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연 캠페인
취업 전선에서 장렬하게 미끄러진 26세의 겨울은 추웠다. 춥기는 한데 아직 정신을 못 차려 신나 있기도 했다. 연애를 시작하고 급물살을 탄 지 얼마 안 돼서 그랬던 거 같다. 정지운과의 연애는 대체적으로 정신이 없다. 어떤 날은 왜 이러나 싶을 정도로 잘해주고. 또 어느 날은 사소한 것에 뒤틀려 치고받고 싸운다. 그리고 은근슬쩍 붙어있다가 없던 일처럼 넘어가고. 가끔 화해한다고 뒹굴기도 하고.
그 날은 12월 31일에서 1월 1일로 넘어가는 날 밤이었다. 괜히 사람 많은 곳에 갔다가 귀찮아질 것이 뻔해 우리는 넓은 거실의 낮은 탁자 앞에 마주 앉아 서로의 할 일을 했다. 정지운은 곧 촬영 들어갈 영화의 대본을 보고 있었고, 나는 짊어지고 온 무거운 노트북을 열어놓고 열심히 자판을 두드렸다.
우리의 탁월한 선택에 서로 자화자찬하기도 했다. 어디 멀리 갔다가는 사람만 많고 또 싸웠을 거라고 말이다. 천장의 보조 조명과 소파 뒤 커다란 전등갓을 가진 스탠드가 불빛을 은은하게 뿌렸다. 저 멀리 티브이 근처 벽에 박힌 큰 스피커에선 배경 음악도 종류별로 분위기 좋게 흘러나온다.
항상 이 자리에서만 무언가를 하는 이유는 다른 방들이 정말 쓸 데가 없어 그렇다. 집은 더럽게 넓은데 정지운은 자기가 사용하는 방들만 왔다 갔다 거린다.
방이 무려 네 개나 있는데 침실로 쓰는 방과 나름 서재랍시고 책 몇 권 꽂아둔 방, 지금껏 활동하면서 받은 선물과 편지들을 미어터지도록 쌓아둔 방, 남은 하나는 아예 텅 비어있다. 욕실도 두 군데지만 하나는 얼마나 안 썼는지 물기 하나 없이 바싹 말라 폐쇄해도 될 지경이다.
결국 쓰는 공간이라고는 침실과 그 안의 드레스룸, 욕실이 전부다. 물건이 없는 것도 여전해서 매번 거실 탁자 신세다.
자소서의 항목은 나의 과거를 캐묻고 또 다른 질문을 제시한다. 회사가 앞으로 진행해야 할 신사업의 방향은 무엇일까, 라고. 진짜 짜증난다. 내가 이걸 알면 컨설팅을 하지 왜 회사 말단 사원을 들어가?
대충 끼적이다 저장 버튼을 누르고 노트북을 저 멀리 탁 밀어버렸다. 그런 내 행동에 정지운은 보고 있던 대본 책에서 눈을 떼고 나를 잠깐 본다. 얘는 의외로 집중력이 좋아서 한 번 대본을 보기 시작하면 계속 본다. 끝도 없이 본다. 내가 먼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기 전에는 말도 안 건다. 고개를 옆으로 디밀어 대본 책의 펼쳐진 부분을 읽어봤다. 가지각색의 형광펜으로 줄이 처져 있다.
“이거 언제 간다고 했지?”
“곧 가야 돼. 전라도까지 가야 돼서 자주 못 올라와.”
“응. 주말에는 와?”
“일정 맞으면. 나 없는 동안 뭐 하고 있을 거야.”
“자소서나 쓰고 있겠지.”
“늦게 돌아다니지 마.”
“어. 생각해볼게.”
우리 엄마도 이젠 안 하는 말을 들으려니 낯간지럽다. 내 대답이 마음에 안 드는지 옆에서 장난스럽게 귀를 깨문다. 피하면서 어깨를 찰싹 때렸다. 옷 아래의 팔이 이전보다 단단하다. 요즘 몸 만든다고 운동하더니 성과가 있나 보다. 사실 얘가 내려가면 운동이라도 하나 다닐 생각이다.
나는 평생 하지 않던 관리를 얘 만나면서 신경 쓰고 있다. 안색도 더 훤했으면 좋겠고 군살도 없었으면 좋겠다. 가끔은 일회용 팩도 찢어서 붙인다. 그렇게 관리해서 잘생겨 보이면 면접 볼 때도 좋겠지. 나름대로 합리화도 끝내놨다.
“너야말로 다른 애들이랑 놀지 말고 바로 자라.”
“재수 없는 애들밖에 없으니까 그럴 거야. 감독님이 부르면 막걸리나 먹고 말걸.”
“다른 배우들 별로야?”
“지각해서 싫어.”
지난주에 인터뷰 볼 때까지만 해도 사이좋은 줄 알았건만, 아닌가 보네. 정지운은 손아귀에 쥐고 있던 대본 책을 탁 소리가 나도록 덮고 등 뒤의 시계를 돌아본다. 열 시가 방금 지났다. 녀석이 내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배배 꼬며 물었다.
“자고 갈 거지?”
“아닌데.”
“오늘은 뭐할까.”
“아니라니까.”
“장난감 써볼까?”
“죽어.”
내 대답은 즉각적이었다. 너나 쓰지 어딜 감히. 정지운은 내 반응 같은 건 아랑곳하지 않고 빙글빙글 웃으며 옆으로 붙어왔다. 얘는 내가 짜증내면 더 좋아하는 것 같아. 이상한 놈.
그날 밤에 기어코 장난감을 들이밀길래 발로 걷어차려다가 발목이 잡혀 나동그라졌다. 그렇게 시끄러운 밤을 보내고 정지운은 며칠 뒤 지방 촬영을 하러 내려갔다.
그리고 남겨진 나는 의외의 심심함과 외로움에 고통받는 중이다.
“아, 심심해.”
“야. 나는 보이지도 않냐?”
“아니야. 그게 아니라 이거 요즘 입버릇이야. 미안.”
카페에 수연이와 마주 앉아 자소서를 쓰던 중 무심코 나온 말에 잡아먹을 듯 눈을 흘기기에 재빠르게 변명했다. 이건 진심이다. 딱히 수연이와 함께 있는 게 재미없다는 뜻이 아니라 요즘 입에 붙어버린 말이다. 아침에도 심심하고 점심, 저녁에도 심심했다.
매일 울리던 카톡은 정지운이 촬영에 들어가면서 딱 끊겼다. 첫날에는 진짜 적응이 안 됐다. 내려가기 전 하루 종일 빡빡하게 촬영이 들어가고 대기하기 때문에 연락이 안 될 거라고 말하기야 했다. 그리고 이런 연기를 찍는 중에는 원래 휴대폰을 잘 안 본단다. 감정을 유지하기 어렵다고. 오히려 급한 일은 창식이 휴대폰으로 물어보는 게 빠를 거라고 친절하게 설명도 해줬다. 분명 그랬는데.
나는 답장이 오지 않는 정지운의 카카오톡을 열어놓고 혼자 기분이 상했다. 연락을 못 한다고는 했지만. 그래도…… 그래도!
파블로프의 개라도 된 양 그렇게 삼 일을 꼬박 괴로워하고 이제야 좀 나아진 것이다. 어젯밤에는 마음속으로 굳게 결심했다. 앞으로 정지운에게 잘해줘야지.
정지운이 연애를 잘한다고 들었을 때는 제멋대로인 데다가 금방금방 헤어졌다던 놈이 잘하긴 뭘 잘하나 했는데, 진짜 잘하는 거였다. 곁에 있는 동안 끊임없이 연락하고, 잘해주고. 사람이 거기에 익숙해진다. 그러다 자기가 재미없어지면 헤어지고. 나쁜 놈이네 이거. 그 말에 지나가듯 이 연애에 대해 물었는데 아직 나를 보면 늘 재밌어서 헤어질 생각이 없단다.
어쨌든 그러다 보니 곁에 없으면 빈자리가 더 크게 느껴진다. 그렇게 기다리던 카톡은 어젯밤이 지나 오늘 아침 수연이를 만나러 나오기 직전에야 한 번 왔고 이제 또 조용하다. 나는 반쯤 포기한 마음으로 그냥 입버릇 같은 말만 중얼거리고 있는 거다. 심심하다. 심심하다. 이렇게.
수연이는 내 노트북을 자기 쪽으로 돌려 확인해보더니 한심하다는 듯 웃었다. 모니터를 가득 메운 한글 창은 깨끗하고 공허하다.
“쓴 게 뭐냐?”
“몰라. 안 써지네.”
“대박이다. 지운 오빠가 그렇게 좋아?”
“그게 아니야. 그냥, 심심해. 옆에 있던 사람이 없으니까.”
“와, 고민하던 게 고작 몇 개월 전인데. 장난 아니다. 지운 오빠가 그렇게 잘해줘?”
“아니야. 너무 붙어 다녀서 그래.”
정지운이 일 끝나고 돌아와도 나는 내 삶을 좀 챙겨야겠다. 전처럼 방학이라고 주에 5일을 붙어있을 게 아니라 만나는 횟수를 줄이고 다른 사람들의 비율을 늘려야겠어. 덜컥 겁이 난다.
“오빠 언제 온대?”
“이번 주말.”
“이틀 남았네. 조금만 참아.”
“그렇게까지 참는 건 아니야.”
약간이나마 자존심을 챙겨보고자 외쳤건만 수연이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자기 노트북 키보드를 두드려댄다. 일정한 리듬으로 두드려지는 타자 소리를 듣다가 변명을 포기했다. 나도 자소서를 다시 채워 나갔다. 자소서 같은 걸 매일 쓰니 삶에 행복이 없어 더 외로운 것 같기도 하다. 그래. 이게 분명하다.
드디어 휴대폰으로 평소와 같은 연락이 왔다. 지금 올라가는 중이고, 어디냐고. 나는 집으로 가겠다 하고 바로 준비했다. 오랜만에 보는 것이니 나름 새로 산 코트도 걸치고 흰 운동화에 딱 맞는 핏의 진도 갖춰 입었다.
버스를 타고 가는 동안 정지운은 아파트 로비에 나와 있다며 내게 뭐라고 했다. 버스를 탈 거면 차라리 데리러 오라고 하지 그랬냐고. 거기서 늘 하는 대로 티격태격 다퉜다. 내가 뭘 타든 말든 상관하지 말라고 하면서 말이다. 목소리가 클 때는 귀에서 전화기를 멀찍이 떼고 듣기도 했다.
내려야 할 정류장에 도착하자 벨을 누르고 뛰어내렸다. 내릴 때 카드를 찍고 내렸던가. 하도 자주 와서 아파트 입구의 경비원은 이제 내 얼굴만 봐도 그냥 문을 열어준다.
반짝거리는 로비로 들어서자 창식이는 이미 보냈는지 정지운 혼자 커다란 건물 기둥 뒤에 서 있었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왔다. 등 뒤로 현관문이 닫히자 정지운은 선글라스를 벗었다. 턱과 입매만 봤을 때는 몰랐는데 가려졌던 눈을 보니 눈 밑이 약간 어둡다. 아직 피곤한 모양이다.
운동화를 벗고 올라서자마자 팔이 끌어당겨졌다. 오랜만이었기에 피하지 않고 나도 팔을 둘러 안았다. 입술이 닿는 순간 노곤한 기분이 들었다. 혀를 빨고 아프게 깨물어오는 것을 느끼며 정신없이 움직임을 같이하는데 문득 느껴지는 것이 있었다.
입술이 떨어져 나가고 나는 정지운의 옷깃에 코를 가까이 가져가 냄새를 맡아봤다. 파고드는 나 때문에 옅게 웃는다. 하지만 나는 웃음이 나오질 않았다. 손을 들어 셔츠의 옷깃을 만지작거리다가 올려다보며 물었다. 내려다보는 눈은 내 기분도 모르고 부드럽기만 하다.
“너 담배 피웠어?”
“어. 어떻게 알았어.”
“키스하니까 알지.”
“냄새나?”
정지운은 당황했는지 제 소매 같은 곳의 냄새를 맡으려 했다. 나는 올라온 오른손을 잡아채 손가락 사이도 코를 가져다 대봤다. 아직 냄새가 여기까지는 안 벤 모양이다.
“원래 안 피웠잖아.”
“그랬지.”
“이번에 내려가서 피운 거야?”
“그냥…… 먹을 만한 건 없고 짜증나서 피웠어.”
무슨 그런 핑계가 다 있냐. 나는 몸을 떨어트리고 입술을 씹었다. 못마땅함이 드러나는 태도에 정지운은 머리를 긁적였다.
“싫어?”
“당연하지. 키스할 때 나도 담배 피우는 거 같아.”
“양치랑 다 하고 왔는데 어떻게 알았지. 알았어. 안 할게.”
이때까지만 해도 정지운은 내 태도에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알겠다고 했다. 하지만 정지운이 내 말을 이렇게 순순히 듣는 성격이었다면 우린 진작 해외 어디로 도피해서 결혼이라도 했을 거다.
그 날 이후 나는 저녁쯤 시간이 되면 정지운에게 전화를 했다. 받으면 좋고 안 받으면 그만이었다. 나중에 다시 통화하면 되니까. 그래서 전화 안 받는다고 창식이에게 문자를 남기지도 않았다.
내가 매일 궁금한 것은 거창한 것이 아니다. 촬영은 잘 되고 있는지. 단독 주연이 아닌데 분량은 잘 챙기고 있는지. 시시콜콜한 이야기 등등. 그리고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주제는 담배다. 그놈의 담배. 다른 이야기는 담배를 묻기 위한 포석일 뿐이다.
밤에 자소서 쓰다가 잠깐 게임하러 피시방에 앉았건만, 정지운에게서 전화가 와 게임도 못 하고 듣는 중이다. 늘어놓는 이야기를 들으며 나름대로 열심히 대답했다. 오늘은 밥차가 왔는데 제육볶음이 부족했다. 시간이 촉박해서 씬을 조각조각 쪼개 촬영 중이라 무슨 연기를 하는 건지 종잡을 수 없다, 등등.
내가 알고 있는 단어는 최대한 동원했지만, 대답에 한계가 있다. 쪽대본은 그나마 알아듣겠는데, 나머지는 다 미지의 세계다. 현장에서 냇가에 발을 담그고 서서 뭍에 서 있는 여주인공에게 말 거는 씬이 있는데 정면에서 찍고 뒤집어서 찍었는데 더블 돼서 다시 찍는 동안 발이 얼어붙는 줄 알았다. 같은 내용들.
무슨 말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빠른 말투로 쏟아내는 것을 보니 기분이 별로인 모양이다. 타이밍에 맞춰 반응해주는 것도 큰일이다.
“발은 괜찮아?”
―나와서 핫팩 붙였어. 그깟 대사 나도 나와서 치게 할 것이지. 끝까지 그 안에 들어가 있으라고. 유지수는 대사를 왜 그렇게 씹냐. 하긴, 못 외우니까 씹겠지.
“여주인공?”
―어. 걔는 관리실 가서 잘 때 누가 옆에서 대본 읽어줘야 해. 들어서라도 외워 와야 할 거 아니야.
“너도 외우지 마.”
―그랬다가는 감독님이 판 걷어찰걸. 안 그래도 조연 하나가 이번에 서울 올라와서 코 필러 맞고 온 거 보고 뒤로 넘어가려고 하더라.
“우와. 그래도 돼?”
―원래 댓글 안 보는데 그 자식 코 필러 해서 얼굴 바뀌는 거 나올 화는 찾아볼 거야.
“미쳤네.”
이 이야기는 웃긴지 목소리 톤이 살짝 올라간다. 그래서 나도 같이 웃다가 말을 꺼냈다.
“방이야?”
―어. 너는.
“피시방. 밥 먹고 뭐했어?”
―그냥 들어왔어. 내일 또 해 뜰 때 뭐 찍자네.
“담배는.”
―아, 안 피워. 안 피운다고.
“왜 이렇게 안 믿기지.”
―너 어디 아프냐?
약간은 신경질적으로 올라가는 목소리를 들으며 지금껏 놓고 있던 마우스를 오른손으로 들고 움직였다. 아니라면 뭐. 더 이상은 내가 신경 쓸 게 아니지. 게임이나 하자. 건성으로 대답했다.
“그럼 쉬어.”
―허구한 날 이러니까 신선하네. 그렇게 싫어?
“어. 냄새 싫어. 키스할 때 입안에 숯을 넣고 씹는 거 같아.”
―그걸 입에 넣고 씹어봤냐.
“그냥 말이 그렇다는 거야. 어쨌든 싫어.”
―알았어.
“이번 주말에 올라와?”
―그럴걸. 나 피부과 가야 해.
“그 앞으로 갈게.”
―들어갈 때 말할 테니까 나오는 시간 맞춰서 와. 너도 관리 받을래?
“그럴까. 시간 되면. 나 이제 게임할게.”
―졌으면 좋겠다.
“야.”
무슨 말을 더 하기 전에 전화가 종료됐다. 꺼진 통화 내역을 보니 30분은 족히 넘게 통화를 했다. 피시방 시간 아깝게 말이다. 게임을 시작하고 헤드셋을 쓰고서 재빨리 친구들을 찾아 팀을 꾸렸다. 게임은 정지운의 저주 때문인지 3연속 어그로를 끌다가 욕만 처먹고 꺼버렸다.
주말 아침에는 머리맡에서 울리는 휴대폰을 잡기 위해 손을 휘젓다가 깨어났다. 일어나려 알람을 맞춰뒀던 시간보다 30분가량 이르다. 방은 보일러가 한 번 돌았는지 따뜻했다. 울리는 전화를 받으며 몸을 일으켜 침대에 앉았다. 마음 같아서는 도로 이불 속으로 들어가고만 싶다.
―일어나.
“더 늦게 온다며.”
―내 씬은 다 끝나서 먼저 나왔어.
“그래. 그럼 지금 가?”
―어. 피부과로 와. 나 먼저 들어갈 거니까 카운터에 네 이름 말해. 알아서 끊어둘게.
“어?”
일방적인 통보 끝에 전화가 끊겼다. 마음 같아서는 피부과고 뭐고 그냥 도로 눕고 싶다. 아침에 일어나는 것은 언제나 어렵지만, 특히 겨울은 더 힘든 법이다. 건조한 공기를 느끼며 이불에서 꾸물꾸물 일어나 바닥에 발을 내렸다. 따뜻해서 좋다. 가끔 타이밍을 잘못 맞춰 일어나면 보일러가 다 돌고 식은 다음에 발바닥을 대는데, 그 차가운 느낌이 얼마나 싫은지.
샤워를 하고 따뜻한 옷을 갖춰 입었다. 두꺼운 베이지색 면바지에 맨투맨을 껴입고 패딩까지 갖춰 입었다. 나가려다가 피부에 아무것도 안 바른 게 생각나서 로션만 대충 손에 덜어 문질러 발랐다.
한파가 풀려 다행히 날씨는 따뜻하다. 지하철 계단을 내려가는 것이 귀찮아 버스에 바로 올라타 꾸벅꾸벅 졸다가 제때 내렸다. 버스 안 대다수의 사람들이 내리려 일어섰기 때문에 나도 일어날 수 있었던 거다.
사람들 틈바구니에 섞여 버스에서 내려 두리번거렸다. 큰 대로변에 늘어선 건물들은 다들 비슷한 구성이다. 1층은 화장품 가게나 카페. 2층부터는 피부과나 성형외과, 학원들이 입주해 있다. 눈으로 건물들을 둘러봤다. 간판이 워낙 많아서 눈에 잘 들어오지 않는다. 주황색, 분홍색 튀는 색색깔의 간판들 사이로 내가 가야 할 곳을 찾은 것은 거의 기적이라고 할 수 있다. 길 건너 높지 않은 건물의 2층에 걸린 초록색 작은 간판이 최종 목적지다.
횡단보도를 건너 건물의 2층으로 올라갔다. 사람들이 드나드는 다른 건물들과 달리 입구부터 한적한 기운이 물씬 풍겼다. 흰 계단을 올라가자 널찍한 자동문이 스르륵 열렸다. 와야 할 곳이라 아무 생각 없이 덥석 들어왔는데 등 뒤로 자동문이 닫히자 걸음이 얼핏 굳는다. 불현듯 긴장감이 등골을 타고 스멀스멀 올라온다.
넓은 로비의 끝에는 안내데스크가 있고 오른편에는 넓은 소파가 벽을 두르며 놓여 있다. 거기 앉아있는 두 명의 사람 중 한 명이 다행히 내가 아는 사람이다. 문 앞에서 굳어버린 나를 보고 창식이가 다가왔다. 얘도 내려가 있던 동안 고생이었는지 얼굴에 피로가 가득하다. 내게 다가오는 예쁜 간호사 누나에게 내 등을 떠밀며 말했다.
“이 사람이에요.”
“네. 안녕하세요. 이쪽으로 들어오시면 돼요.”
“어…, 저 그냥 들어가면 돼요?”
“네. 패키지 예약되셨습니다.”
나는 쭈뼛거리며 안내데스크 옆 진료실 같은 곳으로 들어갔다. 일단은 작은 라커룸에 들어가 패딩을 벗고 몸을 가볍게 한 뒤 그 옆방으로 들어갔다. 작은 방엔 침대 하나가 놓여 있었고, 나는 어떻게 하는지 단 하나도 몰라서 간호사의 말을 그대로 따랐다. 눕고, 몸에 커다란 담요를 덮고. 내 머리맡에 앉은 간호사는 뭘 발랐냐고 한 번 묻더니 곧장 관리를 진행했다.
머리카락을 고정시키고 얼굴에 뭔가를 쉴 새 없이 바르고 닦고 한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잔잔한 음악 소리와 상냥한 손길에 잠이 들었다 깼다를 반복했다. 차가운 것이 얼굴에 닿거나 지압을 할 때마다 졸음이 깨워진다. 뭉친 승모근과 상체를 눌러 안마할 때는 신음을 참기 위해 안간힘을 썼고, 기계를 가져와서 눈을 가린 채 얼굴에 쬐기도 했다. 아플지도 모른다고 말하기는 했지만 약간 따끔거리고 말았다.
관리를 받는 데에 있어 의외의 복병은 좀이 쑤셔 못 견디겠다는 거다. 누워 있기만 하니 답답하고 심심하기도 하고. 길고 긴 시간이 지나 풀려났을 때 나는 누워 있었음에도 피로를 느끼며 패딩을 다시 걸쳤다. 언뜻 지나가며 거울에 비춰 본 얼굴은 광채를 내며 훤하게 변했다.
밖에 나가니 소파에 앉아있는 사람은 한 명뿐이다. 창식이가 앉아있던 자리에 정지운이 마스크를 쓴 채 앉아있다가 일어난다. 나가려는 나에게 간호사가 그린 듯한 미소를 띠고 명함을 건네준다. 내미는 명함을 받아 들고 내려다보는데 상냥한 목소리가 울린다.
“다음 예약은 연락 주시면 잡아드릴게요.”
“다음 예약이요?”
“네. 패키지 10회권 중 9회 남으셨어요.”
나는 표정 관리를 하며 정지운을 봤다. 그런 내 어깨를 두드리며 하는 소리가 이렇다.
“데뷔하려면 관리 잘해둬야지. 다음에 같이 올게요.”
“네. 시간 비워둘 테니 언제든 오세요.”
내게도 상냥했던 간호사 누나지만, 정지운에게 말을 할 때는 세상에 다시없을 천사처럼 상냥하다. 걸어 나오는 우리 뒤로 여러 사람의 목소리가 합창을 했다. 다음에 다시 보자며. 이 병원이 친절하다 해도 이 과한 친절이 누구 덕분인지 모를 수가 없다.
계단을 내려가 건물 뒤에 세워진 차에 올라탔다. 창식이가 가져다 두고 갔는지 일할 때 타는 차가 아니라 평소에 타고 다니는 랜드로버다. 조수석에 올라타 문을 닫자 정지운은 마스크를 벗어 뒷좌석에 던졌다. 안 본 사이 살이 빠진 듯 더 갸름해진 뺨을 보다가 손짓했다. 내 손 모양을 보고 정지운이 상체를 내게로 기울였다. 가까이 다가가 입술을 대려고 하자 살짝 물러나더니 나를 빤히 보며 속삭인다.
“밖에서 이러면 안 된다.”
“근처에 카메라 있어?”
“여긴 없는데 다른 데서 그럴까 봐.”
그리고는 눈을 감고 얼굴을 들이밀어 준다. 나는 천천히 입을 맞추고 혀를 살살 밀어 넣었다. 따뜻한 체온이 전해졌다. 숨을 들이쉬며 입술을 문지르다가 바로 떨어졌다. 금방 물러나는 내가 마음에 안 드는지 정지운은 감고 있던 눈을 살짝 뜨고 깔아본다. 그 잘생긴 얼굴을 음미할 새도 없이 얼굴을 구기며 말했다.
“너 담배 또 피웠지.”
“……아니.”
“우리 아버지가 담배 피워서 다 아니까 빨리 말해라.”
“아니라니까.”
내 추궁에도 그런 적 없다는 양 어깨를 으쓱해 보이고는 몸을 틀어 차의 시동을 건다. 뜸 들여 대답하는 것도 그렇고, 이 태도에 나는 더욱더 확신이 들어 외쳤다.
“네가 그 성질에 진짜 담배 안 피웠으면 지금 나한테 이 정도만 하겠어?”
“너 내 성격을 대체 뭘로 보냐?”
“정지운 씨.”
“아 씨. 그래, 피웠다. 가글도 다 했는데 도대체 어떻게 아는 거야?”
결국 골목을 빠져나와 빨간불에 걸려 서자마자 핸들을 두드리며 짜증을 부린다. 피웠다고.
그래. 그렇게 안 피운다고 잡아떼더니. 거짓말을 말든가. 그런 태도가 더욱 기가 막혔다.
“안 피운다며!”
“네가 하도 뭐라고 하니까 그랬지!”
“왜 갑자기 담배를 피워?”
“스트레스받으니까 그렇지. 그리고 내가 담배 하나도 마음대로 못 피우냐?”
“뭐?”
그렇게 또 싸웠다.
차 안에서 한참을 싸우다가 결국 갓길에 주차까지 하고 목소리를 높였다. 왜 거짓말까지 한 거냐고 물었더니 내가 싫어하는 게 뻔히 보여서 그랬단다. 대체 싫어할 걸 알면서도 왜 피우냐고 했더니 나를 빤히 보던 정지운은 깊은숨을 내쉬며 자기 성질을 죽이려 했다. 그래서 나도 잠깐 화를 참고 진정하기 위해 노력했다.
얘랑 대화하면 별거 아닌 대화도 흥분이 머리끝까지 치솟는다. 분노로 떨리는 주먹을 꾹 쥐어 숨기고 말을 않자 차 안에 내려앉은 정적 사이로 바깥 소음이 새어 들어온다. 그때 정지운이 최대한 무표정한 얼굴을 가장하며 내게 말했다.
“내가 담배 피우는 것까지 허락받아야 해?”
“안 피웠으면 좋겠어. 우리 아버지 건강에 안 좋았던 것도 생각나고 걱정돼.”
“피곤해서 잠깐만 피우겠다는 거잖아. 내려가서 촬영 지연되는 것도 짜증나고, 그렇다고 촬영 중에 아무거나 집어 먹어서 얼굴 붓게 할 수도 없어.”
“너 그렇게 안 부어.”
“약간 붓지. 하지만 카메라에서는 다 찍혀 나와. 일할 때만이라도 그냥 두면 안 되겠냐?”
둘 다 할 말은 다 했다. 나는 말없이 눈만 깜빡이며 나를 보는 정지운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피곤한지 얼굴을 한 번 문지르고는 다시 나를 본다. 살이 많이 빠졌다. 일할 때면 이렇다. 일을 안 할 때라고 해서 완전 풀어져서 사는 건 아니지만, 요즘에는 더 바짝 조인 것을 안다.
실제로 보면 살이 내려 좀 잘 먹고 쉬었으면 하는데, 카메라로 보면 이 정도가 딱 알맞게 나온다며 유지 중이었다. 날카롭게 솟은 콧대나 마른 뺨이 딱 적당하게 나오는 거다. 그걸 완전히 모른 척할 수는 없어 한숨이 나왔다. 고개를 끄덕이고 손을 더듬어 조수석의 문을 잡았다. 차에서 내리려는 나를 보고 표정이 험악해지려 하기에 먼저 선수를 쳤다.
“잠깐만 바람 쐬고 올게.”
“어디 가게.”
“화나서 그러는 거 아니야. 네 말도 맞는 것 같아서 생각해보겠다는 거야.”
내 말에 정지운도 머리를 한 번 쓸어 올리고는 숨을 크게 내쉬었다.
“나 아까 피부과 건물 뒤에 다시 주차해놓고 있을게. 그쪽으로 와.”
“알았어.”
짧게 대답하고 일단 차에서 내렸다. 열이 올라 더운 얼굴에 찬 공기가 닿자 차라리 시원하게 느껴졌다. 이럴 때는 둘이 붙어있는 것보다 서로 머리를 식히는 게 낫다는 것이 그동안의 싸움으로 얻은 결론이다. 나는 인도를 되는 대로 걷다가 짜증이 나서 주위를 둘러봤다. 깨끗한 길에는 걷어찰 쓰레기도 하나 보이지 않는다. 에이 씨, 뭐 이러냐. 손을 패딩의 주머니에 푹 찔러 넣고 길을 걸었다.
그래, 맞지. 내가 뭐 결혼한 사이도 아니고. 담배까지 피우지 말라고 할 수는 없지.
하지만 화가 난다. 화가 난다기보다는…… 속상하다. 우리 아버지가 담배를 피울 때 어머니가 얼마나 뭐라고 했던가. 몸에도 안 좋고 비싼 걸 피워서 대체 뭐하냐고. 집에서 가장 큰 다툼의 주제 중 하나였다.
그렇지 않더라도 담배는 싫다. 내가 술은 있는 대로 마시고 형들에게 별걸 다 배웠다지만, 절대 같이하지 않았던 것이 담배다. 술자리에서 한 번만 해보라고 장난처럼 내밀어지는 것도 거절했다. 기관지가 좋지 않은 편이라 담배 피우는 형들과 오래 있다 보면 기침이 나온다. 심지어 담배를 피우는 형들도 목에 안 좋고 폐활량이 떨어진다며 절대 피우지 말라고 말렸었지.
그런데 그게 피우면 스트레스가 해소되기는 하나?
가장 근본적이 궁금증이 있다. 진짜 피우면 기분이 좋아져? 가던 길을 멈추고 옆을 돌아봤다. 편의점이다. 깨끗한 유리창 너머의 편의점을 물끄러미 보다가 문을 열고 들어가 카운터 앞에서 홀린 듯 말했다. 담배와 라이터요. 어떤 걸 원하냐고 하길래 대충 보이는 것을 가리켰다. 계산을 하고 손에 꽉 움켜쥔 채 건물의 뒤편으로 돌아 들어갔다. 담배를 피워본 적은 없지만 요즘은 이런 곳에서 피우면 안 된다는 것을 안다.
한적한 건물의 주차장 구석. 나는 손바닥을 펴 담배를 내려다보았다. 흰 갑과 비닐 포장. 비닐 포장의 여는 부분을 천천히 뜯어 열고 한 개비를 꺼냈다. 형들이 피우는 대로 손에 쥐고 라이터를 달칵 눌러 켰다. 담배의 끄트머리에 불이 붙었다가 금방 꺼진다.
이게 불이 붙은 건가. 연기가 옅게 올라오기에 입에 물고 한 번 들이마셨다. 들이마시기는 했는데 바로 코로 뱉어냈다. 매캐한 냄새와 옅은 향이 남고 연기가 사라졌다. 다시 한 번 빨아들였다 내쉬었다.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어딘가에서 막혔는지 잔기침이 나왔다.
입맛을 다시며 담배를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기분이 좋나? 그것도 잘 모르겠다. 다시 한 번 들이마셨다가 잔기침을 하고 뱉었다. 제대로 담배를 피워본 적은 없지만 이렇게 피우는 게 아니라는 건 알겠다. 예전에 호기심으로 딱 한 번 피워봤을 때 담배를 건네줬던 형이 그랬었지. 깊게 안쪽까지 들이마셨다가 뱉어내면 머리가 맑아진다고. 이렇게 얕게 숨을 쉬는 게 아니었던 건 확실한데.
들이마셨다 내뱉었다 하는 도중에 담배 한 개비가 벌써 다 타버렸다. 다행히 구석에 쓰레기통이 있어서 불을 비벼 끄고 버렸다. 그리고 담배를 또 한 개비 꺼냈다. 오늘이야말로 담배라는 것을 도대체 왜 피우는지 알아내고야 말리라 결심했다. 다시 한 번 불을 붙이고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뱉어냈다. 옅은 연기가 입에서 뱉어지기는 한데 아리송하다. 이게 맞나?
담배를 세 개비쯤 피우고는 담뱃갑을 주머니에 쑤셔 넣고 길을 걸었다. 결론부터 말하면 모르겠다. 괜히 플라세보 효과처럼 스트레스가 가신 것 같기는 하다. 하지만 담배 때문에 스트레스가 풀린 건지, 아니면 스트레스가 풀릴 거라고 들어서 그렇게 생각하는 건지 모르겠다.
어쨌든 그만하자 싶어 골목을 걸었다. 목은 그사이 매캐해져서 거칠다. 저 멀리 아까 그 피부과 건물이 보인다. 차가 지나가는 골목은 좁아터졌는데 마주 걸어오던 사람이 길을 비키지 않아 바짝 비켜서며 생각했다.
그렇다. 정지운에게 호불호를 말할 수는 있지만, 담배를 못 피우게 할 수는 없는 것 같다. 내가 이렇게까지 싫어하는 것은 내 문제지. 그런 거다. 마음이 씁쓸하지만 인정할 건 인정해야겠다. 대중없이 가깝게 지내다 보니 분간이 안 된 모양이다.
건물의 주차장 입구 쪽에 대어져 있는 정지운의 차로 다가갔다. 조수석 유리창을 한 번 손가락으로 똑똑 노크하듯 두드리고 올라탔다. 차 안엔 잔잔한 음악 소리가 흐른다. 기분이 안 좋을 때면 이렇게 노래를 틀어두는 게 버릇임을 안다. 올라타서 얌전하게 앉은 나를 보고 말을 건다.
“어디 있다 왔어.”
“진짜 걸었어.”
그리고 정적이 찾아왔다. 주차장에 내려온 여자 한 명이 차를 빼서 나가고 우리는 말이 없었다. 갑갑한 분위기 끝에 나는 나오지 않는 말을 먼저 꺼냈다.
“담배 가지고 무슨 말 안 할게.”
“억지로 참을 거면 그렇게 말하지 마.”
“아니야. 내가 뭐라고 할 게 아니지.”
충분히 납득하고 왔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말을 하니 섭섭하다. 그래, 섭섭하다. 제기랄. 내가 나 키스하기 싫어서 그러는 줄 아냐. 물론 개인적인 호불호도 있지만 그게 얼마나 건강에 안 좋은데. 앞으로 니 옆에 붙어있을 때 나는 냄새가 담배 냄새인 게 싫다. 앞으로 내쉬는 숨에 담배 냄새가 섞이는 게 싫어.
하지만 차마 이런 것까지는 말할 수 없어 고집스레 차의 정면 유리만 주시했다. 아무리 봐도 이해하는 게 아닌 내 태도에 옆에서 또 한숨 소리가 들렸다. 손목을 꽉 잡아 몸을 끌어당기려 한다. 이를 악물고 힘으로 버텼다. 옆에서 달래듯 나를 부른다.
“재현아. 이야기 좀 하자.”
“내가 잘못했어.”
“그렇게 대답하지 말고.”
“그만하자.”
내 대답이 싸우자는 건지 화해하자는 건지 나도 모르겠다. 배배 꼬인 심사를 그대로 드러내 보이는데 옆에서 내 몸을 끌어안으려는 듯 가까이 붙어온다. 피하지는 않고 그냥 가만히 있었다. 귀의 아래쪽 목덜미에 얼굴을 대고 기대는 게 느껴졌다. 다음 순간 얼굴을 돌리려 붙잡아올 것이라 생각했는데 붙어온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나는 슬그머니 눈만 내리뜨며 내게 기대 있는 정지운을 살폈다. 갑자기 고개를 벌떡 드는 바람에 시선이 마주쳤다. 딴청을 피울 새도 없이 양손이 내 얼굴을 꽉 붙잡아 자기 쪽으로 돌렸다.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정지운이 내 코끝 바로 앞까지 얼굴을 들이밀고는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내쉰다. 그리고는 대뜸 입술을 물어뜯듯 깨물었다. 멈췄던 숨을 들이쉬며 몸을 등받이에 딱 붙여 피했다. 이게 뭐야. 나를 보는 표정이 잔뜩 일그러졌다.
“너 나가서 뭐했어?”
“걸어 다녔다니까.”
“담배 피웠어?”
어라. 분위기가 이상하다. 나는 영문도 모른 채 쫄아서 고개를 끄덕했다. 정지운은 혼잣말로 뭐라고 알아듣지 못할 말을 중얼거리더니 내 얼굴을 붙잡고 있던 손을 뗐다. 그래 봤자 내게서 멀어지지는 않았다.
“왜.”
“너도 피우잖아. 그래서.”
“원래 안 피우잖아. 갑자기 왜?”
추궁하듯이 말하는 목소리가 심상찮다. 나는 설마 싶어 중얼거렸다.
“지금 내가 담배 피워서 이러는 거야?”
“갑자기 왜 담배야. 건강이네 뭐네 말하더니.”
“너 피우잖아. 나도 피울 수 있는 거지, 왜 이래?”
“너는 먹고 싶은 거 먹으면 되지, 담배를 왜 물어.”
처음에는 이게 무슨 말인지 와 닿지가 않았다. 빤히 바라보는 옅은 색의 눈동자를 마주하려니 천천히 머릿속에서 상황이 짜 맞춰진다. 내가 담배를 피우고 왔고. 냄새를 맡은 거 같고. 그래서 지금 화를 내는 거야? 허. 헛웃음이 나온다. 손을 들어 몸을 밀치듯 밀며 내뱉었다.
“너는 되고 나는 안 되냐?”
“아니, 재현아. 들어봐. 나는 다른 방법이 없으니까…….”
드물게 당황한 모습으로 손짓을 하며 이것저것 설명을 늘어놓는다. 내려가 있으면 먹을 만한 게 없고. 현장의 수많은 사람들을 어떻게 다 할 수 없고. 잠자리도 불편하고.
결국 저만 담배를 피워도 된다는 거다. 변명이 길어질수록 나는 기분이 점점 썩어들어갔고, 그런 내 기색을 읽었는지 무슨 말을 더 하려 한다. 나는 손을 들어 제지하며 단호하게 말했다.
“나 담배 피울 거야.”
“안 피워도 되잖아!”
“그런 게 어디 있어. 너 피우고 싶은 대로 피워. 나도 담배 피울 테니까.”
“아, 그래도. 재현아.”
“왜 너만 되고 나는 안 된다는 거야. 저리 가.”
나는 어이없기도 하고 귀찮아서 손을 저었다. 아예 안전띠까지 끌어다가 채우고 약 올리듯 말했다. 출발 안 하냐고. 무슨 말이라도 하려는 듯 입을 움찔거리던 정지운은 내 여유로운 태도에 할 말이 없는지 입술만 짓씹었다.
뭐 이따위 것이 협박이 되나 모르겠다. 진짜 웃긴다. 자기가 담배를 피우면 나도 피울 수 있는 거지. 너도 키스할 때마다 연기 맛이나 느껴봐라.
정지운은 짜증스럽게 몸을 돌려 시동을 걸더니 툭 내뱉는다.
“나 안 피우면 너도 안 피울 거야?”
“피운다며.”
“그만하자. 안 피울 거야?”
재차 물어오니 할 말이 없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안 한다면. 나도 뭐. 애초에 피우지도 못하는걸.
내 대답을 보자마자 거칠게 출발한 차는 다시 도로로 나갔다. 이번에는 빨간불에 걸리는 것 없이 쭉쭉 나아간다. 어디로 가는지 길을 한 번 보고 도로 조수석에 깊숙이 기대앉았다. 자기 집으로 가는 모양이다. 나도 지쳐서 어디 갈 기운이 남아있질 않아 아무 말도 안 했다.
도로를 달려 지하 주차장에 도착한 우리는 별말 없이 차에서 내려 함께 집으로 올라갔다. 정지운이 묵묵히 앞만 보고 서 있으니 나도 할 말이 없어 휴대폰만 만지작거렸다. 거실에 들어오자마자 정지운은 뒤를 따르던 나를 돌아보며 불쑥 손바닥을 내밀었다. 뭔가 싶어 내려다보고 있으니 눈짓한다.
“담배 줘.”
“너는.”
“줄게.”
그러고는 메고 있던 가방의 지퍼를 열고 아래까지 손을 넣어 더듬는다. 담배가 나왔다. 깊숙이도 넣어놨다. 그것을 손바닥 위에 쥐고는 꽉 힘을 줘 구겨버린다. 혹시라도 다시 펴서 피우는 건 아닐까 했는데 손아귀에 강하게 힘을 줬는지 찌그러져 동그란 모양이 돼버렸다.
그것을 보고 나는 패딩 주머니 안에 넣어놨던 담배를 꺼내 그 위에 올렸다. 내가 올려둔 담배를 보고는 눈썹을 치켜 올리며 뭐라고 한다.
“독한 것도 피웠네. 사람 진짜 미치게 한다.”
“독해? 모르겠던데.”
“너 앞으로 피우기만 해봐.”
“너나.”
“안 피워.”
짜증이 가득 섞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대답은 마음에 든다. 삐져나오는 웃음을 참고 다시 한 번 건드렸다.
“안 피운다더니 피웠으면서.”
“너야말로 없는 동안 피우면 가만 안 둔다.”
“가만 안 두면 뭘 어쩌려고.”
“알고 싶어?”
“아니.”
뭔지 대충 예상은 되기에 재빨리 발뺌하고 모르는 척했다.
저녁은 냉장고에 있는 음식들로 대충 때운 뒤 소파에 늘어져 토크쇼를 틀었다. 예능 프로로써 본다기보다는 정지운이 이야기해주는 뒷이야기를 듣는 게 더 재밌다. 소파에 나란히 앉기 전에는 주방을 탈탈 털어 온갖 초콜릿과 사탕을 바구니에 쏟아붓다시피 해서는 가지고 앉았다. 이 집에 이런 게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해봤는데, 의외로 군것질거리가 많다.
내가 먹으려고 가져온 건 아니다. 아까 쓰레기통에 담배를 털어버리듯 넣고 꾹꾹 밟기까지 하던 정지운이 부탁한 게 있어서 그렇다. 나는 손에 쥐어진 사탕을 까서는 입안에서 녹여 먹다가 티브이를 손가락질했다. 방금 지나간 남자 아이돌을 가리키는 거다.
“쟤 진짜 성연주랑 만나?”
“성연주가 양다리 걸려서 헤어졌어.”
“성연주가? 안 그래 보이더니.”
“너는 왜 그렇게 사람 보는 눈이 없냐.”
“내가 뭘.”
“성연주는 믿으면서 정작 나는 안 믿었잖아. 이렇게 말을 잘 듣는데 말이야.”
또 시비다. 포도 맛 사탕을 입안에서 굴리다가 와드득 소리가 나도록 깨물어 먹었다. 정지운이 자연스럽게 내 턱을 쥐고 자기 쪽으로 얼굴을 돌린다. 입술이 겹쳐지고 혀가 들어왔다. 입 안에 남은 단맛을 훑고 혀를 빨아온다. 깊어지는 입맞춤에 고개가 자꾸 젖혀진다. 집요하게 따라와 타액을 섞었다. 입천장과 예민한 부분을 건드릴 때마다 아랫배 어딘가가 간질거린다. 멍한 머리로 혀를 움직이는데 천천히 입술이 떨어졌다. 다시 자세는 바로 되었다. 기대앉아있는 내 손바닥에 사탕 하나를 더 쥐여준다.
아까부터 내게 시키고 있는 게 이거다. 자기 입이 심심하니 대신 먹어달라고. 그러면 키스로 단맛만 훑고 지나간다. 사탕을 두 개째 먹었는데 이게 무슨 미친 짓인가 싶기는 하다. 손바닥에 올라온 사탕을 쥐었다 펴며 물었다.
“그냥 이거 하나는 먹어.”
“먹으면 끝없이 들어가. 이번 촬영 끝나면 여행 가자.”
“어디.”
“글쎄. 미국 갈까.”
“뭐?”
“미국 가서 기름기 있는 거, 단 거, 짠 거 다 긁어 먹고 오는 거야.”
장난일까. 장난이겠지. 에이. 사탕을 안 먹고 그냥 쥐고 있으니 옆에서 채근한다.
“그거 먹어줘.”
“싫어. 너무 달아.”
“너 혹시 담배 생각나냐.”
“아, 아니라고. 너 안 피우면 나도 안 피워.”
참나. 의외의 방향으로 풀린 일이 웃기다. 매일 전화할 필요도 없이 그냥 내가 담배 피우겠다고 하면 되는 거였군. 물론 그 기저에 깔린 이기심을 생각하면 기가 막힌다. 자기는 되고 나는 안 된다고 생각한 건가.
말도 안 되는 이기심에 화가 나야 되는데 기분이 풀리는 나도 중증이다. 어쨌든 그만두지 않을 것 같던 담배를 단번에 버리는 걸 보니 기분 좋기는 하니까. 티브이에 집중하려는데 또다시 턱이 들렸다. 입술이 쪽 닿았다 떨어진다. 나는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나 아직 안 먹었는데.”
“핑계지.”
“뭐? 진작 말하지. 아, 너무 달았어.”
손에 들려 있던 사탕을 옆에 내려놓고 티브이로 시선을 돌렸다. 티브이를 보다 피식 웃음을 흘리는데 불쑥 또 묻는다.
“너. 혹시……,”
“그만. 제발 좀 그만.”
아, 조금만 더 하면 짜증날 거 같아. 기색을 읽었는지 정지운은 내게 몸을 기대곤 티브이로 시선을 돌린다. 조용해지고 나서야 티브이의 소리가 제대로 귀에 들어온다. 이제야 편안한 저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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