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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강하고 수강신청 변경 기간이 지나자 날씨는 꽤 따뜻해졌다. 벚꽃은 이제야 필 준비를 하고 있다. 나는 이른 아침부터 가벼운 옷차림에 운동화를 질질 끌며 학교를 걸어 올라갔다. 오른손에는 아침밥 대신에 학교 정문 옆 카페에서 산 음료수가 들려 있고 왼편에는 학교 정문에서 만난 영한이가 있다. 우리는 같은 교양 강의를 듣기 위해 부지런히 발걸음을 옮겼다. 아침에 감고 대충 말린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는데 영한이가 갑자기 물었다.
“너 과제 했냐.”
“아니. 이제 해야 되지 않을까.”
인기 교양이라 죽을힘을 다해 뚫었는데, 널널해서 인기 있는 게 아니라 신기해서 인기 있는 강의였다. 죽음에 대해서. 이름대로 동서양의 죽음에 대한 문화, 예술적 표현을 배우는 교양인데 과제가 무려 유언장 써오기다. 여기서 남다른 과제보다 더 남다른 것은 제출 기간이었다.
“그거 언제 내라고 할 거 같냐?”
“일단 이번 주쯤 써서 들고 다녀. 그 교수 진짜 그때 걷는대.”
교수님은 강의 첫날 우리의 유언장을 벚꽃이 떨어지는 날 걷어 가겠다고 하셨다. 설마설마하며 웃고 나왔는데, 앞서 이 강의를 들었던 녀석들에게 물어보니 진짜 그렇다고 한다. 언제 어느 수업 일자에 갑자기 제출하라고 할지 모른다고.
벚꽃이 언제 떨어지는지 가늠해본 적조차 없으니 더 아리송했다. 벚꽃이 지는 날이 언제인지 내가 알 게 뭐람. 무심코 올려다본 벚나무 옆에는 교내 스피커가 있었다. 낭랑한 교내 방송의 목소리가 아침 정규 방송의 멘트를 내보내는 중이다.
「……그러면 오늘 아침을 활기차게 시작하도록 활기찬 노래 들려드릴게요. 블래스트의 라이어.」
뜻밖의 곡이 시작되고 탕탕 때리는 듯한 전주가 교정을 울렸다. 학교의 분위기, 혹은 파란 하늘과 햇살이 내리쬐는 아침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노래 선곡이다. 익숙한 멜로디가 흐르고 자기를 버린 여자의 거짓말을 규탄하는 가사가 흐른다. 저 여자분도 블래스트 팬이라는 데 지금 내 손에 들린 음료수를 걸 수 있다. 조금 전까지 나오던 잔잔한 인디밴드 노래랑은 아예 다르잖아.
마침 흥얼거리던 이민석의 파트 뒤로 정지운의 목소리를 들으며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날 버린 너를 그래도 기다리겠다는 애절한 가사인데, 목소리만 들어도 여자가 돌아갈 것 같다. 하지만 나는 안 돌아갈 거다.
나는 당분간 블래스트의 팬클럽에 돌아가지 않을 거다. 수연이가 틈날 때마다 나를 놀리며 트라우마를 상기시켰기 때문이다. 가끔 잊을 만하면 문자로 ‘ㅋㅋㅋ’를 찍어 보내고, 자기 아는 팬 언니들이랑 놀 때도 전화해서 나를 놀렸다. 같이 노는 그 누나들은 나를 비웃는 데 단 한 순간도 주저함이 없었다. 어찌나 신나게 웃으시던지 나는 분위기를 맞추기 위해 어색하게 같이 웃었다. 나 나중에 사회생활도 잘할 거 같아. 그 정도다.
다행히 블래스트가 컴백하면서 팬덤은 나 정도쯤은 잊혀질 수 있도록 인터넷을 휩쓸며 욕을 먹고 다녀주는 중이다. 나는 많고 많은 사고 중 간간이 그런 애가 있었지 정도로 넘어가고 있음을 알지만, 내가 싫다. 나도 나름 상처를 받는 사람이다. 나쁜 팬들 같으니라고. 욕을 그렇게 해대냐. 우리 집 가정교육은 대체 왜! 날 언제 본 적 있어?
후우, 진정하자. 그래서 수연이가 콘서트 표 얻어 왔다고 같이 가자는데도 심드렁하게 구는 중이다. 일단 스탠딩이라 힘들고 공짜로 구해 왔다는 게 거짓말인 거 같아서 그렇다. 저거 자기가 돈 주고 사 온 게 뻔할 텐데, 미안하게.
그리고 지금.
굳은 결심이 무색하게 나는 수연이와 5월의 올림픽공원 한가운데 서 있다. 한 손에는 야광봉, 나머지 한 손에는 생수를 든 채. 어쩌다 이렇게 된 건지에 대해 구체적으로 묻지는 말아줬으면 좋겠다. 살다 보면 다 그런 거지. 세월의 흐름에 따라 내 억울함이 희석되고. 그사이에 수연이는 표를 아직 두 장 가지고 있었고. 마침 토요일에는 할 일이 없잖아?
그리고 무엇보다 내 마음을 흔들어놓았던 것은 민석이 형의 단독 무대가 있다는 소식이 공식 카페에 올라왔기 때문이다. 요즘 영 공방(공개방송)을 가지 못했더니 심심했다. 당연히 민석이 형은 공연을 끝내주게 하겠지. 음향도 빵빵하고 조명도 좋으며 리액션도 좋을 테니까. 그래서 수연이에게 못 이기는 척 알았다는 대답을 하고 쫄래쫄래 따라온 거다.
그래, 쫄래쫄래 따라왔다는 표현이 옳았다. 나는 이렇게 많은 인파가 함께하게 될 줄 몰랐기에 수연이 옆에 붙어 잔뜩 쫄아 있는 상태였다. 수연이는 귀찮게 붙지 말라며 나를 밀었다.
주변은 온통 초록색의 물결이다. 파릇파릇한 나무들도 초록색이고 블래스트 팬들이 들고 있는 야광봉도 초록색, 옷도 초록색, 죄다 초록색. 멀리서 보면 숲인 줄 알겠다.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주변에 사람이 너무 많아 정신 사납다.
수연이는 역시 굿즈를 하나씩 더 사 와야겠다며 전투적인 자세로 굿즈 줄을 향해 다가갔다. 뒤섞이는 소음과 말소리 사이에서 고개를 들어 체조경기장에 걸린 플래카드들을 바라봤다. 시커먼 옷을 입고 찍은 단체 화보, 그리고 개인 화보들을 하나씩 눈에 담았다.
민석이 형은 개인 화보에서 스탠딩 마이크를 손에 쥐고 그윽한 눈길로 바라보고 있었다. 멋있기는 한데 폼 잡는 느낌이라 웃음도 나왔다. 그리고 그 옆의 정지운을 보고 천천히 시선을 내렸다. 의자에 앉아 팔걸이에 양팔을 올린 채 무미건조하게 앞을 응시하고 있는 정지운은 그날 술집에서 봤던 그 얼굴 그대로다.
하하. 내 인생의 원수 수준은 아니지만, 그래도 한 마리의 새우젓이 소소하게 원한을 가질 만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당당하다. 원한을 가질 것이다. 내게 다시 행복한 트위터 생활을 돌려달라.
민석이 형 개인 무대가 뭐라고 여기까지 왔을까. 잠깐 회의감이 들려는데 그사이 수연이는 제 백팩을 빵빵하게 채워서 돌아왔다. 얼굴이 아주 반짝반짝하다.
“이제 줄 서러 가자.”
“콘서트 시작은 한참 남았는데?”
시간 보니 두 시간도 더 남았는데 벌써? 소규모 콘서트를 와본 적은 있다지만, 이렇게 본격적인 콘서트는 처음이라 잘 모르겠다. 그러면서도 걸음은 인파를 헤쳐 천천히 콘서트장 앞쪽으로 나아갔다. 수연이가 날 버리면 난 끈 떨어진 오리 새끼가 되는 거야.
“스탠딩은 먼저 구역별로 나눠서 번호순으로 서야 돼. 한 시간 전에 그 줄 그대로 입장한단 말이야.”
한여름은 아니지만 햇볕은 꽤 뜨겁다. 그늘 아래 서 있을 생각이었는데, 정말 벌써부터 줄을 길게 늘어서 서로 번호를 맞춰보는 팬들을 보자 할 말이 없다. E구역 43번 44번 스탠딩. 번호를 맞춰 사람들 사이에 끼어들자 수연이가 나를 진지하게 올려다보며 손가락을 하나 들었다.
“어떻게 해야 하는지 기억나지?”
“들어가면 바로 펜스를 향해 달릴 것. 본 무대 쪽 말고 돌출 무대 쪽으로. 맞지?”
그 와중에 주황색 조끼를 입은 스태프가 돌아다니며 주의사항을 외치고 있었다. 뛰지 말라고.
“뛰지 말라고 해도 다 뛰니까 무조건 펜스, 돌출 무대. 오케이?”
민석이 형의 개인 무대가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원형 돌출 무대는 본 무대에서 직선으로 쭉 뻗은 무대 동선 끝에 동그랗게 위치한다. 혹시 얘는 본 무대를 보고 싶은데 나 때문이 배려해준 걸까. 괜히 묻지 않아도 될 걸 물었다.
“혹시 나 때문에 본 무대 포기하는 건 아니지?”
“아냐. 나 내일 막공 표는 본 무대 쪽이야.”
역시 나 때문은 아니었구나. 내일은 누구랑 보러 올 거냐는 말을 하려는데 갑자기 끼어든 팬이 한 명 있었다. 머리를 양 갈래로 묶은, 수연이보다도 작은 여자다. 우리에게 명함을 나눠주길래 얼떨결에 양손으로 공손히 받았다. 보정을 잔뜩 먹인 멤버 텐의 사진이 명함에 가득했다. 뒤에는 홈페이지 주소와 함께.
“텐 오빠 개인 홈이에요. 잘 부탁드려요.”
“네.”
홈페이지 주소를 자세히 볼 틈도 없이 이번에는 긴 생머리에 구두까지 갖춰 신은 여자가 앞줄부터 차례로 나눠주던 전단지를 우리에게도 주었다. 이건 또 뭐야. 노래별 구호 맞추는 법……. 별걸 다 준다. 하지만 내게는 필요한 것이지.
나 같은 경우에는 노래가 나올 때마다 시디를 돌려가며 노래를 다 들을 수 없기 때문에. 손바닥만 한 종이에 적힌 노래 가사들을 읽다 보니 역시 절반은 모르는 노래다. 그래도 괜찮아. 민석이 형 무대를 보는 거야. 티브이에 나오지 않는 무대를 바로 앞에서.
돌아다니던 스텝들이 표의 번호를 몇 번이나 확인하는 사이 줄은 정렬되어갔고, 앞에서부터 차례로 걸어 들어가기 시작했다. 건물 안은 서늘하다. 표를 보여주고 손목에 팔찌를 차는 순간 내 기분도 서서히 들떠 올랐다. 아직은 뛰지 않고, 뛰지 않고 천천히.
조금씩 빨라지는 걸음을 사람들과 같이하다가 E구역이라고 쓰여 있는 커다란 입구의 문턱에 발을 디뎠다. 이미 달려 들어가는 앞사람의 등짝을 보며 나도 저절로 달리기가 시작됐다. 고작 그 50m쯤 되는 거리를 말이다. 손으로 펜스를 단단히 잡고 기대자마자 내 뒤에 온 사람들도 각자 펜스를 손에 쥐었다. 내 뒤, 그리고 양옆으로 사람들이 겹겹이 싸여갔다. 위에서 보면 사과 파이같이 생겼겠군. 그사이 이런 엉뚱한 생각도 들었다. 수연이는 뒤로 메고 있던 백팩을 제 앞쪽으로 돌려 메었다.
“무거우면 들어줄까?”
“아니. 사람들이 밀면 펜스 때문에 배에 멍들까 봐.”
얼굴이 절로 찌푸려졌다. 그 정도란 말이야?
“그렇게 밀어?”
“넌 그래도 남자라고 덜 밀리겠지만 힘내라. 너 키가 몇이지?”
“180.”
어차피 모를 테니 한번 거짓말해봤다. 180에서 아주 조금 부족하다. 아주 조금만.
“까고 있네. 너 180 안 되는 거 알아.”
“니가 어떻게 알아.”
“지난번에 원준이랑 서 있는데 원준이가 딱 180이거든? 근데 너 약간 작았음.”
그렇게까지 과학적인 이유를 댄다면 할 말이 없군. 모른 척 고개를 돌려 시야 앞 조금 높은 곳에 위치한 무대에 시선을 뒀다. 높은 곳에서부터 조명이 비춰 내려오는 이 무대에 곧 민석이 형이 나온다는 거지.
가장 늦게 입장한 E와 F구역의 앞쪽 너머에는 A, B, C, D구역에 사람이 가득했다. 천 명씩 넣었다고 했나. 기대감에 들뜬 분위기와 여성 특유의 높은 목소리가 재잘재잘 이어지자 나도 기분이 들떴다. 아무리 아닌 척해도 블래스트가 역시 좋기는 좋다.
이윽고 좌석 입장이 시작된다는 안내 방송과 함께 본 무대 위 사이드 전광판에는 사전 영상이 흘러나왔다. 벌써 공연장 안을 메우는 함성이 쏟아졌다. 연예인들의 블래스트 콘서트 축하 인터뷰를 이어 붙인 영상이 시작되었다. 그 영상에 나오는 연예인들마다 블래스트의 이번 활동 마무리를 축하한다고 하길래 물었다.
“수연아. 블래스트 이번 활동 접었어?”
“얼마 전에 끝. 싱글이라 얼마 안 했어, 짜증나.”
“그럼 이제 뭐 한대?”
“개인 활동 또 가겠지, 뭐.”
군대는 안 가나. 이 말이 목 끝까지 나왔다가 얻어맞기 싫어서 관뒀다. 그사이 좌석은 차곡차곡 메워지고 있었다.
사람들이 가득 차자 블래스트를 연호하는 목소리가 공연장에 가득했다. 올라가는 사람들의 텐션과 반대로 나의 체력은 벌써 하향곡선을 그리고 있다. 게다가 팬들은 정기적으로 나를 밀어서 펜스에 찰싹 달라붙게 만들었다. 팔 힘으로 근근이 버티긴 하지만 꽤 힘에 부친다.
수연이가 걱정돼서 돌아봤더니 얘는 생각보다는 여유로운 표정으로 펜스에 아예 눌어붙어 있다. 그 와중에 생수도 꺼내서 마시는 중이다. 나는 그냥 나만 잘 챙기면 되겠다. 처음에는 등 뒤에 바싹 붙은 여자 때문에 신경 쓰여 죽을 것 같았지만, 이젠 온 사방이 조여오니 무념무상이다.
그래, 나를 눌러라. 나는 가래떡이다. 혹은 찹쌀떡…. 뒤에 여자 가슴 감촉 찹쌀떡 같…… 아, 이런 미친. 죄송합니다. 조금만 떨어져 주시면 안 될까요.
어느 순간 조명등이 탁 꺼지고 가운데 본 무대 위쪽의 가장 큰 전광판에 불이 들어왔다. 콘서트 시작 영상이다! 귀가 찢길 듯한 비명이 온 사방에 가득하고 멤버들의 이름이 하나씩 떠오른다. 그리고 눈이 부실 만큼 큰 폭죽과 함께 오프닝 노래가 시작됐다.
오프닝은 아는 노래다. 1집의 타이틀곡 Go! 데뷔한 지 얼마 안 됐을 때라 그때는 과격한 안무를 소화하기 어려워했던 터라 오히려 요즘 더 물이 오른 노래다. 노래의 후렴을 따라 열심히 응원봉을 흔들고 바로 다음 곡으로 넘어갔다. 2집에 있던 약간 마이너한 노래. 이건 잘 몰라서 어설프게 따라 부르지 않으며 박자에 맞춰 손을 흔들었다.
“나도 너를 따라갈게~ 같은 속도로! 워우워!”
옆의 찢어질 듯한 수연이의 목소리로 듣는 게 더 익숙한 노래다. 얘가 심심할 때마다 흥얼거려서. 한 곡 더 진행되고 그제야 음악이 멈추고 조명이 훤하게 들어왔다. 스탠딩석은 나름대로 질서를 잡고 있다가 난장판이 되었다.
나는 떡판에 눌리고 있는 떡이다……. 사람이 아니다……. 세뇌하고 있는 동안 멤버들은 제 숨을 다 몰아쉬었는지 일렬로 모여 인사했다. 함성은 아까부터 멈추지 않은 채 강약 중간 약 커지고 작아지기만 한다. 자기들끼리 이야기하는 소리가 마이크 너머로 작게 흘러나온다.
“일렬로 좀 서봐.”
“줄 맞춰 서. 야. 준영아. 손 흔들지 말고 이리 와.”
“하나 둘 셋. 안녕하세요, 블래스트입니다!”
리더 차태원의 박자에 맞춰 한꺼번에 인사를 했다. 팬들은 날뛰고 나도 손을 들어 흔들었다. 신난다. 이야, 정신 빠진다.
공연이 계속될수록 나의 몸은 주변 사람들과 일심동체가 되어서 흔들렸다. 저 너머에서는 한 여자가 밀리다 못해 탈진했는지 풀썩 쓰러졌다. 경호원은 그 여자를 펜스 너머로 들어 올려서는 데리고 나갔다. 밭에서 무를 뽑듯 쑥 뽑아 갔다. 그만큼 험난한 전쟁터였다, 스탠딩이라는 것은. 나는 살짝 질려서 발라드가 끝나고 잠깐 중간 영상을 보여주는 사이 물었다.
“스탠딩 항상 이래?”
“아직 괜찮은 거야. 이따 이 돌출 무대로 오빠들 오면 어떨 거 같냐.”
“으으.”
수연이 손끝을 따라가서 내 눈길이 닿은 곳은 우리 앞의 돌출 무대였다. 그러게. 여길 오면 나는 살아있을까? 힘겹게 왼팔을 올려 시계를 봤다. 한 시간 하고도 좀 더 지났다. 그 와중에 수연이는 부채를 가방에서 꺼내서는 얼굴에다 부쳤다. 가방에서 뭘 자꾸 비집어 꺼내는 게 용하다.
“아, 짜증나. 돌출 별로 안 오네. 내일 본 무대 쪽 스탠딩 잡아놓길 잘했다.”
“이따 오겠지.”
이번에는 무대 뒤에서 민석이 형만 모습을 슥 드러냈다. 나오기 전 얼굴만 빼꼼하게 내밀어서는 또 팬들이 비명 지르는 걸 즐긴다. 하여튼 천상 아이돌이지. 환하게 눈웃음치며 본 무대로 걸어오는 사이 갑자기 스태프들이 아래 어디선가 나타나더니 의자와 스탠딩마이크 하나를 끌고 돌출 무대 위에 세팅하고 재빨리 내려갔다.
어? 설마……? 민석이 형은 스탠딩의 이곳저곳에 인사하며 걸어오고 있었다. E구역과 F구역 사이 바로 이 돌출 무대에! 반짝이는 땀방울까지 다 보인다 싶은 순간 뒤에서는 무시무시한 압력이 나를 덮쳤다.
“우와아아! 형…! 컥…, 쿨럭쿨럭.”
“꺄아아아아악-! 오빠-! 오빠 저 왔어요! 오빠 나-!”
“오빠! 여기 봐요 오빠-!”
내 처참한 신음 소리는 사람들의 함성 사이에 묻혔고, 민석이 형은 의자에 앉아 스탠딩마이크의 각도를 조절했다. 이 난장판 같은 스탠딩석을 보고도 감미로운 표정을 짓더니……, 멜로디가 나와?
“그대를 안은 내 손이…….”
발라드의 앞 소절이 시작되면서 사방은 비명으로 커졌고 나 역시 억울해서 외쳤다.
“발라드였어?! 안 돼!”
무대 해달란 말이야! 나는 절망해서 펜스에 엎어져 기대버렸다. 무대 해줘야지…. 형은 그게 재능인데…. 반짝반짝한 거…….
공연장은 나 빼고 잔치였다.
감미로운 사랑 노래는 계속됐다. 난 이 노래가 있었어도 이게 민석이 형 단독 무대일 줄이야 꿈에도 몰랐다. 억울해. 춤을 보여달란 말이야. 늘어져 흔들거리는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왼쪽의 수연이는 일말의 자비도 없이 자신만의 세상으로 빠져들었다. 그사이 미묘한 동지 의식이 싹튼 오른쪽의 여자가 그런 나를 흘깃 돌아보며 말했다.
“민석 오빠 발라드 할 거라고 팬들이 말 있었는데 못 보셨어요?”
“네, 그냥 당연히 댄스나 퍼포먼스인 줄 알고…….”
“어떡해.”
한 일 초쯤 내게 관심을 보이고 여자는 다시 민석이 형을 향해 눈을 돌렸다. 이미 민석이 형과 자신 둘만의 세계에 빠져 있었다. 여기서 우울한 것은 나뿐이다. 외롭다, 젠장.
노래가 끝나고 나는 힘없이 박수를 쳤다. 그리고 옆의 수연이를 팔꿈치로 힘겹게 쳤다. 멀어져가는 민석이 형의 뒷모습을 아직도 응시하고 있던 수연이는 건성으로 대답했다.
“왜. 화장실?”
“닥쳐. 너 발라드인 줄 알았지.”
“아냐.”
“아니긴 뭐가 아냐. 니가 모른다고? 니가?”
“몰랐지롱.”
허. 기가 차서 진짜 웃음이 나왔다. 뭘 어쩔 거냐는 양 가소로운 표정을 짓는 수연이는 얄미웠다. 진심을 다해 얄미웠다. 됐다. 말을 말자. 표를 준 애한테 무슨.
다시 본 무대 쪽을 바라보자 민석이 형을 마중 나온 멤버들이 손가락질을 시작했다. 퍽 쑥스러워하는 척 민석이 형은 고갤 숙였다. 맨 앞에 나와서 손가락질하며 웃는 멤버가 리더 차태원이다. 키가 크고 이번에 몸을 좀 키웠다. 그래서 그런지 오늘 민소매 옷에 조끼를 걸쳤는데 운동으로 키운 팔이 부담스럽다. 춤도 되고 노래도 기본은 되고 예능이 잘된다.
“너 이거 한다고 한참 신났던데, 좋냐?”
“응. 우리 애기들이랑 한순간이라도 더 소통하니까 좋네.”
그리고 그렇게 받아치는 민석이 형도 예능이 보통은 아니지. 나는 내 팔뚝의 소름을 툭툭 털어냈다. 가끔 저런 멘트를 한다. 주변은 이미 비명으로 가득하지만, 내가 좋아하기에는 너무 변태 같은 멘트라 관뒀다. 나는 정도를 아는 사람이다. 남팬이라고 해도 말이야.
그리고 뒤로 두 걸음 떨어져 있는 게 정지운. 이 멀리에서 봐도 압도적인 비율을 자랑한다. 지 혼자 운동하고 자기 혼자 무럭무럭 자랐는지 말이지. 소소한 원한이 있지만 그 잘남까지 비하할 수는 없어 나는 슬쩍 고개를 돌렸다.
정지운 옆에 나란히 서서 웃고 있는 게 안준영이다. 블래스트의 막내. 나랑 나이가 같던가. 밤톨 같은 머리 색깔에 키는 정지운만큼이나 훌쩍 크다. 형들에게 반말하는 것이 일상인 동생인데, 다들 그냥 그런가 보다 넘어가 주곤 한다. 아니면 카메라 앞이라서 그런 걸까.
그리고 그 옆에서 텐은 아래 스탠딩 팬들과 손짓하며 무언가를 말하는 중인 듯했다. 저 멤버에 대해서는 정말 잘 모르겠다. 정지운만큼 말수가 없고……. 내가 모르는 어떤 매력을 다른 팬들이 알아주겠지. 그래, 그럴 거야.
그들이 말을 섞고 신변잡기를 이야기하는 걸 듣다가 지쳐서 시선을 돌렸다. E구역의 주변 다른 사람들도 자기 할 말을 하며 옆 친구와 이야기 중인 게 몇 개 들린다. 아무리 블래스트가 좋다 해도 E와 F구역은 본 무대와 멀리 떨어져 있다 보니 사람들이 지쳤나 보다.
수연이 너머의 여자는 몰래 아래에서 소형카메라에 녹화된 영상을 확인하는 중이다. 그거 걸리면 뺏길 텐데. 그러는 사이 블래스트가 다시 천천히 본무대를 지나쳐 돌출로 걸어 나오기 시작했다. 아, 아냐. 오지 마!
“우리가 이쪽 별로 안 왔죠? 이제 앞에서 놀게요.”
정지운의 부드러운 말 한마디에 내 몸은 또다시 펜스에 짓눌렸다. 으아악. 빵빵한 음악과 함께 노래가 시작되고 내 앞을 멤버들이 왔다 갔다 하며 춤을 췄다. 나는 바람 빠진 공기 인형처럼 마구 흔들렸다.
“야, 윤재현! 신나지! 완전 좋지-!”
“살려줘!”
“이야아아아아!”
수연이는 미친 듯이 머리를 흔들며 춤췄다. 왼쪽 오른쪽 뒤도. 모두 나를 빼고 신났다. 으아아아 살려주세요!
영겁과 같은 시간이 지났다. 나는 내가 이 단어를 내 삶에서 쓸 날이 올 줄은 몰랐지만, 그렇다. 정신없는 댄스곡과 힙합풍의 노래가 지나고, 발라드도 지나고. 이제 클로징의 때가 다가왔다. 블래스트도 갖춰 입고 있던 검은 가죽점퍼를 어디다 던져버리고 흰 티셔츠 한 장과 청바지만 입고 있었다.
쉬던 도중에 정지운이 무대 위에 준비되어있던 생수를 마시는데 그걸 클로즈업해서 온 전광판에 비춰줬다. 턱선을 드러낸 채 물을 마시자 온 공연장이 비명으로 가득 찼다. 그 소리에 정지운은 사레가 들린 듯 쿨럭거렸다. 그랬더니 팬들은 또 우는소리다. 참 대단해, 하나하나 반응해주는 게.
옅은 갈색의 머리카락이 배어 나온 땀에 젖어있는 것을 보고 나도 이마의 땀을 닦았다. 이미 내 생수는 다 먹고 바닥 어디다 던져둔 지 오래다. 수연이가 물통을 불쑥 내밀었다. 눈동자가 아까보다는 제정신으로 돌아온 것 같다.
나는 그 물을 받아 마시고 물었다.
“이제 뭐 남았지?”
“마지막 노래하고 인사하고 갈 거야.”
“다행이네.”
“이게 제일 밀릴 거야.”
“대체 왜?”
“다른 사람들 봐봐.”
멤버들이 멘트를 하는데 사람들이 이상하게 제 짐을 자꾸 정리한다. 수연이 너머의 카메라를 들고 있는 여자도 제 카메라를 가방 안쪽에 넣고 지퍼를 잠갔다. 휴대폰을 들고 있던 사람들도 자기 주머니에 챙겨 넣고 있었고. 모를 일이라 수연이를 돌아보려는데 그새 친해진 것 같은 우리 뒤편의 여자가 슬쩍 끼어들어 대답했다. 아까 내 발을 지르밟았는데 사과를 받아준 이후로 친해진 것만 같은 착각이 든다.
“오빠들 마지막에 댄스곡 하면서 무대 다 돌아다니는데, 마시라고 올려둔 생수들 다 뿌려버리거든요.”
“여긴 락 행사장이 아닌데요?”
“원래 그래요, 오빠들은. 그리고 저 이거 좀 무대 위로 던져주실래요?”
“네?”
여자가 내민 것은 무슨 슬로건 같은 것이었다. 영원한 막내 안준영. 초록색의 슬로건에 검은 수가 놓여 있다. 여자는 마치 고백이라도 하는 듯 부끄럽게 제 입을 가리며 말했다.
“다들 던져 올려요. 그럼 오빠들이 그거 중에 몇 개 들어서 직접 하거든요.”
“네.”
그러고 보니 주변에서 정말 뭘 하나씩 무대로 던져 올린다. 정 가운데에 떨어져 방해되지는 않게 가장자리에 슬쩍 던져놓는 정도? 나는 그 슬로건을 좀 멀리 던져 올렸다. 여자의 고맙다는 인사가 다 끝나기도 전에 쨍쨍한 리더의 목소리가 저 멀리서 울린다.
“자, 그럼 이제 진짜 마지막 노래. 간다!”
노래가 쾅 하고 울리자마자 다섯 멤버가 무대에서 흩어져 자유롭게 돌아다니며 퍼포먼스를 벌였다. 아래의 팬들에게 손을 잡아주기도 하면서. 그리고 나는.
“크억!”
조금 전까지 대화했던 여자는 맹렬하게 내 뒤를 다시 밀어댔고 나는 짜부라들었다. 아니, 이 여자들아. 그래도 내가 남잔데 너무 붙는 거 아니야? 소리 없는 아우성은 텐이 돌출 무대로 나와 제 발치의 생수병을 열 때 더 불안해졌다. 아, 나는 맞기 싫은데. 하지만 옴짝달싹할 새 없이 비명 소리들에 갇혀 흩뿌려지는 물방울을 맞았다. 텐은 허리를 숙여 손도 몇 번 마주쳐준 뒤 휙 지나갔다.
그다음에 온 게 민석이 형. 그래도 민석이 형 때는 나도 손을 뻗으며 환호했다. 튀는 내 목소리가 민석이 형의 귀에 들렸는지 이쪽을 정확하게 바라봤다. 땀을 닦으며 이쪽을 보는 얼굴이 환하다. 그리고는 마이크에 대지 않고 생목소리로 말했다.
“왔네?”
음, 사실 내게 말했는지도 잘 모르겠다. 왔네? 라고 말하며 이쪽을 보는 순간 내 양옆, 그리고 뒤 다섯 명 정도가 자기에게 말했다며 자지러졌으니까. 형이 막 웃으면서 제 발치의 물통을 또 열려고 하길래 나는 온 힘을 다해 손을 내저었다. 저기요, 저쪽으로 뿌려요!
다행히 이 말은 알아들었는지 손을 살살 흔들어 보이며 반대편으로 갔다. 어휴, 살았네. 오빠 여기요! 여기! 하는 사이에 나는 혼자 안도했고 수연이가 옆에서 내 팔을 아프게 때려댔다.
“야! 저게 다 성수야!”
“웃기는 소리 하지 마!”
둘 다 화가 나서 이러는 게 아니라 이러지 않으면 안 들린다. 둘이 대화에 집중하다가 또다시 뒤에서 훅 밀어대는 것을 느끼고 앞을 봤다. 아, 뒤에 여자 진짜. 우리 우정 어디 갔어요? 내 귀 너머로 스쳐 뻗어지는 손이 비명과 함께 어우러졌다.
“오빠아아악! 지운 오빠-!”
아, 정지운이다. 뒷 여자의 비명 때문에 나는 귀가 찢어지는 줄 알았다. 정지운은 누가 던져준 것인지 기다란 목받침 베개 같은 것을 제 목에 끼우고 이쪽을 향해 걸어왔다. 눈매를 살짝 접고 웃는 것만으로도 주변엔 비명이 난리 났다. 하지만 그럴 만했다. 붉어진 얼굴을 손부채질 하며 조명을 받는 정지운은 지나치게 잘생겨서 부담스러웠다.
정지운의 눈이 아래의 팬들을 쭉 둘러보다가 나에게서 잠깐 멈췄다. 아니, 멈췄다고 생각한 거다. 또다시 주변은 오빠라는 비명 소리로 난리가 났다. 특히 뒤랑 내 옆의 여자는 거의 울기 직전이었다.
그리고 정지운이 천천히 걸음을 옮겨 이쪽으로 다가왔다. 아까만큼이나 환한 미소였지만 한쪽 입꼬리가 올라간 게 영 불안하게 생긴 웃음이었다. 허리를 숙이고, 아래에 있던 물병 중 새것을 들어 올려 까더니 한 모금 마셨다. 그 와중에 흘린 물이 티셔츠에 떨어져 안 그래도 젖은 흰색 티셔츠가 달라붙었다. 옅게 비치는 흉배근과 복근을 보고 내가 다 기겁했다. 저게 뭐하는 짓이래.
팬들의 비명은 저 위의 좌석에서조차 난리가 났다. 온통 정지운을 부르는 소리뿐이었다. 그가 천천히 걸어와서 물통을 들어 올리고는……
“으아아악!”
보통 물을 뿌릴 때는 널리 흩뿌려 물방울이 튀기는 정도로 뿌린다. 그런데 정지운은, 저 악독한 놈이 내 머리 위에 직각으로 물통을 세워 물을 쏟아버렸다. 으아아악 이게 뭐야! 머리끝에서부터 줄줄 흐르는 물이 내 얼굴과 턱까지 적셨다.
둘러보니 다행히 수연이는 무사하고 내 옆의 여자도 조금 튄 정도인 것 같다. 나는 분노에 차서 위를 올려다봤다. 정지운도 이 정도까지는 상상하지 못했던 건지 제 손안의 물병을 보고, 나를 봤다. 무슨 말인가 하려는 듯 벌어지는 입술을 보고 이번에는 내가 선수를 쳤다. 하지 마!
이 와중에도 물은 내 상의 속에서 줄줄 흘러 하의까지 닿고 있었다. 정지운은 아래에 물병을 내려두고 제 발치의 물건 중 하나를 들었다. 수건을 들었는데 누구 발에 밟힌 건지 영 모양새가 아니었다. 다시 그것을 내려놓고 인형을 만졌다가 그 옆의 커다란 부채를 들었다. 그리고는 나를 보고는 그것을 정확하게 조준해 던져주는 게 아닌가.
순간 움찔해서 손을 앞으로 뻗어 잡으려다가 손가락 끝에 탱 하고 튕기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 부채는…… 내 정수리에 그대로 꽂혔다. 따악 하는 소리와 함께 튕긴 부채는 뒤편 어디로 날아갔는지 사람들의 몸싸움 소리가 들렸다. 아아악!
“아! 아, 이 미친놈아-!”
이번만은 진짜 참을 수가 없었다. 나는 식식거렸고 옆의 수연이는 웃다 못해 울고 있는 중이었다. 시발 졸라 웃겨, 라면서 욕까지 현장감 넘치게 섞어 웃는다. 미치겠다. 내 옆도, 뒤도 다들 웃는 소리가 들리고 있다. 쟤는 대체 나한테 왜 저래? 내가 뭘 잘못해서? 씩씩거리는 내 꼬라지를 보던 정지운은 입술을 꽉 깨물고는 무언가 심각한 표정이 되었다가 결국 자기도 웃음이 터졌다. 웃어? 니가 웃어? 야, 계급장 떼고 정당하게 붙자!
“너 내려와, 싸우자!”
“미안한데 너도 욕한 게 있잖아.”
“내가 뭐!”
“앞으로 욕하지 말고.”
와. 그리고 정지운은 또 나를 무슨 강아지 보듯 눈길로 쓰다듬고 저 멀리 휘적휘적 걸어갔다. 야. 너 이리 와라. 싸우자, 이 미친놈아!
“짜증나 죽겠네.”
“야, 졸라 웃겨. 아, 사랑한다, 윤재현. 니가 짱이다.”
수연이는 축축하게 젖은 내 상의에 손을 댔다가 떼며 깔깔댔다. 다 꼴 보기 싫다. 혼자 있고 싶으니까 나가주세요. 이후로 콘서트가 어찌 되던 나는 수연이의 부채를 빌린 채 미약한 부채질을 해댔다. 조금이라도 옷이 마르길 바라면서. 젠장 맞을 인생이다.
콘서트는 그렇게 알아서 잘 끝났다. 내 알 바 뭐냐. 나 빼고 하나 된 사람들. 그리고 그 흥분. 좋겠다? 어? 수연이는 나를 끌고 나오는 내내 깔깔댔고 주변의 팬들은 그제서야 내 몸의 물기를 닦아준답시고 자기 화장지나 타월 같은 것을 빌려줬다. 거절할 처지가 아니라 일단 받아다 닦았다.
보이는 피부는 말끔해졌지만, 축축한 머리와 옷은 답이 없었다. 나는 이들 사이에서 혼자 워터파크를 다녀온 꼬라지였다. 공연장 밖을 나와 수많은 사람들과 같이 공원 입구 쪽으로 나가는데 수연이는 아직도 킥킥거리는 웃음을 간간이 터트렸다.
“너 이제 키 180 되겠다. 지운 오빠가 물 줬으니 무럭무럭 자라겠네, 우리 재현이?”
“닥치세요.”
“아, 미쳤어. 너 괜찮냐?”
“안 괜찮아. 속옷까지 다 젖었어.”
물이 큰 줄기로 주르륵 흐르다 보니 안쪽까지 푹 젖은 게 문제다. 길 가다 보면 넌 선빵이다, 정지운. 내 굳은 결심을 모르는 수연이는 버스를 탈 건지 지하철을 탈 건지 묻는다. 나는 툴툴거리면서도 그 말에는 대답했다.
“내가 밥 사주기로 했잖아. 먹으러 가자.”
“다음에 사줘. 너 젖어서 어디 가지도 못해. 나 그냥 집 가서 밥 먹고 바로 잘게. 내일 또 스탠딩 뛰어야 돼.”
“알았어. 꼴이 이래서 어디 간다는 말이 안 나온다. 난 택시 타고 갈게.”
잠실 쪽에 맛집도 찾아놨는데 다 글렀다, 젠장. 수연이는 제 가방 안에서 부스럭거리더니 굿즈 중에 타월 하나를 꺼냈다. 그리고는 과감하게 그 봉투를 뜯어 내게 건넸다.
“이젠 의미 없어.”
“택시 의자 앉을 때 깔고 앉아.”
“그러네. 다음에 줄게.”
“이리 오세요, 우리 재현이. 내가 배웅해줄게.”
“신났냐?”
“어. 졸라.”
수연이는 세상에서 제일 행복해 보이는 표정으로 나를 택시에 밀어 넣고 손을 흔들었다. 여러모로 나만 슬픈 하루였다.
아, 정지운. 이 원수 같은 놈. 택시의 유리창에 비쳐 보이는 내 꼴을 보고 더 어이가 없어서 웃음만 나온다. 대체 쟤랑 나는 왜 이러는 거지?
∞ ∞ ∞
쓰러져 자고 일어나서는 오랜만에 집에 갔다. 학교와는 두 시간도 넘게 걸리는 탓에 자취 중인데, 이번 주에 안 오면 용돈은 생각도 말라시기에 아침부터 삐걱거리는 몸을 일으켜 지하철을 탔다. 그렇잖아도 무거웠던 다리는 한 발을 아래로 내리뻗으며 무게를 싣자 엄청난 근육통으로 내게 위험 신호를 보내더라. 나는 바로 그 신호를 접수해 에스컬레이터가 있는 옆 출구로 향했다.
환승을 한 번 하고 내려서 버스까지 타고 도착한 집 앞 정류장에는 어머니가 나와 계셨다. 나날이 작아지는 어머니를 보면 마음 한켠이 따끔하다. 그래도 이번에 보는 어머니는 이전보다 흰머리가 줄었다. 환하게 웃으며 내 손을 잡으시기에 나란히 걸었다. 집은 골목 안으로 쭉 들어가다 보면 나오는 3층 빌라의 꼭대기다.
“엄마, 흰 머리 줄었어?”
“응, 막내 이모가 염색해줬어.”
“좋네.”
집에 와보니 아침까지 계셨다던 아버지는 그새 어디 나가셨다. 부엌에 앉아 어머니의 이야기를 두 시간도 넘게 들어야 했다. 아버지를 두고 그 인간은 어디 집에 있는 경우를 못 보겠다며 하소연이셨다. 고개를 끄덕끄덕하며 듣는데 아버지가 들어오셨다. 엄마는 어딜 다녀오냐며 잔소리였고 나는 아주 자연스럽게 그 사이에서 빠져 티브이 앞에 자리 잡았다. 그리고 아버지와 함께 나란히 앉아 티브이를 보고, 밥을 먹고 또 자리에 앉아 티브이를 봤다.
자취방에 가면 보기가 어려워서 집에 오면 많이 봐두는 편이었다. 그래서 아버지도 리모컨을 내게 넘겨주신 채 별말이 없으시다. 나 빼고는 전혀 관심 없는 연예가 뉴스를 보는 중이다. 유명 배우 이승연의 드라마 이야기, 다음 주 컴백하는 아이돌 이야기 등.
뉴스는 리포터를 연결해 오늘까지 하는 블래스트의 콘서트 이야기를 시작했다. 환호하는 팬들과 콘서트의 오프닝 영상, 블래스트의 노래 등등. 인터뷰에서는 평소와 비슷한 그들의 이야기가 계속되고 있었다. 이번 콘서트는 어떤 콘셉트다, 같은 거.
무심하게 그걸 보고 있다가 정지운이 나올 때는 좀 울컥했다. 나른하게 앉아서는 리액션만 한다. 너도 말을 해라. 옆에 민석이 형을 봐. 얼마나 열심히 음악적 포부를 이야기하냐. 너도 작곡 좀 배우고. 그 와중에 엄마가 부엌에 계시다 불쑥 내게 물었다.
“재현이 너 어제 저 콘서트 갔었니?”
“누구한테 들었어?”
“수연이 엄마.”
“아.”
그때 민석이 형이 블래스트 이번 콘서트에서 할 특별 무대에 대해 말하다 문득 정지운에게 말을 걸었다.
「이젠 지운이도 개인 활동해요.」
「어머, 정말요?」
호들갑 떠는 리포터의 멘트와 함께 제게 시선이 고정되자 정지운은 허공에 두던 시선을 바로 해 싱긋 웃으며 말했다. 입꼬리가 올라가자 화사한 얼굴이 더 활짝 편다. 나는 괜히 심기가 불편했다.
「네. 블래스트 활동 끝나면 처음으로 개인 활동에 들어갑니다.」
「우와. 지운 씨는 회사에서 아끼느라 안 내보내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군요. 어떤 개인 활동을 하세요?」
다 알면서도 저렇게 호들갑을 떨어주는 것이 리포터의 예의지. 정지운이 뜬금없이 뮤지컬 ‘두 남자’에 캐스팅됐다는 것은 저 바닥에 소문이 자자할 것이다. 블래스트 활동도 최소한으로 하는 정지운이 갑자기 뮤지컬이라니. 내 알 바는 아니지만 많이 고생했으면 좋겠다. 뮤지컬 감독님 힘내세요. 저 오만함을 눌러주는 겁니다. 할 수 있어요!
「네. 이번에 뮤지컬 ‘두 남자’에서 두 남자 중 한 명을 맡게 되었습니다. 여름에 대학로 신영 아트홀에서 뵐게요.」
아이고. 두 남자 중 한 명, 그러니까 누구를 맡는지, 무슨 역인지도 안 말하는 저……
………….
잠깐, 신영 아트홀. 대학로.
“이런 시발! 우리 학교 앞이잖아!”
너무 깜짝 놀랐다. 저놈이 나랑 같은 공기를 마실 위기라니! 순간 집 안이 조용해져서 눈치를 살피니 아버지와 어머니 모두가 나를 빤히 보고 계셨다. 엄마가 눈살을 찌푸리며 큰 소리를 내신다.
“어디서 욕이야?”
“네…. 죄송합니다.”
아버지는 묵직한 손으로 내 등을 한 번 툭 치시고는 티브이로 관심을 돌려주신다. 부엌은 다시 어머니가 내시는 달그락거리는 소리로 가득 찼다.
나는 아주 조금 억울해졌다. 엄마. 엄마 아들이 저놈에게서 물벼락맞았어. 말해봤자 웃긴 놈이 될 뿐이라 입을 꾹 닫았지만, 답답한 가슴이 세차게 뛰어댔다.
월요일 아침 오랜만에 집에서 일어나 등교한 학교에서 나는 천천히 현실로 돌아왔다. 투자론이 영어로 된 문제지 한 장을 과제랍시고 우리에게 나눠줬기 때문이다. 찬찬히 문제를 읽어 내리다가 나는 눈을 꾹 감았다.
내가 경영학과에 들어와서 느낀 점이 있다면 이 세상에는 영어를 잘하는 대학생과 영어를 잘하지 못하는 대학생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철저하게 후자에 속한다. 나는 영어를 못한다. 정말 못한다.
우리 부모님은 시대에 뒤처진 분이셨고 당신들의 어릴 때를 상기해 내게 한문만을 열심히 가르치셨다. 사실 그 한문도 잘하지 못했던 것이 함정이긴 하다. 어쨌든 사교육 하나 없이 버티던 영어는 고등학교 때 한계에 부딪혔고, 영단어만 죽어라 외워서 수능을 통과했다. 그리고 대학에 당당히 입성하자마자 태초에는 영어로 수업하는 교양이 있었고 전공들 역시 영어로 수업을 하더라.
나는 이리저리 부딪히다가 결국 한계에 봉착해 수업을 회계 라인으로 전부 바꿨다. 이것도 또 하나의 실패였다. 요즘 죽을 것 같다. 회계사 자격증 공부하는 학우들에게 더럽게 치인다. 그 결과 나의 성적표는 처참함을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
여기에 투자론까지 나에게 갑작스럽게 영어 문제를 과제로 주는 것은 너무하지 않은가. 그리고 더한 문제는 또 있었다.
“야, 이제 공부하러 가자.”
영한이는 학식으로 나온 짜장밥을 쓸어 담듯 먹더니 내게 말했다. 아직 반도 못 먹고 있던 나는 어깨가 추욱 처졌다.
“다음 주였나?”
“어. 이제 진짜 마지막 기회다.”
“그래. 도서관 어디 갈까.”
“아예 못 나오게 법학관에 틀어박히자.”
법학관은 안 그래도 산 중턱에 있는 학교에서 가장 안쪽에 있는 건물이다. 법학관에는 전설이 있었다. 사법고시를 준비하던 법학대 학우가 건강을 위해 일 년 동안 법학관 학식을 세 끼 꼬박꼬박 챙겨 먹었는데 영양실조로 실려 나갔다는 그런 전설.
밥은 열악하고 위치는 가장 안쪽 언덕배기다. 처절한 공부를 위해 준비된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땅이 꺼져라 한숨 쉬었더니 영한이는 안경을 벗고는 닦다가 말했다.
“공부 좀 해놨어?”
“아니. 너는.”
“알면서 뭘 묻냐. 나 어제 300일이었어.”
콘서트를 가는 나나 여자 친구와 300일을 보낸 영한이나 똑같은 것이 있다. 공부는 단 한 자락도 하지 않았다는 것. 회계 과목들은 중간고사가 두 번이 있다. 남들 다 중간고사가 끝난 이때쯤에 두 번째 중간고사가 또 한 번 있다. 악독하기 그지없다.
1학년 때는 경영학부 학생들이 거의 다 회계 원리를 듣기 때문에 친구들 여덟 명이 모두 모여 밤을 새웠었다. 그때쯤에는 도서관에 경영학과 학생들만 날을 새서 ‘경영인의 밤’이라고 지영이가 아주 고급스러운 별명을 붙여준 적도 있다. 다른 애들은 다 마케팅이나 인적 관리 쪽으로 빠졌고 나와 영한이만 경영인의 밤 행사를 매년 계속한다.
사람이 드문드문한 도서관에서 천 페이지의 책을 펴는 순간 우린 막막해졌다. 일단 읽고, 다시 한 번 읽고. 저녁 시간이 되자마자 챙겨 먹고 카페 가서 멍 때리고 나니 아홉 시다. 열두 시까지는 아직 시간이 남았으므로 조금만 더 미적대려고 영한이와 법학관 옥상에 올랐다. 시원한 바람을 쐬며 건물 아래 펼쳐진 낮은 산 너머 서울의 야경을 눈에 담는다. 우리는 나란히 난간에 기대서서 아무 말이 없었는데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다.
“영한아.”
“왜.”
“우리가 학점 잘 받고 취업하면 저렇게 일을 하는 거겠지?”
“그렇겠지.”
“근데 저걸 봐.”
내 손이 저 멀리의 야경을 향해 뻗쳐졌다.
“취업하면 뭐해. 저렇게 야근을 하는데.”
이것은 매우 억울한 일이다. 예를 들어서 우리 단체 카톡방에는 혜윤이가 있다. 단발머리를 금발에 가깝게 염색을 하고 치마를 자주 입었던 혜윤이는 지금껏 인턴만 두 개에, 학회에서 나간 공모전이 대상을 받아 신문에 나온 적도 있다. 학점도 4.0은 옛날에 넘을 만큼 부지런했기에 우린 분명 친한데도 일 년에 한 번 정도밖에 만날 수가 없었다.
그래도 우리 모두 혜윤이의 앞날이 밝을 것이라 생각했기에 응원했다. 그리고 혜윤이는 우리 중 가장 먼저 취업을 했고……. 얼마 전 새벽에 단체 카톡방에 말했다. 새벽 두 시가 넘어서 자기 지금 퇴근했다고. 우린 너무 숙연해져서 아무런 말을 할 수가 없었다. 특히 그 시간까지 피시방에 앉아있던 영한이와 내가.
그 정도 노력이면 빛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거 아닐까. 지금 내가 이렇게 열심히 공부하고, 학점을 잘 받고 노력하면 누가 봐도 빛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거 아니냐고.
내 손끝을 멍하게 따라가 앞을 보던 영한이가 눈을 껌뻑이며 말했다.
“재현아, 너 그거 아냐.”
“뭐?”
“니가 가리킨 저기 다 대기업 본사다.”
“그게 왜?”
“우리 학점 잘 받아야 저기서 겨우겨우 야근할 수 있어.”
“이런 젠장!”
밀려왔던 감상적인 기분이 썰물처럼 물러간다. 나와 영한이는 굳은 표정으로 옥상을 내려갔다. 본사에서 야근하고 저 야경의 일부가 되기 위하여. 나중에 야근하기 위해 무럭무럭 자라다니, 너무한 거 아닐까? 착하게 시키는 거 잘하면 다 된다며.
2차 중간고사는 어떻게 되었을까. 내 기준에서는 나름 선방했다고 할 수 있다. 30점 만점으로 30문제가 나와 21점이라는 성적을 거뒀다. 외계어 같은 회계 수식들을 두고 이만큼 했으면 충분히 잘한 거다. 훌륭했지. 영한이는 나보다 한 문제 더 맞춰서 22점이다. 그래 봤자 우리는 실력 절반, 그리고 찍어서 맞춘 운 절반이다.
하지만 안타까운 일은 시험 문제가 지금껏 공부하라며 내준 문제들 사이에서 뽑아냈기 때문에 모두가 잘 봤다는 것이다. 그냥 점수 잘 받으면 모두에게 A+ 주면 안 될까? 안 되는 거 안다.
내가 예전에 평균 98점 받고도 시험이 너무 쉽게 나와서 100점만 A+ 받았던 교양 강의에서 대한민국 대학교의 문제점을 깨달았다. 어떤 강의는 강의 시간에 과 사무실 공지 문자가 와서 휴대폰이 울렸다고 내게 C 학점을 준 적도 있다. 세상은 이렇게나 내 뜻대로 되질 않는다.
그렇다. 나는 그렇게 C+ 학점과 B+ 학점 사이의 기로에 놓여 있다. 그나마 교수님께서 우리 모두를 불쌍히 여겨 학점마다 +는 보장해주셔서 다행이다. 이것만이 이 수업에서 유일한 행운이다. 다른 건 죄다 망했어.
나와 영한이는 성적을 받아 들자마자 슬퍼서 학교 정문을 뛰쳐나가 번화가에서 소주를 마셨다. 그리고 그날 후로 딱 잊었다. 학점 한두 개 망친 걸로 슬퍼하기에는 이미 짓밟은 학점이 너무 많았다. 상처도 잘 안 받는다. 그리고 내게 남은 일정은 시간을 잡아먹는 괴물 같은 과제들과 사회성 테스트를 하는 팀플뿐이었다.
학교 축제는 우리와 상관없이 지나갔고 기말고사 기간만 빠르게 찾아왔다. 어느 날 지영이와 영한이 셋이 모여 점심을 먹던 중이었다. 지영이가 밥을 깨작거리다가 우리에게 물었다.
“너희 인턴 썼어?”
“인턴은 있는데 정규직 전환율이 너무 낮아. 누구 들어가라고 그따위로 조건을 제시해?”
“내 말이. 그리고 안 뽑아주더라.”
내 대답에 영한이는 우울한 동조를 하며 돼지불백을 박박 긁어 먹었다. 취직한 애들이 야근을 하네 마네가 문제가 아니다. 어디든 야근 좀 시켜주면 안 될까? 지영이가 입술을 삐죽거린다. 지영이는 1학년 때부터 학교 교지 만드는 동아리를 했었다. 무슨 놈의 동아리가 의무적으로 2년이나 참가를 해야 하더라. 그래도 지영이는 제가 일하고 싶은 출판업계를 위해 열심히 동아리를 다녔다.
“지영이 너는 어때?”
“이번에 가고 싶은 출판사 사람 구한다고 떴는데 한 명 뽑는다더라. 석박사가 죄다 달려들겠지. 알음알음 들어가는 사람만 들어가고, 돌아버리겠다.”
들어가기 어려울 것 같긴 했지만 그 정도일 줄은 몰랐네. 나와 영한이는 민망해져서 급하게 이야기를 돌렸다. 그래서 이번에는 타깃이 내가 되었다.
“재현이 너 어느 쪽 써?”
“뭘 어느 쪽.”
“물론 다 쓰지만 그래도 어디 위주로 쓰냐고.”
“나. 진짜 다 쓰는데. 학점 조건 맞으면.”
난 학점이 낮다고. 그러니까 두 사람 다 그렇게 안타까운 눈으로 보지 말아줄래? 그렇게 말하면서도 자꾸 우울해진다.
여기 모인 우리 셋의 취업이 늦은 편은 아니다. 지금 중앙 도서관에는 자격증 준비하는 선배들이 빽빽하고, 학원과 독서실마다 공무원 준비하는 사람은 더 넘쳐나니까. 하지만 세상은 자꾸 우리에게 최연소 합격자, 수석 같은 것만 보여준다. 그 뒤에 몇 명의 사람이 줄 서 있는지는 보여주지 않고 말이다.
도전했다가 실패한 사람. 다른 길을 간 사람. 그런 사람들은 다 어디 갔을까. 우리가 1학년 때 같이 동아리방에 모여 있었던 선배들, 동기들은 다 어디로 간 거지.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리는 모래처럼 어디 갔는지 모르겠다.
지영이는 밥을 먹고 헤어졌다. 서점에 들러 살 책이 있다면서. 나는 또 영한이와 둘이 남았다. 영한이는 이러다 우리가 사귀는 거 아니냐며 질색할 농담을 했다. 도서관에 자리가 남아있을까. 다시 천천히 학교로 돌아가는데 영한이가 휴대폰을 만지며 아무렇지 않은 척 내게 물었다.
“너 취업 빨리해야 되는 건 아니지?”
“괜찮아.”
나도 우리 집 형편을 보았을 때 빨리 취업하라고 닦달하실 줄 알았건만, 전혀 그렇지 않으신다. 오히려 당신들이 해주신 게 없다며 별말을 못 하셨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내가 전혀 가질 이유가 없는 죄책감이 생겨난다. 그렇게 힘을 내면 좋겠는데 그러기에는 피곤하고 지친다. 학교 들어와서 아르바이트, 과외, 아르바이트, 아르바이트, 이번 학기가 되어서야 처음으로 용돈을 받아봤는걸.
학기 처음의 계획은 아르바이트를 하나라도 해야겠다고 생각했지만, 자소서에 치이다 보니 이렇게 어영부영 흘러갔다. 가끔 생각한다. 의지라는 것도 소비되는 것이 아닐까. 쓴 만큼 깎여나가고 다시 재충전될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그리고 무엇보다 뭘 하고 싶은지도 잘 모르겠는걸. 도서관 입구에 도착하자 영한이를 먼저 들여보냈다. 들어가다가 나를 보길래 말했다.
“나 잠깐 매점.”
“나 콜라 하나만 사다 줘.”
“알았어.”
앞길이 막막하다 해도 공부하는 시간은 최대한 뒤로 늦추고 싶다. 몸을 돌려 바로 앞에 있는 매점에 들어갔다. 내가 먹을 껌을 집어 들고 시간을 보기 위해 휴대폰을 들었다. 수연이에게서 카톡이 와 있었다. 여자 친구와 헤어지고 나니 연락 올 사람이 얘밖에 없다. 잠깐, 이건 좀 슬픈데.
열어보니 무슨 영상의 링크를 보내줬다. 클릭해보니 내가 보고 싶어 하던 밴드의 이번 공연 영상이다. 어디 페스티벌에서 야외 공연을 했던 건데, 티브이 방영된 영상이 아니라 찾아보기 귀찮아서 말았다. 어디서 났는지는 모르겠지만 기특해서 웃음이 나왔다.
얘가 이렇게 내게 공을 들이는 이유를 알지만, 좋은 건 좋은 거다. 난 역시 공연이 좋다. 보는 그 순간만큼은 복잡한 걸 다 잊을 수 있잖아. 영화나 책이 아니라 공연이 특히 좋은 이유는 나도 잘 모르겠지만. 수연이의 문자가 하나씩 쌓여갔다.
[나 착하지?
너 이거 보고싶어 했잖아
그러니까 내가 이번 여름에 너희학교 앞을 가면
니가 나를 반드시 만나러 와줄거라 믿고 있어
같이 뮤지컬 보자고는 안할게ㅠㅠㅠㅠㅠㅠ 그냥 나와서 나랑 커피만 마셔주라ㅠㅠㅠ]
수연이를 이 정도 괴롭혔으면 됐지. 답장을 보냈다.
[알았으니까 그만 보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