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5
더운 듯 안 더운 듯 애매한 날씨였지만 햇볕만큼은 아직 따갑다. 나는 지하철역 앞에 서 있다가 나무 그늘 아래로 슬쩍 몸을 옮겼다. 지하철역 근처에는 나 같은 모양새로 누군가를 기다리듯 어슬렁거리는 사람들이 여럿 보인다. 시간은 열두 시 반이 다 되어간다. 이 정도 지각이야 각오했던 것이라 별생각이 없었다.
지하철 입구에서 사람들이 무더기로 쏟아져 나오기를 몇 번 거치자 저 아래서 수연이가 커다란 쇼핑백을 두 손으로 들고 낑낑거리며 올라왔다. 나는 계단을 내려가 그것을 받아 들었다. 묵직한 무게가 손에 실렸다. 함께 계단을 올라오는데 자기 손바닥에 자국이 남은 것을 보여주며 수연이는 당당하게 말했다.
“이렇게 무거워서 늦었어. 봐주라.”
“나 아무 말도 안 했어.”
“그러네. 뭐 먹지?”
“김치찌개?”
“맨날 그런 것만 먹냐. 초밥 먹을래.”
그럴 거면 나한테 왜 물어봤나 몰라. 그래도 싫은 것은 아니라 고개를 끄덕하고 근처 일식집으로 향했다. 누군가 내게 밥을 뭐 먹겠느냐고 물어보면 저런 메뉴만 입에서 나온다. 좋아한다기보다는 다른 메뉴가 떠오르질 않는다고 할까.
우리는 오랜만에 낮에 만난 기념으로 일부러 런치 할인이 되는 곳을 찾았다. 인터넷 검색을 통해 찾은 일식집은 지하철역에서 꽤 먼 구석에 떨어져 있었다. 같이 걸어가다 보니 묵직한 쇼핑백의 무게가 손바닥을 점점 짓눌러오더라. 그래도 다른 손으로 바꿔 들기 전에 음식점에 도착해 벽 근처 구석 자리에 앉았다. 점심시간인데도 빈자리는 드문드문 있어서 그렇게 시끄럽지 않다.
초밥 세트 두 개를 주문하고서 물컵에 물을 따르고, 수저까지 제자리에 놓고 기다리게 되었다. 나는 아무 생각이 없어서 테이블의 가짜 나무 무늬를 보고 있었고 수연이는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할 일이 다 끝났는지 휴대폰을 테이블 위에 소리 나게 탁 덮어둔다. 그 소리에 번뜩 정신이 들며 수연이와 눈이 마주쳤다. 잠깐 보다가 약간 부담스러워서 시선을 수연이의 둥근 턱으로 고정시켰다. 서빙하는 아르바이트생이 반찬과 된장국을 놓고 갔다. 수연이는 수저를 들어 된장국을 휘휘 젓다가 문득 의자에 올려둔 쇼핑백을 가리켰다.
“이따 집에 가서 냉장고에 바로 넣어.”
“응. 어머니께 고맙다고 전해드려줘.”
“엄마도 너한테 고맙다고 전해달래.”
“왜?”
“나랑 잘 놀아주니까?”
피식 웃음이 새었다. 그렇게 치면 수연이도 나랑 잘 놀아준다. 그리고 또 침묵이 잠깐 찾아왔다. 초밥 세트가 우리 사이에 차려졌다. 각자 열두 피스씩. 나는 하얀 생선 살에 간장을 잔뜩 발라 입에 넣고 우물거렸다. 오랜만에 먹는 초밥이다. 우리는 묵묵히 밥에 집중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새 초밥은 죄다 사라졌다. 나는 젓가락을 가지런히 해서 들고는 서비스로 나온 우동을 먹었다. 우동도 먹고 나니 할 일이 없다. 수연이는 연어초밥을 젓가락으로 콕콕 찌르다가 입에 넣었다. 불쑥 지금 이야기를 꺼내는 게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따 카페에 가서 각 잡고 이야기하는 것보다는 먹을 것에 정신 팔리고 적당히 시끄러운 여기가 낫지 않을까 싶어서. 그래서 말을 시작했다.
“수연아. 내 친구 이야기인데.”
“어어, 그래.”
수연이는 초밥을 우물거리며 건성으로 대답했다. 가볍게 대하는 태도에 자신감이 붙는다. 그래, 역시 지금이야.
“사귀기는 애매한 사람이 자꾸 사귀자고 하면 어떻게 하지.”
“왜 사귀기 애매하대?”
“어. 그게…….”
“안 좋아한대?”
“……그건 아닌 거 같아.”
입술을 잘근잘근 씹다가 결국 이렇게 대답했다. 아무것도 아닌 대답이지만, 나는 고작 이거 하나를 인정하는 데에도 개월 단위의 시간이 필요하다. 나도 이런 내가 답답하지만, 나는 이런 사람이다.
“그럼 만나면 되잖아.”
나오는 대답은 더할 나위 없이 경쾌하다. 그래, 그게 쉬우면 얼마나 좋을까.
“그렇기는 한데, 못 만날 이유가 있으면 어쩌지.”
“무슨 이유?”
“어. 그게.”
이유의 가짓수가 많은 것은 아닌데 하나하나가 너무 거대해서 나는 정말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수연이가 또 하나의 초밥을 드는 동안 나는 눈꺼풀을 깜빡이다가 다시 한 번 강조했다. 이것은 내 친구의 이야기다.
“그러니까 그 친구가 왜 안 사귀냐면.”
“응. 그래, 그 친구.”
“문제가 있거든.”
“못생김?”
“아니, 겉보기에 아주 좋아.”
“성격이 나빠?”
여기에서 약간 흔들렸다. 쉽게 대답하려던 말이 선뜻 나오지 않아 잠시 눈을 깜빡이다가 대답했다.
“얼굴값 하는 정도야.”
“넘어갈 만은 하나 보네.”
“응.”
“그럼 성격이 안 통해?”
“아니. 이야기하면 시간도 잘 가고 재밌대.”
“그럼 뭐가 문제야.”
그러게. 수연이가 워낙 문제 되지 않을 것들만 물어보다 보니 이런 대화가 되어버렸다. 답은 정해져 있으니 너는 대답이나 해라, 같이.
되짚어보니 그렇다. 잘생겼지, 성격은 좀 모났지만 같이 있으면 재밌고. 그런데 왜 가장 중요한 게 맞지 않을까. 정지운은 너무 아무렇지 않게 여기지만 내게는 중차대한 그것 말이다.
“문제가 말이야. 내 친구가 남자인데.”
“아, 젠장. 그래, 니 친구. 알았다고.”
“그 상대방이…….”
“뭐야. 다른 남친 있는 여자야?”
“아니. 그건 아닌데.”
“헉! 설마 이미 결혼한 사람은 아니지?”
그 와중에 불쑥 궁금증이 떠올랐다. 남자와 연애하는 게 문제일까, 아니면 이미 결혼한 사람과 연애하는 게 더 문제일까. 그래도 이미 결혼한 사람을 바람피우게 하는 것보다는 솔로 남자와 연애하는 게 더 낫지 않을까? 그런 말도 안 되는 비교를 하고 있자니 마음이 새털만큼이나마 가벼워진다. 그래, 그래도 가정파탄범보다는 나을지도 몰라. 조그맣게 반짝이는 불빛 하나가 내 가슴속에 번졌다.
“그건 아니고, 남자래.”
“어?”
“남자라서 문제래.”
“어?”
“그래도 유부녀보다는 낫지 않을까… 싶은데…….”
내 말 한 마디마다 시시각각 변해가는 수연이의 표정을 보며 겨우 말을 끝마칠 수 있었다. 수연이는 멍하게 나를 보고 있다가 손에 잡히는 대로 된장국을 그릇째 들고 꿀꺽꿀꺽 삼켰다. 천천히 고개를 들며 비워가는 모습을 보다가 나도 손으로 더듬거려 물컵을 찾았다. 물. 물을 마시자. 나와 수연이가 동시에 손에 들고 있던 것을 테이블에 탁 소리가 나게 내려두었다. 나는 재빠르게 덧붙였다.
“친구가 그렇다는데 뭐 어쩌겠어. 하하하하.”
“아. 그래. 그 친구 참. 그렇구나!”
그래, 이것은 수연이가 모르는 친구의 이야기인 것이다. 나 자신도 그렇게 마음속으로 다짐하며 수연이와 마주 보며 웃었다.
서로 마주 보며 그렇게 길고 긴 시간을 활짝 웃고 있었다. 가슴속의 불빛이 서서히 꺼져간다. 역시나 정지운에게 물들었어. 다시 생각해보니까 아무리 유부녀라 해도 여자랑 만나는 게 나을 거 같아.
잠시 현실 도피에 빠진 사이 수연이는 멍하니 자리에서 일어나 먼저 계산대로 다가갔다. 내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쫓아갔지만 이미 계산이 끝나 있었다. 옆으로 열리는 나무문을 드르륵 열고 나서는 수연이를 따라가며 우물쭈물 말을 건네자 천천히 나를 돌아보았다.
“내가 사려고 했는데, 미안.”
“아니 됐다……. 뭐 단 거 좀 먹자.”
“단 거?”
“케이크나 아이스크림 같은 걸로.”
수연이는 내 왼팔을 부여잡으며 얼떨떨한 표정이 되어 단 음식을 자꾸 찾았다. 근처의 디저트 카페까지 걸어가는 데에도 계속 주문처럼 먹을 것들을 말하더라. 초코 음료, 아포가토, 치즈 케이크 등등. 나는 아무 소리도 못 하고 끌려가 검고 붉은색으로 장식된 디저트 카페에 자리 잡았다.
케이크 두 개에 초콜릿 음료 하나, 나는 아메리카노 한 잔. 우리 사이로 서빙된 케이크는 수연이의 포크 아래서 금세 제 모습을 잃고 흐물흐물해져 갔다. 다디단 케이크를 먹으며 초코 음료까지 쪽쪽 빨아 마시는 수연이를 보며 나는 조용히 아메리카노를 마셨다. 그러다가 나도 포크를 들고 케이크를 입에 떠 넣었다. 치즈 케이크 하나와 딸기 케이크 하나가 순식간에 배 속으로 사라졌다.
수연이가 멍한 표정으로 초코 음료를 빨길래 나는 카운터에 가서 티라미수 케이크 하나를 더 시키고 자리에 앉았다. 서빙되어 온 티라미수를 절반 정도 퍼먹고 나서야 수연이는 포크를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따라 포크를 내려놓으려는 내 손등을 난데없이 철썩 내리쳤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화들짝 놀라 포크를 움켜쥐었다. 아프지는 않은데 얼떨떨했다. 수연이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당황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야. 대체 갑자기 왜 그런 일이 생겼대?”
“뭐가?”
“그래, 그 친구. 왜 갑자기 남자에게서 고백을 받아.”
“글쎄. 왜 그럴까.”
“이유 몰라?”
“응. 나는… 모르지…….”
나는 정말 이유를 잘 모르겠다. 내가 정지운과 연락하고 있는 사이라는 것도 여전히 조금은 어색한걸. 수연이는 양손을 마주 잡아 만지작거리다가 다시 내게 물었다.
“그래서 그 친구는 그 고백을 받고 고민을 하고 있어?”
“응. 그런 거 같아.”
“그냥 거절하면 되잖아.”
“그래서 친구 하자고 했는데.”
“어.”
“그쪽이 사귀는 거 아니면 싫다고 했나 봐.”
“그래서, 그 친구는 고민한데?”
“응…….”
“왜 고민해. 못 사귀면 걷어차야지.”
“그게, 사람은 괜찮아서. 친구로라도 두고 싶으니까 그런 거 같아.”
“아하. 그 친구분께서는 남자에게 고백을 받았는데 기분이 그리 나쁘시지는 않았고, 자기에게 고백한 남자를 친구로라도 두고 싶어서 고민이시다, 이거야?”
여기서는 차마 웃음이 나오질 않았다. 그러게. 윤재현 씨는 도대체 왜 고민을 할까요. 더구나 저렇게 들으니까 굉장히 어장 관리같이 느껴지고 그렇다. 천천히 끄덕여지는 내 고개를 보며 수연이의 얼굴이 구겨졌다.
“노답이네, 그 친구.”
“걔가 그렇게까지 나쁜 애는 아니야.”
“왜 인마. 니 친구 욕 좀 하는 게 잘못이냐.”
“그 친구도 나름 마음고생이 얼마나 심했겠어.”
“아니면 아예 걷어차 버려야지, 옆에 두고는 싶다는 게 무슨 생각이야. 아예 고백하는 사람 마음도 고민해주지그래. 얼마나 힘들었을까 하고.”
딱히 정지운이 힘들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지만, 억울함보다는 나에 대한 현실 직시가 가슴 아팠다. 내가 그래. 좀 그렇지만. 응? 나도 생각이 많아서 그런 걸 어쩌라고.
“그 친구는 얼마나 힘들었겠냐. 남자가 갑자기 저 좋다는데 마음의 준비가 좀 필요하지 않겠어? 생각도 정리하고 말이야.”
“결국은 받아주려고 그런가 보다?”
“어? 아. 그런가……. 그건 아닐 수도 있지.”
“아니긴 뭐가 아냐. 같은 성별이 고백했는데 남한테 고민 상담을 해? 아니다 싶으면 냅다 걷어차고 친구들한테 이런 일 있었다고 쌍욕 하고 있는 게 정상이거든?”
입술이 말랐다. 그러니까. 그게 말이야. 하지만 수연이는 내 뒷말은 들을 생각도 없는지 내 앞의 커피를 휙 낚아채 가 꿀꺽꿀꺽 들이켰다. 피로 때문에 눈앞이 흐리다. 그래, 다 내 잘못인가 보다. 문득 단 게 당겨서 포크를 들고 묵묵히 티라미수를 퍼먹었다. 나도 초코 음료 시켜다 먹을까. 머리가 띵하다.
“그럼 어떻게 해?”
퍽퍽한 목으로 이렇게 물었다가 기침이 나왔다. 켁켁거리는 내게 수연이는 물잔을 밀어준다. 받아 들고 투명한 유리잔의 물을 다 마시기도 전에 나온 대답은 단호했다.
“어떻게 하긴. 무시해야지.”
“쿨럭쿨럭, 어?”
지금까지의 대화와 방향이 달라서 놀랐다. 인정하라며 윽박지를 때까지만 해도 이런 태도가 아니지 않았나. 물을 꿀꺽 삼키고 앞을 보자 수연이가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동글동글한 눈동자에 전에 없이 진지함이 가득했다.
“만날 거야?”
“어……?”
할 말을 잊고 멍해진 나를 보며 수연이는 한숨을 푹 쉬고 손에 잡힌 빈 컵을 만지작거렸다.
“그 친구 그래서 남자랑 연애할 거래?”
“아직 잘 모르겠어.”
“설마, 하겠니. 아니지.”
문장의 끝이 묘하게 단정형이다. 수연이는 더 말을 잇지 못하고 가슴께까지 내려온 긴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배배 꼬며 만지작거렸다. 나를 보는 눈길이 자꾸 방황했다. 나는 수연이에게 무엇이든 묻고 싶었지만, 너무 많은 대화를 ‘내 친구가’라고 시작했던 탓에 쉽사리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말하는 기색이 이미 알아챈 것 같기는 했다. 그래도 에둘러 말하던 것을 한 번에 밝힐 용기가 없다.
나는 왜 이런 사람일까. 가벼운 자괴감이 자꾸 들려 했다. 명백한 선택을 할 줄도 모르지, 선택의 결과는 무섭지. 나는 뭘 어떻게 할 수 있을까. 흘러가는 일의 행방을 내 손으로 정하기가 무섭다. 정지운이 자꾸 내게 선택을 종용하는 것도 부담스러워. 책임, 두려움, 걱정. 모든 것이 가슴 속에서 버무려져 답답했다. 크게 숨을 쉬어도 답답하다.
카페에서 음악이 몇 번 지날 때까지 자리에 앉아있다가 우리는 함께 일어났다. 내 마음만큼이나 무거운 반찬을 손에 들고 집으로 향했다. 수연이는 내게 빌릴 책이 있어 걸음을 같이했다.
별로 한 것도 없는데 벌써 저녁이 되려 한다. 걸음을 조금 늦춰 수연이의 보폭에 맞췄다. 내가 배려심 넘치는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같이 다닐 때 이걸로 워낙 많이 얻어맞아서 그렇다. 얘는 내 걸음이 빠르면 천천히 걸으라고 때리고 내가 자기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듣지 않는 것 같아도 때린다. 그래서 이제는 맞춰주는 게 가장 편하다는 것을 안다. 그리고 실제로도 제일 편하고.
알고 지낸 게 몇 년이지. 초등학교 때 옆집이었지. 2학년이던가 3학년이던가. 수연이네 어머니께서 가끔 외출하실 일이 있으면 얘를 우리 집에 두고 가셨었지. 여름에 그냥 집에 두고 갔더니 냉장고 문을 열고 하루 종일 그 앞에 앉아있곤 하다가 전기세 폭탄을 맞은 이후로 항상 우리 집에 데려다 놓고는 가셨었다.
인도와 차도의 구분이 없는 골목을 걷다가 차가 진입하자 우리는 벽 쪽으로 바짝 붙었다. 다시 걸음을 옮기다 보니 저 멀리 내 자취방이 눈에 들어온다. 담이 낮은 가게 안의 정원을 들여다보던 수연이가 문득 나를 불렀다.
“윤재현.”
“응.”
“너는 내가 어렸을 때 옆집에 살아서 모든 걸 보지 않았다면 말이야. 아무것도 말을 안 했을 놈이야.”
“갑자기 무슨 소리야?”
내가 종잡을 수 없는 말을 한 데에 대한 복수일까. 수연이는 내 마음을 아예 싱숭생숭하게 만들려 작정했는지 이런 말을 중얼거렸다. 나를 슥 훑어보고는 변함없는 속도로 걷는다.
“그렇잖아. 넌 무슨 말을 안 해. 그리고 안 해도 될 고민까지 다 끌어안고.”
“왜 그래.”
“답답해서 그런다.”
무슨 말이냐고 캐물어도 수연이는 입을 꼭 다문 채 계단을 딛고 올라 유리문을 확 당겨 열었다. 누구 집인지 모를 만큼 당당한 걸음이었다. 닫히려는 유리문을 다시 밀고 들어가 입구 옆 우편함에서 공과금 영수증을 찾는 사이 2층에서 큰 목소리가 들렸다.
“야. 비밀번호 *0824* 맞냐?”
“고맙다. 덕분에 비밀번호 바꾸겠네.”
“목소리 컸나?”
“온 동네 사람들이 다 들었겠다.”
휴우. 말을 말자. 어릴 때 키웠던 강아지를 데려온 날이라 이미 습관이 된 번호다. 수연이는 번호 키를 꾹꾹 눌러 현관문을 열고 먼저 들어갔다. 나도 그 뒤를 얼른 따라 들어가 문을 닫고 신발을 벗었다. 다음 비밀번호는 어떤 걸로 할까.
디리링 하는 소리와 함께 도어락이 저절로 잠겼다. 쇼핑백에서 꺼낸 반찬들을 냉장고에 어떻게든 밀어 넣는 사이 수연이는 책장의 책을 뒤진다. 심상치 않은 소리가 나서 뒤를 돌아봤더니 책장 앞에 올려뒀던 볼펜 몇 개를 떨어트린 거였다. 뭐 하나 조용히 하는 게 없을까. 신기하기도 하지. 나는 손가락으로 그 아래 단을 가리켰다.
“그 아래 맨 끝에 꽂혀 있잖아.”
“그러네. 고마워. 다음에 줄게.”
“너희 학교 도서관에는 없어?”
“이거 과제 도서라고 나온 날 다 빌려 갔더라.”
“빨리 좀 움직이지.”
“그럴걸. 무겁다.”
수연이의 손아귀로 겨우 쥔 책은 양장본에 천 페이지가 넘어가기 때문에 보통 무게가 아니다. ‘프랑스 문화와 사상의 이해’라는 금박의 제목이 두꺼운 책의 옆면에 박혀 있다. 정말 과제가 아니라면 결코 열어보지 않게 생겼다. 나도 저 책 빌려서 내려오다가 팔 빠지는 줄 알았지. 들고 온 가방에 어떻게든 넣으려고 낑낑대는 모습을 보다가 혀를 찼다.
“작은 쇼핑백에 담아가.”
“있으면 하나만 주라.”
막상 찾으려니 어디 뒀는지 기억나질 않는다. 수연이가 잠깐 책상 앞 의자에 앉은 사이 나는 방 안 이곳저곳을 뒤졌다. 작은 냉장고 옆의 틈 사이도 살펴보고 그 위의 전자레인지 뒤를 봐도 보이질 않는다. 지난번에 선물을 담았던 작은 쇼핑백이 있었는데 어디 갔을까. 찬장을 열고 위를 올려다보다가 맨 위 칸에서 연두색의 쇼핑백을 찾았다.
손가락 끝으로 그것을 집어 내리고 돌아서는데, 갑자기 문을 똑똑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수연이가 의자에서 몸을 일으키다가 엉거주춤 나를 봤다. 나는 현관을 한 번 보고 작게 고개를 흔들었다. 1층 출입구에서 번호 키를 누르고 들어오는 구조가 아니다 보니 교회 전도나 무언가를 팔려는 사람들이 가끔 오곤 했다. 수연이도 무슨 뜻인지 알아들은 듯 조용히 내게 손만 내밀었다. 나는 쇼핑백을 건네줬다. 다시 한 번 똑똑 현관문이 두드려지더니.
쿵쿵.
이번에는 힘이 실린 소리가 현관문을 울렸다. 주먹으로 두드린 것 같다. 우리 두 사람의 시선이 동시에 현관문으로 돌아갔다. 이번에는 나도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보통 안에서 아무 소리도 안 들리면 그냥 가는데 오늘은 왜 저러지. 수연이가 조심스레 쇼핑백을 열고 안에 책을 밀어 넣으며 속삭였다.
“뭐야?”
“잠깐 있다가 가면 나가.”
수연이는 고개를 끄덕끄덕해 보이며 다시 의자에 앉으려 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쿵 하는 소리를 넘어서 쾅 하는 소리와 함께 현관문의 아래가 덜컥거렸다. 눈살을 찌푸리며 흔들린 현관문의 아랫면을 바라봤다. 각도를 보니 누가 아예 발로 걷어찬 모양인데.
어느 싸가지 없는 놈이 남의 집 문을 걷어차는 거야? 현관문 앞으로 다가가 작은 도어 렌즈에 눈을 가져다 대려는 순간 또다시 문이 쾅 걷어차였다. 나도 성질이 나서 목소리를 높이려 했는데.
“윤재현.”
들릴 리 없는 낮은 목소리가 밖에서 들려오자 현관문을 짚고 있던 손끝이 차갑게 식는 것을 느꼈다. 밖을 내다볼 필요도 없었다. 급박한 마음에 뒤를 휙 돌아보자 수연이가 의자에 앉아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본다. 입 모양으로 내게 물었다. 아는 사람이냐고.
나는 고개를 저으려다가 애매하게 멈춰서는 끄덕이기를 거부했다. 어디 아픈 애처럼 보였을 게 뻔하다. 안절부절못하고 현관문의 도어락을 열어야 하나, 아니면 나도 걷어차서 쫓아내야 하나 고민하는데 밖에서 소리가 또 들렸다.
“후. 윤재현. 안 열어?”
두꺼운 현관문 너머 전달되는 목소리는 비정상적으로 부드러웠다. 마치 목줄을 잡아채기 전 마지막 관대함 같았다. 그냥 마주쳐도 답이 없는 수연이와 정지운인데, 심지어 정지운의 기분이 바닥이라니. 점점 더 현실을 도피하고 싶다. 하물며 내 집에서 만날 줄이야.
그런데 정지운은 기분이 왜 저렇게 바닥일까. 왜? 왜지? 게다가 왜 내 방문 앞에서 지랄이야? 나도 문을 열고 미친놈 아니냐고 소리 지르고 싶은데, 뒤에 있는 수연이 때문에 차마 열 수가 없었다.
어쩌지. 수연이를 화장실에 밀어 넣을까? 아니면 침대 아래라도……. 아, 돌았나. 이게 무슨 생각이야. 혼란이 초조하게 숨통을 옥죄어오던 중 밖에서 목소리가 다시 한 번 들렸다.
“윤재현 너 여자애랑 안에서 뭐해. 나 갖고 노냐?”
“으아아아아악! 야, 조용히 해! 야!”
“열어, 이 문!”
비명 섞인 내 절규에도 정지운의 목소리는 또렷하게 방 안에 들렸다. 수연이마저도 의자를 밀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손에 들고 있던 쇼핑백은 책상 위에 던져두다시피 하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표정이 이미 심상치 않았다. 나는 손을 휘저으며 이쪽이라도 말리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수연아. 내가 알아서 할게.”
“밖에 저거 뭐야?”
“그, 글쎄! 누구지?”
“니 이름 부르잖아. 열어봐. 뭐 하는 사람이야? 경찰 불러.”
“아니, 수연아!”
얘는 진짜 겁도 없는 게 잽싸게 내 뒤의 현관문을 열려 달려들었다. 나는 수연이의 몸을 어떻게든 잡아채서 떨어트리려 했지만, 허리 옆으로 쏙 빠져나간 팔까지 막지는 못했다. 뒤에서 디리링 하는 소리와 함께 도어락이 풀렸다. 어깨로 수연이의 몸을 어떻게든 밀어내려다가 기겁해서 떨쳐내고 뒤를 돌아봤다.
문이 벌컥 열렸다. 분명 빠른 속도로 열렸을 텐데 내 눈에는 이 세상 그 무엇보다도 느렸다. 그보다 더 느린 것은 그것을 막으려는 내 손의 속도였다. 손끝에 아슬아슬하게 스친 손잡이가 멀어지고 정지운이 눈동자 가득 분노를 담고 안으로 걸음을 들였다. 이런 시발, 심지어 마스크도 안 한 맨얼굴이었다.
나는 망연자실한 채 현관에 들어선 정지운의 턱 끝을 올려다봤고 갈색의 눈동자가 나를 훑었다. 그리고 스르륵 움직여 내 옆의 수연이도 훑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수연이는……
“히이이이익. 어. 어. 어어! 으아악-!”
수연이의 비명에는 단계가 있었다. 일단 정지운의 얼굴을 보고 숨을 들이켰고 그다음엔 숨이 막힌 듯했다. 그리고 높디높은 비명이 크게 방을 울려 복도까지 뻗어 나갔다. 나는 더듬더듬 정지운 뒤의 현관문 손잡이를 잡아당겨 문을 닫았다. 끊겨버릴 듯한 정신 속에서 그나마 소리를 조금이라도 차단하고 싶었다. 다시 도어락 돌아가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이번에는 고요해졌다. 정지운은 나와 수연이를 번갈아 보다가 제 머리를 이마부터 신경질적으로 쓸어 올렸다. 비스듬히 나를 보는 눈에 불꽃이 튀었다.
“안에서 뭐했어?”
대답하는 내 목소리가 갈라졌다.
“뭘 하긴. 아무것도 안 했어.”
“낮에 만났으면 이제 헤어질 때도 됐지, 집까지 데리고 들어가서 뭐하냐?”
“내 마음이지 지금 뭐하는 짓이야. 문은 왜 걷어차고 화는 왜 났어? 존나 웃기네.”
눈앞의 정지운이 왜 화가 났든 나도 화가 치밀어 올라 참을 수가 없었다. 남의 집 앞에는 대체 언제 와 있었고, 수연이랑 들어가는 건 또 어떻게 봤단 말인가. 그리고 들어가면 들어갔나 보다 할 것이지, 문을 걷어차는 건 무슨 당당함이고. 어? 손마디의 관절을 뚝뚝 꺾으며 노려보자 그런 나를 마주 보는 눈빛도 만만치 않았다.
“지난번에도 물었지. 내가 너 데리고 장난치는 걸로 보여?”
“장난 같다고 한 적도 없는데 왜 자꾸 그따위로 물고 늘어져.”
내 말에 정지운의 꽉 쥔 주먹이 현관 옆에 놓인 허리 높이의 신발장을 내리쳤다. 쾅 한 번 내리치고 그러고도 화를 못 이기겠는지 또 내리쳤다. 무너지지 않을까 걱정될 만큼 큰 소리가 났다. 다 때려 부수기로 작정을 했나. 자꾸 차오르는 화 때문에 이가 갈렸다. 이 새끼는 지금 눈에 보이는 게 없나 옆에 다른 사람도 있는데……
아. 수연이.
수연이는 입을 떡하니 벌린 채 서서는 홀린 듯 정지운의 행동 하나하나를 눈으로 좇고 있었다. 그러다 내 눈빛에 퍼뜩 정신이 든 듯 나를 올려다봤다. 그러고도 정지운을 한 번 더 돌아보고 내게 겨우 시선을 돌렸다. 일단 얘부터 보내야 무슨 말이든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최대한 침착하게 말하려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수연아, 너 지금 가야겠다.”
“어…… 그래. 내가 더 들을 게 아닌 것 같다. 나 갈게. 가방.”
책상 옆에 뒀던 가방을 들고는 신발을 구겨 신는 수연이에게 정지운은 몸을 옆으로 비켰다. 손을 뻗어 현관문도 열어줬다. 이놈이 그래도 아직 완전히 미친놈은 아닌 것 같아 화가 약간 가라앉는다. 그리고 고작 저거 하나 했다고 이런 맘이 드는 내가 싫다. 짜증나. 이게 지금 무슨 미친 짓거리야.
수연이는 다시 고개를 들어 정지운을 멍하게 보다가 현관문 밖으로 몸을 빼냈다. 그리고 문을 닫기 전 주저하다가 나를 불렀다.
“윤재현. 있잖아.”
“왜.”
“대체 왜 지운 오빠인지는 모르겠는데…… 잘해봐라.”
“…….”
“연락해!”
“…….”
수연이는 진짜 믿기지 않는 말을 남기고는 여전히 시선을 못 떼며 천천히 현관문을 닫았다. 그리고 발소리가 조금씩 멀어졌다. 나는 내가 잘못 들은 줄 알았다. 잘해보라고? 뭘 잘해봐. 이 상황에서? 정지운인데? 그게 할 말이야? 수연이 쟤는 지금 제정신일까.
몰아치는 배신감과 약간의 회의감이 드는 와중에 정지운도 닫힌 현관문에서 아직 눈을 떼지 못했다. 들은 말이 놀랍기는 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묻는 말은 아직 날카로웠다. 재수 없게도.
“저 애 누구야.”
“아, 정수연이야! 같이 콘서트 다니고! 초등학교 때부터 옆집인! 어릴 때 나랑 계란 후라이에 케찹 같이 뿌려 먹던 사이라고!”
나는 절규와 같은 소리를 내뱉으며 자리에 쭈그려 앉았다. 더 이상 기운이 남아나질 않는다.
“흐어어엉, 이게 뭐야!”
엉덩이를 붙이고 털썩 주저앉자 절로 우는소리가 나왔다. 무슨 일이 이따위로 꼬이는 걸까.
물론 수연이가 아까 밥 먹으면서 한 이야기를 내 친구 이야기라고 온전히 믿어줬을 것이라 생각하진 않았다. 이미 눈치를 챈 듯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만큼이 오늘 이 시점 내 마음 안에 준비된 자리의 전부였다. 어쩌면 좀 더 시간이 지나 그것이 내 이야기라고 스스로 말을 꺼낼 수도 있다. 정지운이라는 이름을 언급하는 날이 왔을 수도 있다.
하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그것도 고작 책 좀 찾겠다고 함께 자취방에 들어와 있는 이 순간. 그리고 정지운이 이렇게 내 집 문을 걷어차며 나오라고 소리 지르는 상황은 결코 아니었다는 말이다. 자꾸 뇌에 과부하가 걸린다.
머리 아프다. 무슨 놈의 인간이 진짜 연애하는 것도 아닌데 이렇게 사람을 들었다 놨다 하는 걸까. 짜증나. 짜증난다는 것을 인식하자 화가 울컥 올라왔다. 이놈은 지만 성질이 있는 줄 아나. 이대로는 못 참겠다 싶어 멱살이라도 잡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닥을 짚고 벌떡 일어서려는데 갑자기 양어깨를 내리누르는 손이 느껴졌다. 도로 제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것도 짜증났다. 고개를 들어 노려보려는데 정지운이 천천히 나와 시선을 맞춰 무릎을 바닥에 대고 앉았다. 신발은 벗지도 않은 채였다. 우리의 시선이 맞추어졌다. 누구 하나 눈에 힘을 풀지 않고 마주 노려봤다. 숨소리만 교차되는 시간이 지났다. 짜증낼 타이밍을 놓친 사이 정지운의 말이 더 빨랐다.
“윤재현. 너는 말이야. 내가 왜 화났는지 이해가 안 돼?”
물어보는 목소리가 진지해서 나는 뻑뻑해지는 눈을 깜빡이며 되물었다.
“그러는 너는 내가 화난 게 이해가 안 되는 것 같다?”
이야기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간다. 그래도 물러설 생각은 없었다. 내 어깨를 꽉 쥐어오는 정지운의 손아귀가 단단해져 간다. 잡힌 부분이 뻐근하게 아파왔지만 표정을 계속 굳혔다. 일순간 어깨가 놓아지고 손이 풀렸다. 작게 한숨을 쉬며 내 팔을 쥐고 있던 양손으로 자기 얼굴을 덮었다 뗀다. 그 짧은 사이 흰 얼굴에 피곤이 내려앉은 듯 보였다.
“내가 너희 집 문 걷어차고 나오라고 지랄하고. 니 친구 앞에서 할 말 안 할 말 안 가린 거?”
“그렇게 잘 알면 하지 마.”
“그럼 이건 어때. 내가 왜 상식 밖의 짓을 했을까.”
“그건.”
내 목소리는 쉽게 말을 만들어내지 못했다.
“나는 왜 저녁 시간에 너희 집 근처에 차를 대고 있었을까. 니가 여자랑 걸어오는 걸 보고 몇 시간을 그 여자랑 보냈을지 계산을 왜 했을까. 니가 그 여자랑 집에 같이 들어가는 것을 보고 왜 따라 올라와서는 문을 두드렸을까. 걷어차서라도 너를 끌어내려고 한 이유는 뭘까.”
“…….”
“왜 내가 너에 관련된 저 모든 일에 성질이 났을까.”
“저기 말이야.”
나는 무슨 말을 하려고 했던 걸까. 어쨌든 시작은 저렇게 운을 띄웠다. 그리고 다시 말이 막혔다. 여기에서 나올 대답은 어떻게든 달리 표현해보려 해도 결국 하나다. 자꾸 치사한 생각이 마음에 끼어들었다. 다음 달까지라며. 그런데 왜 지금 이렇게 직접적인 대답이 필요한 걸 묻는 거야.
그런 내 기색은 아마 숨겨지지 않았을 거다. 그리고 정지운은 나름 연기를 하는 사람이고 많은 사람들 앞에 서는 직업이니 내 기색을 읽었을 거라 생각했다. 서둘러 표정을 관리하기도 전에 시선이 나를 더듬었다. 맞추고 있던 시선이 턱 언저리까지 내려갔다.
“오늘도 대답 안 해줄 거지?”
“…….”
“알아.”
정지운의 말 사이에는 아주 짧은 간극만이 있었다. 내가 긴 시간 입을 다물고 있었던 게 아니다. 자기가 알아서 저렇게 담백하게 끝맺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구김이 가려는 제 바지의 무릎 근처를 탁탁 턴다. 그리고는 나를 내려다보다가 내 팔을 잡아당겨 자리에서 일으켰다.
힘이 셀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는데 순식간에 딸려 올라가 두 다리로 서게 됐다. 얼떨떨했다. 평소 같은 표정이 된 정지운은 처음으로 들어온 내 방 안을 둘러봤다. 좁은 방 안의 싱크대, 냉장고, 그 옆의 창문, 아래의 침대, 그 너머의 책상까지. 다 둘러보고는 나를 물끄러미 보다가 그대로 자리에서 돌아섰다. 신발 한 번 벗지 않은 채 그렇게 현관문을 열고 나가려 했다. 무심결에 불렀다.
“정지운 씨.”
잠깐 걸음을 멈칫했을 때 평소와 같이 몸을 반쯤 돌린 채 나를 돌아볼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대로 문을 열고 천천히 걸어 나갔다. 두 발이 현관문 너머로 나가고 복도를 울리는 인기척이 멀어졌다. 나는 약간 열려 바람이 새어 들어오는 현관문을 멍하게 바라보았다. 나가서 일단 잡을까 하다가도 잡아서 내가 해야 할 말이 무서웠다. 그래서 후회는 엉뚱한 곳으로 튀었다.
형이라고 불렀으면 아까 자리에서 멈췄을까. 그 하나가 지금의 내가 마음 편히 할 수 있는 후회였다.
열린 현관문의 틈 사이를 물끄러미 응시하다가 다가갔다. 문을 닫았다. 도어락 돌아가는 소리가 조용한 방 안을 울린다. 내가 그렇게나 원하던 고요다. 가열됐던 분위기가 가라앉으며 현실적인 생각이 불쑥 솟아났다. 옆방의 여학생은 오늘 방 안에 있었을까. 걱정스러웠지만 뭐 어떻게 하겠나 라는 생각도 같이 들었다.
그러게. 모든 일은 어떻게 되려고 이러는 것일까. 이렇게까지 답이 없는 경우는 처음이다. 요즘 들어 습관이 된 듯한 한숨을 내쉬며 창가로 다가가 몸을 내밀었다. 바깥에서 정지운의 흔적은 찾을 수가 없었다. 차를 어디에 대놨을지, 어떤 차를 가져왔을지도 잘 모르겠다. 거리는 한산했고 주말을 맞은 대학생들은 편안한 옷차림으로 길을 걷고 있었다. 맞은편의 편의점과 그 너머의 학교 담벼락. 모든 것이 일상적이다. 이렇게 일상적인 배경에서 정지운만이 튀었다.
창가에 기대서서 머리를 헝클어트리다가 창틀에 이마를 댔다. 살면서 많은 일이 있었다. 부모님께 이혼의 위기가 닥쳤을 때, 성적이 잘 나오지 않았을 때, 집안에 문제가 생겼을 때. 보통 그 모든 일은 ‘착하다’라는 표현을 들을 정도로 수그리고 버티면 지나갈 수 있었다. 아니면 모든 사람들이 맞다고 여기는 길을 같이 걸으면 해결되었다.
하지만 이번 일은 지금까지 살아왔던 방법으로는 해결되지 않는다. 자꾸 꼬이기만 한다. 모르는 척 외면하면 정지운은 멱살이라도 잡아다 나를 질질 끌고 가고, 거절하려 해도 쉽게 입이 떨어지질 않는다. 입술이 바짝 마르는 기분이 들었다. 정말 말라 죽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고 답도 정하지 못한 채 연락을 할 수는 없어서 나는 휴대폰을 만지작거리지도 못하게 저 멀리 책상 위에 두고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아침이 되고, 저녁이 되어서도 정지운이라는 세 글자가 휴대폰 액정에 떠오르는 일은 없었다.
그럴 만하다고 생각했다. 정지운은 매번 같은 이유로 화를 내고 다시 돌아왔다. 여기에서 누가 잘못했음을 따지기 이전에 같은 일을 그렇게나 반복하는데 당연히 피로감을 느낄 것이라 생각했다. 먼저 연락하고 싶지도 않겠지.
수연이에게서 오는 연락은 최대한 피하며 생각을 가라앉혔다. 과거에 그랬듯 지금도 나는 수연이에게 무엇을 말해야 할지 분간할 수 없다.
∞ ∞ ∞
그렇게 며칠이 또 지났다. 정지운이 그렇게 나가버리고 며칠 동안 나는 난생처음 겪는 기분에 시달리고 있었다. 처음에는 죄책감인가 했다. 하지만 죄책감이라고 하기에는 내가 뭘 잘못한 게 있어야지. 쥐고 있던 무언가가 손가락 마디 사이마다 흘러 흩어져 버린 것만 같았다. 무엇을 쥐고 있었느냐고 물어본다면 대답할 만한 답은 떠오르지 않는다. 그렇지만 그런 기분이 들었다. 있지도 않던 걸 잃어버렸다고 말해도 되는 걸까. 이러한 감정을 뭐라고 정의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답답한 마음에 가끔 밤이 되면 슬리퍼를 신은 채 동네를 산책하듯 배회했다. 인적이 드물어지는 늦은 밤이면 혼자만의 생각에 잠겨 돌아다니기에 좋다. 걷다가 종아리가 뻣뻣해질 때쯤이 되면 벤치에 앉아 멍하니 있기도 했다.
오늘도 다리가 아파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벤치에 우연히 앉았을 뿐인데 옆 벽면에는 각양각색의 연극 포스터와 뮤지컬 포스터가 붙어있었다. 맨 오른쪽에서 가운데에 위치한 포스터는 알아보지 않으려 해도 정지운이었다. 검푸른 색의 배경을 두른 포스터 안의 남자는 마주 보는 사람과 눈이 마주치도록 정면을 보고 있었다. 평소 보던 표정과 비슷했지만 좀 더 얼굴의 근육에 단단하게 힘이 들어가 보였다. 마주치듯 마주치지 않는 그 눈길을 바라보다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포스터 앞을 스쳐 지나가며 생각했다. 이건 역시 좀 억울하다. 정지운은 제 삶에서 나를 신경 쓰고 싶지 않으면 그저 나를 안 보면 되겠지만, 나는 피하려 해도 이렇게 의외의 장소에서 만날 수가 있다. 슬리퍼의 얇은 바닥으로 전해지는 보도블록의 울퉁불퉁한 면을 느끼며 집으로 걸음을 향했다.
머리에 떠도는 생각들을 지우려 페이스북에 접속해 다른 친구들의 근황을 하나씩 들여다보았다. 파랗고 흰 배경의 화면 위에 각양각색의 이야기와 광고들이 섞여 있었다. 문득 아이돌 영상을 올려주는 계정이 하나 눈에 들어왔다. 블래스트의 이번 주 인터뷰 영상이다. 나는 조금 감탄했다. 피하려고 관심사를 돌려도 눈에 띄다니. 대단하다, 정지운. 그러면서도 어디 잘 지내나 궁금해서 영상의 재생 버튼을 눌렀다.
딱 맞춰진 무대 의상은 아니었다. 다들 나름대로 편한 옷을 입고 의자에 일렬로 앉아 리포터의 질문에 짤막한 대답을 하는 인터뷰 영상이다. 제목이 ‘사이좋기로 유명한 블래스트의 실체’다. 시끄러운 오디오 너머로 맨 왼쪽에 나란히 앉은 준영과 태현이 서로 누가 더 잘못했는지 아닌지를 따지며 목소리가 높았다. 정지운은 중앙에 앉아 그런 난리 통을 보고만 있었다.
두 사람의 장난기 어린 다툼이 소강상태로 접어들면서 이번엔 재계약 이야기가 나왔다. 멤버 전원이 재계약을 해서 블래스트의 이름을 계속 이어나가기로 했다는 내용이었다. 리포터의 입에 발린 칭찬이 이어졌다. 사이가 얼마나 좋은 것인지, 그리고 그들의 인기에 대해서도.
거기에 맞장구치던 멤버 텐은 재계약 때 멤버들이 다들 어떤 표정으로 고민을 했었는지를 흉내 내며 다시 웃음을 이끌어냈다. 한참 웃던 와중에 맨 오른쪽에 앉은 민석이 형이 손을 들며 정지운을 가리켰다.
「지운이는 재계약 때 블래스트에서 저 빠지라고까지 했었어요.」
「네? 왜요?」
「쟤가 그래요. 뭐 거슬리는 게 있으면 다 안 해.」
민석이 형의 말을 따라 멤버들의 성토가 이어졌다. 뮤직비디오 촬영 때 누가 실수라도 하면 카메라 감독님 옆에 붙어 앉아 노려본다. 콘서트 연습 때 누가 뒤처져서 시간이 늦어지면 팔짱 끼고 서서 노려본다, 등등. 정지운은 자신을 공격하는 멘트에도 유연하게 웃으며 받아쳤다.
「본업을 다들 똑바로 해야 할 거 아니야. 안 그래요? 여러분, 블래스트는 이렇게 유지되는 것입니다.」
「본업 하겠다는 나는 왜 빼려고 했는데?」
민석이 형의 높은 목소리에 정지운은 약간 고심하는 듯하더니 웃음을 입가에 지우지 않은 채 대답했다.
「본업을 너무 잘하니 솔로 나가 그냥.」
「야!」
「그룹 안무를 해도 혼자 튀어요. 안 그래?」
장난스럽게 손을 뻗으며 과장된 안무를 보이는 정지운에게 민석이 형이 손가락질하며 부들부들 떨었다. 나도 민석이 형의 무대 하는 모습이 좋기는 하지만 차마…… 부정하기 어렵다. 민석이 형이 자기 흥에 취해서 가끔 튈 때가 있지. 요즘 아이돌 안무들이 칼 군무는 아니라 큰 상관은 없지만, 그래도 눈에 띄기는 한다. 여느 때보다도 훨씬 밝아 보이는 정지운의 태도를 보니 별문제는 없어 보였다. 그래, 이게 뭐라고 이렇게 나만 힘들어할까.
영상 아래에 달린 댓글들은 내려도 내려도 끝이 없는데 정지운에 대한 이야기가 대부분이었다. 지운 오빠 왜 이렇게 업되어 보이냐, 오빠 무슨 일 있는 거 아니냐, 갑자기 왜 인터뷰를 열심히 하고 민석 오빠 놀려서 분량 끌어내? 준영이 말도 잘 받아주네, 재계약 안 됐나, 나갈 때 돼서 잘해주나, 등등.
나도 웃음이 나왔다. 댓글 창을 거슬러 올라가 영상을 보았다. 이번에는 안준영이 정지운에게 무언가를 따지는 모양인데 동생이라 손가락질까지는 못하고 있는 듯했다.
「형 나랑 밥 먹을 때 내가 먹고 싶은 건 다 안 먹어주잖아.」
「이상한 것만 먹으려고 하니까.」
「이상한 거 아니야. 우동 좀 먹고 싶다는데 그것도 안 돼, 라멘도 안 돼. 뭐 이런 사람이 다 있어?」
「정지운 씨, 이건 해명이 좀 필요할 거 같은데요. 메뉴 선택권을 상대방에게 결코 주지 않는다는 게 사실이신가요?」
리포터가 장난스럽게 들이미는 마이크를 받아 들며 단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 사실입니다. 저는 이유 없이 탄수화물 안 먹어요.」
「예?」
「단백질 종류는 다 먹어요. 고기 같은 거. 그럼 된 거 아닙니까?」
「가끔 김치찌개도 먹고 싶어!」
「나 없을 때 알아서 먹어.」
옆에서 질린 표정으로 보고 있던 텐이 마이크를 넘겨받으며 물었다.
「형 혹시 여자 친구가 면이나 쌀밥 먹자고 해도 안 먹을 거야?」
「애인은 알아서 먹일 테니까 너 걱정이나 하세요.」
「퍽이나. 먹고 싶다는 것도 안 먹이고 끌고 다니겠지. 형 애인 좋겠다. 형이 억지로 고기만 먹이겠네.」
「요즘 연애 잘 되냐?」
정지운의 질문에 갑자기 주목이 쏠리며 리포터의 집중 사격을 받게 된 텐은 허탈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여자 친구 제발 좀 있었으면 좋겠네요. 아, 지운이 형 진짜.」
「내가 뭐.」
「형 아직 여자 친구 생겨도 집에 한 발짝도 못 들어오게 하지? 그거 결벽증이다.」
영상의 끄트머리에서 정지운이 벌떡 일어나 카메라를 향해 컷 모양의 손을 재빠르게 표시했다.
아.
어.
음.
바람이 불었다. 앞머리가 흔들리며 이마를 간질거린다.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왼손으로 쓸어 올리고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엄지손가락을 습관적으로 움직여 화면을 밀어 올리며 다른 소식들을 어떻게든 읽으려 했다. 어디서 뭘 먹었다고 자랑하는 사진들, 시국에 대한 기사들, 생활 정보, 학교 이야기, 등등. 색색깔의 정보가 망막을 스쳤다. 스쳐 지나가기만 했다. 감정이 부풀어 오른다.
드문드문 켜진 가로등 불빛을 따라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어두운 거리는 사람이 드물었다. 안개로 약간 습한 공기가 거리에 흐릿하게 깔렸다. 그렇잖아도 선명하지 않던 가로등 불빛들은 더욱더 희뿌옇게 보인다. 의미 없는 것들을 생각하기 위해 내 옆으로 스쳐 지나가는 가로등을 세었다. 집중해서 열 개를 세고 나자 바로 다른 생각이 끼어들었다.
하지만 그럴 수밖에 없었다. 집을 가기 위해 직선으로 걷는 길로 들어서면 예전에 정지운과 같이 맥주를 마셨던 가게로 접어드는 초입 길이 나온다. 잠깐 걸음을 멈춰 안쪽을 들여다봤다. 입간판이 정문 앞에 세워져 있는 창밖으로 조명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닫을 시간이 다 되고도 아저씨는 가게를 다시 열어줬지.
그 후에 몇 번 찾아갔는데 아저씨는 친구들과 함께 온 내게 눈치껏 그때의 이야기를 꺼내지 않으셨다. 하지만 다른 친구들이 먼저 가게를 나서고 맨 뒤에 따라 나가던 내게 살짝 물으셨다. 그때 그 친구는 다시 안 오냐고. 나는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나왔었다. 그게 한참 더웠던 여름의 일이다.
그전에는 기프티콘도 많이 받았지. 한때 내 생계를 책임지는 게 정지운의 기프티콘이던 시절도 있었다. 그건 한창 더운 여름이 시작되려는 문턱이었다. 그리고 그전에는 뮤지컬 공연장에서 처음 만났었지. 멍청하게 안까지 들어가 버린 나를 잡아다가 밖에 내보내줬고. 그때 휴대폰 번호를 교환하면서 시작되었구나.
그때가 시작이 맞을까. 아니면 콘서트장에서 물을 뿌렸을 때? 수연이와 술집에서 처음 봤을 때? 언제가 시작이었던 걸까.
나는 처음으로 나와 그 사이의 시작점에 대해 고민해보았다. 그 뒤는 고민할 필요가 없다. 정지운은 내게 명백한 감정을 보여줬으니까.
그걸 몰랐던 건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그 감정이 가볍고, 한없이 가벼울 줄 알았다. 그래서 지금 한꺼번에 밀려드는 감정이 벅차다.
그래도 밖에서는 어떻게든 감정을 자제할 수 있었다. 걷잡을 수 없는 기분이 몰아닥친 것은 자취방의 현관 앞 계단을 두 개 오르고 유리문을 열었을 때였다. 여기에서 그 망할 놈의 카드 때문에 싸웠었지.
빠른 걸음으로 1층을 지나 2층으로 올라와 현관문의 비밀번호를 꾹꾹 눌렀지만, 이 현관문도 문제였다. 그 날 정지운은 이 문을 몇 번 걷어찼던가. 이렇게 들어선 집이니 집 안이라고 내 마음이 편할 리가 있을까.
무언가를 두고 온 사람처럼 방 안을 빙글빙글 돌며 안절부절못하다가 생각을 비우려 샤워를 했다. 좁은 욕실 안으로 들어가기 전 걸음마다 옷을 벗어 던졌다. 미지근한 물을 최대한으로 틀어 머리부터 발끝까지 적셨다.
그래도 생각이 떠나질 않았다. 얕게 잠겨 있는 줄 알았던 감정이 순식간에 머리 위에서 넘실거린다. 그것도 애정이라는 이름으로.
나는 정말 이렇게나 큰 건 줄 몰랐다. 막연하게 느끼고 있던 무서움이 더 커진다. 이런 거였다고 설명을 좀 해주지. 이런 모양이었다고, 그런 마음이었다고. 그걸 알았었다면 나는……
손을 들어 샤워기에서 쏟아져 나오는 물을 잠갔다.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만이 화장실을 일정하게 울렸다. 나는 젖은 얼굴을 문지르다가 손을 뒤로 뻗었다. 수건을 잡아채서는 몸의 물기를 닦으며 문을 열고 나갔다. 침대 옆에 걸려 있는 옷 중에서 그나마 멀쩡한 것들을 골랐다. 블랙진에, 맨투맨 티셔츠. 젖은 머리를 드라이기로 말리며 눈을 감았다. 이게 잘하는 짓인지는 죽었다 깨어나도 모를 일이다.
휴대폰과 지갑만 손에 든 채 운동화를 신고 밖으로 나왔다. 늦었지만 버스를 탈 만한 시간은 되었다. 밤 열한 시. 나는 버스에 카드를 찍고 올라타 자리에 앉았다. 퇴근 시간을 이미 넘긴 버스 안은 사람이 몇 명 앉아있을 뿐 한산했다. 도로도 한산했다. 유리창 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밤의 야경을 보다가 이마를 기댔다. 유리의 차가움이 이마부터 퍼져나갔다.
다시 말하겠지만, 나는 이게 잘하는 일인지 알 수가 없다. 여전히 잘못한다는 생각이 더 강하다. 나는 손아귀의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다가 전화를 걸었다. 통화음이 길게 이어지다가 마침내 상대방이 받았다.
―재현아. 늦었는데 왜 전화했어.
“엄마, 자려고 했어요?”
―아직 안 자. 무슨 일 있어?
“아니요. 그냥.”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냥 전화를 걸고 싶었다. 어떤 모양으로든 말을 하고 싶기도 했다. 귓가에 맴도는 엄마의 목소리에 티브이 소음이 옅게 섞였다.
―집이니?
“어디 갔다가 집 가는 중이에요.”
―학교는 어때. 자소서는?
“다 잘하고 있어요. 아마 잘되지 않을까요.”
―그럼. 우리 아들은 잘하겠지.
“네. 그런데 엄마. 저 하고 싶은 게 하나 있는데요.”
일부러 별일 없는 척 말한 것이었건만, 엄마는 잠깐 말이 없었다. 나는 들켰을 리가 없음을 알면서도 벌써 무언가를 잘못한 기분이 들었다. 잠깐의 정적 끝에 엄마는 내게 엉뚱한 것을 물으셨다.
―왜. 대학원 가고 싶어?
“네? 아니에요.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아니. 그냥…… 너 다른 과 가고 싶었는데 취업 때문에 경영학과 갔었잖니. 그게 생각나서 그랬지.
“아니에요. 취업할 거고 잘 살게요. 나쁜 짓도 안 하고 그럴 거예요.”
나는 어릴 때부터 굳게 결심하고 있던 것을 다시 입 밖에 내었다. 나는 성실하게 살 것이다. 취업도 잘할 거고, 부모님께 좋은 아들도 될 것이다. 큰 사고도 치지 않을 것이고. 그럴 거다. 올해에 잠깐 사로잡혔던 무력감에서도 벗어날 테니까. 그러니까.
―그럼 어떤 건데.
“그게요. 그냥. 좀 하고 싶은 게 있어서요.”
―나쁜 거야?
“아니요. 그런 건 아니에요.”
나쁜 짓으로 분류될 수도 있을까. 설명하려는 입이 떨어지지 않는데 엄마는 뜻밖의 가벼운 목소리로 대답하셨다.
―니가 알아서 잘하겠지. 안 그러니.
“안 그럴 수도 있어요.”
―아니야. 넌 항상 잘해왔어. 이것밖에 못 해준 게 미안할 정도로.
“아니에요.”
―항상 착했고. 뭐 갖고 싶은 거라도 있니?
“갖고 싶은 거……. 네.”
―비싸?
비싸다, 라……. 단위를 매겨본 적은 없지만 정지운의 몸값은 매우 비쌀 것 같다. 지레짐작한 엄마가 물꼬를 터준 덕분에 대화는 자연스럽게 갖고 싶은 것이 물건인 양 나아갔다.
“네. 너무 비싼데…… 갖고 싶기는 하고.”
―사줄까?
“아니에요. 제가 살 수는 있는데. 그냥 여쭤보고 싶었어요.”
―이것 봐. 우리 아들 착하다니까.
“네. 착하게 잘할게요.”
―그래. 그래도 진짜 갖고 싶으면 엄마한테 이야기하고.
“네. 그럴게요. 주무세요.”
인사를 마지막으로 엄마의 목소리가 끊겼다. 이래도 되는 걸까. 다시 유리창에 머리를 기대고 밖을 내다보는데 한 번 와봤다고 익숙한 거리가 눈에 들어왔다. 나는 버스 벨을 누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 명의 아저씨와 함께 버스에서 내렸다.
보도블록 위로 올라서서는 내 앞에 우뚝 서 있는 거대한 건물을 올려다봤다. 들어가는 아치형 입구 앞에는 오늘도 정장을 빼입은 사람들이 지키고 섰다. 그것을 마주하고 나서야 나는 약간이나마 이성적인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게 뭐냐면, 정지운이 집에 있기는 할까. 그리고 이제 와서 나를 만날 생각이 있기는 할까, 라는. 아주 기본적인 생각 말이다.
무엇을 어떻게 할 생각으로 여기에 왔을까. 검은 정장을 입은 남자는 내게 한 번 눈길을 주었고 나는 할 말이 없어 눈길을 옆으로 돌렸다. 천천히 정문 옆 화단 쪽으로 걸었다. 정문 앞에 서서 괜히 어슬렁거리다가 이상한 사람으로 의심받고 싶지 않았다. 휴대폰을 열어 시간을 봤다. 열두 시가 되어가는 시간이다. 충분히 늦은 시간이고 이젠 곧 새벽이라고 불러야 한다. 이 시간에 연락하는 것도 민폐 같다.
고개를 들어 매끄럽고 딱딱해 보이는 건물 표면에 반사되는 달빛을 보았다. 주변의 불빛들도 옅게 반사해낸다. 아파트에 무슨 캐슬이라는 단어가 붙나 했더니, 정말 단단한 성같이 생겼다. 드문드문 황금색 불이 켜진 아파트를 올려다보다가 중간보다 약간 위로 불이 켜진 칸에 시선을 두었다. 저기쯤일까. 확실하지는 않지만 가늠해보며 화단 앞에 놓인 바위처럼 큰 돌에 걸터앉았다. 문자부터 보내보는 게 맞겠다 싶었다. 휴대폰을 켜고 고심하다가 문자 창을 열었다. 이유는 모르겠는데 카카오톡보다는 문자가 더 성의 있어 보인다.
[자?]
새카만 배경 화면 위로 한 문장이 전송 최신 목록에 올라갔다. 버튼을 누르고 곱씹어보니 헤어진 구 남친인 양 질척거리는 걸로 보인다. 손가락을 오므렸다 폈다 하며 후회했다. 차라리 집에 있느냐고 묻던가. 저게 뭐람.
하지만 더 큰 후회는 그 뒤에 찾아왔다. 십 분가량을 기다려도 답장이 오질 않았다. 묵묵히 휴대폰의 액정을 손가락으로 문지르며 만지작거리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비어가는 도로를 달리는 자동차들은 속도를 올리고 있었다. 한 대씩 휙 지나갈 때마다 먼지를 뒤집어쓰는 듯 바람이 불었다. 새빨갛게 거리를 물들인 차의 뒤꽁무니를 보고 있다가 걸음을 옮겼다. 넓은 도로의 길 너머 맥도날드가 보였다. 커피라도 마시고 싶다. 이미 대중교통은 끊길 시간이었다.
횡단보도를 건너 들어간 맥도날드는 크고 한산했다. 나는 커피를 시키려다가 초코를 가득 바른 소프트아이스크림을 주문했다. 건네지는 아이스크림을 입에 물고 창가 자리에 앉았다. 건너편의 높은 아파트를 올려다보며 아이스크림을 입안 가득 베어 물었다. 조금만 기다려보다 가야지.
살살 녹는 아이스크림의 윗부분을 오물거리고 삼킨 다음 아래의 바삭한 과자 부분까지 먹었다. 도로를 달리는 차의 숫자는 눈에 띄게 줄어들어 간다. 창가 옆의 소파는 매끈한 재질이었지만 나름대로 편안했다. 다리를 길게 뻗으며 등받이에 기댔다. 유리 벽에는 바깥의 모습과 겹쳐 내 모습이 형체로 비친다. 괜히 손을 올려 머리카락이나 옷매무새를 정리하고 눈을 비볐다. 새카만 밤은 점점 더 깊어간다.
조금 기다리겠다고 했지만, 그 조금이 치사하게 아이스크림 한 개를 먹는 동안처럼 짧은 시간을 말한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조금 더 기다려줄 생각이었다. 아이스크림을 하나 더 먹을 수도 있고, 아니면 이번에는 진짜 커피를 마시며 시간을 보낼 수도 있다. 어차피 집에 가는 대중교통은 다 끊겼을 거다. 가게로 들어와 주문하는 사람들의 수는 점차 줄어들었고 아르바이트생들의 움직임이 만들어내는 소리도 잦아들어 갔다. 그렇게 자리에 앉아서 정지운이 기다렸을 시간들에 대해 생각해봤다.
늘 별생각 없이 가볍게 넘겨서 정지운이 무엇을 했고 어떤 기다림을 가졌는지 잘 기억나지는 않았다. 하지만 답장이 오지 않는 휴대폰을 바라보며 어렴풋한 가닥을 잡을 수 있을 듯하다. 카톡 하나. 문자 하나. 한 통의 전화. 그리고 잠깐의 공백. 그런 것들이 어쩌면 초조했을 수도 있었다는 것을.
나는 정지운이 전혀 그렇지 않을 줄 알았다. 그럴 것이라고 생각조차 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냥 지나가면서 잠깐 머무르는 한 번의 충동일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충동이라고 꼭 가벼우리라는 법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휴대폰을 내려놓고 다른 일을 하며 신경을 돌리려 하는 것 이상으로, 오히려 정지운은 내게 문자를 보낸 것조차 잊고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가끔 내게 와서 화를 낼 때마다 무슨 유난일까 싶어 화가 났다. 생각해보면 조금 웃기기는 했다. 그런 식으로 잘해주면 무슨 뜻인지 내가 어떻게 알겠나. 그리고 그런 의미였으면 말이라도 한마디 하지. 아니면 눈치라도 어떻게 주던가. 어떻게든 내가 알아볼 수 있도록. 그러다 바로 그 생각을 물렀다. 자존심이 있지, 그 이상 어떻게 했겠어.
아까의 인터뷰에서 나온 단편적인 말들을 모두 나와 정지운의 상황에 적용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래도 그중에, 단 하나만이라도. 하나만이라도 내게 적용되는 게 있다면…….
카운터에 가서 커피 한 잔을 더 받아다 입에 물었을 때 문자가 들어왔다. 자주 보았던 번호가 액정 화면에 떴다. 나는 순간 심장이 크게 뛰었다.
[지금 일어났다]
지금 일어났다는 건 침대라는 거니까 집일 가능성이 높겠지? 이번에는 신중하게 문자를 꾹꾹 눌러 보냈다.
[집이야?]
[어]
그래, 집이구나. 음. 그래. 이다음에 무슨 말을 어떻게 붙여야 할지 고심하느라 커피를 다시 입가에 가져다 댔다. 진동이 짧게 울렸다.
[갑자기 그걸 왜 물어봐]
평소완 달리 냉랭한 문자보다도 더 치열한 고민이 내 머릿속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힐끗 유리 밖 길 건너의 거대한 아파트를 올려다보았다. 집 앞이야. 라고 말하면 완벽한 구질구질 전 남자 친구 풀세트가 된다. 눈꺼풀이 자꾸 떨린다. 졸려서만은 아닌 게 확실하다. 집에 가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날이 밝으면 감정을 좀 덜어내고 차분하게 보는 게 낫지 않을까. 일단 내 연락을 받는다는 건 확인했으니 급한 불은 끈 거다.
손안에서 휴대폰이 진동을 시작하며 ‘정지운’이라는 이름을 띄웠다. 나는 그것이 폭발물이라도 되는 양 손을 멀찍이 했다가 도로 가까이해 내려다봤다. 전화를 받기 부담스럽지만, 방금까지 문자가 되다가 전화를 안 받는 건 너무 티가 난다. 전화. 그래. 받아야지. 초록색의 버튼을 옆으로 끌어당겼다. 천천히 귓가에 가져다 대자 정말 자던 중이었는지 목소리가 잠겨 낮았다. 말도 평소보다 느리다.
“여보세요.”
―왜 물어봐.
“응?”
―집이냐는 걸 왜 물어봐.
“그냥 궁금해서 물어본 거야.”
―안 하던 짓을 하네.
내가 이 시간에 집에 있다면 결코 묻지 않을 질문이니 그렇겠지. 초조한 마음에 손아귀의 휴대폰만 꾹 쥐고 자세를 바꾸는데 가게에 새로 손님이 들어왔다. 지나가는 말소리가 들렸는지 휴대폰 너머의 목소리가 물었다.
―밖이야?
“어……. 그게 말이지. 내가 오늘 어디를 다녀왔는데. 그게 이 근처였단 말이야.”
―이 근처?
“응. 잠실 근처.”
―뭐하러.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밤에 나왔거든. 그리고 차를 놓쳤지.”
―뭐?
음정이 올라가며 커지는 목소리에 나는 살짝 기가 죽었다.
―지금 어디야.
“나 맥도날드.”
―하아. 언제부터 있었어?
깊은 한숨을 내쉰 정지운의 목소리가 제대로 돌아왔다. 지금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 대충 알겠다. 아마 미간을 좁히고 또렷한 눈매로 나를 응시할 거다. 이걸 왜 그렇게 잘 아냐면 나를 볼 때 대부분의 표정이 그랬기 때문이다. 특히 짜증이 그랬다. 지금처럼 말이다.
―그럼 전화하지, 왜 문자 하고 아무 말이 없어. 문자는 왜 하나야. 계속 보내야 될 거 아니야.
“잤다며. 민폐잖아.”
―기다려. 나갈게.
움직이는 소리와 옷이 접촉되는 소리가 몇 번 나더니 현관문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오랫동안 덥히고 있던 자리에서 이제야 일어나 가게를 나갔다. 횡단보도 앞에 서 신호가 떨어지기를 기다리는 동안 옥죄어오는 마음을 다시 한 번 다독였다. 초록 불로 바뀌고 아파트를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늦은 시간 지나가는 사람 하나 없는 길에는 누구 한 명만 나와도 알아보기가 쉬웠다. 저기 저 멀리 입구 쪽에서 걸어오는 정지운처럼. 표정이 보이지 않는 거리에서 점점 가까워질수록 심박 수가 올라갔다.
평소 반들반들해 보이던 머리카락은 감고 나서 내버려 뒀는지 약간 부스스해 보였다. 눈 밑도 부었는지 도톰했다. 거기에 흰 티셔츠 하나만 대충 걸친 채 슬리퍼를 신고 나온 모양새였지만, 부족함이 없어 보였다. 미약한 짜증이 어린 눈길이 내 모습을 위아래로 훑었다. 그걸 눈앞에 마주하고 나는 어색하게 손을 들어 인사했다.
“안녕?”
내 시답지 않은 인사에 정지운의 눈썹이 더 치켜 올라갔다.
“갑자기 무슨 안녕이야.”
“아니. 오랜만에 봤잖아.”
그날 니가 우리 집 현관문을 걷어차고 나가버린 뒤 처음 보는 거잖아. 그러니까 어색해서 이러는 거 아니야. 하여튼 남의 노력은 손톱만큼도 관심이 없지. 나는 쭈뼛쭈뼛 양손을 마주 잡고 손가락을 만지작거렸다. 정지운은 그런 내 꼴을 한심하게 보더니 팔을 잡아끌며 걸었다.
아까부터 내가 죽어라 노려보았던 거대한 문을 드디어 통과했다. 같이 속도를 맞추자 정지운은 내 팔을 놓고 옆에 서서 나란히 걸었다. 사방이 조용했다. 이 상황에서 초조하고 어색한 것은 오직 나뿐인 것 같다. 그래서 되는대로 말을 시작했다.
“빨리 잤네?”
“어제 늦게 자서.”
“왜?”
“일.”
“그래…….”
원래 얘가 이렇게까지 대화하기 어려운 상대는 아니었는데 괜히 내가 생각이 복잡해서 어렵다. 이상한 기색을 정지운도 느꼈는지 걸음이 느려진 나를 잠깐 돌아보다가 다시 걸었다. 은은한 조명이 들어오는 아파트 로비의 1층에 다 왔다. 자동문이 열리고 로비를 가로질러 걸었다. 직원들이 열어주는 로비 안쪽의 유리문을 또 따라 들어갔다. 엘리베이터 앞에서 정지운은 기다란 손가락으로 버튼을 눌렀다.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버튼을. 그리고는 기대서서 하품하는 옆모습을 지켜보다가 나는 참지 못하고 물었다.
“왜 아래 내려가?”
내 물음에 대답하며 나를 내려다보는 표정은 좀 어이없어 보였다.
“이 건물의 주차장은 지하에 있으니까.”
“아…….”
“어떤 차 탈래. 레인지로버랑 포르쉐 중에.”
“아무거나.”
내 대답과 함께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우리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단숨에 지하주차장에 도착했다. 문이 양옆으로 열리고 걸어 나가는 정지운의 너른 등을 보면서도 이게 아닌데 싶었다.
그러니까 이게 아닌데. 이야기를 좀 더 해야 하는데. 나 이대로 집에 가나? 그냥 얘 자는데 깨워서 귀찮게 집에나 태워다 달라고 한 거야? 사람이 이래서 생각을 하고 살아야 한다.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무작정 왔더니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겠다.
지하 주차장은 무슨 외제 차 전시장인 양 온갖 차가 즐비하다. 그 앞을 지나 정지운은 자기가 알아서 차를 선택했는지 흰색의 포르쉐 옆으로 가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딸려 나온 리모컨은 경쾌한 소리와 함께 경보를 해제한다. 그 앞에서 나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야, 대화 좀 하자. 이렇게 대뜸 말할까. 지금 이대로 집에 가면 나는 그저 진상이 되는 거야. 안 돼.
차 보닛 앞에 우두커니 서 있는 나를 정지운이 천천히 돌아보았다. 잠기운은 가셨는지 눈빛이 또랑또랑했다. 할 말을 잃은 나에게 걸음을 좁혀 다가왔다.
“오늘 무슨 일 있어?”
“아니.”
누가 봐도 수많은 일이 있었을 듯한 목소리로 나는 대답했다. 아니나 다를까 나를 훑어보는 시선은 더 의뭉스러워졌다. 그래, 할 말은 하자. 침을 꿀꺽 삼키고 순간 나오는 말을 외쳤다.
“나 이대로 집에 가?”
무서울 정도의 정적이 우리에게 찾아왔다. 주변의 차들마저 숨죽이며 우리를 지켜보는 것만 같다. 아무 말이 없는 흰 얼굴을 올려다보고서야 내 입이 내뱉은 말을 곱씹어봤다. 나 너무 도발적이었나? 제기랄.
때맞춰 찾아온 정적이 무서웠다. 물끄러미 나를 보는 옅은 갈색의 눈동자도 부담스러웠고. 늦은 시간이라 차 한 대 들어오지 않는 주차장은 나의 긴장감을 가중시키는 데 아주 좋은 배경이 되어주었다.
그런 뜻이 아니라며 손을 저으려는데 정지운이 늘어뜨리고 있던 손을 들었다. 거리가 더 줄었다. 가까이 다가온 손이 어깨로 올 줄 알았더니 손가락으로 내 목덜미와 그 근처를 감쌌다. 엄지손가락은 입술 근처를 가볍게 눌러왔다. 따끈한 감촉에 몸이 굳었다. 천천히 기울어진 얼굴이 내 앞에서 멈추고 입술이 열렸다.
“아. 드디어.”
“응?”
“재현아.”
“어?”
“우리 집 갔다가 무슨 일 있을 줄 알고 그래.”
부드럽게 풀린 눈매가 불길한 눈웃음을 지었다.
“그래도 갈 거야?”
이놈의 새끼는 왜 모 아니면 도밖에 없을까. 그 중간값은 없냐. 차분하게 이야기를 한다. 혹은 나의 마음에 대해 함께 고민해본다, 이런 거. 은근한 압박감에서 벗어나려 숨을 크게 쉬고 겨우 대답했다. 쪽팔리게 목소리가 갈라졌다. 심장이 자꾸 안 좋다.
“그렇게까지는 말고.”
“알았어.”
내 말에 눈동자를 굴리다가 고개를 끄덕인 정지운이 가볍게 쥐고 있던 목덜미를 놓았다. 그 대신 내 손목을 꽉 쥐고 잡아끌었다. 지금까지와 전혀 다른 속도의 걸음에 몸이 끌려간다. 내 말 알아들은 거 맞나.
엘리베이터는 아직 다른 층에 가지 않은 채 그 자리에 멈춰 있었다. 문이 열리고 어떻게 끌려들어 갔는지 모르겠다. 정지운은 닫힘 버튼을 손가락으로 연속해서 눌렀다. 달칵거리는 소리가 좁은 공간을 메웠다. 문이 닫히고 엘리베이터가 올라가면서 자잘한 소음들이 났다. 기대서 있는 동안 손목을 잡고 있던 손은 천천히 내려와 내 손을 꽉 쥐었다. 거기서 도망치지는 못하고 숨을 더 들이마셨다. 자꾸 감정이 팽창했다. 누가 잘못 건드리면 펑 터져버릴 것만 같다.
24층. 멈추지 않고 곧장 올라간 엘리베이터의 양쪽 문이 열리고 미처 발을 떼기도 전에 손이 끌려 나왔다. 그가 현관문에 서서 도어락의 비밀번호를 눌렀다. 뭔가 삐끗했는지 경고음이 들리고 다시 누른다. 내 손을 움켜쥔 남자의 잇새로 짧은 욕설이 새어 나오는 것을 들었다.
마침내 문이 벌컥 열리고 급하게 들어갔다. 이제야 보안 카메라가 없는 곳에 왔다. 나는 신발을 벗기도 전에 잡힌 손이 휘둘려 벽 어딘가에 밀어붙여졌다. 현관문은 천천히 닫혔다. 내게 몸을 밀어붙인 정지운은 위부터 내리누르며 내 볼에 자기 볼을 가져다 대고 살갗을 부볐다. 손가락만큼이나 따뜻했다. 눌린 몸이 짜부라지듯 천천히 숨이 샜다. 온몸의 세포가 경직되었다가 풀린다. 단순한 포옹은 오히려 처음이었다.
귓가에 숨결이 닿자 나는 더 늦기 전에 손을 올려 밀어붙여진 상체를 떼어내려 하며 말했다.
“잠깐만. 잠깐.”
“왜.”
“아니 이거 말고…….”
내 말에 탐탁잖은 듯하면서도 정지운은 일단 얼굴을 떼고 나를 내려다봤다. 그래 봤자 지나치게 가까웠다. 숨결이 섞일 만큼 가까운 거리다. 나는 운동화 속의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더듬더듬 말을 꺼냈다. 현관의 조명등은 우리의 움직임에 따라 잠깐 꺼졌다가 켜지곤 했다.
“일단 신발 벗고.”
“벗고?”
“이야기 잠깐만.”
“무슨 이야기.”
아. 내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입술이 귓불에 또 닿았다. 몸이 움츠러들었다. 쿡쿡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려서 반항심이 더 거세게 일었다. 이런 거 말고 정말 잠깐만. 나는 지금까지처럼 끌려가는 것을 원하는 게 아니었다. 손을 밀어내고 조금 높은 각도를 올려다보며 단호하게 말했다. 오늘은 정말 확신이 필요하다.
“이야기할래.”
“너 혹시 나 가지고 놀아?”
“아, 그런 거 아니야. 진짜 잠깐만.”
“그래. 니가 나를 가지고 놀 정도면 내가 이렇게 답답하지도 않았지.”
순간 말도 안 되는 방향으로 이야기가 진행되려 하기에 심장이 덜컹했지만, 정지운은 내 반박에 순순히 수긍하며 몸을 떼어냈다. 그제야 우리는 문명인다운 거리를 유지했다.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재빨리 신발을 벗었다. 딱딱한 대리석 바닥을 그제야 발바닥으로 느낄 수 있었다. 정지운의 뒤를 따라 집 안의 어두운 복도를 지나며 나는 자제하지 못한 질문을 불쑥 던졌다.
“그런데 있잖아. 정말 여자 친구도 집에 안 들였어?”
“아니야, 그런 거.”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고개를 흔들며 정지운은 부정했다. 아마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아는 듯했다. 혼자 고개를 끄덕이는데 복도를 지나 이전에 온 적 있던 거실에 다다랐다. 그곳마저 가로질러 여전히 흰색 소파 앞에 와서야 정지운은 나를 돌아보며 대답했다.
“나 결벽증 아니야.”
“그런 거 같은데? 집이 너무 깨끗해.”
“아니라니까.”
약간의 신경질이 대답에 섞였다. 그래도 마주 보며 웃고 있자 정지운이 말했다.
“너 그 인터뷰 본 거지?”
“응. 진짜 여자 친구도 집에 안 들여?”
거기서 나를 보는 눈빛이 잔잔하게 흔들렸다. 자기도 기억을 더듬어가는 모양이었다.
“아니야, 그런 거. 그냥 데려올 만한 애가 없었던 거지.”
“결과는 같네.”
“그래도 달라.”
“알았어. 잠깐만. 앉아봐.”
내 손길에 따라 그는 순순히 소파에 앉아 나를 올려다보았다. 그보다 키가 약간 작은 나로서는 드물게 내려다보는 모양새가 되었다. 심호흡을 했다. 지금 이 자리, 여기까지 오는 동안 정신이 없는 사이에도 몇 가지를 생각했는지 모른다. 그래도 그 짧은 사이에 몇 가지나 생각했으면 많이 했네. 그렇게 면죄부를 줘본다.
나의 마음. 그리고 정지운의 지금까지의 행동. 그리고 오늘 보이는 정지운의 행동까지. 여기에서 명백하게 해야 할 것은 오직 나의 마음 하나뿐이다. 그래서 고작 생각해낸 것이 이런 방법이었다. 그 대신 당하는 것은 말고, 내가 느끼고 생각해볼 수 있도록.
소파에 앉아 나를 올려다보는 잘생긴 얼굴의 왼쪽 면이 전면 유리를 넘어들어온 미약한 빛을 받았다. 어두컴컴한 와중에서도 빛이 났다. 나는 그 앞에 서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갈 데 없는 손을 정지운의 양어깨에 올렸다. 놀랄까 봐 미리 말도 했다.
“내가 있잖아. 마음에 갈피가 안 잡혀서 그러는데.”
“아직도?”
“응. 그래서 말이야. 한 번만. 너도 했으니까 한 번만 가만히 있어봐.”
“뭘.”
차마 그 질문에 대답하지 못한 채 나는 몸을 숙였다. 허리를 약간 숙이고 고개를 내려 얼굴을 가까이했다. 눈앞에 보이는 동그란 눈동자가 더 이상 커질 수 없을 때까지 커졌을 때 나는 각도를 살짝 틀어 입술을 포갰다. 쿵쾅거리는 심장 소리가 내 귓가에는 쟁쟁하게 들렸다. 입술에 닿은 따뜻한 감촉을 문지르다가 혀를 살짝 내밀었을 때 닿아온 것에 기겁하며 고개를 들었다.
“가만히 있으라니까.”
“키스하잖아.”
“내가 할 거야.”
“이건 또 무슨 고문이야?”
내 주장에 툴툴거리면서도 웃는 낯이었다. 다행이다. 거기에 안심하며 다시금 호흡을 골랐다. 다시 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그렇게 부들부들 떨고 있는 내 허리를 낯선 손이 감싸 안았다. 나는 그것을 내려다보고 불퉁스러운 표정이 되었다.
“왜 안아.”
“키스는 알아서 해. 가만히 있을게.”
“손은?”
“야. 다른 데라도 만지게 해줘. 이게 무슨 고문이냐.”
자꾸 웃음이 새는 정지운의 입가를 보다가 나도 웃음이 나오고야 말았다. 허리에 가볍게 얹혀진 손길에 감각이 예민해진다. 아무래도 좋을 것이었다. 나는 키스하고 확인하면 되는 거겠지. 다시 얼굴을 가까이하자 아예 고개를 들어 제 입술을 내주는 정지운 때문에 얼굴이 더욱 달아올랐다. 매끈해 보이는 입술이 바로 눈앞까지 왔다.
“입 벌려줄까?”
“닥쳐.”
그게 우리 사이의 마지막 대화였다. 코끝이 스치고 입술이 겹쳐졌다. 그리고 가볍게 열린 입술 틈으로 혀를 밀어 넣어 굴렸다. 그 순간 허리를 잡고 있던 손이 넓게 오가며 어루만져왔다. 의심할 나위 없이 심장이 뛰었다.
키스를 리드하는 게 처음은 아니었다. 몇 번인지 세어보지는 않았지만 그럴 거다. 그런데도 모든 것이 어색하고 숨이 급했다. 밀어 넣은 혀가 닿는 점막마다 뜨겁다. 어깨에 올려둔 내 손은 갈 곳을 몰라 움찔거리다가 정지운의 어깨를 아플 때까지 꽉 쥐었다. 곱게 생긴 얼굴과는 다르게 어깨는 딱딱한 감촉으로 손안에 잡힌다. 그래도 괜찮았다. 시각적인 자극을 견디다 못해 눈을 꽉 감은 채 입을 맞추다가 입술을 뗐다.
가만히 있으라고는 했지만, 정말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있는 사람을 데리고 키스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감고 있던 눈을 뜨고 내려다보자 정지운은 쓰다듬듯 만지작거리는 손길을 멈추지 않으며 물끄러미 올려다보고 있었다. 천천히 다가온 손 하나가 내 뒷목을 가볍게 눌렀다. 얼굴이 다시 가까워졌다. 이번에는 턱 끝에 입술이 쪽 닿았다. 소름이 돋았다.
허리와 뼈의 두드러진 부분 어딘가에 걸쳐져 있던 손이 살며시 등 뒤까지 둘러지며 나를 감싸 안았다. 긴장으로 뻣뻣하던 몸이 힘에 이끌려 정지운의 옆자리에 앉았다. 쿵쿵 울리는 심장 소리와 별개로 아직 멍했다. 옆에서 턱을 손바닥으로 감싸 안은 그가 볼에 입술을 댔다. 내가 축 늘어져 아무 말이 없자 정지운이 목덜미에 얼굴을 부비며 말했다.
“무슨 생각해.”
“내 인생은 망했다.”
“왜.”
이렇게 물으며 떨어지더니 옆에서 내 귀를 꽉 잡아당긴다.
“몰라. 망했어.”
“나 좋아해서?”
“어.”
귀의 가까운 곳에서 정지운의 웃음소리가 울렸다. 나는 빨개진 얼굴로 정면만 뚫어져라 응시했다. 거실을 가로질러 벽에 걸려 있는 대형 티브이는 그런 우리의 모습을 흐릿하게 비춰주고 있었다. 더 창피하다. 자꾸 내 얼굴을 손가락으로 잡아 돌리려고 하길래 힘으로 버티는 중이다.
옆에서부터 몸이 눌려 소파에 자연스럽게 등이 눕혀졌다. 그 위에 올라와 가까이 다가온 입술이 이번에는 콧대의 중간에 닿았다.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서 고개를 돌린 채 눈을 꽉 감았다. 그런 내 반응에 뭐가 신났는지 얘는 내게 계속 말을 걸어왔다.
“나 안 볼 거야?”
“응.”
“나 좋아하는 건 알았는데, 오늘부터 이러기로 한 이유가 뭐야?”
“몰라.”
“다 몰라?”
“어.”
“나랑 더 진도 빼면 어쩌려고 이래.”
그 말은 차마 대답할 수도 없어서 혼자 생각해봤다. 진도를 여기서 더 뺀다니.
“하늘이 무너지는 거 아닐까.”
정지운의 신난 웃음소리가 거실을 메웠다. 나는 진짜 심각하다. 그렇고 그런 짓을 얘랑 하다니. 그다음 날 하늘이 무너질 거야. 생각이 더 이어지기 전에 턱 부근이 꽉 잡혀 고개가 돌려졌다. 그리고 무게를 실은 채 눌러 덮쳐왔다. 나는 최대한 닿는 면적을 줄이려 몸을 움직였다. 이번에는 진짜 입술과 입술이 닿았다. 눈앞의 가지런한 속눈썹을 보며 나는 눈을 감았다. 입술이 아프게 깨물리고 각도를 틀어 키스했다.
혀와 타액이 섞이는 시간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정신을 차리기 전에 혀끝이 물리고 다시 떨어진 입술이 아랫입술에 왔다. 앞니에 물린 아랫입술을 쪽쪽 빨아오자 내쉬는 숨이 흐트러져갔다. 나는 무엇인지 모를 기분이 되어 내게 매달린 정지운의 팔을 부여잡았다. 무엇이든 해야 될 것 같으면서도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꽉 잡고 있으려니 손가락 마디마다 저릿했다. 그래도 무엇이든 부여잡고 싶었다. 숨을 다시 크게 들이마시며 몸을 움직이려 했다. 입술은 턱 아래 목까지 내려가 가볍게 닿았다 떨어졌다 하고 있었다.
부스럭거리며 조금 더 내려간 얼굴이 쇄골 근처 어딘가를 입술로 지분거리는 게 느껴졌다. 간지러움뿐만 아니라 자극 때문에 몸 안이 홧홧했다. 거실에 불이 켜지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지금 보면 내 얼굴은 물론이고 곳곳이 벌겋게 달아올라 있을 것이 뻔했다.
몸을 일으키려 팔꿈치로 받치고 상체를 세우려는데 다시 내 위로 불쑥 올라온 몸이 무게를 실어 눌렀다. 풀썩 쓰러져 무게를 받으며 눕혀졌다. 정지운은 코끝을 비켜 부비며 나지막이 말했다. 옅은 체향이 훅 끼친다. 묵직한 체향은 지금껏 가까워져 본 적 없는 냄새였다.
“조금만 더 하자.”
“어떤 거?”
나는 알면서도 일부러 모르는 체 대답했다. 코끝에 또 입술이 닿아서 정말 죽을 것만 같았다.
“알면서 그런다.”
“나 이제 마음 인정했는데 너무 빠르지 않냐.”
“원래 나 좋아했었잖아.”
“아니야.”
“너 다 티 나.”
이제 더 이상 내 얼굴이 붉어질 곳도 없겠다. 애써 목을 가다듬으며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물었다.
“언제부터 알았어?”
“맞춰볼래?”
“됐다.”
수치스러울 일을 스스로 캐내고 싶은 마음은 없다. 내 마지막 대답을 듣고 정지운은 다시금 턱 끝부터 입을 맞추며 천천히 아래로 내려갔다.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손이 방황하다가 그런 정지운의 등 위에 둘러졌다. 손바닥 밑으로 느껴지는 신체는 움찔거리는 근육과 단단한 뼈로 이루어져 있었다. 지금껏 부비고 치댔던 경험이 있는 말랑한 여자와는 달랐다. 또다시 그 차이를 느꼈다. 그래도 불쾌감이 느껴지지는 않아서 헛웃음이 나왔다. 나 진짜 이제 어쩌냐. 망했네.
쇄골의 오목한 곳까지 혀를 넣었다가 빨아대는 움직임에 내 몸 위에 자리 잡은 정지운의 등을 옷 위로 긁었다. 작은 한숨이 나왔다. 손끝 아래로 느껴지는 등의 근육이 어떻게 움직이는지까지 세세하게 느껴졌다. 나는 입술을 짓씹다가 말했다.
“하지 마.”
“왜.”
“못 하겠는데…….”
“섹스?”
“응.”
내가 아무리 각오를 하고 왔다고 해도 오늘 당장 모든 걸 할 마음까지는 갖추지 못했다. 쇄골 아래의 살갗 어딘가를 이로 꾹꾹 깨물며 목소리가 이어졌다.
“안 돼?”
“나 오늘 하면 심장마비로 죽을지도 몰라.”
“안 죽어.”
달래듯 쓰다듬어오는 손이 옆구리를 넘어 가슴 근처까지 올라왔다. 열기도 같이 훅 올라온다. 간질거리는 감각을 외면하며 고개를 흔들었다. 오늘 뭐든지 더 하면 도저히 감당하고 버틸 자신이 없다.
“죽어버릴 거야. 진짜.”
“그럼 조금만 할게.”
“조금만?”
내 말이 더 이어지기도 전에 정지운은 상체를 벌떡 일으켜 몸을 바로 세웠다. 그리고는 양손으로 자기가 입고 있던 티셔츠의 밑자락을 잡아 위로 끌어 올려서는 휙 벗어버렸다. 나는 당황으로 입을 벌린 채 드러난 남자의 굴곡을 바라봤다. 티셔츠를 바닥 어딘가로 휙 던진 그가 몸을 낮춰 내 옷자락을 붙잡았다.
거기서 일단 저지해보려 손을 뻗었지만, 막무가내로 옷을 걷어 올리고 벗기려는 손놀림이 더 빨랐다. 순식간에 뒤집어진 옷이 발버둥 치는 내 몸 위로 끌려 올라가 머리 위로 벗겨졌다. 벗겨진 옷도 정지운의 손에 의해 바닥 어딘가 멀리 휙 던져졌다. 흐트러진 머리카락이 시야를 가려 그것을 걷어내며 눈앞을 응시했다. 침을 꿀꺽 삼켰다. 옷을 입고 있을 때는 마른 듯 보였던 몸은 조밀하게 짜여진 근육과 곧게 뻗은 선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만질 때마다 손끝에 걸리는 감촉들이 왜 단단했는지 알 수 있을 듯했다.
똑바르게 나를 내려다보며 싱긋 웃는 정지운의 표정에 눈꺼풀 안쪽까지 뜨거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점점 가까워져 내려오는 몸을 보며 나는 다리를 살짝 움직였다. 그래 봤자 무릎 사이에 가둬진 다리가 움직일 수 있는 범위는 한계가 있었다.
비이성적인 기대감과 초조함이 함께 어우러져 견딜 수가 없었다. 싸늘했던 공기와 다르게 살갗이 닿자 뜨거워졌다. 꽉 끌어 안겨지자 너무 힘을 줘서 폐 속의 숨이 빠져나오는 것만 같았다. 나는 손을 들어 정지운의 동그란 머리를 겨우 쓰다듬었다.
“진짜 조금만 해.”
“알았어. 조금만.”
내 말에 다짐하듯 대답하는 목소리는 귓가 가까운 곳에서 들렸다. 더듬더듬 내려간 손이 배 위의 피부를 덧그리듯 만지작거리는 데 정신이 팔려 있는 동안 귓바퀴를 깨무는 이가 날카롭게 느껴졌다. 뒤이어 느릿하게 핥아오는 혀에 소름이 돋았다. 나는 매끈하게 잡히는 피부 어딘가를 부여잡으며 매달렸다.
배 근처를 배회하던 손이 불쑥 바지 버클을 풀어 젖히고 내려갔다. 저지하려 했지만 내 손이 닿기도 전에 바지가 약간 끌어 내려졌다. 예민해진 성기에 손가락이 더듬더듬 와 닿자 나는 울고 싶은 기분이 되었다. 그 와중에도 귓가를 자극하는 움직임에 신음이 샜다. 꽉 쥐어진 성기 때문에 엉덩이를 들썩이자 입술이 목덜미 옆을 지나쳐 아래로 내려갔다. 지나가는 자리마다 입술을 찍고는 가슴팍을 콱 깨물었다. 그리고 입술로 유두를 더듬어 덥석 물고 빨았다.
“야! 거긴! 아, 미친.”
일어나 저항하려는 움직임을 저지하려는 듯 속옷 안에 들어온 손가락이 기둥 아래의 고환을 주물럭거리다가 꽉 쥐려 했다. 생리적인 공포감이 쾌감 사이로 비집고 들어왔다. 뻣뻣하게 굳으려는 몸을 다시금 누르며 정지운은 입안으로 유두를 강하게 빨아 자극했다. 아프고 이상한 기분 사이로 성기의 원초적인 쾌감이 섞여 정신이 몽롱했다.
눈물이 고여 흐릿해진 시야로 내 아래의 상황을 보다가 깜빡여 물기를 털어냈다. 숨이 자꾸 거칠어졌다. 힘을 받는 성기를 만지작거리는 소리가 점점 커져 축축한 소음도 섞여들었다. 이제는 진짜 울고 싶어졌다. 나도 뭔가 해야만 할 거 같은데 도저히 엄두가 안 났다.
애초에 섹스할 때 이렇게까지 몸을 섞고 부비는 스타일은 아니었기에 당황스러웠다. 누군가의 아래에 있어본 적도 없고 같은 남자와 맨살을 부벼본 적도 없었기에 더욱 그랬다. 가슴이 빨리는 이상한 기분을 또다시 느끼며 나는 배회하던 손을 정지운의 귓가에 가져갔다. 그나마 닿는 성감대가 여기였다.
부드럽게 쓸어내리고 귓가를 매만지자 내 아래를 만져주는 손길이 더 깊어졌다. 손가락으로 고환을 둥글게 굴리다가 기둥을 흔들어 자극했다. 거기에 정신이 팔려 있다가 정지운이 반대편 가슴을 물고 빨아 당기는 것을 뒤늦게 알았다. 허리가 자꾸 접히려 했다. 온몸이 저릿했다. 젖은 성기에서 느껴지는 손놀림이 점점 빨라지자 몸을 뒤틀며 흔들었다. 그제야 내 가슴에서 떨어진 정지운이 위로 올라와 입을 맞췄다. 차라리 이건 나았다. 입술이 벌려지고 온몸을 부볐다.
입술이 떨어지고 초점을 찾기 위해 노력하는데 정지운의 손이 내려져 있던 내 손을 깍지 껴 쥐었다. 그리고 당겨 아래로 내렸다. 나와 정지운의 다리 사이 성기 근처로 이끌려진 손이 갈 곳을 모르고 멈췄다. 이미 젖은 내 성기가 열기로 달아올라 있었지만, 그것만이 문제는 아니었다. 정지운의 바지 안에 갇혀 있는 성기도 잔뜩 부피를 키운 채 열기가 그득했다. 하라고 이끌어준 것 같은데, 제기랄. 미간을 찌푸린 채 주저하자 이번에는 눈가에 입을 맞춰왔다.
“내가 벗을까?”
“아니야. 내가 할게.”
차마 움직이지 않는 손가락을 삐그덕거리듯 움직여 바지를 벗겨냈다. 다른 남자의 바지를 벗겨낼 일이 올 줄은 몰랐지만, 정말 죽어도 몰랐지만 그래도 닥치고 말았으니 해야지. 그래, 이게 뭐 별거라고.
겹쳐진 몸 때문에 보이지 않았기에 손가락으로 더듬어가며 천천히 바지의 앞섬을 벌려 내렸다. 그리고는 손가락을 브리프의 끄트머리에 걸어 끌어 내렸다. 여기에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렸는지 모른다. 기어코 손가락을 걸어 속옷을 딱딱한 허벅지까지 끌어 내리자 빠져나온 성기가 내 성기의 끝에 닿는 것을 느꼈다. 허리를 굽혀 피하려 했지만 그래 봤자 갈 곳이 없었다.
울고 싶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집에 가고 싶기도 했다. 그런 내 표정이 웃겼던지 길게 빠진 눈꼬리가 살짝 접히며 웃는다. 신나 보이는 그 표정에 나는 괜히 심통이 났다. 내 꾹 다물린 입술과 입꼬리가 올라간 정지운의 입술이 또 닿았다. 아래에선 내 성기와 정지운의 딱딱하게 발기한 성기가 같이 부벼지고 있었다.
배 안쪽 근육 어딘가가 자꾸 움찔거리는 것만 같았다. 코로 겨우 숨을 쉬며 혀를 섞었다. 타액과 서로의 입안을 넘나드는 혀에 정신이 팔리다 보면 억센 손아귀에서 같이 마찰되는 성기가 성감을 돋웠다. 다른 손 하나는 내 엉덩이를 주무르며 강하기 쥐었다 놓기를 반복했다.
“아. 조금만, 으…… 흣. 야. 아….”
자꾸만 정신의 끈이 툭 끊어질 것만 같았다. 콧소리와 신음성이 섞이며 움찔거리다가 아래서 탁탁 쳐올리는 손의 움직임이 빨라졌다. 함께 마찰되는 성기의 움직임도 거칠어졌다. 사정감이 턱 끝까지 차오른다. 그제야 입술을 뗀 정지운도 한숨 같은 신음을 내쉬며 나를 끌어안았다.
귓가에 뜨거운 숨이 뱉어지고 아래가 꽉 조여졌다. 버둥거리는 다리가 얽히며 허리를 뒤틀다가 견디지 못하고 사정했다. 내 위에 덮쳐진 몸도 가느다란 떨림과 함께 사정하는 듯했다. 두 명분의 체액이 질척하게 하체에 흘렀다. 자극이 지나치게 강했던 탓에 숨 쉬는 것도 잊었다가 탈력감이 가시고서야 호흡이 제대로 돌아왔다. 나른하게 풀린 얼굴이 내 뺨에 볼을 부볐다. 한참을 그러고 있다가 무게가 실린 몸이 무거워 말했다.
“나 무거워.”
“방에 들어갈래?”
평소 같은 대화였지만 나는 쉽사리 대답하기가 어려웠다. 방금까지 엉켰던 몸은 이제 겨우 열기가 식어가고 있었다. 문제는 나만 열기를 식힐 생각이라는 거다. 아래에서 허벅지를 눌러오는 저 두꺼운 게 다른 신체 기관이 아니라면 정지운의 성기일 것이 분명한데.
“더 안 할 거야.”
“이 정도만 할게.”
“어떻게 믿냐.”
“내가 지금껏 거짓말한 적은 없을걸.”
그랬던가. 빨리 거기에 대한 반박의 예시를 생각해내고 싶었지만, 머릿속이 지금 그런 걸 떠올릴 상황이 아니었다. 몸을 일으킨 정지운이 천천히 소파 아래로 내려가 내 상체를 손으로 받쳐다 일으켰다. 나는 이제서야 눈앞에 바짝 선 성기를 마주했다. 두 눈 뜨고 태연하게 볼 상황은 아니었기에 슬며시 시선을 돌렸다. 그럼에도 보통 크기가 아닌 게 자꾸 눈앞에 아른거린다. 어깨에 손이 둘러진 채 방으로 걸어 들어가면서도 계속 확인했다.
“진짜 더 이상은 안 할 거지?”
“그렇다니까.”
그렇게 눈앞의 방문이 열리고 침대에 밀쳐진 내 몸이 뒤로 넘어가자마자 정지운이 당연한 듯 덮쳐 올라왔다. 약속대로 진짜 더 이상의 무언가를 하지는 않았다. 중간중간 선을 넘을 듯 말 듯 한 일들은 있었지만. 자꾸 엉덩이를 주무른다든가, 가슴팍과 배 근처를 죄다 빨아놔서 불그스름한 자국을 만들었다든가.
몇 번의 사정을 거친 성기가 저려올 때쯤 나는 침대 시트에 머리를 떨군 채 잠이 들었다. 그런 내 몸을 끌어다가 바로 눕히는 온기까지는 느끼고 잠 속으로 끌려들어 갔다. 정확히 말하면 잤다기보다는 지쳐 나가떨어졌다는 표현이 맞을지도 몰랐다.
얕은 잠과 깊은 잠 사이를 부유하던 정신이 깬 것은 결코 불편해서가 아니었다. 단지 모든 것이 낯설었기 때문이다. 떠지지 않는 눈을 겨우 떠 눈앞에 보이는 회색빛의 탁한 천장을 보고 나는 퍼뜩 놀라 몸을 일으키려 했다. 그러다가 어젯밤의 기억이 떠올라 그나마 천천히 몸을 움직였다.
좀 더 자고 싶었지만 생소한 것들 때문에 다시 잠들지 못했다. 코끝에 스치는 냄새, 누워 있는지 떠 있는지 모를 정도로 감촉이 좋은 침대. 그리고 옆에 누운 사람의 숨소리까지. 고개를 살짝 돌렸다가 모로 누운 채 잠들어있는 정지운의 얼굴을 물끄러미 보았다. 자고 있는데도 그렇게 착해 보이지는 않는다.
내 몸엔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는 일상복이 입혀져 있었다. 움직일 때의 감촉을 보니 속옷까지 입힌 것 같지는 않았다. 내 속옷은 아까의 난리통에 젖어 어디엔가 처박혀 있을 것이었다. 그것을 생각하니 갑자기 집에 가고 싶어졌다. 나만의 시간이 필요하다. 생각을 정리하고 진정할 시간. 잠이 조금만 더 깨면 도망가든가 해야지.
흔들리지 않도록 천천히 몸을 일으키고 이불 밖으로 몸을 빼냈다. 그리고는 바닥에 발을 디뎌 섰다. 뻐근한 어깨를 주무르며 그제야 방 안을 둘러보았다. 넓지 않은 방은 잠만을 위한 것인지 커다란 침대 하나가 전부였다. 나머지 공간은 텅 빈 채 남았다.
나는 방 한쪽 면을 가득 차지한 두꺼운 커튼을 향해 다가갔다. 가운데 틈으로 손을 넣어 조심스레 젖혔다. 방의 한 면도 전면 유리였다. 아직 새벽인지 어두컴컴했지만 하늘 끝자락의 어딘가가 옅은 빛이 물들어가고 있다. 아래의 수많은 건물들, 그리고 가로등을 보며 천천히 자리에 주저앉았다. 빛이 하나씩 떠오르고 있었다. 차가운 유리창에 이마를 기대 아찔한 아래를 내려다보며 생각했다.
그러네, 하늘이 무너지지는 않네.
남자와 자도 하늘이 무너지지는 않고 세상은 잘 돌아가고 있다. 당연한 일인데도 가슴 한켠에 안도가 느껴졌다. 아직 달라진 것은 없는 것 같다.
어두운 밤을 돌아다니는 불빛들의 움직임을 눈으로 한참 좇던 중에 뒤에서 움직이는 소리가 났다. 나는 어제 그 짓을 한 놈을 도저히 마주할 자신이 없어 모르는 척 창밖만 내려다보았다. 느릿한 발소리가 내 뒤까지 다가왔다. 나는 꿋꿋하게 모르는 척을 했다. 뒤에서 미약한 온기가 느껴지며 내 등 뒤에 가까이 자세를 낮춰 앉은 것이 느껴졌다. 그래도 돌아보지 않자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뭐하냐.”
“야경 봐.”
그리고 우리는 잠깐 말이 없었다. 다시 말을 걸어온 것은 정지운이었다. 가벼운 손길이 내 등 어딘가를 쓸어내렸다.
“내가 원래 겉이랑 속이 다른 애들을 싫어해.”
“…….”
“그런데 우리 재현이는 속에 있는 말 죽어도 안 하고. 먼저 움직이는 것도 없고.”
“너 우리가 무슨 교회 수련회 온 줄 아냐? 갑자기 왜 속마음을 털어놔?”
내가 딱히 섬세한 마음을 가진 사람은 아니지만 울컥했다. 이놈은 지금 이 대화가 어제 이렇고 그런 짓을 같이한 사람에게 할 말이라고 생각하는 걸까. 난데없이 자기 혼자 고백의 시간을 갖고 지랄이야. 심지어 평소에 말하지 못하던 앙금들로만 골라서. 내가 듣고 아, 그렇구나, 앞으로 안 그럴게! 하고 웃기라도 해야 하는 건 아니잖아. 기분이 상해서 더욱더 꿋꿋하게 유리 너머의 야경만 뚫어져라 내려다보았다.
“말이랑 행동도 다르고. 어떻게든 자기는 착하려고 하고.”
그 뒤를 잇는 말 역시 모조리 내 부정적인 면들을 박박 긁어댔다. 그런데 듣자 듣자 하니까 어디까지 가려는 거야. 그럼 내가 자기처럼 온갖 성질을 다 부리고 살아야 할까. 욱하는 성질이 목 끝까지 치미는데 등 뒤에서 다가와 귓가에 쪽 하고 입 맞추는 게 느껴져서 응어리지려던 기운이 풀렸다. 겉과 속 다른 거 제일 싫어한다더니, 자기가 제일 행동이랑 하는 말이 다르네. 그러고도 말은 이어졌다.
“그런데 그게 왜 좋지.”
의문감을 실은 목소리가 나지막이 울렸다.
“니 마음대로 해. 나도 내 마음대로 할게.”
“뭐?”
“너는 계속 그렇게 살아. 나는 나대로 살고, 그렇게 만나자.”
결코 다정한 말이 아니었다. 어투는 되는대로 내뱉고 있었고 목 뒤를 부드럽게 맞춰오던 입술은 언제부터인가 아프게 목덜미를 깨물며 괴롭히고 있었다. 따듯할 게 없었다. 계속 곱씹었다. 정지운이 한 말을. 곱씹고. 곱씹다가.
그런데 그 말에 나는 이상하리만치 눈물이 샜다. 처음에는 숨기려 허리를 구부린 채 고개를 숙였다. 머리를 무릎 사이에 박았다. 그러고도 자꾸 등 뒤에 달라붙어 오려고 하길래 울음을 꾹 참았다. 하지만 가빠지는 숨에 들썩이는 몸은 어쩔 수가 없었다.
고장 난 듯 움직임을 멈췄던 정지운의 몸이 뒤에서 덮쳐눌렀다. 팔이 옆구리 옆으로 끼워지고 나를 들어 올려 일으키려 하는 것 같았다. 그 자리에 버티며 나는 혼자 울었다. 부드러워진 목소리가 나를 불렀다.
“재현아.”
“……응.”
“내가 잘못했어. 미안해.”
“아니, 아니야.”
“뭐라고 안 할게. 그런 뜻으로 한 말 아니었어.”
무슨 말인지 안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했지만 터진 눈물이 그치질 않았다. 정지운이 옆에서 무릎 꿇듯 앉아 나를 다독이는 것이 느껴졌다. 얘도 고생이다 싶다. 나도 이 자리에서 처울고 있는 내가 시발스러운데 너는 오죽할까.
“욕하지 마? 내가 너무 뭐라고 했어?”
“아니야. 그런 거……. 후.”
“너 착해. 내가 괜히 개소리를…,”
“그거 아니야.”
대충 닦인 눈물을 추스르며 나는 고개를 들었다. 내 얼굴 꼴은 알 수 없지만, 그런 나를 내려다보는 정지운의 표정은 꽤나 볼만했다. 그 와중에 그건 웃겼다. 울음이 치밀어 내뱉지 못한 말을 그제야 겨우 꺼냈다.
“나 안 착하지. 그래. 그렇지.”
“…….”
여기서 정지운은 일그러진 표정을 한 채 선뜻 대답을 못 했다. 뭐라고 할 말을 찾는 표정이었다. 자기가 방금 정답을 말해놓고도 이런다.
“착하게 살라고 하니까 등신같이 하고 싶은 것도 못 하고 살았을 뿐이지.”
“……그러니까 착한 거야.”
아, 우리는 잘 통하다가도 가끔 대화가 안 돼. 나는 다시 고개를 저었고 끌어당기는 팔에 질질 끌려들어 가다시피 해서 정지운의 품에 기댔다. 몸부림치려는 나를 이상한 각도로 어떻게든 끼워 맞춰 끌어안아준다. 어설프게 토닥이는 손길을 느끼며 눈물을 참으려 애쓰며 목덜미에 기댔다. 왜 오늘 갑자기 이게 터진 거지. 모르겠다.
내가 믿는 것은 철없어 보일지도 모르지만 성악설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어릴 때부터 겪어온 수많은 일들이 그랬다. 세상 물정 어두운 우리 부모님을 등쳐먹으려는 인간들, 거짓을 말하는 친한 이웃들, 어떻게든 한 자락이라도 속이려는 부모님의 친구라는 분들, 아버지에게 팔리지 않는 물건을 떠넘기려 해서 큰 싸움을 일으켰던 이모까지.
걷잡을 수 없이 무너져가는 집에서 엄마는 나를 붙잡고 주문처럼 이 말을 꺼내곤 했다. 학교에서 누구에게나 나눠주는 상장을 들고 오거나, 모르는 사람 하나 없는 쉬운 시험지를 백 점 맞아올 때 특히 그랬다. 우리 재현이, 착한 재현이. 재현이 덕에 살지. 전혀 착하지 않고 착하고 싶지 않은데도 이런 말들을 듣고 자랐다.
거기에 대한 대답으로 어떠한 반박도 하지 않은 채 나는 스물다섯 해를 보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게 집을 나갔던 엄마는 나를 위한다며 집으로 다시 돌아오셨고, 아버지도 말끝마다 나를 보며 살아간다며 짐을 지웠다. ‘짐을 지웠다’라고 말하는 것은 너무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게 그분들의 진심이었고 결코 이런 결과를 의도하셨던 것도 아닐 테니까.
그런데 그 아래에서 자란 나는 모든 욕구를 억누르며 엇나가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이도 저도 아닌 인간이 되었다. 시간을 지나치게 버리는 게 아닐까 싶어 하고 싶은 것도 제대로 못 해. 팬질도 제대로 안 해, 공부도 하다가 멈춰. 연애도 마음을 나누지 못해 자꾸 삐그덕거리고 헤어졌다. 아직 어리고 학교에서 그저 시키는 대로 지시를 따르면 되던 시절과 다르게 사회에 나오니 점점 더 적응하기 어려워져갔다. 착하긴 한데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사람. 그게 나를 설명하는 하나의 문장이 되겠지.
내놓지 못하는 마음은 자꾸만 안으로 기어들어가고 내게 짐을 지웠다. 그나마 수연이가 가끔 내 마음을 끄집어내 짐을 어떻게든 빼앗아갔다. 그마저도 수연이의 속을 얼마나 썩였던가. 어릴 때부터 옆집에 살지 않았다면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을 인간. 그래, 그게 맞지. 그 말에 내가 웃었던가. 잘 기억이 나질 않는다.
이런 내게 정지운과 연애를 하라니. 너무 어려운 과제였다. 전혀 가보지 않은 길을 가고 지금껏 옳지 못하다고 생각해온 일을 하라니. 심지어 이렇게나 내 꼴을 꿰뚫어 보는 놈인데 말이다.
그런데 이번만큼은 말이다. 정말 이번만큼은 손을 뻗어 잡고 싶었다. 이것마저 놓치면 나는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그렇게 잡은 사람이 내 마음을 헤집어놓으니 도저히 참을 수가 없다. 눈물은 계속 흘렀고 나는 울음이 멈추면 당장 이 집을 뛰쳐나가버리고야 말겠다고 결심했다. 생각지도 못한 찰나 남에게 드러내게 된 내 치부는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창피하다. 그사이에도 정지운은 끊임없이 말을 늘어놓으며 나를 달래려 했다.
“내가 원래 할 말 안 할 말을 못 가려.”
“……후우. 아니야.”
“그러니까 다 울고 나면 하고 싶은 대로 말해.”
“아니라니까.”
정말 그런 게 아니다. 나는 네가 아까 한 말을 그대로 따를 생각이었다. 부디 나는 나 원하는 대로 하고 너는 너 원하는 대로 하고. 그렇게 만났으면 한다. 그냥 그렇게 만나고 싶을 뿐이다. 내가 만나고 싶은 너를 만나는 것.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것. 그거면 되는 거다.
한참을 울어 퉁퉁 부은 눈을 한 채 처음으로 안절부절못하는 정지운의 차를 타고서 내 집으로 돌아왔다. 몇 번을 물어도 나는 내 마음에 대해 말하지 않은 채 입을 다물었다. 이게 우리의 연애 첫 날 모습이다.
∞ ∞ ∞
아침에 나를 깨우는 것이 가벼운 무력감이었던 때가 있었다.
그러니까 그게…… 며칠 전, 단 며칠 전까지만 해도 말이다.
대학교의 상담 센터에서 가끔 상담을 오면 좋겠다고 하는 수준의 무력감이었으니 별것은 아니었을 거라 생각한다. 왜냐하면 학교 상담 센터는 심심풀이로 상담하러 가는 학생들에게도 모두 정기 상담을 하는 게 좋겠다고 말하곤 했으니까.
하지만 그 가벼운 것도 나름대로 나를 귀찮게 하고 있었던지 연애를 시작하고 나서는 기분이 훨씬 낫다. 연애 자체가 자잘하게 속을 썩이는 경우는 좀 있지만, 이 정도는 넘겨야지 어쩌겠나. 그러니까 예를 들어 이런 거.
나는 진행되고 있는 강의를 잠깐 한쪽 귀로 흘린 채 치열하게 휴대폰 터치를 하며 카톡 중이다. 망할 정지운 놈이 녹화 중에 잠깐 시간이 생겼다며 연락이 온 터라 그렇다.
[너 내 휴대폰 언제 만졌어]
[이제 봤냐?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죽고 싶어?]
[고작 그거 했다고 애인 죽으라는 놈이 어딨어]
[미친놈아 남의 휴대폰은 왜 뒤지고 니 이름은 왜 바꿔]
[오빠 해줘봐 오빠]
[죽어라 꼭 반드시 제발]
[이따 와서 죽여줘]
망할 놈의 자식. 이게 고단수의 방법일 수도 있지만 나는 반드시 쫓아가서 멱살을 잡을 거다. 오빠라니. 지운 오빠라니.
이것은 아까 정지운에게서 온 전화를 받기 위해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가 본 명칭이다. 너무 흉측해서 휴대폰을 던져버리고 싶었다. 이런 글자를 내 휴대폰 액정에 뜨게 하다니, 결코 용서할 수 없다. 비록 오늘 밤은 저놈이 무슨 녹화인지 뭔지를 하다가 밤 열두 시에나 온다고 했지만, 그래서 원래는 너무 늦다며 내가 안 보겠다고 했었지만. 쫓아가서 반드시 패악을 떨 것이야.
[오늘도 유정이라는 후배랑 수업 들어?]
[ㅇㅇ]
[우리 재현이 오빠 말 진짜 안 듣는다]
[불질러버릴 거야]
[그래 이따 보자]
휴우우. 분노를 다스리며 휴대폰을 내려둔 나는 더 이상 밀려서는 안 되는 필기를 서둘러 따라잡았다. 유정이에게 필기를 빌리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더 이상은 민폐다. 내가 하는 것도 있어야 빌릴 면목이 서는 거다.
필기에 집중하자 강의는 생각보다 빨리 끝났고 나는 필기구를 쓸어 담은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벌떡 일어나는 나를 올려다보며 유정이가 물었다.
“오빠 오늘 어디 가요?”
“응. 자소서 쓰고 이따 저녁에 바빠서. 왜?”
“저 필기 빌려드린 거 밥 언제 사줘요.”
“아. 다음 주에 먹자. 미안해, 진짜.”
“네에. 오빠 자소서 힘내시구요.”
“응. 다음 주에 약속 제대로 잡자.”
상심한 듯한 유정이의 표정이 찔렸지만, 그 와중에도 나를 응원하며 다독여주는 손길을 느끼고 죄책감은 배가 되었다. 벌써 몇 번을 미룬 건지 모르겠다. 이러다가 그냥 용돈이라고 밥값 주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네.
어쨌든 할 일이 급한 것은 맞아서 사람들로 비좁은 강의실 밖 복도를 헤치고 지나갔다. 같은 시간에 강의가 끝나서 그런지 사람들이 가득하다. 그 사이를 헤쳐 나가며 할 일을 하나하나 세었다.
집에 가서. 자소서 항목부터 점검하고, 복붙할 것들은 복붙한 다음에 새로 지어내야 할 것들을 생각해야지. 요즘 자소서는 자소설이다. 내가 회사 비전을 알면 이미 그 회사 사원이겠네. 게다가 내 삶의 가장 힘든 일은 왜 자꾸 물어봐. 그 이상의 경험을 시켜주게? 항의하고 싶은 항목은 많지만 아직 항의를 실천한 적은 없다.
그리고 맨 마지막에 해야 할 일도.
오늘 밤은 그냥 잠자리에 들고 내일 만날 생각이었지만, 아무리 늦더라도 쫓아가서 한마디 해야겠다. 내 휴대폰 그만 만지고, 여자 후배한테 이상한 카톡 보내지 말라고.
휴대폰으로 별달리 하는 게 없고 숨길 것도 없어서 지금껏 비밀번호 지정을 한 적이 없는데 요즘 진지하게 고민 중이다. 내 사생활. 제발 좀. 어이가 없어서 웃음도 나왔다. 얼마 전에는 유정이와 한 카톡을 열어보고는 자꾸 참견이다. 이 여자 후배 아무리 봐도 별로라면서. 별로기는 무슨.
아직까지는 남자와 사귀게 되어 삶이 크게 바뀐지는 잘 모르겠다. 그거야 며칠 안 됐고, 아직 딱히 한 일이 없으며 누군가에게 알린 적도 없기 때문이겠지. 다음 달에는 큰 고비가 하나 기다리고 있다. 수연이가 기어코 정지운을 한 번 마주하겠다며 벼르고 있어서 말이다. 피하는 데에도 한계가 있어 더 이상은 미룰 수 없게 되었다. 정지운도 재밌겠다며 고대하는 눈치다. 오직 나만이 스트레스로 다시금 말라 죽어간다.
앞으로 정지운과 맞춰 나가며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고, 어쩌면 끝이 거지 같을 수도 있지만 아직은 괜찮았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처음으로 어떻게든 기어코 손에 넣은 것이라 새롭고 생소하기마저 하다. 어쨌든 무력감은 옅어졌고 나는 조금 더 나은 사람이 된 것 같다. 이런 기분이 계속 이어진다면 행복해질 수 있을지도 모른다. 탁한 빛으로 물들었던 내 삶이 조금이나마 빛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