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ry me?
정지운의 아침은 남들보다 이른 새벽부터 시작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전날 집에 빨리 들어온 것도 아니다. 드라마 촬영이 끝나 차기작을 고르기 위해 쉼 없이 사람들을 만나는 중이다. 사람들을 만나고, 그러다 보면 얼마 전 끝난 드라마 쪽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를 듣고. 소속사로 들어오는 대본도 골라 읽고. 그러다 보니 전날 밤도 자정을 훌쩍 넘어 들어왔다. 그리고 일어난 시간이 새벽 네 시 반이다.
빡빡한 일정이지만, 연예계 일이라는 게 물 들어올 때 노 저어야 하는 것이니 다들 별말 없이 이런 일정들을 소화해낸다. 잠깐 쉬었다가 정말 길게 쉬는 수가 생긴다. 아주 길게 말이다.
정지운은 어제 새벽에야 침대에 눕혔던 몸을 그대로 일으켜 간단하게 샤워만 했다. 어차피 샵에 가면 머리고 뭐고 다시 만질 터였다. 비몽사몽간에 운동화를 질질 끌고 나와 후드티로 얼굴을 푹 가리고는 차에 올라 뒷좌석에서 졸았다. 차는 텅 빈 도로를 금세 달려 샵 앞에 멈춰 선다.
반쯤 졸며 내린 정지운은 기계적으로 계단을 올랐다. 훤한 샵 안으로 들어가 들려오는 인사에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2층으로 또 올라갔다. 커다란 미용실 거울 앞에 앉아 후드티를 내리니 졸음에 겨운 얼굴이 적나라하게 보인다. 나이를 가늠할 수 없도록 곱게 화장한 여자가 정지운의 양어깨에 가볍게 손을 올리며 뒤에 섰다.
“오늘은 말 걸지 말까?”
“네. 창식아.”
“네, 형. 커피는 아메리카노 가져올까요.”
“카페라떼로. 오늘 뭐였지?”
스케줄이라는 것은 매니저가 알아서 짜 오는 것이고, 그는 그 스케줄에 맞춰 차에 몸을 싣고 내리는 것이 전부였다. 대중에게 보여지는 순서와 스케줄의 순서는 늘 뒤죽박죽이다. 찍었던 것이 아예 고사되어 파묻히거나 어제 급하게 찍은 사진이 바로 쓰여야 해서 인쇄소에 전달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그래서 새벽부터 나오고도 가늠이 되질 않았다. 뒤에 선 창식이도 졸음에 하품이 나오는지 숨을 참는 소리로 대답했다.
“화보요. 포토그래퍼 남하운 씨.”
“그랬지. 여기서 머리만 해?”
“아니요. 내추럴이라고 해서 형이 그때 스타일리스트 팀이 맞춰 갈지 가서 할지 물어보라고 하셨잖아요. 알아서 맞춰 와도 된대요. 이따 현지가 옷 가져올 거예요.”
포토그래퍼의 화보 촬영 현장은 다 제각각이다. 콘셉트를 맞추려 촬영장에 헤어와 메이크업 아티스트, 스타일리스트까지 전부 대기시키는 경우도 있고 콘셉트를 연예인 측에 알려주면 연예인의 스타일리스트 팀과 자주 가는 샵에서 모두 준비를 해 가는 경우도 있다.
그것에 대해 미리 알아오라고 했더니 선택권을 아예 다 넘겨주었던 모양이다. 정지운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눈을 감았다. 어쩐지 며칠째 스타일리스트가 틈만 나면 자꾸 옷을 찾고 검색하던 것이 기억났다. 마지막으로 지시하고 눈을 감았다. 흰색의 환한 조명 때문에 잠이 깊게 들 리는 없지만, 선잠이라도 잠깐 자두는 것이 낫다. 하루의 컨디션을 위해서라도.
“나갈 때 음료 주고 지금은 깨우지 마.”
그렇게 눈을 감았다. 부드럽게 이끄는 손길에 따라 머리가 감겨지고. 다시 앉았더니 시끄러운 드라이기 소리가 들린다. 화장품을 묻힌 스펀지가 가끔 얼굴을 두드리고 지나가도 정지운은 잘만 잤다. 이런 것에 깨어나기에는 하루 이틀 경력이 아니다. 한참 아이돌 활동이 절정일 때는 하루에 두세 시간만 자며 한 달을 굴렀었다. 선잠이 든 사이로 음악 방송의 끔찍한 일정들이 얼핏 지나간다.
오빠, 옷 가져왔어요. 하고 옆에서 작게 부르는 소리가 들리고서야 정지운은 굳게 감겨 있던 눈을 떴다. 그사이 머리는 윤기가 나도록 다듬어져 옆으로 살짝 넘겨졌고 옅은 화장이 피부를 밝혀두었다. 화장으로 손댈 게 없어 돈 받기도 미안하다며 너스레를 떠는 원장에게 고개를 끄덕해 보이고는 옷을 받아 들어 갈아입고 나왔다. 옅은 크림색의 니트와 물 빠진 옅은 청색의 진이다. 알이 두꺼운 가죽 시계. 회색의 스웨이드 스니커즈.
사방에서 들리는 찬사를 흘리며 정지운은 거울 안의 자신을 한참 동안 들여다보았다. 성실한 대학생처럼 보인다. 오랫동안 거울 안을 들여다보며 별말이 없자 뒤에 서 있던 스타일리스트는 약간 긴장했다. 설마 마음에 안 드는 것일까. 그러면 당장 다른 옷을 빼 온다고…… 여기까지 생각했을 때 정지운이 무심하게 뒤를 돌아보며 물었다.
“이거 어디 거야.”
“어떤 거요?”
“다.”
“리스트에 적어뒀어요. 마음에 드세요?”
“그러네.”
정지운이 고개를 끄덕이며 걸음을 옮기자 스타일리스트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샵의 스태프들에게 꾸벅 인사를 해 보이고 따라 나왔다. 평소 입던 스타일과 달라 정지운이 혹시라도 마음에 안 들어 할까 마음 졸이며 수십 벌의 옷을 차 안에 차곡차곡 쌓아둔 터였다.
그런 걱정을 알 리 없는 정지운은 햇살을 받고 졸음이 가신 눈을 감았다 뜨며 카페라떼를 넘겨받았다. 며칠 내내 빈속에 아메리카노를 들이부었더니 상태가 영 좋질 못하다. 졸리지만 얼굴을 만지기에는 작품처럼 깔아둔 원장의 파운데이션이 지워질까 봐 찬 음료만 넘기며 졸음을 떨치는 중이다. 차를 타고 스튜디오로 향하며 생각했다.
‘나보다 재현이가 어울릴 거 같은데. 가져다줄까.’
당장 현지에게 옷을 사다 두라고 하려다가 일단은 등받이에 기대 다시 눈을 감았다. 지난번에 사준 셔츠도 아직 안 입고 왔으니 그걸 입은 모습을 본 다음에 말해야지, 라고 생각했다.
요즈음 윤재현은 정장을 빼입고 출근을 했다. 정지운에게는 아직 익숙한 모습이 아니었다. 그래서 일부러 대학생 같은 옷들을 볼 때마다 집어다 주었다.
차에서 내려 기지개를 켜고 목을 돌리려니 날씨는 좋았다. 야외 촬영은 아니지만 어쨌든 그렇다는 거였다. 정지운은 뻐근한 뒷목을 주무르며 지하의 스튜디오로 내려갔다. 뒤에서 현지가 안마해 드릴까요? 하고 물었지만 고개를 흔들었다.
현지는 손쓰는 것을 영 잘 하지 못했다. 옷 골라내는 안목과 색 보는 건 괜찮은데, 바느질도 잘하는 편이 아니라 자꾸 자기 학원에서 후배들을 데려와 끼워 일하고 싶어 했다. 오늘도 누군가 데리고 온다고 했던 것 같다. 누구든 상관은 없었다. 일을 잘 못 하면 그때 한마디 하면 되지. 정말 신경 쓸 겨를이 없어 그렇다. 요즘 너무 많은 사람을 만나 더 그렇기도 하다.
촬영장은 여러 색의 배경을 겹쳐 세워두고 조명 세팅에 한창이었다. 지하 특유의 아늑하고 갑갑한 기운이 감돈다. 빨리 찍고 나가야겠다는 게 정지운의 결심이었다. 벌써부터 나른해지는 기분이어서 그랬다.
내추럴이니 그냥 있는 대로 찍으면 될 것이라 생각하며 카메라 뒤에 앉아 초점을 잡고 있던 포토그래퍼와 인사했다. 근래 뜨고 있는 포토그래퍼다. 키가 약간 작고 뿔테 안경을 쓴 그는 정지운과 악수하며 몇 가지 인사말을 나누었다. 정지운의 입에서도 매끄러운 이야기가 쏟아져 나왔다. 오늘 촬영 기대된다. 어떤 컷을 원하시느냐. 가능한 한 빨리 원하는 사진을 맞춰 뽑아주고 떠날 예정이라 더 친절하게 굴었다.
촬영은 낮에 얼른 끝내고 잠깐이라도 침대에 기어들어가 잠을 자야 할 것 같았다. 그렇지 않았다가는 저녁에 윤재현과 만났을 때 졸지 않을 자신이 없었다.
예의상의 웃는 낯을 한 정지운을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쭉 훑어본 포토그래퍼는 고심에 잠긴 표정으로 턱을 만지작거렸다. 정지운은 그 표정에 고개를 살짝 갸웃거렸다. 눈빛이 영. 제가 먼저 알아서 하고 오라고 했으면서 말이다.
그 순간 포토그래퍼의 등 뒤로 수많은 옷이 걸린 행거가 눈에 들어왔다. 옷도 알아서 챙겨 오라고 했던 주제에 많이도 쌓아놨구나 싶자 감이 왔다. 특히 그 옆에 내려둔 메이크업 박스를 보고는 거의 확신이 들어 그것을 고갯짓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옷이 많네요.”
“아, 네. 그렇게 됐습니다.”
“알아서 챙겨 오라고 하시더니. 메이크업도 준비해놓으시고.”
“직접 하고 오겠다고 하셔서 일단 알겠다고는 말씀드렸는데, 제가 욕심이 많아서요.”
“그럼 진작 그렇게 말씀하시죠.”
“주장이 확고하신 것 같아서……. 하하. 금방 끝내겠습니다.”
다시 맞잡아오는 포토그래퍼의 손을 잡으며 정지운은 피식 미소 지었다. 말간 빛을 띠도록 화장해둔 얼굴에 순간 싸늘한 빛이 감돌자 포토그래퍼는 모르는 척 곁을 비켜 걸었다. 그 조명 조심하라는 쓸데없는 소리나 하면서.
화보 요청을 듣고 분명히 정상적으로 커뮤니케이션을 하고 일정을 잡았다. 그 사이에 이쪽에서 준비를 할지 아니면 직접 준비해둘 것인지 사심 없이 물었고. 그때는 일단 촬영을 잡아야 할 거 같으니 입안의 혀처럼 굴어놓고, 이제 와서 메이크업 아티스트랑 옷을 따로 준비해뒀다, 라.
연예인들에게 있어 메이크업과 스타일리스트의 옷은 생각 이상으로 예민한 주제였다. 작년이었나. 촬영 당일 화보 콘셉트가 마음에 들지 않자 그 자리에서 옷을 죄다 뜯고 다시 바느질하게 만든 여배우도 있었고, 화보 촬영 전 메이크업 콘셉트를 듣고는 절대 그 꼴로는 사진을 못 찍는다며 샵으로 달려가 제멋대로 메이크업을 받고 오는 배우도 있었다.
그만큼 중요한 문제였다. 지면과 스크린으로 내보이는 것이 대부분인 직업인데, 어떻게 보일지에 예민한 것은 당연하다. 옷을 먼저 보여줬다가는 안 될 것 같았나 보지. 행거에 걸린 옷들을 보자 색이 중구난방이다. 어디 너덜너덜하거나 아방가르드를 추구하겠다고 나대지는 않아도 확실히 난해할 것이다. 얼굴에 어떤 칠을 해둘지도 모르고.
정지운은 오히려 밝게 웃었다. 연말에 상 받아야 한다고 착한 척하고 다닌 지가 몇 개월이더라. 로비 안 하겠다고 다 걷어찼으면 웃고 다니기라도 하라는 실장의 사정에 정지운은 그 장단을 어느 정도 맞춰주는 중이었다. 그리고 요즘에는 실제로 기분도 좋았다. 항상 좋은 건 아니지만 대체적으로 좋은 편이니 다 좋았다고 표현하자. 그랬더니 별 웃기는 게 다 기어오른다.
그는 빠르게 이 촬영장 사람들의 속물적인 계산을 떠올려보았다. 이따위로 판을 짤 거면서 누구 하나 말을 안 했다, 이거지. 포토그래퍼 새끼는 지 원하는 것 하나 말할 줄 모르는 게 요즘 잘나간다고 알력 싸움이라도 하겠다는 건가.
그 기색에 눈치를 보던 촬영장 사람들은 소리 없이 흩어져 제 할 일을 바쁘게 찾았다. 그리고 뒤늦게 촬영장의 옷을 뒤져보던 현지는 울 것 같은 표정이 되어 정지운에게로 다가왔다. 입술을 잘근잘근 깨무는 것이 어느 누군가의 습관과 닮았다 잠깐 생각했다.
“죄송해요. 저 이렇게 될 줄 몰랐어요. 실장님 부를까요. 엎으실 거예요?”
“우리 현지, 많이 컸네. 판 벌인 촬영을 어떻게 엎어.”
더할 나위 없이 다정한 어투였지만, 촬영장의 사람들은 모두 똑똑히 들었다. 포토그래퍼에게 항의하던 창식이도 그 말에 쫑긋 귀를 세웠다. 정지운은 넓다고 하면 넓다 할 수 있는 촬영장을 둘러보며 말했다.
“화보. 잘해봅시다. 그리고 김현지, 저녁에 약속 있어?”
“네? 아니요.”
“잘됐네. 있으면 못 갔을 텐데.”
빌려온 장비들은 며칠을 대여한 것일까. 오늘 새벽까지 촬영을 질질 끌면서 엿 먹이고. 다음 스케줄 잡힐 때까지 이 비싼 장비와 사람들 잘 대여해보라고 할 생각이었다. 잘나가는 포토그래퍼라니 쌓아둔 돈도 많겠지.
담백하게 통보하고 뒤돌아 의자에 앉은 정지운의 옆으로 창식이가 재빠르게 다가와 앉았다. 당황한 듯 우왕좌왕하는 스튜디오의 분위기가 볼만했다. 그러니까 누가 엿 먹이래? 말을 해야 할 거 아니야, 말을. 착하게 살려고 해도 말을 안 들어. 그런 정지운의 귓가에 창식이가 작게 속삭였다.
“형. 윤재현 씨 저녁 약속 있으시잖아요.”
“하는 거 보고 저녁에 끝내주든가. 아니면 이따 전화 줘. 내가 전화할게.”
이 정도 말했으면 알아듣고 잘해줬으면 하는데, 과연 그럴까. 하여튼 이 바닥은 친절하게 굴면 꼭 이랬다. 정기적으로 성격 더러운 티를 내줘야 제대로 하지.
촬영이 시작되고 정지운은 눈이 부신 조명 아래 건성으로 서서 시선을 내리깔았다. 찍을 테면 알아서 찍으라는 태도로. 포토그래퍼의 웃어달라는 주문에 피식 웃기는 했는데 비웃음이 명백해 모든 사람이 한숨을 내쉬었다. 저녁 약속은 죄다 파투가 날 판이라 그랬다.
사진을 찍고. 조명 각도를 바꿨다가 옷을 바꾸고. 나중에는 메이크업도 손보자는 제안에 정지운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한 일련의 행동들이 곱게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촬영을 할 때는 눈이 부시다는 둥, 피곤해서 표정이 안 나온다는 둥 방긋방긋 웃으며 잘도 핑계를 댔다.
짜증이 났는지 입가만 실룩거리던 포토그래퍼는 정지운에게 옷을 갈아입어달라고 요청했다. 물론 스튜디오에 준비된 행거에서 고른 옷이었다. 그것을 흔쾌히 받아 들고는 차에 가서 갈아입겠다고 올라가더니 한참을 안 내려왔다. 결국 창식이 올라가 선팅된 차 안을 어떻게든 눈을 가져다 붙여 들여다보니 흐릿한 실루엣이 뒷좌석에 기대 누워 있음이 보였다.
창식은 크게 한숨 쉬며 유리창을 똑똑 두드렸다. 마침 점심시간도 가까워졌으니 밥 먹고 하자며 또 촬영이 지연될 것이다. 정지운은 그 안에서 이미 옷을 다 갈아입고 눈을 감고 있었다.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도톰한 입술이 먼저 열렸다.
“밥 먹고 하자고 해.”
“……네. 전하고 올게요. 뭐 드실 거예요?”
“너 먹고 와.”
“형도 식사…,”
“가라.”
정지운이 귀찮다는 양 손을 흔들었다. 창식은 옆을 아예 돌아보지도 않는 태도에 한숨을 쉬려다 그것마저 거슬릴까 무서워 차 문만 조용히 닫았다. 그 말을 전했더니 이미 아래에서도 예상하고 있었는지 사람들이 저마다 어울려 식사를 하러 갔다.
사태가 이리되자 자기가 데리고 온 스타일리스트와 이야기하는 포토그래퍼의 안색은 시꺼멓게 변했다. 요즘 유해졌다는 정지운을 믿고 일을 벌였는데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이 사진이 어디 쓰일지 계속 나열하는데도 태도가 이미 글러 먹었다. 그렇다고 넙죽 올라가 빌기에는 사람들의 눈이 너무 많다.
정지운은 조용한 차 안에서 감고 있던 눈을 떴다. 짙게 선팅된 차라 사람들이 지나가도 불편할 것 없이 익숙하다. 배가 고프기도 한데 그보다 귀찮음이 더 컸다.
가끔 이렇게 시답잖은 시비를 걸어오면 같잖고 귀찮았다. 그 귀찮음이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본래 성격이 급해 더 그랬다. 말을 할 거면 딱 하고, 말면 말 것이지 같잖은 수를 쓰는 것들이 더 웃긴다. 거기에 잘못 걸려들면 책임을 이쪽에 덮어씌운다. 오늘처럼. 지들이 뻗대던 것은 기억 못 하고 지연시키는 자신 탓만 하고 있을 것이 뻔했다.
점심시간. 그러면 시간이 되겠군. 인턴을 뛰느라 바쁜 윤재현이라도 점심은 먹는다. 정지운은 전화를 걸어 귀 가까이 가져오며 다시 눈을 감았다. 길게 이어지던 신호음의 끝에 윤재현의 목소리가 들렸다.
―오늘 일하느라 전화 안 받을 거라며.
“그렇게 됐어. 밥 먹었어?”
―은행 왔어. 밥은 샌드위치 먹을 거야. 오늘 뭐 한다고 했더라.
“화보.”
―재밌겠다. 잘 돼?
“응. 잘 돼.”
아주 잘 되고 있었다. 부디 오늘 이 소문이 널리널리 퍼져 쓸데없이 불러내려 하는 관계자들이 다 떨어져 나갔으면 할 정도로. 화보는 아니지만 어쨌든 일이 잘 돌아가고 있다고 할 만해서 정지운은 입가를 문지르며 미소 지었다. 전화기 너머 사람들의 소음이 소란했다.
“은행이 왜 이렇게 시끄러워.”
―직장인들은 다 이 시간에 오니까.
“은행도 안 보내주냐.”
―알아서 다녀오기도 하는데 눈치 보여.
그렇다면 지금 저 은행에 있는 사람들은 다 윤재현 같은 사람들일까. 성실하고 다른 말 둘러댈 줄 모르는 그런 사람들. 보고 있으면 참 속 터지고 귀여운 면모라고 생각하곤 했다.
“그러니까 그냥 내가 취업시켜준다니까.”
―싫습니다. 싫어요.
“마음대로 해라.”
―저녁에 뭐 먹을 거야?
“저녁 말이지.”
정지운은 윤재현의 목소리에 손톱을 탁탁 튕기며 생각했다. 밥도 안 먹었다는데 냅다 약속을 취소하기는 그렇고. 뭘 먹이기는 먹어야 할 것만 같았다. 윤재현은 살을 뺀다고 굶는 것도 아닌데 뼈대가 가늘다. 그러다 보니 살이 약간 붙어도 말랑하다 싶지 퍼진 느낌이 안 들었다. 그것도 정지운이 보기에 그 정도지 일반인 사이에 세워두면 길고 마른 편이다.
요즘에는 운동을 한다고 몇 번 나간 덕에 탄력도 약간 붙은 듯했다. 옷을 입혀놓고 있을 때는 모르지만, 벗겨서 엎어놓으면 특히 엉덩이가 예전보다 탄력 있게 올라붙었다. 그 위로 이어지는 마른 듯한 등선이 최고다. 그전이 안 예뻤다는 건 아니고, 요즈음에 특히 더 예쁘고 만져보고 싶게 생겼다는 뜻이다. 재현이 있을 회사와의 거리를 가늠해보며 말했다.
“여기로 올래?”
―어딘데.
“창식이가 제대로 알려줄 거야. 나도 새벽에 차에 올라타기만 해서 몰라. 그래도 가까울걸. 아마.”
―그래. 그래서 뭐 먹어?
“초밥 먹자.”
―그래. 나 차례 됐다. 끊을게.
대답하는 목소리가 밝아 정지운은 웃음을 꾹 눌러 참으며 전화를 끊었다. 예전에는 고기만 먹겠다고 하던 입맛을 저만큼 가르쳐둔 것이 바로 자신이라 더 뿌듯하다.
얼마 전 윤재현은 카운터 자리에 나란히 앉아 초밥을 먹다가 불쑥 이런 말도 했었다. ‘나 참치가 다랑어라는 거 어제 알았어. 참치 캔을 만드는 건 가다랑어고 이건 참다랑어래.’라고.
제법 자랑스럽게 말하는 눈동자가 반짝거려서 정지운은 그걸 이제 알았느냐고 말하지도 못하고 그저 웃었다. 크게 웃고 싶은 것을 입술만 애써 꾹 다물어 미소를 지으며 웃느라 복근이 아플 지경이었다. 비웃었다가 윤재현의 뿌듯한 미소가 어떻게 변할지 몰라 더 그랬다.
젓가락으로 초밥 위의 회를 쿡쿡 찍으며 진정하려 한참을 노력하고 나서야 다시 식사를 할 수 있었다. 그 후로 초밥의 빨간 참치 살들만 보면 윤재현이 떠오른다. 나누었던 대화들. 귀여운 관심사 등등이. 하여튼 특이한 애인이다.
오후 촬영을 위해 다시 내려간 스튜디오의 카메라 앞에서 정지운은 표정 관리가 되질 않았다. 윤재현의 웃긴 행동들이 떠올라 자꾸 웃음이 흐르는 게 문제였다. 몇 장의 건질 만한 사진이 나오자 잠깐 멈추고 포토그래퍼의 카메라로 같이 확인해보다가 손을 들어 얼굴을 문질렀다. 화장을 지우려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 웃음을 멈추려는 행동이었다. 풀린 얼굴 근육을 어떻게든 도로 굳혀 이 사람들을 괴롭혀야 했다.
포토그래퍼의 옆에 팔짱을 끼고 앉아 사진을 보던 정지운은 주변의 찬사를 귓가로 흘리며 각도와 표정을 확대해 살폈다. 스타일리스트가 사다 준 토마토 주스를 한 번에 털어 마시고는 자세를 특히 확대했다. 몸 상태가 안 좋기는 안 좋은지 포즈가 자연스럽지 않았다. 이것을 보고도 역시 사진이 남다르다 등등, 칭찬에 열을 올리는 스타일리스트를 힐끗 보고는 눈을 비볐다. 어차피 옷도 갈아입을 거고 메이크업도 다시 할 듯해서 손을 쓰는 데 무자비했다.
정지운은 옆에 선 매니저가 건넨 일회용 눈물을 따 눈에 넣고는 눈꺼풀을 깜빡이며 어두운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아까 넣은 렌즈가 안구 위를 겉도는지 뻑뻑함을 느꼈다. 이제는 기가 많이 죽은 포토그래퍼가 정지운에게 우물쭈물하다가 말을 붙였다.
“정지운 씨. 이제 다음 옷 한번 입어볼까요.”
“예. 그러죠.”
몸을 일으켜 행거의 뒤편으로 향했다. 이제는 올라가기도 귀찮아 빽빽하게 옷이 걸린 행거 뒤에서 셔츠를 갈아입었다. 쭉쭉 뻗은 뼈대 위로 시간 날 때마다 운동으로 다져둔 근육이 움직이는 것을 옷을 들고 대기하던 현지가 무덤덤하게 보다가 슬쩍 시선을 돌렸다. 이제는 익숙해졌다지만, 정지운의 벗은 몸을 볼 때마다 얼굴을 붉히던 시절도 있었다. 한때고 이젠 다 지나간 일이라지만.
정지운은 단추를 채워주는 손길엔 신경조차 쓰지 않고 소매를 만지작거렸다. 넓은 소매가 특징인 옷은 오묘한 갈색 셔츠이다. 도대체 필름 카메라에서 어떻게 찍혀 나올지 가늠하기가 어렵다. 뒤로 돌아 옷깃을 정리하고 시침핀으로 고정해 핏을 맞추던 현지가 작게 속삭였다.
“이다음 옷은 우리가 가지고 온 거 들고 내려오래요. 아무리 해도 사진이 안 나오니 포기했나 봐요.”
“이 옷에서 끝낼 건데?”
“네? 협조하시게요?”
현지가 의아함이 가득 담긴 얼굴로 올려다보았다. 정지운은 땀을 닦아내고 메이크업을 보완한 얼굴을 구기며 툭 내뱉었다.
“아예 망쳐서 오늘 가망이 없다는 걸 알려주는 건 어때.”
“어. 어어. 창식 오빠랑 실장님한테 물어보면 안 될까요?”
“알아서 할 테니까 모른 척해.”
그녀는 울상이 되어 먼저 행거를 헤치고 총총 걸어 나갔다. 그 뒤를 따라 나온 정지운이 다시 조명 앞에 섰다. 그냥 서기만 했다. 조명은 찌를 듯이 눈이 부셨고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도 귀찮았다. 커다란 셔터 소리와 이것저것 지시사항이 귓가에 웅웅 울렸지만, 정지운은 몇 개의 움직임을 더 보인 뒤 약간의 미소만을 띨 뿐이었다. 밝게 웃어달라는 포토그래퍼의 지시에는 한참 못 미쳤다.
또다시 촬영이 멈추고 잠깐 조명을 낮춘 사이 뷰파인더를 보던 포토그래퍼가 침울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며 정지운은 카메라 앞에 섰을 때보다 구김 없이 웃었다. 이제 촬영 접자는 말이 나오기만 한다면…….
그때 지하로 내려오는 계단으로 웬 남자가 옷걸이를 높게 들고 내려오는 것이 보였다. 그 뒤를 따르는 현지도. 누가 들어오기에 무심코 고개를 돌렸던 정지운은 순간 우뚝 굳어버렸다. 하루 중 제일 정신이 번쩍 뜨이는 순간이었다.
정지운이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남색의 캐주얼한 정장을 갖춰 입은 남자가 화장기 없는 하얀 얼굴을 이리저리 돌리며 내부를 둘러보았다. 그러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그가 정지운에게로 곧장 다가와 옷을 슥 내밀었다. 그것을 얼떨결에 건네받다가 물었다. 시간을 모르고 있었는데 언제 이렇게 된 건가 싶기도 했다.
“너 여긴 언제 왔어.”
“퇴근 시간 지나서 왔어. 아직 안 끝났구나.”
“곧 끝나.”
어떻게든 금방 끝낼 생각이었던 정지운은 윤재현이 가져다준 옷을 한 번 내려다보고, 그 뒤의 현지를 한 번 쳐다봤다. 그녀는 무슨 질문이 날아오기 전부터 미리 변명했다.
“이 앞에서 뵈었는데 같이 들고 내려와 준다고 하셔서요.”
“이게 그렇게 무겁냐? 일을 쉬어.”
“창식이 오빠가 같이 가랬어요.”
“저걸 한 번 패야 되나.”
맘속으로 해야 했던 말인데 그만 중얼거리고야 말았다. 윤재현은 그 작은 소리를 용케 듣고는 정지운의 팔 옆을 툭 쳤다.
“패긴 뭘 패. 내가 심심하다고 했더니 구경 가도 된다고 한 거야.”
“아, 그게. 아이 씨. 그래. 윤재현 너 잘났다, 인마.”
“내가 뭐.”
남의 속도 모르고 윤재현이 뭔가 말을 하려는데 옆에 끼어든 포토그래퍼가 눈치를 보고 슬쩍 말을 걸었다. 어떤 분이시냐고. 정지운이 아무것도 아니라고 대답하기 전에 윤재현의 대답이 한발 빨랐다. 정지운과 친한 동생이며 지나가다가 잠깐 들렀다고 말이다.
그것을 못마땅하게 보고 있으려니 포토그래퍼는 윤재현과 악수까지 나누며 촬영에 대해 줄줄 늘어놓았다. 정지운 씨와 좋은 화보를 만드는 중이다. 구경하시겠냐고. 얼씨구. 정지운의 눈썹 한쪽이 치켜 올라갔다. 윤재현이 오고 말수가 늘어난 자신을 알아챈 것이 뻔했다. 잘할 생각도 없었던 정지운은 그 사이로 끼어들었다.
“일하는데 괜찮겠어요?”
“괜찮아요. 어차피 내추럴한 콘셉트로 갈 텐데. 친구분 있으면 분위기도 자연스럽지 않겠어요?”
저렇게 말을 잘하는 사람이었던가. 손수건을 들어 손을 비빈 남자가 윤재현을 제 옆 빈 의자에 인도해 앉혔다. 정지운은 둘의 하는 꼴을 멀거니 바라보다가 휙 돌아 옷을 갈아입고 조명 아래로 나갔다. 블랙진과 탄탄하게 짜인 회색의 니트였다. 삐딱하니 서 있으려니 스타일리스트가 달려와 입술에 무언가를 톡톡 찍어 바르고 포커스 밖으로 달려 나갔다. 그 모습을 윤재현이 턱에 팔을 괴고는 보고 있다가 신기하다는 듯 웃는다.
조명을 정면이 아닌 측면으로 바꾼 탓에 정지운의 얼굴에는 자연스러운 음영이 드리워졌고 정면이 좀 더 눈에 잘 들어왔다. 확보된 시야 앞에서 제 애인 속도 모르고 얌전히 앉아 구경하는 윤재현을 보니 어이가 없었다. 또 한편으론 눈을 깜빡이며 아닌 척 장비들을 둘러보는 모습이 귀엽기도 했다.
바닥의 수많은 전선들을 훑던 눈동자가 이쪽을 향한다고 생각하자 차마 대충 찍을 수가 없었다. 한숨을 내쉬며 한쪽 다리에 무게를 싣고 단단히 지탱해 섰다. 이제는 정말 일을 해야만 할 때가 왔다.
조명을 가르고 터지는 플래시의 눈부심을 버티다가 결국 정지운의 눈이 깜빡였다. 모델의 오른손이 들리자 포토그래퍼는 고개를 끄덕이며 잠깐 촬영을 멈췄다. 뷰파인더에 잡히는 실루엣이 아까와 달라 좋은 사진이 나올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모니터에 띄워 사진을 확인하는 동안 정지운은 다가오지도 않고 그 자리에 서서 생수만 받아마셨다. 촬영을 빨리 끝내고 나가버릴 생각만 가득해서 그랬다. 그래서 정지운의 사진은 의도치 않게 윤재현이 같이 보게 되었다.
자리를 피해야 하나 싶어 사람들의 눈치를 보았으나 아무도 별말이 없어 윤재현은 사진을 훔쳐보았다. 수십 장의 사진에서 포토그래퍼는 재빠르게 몇몇 사진을 찍어 확대했다. 윤재현은 저도 모르게 감탄사를 작게 내뱉었다. 옷에 감긴 탄탄한 몸이 자연스러운 몸짓을 그리며 미소 짓고 있었다. 평소에 짓는 온갖 감정이 담긴 미소와는 달랐지만.
포토그래퍼는 사진을 자꾸 이것저것 눌러보며 침음성을 삼켰다. 윤재현은 이 정도면 된 게 아닌가 싶어 포토그래퍼에게 말을 걸었다. 아닌 척해도 정지운의 표정이 피곤해 보였기 때문에 빨리 끝내고 싶었다. 배고프기도 했다.
“제가 보기에는 정말 좋은데, 아니에요?”
“좋죠. 아주 좋죠. 오늘 줄줄이 필름 버리다가 이제야 나오네요. 그런데 베스트 컷 할 만한 게 아직 안 나와서요. 시선이 묘하게 비껴갔어요.”
“눈 부셔서 그런가.”
“그럴 수도 있긴 하죠. 휴, 이 정도로 할까.”
“저기서 이쪽 카메라 잘 보여요?”
“잘 안 보일 거예요. 조명을 저쪽으로 쬐고 있으니까. 한 번만 더 갈게요.”
정지운이 고개를 끄덕거리고 다시 촬영이 시작되었다. 셔터는 연이어 찰칵대며 입 끝이 떨리도록 활짝 웃고 있는 정지운의 얼굴을 담았다. 사진은 계속 찍히는데 ‘다시’를 외치는 목소리만 반복되고 끝이 안 난다. 활짝 웃다가 안면 근육이 아픈지 얼굴을 문지르는 애인을 보고 윤재현이 손 하나를 번쩍 들었다. 흔들어도 못 보는 것 같자 아예 포토그래퍼의 머리 위에서 붕붕 크게 흔들었다. 여기야, 여기.
안달복달하며 손을 쥐었다 폈다 하는 등 난리인 그의 모습을 보고 뻣뻣하게 웃고 있던 정지운의 입에서 결국 진짜 웃음이 지어졌다. 때에 맞춘 듯 쉴 새 없이 플래시가 터져서 그는 손을 내저었다. 이거 아니라고. 멍청해 보여서 웃음이 나온 것인데 그게 고스란히 사진에 남았을 걸 생각하니 어이가 없었다. 정지운이 내려오자 윤재현은 바로 아무 일도 없는 척 냉큼 손을 내렸다. 그런 윤재현의 머리카락을 가볍게 잡아당기며 말했다.
“뭐해. 정신 산만하니까 올라가 있어.”
“하여튼 도와줘도.”
“뭘? 대체 뭘?”
“됐어. 이제 안 도와줄 거야.”
그때 옆에서 사진을 살펴보고 있던 포토그래퍼가 큰소리로 외쳤다.
“사진 다 됐습니다. 오늘 수고하셨어요.”
“어? 되긴 뭐가.”
모니터를 휙 젖힐 기세로 잡아 얼굴을 가까이 들이대며 말했다. 이놈의 포토그래퍼가 지금 누굴 엿 먹이려고. 모니터에 크게 확대된 사진은 무채색의 배경과 옷을 바탕으로 미소 짓는 정지운의 표정을 잡아냈다. 가늘어진 눈은 짝짝이였고 미소도 허술해 보였다. 전체적으로 자연스러워 보이고 밸런스도 맞기는 하지만 이런 식으로 작업을 끝내본 적이 없었다. 기다렸다는 듯 자리를 정리하는 사람들을 보며 포토그래퍼에게도 물었다.
“이걸 쓰겠다고요?”
“네. 그거면 됐습니다. 오늘 죄송했고 수고하셨어요.”
“아, 예. 수고하셨습니다.”
정지운과 황망하게 악수를 하고 나자 포토그래퍼는 그동안 잘 유지하던 표정을 지우고 지친 기색을 드러냈다. 그리고는 저쪽으로 가 버렸다. 그게 어이없어 한마디 해주려 했지만, 스튜디오를 정리하는 사람들의 움직임 속에 파묻혔다. 빠르게 정리하고 뛰쳐나간다면 늦은 저녁이라도 어떻게든 약속을 맞출 수 있었기 때문에 다들 손길이 분주했다.
윤재현이 의자에서 일어나자마자 다른 사람이 그 의자를 접어 거둬갔다. 재빠르게 정리되는 스튜디오를 보며 윤재현은 신기한 듯 중얼거렸다.
“와. 다들 빠르네.”
“신기하냐.”
“어. 이제 밥 먹을 수 있어?”
“그래, 먹자. 밥.”
도대체 저 사진을 어떻게 쓸지 몰라 불길했지만, 정지운은 사람들에게 건성으로 인사하고 지상으로 걸어 나왔다. 하늘에 별이 이미 총총했다. 좋은 공기는 아니지만 바깥 공기라는 것만으로도 답답함이 가시는 법이다.
사진이 마음에 걸리긴 했으나 어떻게 나오든 크게 신경 쓸 일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가볍게 생각했다. 어차피 자신이 잘생긴 것은 다 아는데 사진 하나 망친다고 뭐가 크게 달라질까.
이런 시답지 않은 생각들을 하는데 저 담벼락에 있던 창식이 밝아진 얼굴로 다가왔다. 그런 창식에게 정지운은 손을 들어 보이려다 말았다. 그 대신 표정은 살벌했다.
“너는 얘를 왜 내려보내. 미쳤냐.”
“내가 궁금해서 들고 내려갔다니까?”
“네가? 그래, 열심히 우겨라.”
끼어드는 윤재현 때문에 안 보이는 데서 한마디 하든가 해야겠다 생각하며 매니저와 스타일리스트 팀을 보는 눈에 힘을 줬다. 요즘 애들 버릇이 잘못 들었구나 싶었다. 일이 탁 막히면 실장도 아니고 어디서 윤재현부터 어떻게 써먹어 볼 생각을 하고.
윤재현이 제 발로 내려온다고 했을 리가 만무했다. 아마 가서 옷 좀 전해달라고 먼저 부탁했을 것이 뻔하다. 일하는데 관련 없는 사람 끼어드는 걸 아래 있는 것들이 얼마나 싫어하는지 뻔히 알면서 애를 끼워 넣고 지랄이야. 까딱하면 욕먹게.
눈치를 보던 스타일리스트가 저, 옷… 갈아입으셔야……, 라고 말을 꺼내기에 그냥 구입할 테니 이대로 입고 가겠다고 대답했다. 현지의 얼굴이 형편없이 일그러졌다. 꼭 가져다줘야 하는 옷이었지만, 정지운의 표정을 보고는 다른 옷이라도 사수하려 차 문의 손잡이를 꽉 부여잡는다. 매니저에게도 말했다.
“이 앞에서 밥 먹고 있을 거니까 내 차 가져다줘.”
“네.”
“빨리 가져다줘라.”
“정지운 씨, 그냥 창식이 퇴근시키지.”
“네가 운전할래?”
“나, 아직. 차 없어.”
“알아. 그러니까 내가 운전하겠다는 거잖아.”
묘하게 패배감이 어린 윤재현에게 빨리 가자고 채근하며 선글라스를 쓰고 걸어 나갔다. 멀리 갈 시간은 되지 않아 골목 사이를 걸어 근처 초밥집에 갈 생각이었다.
뒤에서 목소리 높여 인사하는 것을 들으며 정지운의 걸음이 천천히 느려졌다. 사람이 많이 다니는 골목이 아니라 걸음을 늦출 것은 없었지만, 옆으로 윤재현이 따라붙어서 그랬다. 두 사람은 나란히 걸었다. 팔꿈치가 스칠 듯 말 듯 미묘한 거리를 떨어져 걸으며 윤재현은 시계를 한 번 보고 말했다.
“아직 초밥집 열었을까.”
“늦게까지 하는 곳 있어. 아니면 다른 거 먹을까?”
“아니야. 초밥 먹자.”
“초밥 먹고 싶어서 촬영 빨리 끝내려고 그랬냐.”
“너는 생각이 다 삐딱하지.”
윤재현의 말에 새삼스레 정지운의 시선이 옆을 향했다가 앞으로 향했다. 지금 누가 그런 소리를 하는 건지. 같잖은 듯 오는 시선에 윤재현도 지지 않고 한마디를 했다.
“너 피곤해 보여서 그랬던 거거든?”
“나? 안 피곤해.”
“아니긴. 잠깐 나 봐봐.”
어둑한 골목 사이에서 자연스럽게 두 사람의 걸음이 멈췄다. 앞에 선 윤재현의 손이 정지운의 선글라스를 잠깐 벗겨냈다. 마주친 잔잔한 검은 눈동자를 보며 정지운은 천천히 눈을 감고 얼굴을 맡겼다. 손끝이 약간 부은 눈두덩과 관자놀이 부근을 지압하듯 꾹꾹 누르며 만지작거린다. 정지운은 피부에 예민하게 느껴지는 손길을 받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간지러우면서도 시원한 기분이었다. 그 한숨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다시 나란히 걸음을 옮기며 윤재현이 말했다.
“아까 보니까 눈꺼풀 뻑뻑해 보였어.”
“그랬나.”
“응. 조명 너무 세더라.”
“항상 그래.”
“선글라스 자주 끼고 다니는 거 이해할 거 같아. 나라면 빛은 꼴도 보기 싫겠다.”
가벼운 이야기와 함께 골목의 오른편을 한 번 돌았다. 이제 한 번 더 왼쪽으로 꺾으면 대로변일 것이다. 여전히 사람이 없는 골목에서 정지운은 옆에 자연스럽게 늘어뜨려져 있는 손을 한 번 잡았다 놓았다. 이제 이 정도 장난에는 반응도 안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랬다. 그래서 다른 말을 문득 꺼냈다.
“재현아.”
“어.”
“결혼할래?”
“뭐?”
윤재현의 짧지 않은 인생 중 많은 말을 들어봤다지만, 이런 말은 처음이었기에 걸음이 우뚝 멈췄다. 다급하게 옆을 돌아보고도 입 모양만 우물거리며 제대로 무슨 말을 하지 못했다. 그 표정이 웃겨 정지운은 또 웃음이 났다. ‘당황’이라는 단어를 그대로 표현한 것 같기도 해서 더 그랬다. 잠깐의 정적 끝에 내뱉은 대답이라는 게 겨우 이거였다.
“대한민국은 우리 결혼 못 해.”
“알아.”
간단하게 나오는 대답을 듣고 윤재현은 더 갈피를 못 잡았다. 그것을 보며 정지운은 별 대수롭지 않다는 양 말했다.
“그냥 전부터 해보고 싶었던 말이라 해봤어.”
“뭐?”
“결혼하자는 말 해보고 싶었는데, 앞으로 이걸 말할 사람이 없잖아. 그래서 너한테 써먹은 거야.”
“아…, 뭐. 이런……. 야! 결혼…, 결혼하자는 말을 뭐 이렇게 해?”
“해보고 싶으면 하는 거지.”
“이야……. 안 해. 안 한다고!”
“우리나라는 어차피 너랑 나 결혼 못 해.”
“…….”
기가 막혀 멍하니 서 있는 윤재현을 두고 정지운이 먼저 발걸음을 뗐다. 방금 한 말은 빈말이 아니었다. 진지하게 생각했다기보다는 언젠가 누군가에게 청혼을 하는 것에 대한 로망이 있었고, 그것이 이 순간 불쑥 입 밖으로 나온 것뿐이었다. 그 로망에 사람 없는 어두운 골목길도 포함되었던 건 아니었지만 말이다. 그 말에 화들짝 놀라는 윤재현의 반응은 충분히 웃겼다. 그럼 된 거 아닐까.
정지운은 그렇게 생각하며 대로가 시작되기 전 마지막 모퉁이를 돌았다. 그 뒷모습을 멀거니 보던 윤재현이 급하게 따라잡으며 말했다.
“나 너랑 결혼 안 할 거야.”
“어차피 한국에서는 못 한다니까?”
“진짜 재수 없다.”
“너 요즘 내가 형인 것도 잊었나 보다.”
불만스럽게 투덜거리는 윤재현의 손등 위로 다시 한 번 따뜻한 손길이 스치듯 지나갔다. 밝아진 길거리 탓에 접촉은 금방 떨어졌다. 환한 거리 사이로 두 사람은 그저 친구 같은 모습으로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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