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ver after? (8/14)

Ever after?

그럼 그렇지.

이렇게 쉽게 행복해질 리 없었어. 해피엔딩이라고 이야기를 마치기에는 너무 일렀던 것이다.

우리가 정식 연애를 시작한 지 두 달째. 한 달이 되기에는 며칠 부족한 거 같기도 하고. 어쨌든 시간은 흘렀다. 거침없이 흘렀다. 문자 하고, 전화하고, 만나고, 다투고. 남자다 보니 하는 말은 편하고 욕이 섞여 나올 때도 있었다. 다 괜찮았다. 

수연이와의 만남도 의외로 싱거웠다. 금요일 저녁. 삼자대면을 하는 일식집의 칸막이 방 안에서 수연이는 팬 모드에 발동이 걸려 모든 말을 버벅거렸다. 정지운은 내 앞에서 오랜만에 연예인 같은 아우라를 연기하며 긴 다리를 꼬고 앉았다. 선글라스는 벗지도 않았다. 나도 다시 깨달았다. 그랬다. 나와 만나고 있는 이놈이 요즘 드라마도 준비한다던 놈이었지. 

저녁식사를 마치고 블래스트 이야기, 민석이 형 이야기, 연예계의 뒷이야기 등등, 가십으로 자리를 즐겁게 해준 정지운은 무려 집 앞까지 수연이를 데려다주기마저 했다. 뒷좌석에 탄 수연이가 혹시 차 안에서 셀카라도 찍지 않을까 내가 다 신경이 곤두섰건만,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더라. 차가 멈추고 내릴 때 나에게 인사하는 둥 마는 둥 하면서도 정지운에게는 몇 번의 인사말을 했는지, 원. 

조심스러운 손길로 뒷좌석의 문이 닫히고 차 안은 조용해졌다. 핸들을 쥐고 있던 손가락이 선글라스를 코끝에 걸쳐지게 내리고 나를 지긋이 응시했다. 수연이가 나가고도 분위기를 유지하려는 태도에 나는 허벅지 위에 올린 손을 꽉 주먹 쥐었다.

“왜 그렇게 봐.”

“재현아.”

“어.”

“우린 이제 뭐 할까.”

“어……, 밥 먹을까?”

말하자마자 우리가 방금 일식집에서 나온 것이 기억나버리고 말았다. 탱글탱글한 회를 잘만 주워 먹어놓고 이런 말을 하다니. 나의 큰 실책이다. 아니나 다를까 잘생긴 미간이 좁아진다.

“밥은 내일 아침에 먹어.”

“그럼 영화 볼까?”

“월요일에도 보고 수요일에도 봤어. 우리 상영 중인 영화는 다 봤을걸.”

아마 그것도 맞을 거다. 뭐할 거냐고 물어볼 때마다 내가 항상 영화를 보겠다고 했으니, 이제 다 볼 때가 되기도 했겠지. 하지만 아직 내게는 부족했다. 대한민국의 영화계가 이렇게 좁을 줄이야. 남아있는 영화가 더 없을까. 아니면 산책이라도.

“한강 야경 보러 가자.”

“그거 지난주에 봤거든?”

“그럼… 드라이브…….”

스스로 운전할 것도 아닌 나는 점점 목소리가 작아졌다. 운전면허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타고 있는 이 랜드로버를 몰기에는 실력이 부족하다. 부족해도 한참 부족하다. 갑자기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는 궁금증이 치밀었다. 혹시 내가 이 차를 운전해보고 싶다고 하면 주기는 할까. 그리고 운전하다가 어디 박아버려도 봐줄까? 실천해볼 생각은 한 톨도 없지만, 그냥 궁금하다.

하지만 분위기는 그런 궁금증을 슬쩍 물어볼 여유조차 주지 않고 흘러가고 있다. 내 말을 묵묵히 듣고 있던 정지운은 손가락으로 선글라스를 천천히 벗어 차 핸들 너머 실내 보드 위로 휙 던졌다. 타가닥 하는 소리와 함께 선글라스가 가볍게 튕기며 안착했다. 선명한 눈매로 나를 물끄러미 보며 손이 가까이 왔다. 의도적으로 내 허벅지 위를 한 번 쓸고는 손등 위로 올라온다. 내 연애 경험이 부족하다고 생각해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지만, 요즘 좀 밀리는 느낌이 든다. 거의 확신에 가깝다.

“윤재현.”

“응.”

“호텔 가자.”

“왜?”

“너 자꾸 모른 척할래?”

“무슨 말이야. 나 진짜 모르겠는데.”

온 힘을 다해 순수한 표정을 연기하자 정지운은 입 모양으로 뭐라 중얼거리더니 몸을 내 쪽으로 기울였다. 뒷덜미가 덥석 잡혀 가까워졌다. 불만으로 똘똘 뭉친 눈동자가 바로 앞까지 디밀어지고 입술이 맞물렸다. 저항하지 않고 입을 열었다. 다소 거칠게 입안을 헤집었지만, 그래도 안심이 되었다.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여기서 넘어가 준다는 뜻임을 알아서 그렇다.

그래, 이게 문제다. 정지운은 자꾸 나와 자고 싶어 한다. 그냥 순수하게 잔다는 거 말고 진짜 모든 걸 해보자고 이러는 거다. 그때마다 심장이 깜짝깜짝 놀라곤 한다.

이 문제에 대해 생각해보자면 또 하나의 갈등 요소가 생기는데, 바로 서로가 인식하고 있는 연애의 시간이 다르다는 점이다. 우리가 연애를 시작한 시점을 정확하게 짚어보라면 나는 두 달 전이라고 할 것이다. 당연한 선택 아닌가. 그전까지 나는 치열한 고민을 거쳤고 그 날에서야 겨우 마음을 다잡았는걸. 

그런데 정지운은 그 시점을 한참 전으로 잡고 있다. 뭐라더라. 내가 분명 넘어왔는데도 안 넘어왔다고 박박 우긴 거라고 말이다. 예전에 했던 것도 다 데이트로 봐야 한다고 주장한다. 웃기지도 않는 소리다. 

어쨌든 그래서 처음 자자고 했을 때 내 대답은 ‘내년에’였다. 거기에서 정지운이 어떤 반발을 했을지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예상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거다. 나는 아직도 굳게 결심 중이다. 내년이야. 내년이라고.

결심을 되뇌는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혀가 아프게 깨물렸다. 무릎 뒤쪽 어딘가가 간질거리는 것만 같다. 다시 말하지만 얘는 연애를 도대체 얼마나 많이 해본 걸까. 가끔 이런 의문이 끼어들었지만, 아직 묻지는 못했다. 입술이 떨어지고 내 뒷목을 다시금 꽉 잡았다 떨어지며 투덜거린다. 차 시동이 걸렸다. 부드럽게 운전이 시작되자 안심한 내게 물어온다.

“무슨 생각했어.”

“키스 어떻게 할까.”

“차라리 그냥 해.”

“응.”

그리고 우리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차는 내 자취방 쪽으로 가는 중이다. 나는 정지운과 뭘 더 할 수 있을지 열심히 생각해봤다. 하지만 늦은 밤 이 시간에 뭘 할 수 있는 게 없다. 농담이 아니라 상영 중인 심야 영화는 다 봐버렸고 어딜 산책하기에도 늦은 밤이다. 

사실 낮이라고 딱히 할 만한 게 있는 것도 아니다. 정지운은 얼굴을 가리고 있어도 가끔 알아보는 사람이 있었고 사생이 붙을 때도 있었다. 내가 남자라서 별문제는 없지만, 그래도 데이트라는 모양새의 무언가를 하거나 사람이 많은 곳은 갈 수 없었다. 서점에 가거나 피시방을 간다는 생각은 해본 적도 없다. 그래서 선택지가 어렵다. 

연예인들이 연애하려고 오피스텔이나 집을 빌린다고 할 때 가지가지 한다 싶었는데, 직접 만나 보니 그 이유를 알겠다. 밖에서 무언가 할 수 있는 게 없다. 하지만 나는 정지운과 아직 밀실에 들어갈 용기가 부족하다. 자꾸 깔아뭉개고 괴롭혀서 얘네 집도 안 가는데 가긴 어딜 가. 아, 진짜 우리 뭐하냐. 술이라도 마셔?

내 고민이 무색하도록 차는 거침없이 달려 자취방 앞에 도착했다. 나는 꾸물꾸물 안전벨트를 벗으며 시간을 끌었다. 이번 주말에는 집에 다녀올 예정이고 다음 주는 둘 다 시간이 맞지 않아 한 주 내내 볼 수가 없다. 한동안 얼굴 보기도 어려운데 수연이를 끼워서 만나고. 나 내가 생각해도 좀 별로다. 괜스레 꾸물거리며 내리는 시간을 늦춰보려 했다.

“재현아, 너 다음 주는 스터디 저녁마다 있다고 했지?”

“응.”

“주말은.”

“없어.”

“주 중에 시간 되면 얼굴이라도 잠깐 보고…….”

거기서 천천히 말을 늘이던 정지운이 나를 보고 평소 같은 표정으로 물었다.

“주말에 여행 갈래?”

“여행?”

“너 월요일은 수업 없잖아.”

“그…렇지.”

“주말에 일정 없고.”

“응.”

“그럼 여행 가자. 데이트할 것도 다 했고.”

“어딜 가게?”

내 당황스러움이 안 보이는 건지, 아니면 못 본 척하는 건지. 정지운은 별거 아니라는 양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는 검색을 한다. 검색 키워드는 서울 근교 여행지. 

여행을 간다고? 진짜? 그래, 뭐 시간이 있고 차도 있고 갈 수 있기는 한데. 섣불리 대답 못 하고 머뭇거리는 내 뺨에 가볍게 입술이 닿았다 떨어진다. 아직도 얼떨떨한데 가까이 들이밀어진 얼굴이 어리광부리듯 내게 문질러오며 말한다.

“평일 동안 할 일 다 해놔. 알았지?”

“여행 진짜 갈 거야?”

“응. 같이 놀다 오자.”

이번에는 양 볼이 꽉 잡혀 얼굴을 마주했다. 나를 보는 눈빛이 더할 나위 없이 촉촉해져서는 물었다. 안 되냐고. 나도 모르게 대답이 나가는 것을 귀로 들었다.

“안 될 건 없지만…….”

“그럼 가는 거다. 좋은 데 찾아둘게.”

눈웃음치는 화사한 얼굴에 마주 웃었던 것 같기도 하고. 그렇게 나는 언제 열렸는지 모르는 차 문을 열고 땅에 발을 디디고 섰다. 머리를 긁적거리고 있는데 그사이 나를 내려둔 차는 저 멀리 골목을 돌아 사라졌다. 얼떨떨함은 좀처럼 가시지 않아서 발이 떨어지지 않는다. 여행을 가자고. 그래. 여행 좋지. 여행. 못 갈 건 없는데.

그런데 왜 이렇게 불길할까.

그 불길함의 실체를 알 것만 같으면서도 애써 무시했다. 앞으로도 무시할 거다. 알고 싶지 않기 때문에 그렇다. 이렇게 서 있어봤자 달라질 것은 없기에 터덜터덜 걸어 건물의 유리문을 밀고 들어갔다.

사회적으로 인정되는 함의라는 것이 있다. 누구나 이러한 뜻이 내포되어있을 것이라 생각하는 그런 것 말이다. 아이를 낳았다고 하는데 고추를 걸어두면 아들인가 보다 하고, 오랫동안 연락이 안 되던 사람이 갑자기 친한 척 연락하면 청첩장을 주려나 보다 하는 그런 거 말이다. 그리고 연인 간에 여행을 간다면 무엇을 할까. 여기에도 누구나 동의할 만한 함의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의 이 불안감은 정당한 것이다. 암, 그렇지. 

그래. 역시 거절하고 다음에 가자고 해야겠어. 나는 저도 모르게 책상을 주먹으로 쾅 내리치며 결심했다. 지난주 금요일부터 오늘 수요일까지. 고민하다 나온 결론이 마음에 들었기에 그만 행동으로 드러나 버린 것이다. 좁은 스터디 룸 테이블에 둘러앉은 다섯 명의 시선이 내게 모였다. 나는 퍼뜩 정신이 들어 가볍게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잠깐 다른 생각이 들어서요.”

“재현이 너 나 때문에 빨리 끝난다고 지금 시위해?”

“에이. 아니에요, 누나.”

분위기는 가벼운 말장난과 웃음으로 무마되었고 다시 스터디의 굴레로 빠져들었다. 낭랑한 수진 누나의 목소리와 함께 나는 시선을 테이블에 내려둔 프린트물에 집중했다. 시사 상식은 매주 이렇게 상식 같지 않은 것들을 내게 가르치려 한다. 그래도 이 스터디는 시사 상식을 빙자한 가십거리도 이야기하며 재미있는 편이다. 토익 스터디 날은 매일 아침 시간을 되돌려버리고 싶을 지경이지만……. 

아, 어쨌든. 오늘은 나름 즐거운 스터디 날이건만, 수진 누나가 빨리 가야 할 곳이 있다며 스터디를 일찍 나가겠다고 했다. 그 결과 우리는 은근슬쩍 스터디 끝내는 시간을 한 시간 정도 당겼다. 즐거운 스터디라 해도 하기 싫은 건 싫은 거다. 

스터디가 끝나고 사람들은 짤막한 인사를 하고 한 명씩 방을 나갔다. 옆에 있던 영한이가 가방을 둘러매고 나가기 전 앉아있는 내 어깨를 툭 치더니 물었다.

“저녁 안 먹어?”

“약속.”

“겁나 바쁘네. 알았어.”

그렇게 마지막 한 명까지 보내고 나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백팩을 멨다. 그리고 휴대폰을 꺼냈다. 요즘 생긴 새로운 버릇이다. 사람들 다 나가고 나서 휴대폰 열어보기. 정지운이 가끔 이상한 소리를 할 때도 있고, 옆에서 휴대폰을 들여다봤다가 혹시라도 알아볼까 걱정돼서 생긴 버릇이다. 

밤이라 조용해진 건물을 나오며 문자를 남겼다. 아직 스케줄이 끝나지 않은 모양인지 답이 없다. 조용한 학교를 걸어 내려가며 약간 싸늘한 팔을 문질렀다. 날이 점점 추워진다. 길을 걷다 올려다본 주황색 가로등 빛을 받은 나뭇가지들이 앙상하다. 언제부터 이렇게 된 것인지 기억이 안 난다. 시간이 벌써 이렇게나 흘렀다. 

자취방으로 돌아와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면서 휴대폰을 봤는데 아직 답장은 오지 않았다. 나는 백팩을 벗어 책상 위에 휙 던지고 벽의 거울을 봤다. 얼마 전 자연스럽게 정리한 머리카락은 아직 모양이 잘 잡혀 있다. 새까만 색 말고 다른 색으로 염색할까 했는데 말려서 그만뒀다. 얼마 전 만났을 때 머리카락을 한참 만지작거리더니 내 눈동자 색이 짙어서 그냥 검은 머리가 어울릴 거라고 조언해준 것이다. 

찬바람이 불어오면서 건조해진 피부는 얼마 전부터 스킨과 로션을 챙겨 바르고 있다. 이것도 정지운이 내 방을 한번 둘러보더니 안겨주고 간 거다. 거울 안의 남자와 천천히 눈을 깜빡이며 마주 보았다. 눈 코 입, 다 제자리에 잘 있다. 입고 있는 흰 티셔츠에 얇은 카디건도 멀쩡하고. 짙은 색 청바지도 이 정도면 된 거다. 

나는 휴대폰을 꽉 쥔 채 침대 위로 풀썩 쓰러지다시피 해서 누웠다. 정지운을 보러 가기 전에 잠깐만 눈을 붙일 생각이다. 휴대폰을 들어 답장 없는 문자를 꾹꾹 눌러 보내뒀다.

[나 잠깐 자고 있을게. 이따 보자.]

그리고는 모로 누워 잠시 눈을 감았다. 진짜 잠깐만 자고 일어날 생각이었다.

눈을 번쩍 뜬 것은 잘 자고 있던 와중에 불쑥 생각이 튀어나왔기 때문이다. 나 지금 얼마나 잔 거지? 하고. 

순간 온몸에 찬물을 뒤집어쓴 듯 오싹해졌다. 정신이 번쩍 들며 급히 몸을 일으켰다. 온 방 안은 캄캄하다. 물론 밤이니까 캄캄한 건 맞지만, 보통 깊은 밤이 아닌 것만 같은 느낌이 강렬했다. 나는 침대 위를 더듬거려 휴대폰을 찾았다. 손끝에 걸리는 것을 급하게 열어보자마자 액정의 첫 화면에 뜬 것은 부재중 전화의 숫자였다. 부재중 전화. 12통. 나는 절규했다.

“아아악! 왜! 왜 안 일어났지?”

미친놈의 휴대폰. 왜 안 울려? 설정을 확인해보니 무음이었다. 이런 제기랄. 스터디 하면서 무음 해둔 걸 잊고 있었구나. 액정 구석에 자그맣게 떠 있는 시간이 보인다. 밤 11시 38분. 하루가 지나기까지 30분도 안 남은 시간. 

나는 떨리는 손가락으로 정지운에게서 온 카톡을 열어보았다. 심장이 오그라들다 못해 폐 속의 공기도 부족해지는 기분이었다. 나가 죽자, 윤재현. 모양새만 체크하고 자면 뭐하냐. 이렇게 처늦어서는. 

[재현아]

[자?]

[너 전화 안 받아?]

[거의 다 왔다]

[윤재현씨]

[일어나면 전화해라]

[아직 안 일어났냐?]

나는 정말 초조한 마음이 되어 창문으로 다가가 문을 열었다. 밖은 어둡다 못해 캄캄하다. 그리고 부디 없길 바라던, 이렇게나 간절히 바라는 정지운의 차가 저 구석 가로등 아래 주차되어있는 것을 보고 입에서 이상한 소리가 나왔다. 휴대폰마저 내던지고 급하게 운동화를 구겨 신었다. 대체 왜지. 왜 아직 기다리고 있는 거지. 차라리 쌍욕을 하고 가지, 왜!

어떻게 내려온 것인지 모르고 계단을 달려 내려왔지만, 유리문을 어깨로 확 밀고 나가는 순간 나의 걸음은 급박하게 느려졌다. 뒤축을 꺾어 신은 운동화가 불편해서는 결코 아니었다. 그냥…… 가기 무서웠다. 정지운이 무슨 지랄을 떨지 몰라서. 

정말 쪽팔리지만 조금 무섭다. 오래전에 극복했다고 생각했던 회피 욕구가 막 들면서 지금 당장 침대에 도로 드러누워 거짓말을 하고 싶었다. 아팠다. 갑자기 급체를 했다 등등, 그런 거짓말 말이다. 가기 싫은 약속이 생기면 아플 예정인 그런 기분처럼. 

하지만 나는 차마 그러지 못하고 느릿하니 차를 향해 걸어갔다. 가면서 최대한 고개를 숙이고 미안한 기운을 온몸으로 내뿜었다. 살짝 고개를 들어 보니 정지운은 운전석에 기대앉아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다가 마침 나를 봤다. 손가락질을 까딱까딱한다. 나는 보이지 않는 줄에 질질 끌려가듯 차로 다가가 조수석을 열었다. 그리고 몸뚱이를 그 조수석에 엉거주춤 앉히고 문을 닫았다. 

차 안은 무슨 노래인지 모르겠는 재즈가 흐르고 있었다. 심리적 안정을 위해 틀어둔 게 아닐까 싶은 재즈는 나긋한 여자의 목소리가 노래한다. 차마 옆을 보지도 못하고 차 앞 유리 밖의 골목을 보며 기어들어가듯 사과했다.

“미안해.”

“지금까지 잤냐?”

“응…….”

헉. 갑자기 어깨 위로 손이 탁 올라왔다. 탁탁 두드리는 손이 언제 돌변해 멱살을 잡을지 몰라 무서웠다. 가뜩이나 바쁜 와중에 애인 놈 집 앞까지 찾아왔는데 자느라 안 나오다니. 자꾸 변명이 나왔다.

“그냥 올라와서 문 두드리지 그랬어.”

“집 오지 말라며. 사람들이 알아보는 거 같다고.”

……아씨. 도대체 언제부터 내 말을 그렇게 잘 들었다고 두 시간이나 기다리면서 분노를 무럭무럭 키우냐. 또다시 할 말이 없어졌다. 어깨를 툭툭 두드리던 손이 뒷목을 감싸 꽉 눌러 잡았다. 키스할 때와는 전혀 다른 악력이다. 힘으로 버티려니 감정이 풍부한 목소리가 귓가 가까이 들렸다.

“우리 재현이. 내가 강원도에서 촬영 끝나고 여기까지 달려와서 두 시간 기다렸는데 얼굴 안 보여줄 거야?”

아주 다정하게 자신의 노력을 강력히 주장하며 내 과오를 짚어주는 문장이다. 나쁜 놈. 젠장. 그리고 나는 더 나쁜 놈이지. 나는 삐걱거리듯 천천히 고개를 들어 정지운을 돌아봤다.

웃고 있었다. 웃고 있기는 한데 평소엔 도톰한 입술이 얇아질 정도로 턱에 힘을 꽉 주고 웃는다. 눈웃음이 그린 듯이 예쁘기는 한데 눈꼬리가 이상하게 어색하다. 주저하지 않고 바로 외쳤다.

“미안해. 잘못했어.”

“아니야. 우리 재현이, 피곤하면 잘 수도 있지.”

“진짜 미안하다니까.”

“괜찮아.”

“그냥 화내면 안 돼?”

나는 내 뒷덜미를 잡고 있는 팔을 매달리듯 끌어안았다. 그냥 화내줘. 내가 다 잘못했다. 하지만 정지운은 깊은 감정을 숨기며 단조롭게 말을 되풀이했다. 많이 피곤하냐고. 혹시라도 내가 피곤하다고 대답하면 평생 누워 있게 만들어줄 성싶은 표정이라 진짜 무서웠다. 

내가 얼마나 얌전하게 정지운의 잔소리를 들었는지에 대해서는 굳이 이야기할 필요가 없을 거라 생각한다. 너는 어떻게 된 애가 연락이 항상 이 모양이냐, 잘하는 짓이다 등등. 굳이 여기에서 무슨 말을 더 끼얹어 욕먹을 필요는 없었기에 입을 꾹 닫고 미안한 표정을 유지했다. 

게다가 사실관계가 그렇다. 바쁜 사람을 두 시간이나 기다리게 해놓고 무슨 말을 하겠어. 삼십 분가량을 욕먹고 드디어 잔소리가 마무리될 기미가 보였을 땐 좀이 쑤셔 견딜 수 없을 지경이었다. 이제 다 지나갔나 보다, 휴우. 드디어 마무리 같은 문장들이 나온다.

“앞으로 휴대폰 좀 잘 보고. 어?”

“응. 미안해.”

“됐다. 야. 들어가.”

“가게?”

“너 어디 넣을 서류 많고 바쁘다며. 주말에 길게 봐.”

“아…….”

“어디 갈 데 생각 안 했으면 동해 가자.”

아, 맞다. 여행. 오늘 만나면 여행 거절할 생각이었는데. 나는 정지운의 눈치를 살폈다. 있는 짜증을 다 털어낸 덕분에 이제 더 이상 성질 낼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여행을 거절해도 되는 분위기인지는 모르겠다. 얘는 휴대폰으로 무슨 바닷가 하나를 검색해서 슥슥 손가락으로 올려 보는 중이다. 어두운 차 안에서 훤한 휴대폰 액정 빛이 정지운의 얼굴을 비춘다. 내가 계속 힐끗거리고 있으니 시선이 느껴졌는지 돌아본다. 

“왜. 다른 데 어디 가고 싶어?”

“아니.”

“그런데 왜 그런 표정이야.”

“아. 그냥.”

“웃어.”

웃음. 그렇지. 기뻐해야지. 나는 작위적이다 싶도록 활짝 웃었다. 그런 내 표정을 물끄러미 보다가 고개를 휙 돌려 다시 휴대폰에 관심을 준다. 나 스스로 작위적이라는 것을 느꼈으니 진짜 그렇게 보였을 거다. 나는 속내가 잘 안 드러나는 사람이라 자부하며 살아왔는데 정지운은 연기를 해서 그런지 내 심리를 바닥까지 다 긁어 보는 것 같다. 어떻게 말해야 할지 막막하다. 안 웃는다고 웃으라고 협박하는 것 봐. 내 멍한 반응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이렇게 말한다.

“바다 싫으면 강원도 산 좋은 데 가든가.”

“응.”

“내일 오전까지는 어디 갈지 말해줘. 창식이 예약하라고 시킬 거야.”

이게 어쩌면 마지막 기회가 아닐까. 나는 숨을 크게 들이쉬고 가슴을 부풀렸다. 그러고도 말이 쉽게 나오지 않아 숨을 도로 내쉬었다. 그리고 또 마음속으로 굳게 다짐한다. 윤재현, 너는 할 수 있어. 지금 거절 안 하면 너무 늦어. 

내가 물고기인 양 입술만 뻐끔거리고 있으려니 휴대폰을 내려두며 정지운이 돌아본다. 나는 다시 표정이 굳었다. 그런 내 꼴을 보고 정지운은 손을 들어 오른쪽 볼을 꽉 꼬집었다. 머리가 살짝 기운다. 정지운이 나를 물끄러미 보다가 손가락에 힘을 주더라. 눈살이 약간 찌푸려졌다. 아프다. 얼얼해지기 전에 손을 떼고 손바닥으로 슥슥 문지르며 묻는다.

“할 말 있어?”

나는 새로 옅게 컬을 넣은 정지운의 머리카락을 멍하니 보고 있다가 대답했다. 하여튼 잘생기기는 잘생겼지, 어휴.

“아니. 그냥.”

“할 말 있는 표정이잖아.”

“아니야. 집에 운전 조심해서 가.”

“알았어. 들어가.”

담백하게 인사하고 차에서 내렸다. 차 문을 밀어 닫고 천천히 집 쪽으로 걸었다. 걷다가 뒤를 힐끗 보았다. 정지운의 차는 골목을 빠져나가려 조금씩 속도를 올린다. 나는 현관 앞에 서서 빠져나가는 차를 마지막까지 지켜보다가 발걸음을 돌렸다. 늦게 나왔으니 나름대로의 성의를 보인 거다. 계단을 올라 방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한숨이 나왔다.

그래. 다 좋지. 나라고 왜 같이 여행을 가기 싫겠어. 하지만 가서 무엇을 할 것인가. 그게 문제다. 

연애를 하면서 언제까지나 손만 잡고 다닐 생각은 아니다. 할 일이 있으면 하고, 진도를 나갈 때가 되면 나가는 거지. 물론 그럴 수 있고 그렇게 할 예정이다. 연애는 나름대로 잘 진행되고 있고, 이렇게 시간이 흐르다 보면 여러 가지를 할 수 있을 거다. 이렇고 저런 거. 그런 것들. 내가 아무 생각 없이 놀러 가던 정지운의 집에 더 이상 놀러 가지 않는 이유. 키스 다음의 진도. 이런 거.

아, 여기서 정지운은 나더러 그, 깔리라고 대놓고 말한 적은 없다. 내가 마음의 준비를 위해 영상을 봤던 것이 문제지. 그나마 약하다는 영상을 어렵게 다운받아서 하나 보다가 닫았다. 침대에 엎드려 보다가 닫아버리고 곧장 잠들었는데 잠을 뒤척여 아예 바닥에 내려가서 자 버렸다. 내 마음은 아직 영상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았더라. 무엇보다 이게 정지운과 정신없이 키스하거나 스킨십을 할 때와는 느낌이 전혀 달랐다. 그래서 그냥 글로 공부했다. 공부할수록 깔리기는 싫었다.

마지막으로 그 집에 놀러 갔던 날 나는 집 안에 들어서자마자 말했다. 우리 앞으로 포지션은 어떻게 정할 거냐. 얼마나 비장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두 주먹 불끈 쥐고 결연하게 말하는 나와 달리 정지운은 그저 냉장고 안에서 생수나 꺼내 마시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하다가 깔리면 깔리는 거지 뭘 정하냐고. 자기가 위를 하겠다고 주장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김빠지게 대답해서 나도 잔뜩 긴장하고 있던 어깨가 풀렸었다.

“진짜?”

“어. 하다 보면 하겠지 뭘 정해.”

“나는 네가 위 한다고 고집부릴 줄 알았어.”

“네가 위에 올라오던가.”

물을 마시고 내려놓으면서 했던 그 가벼운 말이 어떤 결과가 되었는지는 별로 말하고 싶지 않다. 그 말이 맞기는 했다. 위를 할 거면 할 수는 있지. 할 수는. 

그런데 내가 도저히 그럴 능력이 되지 않는다는 아주 사소한 문제가 하나 있어서 말이다. 엎치락뒤치락하며 소파에 엉켰던 사이 내가 정지운의 위에 올라탈 수 있었던 것은 몇 초 정도뿐이었다. 자꾸 거침없이 손을 대오는 탓에 정신이 팔리면 그사이 몸이 돌려 눕혀지고 깔려 몸무게로 짓눌렸다. 키스하던 도중 손이 어디까지 들어와 만졌는지는……. 

그랬다. 그래서 그 집에 안 간다. 밀폐된 장소도 다 피했다. 나는 아직 자신이 없다. 나의 패배가 너무 확정적이다. 정지운에게 너 대체 얼마나 경험이 많아서 이렇게 능숙하냐고 외칠 뻔했는데, 그건 겨우 참았다.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였다.

∞ ∞ ∞

시간은 잘도 흘렀다. 아침에 비몽사몽하던 중 받은 전화에서 어딘가 간다고 하길래 알겠다고 대답을 하고야 말았다. 잠이 깨자마자 확인해보니 강릉 바닷가의 어디 호텔이었다. 나는 급박하게 주변의 즐길 거리를 찾아봤다. 해변도 있고 나름 시간을 보낼 곳은 많더라. 정지운이 훤한 대낮에 나갈 수 있는지는 가서 확인해봐야겠지만 말이다. 

그렇게 목요일이 순식간에 지나가고 금요일도 지났다. 나도 내가 도대체 무슨 정신으로 이틀을 보냈는지 모르겠다. 시시각각 지날수록 거절의 기회는 멀어졌고, 금요일 밤늦은 시간까지 책상 앞에 앉아 자소서를 조작해내던 나는 머리를 쥐어뜯었다. 자소서도 막막하지만 그보다 더 막막한 것이 나를 기다리고 있어서 그랬다. 새벽에 침대에 누워 뜬눈으로 밤을 새우다시피 하다가 겨우 일어났다. 

머리가 멍했지만 그 와중에도 옆으로 매는 검은색 가방에 짐은 이것저것 챙겼다. 청바지, 트레이닝복, 티셔츠 등등. 세면도구는 아마 있겠지. 샤워하고 나와 오늘 입을 옷을 주섬주섬 챙겨 입고 거울을 보았다. 눈가가 약간 충혈되어있다. 머리카락에 바를 것까지 챙겨 발라 차분하게 만든 뒤 가방을 메는데 휴대폰이 울렸다. 

전화를 받고 내려가자 찬 공기가 도는 아침 거리에는 사람이 없었다. 토요일 아침이니 더 그럴 만도 하다. 잔잔한 시동 소리가 들리는 차의 조수석에 오르며 가방은 뒷좌석에 휙 던졌다. 정지운은 깔끔한 청바지에 재킷까지 걸쳐 입고 왔다. 이른 아침인데 붓지도 않는지 턱선이 날렵하다. 안전벨트를 더듬거려 찾는 나를 보더니 말을 건넸다.

“안 잤어?”

“응. 자소서 쓰느라.”

“가는 동안 자.”

“운전하는데 옆에서 자면 예의 아니라던데. 사생 오늘 없었어?”

“새벽이라. 그리고 난 별로 안 붙어.”

일단 내가 남자이고 밖에서 손을 꼭 붙잡고 다니는 것도 아니기에 별 상관은 없지만, 신경 쓰이는 것이 사실이다. 그래도 확실히 정지운은 사생이 덜 붙는 편이기는 하다. 블래스트에서는 텐과 안준영이 사생이 제일 많이 붙는다. 사생도 만만하게 봐주는 쪽에게 붙는 법이다. 

정지운 같은 경우에는 사생에게 전혀 틈도 안 주는 스타일이다. 일부러 아예 못 따라 들어오는 룸으로 들어가 버리고, 차 동선이 제대로 나오지 않으면 외출도 안 하고. 이런 삶을 몇 년간 지속했더니 다 떨어져 나갔다고. 하긴. 뭐라도 건질 게 있어야 사생을 할 거 아닌가. 아직 가끔 따라붙는 애들이 있기는 한데 다른 연예인들에 비하면 새 발의 피라고 했다. 내가 봐도 그런 거 같기는 하다. 

차는 시원하게 뚫린 서울 도심을 달려 고속도로로 접어들었다. 그리고 나는 고개를 처박고 잠에 빠져들었다. 어깨를 흔드는 손에 눈을 번쩍 떠 보니 어느 건물의 지하다. 다급하게 자세를 바로 해 두리번거리는데 그런 나를 약간 한심하게 보며 혀를 찼다. 차는 시동마저 꺼져 조용하다.

“다 왔어.”

“어? 벌써?”

“올라가서 더 자라.”

차에서 내려 가방을 들고 쫓아가며 나는 손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혹시 침 흘리거나 그런 건 아닐까 싶어서. 다행히 그런 건 아니지만 잘도 구겨져 잤다 싶었다. 나보다 한 걸음 앞서 나가는 너른 등에 시선을 두고 걸었다. 얘는 이런 나를 보고 잘도 사귈 생각이 드나. 거기다 이렇고 그런 것도 하고 싶고? 

엘리베이터를 올라타고 밀폐된 공간에 갇혔다. 정지운은 재킷 앞주머니에 찔러뒀던 선글라스를 쓰고는 내게 물었다.

“얼굴 빨갛다.”

“아, 그래?”

“졸려서 그런가. 예약은 네 이름으로 해뒀으니까 카운터에서 이름 말해. 난 목소리 안 낼게.”

고작 그렇고 그런 생각 좀 했다고 얼굴이 붉어질 줄이야. 나는 손으로 뺨을 눌렀다. 몇 개의 층을 올라 로비에 도착했다. 넓은 로비는 유리로 된 벽 너머로 동해 바다를 마주한 채 세워져 있었다. 거기에 정신이 팔려 예약 사항도 제대로 확인을 못 할 뻔했다. 내 시선이 자꾸만 바다로 가려고 할 때마다 뒤에 서 있던 정지운이 등을 쿡쿡 찔렀다. 프런트의 여직원이 이런 어색한 행동을 보고도 내게 키를 내준 것이 용하다. 

체크인 시간으로는 일렀지만 다행히 방이 준비되어있다며 키를 건네받았다. 꽤 높은 층의 객실을 향해 다시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 방에 도착했다. 1610호. 문을 열고 들어간 호텔 룸은 한눈에도 호화롭다. 여기도 꼭 정지운의 집과 똑같이 생겼다. 말끔하고 훤하고 한 면이 전면 유리다. 

틈 없이 반질반질하게 깔린 원목 바닥을 디디며 안으로 들어가는데 양말 아래에서 매끈매끈한 게 느껴진다. 나는 이런 곳에 자주 와본 척 복도 끝 거실 소파에 앉았다. 내 뒤를 따라 들어온 정지운은 가방을 내 옆자리에 휙 던지고 소파 뒤 공간 중 하나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고개를 돌려 닫힌 문을 보고 있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소파의 정면은 흰 벽처럼 깔끔하게 일체형으로 들어간 빌트 인 가구다. 안에 뭐가 있는지 궁금했다. 길쭉한 문을 여니 전기포트와 에스프레소 기계가 있고, 그 옆의 서랍을 당겨보니 깨끗한 흰색 커피 잔이 들어있다. 

탁 소리가 나도록 빠르게 닫고 그 아래 서랍을 줄줄이 열어보았다. 에스프레소 캡슐. 그 아래는 뭔지 모르겠는 상자인데 꺼내서 옆면을 읽어보니 티백이다. 아래 서랍은 유리잔들. 맨 아래의 큰 문을 당겨 열었더니 미니바가 나왔다. 그제야 목이 마른 것이 느껴졌다. 차에 타자마자 기절하듯 잠들었으니 그럴 만도 하지. 

생수 하나를 꺼내 입에 물고 거실 안을 둘러봤다. 앉을 일이 없을 것만 같은 책상은 벽을 향해 있고 전면 유리창으론 훤한 바다가 끝없이 펼쳐진 뷰가 시야 가득 들어온다. 여기 오기 전까진 여행을 왜 가나 싶은 마음도 있었다. 쟤는 자기 집이 더 좋을 텐데 피곤함을 무릅쓰고 뭐하러 멀리까지 나가자는 걸까 싶은 궁금증들. 

하지만 유리 너머로 펼쳐진 짙은 청색의 바다를 바라보자니 속이 확 트이는 것 같다. 외국처럼 바다 밑이 흰 모래라 에메랄드빛으로 빛나는 건 아니지만, 물이 맑아 옅은 색인 부분과 아래 바위의 형태까지 분간할 수 있다. 그렇게 얼룩덜룩한 바다가 닿는 시야각 내에 가득하다. 아침에 희뿌연 안개가 껴 있던 서울과 달리 하늘도 훤하다. 햇살이 많이 들어와서 벽 쪽으로 걷혀 있는 암막 커튼을 당겨 약간 가렸다. 

욕실에 들어간 정지운은 아직도 안 나온다. 물소리도 안 들리고 간간이 달그락거리는 소리만 들리는데 뭘 하는지 모르겠다. 티브이를 틀 것도 아니고 더 이상 볼 것이 없는 거실을 지나쳐 그 옆의 복도로 들어갔다. 

문이 따로 없이 촘촘한 블라인드처럼 생긴 나무 벽이 반쯤 가로막혀 공간을 분리해뒀다. 안쪽은 침실이다. 침대가 놓여 있고 그 앞에 안락의자 하나와 티브이가 걸려 있을 뿐 다른 건 없다. 그리고 두 면이 다 유리 벽인 탓에 햇살이 가득 들어왔다. 둘 중 햇살이 더 많이 들어오는 유리창의 암막 커튼을 꼼꼼히 닫고 나서야 침대에 털썩 앉았다. 

아니나 다를까 침대가 하나다, 두 개가 아니라. 그래, 뭐 크게 기대도 안 했다. 저놈이 예약하는데 침대가 두 개일 리 없지. 

풀썩 드러눕자 몸이 녹아내리는 것만 같다. 차에서 잔 건 잔 게 아니다. 불편한 자세로 피로도만 오히려 높아졌지. 그렇게 다리까지 올리고 제대로 눕는데 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이제야 나왔나 보다. 나직하게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윤재현.”

“나 방에.”

발소리가 금세 이쪽으로 향한다. 나는 침대에 바르게 누워 그가 들어오는 것을 고개만 돌려 바라봤다. 한참 욕실에 있던 것 치고는 물기 하나 묻은 곳 없이 번듯하다. 재킷은 어디다 벗어 던졌는지 품이 맞는 셔츠 한 장만 입고 있다. 

정지운은 누워 있는 내 모습을 보더니 피식 웃고는 옆에 앉아 코를 꾹 누른다. 번개같이 손을 들어 손목을 잡아 치웠다. 손아귀에 잡힌 손목은 생각보다 뼈가 두껍다. 그는 내 짜증스러운 표정에도 개의치 않고 웃으며 내려다본다.

“잘 거야?”

“응. 어디 가야 되나.”

“아니, 자. 밤에 어두워지고 나가면 사람들 못 알아보고 더 좋지.”

“넌 뭐하게.”

“대본 보고 있을게.”

순순히 내 사이클에 일정을 맞춰주는 게 무언가 불안하다. 고개를 숙여 내 이마의 머리카락을 한 번 쓰다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간다. 나가면서 나머지 창문 하나도 꼼꼼하게 암막 커튼을 여며준다. 빛이 차단된 안락한 방에서 나는 양팔을 펴고 넓은 침대를 누리기 위해 준비했다. 그때 정지운이 화사한 미소를 지으며 뒤를 돌아보곤 한마디 툭 던졌다.

“밤에 안 자게 미리 자둬.”

멀어져가는 인기척을 느끼며 나는 놀라 경직됐던 양팔을 오므리고 조신하게 다시 자리를 잡았다. 왜 밤에 안 잘까, 왜. 밤은 자라고 있는 건데, 응? 손을 머리 위로 뻗어 굳은 목을 위해 베개를 바로 하면서도 불안감이 자라났다. 에이, 아닐 거야. 덤빌 거면 밤낮없이 지금 덤비겠지. 이렇게 자기 위안을 했지만 잠은 달아나버려 한참 동안 뒤척였다. 

오히려 잠이 온 것은 바깥의 거실에서 작은 티브이 소음과 인기척이 섞이고 나서였다. 엎드린 자세로 푹신한 베개에 얼굴을 묻고 얕은 잠에 빠졌다. 작은 생활 소음에 파도 소리도 부드럽게 섞여 녹았다.

엎드린 채로 자다가 몸을 뒤집고는 눈을 비볐다. 흰 천장이 보이고 일어나 앉으니 걷힌 암막 커튼이 보인다. 걷힌 이유는 이제 더 이상 햇볕이 들어오지 않기 때문이다. 노을도 지는 시간이 되도록 잔 모양이다. 알아서 깨울 줄 알았는데 아예 일어날 때까지 내버려 둔 것 같다. 

자리에서 일어나 크게 기지개를 켜고 밖으로 나갔다. 느릿하니 걸음을 옮기며 부은 얼굴이 괜찮은지 한 번 쓸어 만져보고 체크했다. 잘생긴 놈이랑 사귀려니 별게 다 신경 쓰인다. 여자와 만날 때도 이렇게 외모를 고민한 적이 없었는데. 

거실 소파에 앉아있는 뒷모습이 보이길래 옆에 앉았다. 보고 있던 대본을 테이블 위로 휙 던진 정지운이 손을 들어 내 머리카락을 누르듯 쓰다듬는다. 버릇이 된 행동 중 하나다.

“머리 다 떴다.”

“아.”

“이제 됐어. 나 들어가는 소리에 깼어?”

“아니. 그냥 일어났어.”

“잘됐네. 룸서비스 시켰어. 오면 깨우려고 했더니 알아서 일어났네.”

머리가 더 뜬 곳이 없나 만지작거리는데 정지운은 대수롭지 않게 말하곤 티브이를 본다. 저녁 드라마가 작은 소리로 방영되고 있다. 왜 보고 있나 했더니 정지운의 단 한 명뿐인 것으로 추측되는 친구가 연기 중이다. 여자 주인공 위주의 가족 드라마다. 이 시간대에 하는 그런 드라마 말이다. 결혼과 이혼, 집안끼리의 다툼, 약간의 막장과 화해, 감동의 도가니 뭐 그런 드라마. 테이블 위에 올라와 있는 두 개의 대본을 보다가 물었다. 지금 보고 있는 드라마와는 스타일이 전혀 다른 듯하다. 

“친구라서 보나 봐.”

“모니터링 해달래.”

“어때?”

“글쎄, 모르겠다.”

딩동, 벨이 울리고 음식이 도착했다. 내가 문을 열어주려 나가는 사이 정지운은 방으로 자리를 피했다. 혹시 알아볼까 신경 쓰이는 모양이다. 트레이를 미는 직원을 따라 들어오다 테이블 위에 놓인 대본을 보고 얼른 집어 들어 품에 안았다. 

직원이 밖으로 나가고도 조금 지나서야 거실로 나온 정지운은 아무 일도 없었던 양 소파로 와 앉았다. 나도 대본은 소파 아래 발치에 내려두고 대충 가까이 앉아 음식을 먹었다. 스테이크와 피자, 샐러드까지. 초록색의 풀이 가득 올라간 피자는 귀찮아서 손으로 들고 돌돌 말아 먹었다. 풀에서 특이한 맛이 난다. 싫은 건 아닌데 생소해서 천천히 씹고 있자 스테이크에 칼질을 하던 정지운이 내 먹는 모양을 보고 묻는다.

“맛 이상해?”

“아니. 이거 무슨 풀이야. 바질?”

“루꼴라. 맛없어? 그게 잘나간다고 했어.”

“맛없는 게 아니라 이렇게 많이 먹는 거 처음이야.”

얘는 한식이나 밥을 별로 안 먹는다. 냉장고에는 다이어트 음식이 종류별로 준비돼 쌓여 있고, 같이 먹을 사람이 없으면 그냥 그것만 꺼내 먹는 것 같더라. 그걸 먹고 운동 가고, 가끔 매니저가 피부과 끌고 가고. 

그걸 알고서는 데이트할 때마다 메뉴 선택권을 다 넘겼다. 평소에 닭 가슴살만 씹고 사는데 나랑 같이 먹을 때만이라도 먹고 싶은 걸로 고르라고 말이다. 덕분에 온갖 특이한 음식은 다 먹어본다. 일식, 네팔 음식, 포르투갈 음식 등등. 호주의 유명한 브런치 레스토랑 같은 데도 가고. 그 덕에 요즘 쓸데없이 입맛이 고급이 되어 걱정이다. 학교 앞 제육덮밥에 만족하던 과거는 이미 지나가 버린 지 오래다.

손에 들고 있던 피자를 다 먹고 스테이크를 몇 조각 입에 밀어 넣으니 자고 일어나서 그런지 입맛이 없어 더 이상 안 들어갔다. 음식을 치우고 소파에 늘어져 쉬었다. 한번 늘어지니 끝이 없다. 그사이 밖은 완전히 어두워져 바다와 하늘이 구별되지 않았다. 그제야 우리는 나갈 채비를 했다. 밤이 된 탓에 선글라스를 쓰기 어색해서 마스크로 대체했다. 마스크를 써도 딱 벌어진 어깨나 풍기는 분위기 때문에 사람들이 계속 돌아보지만 아예 얼굴을 드러내는 것보다는 나으니, 뭐.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오니 로비에는 사람이 꽤 돌아다닌다. 관광을 하고 이제 체크인을 하는 사람들 같았다. 고개를 살짝 숙인 채 걷는 정지운과 함께 로비를 가로질러 나왔다. 호텔 앞이 모래사장으로 연결되는 덕에 계단을 내려와 조금만 걷자 바로 흰 모래 위를 걷게 되었다. 운동화가 푹푹 빠진다. 사람이 없는 쪽으로 걸었다. 그래 봤자 아예 없는 건 아니지만, 근방에 높은 건물이 호텔 하나뿐이다 보니 빛이 별로 없다. 

나는 시원한 바닷바람을 맞으며 기지개를 켰고 정지운은 그제야 검은 마스크를 벗고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바닷물에 젖은 모래는 단단해서 걷기 편하다. 파도가 가볍게 치고 멀어진다. 호텔에서 멀어질수록 불빛도 멀어져 그런지 사람들이 없었다. 이제야 이야기를 나누기 편해졌다.

“너 너무 티 나.”

“뭐가.”

“나보다 네가 더 긴장하더라.”

“어떻게 긴장을 안 해.”

“가리고 돌아다니면 잘 몰라.”

“꼭 그렇지는 않을걸.”

얘 말이 아예 틀린 건 아니다. 요즘은 일반인들도 마스크를 많이 하고 다니는 터라 검은 마스크를 쓰고 아무렇지 않게 돌아다니면 그냥 모델이거나 연예인 지망생인가 보다 하고 넘기는 경우가 많다. 왜냐면 티브이로 정지운의 얼굴이 익었다 해도 실제 모습과 매치를 시켜 확신하기는 쉽지 않아서 그렇다. 

하지만 정지운은 데뷔하고 단기간에 사생들을 질려 나가떨어지게 해서 그런지 조심성이 없기도 하다. 그냥 언제나 주목을 끌고 다녀서 누가 자기를 돌아보거나 주목하는 데에는 둔감하다. 그러다 보면 가끔 알아본 게 분명한 시선도 섞여 있는데 말이다. 그런데 그런 것도 못 알아보고는 무시한다. 가끔 깜짝 놀랄 만큼 둔감한 모습들을 보면 연예인 하기 참 좋은 성격이구나 싶다. 

우리는 모래사장을 따라 한참을 더 걸었다. 주변이 다 어두워지고 사람들도 저 멀리 밝은 데에만 몇 명이 보인다. 이제 더는 불빛도 비치지 않지만 하늘의 별이 총총해 더 걷고 싶었다. 걷던 중 슬쩍 오른손을 잡아오는 손을 내버려 뒀다. 최대한 눈을 크게 뜨고 주변을 둘러봤는데 이게 보일 만큼 가까운 사람은 없다. 다시 말하지만 워낙 어둡기도 하고. 

손을 잡고 그렇게 몇 분 더 산책했다. 따뜻한 손을 잡고 있는데도 이상하게 속이 후련하다. 항상 남들 눈을 피해 다녀서 그런가. 밖에서 아무렇지 않게 함께 걷고 있다는 자체가 즐겁다. 파도 소리는 규칙적으로 밀려왔다 물러난다. 문득 정지운이 걸음을 멈추고 손을 잡아당겼다. 

“이제 돌아가자.”

정지운이 고갯짓하는 호텔 쪽을 보니 꽤 멀리 떨어지기는 했다. 꽤 정도가 아니라 많이 멀다. 산책이랍시고 무턱대고 걸었으니 그렇지. 환한 달빛이 정지운의 얼굴 윤곽을 비췄다. 나는 어둠에 묻힌 얼굴을 보며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말했다.

“좀 더 걸으면 안 돼?”

“왜.”

“좋아서.”

왜긴 왜겠어. 돌아가면 너는 마스크를 쓰고 나는 한 걸음 떨어져서 일행이되 일행이 아닌 것처럼 들어갈 테니까. 내가 좀 더 익숙해진다면 자연스러운 친구로서의 연기를 하겠지만, 아직 그 정도까지 연기가 몸에 익지 않아서 어색하다. 그래서 옆에 붙어있느니 차라리 한 걸음 뒤에 떨어져 걷는 것을 택한다. 

내 말에 정지운은 별 대답 없이 한 걸음 가까이 다가왔다. 손을 잡고 있던 팔이 허리에 감긴다. 상체를 뒤로 빼며 주변을 또 둘러봤다. 물론 아무도 없지만. 정말 없지만 혹시 모르니까 역시 불안하다. 

“미쳤냐. 들어가서 해.”

“아무도 없어.”

“그래도!”

“그만 빼라.”

막무가내로 등 뒤에 팔을 둘러 당기니 잠시 주춤거리다가 결국 꽉 끌어안겼다. 나는 팔을 어쩌지 못하고 꽉 낀 채로 가만히 있었다. 입술에 바로 뜨거운 숨이 닿았다. 고개를 숙여 키스하려고 하길래 깜짝 놀라 고개를 흔들었다. 입술이 억지로 비틀려 맞춰졌다. 이빨 어딘가에 살이 긁힌 거 같은데도 막무가내다. 

혀가 입안으로 들어오고 제 마음대로 활개를 치며 엉켰다. 다리가 움찔거렸다. 주춤거리고 물러나려다가 다리가 꼬여 쓰러지듯 뒤로 넘어졌다. 푹신한 모래가 엉덩이와 등에 느껴졌다. 넘어져 버린 나를 밀어붙이며 정지운은 막무가내로 다시 혀를 섞어왔다. 

차라리 누워 있으니 사람들 눈엔 제대로 안 보이지 않을까. 말도 안 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럴법한 생각이잖아. 그래서 그때부터는 코로 숨을 내쉬며 키스를 받았다. 

정지운과 하는 키스는 지나치게 자극적이다. 섞이는 타액이 목 너머로 넘어가고 입술이 아플 때까지 문질러진다. 입안을 자꾸 건드리는 혀도 정신이 없게 만든다. 무엇보다 큰 문제는 성적인 자극이 너무 강하다는 거지. 

쉴 새 없이 몸을 오가는 손이 어디를 만지는지 잘 모르겠다. 하지만 속옷 안이 갑갑해져 다시 다리를 움직였다. 위에서 눌러오는 몸도 열기가 뜨겁다. 그리고 자신의 성기 부근을 내 아래와 맞춰 자꾸 허리를 움직였다. 신음이 나올 때마다 그것마저 다 먹혔다. 

그렇게 정신을 놓고 입 맞추다가 얼굴을 들어 나를 내려다본다. 어두운 와중에도 옅은 색 눈동자에 열기가 갑갑하게 들어찬 것을 알겠다. 손에 묻은 모래를 턴 정지운이 내 얼굴을 만지작대면서 자꾸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

“여기서 하면 죽일 거지?”

“미쳤냐.”

“그러니까 왜 예쁜 소리를 해.”

“아, 일어나. 들어가자.”

“가서 섹스하자.”

이렇게 나올 줄 알았다. 할 말을 못 찾고 눈만 굴리다가 가볍게 몸을 밀어냈다. 일단 들어가자고 하면서. 그랬더니 힘으로 내 몸을 도로 꽉 누르며 밀어붙인다. 뒤통수가 모래사장에 눌려진다. 온 얼굴에 입술을 맞춰왔다. 코 옆, 눈 옆과 관자놀이 부근까지. 그리고 귀를 핥아 움찔한 몸이 움츠러드는데 그의 입술은 목까지 내려가 이로 아프지 않게 깨물었다. 속옷 안이 다시금 불쾌하게 갑갑해져 온다. 태극기. 애국가. 동해물과 백두산이. 넘어가지 않으려 안간힘을 다해 흥분을 가라앉혔다. 안온한 공간과 달리 밖인데도 흥분이 가라앉질 않는다. 미친 게 분명하지.

“내가 아까 잘 재웠잖아. 건드리고 싶어서 계속 왔다 갔다 했는데. 응?”

“진짜 안 건드렸어?”

“어.”

“뽀뽀 정도는 하지.”

“싫어. 너랑 할 때 처음부터 끝까지 다 같이할 거야.”

심장가에 대고 웅얼거리듯 말해서 그런가. 더 직격으로 오는 말이다. 어울리지 않게 어리광부리듯 내 가슴에 얼굴을 비빈다. 재현아, 제발 하자. 넘어가면 안 되는 걸 아는데도 꼬여내는 목소리가 너무 달콤하다. 목 안이 탔다. 나라고 싫다는 게 아니라…… 정지운과의 스킨십은 좋다. 주어지는 성감도 혀가 아릴 정도로 달다. 왜 싫겠어. 

일단은 되는 대로 고개를 끄덕였다. 고개를 묻고 있으니 모를 거라 생각했는데 득달같이 일어나 팔을 잡아 일으켰다. 몸에 묻은 모래도 서둘러 털어내 주고서 우리는 해수욕장을 가로질러 달리듯 걸었다. 그 와중에 답답한 열기가 자꾸만 몸을 괴롭혔다. 

돌아올 때는 거리 같은 걸 두고 걸을 정신이 없었다. 정지운은 몇 명의 사람을 지나치고 나서야 주머니 속의 마스크를 떠올렸고, 나는 그 옆에서 고개를 숙인 채 오히려 걸음을 빠르게 했다. 로비를 지나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그 짧은 사이에도 누군가 알아볼 것만 같았다. 방금까지 훤한 바닷가에서 얘랑 뒹굴었고 호텔 방으로 같이 들어갈 거라는 사실을. 

망할 놈의 방은 왜 그리 높은 층을 잡았는지. 초조함과 기대감이 속에서 배배 꼬여갔다. 끌어올려졌던 쾌감이 천천히 하향곡선을 그리며 초조함은 더 커져만 갔다. 진짜 해? 그래도 되는 거야? 싶은 감정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는 동안 부풀어 오른 불안감은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덮쳐오는 정지운과 함께 사라져버렸다. 문을 닫자마자 현관에서 엉킨 우리는 다시 키스했다. 숨이 모자라 고개를 돌리자 순순히 비켜주더니 목 부분이 당기도록 옷을 잡아 내린다. 드러난 쇄골 아래쪽 어딘가에 이를 세워 깨물었다. 아파서 피하려는데 살살 달래듯 피부를 빨아올리자 쓰라린 감각이 가시더니 간질거린다. 몸을 덮쳐오는 감각에 약간 웃음이 샜다. 복도에서 이러고 있는 것도 웃기고. 내 몸 위에 올라타 있는 정지운도 웃기고. 

내 웃음소리에 고개를 들고는 왜 그러냐는 눈빛으로 보는 정지운의 목을 끌어당겼다. 가까이 다가온 목덜미에 나도 입술을 맞추고 혀를 미끄러트렸다. 내 움직임에 따라 툭툭 튀는 정지운의 몸이 웃겼다. 만족스럽기도 했다. 귀 근처 어딘가에 입술을 맞추다가 떨어지자 짜증스레 나를 본다. 왜 멈추냐는 표정이다. 나는 혀를 살짝 내밀어 보였다.

“모래.”

“하긴. 너도 있더라.”

“일단 씻을래.”

“그럼 같이 씻어.”

“왜.”

“어차피 오늘 다 볼 건데 뭐 어때.”

“그래. 어차피 볼 건데 이따 봐.”

“너 이따 나오면 또 머리 굴려서 고민만 많아져 있을 테니까 같이 들어가.”

얘는 짧은 시간 동안 놀랄 만큼 나를 많이 파악해둔 것 같다. 무슨 배역 연구하듯 내 행동 양식만 연구했나. 나는 차가운 마룻바닥에 누워 말없이 버텼다. 무릎으로 바닥을 지탱하며 천천히 일어난 정지운은 내 손을 잡고 일으켰다. 

결국 일어나 같이 욕실로 걸어 들어가면서도 이게 잘하는 짓인지 모르겠다는 생각만 든다. 걷는 걸음마다 모래 떨어지는 소리가 톡톡 울렸다. 기어코 욕실로 함께 들어가 문을 닫았다. 밖에 누가 있는 것도 아닌데 그렇다. 

안은 보조 조명만 켜둔 건지 빛이 은은하다. 나는 심호흡을 하며 눈을 꽉 감았다. 욕조에 물 트는 소리가 들리고 따뜻한 양손이 내 허리 근처를 감싸 안아 당긴다. 약간 끌려가자 또 입술이 닿았다. 앞으로 시작될 걸 알아 자꾸 떨렸다. 미약한 떨림이 있는 입술이 부드럽게 빨아 당겨졌다. 전류가 흐르듯 찌릿한 감각 때문에 한숨이 나왔다. 

허리 근처에 있던 손이 옷 사이로 들어와 살을 손바닥으로 문지르다가 떨어졌다. 입술도 떨어졌다. 천천히 끌려 올라가는 웃옷에 맞춰 나는 팔을 들었다. 추운 건 아닌데 몸에 소름이 돋았다. 내 옷이 저 멀리 던져지고 정지운은 제 윗옷도 벗어 바닥에 던졌다. 그리고 다시 끌어 안겨졌다. 이번에는 거침없이 바지의 버클을 풀어 끌어 내렸다. 속옷까지 한 번에. 

다리를 빠져나가는 바지와 속옷 때문에 눈앞이 아찔했다. 천 한 장 없이 드러난 허벅지와 안쪽 살에 정지운의 손길이 닿았다. 열이 올라 뜨거운 손 때문에 정신이 없었다. 그 와중에 성기를 바로 잡아오는 손에 기겁했다. 정지운은 움츠러드는 다리 사이의 성기를 주물거리듯 만지며 귓가에 속삭였다. 이미 목소리가 흥분으로 거칠었다.

“섰네.”

“만지니까.”

“그전부터 서 있던데. 축축하기도 하고.”

손가락이 예민한 끝부분을 문지르듯 눌러서 몸이 튀었다. 나만 농락당하는 기분에 짜증이 나서 소리쳤다.

“너도 벗어.”

“그럴 거야.”

왜 아니겠는가. 정지운은 몸을 돌려 나를 욕조에 걸터앉히고선 제 바지의 버클을 풀었다. 눈을 둘 데가 없어 망연히 그것을 바라봤다. 너른 어깨와 팔 가슴 배 할 것 없이 얇고 단단하게 짜여진 근육들. 그리고 매끈한 허리와 내려가는 바지. 

천천히 벗어 내린 바지를 뒤편에 두고 정지운은 나와 눈을 마주친 채 제 드로즈의 허리 부근에 손가락을 걸어 내렸다. 곧추선 성기가 튀어나오듯 모습을 드러냈다. 하여튼 저 얼굴과 몸에 저런 물건은 반칙이다. 묵직해 보이는 크기도 문제지만, 수북한 음모 사이로 보이는 성기는 핏대가 서 울퉁불퉁하고 벌겋다. 

원래 성기라는 것이 예쁜 모양새는 아니라지만, 정지운은 특히 그게 심하다. 부담스러울 정도로 음란하게 생긴 모양새다. 민망한 기분을 버티지 못하고 바닥으로 시선을 떨구자 다가온 몸이 나를 욕조 안으로 밀어 넣었다. 따뜻한 물이 찰랑이는 길쭉한 타원형의 욕조로 밀려 들어가 일단 앉았다. 이어서 내 뒤로 들어온 정지운의 몸도 잠기면서 물이 가슴께까지 올라온다. 등 뒤에서 좁게 몸을 딱 붙이고 앉으려는 게 부담스러워서 잠깐 반항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엉덩이를 누르는 성기가 신경 쓰여서 그렇다.

“반대편에 앉아.”

“이렇게 안 앉으면 다리 못 펴.”

“그래도.”

“그리고 니 엉덩이에 자지도 못 비비잖아.”

뭐……? 적나라한 말에 순간 할 말을 잃었다. 뒤에서 허리를 콱 당겨 자세를 고정하는 탓에 허우적거리다 허벅지 위에 앉아버리고 말았다. 엉덩잇살을 누르다가 그 틈으로 문질러지는 성기를 느끼며 나는 울고 싶어졌다. 벌써 손은 가슴 주변의 피부를 만지작거린다 싶더니 유두를 누르고 있었다. 이상한 감각에 허리를 뒤틀며 하소연했다.

“내가 위 하고 싶으면 해도 된다며.”

“응. 그랬지.”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들뜬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

“할 수 있으면 하라니까. 할 수 있으면.”

“그런 게 어디 있어.”

“설마 내가 알아서 드러누워 줄 줄 알았어?”

“……”

상상이 잘 되지 않기는 한다. 정지운이 알아서 나 잡아먹으시오 하고 누워준다고? 그럼 나더러 뭘 어쩌라는 거야. 힘으로 밀어붙이라는 건가.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힘이 달린다. 운동을 아직 다 못한 탓이다. 돌아가면 벤치 프레스 킬로그램 수를 두 배로 늘려서 단련해야지. 

문제는 지금이다. 바로 지금 이 순간. 욕조에 둘이 맨몸으로 붙어 앉아있는 지금 말이다. 욕조 가장자리를 붙들고 일어나려 했지만, 물속에서 발버둥을 쳐보기도 전에 허리를 꽉 조여온 팔이 주저앉혔다. 따뜻한 물 안에서도 높은 온도의 체온이 온몸에 달라붙는다. 특히 움찔거릴 때마다 엉덩이 사이에서 움직이는 성기가 더 신경 쓰여 결국 우는소리가 나왔다.

“자세만 바꾸자.”

“왜. 좋은데.”

당연히 너야 좋겠지. 반문하려고 고개를 트는데 귀를 빨아오는 혀 때문에 질척한 소리가 머릿속을 진탕으로 만들었다. 축축한 살덩이가 자꾸 귓바퀴를 핥고 자극한다. 근질거리며 올라오는 성감에 시달리다 정지운의 손아귀에 성기 아래의 고환이 주물러지고 있음을 알았다. 견딜 수 없는 감각에 몸이 움츠러들었다. 엉덩이 사이에 슬슬 부벼오는 성기가 무서워 말이 잘 안 나온다.

“지운 씨.”

“아직도 그렇게 부르네.”

손안에 굴려지던 고환이 힘 있게 잡히자 숨이 훅 뱉어진다. 입에 익은 호칭이라 그러는 건데 그게 불만인 모양이다. 도리질 치며 등 뒤로 붙어오는 가슴에 늘어져 기댔다. 내 태도가 만족스러운지 다시 성기가 부드럽게 어루만져졌다. 이제 와서 뺄 수 있을 것 같지도 않다. 여기서 달랠 수 있는 것은 이 정도였다.

“침대라도 가서 하자.”

“당연하지.”

긍정은 금방 나온다. 그 뒤가 문제지만.

“처음이니까 침대 가서 예쁘게 넣어줄게.”

“그, 말 좀. 그렇게 안 하면 안 돼?”

“왜. 자제했는데.”

단어 중에 문제 될 만한 건 없지만 느낌이 걸리는 게 있다. 하지만 나도 뭔지 확실히는 모르겠다. 아무 말 못 하고 가만히 있으려니 뒤에서 고개를 숙여 내 뺨에 자기 뺨을 부벼온다. 나긋하게 옆구리를 쓰다듬으며 기어 올라온 손이 가슴의 윤곽을 덧그리듯 만졌다. 따끈해진 몸에 뜨거운 손이 오가니 배 속이 간질거렸다. 

뭉근하니 몸을 만져대던 정지운이 각도를 틀어 입술에 키스하면서 왼쪽 유두를 꽉 잡아당겼다. 손가락 사이에서 만지작거리고 놓기를 반복했다. 다시 숨이 가빠왔다. 불안하게 눈을 깜빡이는데 입술이 떨어지더니 등 뒤의 몸이 일어나며 내 몸도 안아 일으켜 세웠다. 정지운을 따라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욕조에서 나왔다. 

밖으로 나갈 줄 알았더니 세면대 옆의 수납장으로 나를 부축하듯 데려갔다. 열어젖혀진 수납장을 보고 그 안의 물건을 이해하기까지는 몇 초가 걸렸다. 입이 절로 벌어졌다. 나는 등을 받치듯 서 있는 정지운의 맨살을 퍽 소리가 나도록 때리며 물었다.

“이게 뭐야?”

“오늘 하려고 준비해 온 거. 어떤 거 쓸래.”

그는 밝은 얼굴로 내 손을 끌어다가 수납장으로 이끌었다. 나는 손가락이 닿는 것조차 남사스러워서 주먹을 꽉 쥐었다. 수건이 있어야 할 자리에서 가장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는 것은 방금 내 손에 닿을 뻔한 이 물건이다. 먹색의 커다란, 남자의 성기를 본뜬 모양의 실리콘 같은 것. 

세워져 있기까지 한 것에 어떻게든 안 닿으려고 피했더니 그 옆의 물건들도 난리였다. 작고 동그란 모양의 분홍색 타원형 물건은 끝에 줄이 길게 달려 있었고, 구슬을 여러 개 이어 붙인 듯한 물건도 있다. 그 옆으론 평범하게 색색깔의 콘돔 박스 몇 개와 젤 같은 것들이 널브러져 있다. 이를 악물고 정지운에게 물었다.

“너 취향 이래?”

“아니야. 나도 인터넷 주문하면서 처음 사봤어. 못 믿겠으면 영수증 보여줄게.”

“됐어!”

일단 샀다는 게 문제다. 나는 시선을 피하며 고개를 푹 숙였다. 긴장감이 더한층 부풀어 올랐다. 진짜 하는구나. 미쳤어. 정지운이 고개 숙인 내 이마에 다정하게 입술을 누르며 묻는다.

“안 고를 거야?”

“저런 걸 왜 사 와, 미친놈아.”

“안 풀어주면 아플까 봐 그랬지.”

순간 현실적인 공포가 나를 엄습했다. 침대 위에서 초인적인 레슬링 실력을 발휘해 엎어치지 않는 이상 내가 깔릴 것이 뻔한데, 안 풀고 넣으면? 티 나지 않게 눈동자만 굴려 정지운의 성기를 슬며시 봤다. 흉악하게 발기한 물건은 여전히 부담스럽다. 저걸 넣는단 말이지. 그래. 제기랄.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들어 다시 천장과 활짝 핀 정지운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내 시선이 오가는 것을 보고 눈동자에 의문이 담긴다.

“저 도구. 꼭 써야 해?”

“쓰기 싫으면 쓰지 마.”

“쓴다고 발작할 줄 알았더니.”

“생각해보니까 처음에는 내 좆으로만 박고 싶어.”

그 말에 내 표정은 기괴하게 일그러졌다. 그게 웃긴지 싱글벙글 웃더니 수납장 안에서 젤 같은 것과 무언가 다른 작은 튜브형을 하나 더 꺼내고 탁 소리가 나도록 닫았다. 욕실에서 나오는데 정지운은 내게 다시 한 번 확답을 받았다.

“네가 안 고른 거다?”

“어떻게 골라.”

진짜. 그런 데서 나더러 뭘 고르라는 거야. 

욕실 문을 열고 나와 곧장 침실로 향했다. 들고 온 젤과 뭔지 알 수 없는 물건은 침대 위로 휙 던져졌다. 나는 그 옆에 어정쩡하게 자리 잡았다가 다리를 다 펴지도 못하고 반쯤 구부려 앉았다. 눕기에는 부담스러웠다. 그래도 어두워서 그나마 낫다. 

이런 내 몸 위로 묵직한 남자의 몸이 겹쳐 올라왔다. 눌려서 침대에 파묻히듯 누웠다. 단숨에 잡힌 성기가 탁탁 쳐지며 흔들렸다. 아. 나는 목을 길게 빼며 신음했다. 목이 말랐다. 정지운이 내 목덜미와 어깻죽지를 깨물더니 속삭였다.

“이제 괜찮지?”

“응?”

그 순간 내 옆에 던져져 있던 젤을 잡아 든다. 아. 긴장감으로 다시 몸이 굳었다. 정지운은 몸을 일으켜 젤 뚜껑을 열곤 제 손가락에 천천히 짜 떨어트렸다. 지나치게 선정적이어서 안구가 뜨거운 것만 같았다. 그리고 동시에 심장도 뛰었다. 

항상 의문이었다. 정지운은, 이렇게 잘나고 섹시한 놈이 왜 나한테 이러지. 허벅지를 넓게 벌려 아래가 훤하게 드러난 자리에 손가락이 기어오듯 내려왔다. 닿아선 안 될 곳에 손가락의 끄트머리가 닿자 엉덩이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손바닥의 넓은 면으로 허벅지 안쪽 살이나 엉덩이를 어루만지며 달랬다.

“재현아, 힘 빼.”

“그게 말처럼 안 되거든?”

“괜찮아. 아프게 안 할게.”

정말 단 하나도 믿을 수 없는 말이다. 특히 저 욕망이 꽉 찬 눈동자를 보면. 오랜 시간 허벅지와 성기 근처의 연한 살을 어루만지며 정지운은 기다렸다. 꼿꼿하게 선 성기에 물기가 어릴 정도가 되어서도. 그제야 겨우 힘이 풀렸다. 나도 힘을 주려고 주고 있던 건 아닌 터라 내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니었다. 

경직되었던 근육이 겨우 노곤해지고 나서야 손가락 하나가 아래의 입구를 더듬어 들어온다. 잠시 움직임을 멈춘 손가락에 젤이 한 번 더 부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차가워서 움찔거렸다. 손가락이 천천히 진입해 들어오자 나는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허벅지가 덜덜 떨렸다. 내 양다리를 제 허리에 걸치고 가깝게 다가와 앉은 정지운이 내 표정을 살피며 말을 걸었다.

“아파?”

“아니. 아직은. 이상해. 젤 차가워.”

“문지르면 뜨거워질 거야.”

“왜?”

“그런 거 샀어.”

주도면밀한 새끼. 거기서 약간 긴장이 풀려 웃음이 나왔다. 손가락이 더 깊게 파고드는 바람에 바로 멈췄지만. 그래도 허벅지 안쪽으로 정지운의 허리를 감고 있자 따뜻한 체온이 느껴져 그나마 마음이 놓인다. 다리를 움찔거리며 비볐다. 그런 내 모습에 정지운은 손가락을 돌리며 말했다.

“재촉하지 마.”

“내가 뭐.”

“비벼오지 말라고. 지금 죽겠으니까.”

더할 나위 없이 심란한 기색이라 웃겼다. 네가 아무리 그래 봤자 남의 손가락을 받고 있는 나만 할까. 젤이 한 번 더 발려지고 찌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손가락이 두 개로 늘었다. 커진 이물감에 눈을 찡그렸다 폈다. 하나일 때와 달리 손가락이 두 개가 되자 안에서 제멋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내벽을 살살 긁듯이 움직이다가 깊게 들어오고 빠진다. 그때마다 안쪽의 살이 딸려 나가는 것만 같아 덜컥 겁이 났다. 

젤이 다시 한 번 부어지고 하체가 온통 질척거려졌다. 손가락을 넣고 있는 접합부를 뚫어지게 보고 있는 눈길 때문에 죽을 것 같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는 않겠지만, 아예 안 보이는 것도 아닐 거다. 이상한 기분이다. 내 몸 안에 내가 아닌 누군가의 움직임이 느껴진다는 것은. 

손가락이 하나 더 들어가 세 개가 되었다. 여기서는 입술을 잘근거리며 욕을 했다. 손가락이 무겁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섬세하게 안에서 돌려지는 움직임을 느끼며 나는 앓는 소리를 냈다.

“아파?”

“이상해.”

“좁네. 그래도 많이 풀렸어.”

“웃기지 마.”

“진짜야. 아까는 넣을 때 잘 안 들어갔는데.”

손가락이 천천히 왕복 운동을 하며 푹푹 박혀왔다. 허리 아래로 들어온 다른 손 때문에 나는 허리를 휘면서도 도망칠 곳이 없었다. 상체를 일으키려다 도로 누워 경련했다. 느낌이 이상하다. 아래에서 젖은 소리가 날 때마다 창피함에 얼굴이 터져버릴 것만 같다.

“이제 부드럽게 들어가.”

“아니야. 그거 니가 억지로…!”

“이제 박을게. 괜찮지?”

“아니. 조금만 더 해.”

“남자도 느끼는 데가 있는데 넌 깊이 있나 봐. 만져도 반응이 없네.”

“없는 거 아니야?”

“아니 안쪽에 있을 거야. 야해빠졌어. 손가락으로는 못 가고 좆으로 박아줘야만 가겠네.”

“야!”

내 의미 없는 마지막 말이 침대 위에 흩어졌다. 안을 꽉 메우고 있던 손가락이 천천히 물러나고 몸이 침대 위에 놓아졌다. 벌어진 다리 때문에 골반이 아파왔다. 정지운은 내 양다리를 제 옆구리에 끼우고 위로 들어 올렸다. 벌려진 엉덩이 사이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아직 약간 벌려진 구멍 사이에 데일 듯 뜨거운 성기를 가져다 대다가 떨어졌다. 

정지운이 이를 악물고 나를 내려다보며 제 성기 위에 젤을 줄줄 흐르도록 뿌린다. 그리고 뭔지 알 수 없는 작은 젤 같은 것을 열고는 입구를 대고 눌러 넣었다. 그리고 그대로 성기를 삽입하려 했다. 나는 순간 기억난 것이 있어 몸을 물렸다.

“아! 콘돔!”

“콘돔?”

“이대로 해?”

“네가 아까 안 골랐잖아.”

“그, 그건 당황해서…….”

안 고르기는 했지만 그래도……. 몸을 일으키려 하자 양손을 깍지 껴 침대 위에 눌러 잡았다. 나는 옴짝달싹을 못 한 채 아래를 드러냈다. 다시 닿아온 성기의 끄트머리가 어떻게든 내 안으로 비집고 들어오려 했다. 정지운은 잡아먹을 듯 나를 내려다보며 천천히 허리를 내렸다. 입이 벌어졌지만 목에선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뜨거웠다. 뜨겁고. 억지로 벌려지는 여린 살이 무서웠다. 그 안에 자리 잡고 들어오는 것이 남자의 성기라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도리질 치며 피하려 해도 양손이 결박되다시피 깍지 껴 눌려져서 움직일 수가 없었다. 눈시울이 뜨겁다. 울퉁불퉁한 성기가 안을 긁으며 자꾸 진입하자 사정하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아, 지운 씨. 나. 안 되겠어. 안 돼.”

“벌써 자지 받아놓고 뭘 안 돼.”

내 말에 대답하는 정지운도 압박감에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다. 꽉 조여드는 내 몸을 나도 느끼고 있으니 장난 아닐 텐데. 그가 진입을 잠깐 멈추고는 손을 놓아주자 나는 침대 시트를 그러쥐었다. 깍지 끼고 있던 손을 얼마나 세게 잡았는지 손마디가 얼얼하다. 그것도 몰랐다. 

하체도 어떻게든 움직여보려다 들어와 있는 성기를 꽉 조여 무는 꼴이 되었다. 정지운의 얼굴이 확 일그러지며 내 다리를 다시 고쳐 잡았다. 양다리를 모아 위로 들어 올렸다. 내 무릎을 가슴 쪽에 모으고 종아리를 어깨에 걸쳤다. 뭘 하는지 몰라 무슨 말도 못 했다. 그새 붕 뜬 허리 아래로 베개가 받쳐지고 골반이 꽉 붙들려 다시금 삽입이 시작됐다. 개새끼. 커도 너무 크다.

“아, 으. 안 돼. 너무 커…….”

“커?”

“응. 아파. 너무 깊어서… 으…….”

“거의 다 들어갔어.”

아. 엉덩이에 까끌한 감촉이 느껴질 때쯤 안을 긁고 벌려가던 성기가 어딘가를 눌렀다. 나는 솜을 들이쉬며 히끅거렸다. 느낌이 이상했다. 내 반응을 눈여겨 살피던 정지운이 진입을 멈추고는 허리를 약간 돌렸다. 그 움직임에 따라 내 허리도 흔들렸다. 감촉은 여전히 이상하다.

“기분 좋아?”

“아. 아니. 아니야. 이상해.”

“여기 괜찮은가 본데.”

“아니라니까. 으으…….”

“진짜 야해빠졌네. 이렇게 깊게 있으면. 다른 새끼들도 못 눌러주잖아.”

헉. 그대로 몸을 굽혀 키스하며 성기가 눌려 틀어박혔다. 나는 벌벌 떨며 입안에 들어온 혀를 받았다. 키스하는 게 아니라 잡아먹히는 수준이었다. 나는 배 안쪽에 차오른 둔통에 벌벌 떨었고 정지운은 깊게 넣은 성기를 움찔거리듯 움직이며 내 혀를 빨았다. 정신이 없어 따라가지 못하고 농락당했다. 

끌어안기에 방해됐는지 다리를 도로 천천히 내려 허리 옆에 감았다. 골반이 한계까지 벌어지며 아팠다. 그리고 엉덩이가 더 벌어지는 것 같기도 했다. 뜨겁고, 간지러워서 고통스러웠다. 눈에 결국 눈물이 고였다. 정지운이 흐르는 눈물을 핥고 속눈썹에 고인 눈물까지 입술로 문지르며 나를 끌어안는다. 빈틈없이 온몸이 맞아 들어갔다. 성기까지 내 몸에 묻은 채. 

상상 이상의 감각이 온몸을 내달렸다. 온 정신이 성기를 물고 있는 구멍과 그 안의 내벽에 집중됐다. 이상하게 숨이 가빴다. 정지운이 그런 내 등을 쓸어내리고 온기로 데우며 부드럽게 달래듯 말했다.

“괜찮아. 이제 다 들어갔어.”

“넌 좋냐? 흐윽…… 난 죽겠다.”

“나도 빡빡해서 죽겠어.”

“당연한 거 아니야?

“그래. 당연하지.”

정지운이 입술에 가볍게 키스하고는 천천히 허리를 움직인다. 유연하고 조심스러운 움직임이라는 것은 직접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앓는 소리가 나는 건 어쩔 수 없다. 한 번씩 밀어닥치고 빠질 때마다 내벽이 함께 딸려나가는 듯 아팠다. 흐릿하니 흔들리는 시야 앞에 핏대가 설 정도로 힘이 들어간 목이 보였다. 거기 매달려 안기다시피 했다. 강인하고 따듯한 손이 내 등을 쓰다듬고 주물렀다. 어떻게든 달래려는 이런 행동들이 아니었으면 진작 나가떨어졌을 거다.

“처음이니까 당연히 빡빡하지.”

“아 씨, 말 좀…… 읏, 으으….”

“씨발. 그런데 왜 이렇게 맛있냐.”

“야! 아으. 말… 읏! 아아…….”

“어? 재현아. 너 여기도 풀렸어.”

“아니야!”

“아니긴.”

내 말에 정지운은 작게 웃음 지으며 왕복 운동하던 허리를 느긋하게 돌리듯 안을 자극했다. 찌걱거리는 물소리가 울리며 압박감이 심해졌다. 헉. 그 안에서 긁힌 어딘가가 이상해 다리를 오므렸다. 내 표정을 보며 턱을 이로 씹어대던 정지운은 가슴까지 내려가 유두를 잘근잘근 씹었다. 다시 몸에 힘이 들어가는데도 막무가내였다. 자기 성기가 조여들 텐데도 상관없는지. 

나는 발발 떨며 온몸의 성감을 느끼기에 정신이 없었다. 아릿한 감각과 함께 빨리는 유두도 이상했다. 가슴을 잘근대던 입술이 도로 올라오며 얼굴을 가까이 마주해 흐릿한 시야 안에 들어왔다.

“눈이 풀렸네.”

“흐으…….”

“좋아?” 

“지운 씨. 이상해. 뭔가…….”

“응. 괜찮아.”

손가락이 입안에 디밀어져 휘저었다. 점막을 누르고 고인 타액을 들쑤셨다. 이상했다. 몸이. 진짜. 고작 남자 성기 하나 들어왔다고 미친 애처럼 이러는 게……. 입안의 손가락을 피해 엉성한 발음으로 물었다.

“아까 뭐 넣어어?”

“젤.”

“그거 말고 하나 더.”

아까 작은 젤. 내 안에 넣었던 거. 움찔거리는 안쪽의 내벽을 꾹 참으며 노려보자 태연하게 손가락을 더 움직이며 혀를 만진다. 점막이 자극되자 또다시 허리가 움찔거렸다. 

“그냥 도와주는 약이야.”

“뭘 처넣은 거야.”

“사이트에서 파는 그런 거야. 이상한 거 아니야. 약간 도움 되는 정도랬어.”

“아. 그래도…….”

“그런데 우리 재현이는 이렇게나 느끼네.”

“좋냐?”

손가락이 빼내어지고 다시 허리를 짓쳐 올린다. 일정한 리듬으로 흔들리며 정지운의 품 안에 꽉 안겼다. 머리가 멍하고 뱉는 숨이 뜨겁다. 자꾸 안으로 파고드는 성기가 어딘가를 건드릴 때마다 몸을 뒤틀었다. 처음에는 그럴 때마다 잠시 움직임을 멈추던 성기가 이제는 집요하게 더욱 박혀 들어온다. 밭은 숨을 내쉬며 정지운의 어깨에 이마를 대고 말했다. 다정하게 안겨 있는 상체와 달리 내 다리 사이 하체는 격하게 움직이는 중이었다.

“지운 씨. 아. 나. 읏, 흐읏.”

“형이라고 하랬지.”

“안 해. 아… 앗, 으응… 거기.”

“알아.”

죽을 것만 같았다. 헐떡이는 숨이 함께하며 내 안에 박혀 들어오는 성기의 박자가 빨라졌다. 자극되는 안쪽의 감각이 무언가 약간 못 미쳐서 손을 내려 내 성기를 주물렀다. 그런 내 모습을 흘깃 본 정지운의 허리짓이 더 빨라졌다. 

마침내 박자 없이 그냥 처박히기 시작하자 나는 목 놓아 울었다. 그러다 사정의 순간이 찾아왔다. 쿠퍼액으로 젖었던 성기가 울컥 정액을 내뱉자 몸이 경직되며 몸 안의 성기를 조여 물었다. 그사이에도 퍽퍽 소리가 날 정도로 쳐올려져서 사정 중에 절정이 더 올랐다. 가쁜 숨을 내쉬던 정지운이 이를 세워 내 귀를 깨물고는 꽉 누르며 성기를 깊게 디밀었다. 그 행동에 기겁해서 외쳤다.

“아! 안 돼…… 아!”

몸부림치며 도망치려 했지만 깔린 몸은 옴짝달싹도 하지 않았다. 적나라하게 꿈틀거리던 성기가 내 안에서 액체를 왈칵 토해냈다. 안 된다고 중얼거리는 말은 들리지도 않는지 온몸이 부서져라 꽉 끌어안겨 나는 생소한 감촉에 진저리쳤다. 

떨리는 손으로 내 몸을 덮쳐누른 남자의 등에 손을 올렸다. 매끈한 피부 아래 근육이 경직되었다 풀어지기를 반복한다. 닥쳐온 입술이 내 혀를 깨물고 당겨 제 입안으로 가져갔다. 억지로 벌어진 입과 이에 긁히는 혀가 아팠다. 

짐승 같은 섹스가 끝나고 나서야 내 몸은 침대 위에 온전히 놓여졌다. 안에서 꿈틀거리며 정액을 싸던 성기가 천천히 물러났다. 무슨 말이 나오질 않았다. 콘돔. 그놈의 콘돔. 아니면 할 때 빼든가. 성질을 부리고 싶었지만, 아직 날카롭게 날이 선 눈빛이 나를 훑어보고 있는 탓에 잠긴 목에서 목소리가 안 나왔다. 

정지운은 엉망진창이 된 내 몸을 내려다보며 정액이 범벅된 제 성기를 손으로 슬슬 문질렀다. 무서울 정도로 음란한 모습이었다. 입술을 핥으며 나를 핥는 듯 보는 그의 손에서 힘을 받은 성기가 꺼떡거리며 아랫배에 붙을 정도로 바짝 섰다. 나는 다리를 오므리며 고개를 저었다.

“안 돼.”

“재현아.”

부르는 목소리가 나 못지않게 잠겨 있었다.

“한 번만 더 하자.”

“안 돼. 나 진짜…… 못 하겠어.”

“너도 좋아서 쌌잖아.”

“형. 지운이 형. 나 안 돼. 오늘 처음 했잖아.”

씨발. 아무 말도 안 통했다. 어떻게든 피하려는 내 몸을 낚아채 다리를 벌리고 자리 잡는다. 이번에는 성기의 침입이 더 쉬웠다. 안에 정액을 싸지르기까지 했으니 더욱 질척했다. 수위가 올라가는 것도 빨랐다. 고개를 저으며 하지 말라는데도 속도가 붙은 허리는 무자비하게 내벽을 벌려 쳐올렸다. 눈물이 또다시 고였다. 자극에 반응해 힘을 받는 내 성기도 짜증났다. 아릿하게 아픈 아랫배와 가끔 조이려 드는 내벽도 미친 것 같고. 

당황스러워 어쩔 줄 모르는 내 표정을 보고 정지운은 잠시 허리짓을 멈추고 꽉 끌어안았다. 그래 봤자 빼지는 않았다. 귓가와 목덜미, 눈 아래 등에 키스하며 한숨처럼 중얼거렸다.

“뭣도 모르는 애 데려다 하는 거 같아서 미치겠네.”

“남자랑 하는 건 몰라.”

“그렇지. 나한테 배워.”

“형. 그만하자. 힘들어.”

그렇게나 듣고 싶어 하던 형 소리를 해줬는데도 어깨만 작게 으쓱해 보이고는 또다시 박아온다. 흔들리는 몸은 단단한 팔이 붙들려 고정된 채로 처박혔다. 흐으……, 신음이 다시금 흘러나왔다.

“별로 감흥 없네.”

“하래서 했더니… 흐응, 으… 읏, 아…….”

“다 형이라고 부르잖아. 민석이도 그렇고.”

“아! 그만, 좀, 으응…. 아, 앗.”

“오빠, 라고 해봐.”

뭐, 이 씨발? 

“변태 새끼야.”

“다 형이라고 부르니까 나는 오빠라고, 후, 해주라.”

“아, 아저씨. 응, 으으…….”

“와, 그거 엄청 야해.”

속도를 올려 퍽퍽 쳐올리는 사이에 나는 또 한 번 성기에서 정액을 흘렸다. 뚝뚝 떨구다시피 하며 이뤄진 사정이었다. 거기에 넋이 나가 흔드는 대로 흔들리는데 내 몸을 반쯤 일으키다시피 해서 끌어안은 정지운이 다시 허리를 깊게 눌러 삽입해왔다. 빨라지는 움직임이 뭔지 알아서 이번에는 저항해봤다.

“아! 밖에 싸. 안에, 하지… 마. 아! 으응, 흣…….”

“아까 콘돔 안 골라놓고.”

“몰랐어, 아. 아읏,”

“늦었어. 다리 더 벌려.”

양옆으로 당겨 벌려진 허벅지 안으로 허리가 더 깊게 내리눌렸다. 발버둥 치는 와중에 허벅지 안쪽에 닿은 허리가 움찔거리는 게 느껴졌다. 깊게 눌리며 안에서 성기가 사정했다. 잔뜩 예민해진 탓에 정액의 감촉마저 뜨거웠다. 눈물이 고였다가 왈칵 터졌다. 너무 자극적이어서 괴로웠다. 내 몸이 내 것 같지도 않았다. 

줄줄 흐르는 내 눈물을 손으로 닦아내며 이제 와 다정하게 몸을 비벼오는 정지운을 힘없이 밀어냈다. 순순히 물러나면서도 기운 잃은 내 성기를 만졌다. 힘을 줄 기운도 남지 않아 노려보기만 했다.

“놔.”

“방금 또 쌌어?”

“뭐?”

“내가 안에 사정했을 때.”

“아니야.”

“그런 거 같은 데. 한 번만…….”

“꺼져!”

은근히 권유하는 말에 기겁했다. 더 이상 하면 진짜 죽을 것 같다. 이미 온몸이 덜그럭거리는 것만 같았다. 한계까지 벌어진 엉덩이도 너무 아팠고 아래가 다물리지 않을 것만 같아 무섭다. 내가 울상을 지으며 몸을 추스르고 동그랗게 말자 정지운은 이제야 다정한 척 끌어안으려 했다. 가증스러워서 밀어냈다.

“꺼져.”

“너도 좋았으면서…….”

“…….”

“알았어. 자. 안 할게, 씻자.”

한참을 누워 있다가 그 후에 정말 씻기만 하기는 했다. 그것도 내가 성질을 낸 덕분이었다. 욕실 안으로 부축받다시피 들어가서는 씻으려는데 정지운이 물끄러미 수납장을 보는 게 아닌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쌍욕을 했더니 그제야 시선을 떼고 몸을 씻는 데 집중했다. 

정액을 빼낸답시고 날 욕실 벽에 밀어붙인 채 손가락을 들이밀었을 때도 온 힘을 다해 욕을 해서 겨우 무사할 수 있었다. 욕실을 나올 때 또다시 곧추선 어느 누구의 성기는 대놓고 무시해버렸다. 그렇게 자꾸 나를 설득하려는 정지운을 피해 잠자리에 파고드는 데까지 얼마나 많은 노력이 필요했는지 모른다. 

그리고 나는 다음 날 세상 다시없을 만큼 쪽팔리게 몸살이 났다. 

내가 섹스 좀 했다고 그다음 날 몸살로 앓아눕는 병약한 체질일 줄 그 누가 알았겠는가. 나조차도 예상하지 못했던 결과다. 하지만 그럴 만한 체험이었다. 나는 정말 죽는 줄 알았다. 돌이켜 생각해보려니 다시금 온몸이 지끈거리는 것 같아 떠올리고 싶지도 않다.

아침이 되고 정지운은 내 옆에 바짝 붙어선 반듯하게 누워 잘만 자고 있었다. 뻣뻣한 목에 힘을 줘 그 얼굴을 돌아봤다. 이마에서부터 시작돼 높게 올라갔다가 떨어지는 선이 도톰한 입술과 이어진다. 생긴 건 이렇게나 곱게 잘생겨놓고. 

손을 들어 우리가 같이 덮고 있는 이불을 들쳐 보았다. 어제 그렇게나 해대고도 아침 생리현상으로써 자기주장을 하고 있는 물건과 눈이 마주쳤다. 나는 슬며시 이불을 놓고 못 본 척했다. 새삼 몸 안 어딘가가 욱신거리는 것 같았다. 그 감각 역시 못 느낀 척하며 천천히 다리를 움직여보았다. 한껏 당겨지고 긴장했던 근육들에 힘이 없다. 

일어나보려고 팔로 침대를 받치고 허리를 세우다 그대로 털썩 누웠다. 침대의 흔들림에 옆에 누운 몸이 움찔 떨렸다. 감겨 있던 눈이 뜨여지고 멍한 눈길로 꼼지락거리는 나를 본다. 워낙 가까웠기에 안구에 비친 내 모습이 보일 정도다. 더불어 내 표정이 얼마나 굳어있는지도 알겠다. 

정지운은 꿈틀대느라 약간 내려간 이불을 우리 둘의 머리 위까지 끌어다 덮었다. 바깥의 잔잔한 파도 소리와 햇볕이 차단되었다. 내 쪽으로 돌아누우며 끌어당겨 안자 허리가 살짝 움직였다. 나는 죽는소리를 냈다. 나오는 목소리마저 쉬어있다.

“아아아, 나. 아파.”

“많이 아파?”

“죽겠다.”

어두운 이불 안에서 내 귓가에 얼굴을 파묻으려던 녀석은 엎드려 상체를 일으키더니 나를 내려다본다. 졸음이 가득한 눈을 비비고는 손을 내 목 뒤로 밀어 넣어 가볍게 잡았다. 주물러오는 손길은 약했지만 나는 벌써 눈을 찡그렸다.

“아아, 아프다니까.”

“어제 힘 많이 줘서 그래. 힘 풀라니까.”

“말은 쉽지.”

아파하는 내 반응이 웃긴지 잠이 덜 깨 멍한 얼굴에 얼핏 미소가 걸렸다. 천천히 얼굴이 가까워지더니 턱 끝에 입술을 눌렀다 떨어졌다. 주무르던 손은 이제 피부를 살짝 누르고 만지는 정도로 손길이 나긋해졌다. 쇄골 근처를 어루만지고 느릿하니 가슴과 옆구리 쪽으로 내려갔다. 옆구리 아래 등으로 파고들며 다시금 근육을 어루만졌다. 아파서 또 움찔거리며 입이 벌어졌다.

“흣, 아.”

“소리 그렇게 내지 마.”

“건드리지를 말든가.”

“얼마나 아픈지 확인해보려고.”

“이런 거 어떻게 알아?”

“하루 종일 운동하고 춤추면 마사지 받으러 갈 때가 있어.”

은근한 손길이 엉덩이 쪽으로 내려가며 주무르려 했다. 몸이 살짝 기울며 내 오른쪽 허벅지 위로 정지운의 몸이 무게를 실으려는 순간 나는 악 소리를 냈다. 허벅지 근육은 정말 말도 못 하게 굳어있단 말이다. 내 반응에 열이 오르려던 정지운의 손길이 멈칫했다. 이놈은 아프다는 말을 뭘로 들은 거야.

“진짜 아프다니까.”

“이렇게 아플 줄은 몰랐네. 올라가면 마사지 다니자.”

“됐어. 낫겠지.”

“앞으로도 말이야.”

앞으로? 물으려는 입안으로 내 몸을 배회하던 손가락이 쑥 집어넣어졌다. 손가락 두 개가 혀 아래와 점막을 꾹 누르다가 빠져나갔다. 불길한 느낌이 들어 콧잔등을 찡그리며 물었다.

“앞으로?”

“몸이 부드러워야 섹스해도 안 아프지.”

“……”

아무런 대답을 못 하고 멍하니 있는데 정지운이 내 다리를 살짝 벌리고 무릎을 반쯤 세웠다. 그렇게 움직여지는 근육들도 아파 이를 물었다. 자세를 다시 바로 하기 전 엉덩이 사이로 손가락이 더듬어 들어왔다. 젖은 손가락이 안으로 침범하자 놀란 나는 몸을 굳혔다.

“나 안 해. 못 해.”

“안 할 건데 그냥 풀어만 두게.”

“대체 왜?”

“자주 해줘야 잘 받지.”

그러고는 몸을 바싹 붙여오며 내 가운을 풀어 흘러내리도록 치웠다. 냅다 걷어차고 도망가기에는 몸 상태도 안 따라줄뿐더러 이미 허리가 끌어안겨 잡혀버렸다. 불안감으로 배회하는 눈동자를 봤는지 정지운은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는 미소 지으며 얕게 키스했다. 입술 위를 핥는 혀가 달래듯 느긋했다.

“진짜야. 안 박을 거야.”

“손……가락.”

말을 하려고 벌린 입안으로 혀가 잠깐 밀려 들어왔다 나갔다. 저절로 그 감촉을 쫓아 시선이 따라갔다. 안 하겠다는 말은 어느 정도 진담인지 손가락이 아래에서 천천히 움찔거렸다. 이리저리 움직이는 손가락이 느릿하니 안에서 내벽을 문지르며 돌아간다. 또다시 허벅지 아래와 복근 등 여기저기 힘이 들어가서 아팠다. 움찔거리는 내게 작게 속삭였다.

“힘 빼라니까.”

“힘을, 어떻게 안 줘.”

“그러니까 연습하는 거잖아. 몸은 힘 빼고.”

나머지 손 하나가 피부에 닿을 듯 말 듯 가슴과 명치 근처를 맴돌다가 아랫배로 내려갔다. 

“안쪽만 느껴봐.”

“아. 그러니까…… 그게 안 된다고.”

“그러니까 연습.”

“너나 해.”

“다음에는 아래가 완전히 열릴 때까지 풀고 하자.”

옴짝달싹 못 하고 떨고 있는 내 코끝에 입술이 닿았다 떨어졌다. 아래는 젤을 넣지 않아 그런지 뻑뻑하다. 천천히 움직이는 손가락을 따라 전신에 열이 퍼졌다. 이제는 잠기운이 걷힌 눈동자가 그런 내 반응을 세밀하게 살피며 아래에서 손을 움직여왔다. 시선이 끈적하게 훑어온다. 잘근 씹는 입술이나 목울대, 오르락내리락하는 가슴까지. 외부와 차단된 이불 속은 우리 둘만을 온전히 감싸고 있었고 나쁜 장난을 치는 어린애가 된 양 자극적이다. 따뜻하기도 하고. 

손바닥이 회음부에 꾹 눌릴 정도로 손가락이 깊게 안을 눌러왔다. 순간 놀라 몸을 들썩였다. 손가락의 끝이 예민한 내부의 어딘가를 눌렀다. 흐으, 하고 신음이 새서 입을 다물었다. 그런 내 표정을 집요하게 응시하며 손가락이 나왔다 들어왔다 반복했다. 다리가 바들바들 떨렸다. 힘이 들어가지 않는데도 발가락은 움찔거린다. 

반응을 살피며 왕복하던 손가락이 안으로 깊게 치달으며 자극을 더했다. 내벽을 긁듯 손가락이 움직일 때 더운 숨이 뱉어졌다. 멍한 시야 안으로 정지운의 얼굴이 들어찼다. 입을 벌린 채 움찔거리고 있으니 혀를 내밀어 안으로 들어왔다. 짧은 키스 후에 손가락이 천천히 빠져나가며 속삭였다.

“재현아.”

“응. 어.”

“많이 아파?”

“안 돼.”

“절대?”

“절대.”

한숨이 내뱉어지고 손가락이 느릿하니 물려졌다. 뒷목이 틀어 잡혀 입술이 맞춰졌다. 흥분한 호흡이 섞이며 타액이 넘어왔다. 정신없이 혀를 빨며 삼켰다. 잡아먹을 듯 달려들었던 키스가 잦아들고 천천히 호흡이 돌아왔다. 다른 일이 더 벌어지기 전에 다리를 어떻게든 내려 바로 했다. 입술이 떨어지고 눈앞에는 열이 올라 불긋한 얼굴이 있었다. 부은 입술에 시선이 갔는데 그 입술이 움직인다.

“예쁘다.”

“예쁜 건 네가 더 예쁘지.”

“그래도.”

느긋했던 분위기 안에서 더 이상 달아오를 수 없을 거라 생각한 얼굴에 열이 훅 끼쳤다. 천천히 몸을 일으킨 그는 잠깐 밖으로 나가더니 따듯하게 적신 수건을 들고 와 몸을 닦아줬다. 이불 속에서 빠져나오니 방 안은 완전히 환해져 있었고 나는 남아있던 흥분감이 확 식는 것을 느꼈다. 내가 알아서 하겠다는데도 꿋꿋하게 온몸을 닦아준 정지운은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하는 나를 눕히고 다시 이불을 목 끝까지 덮어주었다. 그리고는 나가며 말했다.

“잠깐 있다가 룸서비스 시킬게. 누워 있어.”

“응.”

침실 밖으로 나간 인기척이 욕실로 들어갔다. 나는 베개에 기대 멍청하게 천장을 보고 있다가 미약하게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처음에는 파도 소리에 섞여 무슨 소리인 줄 모르다가 문득 알아채고는 얼굴을 붉혔다. 이불을 머리 위까지 덮어쓰고는 못 들은 척 눈을 감았다. 침실의 벽 너머로 욕실 소리가 자꾸 들린다.

∞ ∞ ∞

이렇게 잘 지냈으면서 서울로 돌아오던 날 우리는 또 싸우고야 말았다. 몸이 노곤노곤해지도록 푹 쉰 덕분에 다행히 내 발로 퇴실할 수 있었다. 불편한 근육통이 움직일 때마다 찌릿했지만, 그래도 남들 보기에 이상할 정도는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조수석에 올라타 앉자마자 엉덩이 안쪽의 말할 수 없는 부분이 욱신거렸다. 이 부분은 도대체 어떻게 할 수가 있는 게 아니다. 그저 시간이 해결해주겠지. 차가 출발하고 강원도의 높은 산자락을 뚫고 내려가는 고속도로를 따라 산을 헤치고 계속 달려갔다. 나는 습관처럼 아프다는 말을 또 툭 내뱉었다.

“아파 죽겠네.”

“미안하다니까.”

“다음에는 내가 위 할 거야.”

정면을 보고 운전하던 녀석의 얼굴이 잠깐 나를 보고는 돌아갔다. 그 와중에 걸려 있던 웃음을 나는 보고야 말았다. 그것만 안 봤어도 일이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 텐데. 옅은 비웃음이 문제였다.

“할 수 있으면 하든가.”

순간 나는 몸 안의 고통을 포함해 무언가 울컥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정지운 씨. 인간적으로 내가 이렇게 한 번 고생했으면 이젠 바꿔줘야지.”

“그거 하던 쪽이 계속해야 익숙해지는 거야.”

“꼭 위 아니어도 된다며!”

“한 번 했으면 이제 포기해라. 나 눕힐 자신 있어?”

거기서 나의 자존심은 크게 생채기가 나고야 말았다. 그렇잖아도 네놈에게 깔려서 앙앙댔던 과거가 창피해 죽겠는데. 뭐? 눕힐 자신이 있냐고? 너만 남자냐? 내 심상치 않은 눈빛을 힐끗 돌아본 정지운은 뒤늦게 제 말을 정정했다.

“그러니까. 이미 했는데……,”

“못해서 아프게 만들었으면 양심이 있어야지. 뭐? 눕힐 자신이 있냐고?”

“못해?”

녀석의 목소리도 확 커졌다.

“윤재현. 너 나 정도니까 이렇게 끝난 거지 다른 못하는 새끼였으면 진짜 죽어났어.”

“아파 죽겠는데 웃기고 있네. 나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못한 거 기억 안 나냐?”

“네가 못해서 그런 걸 나더러 어쩌라고. 게다가 잘만 느껴놓고는 무슨.”

“야! 아니야. 안 느꼈어.”

“웃긴다. 가서 당장 해볼까?”

“잘하기나 하면서 저러면. 아오.”

“재현아. 그만해라.”

“뭐!”

“내가 고작 그거 하고 네 병수발만 들고 왔는데 미안하지도 않냐?”

“고작 그거? 할 만큼 다 해놓고.”

“할 만큼 했으면 너 이박 삼 일 내내 허리도 못 들었어.”

“허세는.”

픽 웃으며 한 내 마지막 말 때문에 차 안의 분위기는 더 이상 적막할 수가 없다. 차는 산 사이를 달리고 달려 휴게소도 거치지 않은 채 서울에 도착했다. 정지운은 나를 집 앞에다 휙 내려다 주고는 인사도 없이 차를 후진해서는 바로 가버렸다. 시선을 끄는 차가 골목 너머로 사라지고 나서야 몸을 돌려 건물로 들어왔다. 

묵직한 가방을 어깨에 메고 계단을 오를 때마다 세 걸음 걷고 욕을 한마디씩 내뱉었다. 남자와 자는 건 원래 이렇게 힘든 걸까. 그게 아니라는 것은 뭣도 모르는 나라도 알겠다. 이건 다 정지운의 문제다. 너무 커서. 어떻게 그런 걸 가지고 자기가 위를 하겠다고 할 수 있는가. 이 땅에 떨어진 양심이 정말 한탄스럽다.

그날 밤 나는 네모난 자취방 침대 위에 누워 휴대폰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다행히 내 몸뚱어리는 한숨 자고 일어나면 정상 컨디션으로 돌아올 기미가 보인다. 나를 그렇게 내려놓고 쌩하게 가버린 정지운은 연락 한 자락 없다. 프로필 사진을 클릭해 물끄러미 보고 있다가 그냥 내려뒀다. SNS를 확인해봐도 오늘 얘가 올린 게 없어 뭘 하는지 모르겠다. 

내일은 연락이 올까. 아니면 내가 먼저 연락을 하게 될까. 불현듯 보고 있던 휴대폰의 액정에 불이 들어오더니 진동이 시작되었다. 창식이다. 정지운의 매니저. 번호를 준 적은 있지만 직접 연락을 해온 적은 없었기에 의아했다. 가까이 가져다 대 받기도 귀찮아서 버튼을 눌러 스피커폰으로 전환했다.

―윤재현 씨?

“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잘 지내셨어요?

“잘 지냈죠. 그런데 무슨 일이에요?”

창식이는 내가 정지운과 여행을 다녀왔다는 것도 다 알 거다. 호텔을 예약해준 게 창식이라고 들었으니 말이다. 잘 지냈냐니. 잘 알면서 물은 거다. 다른 할 말이 있을 게 너무 뻔하다. 아니나 다를까 목소리가 곧 기어들어갈 듯 우울해졌다.

―윤재현 씨. 제가 자세한 걸 묻고 싶지는 않고요.

“네.”

―다른 의도는 절대 없이, 지운이 형 기분이 안 좋은데 이유만 알고 싶어서 그러는 거니까요.

“네?”

―지운이 형이랑 싸우셨어요?

“……막 치고받고 싸우지는 않았는데요.”

―뭐가 있긴 하죠?

“아주 조금.”

―네. 휴우.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정지운 씨가 지랄해요?”

―그건 아닌데요. 그냥 이유만이라도 알고 싶었어요. 쉬세요.

힘내라는 내 말이 다 나오기도 전에 전화는 끊겼다. 나는 어두워진 액정을 보다가 옆에 내려두었다. 내가 뭐. 그렇게까지 나빴나. 아직도 내 몸 상태는 안 좋고. 난생처음 한 경험에 기분이 이상하기도 했단 말이야. 멀리까지 여행 가서 좋은 데서 잘 쉬기는 했지. 그렇기는 한데……. 못한다고 했던 거 때문에 그런가. 

원래 이 정도 말다툼이야 자주 있었으니 모른 척 넘기려 했는데 엉뚱한 사람에게서 전화가 오자 신경 쓰인다. 못한다고 한 게 그렇게 자존심 상하면, 깔려서 몸살 났던 내 자존심은 어디 있는데?

………….

제기랄. 앞으로는 창식이 번호를 차단해버려야지.

나는 바르게 누워 있던 자세를 엎드린 자세로 바꾸었다. 정기적으로 이렇게 자세를 바꿔줘야 근육통이 덜하다. 그리고는 휴대폰을 노려보다가 결국 액정 위에 손가락을 가져갔다. 통화 내역. 들어가서. 지운 오빠. 아, 이런 미친놈. 또 바꿔뒀다. 

여기서 내 인내심이 비 맞은 여린 새싹 줄기처럼 휘청거렸지만, 꾹 참았다. 머뭇거리던 손가락이 결국 통화 버튼을 눌러버렸다. 신호음이 간다. 한 번, 두 번, 세 번…… 꽤 길게 이어진다. 전화를 받을 수 없다는 안내 음성이 나오겠다 싶었는데 전화를 받았다. 상대방의 인사말은 짧았다.

―왜.

“뭐해?”

―회사.

“늦게 끝나?”

―대본 바뀐 거 보고 작품 방향 확인하려고. 왜.

“그냥…….”

알아서 일 잘하는데 창식이는 왜 나한테 전화했지. 일 안 한다고 드러누운 정도인 줄 알았더니 별거 없다. 하긴, 생각해보면 그 정도 싸웠다고 일을 안 한다고 할 놈은 아니다. 됐으니 끊는다고 말하려는데 움직이는 소리가 살짝 난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나고 배경의 소리가 작아졌다. 목소리가 나직이 물어왔다.

―아직 아파?

“어…, 어.”

할 말이 없으니 의미 없는 말만 반복되네. 건너편에서 낮은 한숨 소리가 울렸다.

―병원 갈까.

“안 돼. 절대. 그리고 나아지고 있어.”

―다음에는 어떻게든 해볼게.

“술이라도 먹고 할까.”

―술? 먹고 또 욕하려고.

“아니야.”

―아니긴.

사람 창피하게 예전에 한 번 실수한 걸 얼마나 우려먹으려는 거야. 따끈하게 열이 오르는 휴대폰을 잡고 몸을 옆으로 돌려 누웠다. 어깨가 눌리고 골반이 옆으로 세워지면서 약간 신음이 나왔다. 휴대폰을 고쳐 잡는 사이 잠깐 서로 말이 없다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몇 시에 잘 거야.

“몰라.”

-끝나고 갈게.

“왜?”

내 의문에 휴대폰 너머의 목소리가 내 말투를 따라 했다.

-몰라.

“어?”

-그냥. 기다리고 있어. 

그렇게 무슨 인사말도 없이 전화가 끊겼다. 지금 당장에라도 현관문을 열고 들어올 것처럼. 나는 통화가 끊긴 휴대폰을 베개 옆에 던지듯 내려놓고 멀뚱히 보았다. 그렇다고 휴대폰이 무슨 답을 줄 수 있는 건 아니었다.

화해는 따로 안 해도 되나. 어영부영 넘어간 대화를 생각해보다가 에라 모르겠다 싶어서 내버려 뒀다. 대신 왜 오는 건지 생각해봤다. 먹을 거라도 사 오려나. 이유를 생각해보다가 피식 웃었다. 

왜겠어. 우리가 그렇고 그런 사이니까 오는 거겠지. 고민을 묻어둔 채 자세를 고쳐 누웠다. 누가 보는 것도 아닌데 민망함이 번져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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