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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완) (1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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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ght up Side story

늘 그래왔듯

Bonus track

늘 그래왔듯

“됐어. 기대도 안 했어.”

정지운은 퉁명스레 대답하며 잔에 담긴 술을 털어 마셨다. 유리잔을 굴러다니는 얼음 소리가 경쾌하게 울린다. 나는 그 반응에 어이가 없어 할 말을 잃고 맞은편을 봤다. 형이 데려온 남자는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술을 마신다. 그래도 넌지시 한마디 거들어주기는 했다.

“재현 씨가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 왜 그래.”

“지난 휴가도 못 맞춰서 말아먹으셨죠, 윤재현 씨? 대답해봐.”

“내가 일부러 휴가 안 맞추는 거 아니잖아. 나 신입이고 막내야. 위에서 조정하라는데 무슨 대답을 해.”

“왜 아직도 신입이야? 들어간 지가 언젠데.”

“회사에서 신입을 안 뽑는다고요. 그래서 매일 야근하고 있고요.”

“알았어. 알았다고.”

오, 하느님 아버지 그리고 부처님. 나는 분명히 무신론자였건만 정지운과 연애하면서 매 순간 온 세상의 신은 다 찾게 되었다. 긍정적인 이유는 절대 아니다. 누구든 이 싸가지 없는 놈에게 세상의 쓴맛을 보여주시면 안 될까요.

멜랑꼴리한 노래가 촛불 사이로 감도는 바는 데이트에 딱 좋겠지만, 남자 세 명만 앉은 우리 테이블의 분위기는 별로 낭만적이지 못하다. 정지운은 아예 등받이에 등을 기대앉아 휴대폰을 만지작댄다. 나는 술잔이 부서져라 부여잡고 그 꼴을 노려봤다.

차분하게 되짚어보자. 내가 잘했다는 건 물론 아니다. 하지만 온종일 싹싹 비는데도 너무하는 거 아니야? 아침부터 토라져서는 말수도 별로 없더니 자기 아는 형을 데려와서도 이 모양이다.

애초에 될지 안 될지 모른다고 말하기도 했었잖아. 했던가? 했겠지. 슬슬 눈이 감길 만큼 뻑뻑해지는데 노려보는 나를 새초롬한 눈동자가 올려다보고는 한마디 하기는 했다.

“뭘 봐.”

“내가 그렇게 잘못했어?”

“뭐?”

“내가 약속 조지려고 일부러 그래?”

“윤재현. 누가 들으면 내가 휴가 말아먹은 줄 알겠다.”

“됐어. 나도 됐다고.”

나름대로 자제해서 한 말인데 턱을 치켜든 표정이 심상치 않아졌다.

“돼? 뭐가 됐어?”

“말 좀 좋게 해주면 안 돼?”

“그럼 거기서 아이고, 우리 재현이가 힘들겠구나. 이번 휴가도 망했지만 언젠가 해외여행 갈 수 있겠지. 힘내. 이렇게 말해줘? 니 휴가랑 내 휴가가 기적처럼 맞는 순간을 손꼽아 기다리자고?”

“좀 그러면 안 돼?”

“안 되겠다.”

“아, 나가자. 나가서 이야기해.”

옆 테이블과 간격이 있다지만 아예 안 들릴 건 아니다. 형이 데려온 남자는 내 맞은편에서 이 싸움을 보고도 별 상관없는지 지나가는 누나에게 부탁해 술이나 몇 잔 더 시켰다.

잠깐 이야기 좀 하고 오겠다고 양해를 구하고 우리는 당당하게 가게 밖으로 걸어 나왔다. 어차피 나가봤자 1층 바의 유리문 너머 좁아터진 골목일 뿐이다.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눈을 피해 전봇대 뒤에 섰다. 정지운은 전봇대에 기대서서는 어디 말해보라는 표정으로 내게 까딱까딱 손짓했다. 시발놈 같으니라고. 나도 인상을 구겼다.

“형은 왜 말이 항상 그래?”

“나 원래 이랬어.”

“그건 알았지. 아, 짜증나. 이게 지금 내가 일부러 망친 거야?”

“짜증? 상식적으로 생각을 해봐라. 애인이 휴가 못 맞췄다는 걸 알게 된 내 기분이 안 좋겠냐, 니가 안 좋겠냐?”

그래도 약간의 이성은 남아서 애인이라는 단어는 나조차도 안 들리게 소리를 죽여 말한다. 이렇게 이성적인 놈이 회사에 대해서는 어떻게 손톱만큼도 이해를 못 하는 걸까.

왜긴 왜야, 이놈이 회사엘 다녀봤어야 알지. 나는 갑갑한 마음에 셔츠 소매 단추를 끌러 옷을 걷어 올렸다. 싸우자는 뜻은 아니고 더워서 그런 거다. 진짜로.

“미안하다고 했잖아.”

“알았고, 나는 내가 알아서 짜증내고 기분 풀게.”

“……알았어. 나는 집에 갈게.”

“왜 가.”

“형 짜증 풀리면 연락해.”

“싫은데. 옆에서 내 짜증 받아줘야지.”

뭘 당연한 걸 묻냐는 표정이어서 나는 눈을 감고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얘는 왜 이렇게 나를 열받게 만들지? 술이 확 올라 어지럽다.

서로 기세등등하게 노려보기를 몇 분이 지났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기웃거리는 게 느껴져도, 슬슬 추워져 와도 나는 꿋꿋하게 자세를 풀지 않았다. 그건 정지운도 마찬가지였고.

적막을 깨고 술집의 문이 열렸다. 남자가 나와서는 한심하다는 듯 우리를 보고 있었다. 그 눈빛이 진짜 애들 보는 듯하다. 민망해져 일단 안 싸운 척 딴청을 부려봤다. 물론 하나도 안 통했다.

“난 간다. 집 가서 싸워. 사람들이 다 내다보고 있더라.”

“누가?”

“전부 다.”

정지운의 물음에 남자는 뒤를 손짓해 가리켰다. 그런가? 동네 쪽팔리게 진짜. 나는 죄송하다고 중얼거리고는 애꿎은 바닥만 툭툭 걷어찼다. 정지운은 퍽 사회성 좋은 사람처럼 남자에게 인사말을 건넨다.

“재현이 보여준다고 데려와 놓고 싸웠네. 미안. 다음에 술 살게, 형.”

“봤으니 됐다. 다음에는 이원이 데려와서 내가 싸울 거야.”

처음 만난 사람을 두고 열심히 싸워댄 나도 겸연쩍게 고개를 꾸벅하며 인사했다. 남자는 시원스레 웃어 보이곤 대리 운전기사의 전화를 받으며 골목 너머로 걸어갔다. 세워둔 검은색 차가 헤드라이트를 깜빡이는 게 보였다.

그러고 나니 이쪽을 구경하듯 힐끗거리는 사람들이 보인다. 바 안에서, 그리고 우리 옆을 스쳐 지나가다가 한 번 힐끔 보고 갈 길을 가는 여자까지.

삐딱하니 끼고 있던 팔짱을 풀고, 정지운도 휴대폰을 꾹꾹 눌러 뭐라고 한다. 대리 운전기사를 부르는 모양이었다. 나는 하는 행동을 눈만 깜빡이며 보고 있었다. 몇 마디 통화하고는 근처에 다 왔는지 전화를 끊으며 내게 눈짓한다.

“가자.”

“이러고 오늘 같이 가자고?”

“어.”

그게 뭐, 안 되냐는 듯 나를 보는 눈동자를 마주하려니 손가락을 세워 쿡 찌르고 싶다. 안 될까? 안 되겠지.

“싫은데.”

“좋게 집에 가자.”

“내가 왜.”

가기 싫다고 버텨봤더니 정지운은 내 뒷덜미를 잡아다 질질 끌고 갔다. 그리고는 차 문을 열고 내 등을 밀어 구겨 넣다시피 했다.

물론 끌려가면서 옆구리도 팔꿈치로 치고 나름대로 반항을 했다. 그래 봤자 끌려들어 간 거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자꾸 우리의 개싸움을 구경하려 했고 쪽팔린 나머지 결국 마지막에는 내 발로 걸어가고야 말았다.

대리 운전기사님이 운전석에 타고 나와 정지운은 뒷좌석의 양 끄트머리에 앉아 바깥만 노려봤다. 차라리 나를 좀 놔줬으면. 저놈은 왜 나를 안 놔주고 열받게 옆에 끼고 있는 거지.

집에 와서는 방으로 휙 들어가는 뒷모습을 노려보다가 거실 소파에 드러누웠다. 내가 안 따라가니까 도로 나와서 누워있는 내 꼴을 한참이나 내려다봤다.

“안 들어와?”

“여기서 잘 거야.”

무슨 말을 하려는 듯 입술만 우물거리더니 묵묵히 서 있다가 방으로 들어갔다. 그제야 나는 몸에 힘을 풀고 길게 드러누웠다. 넓은 거실의 천장만 의미 없이 보고 있다가 웃기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같은 방에서 자지도 않을 거, 왜. 대체 왜 나를 안 보내주는 걸까.

불을 끈 침실 안쪽이 조용해졌다. 곧 날이 밝아올 만큼 늦은 새벽이었다. 이제라도 조용히 집에 갈까 하다가 내일 아침 더 지랄할까 봐 그냥 소파에 웅크려 잠들었다. 가벼운 술기운에 힘입어 졸리기는 더럽게 졸렸다.

아침에 너무 밝아서 눈살을 찌푸리며 깼다. 나른한 몸을 길게 기지개 켜며 천장을 봤다. 푹신하긴 한데 항상 보던 천장이 아니다. 맞다, 방이 아니었지. 몸에 마찰된 가죽 소파 소리가 작게 울린다.

서향이라 아침 햇볕이 안 드는 내 방이 아니었다. 두꺼운 커튼으로 창을 둘러둔 정지운의 방도 아니었고.

문득 일어나려는데 머리 아래에 베개가 대어져 있는 걸 알았다. 그리고 몸을 누르고 있는 이불도. 묵직한 솜이불은 내 몸을 짓누르고 있었다. 숨 막혀 죽겠다.

내가 자다가 추워서 가져왔을까. 아니면 덮어준 건가? 아직 안 일어난 건지 조용한 침실 문을 물끄러미 보다가 샤워하러 들어갔다.

하여튼 짜증나게 굴다가도 손톱만큼은 귀엽다. 진짜 손톱만큼만. 드레스룸에 들어가서 편한 옷도 알아서 찾아다 입고는 또 멍하게 있었다. 뭘 할까. 거실에 덩그러니 앉아 있다가 생각난 게 있었다. 주방에 가서 밥이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이었다.

밥통에 물을 받고 쌀을 씻었다. 두 번 씻고 물을 버릴 때 뒤에서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깼나 보네. 집에 갈 걸 그랬나. 생각해보니 그렇다. 어젯밤 그렇게 집에 가겠다고 해놓고 아침에 일어나 샤워하고 쌀을 씻고 있는 게 약간 쪽팔렸다. 그래서 뒤도 안 돌아보고 쌀만 벅벅 씻었다.

발소리가 뚝 멈추더니 냉장고를 여는 소리가 들렸다. 빨대가 음료를 다 빨아 쪼로록 울리는 소리도 들렸고. 또 그 맛없는 코코넛 음료를 마시나 보다. 저걸 도대체 무슨 맛으로 먹는 걸까. 쌀을 벅벅 씻다가 물을 버리고 수돗물을 다시 받았다. 멀어질 줄 알았던 발소리가 조금 더 가까워졌다. 귀 가까운 곳에서 목소리가 들린다. 바로 뒤에 서서는 내게 말을 걸었다.

“뭐 해.”

“쌀 씻어.”

“밥하게?”

“어.”

“갈 줄 알았더니.”

“습관이야, 습관.”

한 걸음 더 가깝게 다가와서는 내 뒤에 서는 게 느껴진다. 나는 싱크대와 정지운의 몸 사이에 갇혀 오도 가도 못 하고 쌀만 만지작거렸다. 허리를 끌어안고 내 어깨에 턱을 올리는 게 느껴졌다. 숨결이 목덜미를 간질여온다. 상체를 기울여 피하려는데도 집요하게 붙어 오길래 살짝 고개를 돌렸다. 콧대가 내 뺨을 누를 만큼 가깝다. 키도 큰 게 무겁게. 일부러 퉁명스럽게 말했다.

“왜 붙어.”

“짜증 다 풀렸어.”

“나는 아직 안 풀렸어.”

“그래?”

내 대답에 잠깐 생각하는 듯 신음성이 흘렀다. 다시 어깨에 기대며 하는 말이.

“그럼 지금 풀어.”

그러고는 턱선을 따라 입술을 자꾸 붙여 왔다. 간지럽기도 하고 민망해서 피하려 왼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집요하게 붙어 오는 얼굴 때문에 씻고 있던 쌀은 결국 놔버렸다. 돌아보니까 아직 잠도 다 안 깬 얼굴이다. 그런데 이렇게나 붙어 온다. 젖은 손을 옷에 문질러 닦고는 얼굴을 밀어내다가 약간 짜증을 냈다.

“좀 떨어져. 왜 벌써 풀려?”

“지금 귀여워서.”

“뭐?”

“그리고 너 자고 있는 거 불쌍해 보이기도 했어.”

“아, 시발. 인간성 봐. 내가 불쌍해 보이면 좋아?”

“응.”

“왜 그래?”

“음…….”

여기서 잠깐 고심하는 척을 하더니 금세 그 기색을 지운다.

“몰라. 넌 그런 게 귀여워.”

“난 아니야. 형 이러는 거 안 귀여워!”

온몸을 비틀며 피했더니 배 위에 있던 손이 아예 깍지를 껴 허리를 꽉 끌어안는다. 순간 헉 소리가 나올 뻔했다. 힘만 더럽게 세서는. 결국은 목덜미를 내준 채 그냥 모든 걸 포기했다. 이게 뭐 하는 짓인가 싶어 멍하게 서 있다가 쌀을 다시 만지는데 귓가에 대고 한다는 소리가.

“안 풀 거야?”

“생각 좀 해보고.”

“왜?”

왜기는. 정말 모르고 하는 소리일까. 한마디 할까 싶어 고개를 돌리려다가 그만뒀다. 목덜미에 딱 맞게 기대 있는 게 귀여워서 그냥. 잠깐 둘까 싶었다. 딱 손톱만큼만 귀여웠다. 정말로.

∞ ∞ ∞

“대리님, 제가 구울게요.”

“됐어요. 이쪽 불판은 제가 할게요. 김 주임님은 그쪽 불판 구워주세요.”

집게를 고쳐 쥐며 내뱉은 대답에 김 주임의 흰 손이 오려다가 만다. 네에 하는 작은 대답과 함께 다른 집게를 집어 들고는 고개를 돌리길래 나도 마저 고기를 구웠다. 맞은편의 나이 지긋한 차장님이 내게 안경 너머로 짓궂은 눈치를 주신다. 그것도 모르는 척 김치를 불판 구석에 척 올렸다.

내 대답이 싸가지 없었나. 왁자지껄한 회식 소리를 귓가로 흘리며 잠깐 고민해봐도 별문제는 없었다. 딱 잘라내는 대답이기는 했어도.

책상다리로 앉은 엉덩이를 들썩이며 집게로 불판 위의 고기를 척척 뒤집었다. 긴 상을 두 개 붙여 앉은 팀 회식은 불판이 두 개고, 내가 하나를 맡았으니 김 주임이 다른 하나를 맡는 게 맞잖아. 이 정도면 이유도 대고 잘 거절한 거다.

불판에서 숯으로 뭐가 떨어졌는지 연기가 풀풀 날려댄다. 인상을 찌푸리고 손부채질을 하는데 옆에 앉은 과장님이 고기를 날름 집어 먹으며 말씀하신다.

“고기 잘 굽네, 윤 대리.”

신입 들어오기 전까지 제가 고기 다 구웠잖아요. 손목 나갈 뻔했었죠. 하하하.

“감사합니다.”

“우리 윤 대리 고기도 잘 굽고 이렇게 가정적인데 누구 안 만나? 이제 슬슬 만나야 때가 맞지.”

“에이, 무슨 때요.”

고기를 잘 굽는다는 칭찬에서 물 흐르듯 이어지는 떠보기까지. 남다른 멘트로 치고 들어오는 권유에 나는 슬쩍 고개를 저으며 얼버무렸다.

때가 맞는다, 라. 그 일반적인 사람들의 인생 루트를 말하는 거겠지. 연애할 때, 결혼할 때, 집을 사고, 애를 가지고, 뭘 해야 한다는 그 때들.

예전 같았으면 이 정도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면 다들 말을 접어줬지만, 요즘에는 꼭 한 마디씩 더 나오곤 하신다.

“누구 딱히 만나는 사람 없으면 우리 조카딸 만나볼래? 사보 모델 했던 거 집에 뒀더니 괜찮아 보인다고 하더라. 공기업 다니고 참한 애야.”

그리고 나는 이때마다 강렬한 유혹에 빠져드는 것이다. 차라리 만나는 사람이 있다고 정수연이라도 팔아먹을까. 하지만 요즘 같은 대인터넷 시대에서 정수연이 제 남친과 찍은 사진을 틀림없이 SNS에 올려뒀을 테니 이 생각은 재빨리 접었다.

용돈 벌이나 하고, 무엇보다 부모님께 자랑스럽게 가져다드리려 찍은 사보 모델이 이렇게나 내 발목을 잡을 줄 누가 알았을까. 돈이라도 많이 줬으면 안 억울했지.

그리고 뭐랄까. 기념으로도 그냥 하나 갖고 싶었다. 지운이 형은 빈방 중 하나에 자기 사진을 걸어뒀는데 무슨 유명 포토그래퍼가 찍은 거라고 했다.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고 있는 흑백 사진인데, 테이블에 기대앉아 상반신만 클로즈업되어 있다. 그게 그렇게 분위기 있어 보였다. 그 외에 자기가 찍은 사진이나 영상물도 차곡차곡 쌓아 정리해뒀고.

그게 부러워 괜히 한번 해봤다. 어릴 때야 사진을 찍는 데 시큰둥했지만, 지나간 모습이 기록으로 남아있는 게 좋아 보였달까.

한때의 충동으로 도전했던 사보 모델은 내게 한순간의 기록을 남겨줬고, 그 후에 형 카메라를 뺏어다 일상을 몇 개 찍다가 말았다. 그리고 이제는 집에서조차 자꾸 엄마가 연락을 해온다. 교회 누가 그 팸플릿을 보더니 한번 보자고 한다고.

나는 그때마다 그 팸플릿 속 사람은 현실의 나와 전혀 다르게 생겼으니 그런 말 하지 말라고 했다.

“저 괜찮아요. 매일 야근에 만날 여유도 없구요.”

“만나는 사람 없으면 한번 봐봐. 인연 누가 알아?”

“여유 되면 열심히 찾을게요.”

누구 딱히 만나는 사람. 물론 있다. 그 사보를 찍을 때 죽여주는 각도를 잡을 수 있도록 친히 지도해주신 애인이 한 명 있기는 하다. 하지만 이 사실을 밝힐 날은……. 아마도 죽음이 가까운 날 아닐까. 혹은 정말 대단한 사람이 되어 이 세상에 자서전을 남기게 된다면. 인생의 황혼을 맞이한 마지막 날쯤에 밝힐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나를 이 불편한 대화에서 구해준 건 다른 주제였다. 중년을 넘어서는 나이의 지점장님이 작은 몸짓으로 젓가락을 테이블에 툭툭 두드리자 우리 모두 하던 말을 멈추고는 그쪽을 바라봤다. 고기가 타려는 것 같아 뒤집으려다가 딴짓하는 것처럼 보일까 봐 그냥 뒀다. 직장은 효율보다 눈치다.

“자자, 연말 회식은 언제 할까. 다음 주 금요일? 다다음 주? 손들어봐.”

저는 3번이요. 안 한다 없습니까?

마음의 소리를 힘겹게 억누르며 두 번째 선택지인 다다음 주 금요일에 손을 들었다. 다행히 내가 손든 날이 압도적으로 많다.

연말 회식에는 한우라도 먹을 수 있을까. 근데 회식은 한우 먹어도 싫은 법이다. 한우 정도면 좋을 줄 알았는데 그래도 싫더라. 집에서 그냥 컵라면 먹게 해주세요.

이미 딱딱해졌을 고기를 또 뒤집는데 과장님이 은근히 권유를 해온다.

“이번 주말에 일 있어, 윤 대리?”

“친구가 연극 보고 책 보자고 하더라구요.”

“여자?”

“남자입니다. 학교 앞에 오랜만에 가볼까 해서요.”

“할 일 없으면 우리 조카 보자고 하려 했는데. 아쉽다.”

그 말에 말씀은 감사합니다, 라고 활짝 웃어 보이고는 밥을 먹는 척했다. 직장용 미소였다. 한껏 올라갔던 입꼬리가 내려가고 무의식이 되어 이제는 공깃밥을 깨작거렸다. 술이라도 강권 안 해서 다행이다. 집에 가고 싶다. 주말이나 빨리 왔으면.

오해하지 않도록 가끔 저런 자리에 나가 얼굴이라도 비칠까 생각한 적도 있었지만 안 그러기로 약속했다. 대신 지운이 형은 어떤 예능이든 러브 라인이 맺어질 만한 건 안 나가기로 했고.

심지어 그 약속을 깨지도 않고 잘 지키고 있으니 나는 더더욱 나를 단속해야 하는 거다. 러브 라인이 없으면 제대로 된 카메라도 못 받는 대한민국 예능에서 그걸 굳건히 지키고 있는데 내가 감히?

드라마나 영화는 도저히 연애 없는 시놉을 찾을 수가 없어서 그냥 찍어도 된다고 합의했다. 연애하자고 애인 밥줄 다 끊어놓을 수는 없는 일이잖은가. 하고 다니는 시계랑 선글라스들 다 사 모으려면 한 재산 해 넣었을 텐데.

왼쪽 손목에 차고 있는 은색 시계를 돌리며 생각했다. 다 됐고, 집에 가고 싶다. 회식 끝났으면. 빨리 주말이 됐으면 좋겠다. 요즘 인생의 낙이 지운이 형 괴롭히는 거 외에 별로 없어서.

사람이 붐비는 게 싫었던 우리는 토요일 낮 연극을 예매해놓았다. 그리고 한낮이라고 날씨를 무시했던 나는 현관을 열고 나왔다가 도로 들어가 옷을 갈아입었다. 목까지 올라오는 두꺼운 베이지색 니트에 검은색 패딩까지. 그리고 목도리를 둘러 얼굴만 내놓고는 밖으로 나왔다.

어릴 때는 몰랐는데 나이 먹으니 더위는 그럭저럭 참을 만한 거 같은데 추우면 기운이 없다. 주머니 안에서 진동하는 휴대폰을 들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응.”

―나왔어?

“응.”

―자는가 싶어서. 알았어.

어제 전화하다가 데리러 온다길래 그냥 버스 타고 가겠다고 말렸었다. 괜히 차 끌고 오면 그게 더 눈에 띈다. 보통 눈에 띄는 차라야지. 혹시 길 가다 알아보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고.

그랬더니 형도 눈에 안 띄게 택시 타고 오겠다고 했다. 그리고 약속을 하자마자 우리 두 사람 다 느꼈다. 절대 늦으면 안 된다, 라고.

대학로 공원 초입에서 보기로 했고, 추운 겨울날에 누구 한 명이라도 기다렸다가는 만났을 때 서로 지랄할 거라는 예감을 강렬하게 느꼈던 것이다.

그래서 버스정거장에 일찍 나와 서 있는 중이다. 시린 손을 주머니에 쑤셔 넣고 버스를 기다리며 옆 가판대를 보다 보니 색색의 잡지가 눈에 밟힌다. 두꺼운 패션 잡지들 아래에는 얇은 시사지나 신문, 그리고 연예 기사가 있는 잡지들까지.

영화 잡지의 제목을 보다가 가판대로 성큼 걸어갔다. 다행히 지갑에 지폐가 몇 장 있었다. 천 원짜리 석 장을 드리고 가판대에서 잡지를 꺼내 들자마자 버스가 왔다.

버스에 올라타니 훈훈한 공기가 얼굴을 훅 데웠다. 한산한 버스 뒷자리에 앉아 창가에 기대서는 잡지를 펴 봤다. 얇은 재질의 미끄러운 종이가 손안에서 사르륵 넘어가다가 중간쯤에서 멈춘다.

얼마 전에 했던 인터뷰가 두 페이지에 걸쳐 빽빽하게 실려 있다. 측면을 보고 있는 옅은 머리 색의 사진을 보다가 나는 창을 돌아봤다. 스쳐 지나가는 겨울의 풍경보다 앞에 내 얼굴이 반투명하게 비쳐 보인다. 잡지 안의 정지운보다는 어두운, 하지만 직장인치고는 다소 밝은 머리 색을 노려보다가 다시 잡지를 봤다.

염색하러 혼자 가기 심심하다고 해서 끌려갔다가 나도 강제로 같은 색을 염색하고야 말았었다. 뭐, 나야 검은 머리카락 위에 염색약을 덮었고 형은 색을 뺀 모래알 색 같은 머리카락에 염색을 했다.

묘한 베이지와 같은 갈색이 된 형과 달리 나는 그냥 색이 좀 밝아졌을 뿐인데 그래도 직장에서 툭하면 한 소리를 들었다. 머리 색이 그게 뭐냐고. 워낙 보수적인 직장이다 보니 다들 걸고넘어지더라.

보고서를 들고 갔다가 차장님이 우스갯소리로 니가 아이돌이냐고 했을 땐 속에서 울컥했다. 아니요. 애인이 아이돌인데요.

물론 실천은 못 했다. 실없는 생각에 잠겨 있다가 깨알 같은 기사 글자를 읽어 내려간다.

- 작년부터 올 한해, 연예계에서 가장 바쁜 사람이 아니었을까 싶다.

- 그랬었다. 연초에는 콘서트로 바빴고 잡힌 촬영은 계속 강행군이었으니까. 드라마가 끝나면 영화가 있고 영화가 끝나면 뮤지컬이 있었다. 그리고 아직 개봉하지는 않았지만, 드라마가 끝나고 영화를 찍기 전 5월쯤에는 독립영화도 잠깐 찍었다. 일주일 정도. ‘네 곁에 머물 시간’이라는 제목인데, 내년 영화제에 출품되면서 처음 선보일 예정이라 아직 개봉하지는 않았다.

- 올해 굉장히 다채로운 작품 활동을 했고 모두 호평을 받았다. 특히 뮤지컬에서. 드라마 ‘푸른 도시’와 영화 ‘서른두 번째 밤’은 현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뮤지컬 ‘프랑스, 1794’는 전혀 다른 배경과 인물상을 그려냈다. 특히 ‘서른두 번째 밤’과 시기도 겹쳤었는데 힘들지 않았나.

- 힘들었고 사실 욕심이었던 게 맞다. 하지만 ‘프랑스, 1794’는 지난 공연에 참여한 경험도 있었고 그래서 더더욱 놓치고 싶지 않았다. 작품이야 워낙 좋지만 이번에는 이원석 연출이 합류했기 때문에 더 기대되는 면도 있었고. 각오는 했지만 생각보다 더 바빴고 그래서 더 성장한 면이 없잖아 있다.

- 예를 들어서?

- 어디에 징징거릴 시간도 없었다. ‘푸른 도시’에서 외로움을 느끼는 직장인이었다가 ‘서른두 번째 밤’에서는 시한부 선고를 받은 여자 곁을 지키는 연인이 되었다. 그와 동시에 ‘프랑스, 1794’에서는 혁명을 냉소적으로 바라보는 현실과 유리된 지식인을 연기했다. 여유가 없다는 걸 스스로 알고 있으니 더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 이런 거짓말을. 이 날강도 같은 놈이.”

징징거릴 시간이 없어? 어이가 없고 기가 막히고 코가 막혀서 무슨 말이 안 나온다. 덜컹거리는 버스 안에서 나는 혼자 답답함에 가슴을 치다가 찬 유리에 머리를 쿵쿵 박고는 제대로 앉았다.

흘러내린 앞머리를 쓸어 올리고는 인터뷰를 마저 읽으려는데 다시 생각해도 거참. 징징거릴 시간이 없었다고?

주말에 시간 날 때마다 매달려서 괴롭히고. 자기 힘들다고 머리 하는 것도 같이 가달라고 그러고. 운동하러 갈 때도 끌고 가고. 대본 대사 읽어달라고 했던 건 어디의 누구지?

가끔 연기가 막힌다고 넋 나간 표정으로 대사만 입으로 중얼거리는데 도저히 모른 척할 수가 없었다. 같이 본 자료가 몇 개였던가. 심지어 내가 상대역을 해준 적도 있었다.

나는 ‘푸른 도시’에서 정지운을 자기 라인에서 잘라내려 했던 상사이며 배신한 전 여자친구였다. 또한, 아이디어를 빼가려는 같은 팀의 동료이기도 했고. ‘서른두 번째 밤’에서는 시한부를 선고하는 의사 역을 하면서 멱살 잡혀 흔들려야 했고, 그다음 날에는 거실 소파에 누워 손을 늘어뜨리고는 아픈 연인을 연기해줘야 했다.

좀 더 아픈 사람처럼 숨 쉬라고 할 때는 진짜 짜증났다. 내가 그렇게 메소드 연기가 가능하면 정극 배우를 했겠지!

아, 갑자기 눈물이 날 거 같다. 연기를 하고 제 커리어를 올린 건 정지운인데 왜 내가 이렇게 눈물이 날까.

그 외의 작품에 대한 세세한 해석들은 건너뛰었다. 내 손때도 같이 묻었던 대본을 아예 외우다시피 했으니 작품의 주제의식이니 그런 건 관심이 없다. 무엇보다 그날그날 촬영장에서 있었던 뒷담화를 너무 많이 들어서 아무런 감흥이 없기도 하고.

오른쪽 페이지의 끄트머리. 마지막 질문들이 그나마 눈에 걸린다.

- 이제 뭘 할 생각인가.

- 쉴 거다. 내년 초에는 민석이와 텐이 단독 콘서트를 열 거라 블래스트로서 설 무대는 없다. 누가 게스트로 부른다면 잠깐 얼굴만 비치고 쉴 생각이다. 휴식기가 필요하다는 생각은 해왔다.

- 공백기가 아예 없었나.

- 제일 한가했던 때가……. 재계약 시기였다. 블래스트 활동을 5년 하고 지금 소속사와 재계약 조건을 조정하느라 뮤지컬 하나만 했던 때. 그때 딱 한 번 한가하고 그 외에는 계속 바빴다.

- 그렇다면 첫 공백기가 되는 건데 불안하지는 않겠나.

- 요즘에는 휴식이 필요하다는 생각뿐이다. 돌이켜 생각해보니 그렇다. 20살에 군대를 다녀왔고 제대하고는 대학로를 기웃거리다가 바로 데뷔했다. 아이돌 활동 5년을 꽉 채워 활동했고 그 이후로도 계속 연기했으니 이제 쉬어도 되지 않을까. 물론 쉬는 것과 별개로 CF는 찍을 거다. 작품을 천천히 생각하고 싶다. 다행히 올해 찍어둔 영화가 내년에 개봉할 테니 공백기가 느껴지진 않을 거 같다.

- 뜬금없이 든 생각인데 연말 데이트하고 싶은 남자 연예인 같은 설문에서 항상 세 손가락 안에 들지 않았나? 공백기 동안 정지운 씨 이름이 순위권에 없으면 어색할 것 같다.

- 그래 봤자 5위 안일 테니 보일 거다.

웃기는 자신감은 여전하다. 늘 봐서 익숙한 얼굴인데도 화장으로 그려놓고 조명을 쬐어 찍은 사진은 약간 낯설게 느껴진다. 인터뷰의 마지막 페이지를 잡고 넘기려다가 사진 속의 낯선 얼굴과 눈이 마주쳤다. 렌즈를 꼈나. 탁한 눈빛을 오래도록 보다가 잡지를 덮었다.

버스에서 흘러나오는 안내 방송에 팔을 뻗어 벨을 눌렀다. 버스에서 내리자 익숙한 지형이 눈에 들어온다. 남다르게 둘레가 굵고 키가 큰 가로수나 건물들은 그대로라지만 몇 개의 간판들이 바뀐 게 보인다.

버스에서 내려 인도를 지나 넓게 펼쳐진 공원으로 들어왔다. 많이 찾아볼 것도 없이 저 앞 공연 안내데스크 옆에 긴 검은색 패딩을 입고 서 있는 남자가 보인다. 양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고는 나무에 기대 주변을 둘러보는 모습에 사람들 몇의 시선이 이끌렸다가 멀어진다. 패딩에 딸린 모자를 눌러쓰고 검은 마스크까지 쓴 얼굴은 눈과 염색한 머리카락의 앞머리만 보이는 정도다. 조금 전 사진으로 본 낯선 얼굴보다는 이쪽이 내겐 익숙했다.

가까이 다가가자 나를 보고도 손을 주머니에서 빼지는 않는다. 대신 내 손에 들린 잡지를 보고는 턱으로 가리켰다.

“그건 왜 샀어.”

“궁금해서. 인터뷰 했다며.”

“어때. 잘 나왔어?”

“응. 확인 안 했나 보네.”

“귀찮아서. 애들이 별말 없길래 잘했겠지 하고 안 봤어.”

요즘의 정지운은 지금 손에 쥔 잡지 안의 인터뷰 대답을 착실히 실천하고 있었다. 정말 늘어져 있기만 한다. 그나마 연말 시상식은 나갈 생각인 거 같은데 그 외에는 들어오는 대본도 물리고 그냥 시간을 보낸다.

물론 그렇게나 바빴으면 사람이 휴식이라는 게 필요하기도 하지. 하지만 생긴 것과 다르게, 정말 생긴 것과는 전혀 다르게 연예인으로서 나름 성실한 삶을 살아온 정지운의 이런 모습은 처음 보는 것이라 어색하기만 할 따름이다.

나야 좋다. 폭풍 같던 뮤지컬까지 끝내고서 우리는 매일 따뜻한 방바닥에 함께 늘어져 있었다. 집에서 뒹굴대다가 밥을 먹고. 인터넷 서점에서 배송된 책을 몇 권 뜯어 읽다가 나한테 같이 읽자고 자꾸 말을 걸고. 그러다가 무릎 위에 올라타서 짓누르고 괴롭히고. 키스하고. 섹스하고. 늘어져 자는 데이트뿐이었다. 밖에서 하는 데이트는 거의 한 달만인 것 같다.

한파로 추워진 거리에 사람들은 다들 패딩을 껴입어 한 무리의 펭귄 떼 같았다. 펭귄 떼와 멀어져 대학로를 가로질러 걸었다. 예매한 연극은 붐비는 대학로 한가운데가 아니라 약간 언덕을 올라가면 나오는 어느 건물의 지하 소극장에서 한다고 했다. 시간에 맞춰 도착하자 스무 명 정도가 줄을 서 있었다. 그 맨 끄트머리에 섰다가 곧 내려갔다.

가뜩이나 어두운데 지하로 내려가는 나무 계단에 검은 칠을 해둬서 제대로 보이는 게 없다. 벗겨진 나무 칠을 보고 대충 더듬어 내려가다가 발을 헛디딜 뻔했는데 내 뒤를 따라 내려오던 형이 팔을 걸어 붙잡았다. 그렇게 내려가다가 괜히 한 소리 들었다.

“너 넘어지면 다 넘어져.”

“나도 알아.”

속삭이듯 귓가에 하는 말이 내 걱정이 아니라 남 걱정이다. 고맙기도 해라.

지하로 내려와 중간에 앉기보다는 차라리 맨 뒤에 나란히 앉았다. 사람들이 좁은 객석에 앉아 약간 높은 단 위의 무대를 본다. 지하 특유의 습하면서도 퀴퀴한 냄새가 옅게 풍겼다. 반지하 살 때 생각나네. 추억이긴 하지만 거지 같은 추억이라 생각하고 싶지도 않군.

시작할 시간이 가까워지자 눈부시던 조명이 몇 개 꺼진다. 둘 다 패딩을 부스럭거리며 벗어 무릎 위에 올려뒀다. 형은 그러면서도 마스크는 안 벗는다. 극이 시작되려 하자 허벅지 옆에 둔 손에 뭔가 닿았다. 뭔지 모르고 피하려다가 옆에서 잡아오는 손인 걸 알고 내버려 뒀다. 옷에 가려진 데다 의자는 등받이가 있어 안 보일 거다.

따뜻해서 좋았다. 여긴 난방도 안 트나. 정작 손은 잡아놓고 아무 내색도 없이 앞만 보고 있다가 몸을 기울여 내게 물었다.

“너 연극 본 적 있어?”

“웬만한 건. 학교 앞이다 보니까 누가 가끔 표를 얻어오더라고.”

“어땠어.”

“솔직히 말하면 유명한 거 몇 개만 봤고 다 비슷했어. 바람피우거나 동거하는 러브 코미디 같은 거.”

“사람들 많이 보는 건 거의 다 그렇지.”

“이런 건 몇 개 못 봤어. 주제가 자살이더라.”

“그럼 여긴 처음이겠네.”

“응.”

잠깐 말이 없다가, 정말 극이 시작하려는지 한 남자가 무대 위로 올라와 주의 사항을 이야기한다. 우렁찬 목소리가 울려 퍼지는 사이에서 정지운은 묵묵히 제 할 말만 했다.

“나 대학로 있을 때 여기 있었어.”

“여기서 연극 했어?”

멍하게 무대와 정지운의 얼굴을 번갈아 봤다. 갑자기 웬 추억여행일까. 마스크를 써 입 모양이 어떤지는 잘 모르겠지만 무대를 향한 눈빛이 딱히 회한에 젖었거나 먹먹한 건 아니었다. 그냥 무덤덤하게 무대를 따라 눈동자가 움직인다. 그리고 남자가 들어가고 조용해지자 속삭이듯 말했다.

“무대 선 적은 없고.”

“그럼.”

“비품실 청소만 존나 시키길래 문 잠가놓고 열쇠 버리러 나갔다가 지금 소속사 캐스팅 담당자 마주친 거야.”

“어…….”

아, 전에 들은 적 있는 이야기다. 어쩌다 아이돌을 하게 됐냐고 물었더니 그냥 누가 길 가다 시켜주던데? 라던 대답. 대충 대학로 연극판에 있었다고 하니까 자잘한 역이라도 맡은 줄 알았었는데 말이다. 그 와중에 진짜 궁금해져서 불이 꺼지기 전에 목소리를 낮춰 마지막으로 물었다.

“그래서 그 열쇠는?”

“버렸지.”

“아…….”

“다들 그러고 튀던 바닥이야. 연습 때 입금 안 되면 막 올리는 당일에도 튀어.”

그렇구나……. 딱히 예상과 빗나가는 대답도 아니라서 그냥 말았다. 다들 그랬다고 하니 부디 그게 사실이기만을 바라자. 불이 모조리 꺼지고, 새까만 암흑 사이로 한 줄기의 빛이 무대 정중앙에 내리꽂힌다.

연극은 자살로 죽은 사람들이 사후세계에서 심판을 받을 때 자신이 왜 자살을 할 수밖에 없었는지 각자의 변명을 하는 것으로 진행되었다. 그렇다 보니 다들 시커먼 옷을 두르고 있는 게 대부분이었고 한때 유행했던 스모키 화장보다도 시커멓게 눈을 칠한 배우들이 나왔다.

쩌렁쩌렁한 목소리와 눈부신 조명에 집중도가 떨어져 가던 찰나 겨우 휴식시간이 되었다. 잠깐 잡고 있던 손을 빼고는 기지개를 켰다.

휴식시간이 끝나고 2막이 시작될 때 검은 망토를 둘러쓰고 얼굴에 흰 칠을 한 배우가 우리 뒤에서 성큼성큼 등장했을 때는 얼마나 놀랐던지. 벗어둔 패딩 아래로 잡고 있던 손을 황급히 잡아 뺐다. 어차피 못 봤겠지만 괜히 찔려서 그랬다. 지레 겁먹은 내 태도에 형은 어깨를 툭 부딪치며 속삭였다.

“그러면 더 이상해 보여.”

“놀랐단 말이야. 봤으면?”

“그럴 땐 자연스럽게 손 꺾어서 빼.”

“꺾는 게 자연스럽다고 생각해?”

자잘하게 투닥거리는 사이 연극이 끝났다. 배우들이 나와 인사하고 포토 타임이 되자 형이 천천히 일어나서는 내게 눈짓했다. 마스크 안에서 울리는 목소리는 잘 안 들린다.

“나가자고?”

“어. 사진 찍을 거야?”

“아니. 허리 아파. 나가자.”

뭔가 감상에 젖었을 줄 알았는데 그러지도 않는다. 우리는 좁은 계단을 올라 다시 지상으로 나왔다. 해가 떨어질수록 추위는 더해갔고 사람들은 이제 펭귄 같은 모양새로 걸어 다니는 정도가 아니라 한데 무리를 이루어 걷고 있다. 대학로 다른 구석으로 향하다가 사람들이 들고 다니는 테이크아웃 컵을 보고 물었다.

“커피 사 올까?”

“너 먹을 거면.”

“아메리카노?”

“초코 라떼.”

혹시 해서 물었는데 역시 일을 안 하니 먹고 싶은 걸 마실 모양이다. 카페에 들어가 음료 두 잔을 사 왔다. 둘이 있으면 뭘 사 오거나 목소리를 내는 건 늘 내 몫이다. 행여나 목소리를 알아듣는 사람이 있을까 싶어서.

내 몫은 따뜻한 아메리카노. 형은 차가운 초코 라떼. 장난치려고 그런 게 아니라 요즘 형은 한겨울에도 차가운 음료만 마신다. 역시나 얼음이 든 투명한 테이크아웃 컵을 보고도 별말을 안 했다. 걸어가는 동안 아직은 뜨거운 아메리카노를 양손으로 들고만 있는데 형이 음료수를 내려만 보고 있길래 물었다.

“왜 안 먹어.”

“마스크 때문에.”

“아…….”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없고. 과연 어떻게 하려나 보고 있으려니 마스크 아래쪽을 걷어 올려 코끝에 걸쳐두고는 음료를 마신다. 그 꼴이 우스워서 조금 웃었다가 한 대 맞았다. 그렇게나 먹고 싶은데 얼굴은 보이기 싫고. 참 고생이다.

큰 건물들 뒤편 골목의 끝에는 자리 잡은 지 십몇 년은 된 독립 서점이 하나 있었다. 십몇 년이 되었는지 어떻게 알았냐면 흰 바탕의 간판 구석에 작게 개업 연도가 적혀 있어서 안 거다. 정작 대학 다닐 때는 지나치기만 했던 서점을 정지운 때문에 들어가 볼 줄이야.

또 지하로 내려간 서점은 밝은 분위기에 갤러리처럼 벽에 그림도 몇 장 걸려 있었고 코너와 구석마다 낮은 의자를 한두 개씩 놓아두었다. 낮은 책장과 높은 책장을 미로같이 돌아다니다가 소설책을 하나 골랐다.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지은 ‘설국’이라는 소설이다.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

우연히 들은 이 문장이 좋아 기억해뒀었다. 다른 내용은 모르지만 언젠가는 읽겠지.

왼손에 책을 들고 제일 큰 서가 뒤로 돌아 들어갔다. 정지운은 팔에 책 몇 권을 안고는 눈높이에 꽂힌 책의 책등을 노려보고 있다. 얇은 책은 책등의 제목 폰트도 작아서 나도 얼굴을 들이밀어야만 보였다. 팔에 안긴 책 중 맨 위에 있는 책은 에우리피데스의 ‘엘렉트라’다. 요즘 집에 드라마 대본에 영화 대본까지 다 꺼내놓더니 이제는 희곡인가. 아는 척하면 더 귀찮아질 걸 알면서도 말이 나오고야 만다.

“나 엘렉트라 본 적 있어.”

“이걸 어디서 봤어.”

“대학 때 친구가 연극 동아리에서 희곡 각색한 거 올렸었거든.”

“어떻게 각색했는데.”

“엘렉트라와 남동생이 결국 굴복하는 이야기로.”

“흐음.”

“아버지를 아직 죽이지 않고 감금해두고 있었거든. 딸과 아들이 반항할 때마다 아버지의 채찍질한 등에 소금을 뿌려서 비명을 듣게 했어. 괴로워하다가 결국 포기하더라고.”

“특이하네. 잘됐다. 나중에 더 알려줘.”

“그래도 혼자 공부해.”

“싫어. 쉬는 김에 너 끼고 고민할 거야.”

“고민?”

“어. 앞으로 어떻게 할지.”

“형 고민도 해? 철들었구나.”

“철은 원래 들었었지. 나처럼 어른스러운 사람이 어딨어.”

자, 보자. 지금 서점 계산대에 주인아저씨. 그리고 우리. 저기 그림 앞에 여자 두 명. 그리고 볼펜을 보고 있는 여자 또 한 명. 총 여섯 명이니 여기서 정지운 씨보다 철 든 사람은 다섯 명이 되겠군.

내 속도 모른 채 생글생글한 미소가 밝다. 그런 표정을 물끄러미 보다가 갑자기 궁금해졌다.

“연극하고 싶어?”

“하려다 때려치워서 그런지 가끔 생각나. 안 해서 후회된다, 그런 정도는 아니고. 워낙 어려운 바닥이라 안 맞았을 거야.”

“힘들다고 듣기는 했었어.”

“최준혁이라고 아까 우리 본 연극에서 저승사자 역할 했던 놈 있거든. 작년에 연극 여섯 개 했는데 소극장만 돌았더니 입금 들어온 극은 두 개라고 하더라.”

“그거 고소감이네.”

“다 그래. 극장주가 제일 먼저 입금받고, 그다음은 투자자, 그다음이 배우라서. 예매율이 낮으면 돈이 없으니 다 그렇게 돼.”

“그러니까 고소해야 되는 거 아니야? 그런 분위기가 아니라서 그런가.”

“작년에 몇 개 연달아 말아먹어서 배우들이 고소한 제작자가 있긴 했어. 자살했다더라. 그렇게 끝.”

“…….”

일순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머뭇거린 내 등을 한 번 토닥거리고, 형은 다시 책등을 훑었다.

책을 한 아름 안고 서점에서 나와 음식점으로 향했다. 옛 생각이 나서 자주 먹던 칼국숫집에 갔는데 안 온 사이 없어졌는지 삼겹살집이 대신 자리 잡고 있었다.

발길을 돌려 뭘 먹을지 고민하며 계속 걷던 찰나 새로 연 듯한 빵집이 보였다. 1층은 빵이며 케이크를 팔고 2층은 유리 너머로 사람이 거의 없어 보이길래 들어갔다. 음료에 케이크, 샌드위치, 그리고 그냥 뜯어먹을 빵까지 한 아름 쟁반에 담아 올라갔더니 정말 사람이 없다. 구석에 앉아 대화 중인 한 테이블만 제외하면.

우리는 창가에서 가장 구석으로 가 앉았다. 내가 안쪽에 앉고 형은 바깥쪽에 앉아 벽과 나를 마주 봤다. 사람들 눈에 띄지 않으려고 습관처럼 굳어진 자리 배치였다.

빵을 뜯어 먹고 아까 사 온 책을 서로 보다가 창밖을 내다봤다. 밤거리라 사람이 별로 없다. 개중에 큰 책을 들고 다니는 대학생들이 보이자 나는 습관 같은 말을 내뱉었다. 요즘 한탄처럼 내뱉는 말이었다.

“일 때려치우고 대학원 가고 싶다.”

“정확하게 말해야지.”

“로또 돼서 일 때려치우고 마음 편히 대학원 생활을 하며 인생을 만끽하고 싶다. 나 왜 취업하고 싶어 했던 걸까. 학생으로 돌아갈래.”

매주 얄팍한 로또 종이를 들고 얄팍한 기대를 하는 나를 알기에 정지운은 잠깐 웃었다. 그리고는 보던 책을 잠깐 내려놓고는 하는 말이.

“여기 있잖아. 로또 같은 남친.”

“…….”

순간 할 말을 잃어서 차라리 책을 봤다.

읽던 책을 한 줄 더 읽기도 전에 테이블 아래로 슬며시 발이 건드려진다. 발끝을 툭툭 건드리는 태도에 고집스럽게 책에다 시선을 박고 있다가 고개를 들었다. 빨대를 입에 물고는 뻔뻔스럽게도 빤히 보고 있다. 마스크를 벗어 시원하게 드러난 얼굴이 익숙했다. 아까 잡지에서 본 얼굴이 아니라 화장기 하나 없는 얼굴로.

정지운을 많은 사람이 안다지만 민낯을 본 사람은 몇이나 될까. 쓸데없는 걸 궁금해하다가 도톰한 입술이 열리기 전에 먼저 대답해줬다.

“로또 같긴 하다.”

“그치?”

“응. 예상치 못했다든가. 잘못하면 재앙이 된다든가……. 또…… 뭐가 있을까.”

“그러게. 또 뭐가 있을까. 당첨금?”

“당첨금?”

당첨금……? 전혀 생각도 못 한 말이라 고개를 갸웃하는데 책에서 내려온 손가락이 유려하게 움직여 휴대폰을 들어 검색한다.

당첨금? 로또 당첨금? 검색이 금방 끝났는지 휴대폰을 보여주는데 거기에 떠 있는 건 지난주의 로또 번호다. 내가 단 하나도 못 맞췄던 그 번호. 일곱 개의 번호가 색색깔로 나란히 떠 있는데 그 아래 금액이 눈에 들어왔다. 1등 당첨자 상금은 약 28억이었다고. 옛날의 명성보다야 작지만 직접 벌다가는 뼈가 삭을 금액이다.

영문 모를 표정을 하고는 다시 고개를 제자리로 돌리는데 미소를 지으며 내 쪽으로 몸을 기울인다. 테이블에 팔꿈치를 기대 가까이 오는 모양새가 무슨 작당 모의라도 하는 줄 알았다. 그냥 보고만 있으려니 은근한 목소리로 하는 말이.

“재현아. 형 재산이 28억보다 많을까 적을까?”

“적잖아.”

“적다고?”

“……안 적어?”

“글쎄, 모르겠네. 자꾸 금액이 변해서. 확인 한번 해볼까?”

“헐, 진짜?”

몸을 바로 세워 등받이에 기대는 모습을 보며 숨길 수 없는 감탄사가 입 밖으로 나오고야 말았다. 내 반응에 아예 신이 났는지 다리까지 꼬고 앉아서는 거만해진 태도지만. 물론 그 꼴은 별로 보고 싶지 않지만. 와, 진짜 놀란 걸 감출 수가 없다. 진짜? 정말?

“좋겠다……. 진짜 좋겠다.”

“야, 좋겠다가 아니지. 형 돈 많다니까?”

“나도 연예인 할까?”

“당첨금이나 수령해 가. 그리고 무슨 연예인. 누가 너 그런 거 시켜준대?”

“응. 현지가 자기 아는 사람 인터넷 쇼핑몰 여는데, 모델 필요하댔어.”

“현지? 내 옷 봐주는 그 현지?”

“어, 그 현지 씨. 모델 아직 비싼 사람 못 쓴다네. 사진에서 내 얼굴만 자르면 어떻게 되지 않을까. 포샵이라든가. 방법 많잖아.”

“윤재현. 너희 회사 겸업 금지라며.”

“현금으로 챙겨줄 수 있대. 설마 나 회사에 이를 거야?”

나름 애교 있게 웃어 보였다고 자부할 수 있었다. 차장님이 가끔 저녁 먹고 가라고 할 때 일이 있다고 도망치며 보였던 그 웃음. 정지운이 알려준 대로 입꼬리를 올리고 눈을 가늘게 떠 웃어 보였더니 하는 말이.

“어. 내가 본사에 이를 거야.”

“와, 너무한다. 혼자 돈 벌겠다 이거야?”

“응. 얌전히 회사 다녀. 아니면 쉬라고. 하고 싶었는데 못 했던 거 없어? 너 그런 거 많잖아. 뭐 하라고 해도 이래서 안 된다, 저래서 안 된다.”

“형이랑 연애하잖아. 이것만으로도 벅차다. 내 인생 최대의 모험 중이야.”

“진짜?”

웃기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사실이라 쓸데없이 의기양양해지는 태도에도 그렇다고 했다. 뭐랄까. 형과 연애하는 건 내가 인생의 역경을 마주칠 때마다 큰 힘이 되어주는 면이 있었어. 이런 일도 하고 있는데 세상에 더 놀라운 도전이 뭐가 있겠냐 하는 의미로.

그렇게 사귄 지도 꽤 되었고 이제는 서로 잘 섞인 면이 있다고 생각한다. 싸움도 예전보다는 덜 하는 것 같고. 물론 방심하다가 가끔 지뢰같이 터지는 일들이 있기야 하지만.

“요즘에는 빨리 나이 먹고 싶다는 생각도 해. 그냥 빨리 늙어서 은퇴할 나이 되었으면 좋겠어.”

“그냥 그만둬. 뭘 늙을 때까지 기다리냐?”

“정년퇴직해야 연금이 나올 거 아냐.”

“야, 내가 로또보다 돈 많다니까?”

“그래도 비정규직인 거, 정규직이 최고 아니겠어?”

마지막 말은 자꾸 용돈 준다는 말이 민망해서 우스갯소리로 한 거였다. 그랬더니 내 모습을 은근한 눈길로 지켜보는가 싶더니 하는 말이.

“하긴. 재현이가 돈 많이 벌면 나 고생 안 하게 스폰 해줄 거라고 했지.”

“악, 씨발! 그 말 하지 말랬지!”

“완전 설렌다. 형이 매일 밤 그거 기다리고 있는 거 알아?”

발작처럼 발을 펴다가 발끝에 형의 정강이가 콱 채였다. 그래도 운동화라 안 아팠는지 약간 움찔하고는 낄낄거리며 웃기만 한다. 급하게 주변을 둘러봤는데 끝날 시간이 되어가는지라 사람이 없었다. 누가 없어서, 그리고 이런 얘길 안 들어서 천만다행이다.

“한 번 실수한 거 가지고 진짜.”

“왜. 완전 감동이었는데. 기대된다. 내 몸값 알려줄까?”

“안 사. 안 산다고. 천 원이어도 안 사.”

“내가 맞춰줄게.”

“안 산다고!”

홧홧하게 열이 오른 얼굴을 식히며 눈앞의 음료를 벌컥벌컥 마셨다. 내가 나가 죽어야지. 술을 끊던가 내가 죽어야 해.

회식 때 술 잘못 먹었다가 정지운에게 전화해서는 저딴 소리를 했던 거였다. 다음 날 아침에 문자로 ‘ㅋㅋㅋ’가 와 있길래 대체 뭔가 했더니 내가 저런 말을 했다고. 개소리하지 말라고 강력하게 부정하다가 녹음된 내 목소리가 들리는 순간 나는 모든 것을 잃고야 말았다. 나의 자존감. 그리고 인권적인 것들까지 모조리.

눈물 날 거 같아서 길거리에 쭈그려 앉았는데, ‘왜? 또 나랑 인연 끊고 튀려고?’라고 일으키면서 굳이 한 번 더 놀렸었고……. 데이트고 뭐고 집에 도망가려다가 붙잡혀서는 다짐을 들었었건만. 왜 또 말해, 왜. 이제 안 놀린다며!

“알았어, 재현아. 안 놀려. 다른 이야기 하자.”

“…….”

“그러니까 로또 당첨금 안 쓸래?”

“너나 쓰세요.”

“나 쓸 거야. 너도 같이 쓰자고.”

“뭐 하게.”

“연기 공부도 하고. 쉬고. 너도 쉬어.”

“됐어.”

“대학원 갈래?”

“형부터 가면.”

“오, 그럴까?”

그럴까, 라니. 대충 한 대답이었건만 돌아오는 웃기는 소리에 입술만 내밀었다 마는데 갑자기 창밖의 어딘가를 손가락질한다.

“쟤들 대학생 커플 같다. 우리도 캠퍼스 커플 하자.”

“뭔 소리야.”

“너 대학원 가고 나 연기예술학과 들어가면 되겠다.”

“연애하러 대학 가시게요?”

“재밌겠네. 창식이 시켜서 알아봐야지.”

“아니, 저기요. 저 안 간다구요.”

내 말에도 신났는지 누군가에게 휴대폰으로 문자를 보내느라 건성으로 대답하고는 만다. 동그란 정수리가 살짝 끄덕끄덕하는 것을 보다가 나는 될 대로 되라 싶었다. 어차피 나갈 시간인 거. 자리나 정리하자.

쟁반 위에 컵과 접시를 차곡차곡 쌓아 자리에서 일어나는 동안에도 열심히 문자만 보내고 있다. 그래 봤자 어쩌겠냐 싶어서 별다른 말을 안 했다. 지금 12월인데 입학을 어떻게 해. 저러다 말겠지.

1층으로 내려가 먼저 문을 열고 나가려는데 갑자기 뒤에서 잡아당기며 내게 물었다.

“추운데 커피 사 갈래?”

“밤이라 안 먹을래. 잠 안 와.”

“잠을 왜 자?”

“밤이니까 자야지?”

“우리 집 가야지.”

“어……. 꼭?”

“너희 집 가자고? 그러던가.”

그리고는 우물쭈물 말을 못 하는 나를 두고는 계산대 위에 카드를 척 올려두며 주문한다. 그 시원스레 뻗은 뒷모습을 보며 나는 하려던 말을 치열하게 유사어들로 바꿔보려 했다.

왜 데이트의 마지막 코스가 꼭 상대방의 집이 되어야 하는 건지. 그냥 여기서 헤어지는 것도 하나의 방법은 아닐지. 그리고 나 그 집 지나치게 자주 가는 거 같다. 내 방 안 들어갈 때마다 보일러 동파될까 봐 무섭다.

아이 씨 몰라. 무슨 말을 넣어도 남들 듣기에는 이상하게 들리잖아. 그사이 나온 음료 중 하나가 내 손에 들렸고 우리는 밖으로 나왔다. 사람들 사이에 섞여 소란함이 생기자 그제야 나는 말을 꺼냈다.

“나 오늘 잘 건데.”

“내일 어디 가?”

“……어, 엄마….”

“삼 초 지나서 나왔어. 땡.”

“나 피곤해.”

“그럼 자. 알아서 할게.”

“아니. 그게 더 무서워.”

자는 사이에 뭘 하려고. 택시를 잡으러 길가에 서서도 티격태격했다. 차가 쌩쌩 스쳐 지나갈 때마다 찬바람이 거세게 부는데도 우리 할 말이 더 바쁘다.

“우리 집 보일러 동파될까 봐 무서워.”

“그러니까 그냥 들어와 살라니까. 어차피 방도 많은 거.”

“매일 괴롭히게?”

“조금만 괴롭힐게, 조금만.”

“끝내 안 괴롭힌다는 말은 안 하지?”

“좀 믿어보라니까. 저기 택시.”

“아, 택시.”

손짓을 본 빈 차가 차선을 바꿔 바로 앞에 서 준다. 택시를 같이 타고서 목적지를 말한 형은 내게 말 같지도 않은 설득을 시작한다. 나는 지나치는 바깥 야경을 보며 한 귀로 흘린다.

솔직히 말하면 중간중간 혹하기도 했다. 집이 좋기는 좋지. 넓고, 쾌적하고. 따뜻해서 반팔 티셔츠 입고 뒹굴거려도 손발 안 시리고. 방에 옷장도 짜 넣어져 있던데……. 집 안에서 엘리베이터 미리 불러둘 수도 있었지. 골똘히 하는 생각은 모르고 반응이 없으니 이번엔 엉뚱한 소리를 한다.

“집 맘에 안 들면 이사 갈까? 이번에 새로 지은 데는 조식도 나온다더라.”

“그거 그냥 식당 아니야? 아니면 내부 상가?”

“호텔같이 조식이래.”

“와, 세상 좋다.”

맑은 겨울 공기가 야경을 한층 깨끗하게 보이게 한다. 길마다, 거리 가까이마다 이르게 장식된 크리스마스 장식들까지. 주광색의 불빛이 아스라이 멀어져 가는 사이 형이 저 멀리 우뚝 솟은 주상복합 하나를 손가락질했다. 저 집이라면서.

저게 몇 층일까. 거기에 홀려 있는데 옆에서 허벅지를 손아귀로 꽉 쥔다. 택시 아저씨를 한 번 힐끔 보고, 전혀 관심 없는 태도임을 확인하고는 대답했다.

“사람이 거리가 필요한 법이야.”

“무슨 거리.”

“매번 나 귀찮게 안 할 안전거리.”

“적당히 할게, 적당히.”

“올해 그 믿음은 사라졌어. 뭐랄까, 형. 점점 더 날 귀찮게 하고 있다는 생각 안 들어?”

“내가? 아니야. 올해만 좀 그랬지.”

그리고는 손가락을 들어 얼마나 조금인지 보여주는 그 표정을 보다가 웃었다. 티브이에서나 보던 가식적인 표정이다. 됐다고 대답하고는 허벅지 위의 손을 치웠다. 택시만 아니었으면 한번 잡아주기라도 했을 텐데. 쓸데없이 든 생각에 나도 이제 글렀구나 싶어 그냥 웃었다.

택시를 내려 집에 들어가고, 샤워를 마치고 나와 분위기를 잡는데도 그 소리였다. 침대에 앉아 반바지의 고무줄을 만지작거리는데 곁에 앉아서는 자기 집을 어필하길래 슬쩍 어깨에 기대어봤다. 딱딱하기는 해도 한창 바쁠 때에 비하면 말랑한 거 같기도 하고. 일단 따뜻해서 기분은 좋다.

말하던 목소리가 멈추더니 고개를 틀어 입술을 맞춰왔다. 혀가 섞이는 입안도 따뜻하다. 까닭 없이 기분이 좋아져 키스하던 와중에 고개를 흔들었다. 코끝이 살살 부딪히다가 이내 떨어졌다. 졸음기가 있을 게 분명할 내 눈을 잠잠히 본다. 방 안이 제법 어두운데도 연한 눈동자 색은 또렷이 보인다. 거기에 비친 내 실루엣도. 침대 위로 다리를 꾸물꾸물 올리는데 묻는다.

“많이 졸려?”

“졸리면 안 할 거야?”

“한 번.”

“그 한 번. 한 번 넣고 다 한다는 뜻인 거 알아.”

“흐으음. 그럼 살살 할게.”

“얼마나.”

“막 안 쳐올리기. 약속.”

“으음…….”

“형 못 믿어?”

“으응…….”

“응이라고? 대답한 거야?”

“어어…….”

다른 일도 아니고 이 종류의 일에서는 믿음이 아직 부족하지. 못마땅한 표정은 그래도 내가 순순히 침대에 같이 눕자 쉽사리 수그러든다.

헐거운 회색 트레이닝복 허리로 손이 쑥 들어와 바지와 속옷을 한 번에 벗겨낸다. 순식간에 휑해진 다리 사이로 허리가 들어와 몸을 밀어 올렸다. 따뜻한 체온이 허벅지 안에 가득 찬다. 티셔츠는 벗겨져 바로 옆에 밀어놓았다. 가슴 부근부터 따끈하게 데워오는 손바닥이 살결을 천천히 아래로 쓸고 내려가다가 허리를 틀어쥐어 들어 올린다. 몸이 약간 딸려 내려갔다. 제 옷을 벗어 뒤로 넘긴 정지운이 무슨 말을 하려기에 문득 생각난 게 있어 손을 들었다.

“말도 살살.”

“말?”

“말로 괴롭히지 마.”

“너 그거 싫어하는 게 제일 귀여운데.”

“안 돼. 물러.”

“다 벗어놓고 어딜 빼세요, 윤재현 씨.”

그리고는 반쯤 일어선 제 성기를 한 손으로 천천히 훑어 올린다. 항상 봐오던 장면인데도 볼 때마다 외설적이어서 어디든 눈길을 피하고 싶어지는 모습이다.

넓은 어깨 아래로 섬세하게 짜인 근육들이 약간씩 움직이는 게 보인다. 모여든 근육이 복근을 은근하게 그리다가 골반 부근에서 갈라져 넓어지는데 흰 피부에 어울리지 않게 검붉은 성기가 힘을 받아가는 것이다. 손에 쥐고 몇 번 흔드는 것만으로도 금세 크기를 키워 움찔거린다. 입이 말라가는 기분이 침을 한 번 삼켰다. 평일에는 못 했으니 우리 기준으로는 오랜만이네.

잠깐 몸을 일으켜 젤과 콘돔을 들고 와서는 다시 다리 사이에 자리 잡는다. 말로 괴롭히지 말랬더니 무슨 할 말이 없는지 묵묵히 할 일만 했다. 정지운이 몸을 움직일 때마다 이불 사각거리는 소리만 잔잔히 깔렸다. 젤 뚜껑을 따고, 손가락에 쭈욱 짜내는 소리도 난잡하게 울렸다.

이내 한 손으로 엉덩이 아래를 살짝 받쳐 올리더니 손가락이 더듬어 들어온다. 손가락이 천천히 밀고 올라와 끝까지 들어와서는 살짝 둥글려 움직인다. 다른 손이 힘을 받기 시작한 내 성기를 주물러 만진다. 쾌감이 일깨워진다. 안쪽 내벽에서 근질거리는 쾌감과 성기에 주어지는 자극이 아랫배에 함께 고여 뭉쳐들면서. 내쉬는 숨에 작게 목 울리는 소리가 섞여들었다.

“어어…… 형.”

“더 살살 해?”

“아니. 음…… 말 좀 해봐.”

“하지 말라며.”

“이상한 거 말고. 조용하니까 더 이상해.”

“참나. 오늘 몸 부드럽다.”

“졸려서 그런가. 흐으…….”

“씌워줘. 들어가게.”

손을 내밀었더니 콘돔이 손에 쥐어졌다. 입에 물고는 양손으로 바닥을 받쳐 잠깐 일어나 앉았다. 골반 부근이 뻐근하도록 다리가 벌려져 있어 불편하지만 모을 기운도 없었다. 손으로 옮겨 들려는데 갑자기 양손을 덥석 잡아 왔다.

왜 그래? 말없이 올려다봤더니 이상하게 눈빛이 열렬하다. 고개가 천천히 숙여지고 왼쪽 뺨에 입술을 눌렀다 뗀다. 그리고 입에 물려 있던 것을 입술에 옮겨 물어 빼앗아 간다. 도톰한 입술 사이에 물려 있는 것을 멍하게 보다가 민망해서 손으로 확 뺏어 포장을 찌익 찢었다.

조용하다고 다가 아니구나. 세게 안 한다고 다가 아니야. 이젠 별걸로 다 쪽팔리게 하네.

한계까지 딱딱해진 성기를 가까이해 윗부분부터 밀착시켜 콘돔을 씌워 내렸다. 우둘투둘한 기둥 아래까지 돌돌 말린 것을 펴서는 뿌리까지 꽉 맞아 조여 들어간다. 어릴 때야 몰랐지. 콘돔을 내 성기가 아니라 다른 놈 성기에 씌워주게 될 줄이야. 잠깐 드는 생각을 지우며 미끌미끌한 손을 침대에 슥슥 문질러 닦는데 몸이 넘어간다. 그리고 뭉툭한 끄트머리가 입구에 문질러졌다. 어디든 더 비비다 들어갈 줄 알았는데. 양다리를 팔에 걸어 한계까지 벌려오자 다급하게 물었다.

“벌써 넣게? 아. 아-…. 읏….”

“응. 또 좁아졌다.”

애초에 들어갈 데가 아니니까 좁지. 이런 말을 하기도 전에 열기가 불쑥 몸을 열고 들어와 입만 뻐끔거렸다. 아플 정도는 아니지만 버겁다. 미끄러움을 빌려 내벽을 밀고 들어오는 성기의 크기가 가늠되질 않는다. 뜨겁고 아릿한 아픔이 일단 커서.

아아-…. 허리가 들썩였다 내려오고 성기가 거의 끝까지 들어왔다 나가기를 반복했다. 제멋대로 움찔거리는 엉덩이가 몇 번 조여들었더니 다리를 놓고는 아예 내 위로 겹쳐 올라왔다. 무게를 실어 묵직하게 꿰뚫자 신음이 나왔다. 턱을 틀어쥐고 깊게 키스해오자 눈앞이 어룽거렸다. 신음이 서로의 입안에서 울려 먹힌다. 입술이 떼어지고 말없이 허리만 깊게 눌러 움직여오는데 더 죽을 것만 같았다. 팔을 벌려 어깨를 쥐고는 속삭였다.

“말해줘……. 앗, 아….”

“무슨 말?”

“으응, 거기 그렇게 돌리지 말고. 으…. 어. 뭐라도.”

“좁긴 한데 말랑해서 좋다.”

그리고는 허리를 꾹 눌러 삽입해 들어온다. 으으……. 살 맞아 들어가는 소리가 착착 울리고 엉덩이가 모여들었다. 아, 죽겠다. 안쪽을 긁어내리는 쾌감이 온몸에 돌아 퍼져간다. 천천히 하니 더 정신을 못 차리겠네. 움찔거리고 내 눈가를 보더니 입술이 쪽 닿았다 떼어졌다.

“엄청 느끼네.”

“안 괴롭히니까. 으으……. 흣….”

“여기 누를까?”

“응, 아니, 아닌데…. 읏….”

아. 또 안에서 찌르르 울려온다. 발가락이 왈칵 곱아들어 다리가 단단하게 오그라들었다. 세게 무는 힘이 느껴졌는지 형도 턱에 단단히 힘이 들어가더니 나를 끌어안았다. 코를 깨물다가 눈알을 핥듯 혀를 움직여온다. 뜨겁고 말캉거리는 게 핥아오자 숨이 가빠왔다. 귀로 미끄러져 간 혀가 귓구멍을 메워 움직였다. 청각적 자극과 절로 움츠러드는 쾌감에 이가 다물린다.

손을 어떻게든 등으로 둘러 끌어안는데 파도 타듯 허리를 한참 움직였다. 푹푹 찔러 들어오는 순간마다 눈 안이 저려온다. 같이 허리를 흔들다 제멋대로 찔린 안쪽이 꼭 다물렸다. 둘 다 신음을 겹치고는 잠깐 몸을 멈췄다. 내려온 입술이 이번에는 가슴 부근을 핥다가 깨문다. 살결을 빠는 소리가 울렸다. 가슴 위쪽에 달라붙어 붉게 익은 자국을 만들다가 이내 빳빳이 선 유두를 한번 꼬집고는 허리를 다시 움직인다. 쾌감이 자꾸 안을 긁어 내려서 눈을 꽉 감았다.

“재현아. 힘들어?”

“으응…. 흣.”

“같이. 살면.”

“어……. 아읏.”

“좁아질 틈이, 없을 텐데. 응?”

“그게, 더, 안 되는……. 아, 아, 형, 나 거기…….”

말할 틈도 없이 등골이 오싹해지도록 쾌감이 내달린다. 이내 서로의 배 사이에 맞물려 눌리던 내 성기가 왈칵 정액을 토했다.

아아……. 사정하다 지쳐 팔다리를 편한 대로 늘어뜨렸다. 꼭대기에 오른 절정이 몸의 중심부를 바싹 조여들게 만들어간다. 뒤를 꿰뚫고 들어온 성기가 윤곽까지 또렷하게 느껴지도록 조여 무는 것이 느껴졌다. 눈앞이 제대로 보이기도 전에 양 팔꿈치가 손에 눌려 침대에 고정됐다. 퍽퍽 밀어 올리자 다시 죽을 것 같아 되는대로 말했다.

“형, 나. 좀. 아으. 아직, 안 돼. 아-….”

가는 중에 억지로 끌어올려진 쾌감이 전신을 울린다. 힘으로 밀어붙여지는 허리도 계속 밀려 올라갔다. 성기에서 대체 뭘 흘리는지도 모를 정도로 시달리다가, 이내 허리를 깊게 눌러 삽입하더니 마구 짓눌러왔다. 꽉 안겨 가쁜 숨을 몰아쉬는 중에도 몸 안의 성기가 자꾸 툭툭 튀어댔다. 사정의 기운을 느끼며 다시 허리가 움찔거렸다.

한참을 그렇게 안겨 있다가 고개를 돌려 형의 연한 머리카락을 들추고 귓가에 입술을 눌렀다 뗐다. 무거워, 라고 속삭이며. 그제야 상체를 일으켜 나를 내려다본다. 성감이 돋워진 얼굴은 아직 한참 남은 듯해서 나는 불안하게 웃었다. 사정하고도 부피감이 가시지 않은 물건도 불길하고……. 아니나 다를까 다시 천천히 허리를 들었다 눌러 내리는 감각에 나는 최대한 불쌍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나 힘들다.”

“안 빼면 한 번이었지 아마.”

“아니요. 흐으…… 형, 움직이니까. 안에 흘러…… 히익.”

“처음보다 더 열렸다. 아으, 꽉 넣을게?”

“아니. 안에서… 벗겨지면, 나…….”

안에서 벗겨지면 어쩌지? 사정액을 잔뜩 가두고 있던 콘돔이 뒤에 꽂힌 채 움직이는 성기에 맞춰 쓸리는 모양이었다. 정액이 새는지 입구에서 줄줄 새는 게 느껴진다. 그 물컹한 감촉보다도 무서운 건 따로 있었다.

안에서 벗겨지면 어쩌지. 그…… 안에 들어가면 나 어떡해. 이렇게 깊게 미는데……. 안절부절못하며 움츠러드는 내 턱 끝을 물고 떨어지더니 허리를 천천히 돌린다. 아으……. 그 와중에 안이 긁힌다고 느끼는 내 몸이 더 미친 거 같다. 딱딱한 어깨를 손에 꽉 쥐고 신음처럼 불렀다.

“형, 나… 안에…….”

“빼면 안 된다며.”

“콘돔은, 빼야지. 아, 읏, 벌써 움직이지 말고…….”

“이거 빼는 건 봐줄 거야?”

“그거 빼고 한 번. 한 번만.”

체온에 색이 짙어진 입술이 자꾸 얼굴에 내려와 간지럽혔다. 장난기 어린 눈동자를 보고도 나는 입으로 계속 중얼거렸다. 제발, 제발요. 빼고 하자. 응? 간절히 쳐다봤더니 아랫입술이 가볍게 물리고 혀끝으로 간질이고는 떨어졌다.

“내가 너 몸 상하는 짓을 하겠어?”

“으음…….”

“뭐야, 그것도 못 믿어?”

우물쭈물하는 내 코끝을 꽉 쥐었다 놓는다. 얼얼함에 잠깐 얼굴을 찌푸렸다 펴는 사이 몸을 일으켜 천천히 허리를 물려준다. 성기가 입구 밖까지 주욱 걸려 나가는 게 느껴졌다. 잠깐 빈 사이 허전해진 아래가 움찔거리고, 형은 성기에 반쯤 벗겨진 채 팽팽하게 당겨져 있던 콘돔을 휙 잡아 뺐다. 다시 자세를 고쳐 쥐더니 성기가 들이닥쳤다. 정액에 푹 젖은 성기가 축축한 안을 사정없이 쑤시자 정신이 없었다. 어디든 붙잡고 울자 어린애를 달래는 듯 대꾸한다.

“응, 알았어. 좋다고?”

“아파, 흐읏… 아니 거기 말고…….”

목에 팔을 두르고 짓누르는 몸에 골반이 꽉 달라붙어 눌러오면 벌려진 허벅지 안쪽이 당겨 아프다. 그럼에도, 그렇게 깊게 결합해오면 내벽 안쪽이 들끓듯 움찔거리는 곳이 있었다. 그 지점을 성기가 무자비하게 벌릴 때마다 고통과 쾌락이 섞였다.

“하으…… 읏, 앗, 아으… 아-!”

열 오른 허리를 따라 흔들다가 뻐근해지고 나서야 움직임을 멈췄다. 멈췄다기보다는 못 따라갔다는 게 맞을 거다. 형은 그런 내 머리카락을 흐트러트리듯 쓰다듬다가 속도를 다시 올렸다. 낮은 신음을 흘리며 거칠게 움직이는 모습에 발끝이 곱아들어갔다. 안쪽의 짓눌린 극점이 정신을 녹게 하고, 다리를 움츠러들게 한다.

난잡하게 파고드는 허리짓에 휩쓸려 소리도 못 내고 있다가 내 안에 사정할 때야 눈을 깜빡였다. 밀착된 몸이 뜨겁다 못해 더웠다. 그렇게 옭아맨 몸이 내 안에 사정액을 내뱉고 있었다. 깊게 열린 곳보다 더 안쪽까지 흘러드는 정액이 묵직하게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꽉 끌어안고는 어깨에 이마를 문지르며 몸부림치다가 늘어진다. 그제야 배 부근이 미끈거리는 게 느껴졌다. 내가 흘린 사정액이겠지. 들이닥치는 입술에 입을 열며 숨을 나누고 있는데 볼을 손가락으로 툭툭 누르며 속삭인다.

“나 아직 안 뺐다.”

“흐으, 죽자 죽어.”

“죽여달라는 거지? 알았어.”

키득거리며 쇄골 아래를 이빨로 긁듯 물며 하는 말에 등골이 서늘할 지경이었다. 이놈의 입. 말 좀 똑바로 할 것이지.

∞ ∞ ∞

“형.”

“…….”

“정지운 씨.”

“왜.”

“누구 왔어.”

“내버려 둬.”

전날 밤 열심히 침대에서 운동을 하고, 샤워하러 들어갔다가 또 하고, 시퍼런 새벽이 되도록 몸을 섞다 잠이 들었던 우리는 해가 중천에 떠 있음에도 침대에 늘어져 있었다.

나가서 물을 마시고는 다시 침대로 기어들어오자 형은 부스스한 얼굴을 손으로 쓸더니 옆에 누운 나를 끌어다 도로 잠을 청했다. 잠꼬대처럼 대화를 하기는 했다. 뭐 먹을까. 몰라. 이 정도의 대화만.

어깨에 기대 나도 설핏 잠이 든 순간이었다. 밖에서 작은 벨 소리가 들린 건.

한 번 들리고 말길래 뜨고 있던 눈을 다시 감으려 했다. 이번에는 머리맡에 있던 형의 휴대폰이 울렸다. 우우웅 하는 자잘한 진동 소리지만 거슬리기에는 차고 넘친다.

형은 불쑥 위로 손을 뻗어 어딘가를 더듬거렸다. 그렇게 휴대폰을 덥석 잡는가 싶더니 있는 힘껏 손을 뻗었다. 시원하게 방문을 향해 던져진 휴대폰이 탕 소리와 함께 바닥에 떨어져 구른다. 벨 소리보다 그 소리가 더 커서 눈이 말똥말똥해졌다. 모로 누워 가까운 곳에 들이밀어진 정지운의 얼굴에 짜증이 짙게 어렸다.

“문 열어야 되는 거 아냐?”

“올 사람 없어.”

“회사는.”

“지가 키 안 갖고 왔으면 갔다 올 것이지 어딜 열어달라고 지랄이야.”

“그래도.”

“그게 규칙이었어. 냅 둬.”

그게 이치상 맞기야 하겠지만 같은 월급쟁이로서 괜히 마음이 더 쓰이는 것이다. 정지운은 제집에 누구 들어오는 게 싫다며 회사에 키를 주기는 주되, 전해줄 대본 등을 현관에 두고 가는 일만 허락해줬다.

사람이 거참, 키 좀 두고 다닐 수도 있고 열어달라고 할 수도 있지. 고작 현관에 두고 가겠다고 주말 아침부터 와 있는데. 한번 마음에 걸리자 또다시 울리는 현관 벨 소리가 신경 쓰였다. 못 누워있겠다.

자리에서 꾸물거리며 일어나서는 침대 아래로 내려섰다. 뻐근한 허리와 종아리까지, 당겨오는 아픔에 잠깐 주춤했다. 말 못 할 곳이 아직도 얼얼하기도 했고.

대충 바지를 껴입고 옷은 어디 던져뒀는지 몰라서 형이 던져둔 큼직한 반팔 티셔츠 하나를 주워다 입었다. 해외에서 사이즈를 잘못 사 왔다며 헐렁하게 잠옷처럼 입는 옷이다. 조용히 문을 열고 나가려 하자 뒤에서 나를 불렀다.

“내버려 두라니까.”

“신경 쓰여. 열어만 주고 올게.”

“쯧, 애들 버릇 나빠지게.”

그래도 말만 그러고는 더 이상 잡지는 않았다. 천천히 거실을 가로질러 걸어가서는 인터폰으로 밖을 내다봤다. 아니나 다를까 창식이다. 손에 대본 몇 개를 들고는 한 번 더 벨을 누를까 말까 고심하는 표정이길래 다가가 문을 열었다. 현관문 틈 사이로 기죽어 있던 표정이 나를 보더니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깜빡이며 말을 더듬었다.

“어, 죄, 죄송합니다. 계시는 줄 모르고.”

“형이 열쇠 잘 가지고 다니래요.”

“네. 지난번에 현지가 잠깐 빌려 갔는데 엇갈려서요. 정말 죄송합니다. 이것만 두고 갈게요.”

그래도 우리가 곧잘 마주치고 나름 정지운 뒷담화도 하며 친해진 사이인데 오늘따라 서먹하게 군다. 호의로 문도 열어줬건만 멋쩍네.

내게 대본집을 건네준 창식이는 손가락이 살짝 닿자 화들짝 놀라며 허리를 꾸벅 숙여 보이고는 가버렸다. 무슨 영문인지 몰라 목을 벅벅 긁다가 추워서 문을 닫았다. 벗고 나온 것도 아닌데 왜 저래.

돌아오는 동안 크게 하품을 하고 기지개를 켰다. 더 자야지. 대본을 거실 테이블에 던져두고는 눈곱이라도 뗄까 싶어 욕실로 들어갔다. 따뜻한 물을 손으로 받아 몇 번 얼굴을 적시고 목을 문지르다가 헐렁한 티의 목 부분이 늘어지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수건으로 물기를 닦고 바르게 서봤다. 어깨선을 잘 맞춰서.

나는 다급한 걸음으로 방에 들어갔다. 형은 베개를 높이 해 기대 누워있다가 나를 봤다. 잠은 다 깬 표정인데 만사가 귀찮은 모양이었다. 나는 침대에 다시 기어 올라가서는 그 앞에 무릎으로 서서는 말했다.

“형. 보여?”

“뭐가.”

“이거, 잘 봐봐. 나 자국 보여?”

“어제 빨아둔 거?”

“어. 보이지……?”

“지금은.”

쇄골보다 약간 내려간 옷의 목 부분을 만지작거리다가, 나는 눈을 꽉 감았다 떴다. 정지운은 꽤나 신중한 표정이 되어서는 내 쇄골 근처를 손바닥으로 쓸다 만지작거린다. 셔츠를 입으면 가려질 부분이라 내버려 뒀더니, 이런 젠장.

“얼마나?”

“위에 몇 개.”

“그래…….”

“창식이 이러고 봤어?”

“되게 어색해하면서 가던데…….”

“이러고 나갔냐고.”

“몰라. 나 쪽팔려…….”

시뻘건 자국 다 보이는 줄도 모르고 뭐 신났다고 나가서 문을 열었지?

울상이 된 내 표정이 웃겼는지 형은 굳히려던 표정을 풀더니 헛웃음을 지었다. 쇄골을 쓸던 손을 뒷목으로 돌려 당긴다. 나는 힘없이 품 안에 무너졌다가, 뿌리치고는 침대에 엎드려 이불 안으로 파고들었다. 옆에 웅크리듯 누워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었더니 손이 불쑥 따라 들어온다. 차분한 손길로 등을 툭툭 쓸어내려줬다.

“나가지 말랬지.”

“몰라, 이제 안 나가.”

“으휴, 이걸 진짜.”

“어쩐지 어색해 죽을라 하더라…….”

뒷머리까지 슥슥 쓸어주더니 이내 내 옆에 붙어있던 몸이 떨어졌다. 침대에 혼자 웅크려 있는데 발걸음 소리가 몇 번 안 가서는 우뚝 멈춘다. 그리고 희미하게 통화음 소리가 들렸다. 휴대폰을 주웠나 보다.

아까 전화 왔을 때 받지. 그랬으면 좀 좋아? 그냥 현관 앞에 두고 가라고 하지 그랬어……. 괜히 코를 한 번 훌쩍이는데 상대방이 전화를 받았는지 짧은 통화를 한다.

“서창식, 너 주말 출입 금지. 됐어. 회사에 내가 너 출근도 하지 말랬다고 해. 그리고 다 잊어라, 어? 오늘 본 거 내 앞에서 입이라도 뻥끗하면 보자.”

띠리링 하고 통화 종료음이 작게 울리더니 이내 발소리가 도로 가까워진다. 그리고 침대가 살짝 흔들렸다. 옆에 앉아서는 이불을 들치더니 손이 내 팔을 덥석 잡아 끌어내려 했다. 고개를 저으며 다시 침대와 붙으려다가 결국 끌려 나왔다.

형은 불편한 포즈로 어떻게든 해보려다 달아오른 내 얼굴을 보고는 그냥 말없이 끌어안아준다. 어깨에 기대 이마를 문지르다가 한숨 쉬고는 다시 숨을 들이마셨다. 코끝에 체취와 섬유 냄새가 섞여 포근하다.

“쪽팔려.”

내 등을 다시금 쓸어내리다가 뒷목도 쓸어주고, 붉어졌을 게 뻔한 귀도 머리를 쓰다듬다가 만지작거리며 속삭였다.

“창식이 오지 말라고 했어.”

“됐어. 벌써 본 거.”

“울겠다, 울겠어.”

“쪽팔린다니까.”

“어차피 우리 뭐 하는지 다 아는 거. 아, 이제 때리냐?”

“세게 안 쳤잖아.”

그냥 이마로 어깨 한 번 박았을 뿐인데 엄살은. 가슴팍에 얼굴을 문지르며 모른 척 가만히 웅크려 기댔다.

End

Bonus track

“현지야.”

“네, 오빠.”

“재현이 모델 하라고 했어?”

“그거 별거 아니에요. 아는 오빠가 인쇼 연다고 해서 그냥. 오늘은 그거 입으세요.”

“그래. 창식이는 어떻게 생각해.”

“재현 씨요? 잘하지 않을까요, 형. 그 회사 모델 하신 거 보니까 잘했던데요.”

“그래? 그래서 재현이가 한대?”

“저한테는 할 거처럼 말했었어요. 현금으로 주는 거 맞냐고 확인하시던데요. 진짜 귀여우셔.”

“재현 씨 인스타 팔로우 수도 요즘에 장난 아니잖아요. 형이 자꾸 말 거니까 팔로 했다가 이제는 그냥 재현 씨 구경하는 사람 많대요.”

“어, 저도 그거 봤어요. 저 아는 오빠도 그거 보고 연락했었어요. 이 사람 연예인 아닌데 순하게 잘생겨서 좋다고.”

“……형, 왜요?”

“좋냐?”

“……네?”

“남에 애인 팔아먹을 생각 하니까 좋아?”

“어…… 하지 말까요, 오빠……?”

“아니. 좋냐고. 재현이 어디다 자랑해서 좋냐고 그냥 물어보는 거야.”

“……안 할게요.”

“창식아, 무지방 두유로 카페라떼 90도 맞춰서 사 와라.”

“……네. 형, 저는요. 그런 생각은 아니었구요.”

“사보 모델도 쓸데없이 이리해라 저리해라 알려줬구나 싶어서 좆같은데, 뭐? 모델? 현지야.”

“아니요. 오빠, 저 옷 가지러 다녀올게요! 협찬 올 시간이다.”

진짜 끝!

라이트 업 외전(Light up Side story)

지은이 | 해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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