감사합니다.”
점심시간에 분명 같이 커피를 마셨는데도,
굳이 이렇게 또 직접 커피를 타서 가져다주는 서 선생님.
그녀가 이렇게 커피를 가져다줄 때는, 필시 무언가 할 말이 있다는 뜻이었다.
이번엔 또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저기 원장님. 죄송한데요... 내일 하루, 쉴 수 있을까요?”
“내일요?”
“네. 갑자기 말씀드려서 정말 죄송해요. 집에 일이 생겨서...”
“혹시, 무슨 일이신지 여쭤봐도 될까요?”
“어휴~ 딸년이 또 사고를... 아주 웬수가 따로 없다니까요?”
서 선생님의 딸은 대학생으로 지방에서 자취 중이라고 한다.
가끔 이런저런 사고를 친다고 들었는데, 한동안 조용하다 싶더니 또 무언가 말썽을 일으킨 모양이었다.
“흠-”
사실 한의원에 직원이 둘이었다면 아무 문제 없는 일이었겠지만, 현재 사정상 지금은 서 선생님이 이 한의원의 유일한 직원이었다.
그나마 다행스럽게도 내일은 토요일.
오전 9시부터 오후 1시까지 4시간만 일하면 되는 날.
뭐, 여자친구한테 카운터만 잠시 맡아달라고 부탁하면 되지 않을까?
“알겠어요. 지인한테 부탁해 볼게요.”
“아우~ 정말 고마워요. 원장님~!”
50대의 서 선생님이 콧소리를 내며 답한다.
허준은 그 애교가 굉장히 부담스러웠지만, 태연하게 미소지으며 답했다.
“아니에요. 일 잘 보고 오세요.”
“네~ 맛있는 거 사 올게요~~ 천안 호두과자~~”
‘선생님. 저 팥 안 먹는 거 아시잖아요. 엊그제 붕어빵 사 왔을 때도 혼자 다 드셨으면서···.’
허준은 애써 미소를 유지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 * *
살다 보면 그런 날이 있다.
아침에 일어나 하늘을 보니 먹구름이 가득하고, 출근하러 나오는데 끈적한 공기가 몸을 감싼다.
이어서 후두두두둑- 소리를 내며 쏟아지는 굵은 빗방울이 바람에 날려, 우산을 썼음에도 아무 소용이 없는 바로 그런 날.
‘망했다.’
허준의 머릿속에 오늘 하루가 자연스럽게 그려진다.
당장 본인도 집 밖을 나서기 싫었으니까.
복작, 복작.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침부터 바삐 움직이는 시장 골목.
그러나 역시 평소보다는 한적한 모습이다.
허준은 시장 골목 사거리에 있는 2층의 한의원,
허준한의원을 향해 계단을 올랐다.
“오빠~ 왔어?”
화사하게 화장을 한 여자친구가 미리 도착해 현관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의 집은 한의원에서 1시간 정도의 거리로 꽤 멀었는데, 먼저 도착해 있을 줄이야.
“어, 일찍 왔네? 늦어서 미안.”
“아니야. 그냥 오늘 눈이 빨리 떠지더라고. 근데 오늘 날씨 너무 안 좋다.”
“좀 그렇지? 어차피 이런 날에는 사람들 잘 안 나오니까, 그냥 데이트하기 전에 잠시 들렀다고 편하게 생각해.”
허준은 한의원 문을 열고 들어가 진료 준비를 시작했다.
서 선생님의 펑퍼짐한 간호사복이 너무 헐렁했기에, 어쩔 수 없이 오늘 입고 온 단정한 원피스 차림으로 카운터에 앉은 여자친구.
“아~ 차트 입력 이렇게 하면 되는 거구나? 간단하네?”
“응. 쉽지? 혹시 모르는 거 있으면 카톡으로 바로바로 물어봐. 아 그리고 한의원에서는 원장님이라고 부르는 거 까먹지 말고.”
“당연하죠. 원장님!”
밝게 대답하는 그녀에게 기본적인 차트 프로그램의 사용법에 대해 대강 알려주다 보니, 진료시간이 다가온다.
9시 정각.
드디어 진료 시작.
- 아 오빠 환자 많이 오면 어떻게 하지? ㅠㅠ 나 긴장돼.
- 걱정하지 마. 날씨 보면..
- 에이~ 그래도 갑자기 몰려올 수도 있잖아? 어쨌든 나 실수해도 봐줘야 한다? ㅋㅋ
- ㅇㅇ 물론이지.
초반에는 여자친구에게서 환자가 많이 오면 어쩌냐며 호들갑 떠는 카톡이 왔지만.
째각. 째각.
시간이 아무리 지나도.
한의원 현관문에 매달린 종이 울리지 않자.
- 오빠... 환자가 안 와. 심심하당.
- 그럼 대기실에 있는 TV켜서 보고 있어.
- 정말? 그래도 돼?
- ㅇㅇ
그렇게 어느덧 11시.
2시간이 지날 동안, 한 명의 환자도 오지 않았다.
예상은 했지만,
그래도 여자친구한테 카운터를 맡겼는데.
“하-.”
한숨이 절로 나온다.
어차피 환자도 안 오는데, 그냥 원장실 밖으로 나가 여자친구와 놀까? 라고 생각도 해봤지만.
창밖을 보자 그럴 마음이 쏙 들어가 버렸다.
“...저기는 들어가네.”
길 건너편의 정우한의원에는 이런 날씨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들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날씨 핑계나 대고 있다니 스스로가 너무 한심한 허준이었다.
그렇게 시간은 계속 흘러,
딸랑. 딸랑.
12시가 조금 지나서야, 처음으로 한의원 현관문의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어서 오세요~ 성함이 어떻게 되시죠?”
오랜 기다림 탓일까.
여자친구의 목소리가 아침보다 조금 더 하이톤이 되어 있었다.
“어? 처음 보는 얼굴이네? 아~ 주말 땜빵? 난 치료받을 건 아니고...”
닫혀있는 원장실 문 사이로 들려오는 귀에 익은 목소리에 허준은 인상을 찌푸렸다.
하필, 목소리의 주인공이 진상 중에서도 개진상에 속하는 환자였기 때문이다.
“발목이 좀 시원찮아서, 저기 발 마사지기 좀 쓰려고.”
“아...”
들어온 환자는 자연스럽게 우산을 접어 통에 꽂은 뒤, 마치 자기 집인 양 자연스럽게 신발을 벗고는 당당하게 정수기 앞으로 가 커피 믹스를 타서 한 모금 호로록 마셨다.
“거기~ 리모컨 좀 줄래? 아침드라마 재방 시간이라서, 아 그리고 난 신경 안 써도 되니 가서 편하게 일 봐~”
그러면서 당연하다는 듯이 발 마사지기로 축축하게 젖은 발을 들이밀고는, TV를 보고 있던 여자친구의 리모컨을 빼앗아 갔다.
‘아오 저 진상..’
허준은 당장에라도 그녀를 쫓아내고 싶었지만, 그녀는 이 시장 골목에서 마당발로 통하는 사람 중 하나였다.
가뜩이나 파리 날리는데, 그녀의 입에서 이상한 소문이라도 나기 시작한다면, 남은 환자들의 발길마저 끊기게 될지도 모르는 일.
“이 한의원은 조용해서 참 좋단 말이야. 건너편 정우네는 점심시간에도 사람이 항상 많아서 쯧쯧.”
호로로록-
커피를 마시면서 짜증 나는 소리만 늘어놓는 진상.
그녀는 그렇게 1시까지 본인 집처럼 편안하게 발 마사지기를 사용하다가,
“저... 진료시간 끝났어요.”
“아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그럼. 수고~”
여자친구의 말에 얌전히 문을 나섰다.
물론, 나가는 길에 커피 믹스와 사탕을 한 움큼 챙겨가는 것도 잊지 않았다.
똑똑.
“...오빠. 끝났어.”
이렇게 토요일 진료가 끝났다.
오늘 환자는 0명.
고로, 매출도 0원.
여자친구한테 도와달라고 부탁할 필요도 없었던 날이었다.
* * *
“우리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 뭐 땡기는 거 있어?”
“아니, 배 안 고파. 그냥 카페나 가자.”
한의원을 나설 때부터, 여자친구에게서 싸늘한 냉기가 풀풀 날린다.
평소에 맛있는 거라면 사족을 못 쓰던 그녀였는데.
“오빠.”
허준이 김이 올라오는 커피를 가져오자마자.
자리에 앉아 있던 여자친구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불렀다.
“응?”
“나한테 결혼 생각 있다고 했지?”
“당, 당연하지...”
허준의 나이 어느덧 서른 중반을 향해 가는 중,
그리고 그 시간 동안 여자친구도 서른이 되어 있었다.
“준비는...?”
조심스레 물어오는 그녀의 질문에.
허준은 곧바로 대답할 수가 없었다.
그녀가 오늘 직접 경험했듯이, 현재 한의원의 상황이 최악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가지고 있는 통장 잔액도 그와 같다는 것은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었다.
“되었을 리가 없겠지.. 내가 직접 보니 알겠어.”
후우우우- 여자친구가 깊게 심호흡했다.
그러고는 한참 창밖을 바라보더니, 입을 열었다.
“오빠. 내가 예전에 20대가 지나기 전에는 결혼하고 싶다고 했던 거, 기억나?”
“물론이지.”
“그때, 오빠가 아직 준비되어있지 않다고 해서,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했잖아. 그래서 기다렸어. 오빠가 한의원 인수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까. 자리만 잡으면 금방이겠지. 그때까지 보채지 말자. 부담 주지 말자. 그렇게 생각했어.”
“...”
“그게 벌써 2년 전이야. 그런데, 오빠는...”
결혼 준비란 무엇인가.
결국은 돈이다.
지난 2년간 허준은 한의원을 개원한 뒤, 제대로 돈을 벌지 못했고,
기다려 준다고 했던 그녀의 시간도 영원한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지금,
그녀는 결단을 내렸다.
“우리.. 여기까지 하자.”
그렇게 그녀의 입은 담담히 이별을 고했고.
“그래...”
허준 또한 그것을 담담히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먼저 갈게.”
허준은 멀어져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어쩐지 망할 것 같더라니..”
그 예감은 완벽히 적중했다.
오늘은 한의원을 인수한 뒤, 처음으로 환자가 한 명도 오지 않은 날이자,
4년을 함께해왔던 인연도 잃은 날이었으니까.
“커피는 무슨.. 술이나 마시자.”
허준은 그녀가 입도 대지 않은 커피를 버리고,
근처 편의점에서 술을 사서 한의원으로 향했다.
그래. 이 거지 같은 한의원에서 술이나 마시자.
어차피 이제 내게 남은 것은 이 한의원 하나뿐이잖아.
그렇게 토요일을 개처럼 보낸 다음의 일요일 오후.
<환자를 진맥하라. 1>
* 진행도 : 0 / 10
* 보상 : [침술 Lv. 1]
“...뭐야 이게?”
허준은 눈앞에 보이는 것을 보며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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