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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요일은 수업이 늦게 끝난 탓에 수연이와 같이 먹을 수 있는 저녁 식사가 한정되었다. 고르고 고르다가 그나마 선택한 게 햄버거다. 햄버거 세트를 각자 쟁반 가득히 들고 창가의 자리에 앉았다. 밖은 사람들이 넘쳐난다. 뮤지컬뿐만 아니라 온갖 연극이 다 모여 있는 번화가다 보니 저녁마다 사람들이 몰려든다. 콜라를 한 모금 마시고 감자튀김부터 케첩에 찍어 먹는 사이 수연이는 햄버거의 포장을 벗겨 한입 야무지게 베어 물었다.
“재현아, 이따 저녁에 술 먹자.”
“나 간 버렸어. 다음 주에 먹자.”
“에이, 재미없게.”
다들 자기 간 아니라고 이렇게나 신경을 안 써준다. 내 몸은 내가 챙겨서 오래오래 무병장수해야지. 수연이가 또 무슨 말을 하려는 모양새라 먹던 거나 씹어 삼키고 말하라고 말렸다.
“천천히 말해. 나 어디 안 가.”
“삼켰어. 갑자기 뮤지컬은 왜 봐?”
“재밌대서.”
오기 전에 그래도 예습은 조금 해뒀다. 뮤지컬이라는 게 미리 알아두질 않으면 가끔 들리지 않는 노래나 대사도 있어서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공부하면서 대충 훑어본 이번 뮤지컬에 대한 반응은 대체적으로 호의적이었다. 안정적인 연기와 독보적인 마스크. 가수 출신으로서 호흡이 약간 다르기는 하지만 노래 가사가 씹히지도 않고 잘 들린다고. 배역도 꼭 자기 같은 걸 맡아서 그런가 잘하나 보다. 물론 팬들의 발언을 다 믿을 수는 없지만, 그렇다.
이렇게 대답하고 감자튀김을 집어 먹는 사이 수연이는 제 몫의 햄버거를 다 먹고 콜라까지 다 마셨다. 햄버거는 몇 입 먹다가 내려뒀다. 치킨버거인데 치킨이 한군데만 몰려 있어서 그랬다. 콜라를 손에 들고 수연이와 자리에서 일어났다. 공연장까지는 조금 걸어야 한다.
사람이 한적해지고 나서야 겨우 대화가 되었다.
“너 그때 어려워서 끝냈다는 사람.”
“응?”
“전화에서.”
“아.”
“어디서 만난 사람이야?”
“술 먹다가 만났어.”
“니가 그렇게 만나기도 하냐.”
도대체 처음 만남을 어디로 잡을까 잠깐 고심했지만, 수연이와 같이 마주쳤던 그 술집으로 결정했다. 그래. 그렇게 만난 게 정면으로 마주한 처음이었지. 이렇게 생각하니 새롭다. 정수연이 술 마시고 엎드려 있던 사이 옆 테이블에 앉아있던 아이돌 놈과 내가 연락을 계속했다니. 자꾸 누구냐고 물어보길래 차마 너도 아는 사람이라는 대답은 못 하고 말을 자꾸 돌렸다. 어, 저 포스터 봐. 저기 사람 많이 모여 있다.
이렇게 공연장 앞까지 가는 내내 질문을 피해버렸더니 수연이는 대차게 삐쳐서는 내게 소리치고 달려 들어가 버렸다.
“너는 나한테 대체 말하는 게 뭐냐. 짜증나!”
“야, 그게 무슨 소리야.”
내 말은 듣지도 않고 수연이는 공연장 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누가 보면 여자 친구 괴롭힌 나쁜 놈인 줄 알겠다. 거참, 어쩌라고.
공연장의 2층 좌석으로 가기 위해 4층까지 올라갔다. 입장하려고 티켓 부스에서 찾은 표를 내밀었더니 입구에서 표를 확인한 직원이 내 콜라를 가리켰다.
“컵에 든 음료는 반입안 되세요.”
“아, 네. 버리고 들어갈게요.”
맞다. 영화관이랑 다르지. 나는 원래 아는데 실수한 것처럼 음료를 쓰레기통에 던져 넣고 돌아왔다. 좋았어. 자연스러웠어.
무대는 저 멀리 발치 아래에 펼쳐져 있다. 2층에서 본 적은 없기에 약간 당황했다. 너무 내려다보는 위치네. 뮤지컬의 흥망성쇠를 내려다보는 위치다. 밀려드는 사람들을 피해 2층 1열의 가장 가장자리인 내 자리를 찾아갔다.
난간도 낮아서 잘못하면 내가 굴러떨어질 것만 같다. 누가 뒤에서 갑자기 밀면 밀려 떨어지는 건 아니겠지. 1층으로 떨어지면서 사람들 사이에 콱……. 아니야. 그런 생각 안 해야 돼.
가방을 바닥에 내려놓고 몸을 안정적으로 의자 등받이에 붙였다. 좋은 날 유혈 사고가 날 수는 없지. 다른 사람들은 넘어지지도 않고 저 좁은 자리 위쪽을 잘도 찾아 올라간다. 사람들의 발을 밟지도 않고 말이다. 무섭지 않나?
그래도 오랜만에 찾은 공연장의 고양감이 좋았다. 저 멀리 무대 아래 왼편에는 피아노를 라이브로 연주하는 사람이 경쾌한 멜로디를 쉬지 않고 만들어낸다. 아마 뮤지컬의 메인 멜로디가 아닐까 싶다. 빈 곳이 드문드문 보이는 1층의 좌석을 보며 재빠르게 줄거리를 복기했다.
뮤지컬 ‘두 남자’는 프랑스 절대왕정 시대를 따온 가상의 중세가 배경이다. 절대 왕정의 시대가 저물어가고 혁명이 임박한 시대상에서 명문 귀족가로 이름 높은 에일즈 가문이 있다. 에일즈 가문에는 어느 날 밤 경사스러운 일과 불행한 일이 동시에 찾아온다.
시대의 특성상 미신이 많은데 그 미신 중 하나가 쌍둥이는 악마의 장난이기에 불길한 징조라는 것이다. 종교를 굳게 믿는 왕에게 쌍둥이를 낳은 가문은 탐탁잖을 것이 분명했다. 에일즈 가문의 가주는 부인이 낳은 쌍둥이를 보고 문을 걸어 잠근 채 출산을 돕던 시녀에게 아들 중 하나를 안긴다. 이 길로 에일즈 가를 빠져나가 연락을 기다리라고.
사람들의 눈을 피해 도망친 시녀는 시민들 사이에 숨어들어 에일즈 가의 아들을 키우게 되고 남은 아이는 에일즈 가문의 장자로서 가문을 잇게 된다.
성장한 아이들에게 완전히 숨길 수는 없었기에 서로의 존재를 알게 된 이 두 아들은 달이 밝은 밤이면 가끔 거리의 술집에서 신분을 숨긴 채 만난다. 에일즈 가를 이은 남자는 막스 에일즈라는 이름으로 귀족을 대표하며, 시민들 사이에 숨겨진 동생은 다이언이라는 이름의 청년으로 시민들의 의견을 대변하며 자라난다. 각자의 삶을 살아가던 이들은 국가의 혁명으로 인해 서로를 적대하며 전혀 다른 운명을 맞게 된다는 이야기이다.
여기서 정지운은 금발의 머리를 하나로 묶은 가발을 쓰고 막스 에일즈 역을 맡고 있다. 다이언 역을 맡은 배우는 뮤지컬 쪽에서 이름이 있는 배우였는데 잘 기억은 안 난다. 어쨌든 그런 이야기이다. 뒤쪽은 스포가 될까 싶어 확실하게 보지 않고 왔기 때문에 이제부터 집중해야 한다. 과연 정지운은 내 8만 원만큼의 공연을 해줄 수 있을 것인가.
장내 방송이 시작되며 사람들이 자리에 착석했다. 경쾌한 피아노 멜로디는 끊이지 않았고 서서히 불이 꺼진다. 빛이 사라지고 공연장은 피아노 멜로디만이 천천히 느려지다가 사라졌다. 한 치 앞도 분간되질 않았다. 눈앞의 난간도, 무대도.
갑자기 시작된 드럼의 소리가 순식간에 고조되더니 무대 위 조명이 아래의 침대를 비추며 뮤지컬이 시작되었다.
「얼마나 기쁜 일인가. 에일즈 가의 새 도련님이 나실 날.」
메이드 복장의 여자들이 침대 주위를 분주하게 돌아다니며 노래를 시작했다. 앙상블은 낭랑한 목소리로 각자의 연기를 방해하지 않고 무대를 돌아다닌다. 누구는 덮개를 가려 내린 침대 뒤쪽으로 들어가 그림자로 움직임을 보여주고, 다른 여자는 방 안처럼 꾸며진 무대의 가구들을 만지작거리고.
그들 사이로 화려한 금색 장식이 된 의자에는 한 나이 지긋한 남자 배우가 고민하는 듯 앉아있었다. 멜로디가 고조되면서 여배우의 비명이 높아지더니 어느 순간 무대 위 모든 사람이 제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곧이어 기쁜 표정으로 손을 휘저으며 덮개 뒤편에 있던 메이드가 달려 나온다.
「아들입니다. 이런 기쁜 일이. 아드님이 나셨어요.」
「정말인가?」
여자가 안고 나온 아기를 조심스럽게 품에 안으며 남자가 함박웃음을 지었다. 그 순간 뒤편의 침대에서 다시 한 번 비명 소리와 함께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모두가 당황해 두리번거리는 사이 침대 뒤에서 한 명의 여자가 또다시 달려 나와 제 품에 안긴 것을 보였다.
「백작님, 아이가. 아이가 한 명 더 있어요. 어쩌죠. 쌍둥이예요.」
배우들의 탄식이 터지며 남자만이 걸음을 뚜벅뚜벅 걸어 뒤늦게 나온 아기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고요한 침묵이 흘렀다. 움직임 하나 없는 그들 사이에서 남자 배우의 단독 노래가 시작된다.
「아. 어찌할 것인가. 쌍둥이라니. 이 무슨 말인가. 하늘도 무심하시지.」
천천히 다가온 여자 배우들은 남자의 품에 안겨 있던 아기와 뒤늦게 나온 아기를 안아다 준비되어있던 아기 침대에 눕혔다. 좁은 침대 안을 들여다보며 남자 배우는 아직 노래하는 중이다.
「이 아이가 무슨 잘못이 있다고……. 하지만 이럴 수는 없어.」
그는 돌연히 메이드 중 한 명을 가리켰다.
「너. 이 아이를 데리고 나가거라. 어서.」
「백작님,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아이를 데리고 마차를 타거라. 저택 밖의 도시로 숨어.」
과장스럽게 숨 삼키는 소리가 나면서 지목받은 여자 이외에는 다시 움직임이 멈췄다. 남자 배우의 꼿꼿한 손가락질도 그대로였다. 여자는 주변을 황망하게 바라보다가 조심스럽게 아이 중 한 명을 제 품에 안았다. 뒷걸음쳐 나가는 여자의 양옆을 다른 사람들이 숨기듯 감싸고는 데리고 나갔다. 문밖으로 이어지는 발걸음이 점차 멀어지면서 남자의 노래가 다시 이어진다.
「어쩔 수 없었어. 이제 어떻게 하지. 내 아들. 문밖의 아이도 내 아들이고 이 안의 아이도 내 아들이네. 갈려진 삶, 달라진 길. 하지만 어쩔 수 없지. 에일즈 가는 영원한 것. 남아있는 네가 갈 길을 터놓는 것이 나의 숙명.」
침대에서 일어난 백작 부인이 아이를 찾았지만, 남자는 그런 부인을 안고 한 명의 아이만을 보여주었다. 여자의 오열이 높아지면서 무대가 움직인다. 오른쪽 벽 안쪽으로 침대는 빨려 들어갔고 메이드들이 자연스럽게 방 안의 가구들을 밀어 치웠다.
말끔해진 무대 가운데로 뒤쪽에서 거대한 벽 하나가 움직여 앞으로 나와 왼쪽과 오른쪽을 정확하게 양분한다. 그 사이에도 앙상블들의 목소리는 노래로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었다.
「막스 에일즈의 에일즈 가 시대가 문을 열어 귀족들의 칭송을 받네. 도시의 광장에서는 다이언이 시민들의 의견을 모으네. 이들의 마주침, 그리고 격동의 시대가 다가온다.」
왼편은 화려한 의자들이 놓이고 치렁치렁한 드레스를 입은 여자와 금박 단추를 단 재킷을 걸친 남자들이 샴페인 잔을 부딪쳤다. 오른편에서는 사과와 배가 가득 찬 시장의 가판대가 들어서고 신문팔이 소년이 시민들 사이를 스치며 달려갔다.
전혀 다른 배경 사이로 두 명의 남자가 걸어 나왔다. 오른편의 다이안은 갈색 머리를 짧게 자른 모습으로 사람들 사이를 헤치고 나왔다. 그리고 왼쪽에서는 긴 금발 머리를 뒤편으로 쓸어 넘긴 정지운이 예의 바른 미소를 지으며 갈라지는 귀족들 사이로 당당하게 앞으로 나와 섰다.
옆에 살며시 감겨오는 여자에게서 잔을 넘겨받은 정지운은 누구보다 강렬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그것을 넘겨 마셨다.
「나라와 귀족의 영광을 위하여.」
그리고 그 벽 너머에서 다이언은 다른 문구를 외쳤다.
「시민들의 의지를 보여줍시다.」
다이언의 스포트라이트도 강렬했지만, 태생이 귀족인 양 차려입은 정지운의 냉막한 눈빛은 좌중을 압도하고 있었다. 주변이 온통 누군가에게 보내는지 모를 찬사를 삼키며 발을 동동 굴렀다. 멀리서도 확연히 들어오는 남자의 완벽한 얼굴선을 내려다보고 있으려니 괜스레 뿌듯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랬다. 모든 빛을 삼킨 듯, 그랬다.
왼쪽 귀족들의 측면을 비추고 있던 스포트라이트가 천천히 꺼지고 전반적인 조명이 내려간다. 그러자 우아한 웃음을 짓고 있던 귀족 여자들의 몸놀림과 귀족 청년들의 발걸음이 천천히 잦아들었다. 정지운이 맡은 막스 역시 준비된 벨벳 의자에 길게 늘어져 앉아서는 빈 잔을 지나가는 하인에게 넘겨준 채 움직임을 멈춘다.
정지된 사람들의 움직임과 다르게 오른편의 시장은 활기를 찾았다. 물건을 사고 돈을 지불하는 아낙네 사이로 아까 지나갔던 신문팔이 소년이 다시 달려 나와 사람들에게 신문을 뿌렸다. 그 신문을 가장 먼저 손에 넣어 펼쳐 본 것은 다른 남자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다이언이었다.
신문을 펼쳐 본 다이언의 입에서 웃음기가 찬찬히 사라지더니 신문을 크게 휘두르며 뒤편의 사람들에게 소리쳤다. 뒤편에서 이미 신문을 읽고 있던 다른 배우들 역시 웅성거림이 높아져 있었다.
「여러분. 이걸 보셨습니까. 세금을 또 올리다니요?」
「안 돼요. 지난해에 걷는 세금을 올렸잖아요.」
사과를 고르던 여자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제 바구니에 담았던 사과 중 두 개를 꺼내 다시 가판대에 돌려놓았다. 가판 주인과 여자의 실랑이를 뒤로하고 다이언이 천천히 무대를 휘저으며 시민들에게 재차 외쳤다.
「이번에는 걷는 세금이 아니라 사고팔 때 붙이는 세금을 올리겠다고 합니다. 이게 말이나 될 소리입니까.」
「작년에 걷은 세금은 어디로 가고?」
「그 전해에 걷은 세금은?」
「다 영토 전쟁과 귀족들 무역 뒷배로 흘러들어 갔겠지.」
「뭐가 강성해지는 아르만 제국이야!」
사람들의 불만이 더욱더 커져갔다. 조명이 저 멀리 광장의 외곽을 순찰하는 병사들을 잠깐 비추자 사람들은 재빠르게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려 모여 있지 않은 척 연기를 시작했다. 의심쩍은 표정으로 보고 있던 병사들은 사람들이 각자 제 할 일을 하는 것을 보고는 어슬렁어슬렁 무대의 뒤로 넘어갔다. 그러한 병사들의 뒷모습을 당당하게 노려보던 다이언이 앞을 향해 양팔을 펼치며 외쳤다.
「나날이 발전하는 아르만 제국. 맞습니다. 우리는 안중에도 없고 국가와 귀족만이 배를 불리는!」
그리고 웅장한 현악기의 박자와 함께 다이언의 노래가 시작되었다.
「나아가는 제국, 넓어지는 영토, 넘쳐나는 황금 그 사이 우리는 어디에 있는가. 찬란한 위 아니면 바닥. 정복당한 민족들과 쥐어 짜일 뿐이지.
영광은 오직 제국과 귀족에게 계속될 것인가.」
어지럽게 움직이던 뒤편의 배우들이 다이언을 감싸고 원을 그려 선다. 그리고는 뒤에서 화음을 넣어 노래를 뒷받침했다. 그 와중에 똑똑히 들려오는 목소리에 집중했다. 뮤지컬 배우들의 발음은 들을 때마다 항상 신기하다. 크게 뻗어 나가는 소리인데 발음이 놀라울 정도로 뚜렷하다.
모여든 민중들은 어느새 무대 구석에 숨겨져 있던 깃발들을 높이 들어 휘두른다. 파란색, 흰색, 노란색, 붉은색. 힘차게 나부끼는 깃발들 사이에서 다이언은 노래의 클라이맥스를 지나 마무리 지었다.
「우리가 이루고 있는 나라. 우리의 몫을 찾아 나아가리라. 나아가리라!」
뮤지컬의 첫 번째 넘버가 끝나고 관객들의 박수가 터져 나오는 순간 아까 시장을 지나쳤던 병사들이 달려오며 소리쳤다. 거기 뭘 하고 있는 거냐고. 허겁지겁 사라지는 사람들 사이에서 뒤돌아 걸어 나가려는 다이언의 어깨를 잡고 한 남자가 물었다.
「그런데 다이언, 어떻게 하려고?」
「괜찮아. 맡겨둬.」
믿음직하게 남자의 어깨를 마주 두드리던 다이언이 무대 오른편으로 사라지고 시장의 불이 꺼졌다. 그리고 왼쪽의 조명이 들어오면서 인형처럼 멈춰 있던 귀족들이 살아 움직이며 노래를 시작했다. 가슴이 깊게 파인 드레스를 입은 검은 머리의 여자가 제 목에 걸린 황금색의 긴 목걸이를 빛에 들어 자랑하며 웃음기 어린 노래를 시작한다.
「황금의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의 양팔에는 언제나 반짝이는 것이 가득해. 아, 아름다운 시대여, 영원하길. 우리의 번영이여, 영원하라.」
「영원하라!」
「승리와 영광이여, 영원하라. 아름다운 황금이 우리의 앞날에 깔려 있기를! 호호호호.」
간드러지는 웃음과 함께 짧은 노래를 마친 여자는 귀족 남성의 품에 안겨 스포트라이트의 옆면으로 비껴났다. 그 자리에 비스듬히 앉아있던 막스가 걸음을 옮겨 중앙으로 향했다. 금발의 막스는 관객석을 바라보던 냉막한 눈길을 귀족들에게 돌리며 노래를 시작했다. 목소리와 어우러지는 피아노 멜로디가 뒷받침되었다.
「분내와 알코올 내음이 감도는 이곳이 황금의 귀결지인가. 제국의 가장 높은 자리 황금이 머물 자리인가.
그대들은 어떤 의무를 완수하고 이곳에 모였을까. 나 또한 무엇을 이루었는가.」
막스의 노래는 의외로 차분했다. 잔잔하게 공간을 울리고 귀족들의 사이를 퍼져나가며 파문을 일으킨다. 작게 불편함을 표현하는 귀족들의 부채짓과 헛기침하는 듯한 제스처가 나타난다. 그것에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막스는 자신만의 생각에 빠진 듯 걸음을 천천히 옮겼다.
그의 궤적을 따라 빈 공간이 만들어지고 사람들이 비켜나간다. 그러한 것에도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꿈결 같은 표정이 들어 올린 고개에 드러났다. 그 얼굴 위로 강렬하게 내리쬐는 조명이 흘러내려 발밑에 머무른다. 요란스러운 치장에도 묻히지 않을 만큼 막스에게서는 그만의 기품과 빛이 흘렀다. 무대 위에서 그는 그런 존재였다. 길게 뻗어져 가는 노래는 관객석을 휩쓸고 내게도 닿는다.
「우리가 해야 했던 일. 그것은 무엇인가. 진정한 귀족은 어디로 갔는가. 오직 그러한 자만이 나의 길을 함께하기를. 그 길만이 우리의 번영이 깔려 있으리라.」
우아한 태도로 한 바퀴 돌아 귀족들을 둘러본 막스는 천천히 무대 뒤편으로 퇴장했다. 막스의 넘버가 끝난 모양이었다. 객석에서 참아왔던 함성이 터지고 박수 소리가 끊임없이 계속되었다. 퇴장하는 막스의 뒤를 아름다운 푸른색 드레스를 입은 여자가 따르고, 꼬리를 길게 물어 다른 귀족 청년들이 따라 들어갔다. 남은 몇몇 귀족은 탐탁잖은 표정을 부채 뒤로 가리거나 무대의 왼쪽으로 퇴장했다.
드디어 모든 무대의 불이 꺼졌다. 여기까지만 보는 데에도 소화하기가 벅차다. 가볍게 보러 온 뮤지컬인데 낚아채 끌려가듯 스토리에 빠져들어 갔다.
다음 불이 들어왔을 때 무대는 말끔한 술집이 되었다. 무대의 오른편에는 술을 판매하는 카운터가 자리 잡았고 예쁘장한 여직원이 술을 날라 테이블마다 하나씩 가져다 둔다. 널찍한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는 테이블 중 가운데 테이블은 아직 비어있다. 관악기의 선율과 함께 술을 나르던 여직원의 입에서 시작된 노래는 술집에 앉아있는 손님들과의 합창으로 마무리 지어졌다.
노래가 끝나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양 다시 일상으로 돌아간 배우들 사이로 다이언이 먼저 나왔다. 검은 모자를 푹 눌러썼지만, 누가 봐도 다이언임을 알아볼 만한 모양새였다. 그는 주변의 어느 사람에게도 신경 쓰지 않은 채 중앙 테이블로 다가가 비어있던 두 개의 의자 중 하나를 채웠다. 주문을 받으러 온 여직원에게는 손가락 두 개를 들어 보이는 것만으로 주문을 대신했다.
작은 술잔 두 개가 다이언의 앞에 놓이고 왼편에서 막스가 술집에 들어섰다. 막스는 다이언보다 더한 것이 편한 셔츠와 조끼 차림의 사람들 사이에 저 혼자 검은 긴 코트와 말끔한 구두까지 갖춰 신고는 당당하게 들어온 차다. 사람들의 시선을 가득 받으며 막스는 다이언의 맞은편 의자에 앉아 제 옷깃을 한 번 매만졌다. 그 모양새를 어처구니없다는 듯 보며 다이언이 말했다.
「사람들 눈에 띄지 않게 오라고 전했는데, 못 들었어?」
「그래서 검은 옷을 차려입고 왔다만.」
무엇이 문제냐는 듯한 막스의 태도에 다이언은 고개를 설렁설렁 저었다. 그리고 두 사람은 앞에 놓인 술을 한 잔씩 마셨다. 다이언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주변의 소리는 더 작아졌기에 들리는 데 무리는 없다.
「이번 세금에 대한 반발이 심해.」
「그렇겠지.」
「청년회에서 직접 항의를 하고 법 개정을 위해 국회에 난입할 계획까지 짜고 있어.」
「귀족들의 국무회의에?」
가만히 듣고 있던 막스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여 다이언을 바라보았다. 옆에서 보기만 해도 압박감이 느껴지는 눈빛이나 다이언은 묵묵히 그 시선을 감내하며 대답했다.
「더 이상은 온건하게 항의만 하지 않을 생각이야. 들어봐.」
빠른 템포와 함께 다이언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조명을 받으며 막스를 향해 입을 열었다. 설득하려는 듯 부드러운 손짓으로 무대를 빙글 돈다.
「어두운 하늘, 저 빛나는 하늘의 별. 이곳이 신의 품 안이라 생각하던 때가 있었지. 하지만 이제 우리는 모든 것을 알아.
지구는 둥글고 사람은 모두 같다는 것을 말이야.
넘쳐나는 지식과 흘러들어오는 문화가 시민들을 일깨우네.
우리는 이제 눈을 떴지. 보이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어.
이제는 더 이상 멈출 수 없어. 나아가리라. 나아가리라. 모두가 같은 시대로.」
다이언의 노래는 희망에 둘러싸였다. 여기서 봐도 알겠다. 이상과 희망에 반짝거리는 청년의 빛을. 그 노래를 끊으며 막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노래했다.
「지식. 문화. 같은 시대. 거기에 더해질 것이 있지.
법률, 예법, 축적된 경험. 그것을 뛰어넘었다 생각하는 건가.
시대는 변하지, 하지만 지휘하는 자가 누구인가.
선봉에 선 자. 시대를 이끌 자. 누가 그럴 자격이 있는지. 오직 귀족만의 길 아니겠는가.」
막스의 화답에 다이언은 고개를 저으며 마주 섰다.
「아니야. 이제는 바뀔 거야.」
「그대로인 것도 있는 법.」
「이제는 때가 되었어.」
「멈춰. 더 이상은 안 돼.」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가 대립을 이루면서 음악이 고조된다. 노려보는 두 사람의 연기를 보며 나도 숨을 멈췄다. 나뿐만 아니라 내 주변의 관객들도 모두 숨을 들이마시는 게 느껴졌다. 풍선처럼 팽팽해진 긴장감이 툭 터진 것은 두 사람이 서로 등을 보이고 휙 돌아서는 순간이었다. 무대의 양쪽 뒤편으로 넘어가던 두 사람 중 다이언이 외쳤다.
「이번 국무회의야!」
「못 들은 것으로 하지.」
받아치는 막스의 목소리도 만만치 않다. 두 사람이 나가버린 술집은 일상의 활기를 되찾나 싶더니 순식간에 불이 꺼졌다. 갑자기 현실로 끌어올리는 낭랑한 여성의 목소리가 쉬는 시간을 알렸다.
인터미션이구나. 한순간에 잠에서 깨어난 기분에 맨손으로 얼굴을 문지르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화장실은 관객석 2층으로 들어오는 입구 바로 옆에 있었다. 밖으로 나가자 갑자기 환해진 시야가 적응되질 않았다.
사람들은 일행과 방금 본 공연을 이야기하며 흥분감을 감추지 않았다. 나는 길게 늘어선 여자 화장실의 줄과 벽 사이를 거쳐 남자 화장실로 들어갔다. 남자 화장실 안은 사람이 거의 없다. 흰 세면대를 내려다보다가 찬물을 틀어 손을 씻었다. 비누칠도 하지 않고 계속 물로만 문질렀다. 기분이 이상해. 이게 말로만 듣던 덕통 사고야? 이런 감정은 너무 생소했다.
차가워진 손으로 얼굴을 주물럭거리다가 거울을 봤다. 정신 차리자, 윤재현. 저건 정지운이야. 막스가 아니라 막스의 탈을 쓴 정지운이라고. 속아 넘어가면 안 돼. 저 무대만 내려가면 없어지는 인간이란 말이다.
연기는 연기. 그 개개인과 완벽하게 분리해서 봐야 된다. 지금껏 너무나 당연해서 생각해본 적조차 없는 사실인데, 나는 지금 그것을 주문처럼 외우는 중이다. 넘어가지 말자. 정신 차려.
20분의 인터미션이 순식간에 지나가고 사람들 사이에 섞여 다시 2층 관객석의 1열에 앉았다. 하느님인 양 저들의 삶을 굽어살피고 있자니 1층에서 보는 것도 좋았을 듯하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내가 1층의 자리를 예매할 수 있었을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다.
막공이나 무슨 특별한 날도 아닌데 이렇게 꽉꽉 들어찰 줄이야. 광대한 규모의 공연장은 아니지만 2층의 맨 위까지 사람들로 빼곡한 것을 아까 봤다. 인기 많네. 이 수많은 관객석의 관객들이 오직 정지운만을 보러 오진 않았다는 것은 알지만, 그래도 큰 공헌을 하고 있음을 부정할 수는 없을 듯하다.
오길 잘했네. 수연이 이따 커피라도 사줄까. 잠깐 연락할까 해서 휴대폰을 꺼내려는 차에 다시금 안내방송이 흘러나왔다.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던 손을 떼고 무대를 내려다봤다. 끝나고 연락해도 충분할 거다.
무대가 다시 시작되었고 이번에는 회의실에서 귀족들과 논쟁을 벌이며 탐욕에 찬 사람들 때문에 고뇌하는 막스의 연기가 진행됐다. 장소를 옮겨 에일즈 가에 돌아와서도 고민하는 막스에게 다가온 약혼녀는 썩은 귀족들의 행태를 자조적으로 웃으며 그를 위로한다. 막스는 제 팔을 부드럽게 쓰다듬는 약혼녀의 손길을 보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혁명을 위해 은밀한 장소에서 사람들과 모임을 갖는 다이언의 연기도 지나갔다. 조달한 무기를 나누며 침입로와 퇴각로를 설명하는 그들은 사뭇 비장하지만 흥분에 가득 차 있었다. 그 과한 흥분이 일을 그르칠 것만 같은 불길함을 불러일으킨다. 나같이 모르는 사람도 불안감이 느껴지니 오죽할까. 힘차게 노래하며 물러나는 다이언과 청년들의 형체가 어둠 속으로 사라지고 나는 다음 무대를 기다렸다.
조명이 켜지기 전 어두운 무대 위에서 다양한 소음들이 섞였다. 처음 은은하게 시작된 소리는 빗소리였다. 거기에 다그닥거리는 말발굽 소리와 흔들리는 마차의 바퀴 소리가 녹아 들어갔다. 한두 명이 아닌 많은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소음 같았다. 이윽고 마차 소음이 딱딱한 바닥에 부딪히는 발걸음 소리들로 바뀌었다.
그리고 그 순간 무대에 불이 들어왔다. 무대의 중앙에는 높은 단을 세워놓고 검은색 긴 옷을 늘어뜨려 입은 남자가 의장봉을 손에 쥐고 있었다. 그 양옆에는 짙은 나무색의 책상들이 놓여 있고 귀족들이 자리하고 있다. 막스는 흰 셔츠의 단추를 목 끝까지 채워 올리고 짙은 푸른색의 외투를 입어 어깨 위로 단정히 묶은 금발을 흘러내리도록 해둔 채 의장의 오른쪽에 앉아있었다. 책상에 앉아있던 귀족들이 책상 위에 올려두고 있던 손을 일정한 박자로 두드리기 시작했다. 쿵 쿵 쿵 쿵. 손바닥으로 내려치는 소리가 일정한 리듬을 만들고 뒤를 이어 음악이 시작되었다.
「얼마나 좋은 삶인가. 귀족으로 살아가는 것.
아침이면 치장을 하고, 저녁에는 모임을 가지.
지금은 오후 다섯 시. 끝날 시간 다가온다네.
회의의 모든 안건은 통과될 뿐이지.
세금 인상. 특권 확립. 무역 자유. 끝을 내고 어서 나가자.」
노래가 끝나고 회의장 안은 이미 파장 분위기였다. 책상 위의 서류를 설렁설렁 넘겨보거나 옆에 앉은 사람과 잡담을 하기 바쁘다. 막스는 눈살을 찌푸린 채 그 난장판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외투 안주머니에서 금줄에 매달린 회중시계를 꺼내보며 시간을 가늠한다. 혼자 고개를 저으며 자리에서 일어난 막스에게 옆에 앉아있던 붉은 머리의 남자가 말을 건넸다.
「막스 자네는 오늘 밤에 어디 갈 곳이 있나?」
「회의의 안건이 많아 시간이 걸릴 줄 알고 시간을 비워놨지.」
정말 의미 없는 시간 비워놓기였네. 내 혼잣말이 전염된 것처럼 옆의 귀족이 크게 웃었다.
「뭐 시간이 걸리겠는가. 안건 통과. 통과. 통과. 이따 오페라를 보고 모일까 하는데, 같이 가겠는가?」
「되었네. 이젠 다 끝인 듯하니.」
그렇게 말하며 입술을 깨물던 막스는 곧 여상한 표정이 되어 회의실을 눈에 담듯 둘러보았다. 단 위에 서 있는 의장은 통제되지 않는 사람들을 내려다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의장봉이 의미 없는 소음을 만들어냈지만 주목하는 사람은 몇 되질 않는다. 그래도 목소리를 돋우어 말했다.
「그럼, 이다음 무역 관세율 상승에 대한 안건을 올리겠습니다.」
「통과.」
「나도 통과.」
「통과.」
귀족들은 길게 들을 것도 없다는 양 한 손을 들어 의사를 표시한다. 막스에게 그 차례가 돌아오기도 전에 밖에서 뛰는 듯한 발소리와 함께 사람들이 달려왔다. 다급한 발걸음에 우스꽝스럽게 흐트러진 옷차림조차 신경 쓰지 못하며 그는 귀족들에게 외쳤다.
「밖에 사람들이 몰려오고 있습니다.」
「뭐? 무슨 일이냐.」
「사람들이 세금을 올리기 위한 국무회의를 해산하라며 횃불을 들었습니다.」
회의장 안의 소음이 순식간에 높아졌다. 유쾌함이 담겨 있던 아까의 소음과는 다르게 회의장 안의 귀족 중 몇몇은 자리에서마저 벌떡 일어나 당황스러움을 표시했다. 막스가 그 말을 전하러 달려 들어온 남자를 물끄러미 보며 물었다.
「얼마나 되더냐.」
「시장에서부터 이곳까지 오는 대로를 가득 메웠습니다.」
허. 탄식이 회의장을 메우고 귀족들이 우왕좌왕한다. 그중 구석에 있던 자들은 회의장 밖으로 나가버리기도 했다. 의장의 왼편에 앉아있던 큰 키의 남자가 책상을 내리치며 사람들을 주목시켰다.
「안 될 일 아닙니까. 이것은 반역입니다. 군을 불러들여 치워버립시다.」
「그, 그래. 이것은 반역이지.」
「군대. 수도 밖을 지키는 군대를 불러들여!」
「그동안 사병을 가진 자가 버티면 될 거 아닌가?」
사람들의 시선이 하나씩 막스에게로 쏠렸다. 막스는 혼란함 속에서도 태연하게 회중시계를 꺼내 보고 있었다. 쏘아질 듯한 시선을 받으며 그는 찌푸렸던 하얀 얼굴을 펴고 미소 지었다.
「여러분과 달리 영토와 항로 개척에 힘을 덜 쓴 에일즈 가는 사병이 충분합니다만. 사병을 왜 저기에 쓰겠습니까.」
「그게 무슨 말인가!」
「횃불이 태워야 할 것은 태워야 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자네가 이렇게 나와서는 안 되지!」
「안 될 게 무엇인가. 자네들이 귀족이란 말인가? 배우지 못한 자들이 든 횃불보다도 희미한 자들이 무슨 귀족이란 말인가.」
이번에는 현악기로 멜로디가 시작되었다. 막스는 귀족들을 손가락질하며 무대 한가운데로 나왔다.
「믿었지. 이 길을. 내가 가야 할 운명. 고귀한 빛에 대해.
새벽에 뜬 별처럼 언제까지나 앞서 나아가리라 믿었지.
하지만 이제는 해가 뜰 때. 태양이 다가온다.
어둠을 걷어낸다. 우리의 의미는 지나간 역사로 사라지겠지. 아침을 위해.
이제는 모두가 빛을 발하리.」
「그게 무슨 말인가, 막스.」
「우리가 물러날 때가 되었음을 말하는 거네.」
「귀족으로서 긍지도 없는가!」
「물러날 때를 알아보는 현명함이야말로 긍지 아니겠는가.」
귀족들이 한데 뭉쳐 막스와 척을 지고 으르렁거리기 시작한다. 아까 반역을 외쳤던 키 큰 남자가 구석에 서 있는 경비원에게 달려가 칼을 뽑아 들었다. 칼을 들고 천천히 접근하는 그를 보고 사람들이 질겁해 슬금슬금 물러났다. 더러는 말리는 이도 있었다. 하지만 막스는 제 눈앞까지 와서는 칼을 겨누는 남자를 보며 동요하지 않았다.
「막스 자네는 누구의 편인가! 저 밖의 무지한 놈들과 같은 편에 서겠다는 건가?」
「나야말로 귀족의 편이라네. 올바르고 깨어있는 귀족 말이네.」
그리고는 몸짓마저 우아하게 뒤돌아 무대를 걸어 나가려 했다. 그를 멍청하게 보고 있던 남자는 결국 칼을 들고 막스의 등을 내리쳤다.
무대 위가 비명으로 넘쳤다. 나조차도 나오는 소리를 삼키려 헛숨을 쉬었다. 칼에 찔린 막스가 쓰러지고, 무대의 오른편에서 사람들이 들이닥쳐 횃불을 휘둘렀다. 그 사이로 다이언이 앞장서 달려 들어오고 그를 따라 들어온 사람 중 몇몇이 도망치는 귀족을 쫓아 사라졌다.
회의실 안에 흩어져 날리는 서류들을 증거로써 모으며 난장판을 수습하던 다이언은 바닥에 쓰러진 막스를 보고 달려갔다. 그리고 막스가 사병을 움직이지 않고 버티다가 이렇게 되었음을 전해 듣자 결국 참았던 눈물을 터트리며 그 앞에 무릎을 꿇었다.
청년들은 승리의 노래를 부르고 소란스러운 와중에 오직 막스와 다이언의 주변만이 조용한 침묵에 휩싸였다.
그렇게 무대의 불이 꺼졌다. 이게 끝임을 알 수 있었던 것은 다른 사람들이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박수를 쳤기 때문이다. 나는 얼떨떨한 정신을 붙잡고 자리에서 일어나 박수를 쳤다. 손바닥이 얼얼해지는 것도 느끼지 못한 채 다시 불이 켜져 배우들이 인사를 나올 때까지 말이다.
배우들이 일렬로 서 인사를 하고도 환호는 멈추지 않았다. 중간에 오빠 하며 목 놓아 부르는 소리도 있었다. 나도 무슨 소리든 외치고 싶었지만 그냥 박수만 쳤다. 외칠 만한 말도 없고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도 잘 모르겠다.
끝없는 박수에 손바닥이 벌겋게 익어 아플 때쯤 배우들이 무대 뒤로 들어가는데도 아무도 자리에 안 앉는다. 눈치를 보며 두리번거리자 옆에 서서 박수 치던 여자가 내게 말했다.
“커튼콜 할 거예요.”
“커튼콜이요?”
“저거요.”
사람이 다 들어간 줄 알았던 무대로 배우가 뛰쳐나온다. 자기가 혼자 불렀던 솔로 곡들을 다시 부르며 연기해준다. 손바닥이 떨어져라 박수를 치고, 앙상블을 맡은 배우의 노래가 지나가고 다이언이 걸어 나왔다. 비명과 환성 속에서 다시 노래한다. 이제는 환해진 공연장이었지만 여전히 반짝거리는 생기로 관객석을 향해 노래했다.
「어두운 하늘, 저 빛나는 별. 이곳이 신의 품 안이라 생각하던 때가 있었지, 하지만 이제 모든 것을 알아.」
다이언의 노래까지 끝나고 물러나자 나는 박수 치던 손을 멈추고 주먹을 꾹 쥐었다. 화끈한 손바닥에 손톱이 파고드는 것도 아팠다. 하지만 이제 누가 나올지를 안다. 남아있는 마지막 주연 배우.
막스가 외투마저 벗어버리고는 무대로 걸어 나왔다. 고조되는 비명과 박수가 최고점까지 높아지는 순간 흰 손이 관객석을 향해 뻗어져 높이 올라갔다. 2층을 우러러보듯 응시하며 노래가 시작되었다.
「믿었지. 이 길을. 내가 가야 할 운명. 고귀한 빛에 대해.
새벽에 뜬 별처럼 언제까지나 앞서 나아가리라 믿었지.」
아. 정말 반짝거린다. 단순히 역할이 그래서가 아니라, 옷에 달린 금색 단추가 반짝거려서가 아니라 정말 빛이 난다. 문득 어색해졌다. 나랑 같이 밥 먹고 투닥거렸던 그 사람이 맞나. 눈 코 입이 똑같이 생기기는 했으니 맞겠지.
노래가 점차 고조되면서 괜스레 설렌다. 아까 듣고 외운 가사를 입 모양으로만 따랐다. 내 목소리를 섞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이제는 해가 뜰 때, 태양이 다가온다.
어둠을 걷어낸다. 우리의 의미는 지나간 역사로 사라지겠지. 아침을 위해.
이제는 모두가 빛을 발하리.」
모두가 빛을 발하리. 왠지 모르게 울컥해서 손을 들어 있는 힘껏 박수 쳤다. 씨익 웃으며 인사한 정지운이 관객석을 두루두루 둘러보고 2층까지 손을 흔드는 동안 묵묵하게 그 자리에 있었다.
내가 관객석을 떠난 건 모든 사람이 나가고 난 다음이었다. 멍하니 사람들이 떠난 자리에 혼자 앉아있다가 휴대폰의 진동을 느끼고 꺼냈다. 수연이다. 그제야 자리에서 일어나 입구 쪽으로 나갔다.
―너 안 나왔어?
“지금 나가.”
―1층으로 와.
“응.”
나가기 전 마지막으로 무대를 흘깃 돌아보고 밖으로 나갔다. 이제 공연은 끝났다.
사람들이 빠진 계단을 내려가 멍하게 걷고 있자니 공연장 앞에서 수연이가 손짓했다. 그 앞으로 가면서도 흐느적거렸다. 수연이가 눈앞에다 대고 손을 흔든다.
“왜 이렇게 정신이 없어?”
“몰라. 기운이 쏙 빠지네.”
“재밌지?”
“응. 재밌다. 잘 봤어.”
“다음에 또 보자.”
“기회 되면.”
이렇게 대화하며 공연장 앞에서 헤어졌다. 수연이는 우리 집과 반대편 방향의 버스정류장에서 버스를 타겠다고 했다. 집에 가는 게 아니라 원준이 만나러 가나 보다. 알았지만 내색하지 않고 손을 흔들었다. 그리고 몸을 돌려 우리 집 쪽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러게. 재밌고 잘 봤는데 좀 부담스럽다. 잘 보고 나왔는데 왜 이렇게 힘들지.
정지운은 빛나서 좋겠다. 나도 빛나고 싶은데. 저렇게까지 휘황찬란한 빛까지는 필요 없지만, 그래도 빛나고 싶다. 사람은 누구나 그런 욕망이 있잖아. 어릴 때는 아무것도 안 해도 나를 알아줬으면 하는 중이병, 그리고 나이를 먹으면 자존심. 남들에게 뒤처지고 싶지 않고. 지금 내가 그래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고 있지.
가볍게 한숨을 쉬며 걸음을 빨리했다. 집에 가서 일단 자자. 그리고 이제 부지런히 살아가는 거야. 무엇이든 하고 이뤄낼 수 있는 건 이뤄내자. 약간의 의욕이 생긴 것도 같다.
공연이 늦게 끝나서인가 길거리에는 사람이 얼마 없다. 도대체 언제 심어진 지 모를 거대한 가로수 사이 벽돌 길을 걷는데 갑자기 뒤에서 누군가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윤재현 씨?”
모르는 목소리지만 내 이름이 맞아서 돌아봤다. 나와 비슷한 나이로 보이는 남자가 쫓아온 듯 숨을 고르며 빤히 보고 있다. 누구지? 얼굴이 기억날 거 같기도 하고 알쏭달쏭했다.
“누구세요?”
“윤재현 씨 맞죠? 그때 지운이 형이랑 대기실에 있었던.”
와. 기억났다. 그…… 새로 데리고 다니던 매니저. 어색했던 통성명과 첫인사까지 눈앞에 재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것 같다. 소스라치게 놀라 온몸의 털이 쭈뼛 서는 줄 알았다. 나는 다급하게 대답했다.
“아닌데요!”
“맞잖아요, 윤재현 씨. 아오, 찾았다. 지운이 형이 윤재현 씨 찾아요.”
“왜, 왜요?”
아 씨, 잘못 대답했다. 너무 당황한 나머지 물어봐 버렸네. 그때까지만 해도 약간 의심쩍어하던 남자의 표정이 확신으로 굳어졌다. 주춤주춤 물러나려는데 내 팔목을 덥석 잡는 게 아닌가.
힘으로 당기자 나는 질질 끌려가면서 저항했다. 이제 보니 건물 뒤편에 정지운이 타고 다니던 카니발도 비상깜빡이를 켠 채 서 있다. 안 돼. 나 못 가. 나 창피해! 격렬하게 저항했지만 남자는 이제 아예 내 양팔을 꽉 잡고는 질질 끌어당겼다.
“지운이 형이 데려오라고 패악질 부린단 말이에요!”
“아냐. 난 안 볼 거야. 나 나름대로 마음 정리 잘하고 지금 집 가려고 했거든요?”
“그러게 전화는 왜 안 받고 집에도 왜 없어가지고. 한 번만 만나줘요.”
“안 돼! 진짜 쪽팔려!”
“내가 당신 찾는다고 매일 관객 누가 오는지 체크했단 말이에요.”
내 처절한 외침에도 남자는 소싯적 도망가던 아이돌 뒷덜미 좀 많이 잡아봤는지 손쓰는 데에 무자비하다. 이 난리를 치며 질질 끌려가는 꼴을 보고도 행인들은 갈 길만 갔다. 우리가 큰소리로 대화를 해서 그런가 누구 하나 도와주질 않는다. 평일 늦은 밤 길거리는 사람이 애초에 얼마 없기도 했고.
다급하게 주변을 둘러보다가 코앞까지 끌려간 검은색 카니발의 문이 불쑥 열렸다. 선팅되어있어서 몰랐는데 뒷좌석에 진짜 정지운이 앉아있고야 말았다. 가발은 벗고 옷도 바뀌었지만, 아직 막스의 분장을 다 지우지도 않은 채였다.
나를 빤히 노려보며 손짓하는 정지운 때문에 그 자리에서 뻣뻣하게 굳어버렸다. 남자는 이제 내 뒤쪽으로 몸을 옮겨 등짝을 미친 듯이 밀어댄다. 차 문간을 잡고 버티던 손은 정지운에게 잡혀 질질 끌려 들어갔다. 몸이 어떻게 차 위에 올려지고 무릎이 접히더니 나는 구겨지다시피 차 안에 넣어졌다. 그리고 뒤에서 문이 쾅 닫히는 소리가 났다. 차마 고개를 들지 못하고 엎드려 바닥을 짚은 채로 차 시트만 보고 있는데 머리 위에서 정지운이 큰 목소리로 말했다.
“창식이 너 카페라도 가 있어.”
“네, 형. 연락하세요.”
나쁜 창식이 같으니라고! 나도 한마디 외치고 싶었지만 쪽팔려서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 차 안은 밖에서 간간이 들리는 소음 외에는 조용했다. 나는 눈앞에 있는 정지운의 무릎을 슬쩍 봤다가 도로 고갤 숙였다. 그랬더니 정지운의 손이 무지막지한 힘으로 내 양 뺨과 턱을 움켜쥐었다. 그렇게 순식간에 들어 올려지며 비명을 질렀다.
“으아아악! 때릴 거야?”
“뭐?”
순식간에 우리의 눈높이가 맞춰졌다. 나는 발버둥 치느라 숨이 가빴는데 정지운도 입으로 뱉어내는 숨이 빠르다. 막스가 나와 눈을 마주친다. 아니, 막스 아니야. 그거 아니야, 이거 정지운이다. 정신 차리자.
바로 눈앞에 마주한 잘생긴 얼굴에서 아까의 이미지를 애써 지웠다. 그거 말고 이놈은 나에게 만나자고 막무가내로 밀어붙였던…… 아니, 그것도 말고. 내가 술 처먹고 지랄했던 놈이잖아.
나를 꼼꼼하게 뜯어 내려 보는 옅은 갈색 눈동자에 내 모양새가 비쳤다. 옴짝달싹도 못 하는 게 참 볼만하다. 좌석은 좁고 자세는 거지 같으며 얼굴은 잡혀 있다. 이 이상 초라한 꼬라지일 수가 없다. 결국 압박감을 견디다 못해 먼저 꼬리를 내렸다.
“때릴 거면 그냥 한 대 때릴래?”
“야. 이걸 진짜. 어휴.”
“아니…, 내가 술 먹고 실수한 거 맞으니까……. 그렇게 계속 노려볼 거면…….”
우물거리는 모양새를 보다가 정지운은 내 얼굴을 놓고 자기 혼자 웃었다. 헛웃음이 나온다는 듯 웃다가 나중에는 한숨까지 쉬길래 나는 슬그머니 몸을 바로 해 앉았다. 일단 그래도 동등한 사람으로서 대접받고 싶어. 멀뚱하게 앉아있는 나를 보던 정지운이 손바닥을 들어 내 눈꺼풀을 꾹 눌러 내린다. 눈이 감겼다.
“그래. 때릴 테니까 가만히 있어.”
“응.”
“한 대만 때릴게. 나 때문에 세상이 좆같다며? 그런 욕은 난생처음이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조용히 해.”
“…응.”
눈을 감고 가만히 있으려니 민망해서 살짝 실눈을 떴는데 손바닥이 눈을 다시 콱 눌렀다. 저놈의 손바닥에 속눈썹이 짓눌리는 걸 느끼며 다시 한 번 꽉 감았다. 아, 이 긴장감. 패라고 하기는 했는데 진짜 때릴 줄이야. 보통 한 대 쳐라 그러면 넘어가 주지 누가 진짜 때리겠다고 이렇게 각을 잡냐. 나 어디 잘못되면 폭행죄로 넣어버릴 거다.
헉, 뒷목이 잡혔다. 손바닥이 목을 감싸 고정한다. 설마 얼굴에 주먹질하는 건가. 가까이 다가오는 인기척을 느끼며 잔뜩 긴장하는데 몸이 밀쳐져 뒤통수에 차가운 유리가 닿았다. 그리고 몸 위를 누르는 몸무게가 느껴지더니.
입술에 숨이 닿았다.
놀라서 눈을 떴을 때 정지운은 눈도 감지 않은 채 나를 내려다보면서 내 입안에 혀를 넣었다. 소스라치게 놀라 고개를 흔들어 피하며 소리쳤다.
“때린다며!”
“어.”
태도가 너무 시큰둥해서 나는 내가 얘랑 방금까지 입술 맞대고 있던 게 착각인 줄 알 지경이었다. 그런데 착각이라고 하기에는 저 매끈한 입술이 반질거리는 게 내 침 때문인 것만 같았다. 일어나려는 내 허리를 제 무릎 사이에 가둬 누르면서 혀를 살짝 내밀었다가 말했다.
“뭘로 어딜 때리는지는 내 마음이잖아.”
“아니. 저기요. 이거 아닌데?”
내 말은 못 들은 척 다시 천천히 내게 얼굴을 가까이한다. 고개를 흔들다가 기어이 코끝이 닿자 결국 눈을 질끈 감았다. 입술이 닿고 또 혀가 들어왔다. 발버둥 치다가 입술의 어딘가가 저놈의 이빨에 부딪히면서 아프다. 움츠러든 내 뒷목을 열 오른 손이 살살 쓰다듬자 소름이 주욱 끼쳤다. 벌려진 입안에서 혀가 엉키고 부드럽게 쓸렸다. 그때부터는 그냥 모르겠어서 호흡을 맞췄다. 같이 키스하는 꼴이 되고야 말았다.
키스에 빠져들었다 정신이 들 때쯤 되면 귀신같이 알아채고는 혀를 깊게 넣어 안쪽을 간질여온다. 그러면 정말 인정하기 싫지만 신음성이 흘렀다. 그렇게 몸서리칠 때마다 쪽쪽거리고 입술이 붙었다 떨어지며 다시 각도를 바꿔 키스해왔다. 이미 머리는 시트에 닿아 눌렸고 그의 손은 내 등 어딘가를 받치고 있었다. 숨이 부족해서 입을 벌리고 숨을 좀 쉬려고 했다. 그걸 또 안 봐주고 다시금 달려든다.
모르겠다. 너 마음대로 해라. 살며시 눈을 떴다가 내게 집중해 키스하는 정지운의 얼굴을 보고 그냥 힘을 풀었다. 늘어진 내 몸을 낚아채듯 혀를 자꾸 빨아온다. 깨물리고, 말캉한 살덩이가 은근하게 입술을 훑고 나서야 겨우 떨어졌다.
나는 숨을 고르는 사이 잠깐 할 말을 생각했다. 어떻게 알고 찾았느냐, 전화 많이 했었냐, 등등. 많은 말이 있었지만 바깥에서 새어 들어온 가로등이 비춘 눈앞의 잘생긴 얼굴을 보자니 이게 먼저 생각났다.
“정지운 씨. 나한테 왜 그래?”
“너야말로 모르는 척하지 마.”
아이 씨…, 할 말 없네. 대꾸하려다가 정지운이 진짜 짜증난 거 같아서 입을 다물었다. 그래도 하고 싶은 말은 못 참았지만.
“그럼 다르게 물어볼게. 어쩌다가 이렇게까지 된 거야?”
두 번째 질문에 정지운의 눈매가 더 매서워졌다. 말끄러미 보고 있으니 손을 들어 내 코를 아프게 꼬집다가 놓는다.
“그러게. 왜 이렇게 됐지? 왜 이럴까.”
“그걸 나한테 물어보면…….”
어쩌라고 미친놈아…… 라는 뒷말은 그냥 마음속에 잘 묻었다. 내 심란한 마음도 모르고 정지운은 여전히 내 허리 위에 올라타서는 세상 심란함을 저 혼자 다 끌어안은 표정으로 고민 중이다.
“원래는 한번 해보고 싶다 정도였는데.”
“뭘?”
기겁한 내 눈빛에 정지운은 재빨리 대답했다.
“연애.”
“맥락상 그거 아닌 거 같은데? 비켜.”
“너는 왜 그렇게 사람을 못 믿냐. 내가 뭐. 무슨 말을 했는데.”
“그…… 주어 생략이면 다 그런 뜻 아니야?”
“아니라니까 그런다.”
“아니긴.”
“어쨌든. 그러게 내가 건드리려고 할 때 그냥 넘어와 주지 그랬냐. 자꾸 튕기니까 더 이러잖아.”
그러고는 내 위에서 순순히 몸을 일으켜 차 시트에 앉는다. 나는 미심쩍은 눈길을 거두지 않으며 시트에 누워 있던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문 쪽으로 멀찍이 떨어져 앉았다. 언제라도 문을 열고 튀어나갈 수 있도록. 그런 내 꼴이 퍽 웃겼는지 피식 웃는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이런 위기를 맞은 나는 울컥했다. 그래서 차마 지금껏 못 했던 말을 뱉어내고야 말았다.
“나 정지운 씨 팬도 아니거든?”
“알아.”
“어? 안다고?”
지금껏 자기 팬이네 들먹거렸던 게 누군데. 너무 순순히 인정해버리자 할 말이 없다. 내가 무슨 말이든 하려다가 말문이 막히자 먼저 말을 가로채서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표정으로 설명했다.
“예전에 민석이가 자랑했어. 니가 자기 팬이라고.”
“어. 응. 그래. 그랬지.”
“그래서 장난 좀 쳐볼 생각이었는데.”
“그랬는데?”
“어쨌든. 민석이 팬 계속해.”
“응.”
“내 팬은 하지 마. 다른 거 해.”
“…….”
그 다른 거가 뭐냐고는 차마 물어볼 수 없어서 침만 꿀꺽 삼키다가 입술을 깨물었다. 또다시 어색하기 그지없는 침묵이 흘렀다. 나는 비겁하게 여기서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살려주세요. 누가 이 자리에서 나 좀 빼내 줘.
초조해 보이는 내 꼬라지를 보고는 정지운은 별말 없이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전화했다. 창식이를 부르는 것 같았다. 그제야 긴장을 놓았다.
창식이는 재빠르게 운전석에 올라탔다. 나는 반대로 냉큼 내리려는데 정지운이 우리 학교 앞부터 들렀다 가라고 해서 그냥 앉았다. 마음 같아서는 사양하고 걸어가고 싶었지만, 그런 말 꺼내는 자체가 민망했다. 집 앞에 도착하면 얼른 내려버려야지.
다행히 공연장과 학교 앞은 정말 잠깐 사이에 도착하는 거리라 차는 금세 사람 드문 인도 옆에 멈췄다. 슬며시 문손잡이를 잡고 내리려는데 어깨가 덥석 잡혔다.
“윤재현 너 전화 왜 안 받았어.”
“창피해서.”
“니가 창피한 줄은 아는구나. 너 술버릇 원래 그 모양이야?”
“아니. 정지운 씨한테만 그런 건데.”
내 대답이 마음에 안 들었는지 아주 조그맣게 뭔가를 중얼거렸다. 웃고 있지만 입 모양을 보니 욕인 것 같다.
“그럼 집에는 왜 없었어.”
“언제?”
“주말.”
“주말은 원래 집에 갔어.”
“아. 그래. 잘했다.”
예전에 어떤 교양 수업에서 들었는데, 긍정을 두 번 반복하면 부정적 의미를 가지게 되는 언어가 한국어밖에 없다는 걸 들었던 것 같다. 정지운이 내뱉은 그래, 잘했다. 라는 문장도 그렇다. 긍정이 두 번 반복되었건만, 그 어조와 의미는 내게 짜증을 불러일으키기 충분하다. 내가 우리 집 가는 게. 왜. 뭐. 왜.
“우리 집 왔었어?”
“어느 누가 울고 욕하고 전화를 안 받아서 말이야.”
“쪽팔려서 안 보려고 했어.”
“안에 숨어있나 했는데 발로 문 걷어차도 안 나오길래.”
“찼어?”
아, 저놈의 성질머리.
“어. 옆집에서 나와 보더라.”
“뭐? 그래서 뭐라고 했어? 정지운 씨 못 알아봐?”
“마스크 쓰고 있었지. 니가 돈 빌리고 도망가서 쫓아온 거라고 하니까 별말 없이 들어갔어. 걱정 마.”
지금껏 몇 번 마주친 적이 없는 옆집 여학생의 얼굴이 떠오르며 나는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어졌다. 역시 이사 갈 때가 된 거다. 집을 옮겨버리든가 해야지. 더 이상은 쪽팔려서 하늘 아래 얼굴을 들고 살 수가 없네. 내가 뭐라고 해도 안 들을 놈이라 무슨 말을 하는 것도 그만뒀다.
수신거부 풀어. 딱딱한 목소리에 나는 반항하지 않고 바로 풀었다. 또 집에 쫓아올까 무서웠다. 그걸 꼼꼼하게 확인하고 나서야 어깨를 놔준다. 정지운은 뿌듯한 표정으로 차 문까지 직접 열어줬다.
“자, 재현아. 전화 잘 받고 이번 달 내에 잘 생각해서 알려줘.”
“뭘.”
“다시 기억나게 해줘?”
“……아니야.”
모르는 척도 안 통한다. 나는 진짜 울상이 되었다. 이렇게까지 궁지에 몰려 고백을 받는 사람이 나 말고 또 어디 있을까. 멀어지는 차의 뒤꽁무니를 맥없이 보다가 터덜터덜 자취방 건물의 유리문을 열고 들어왔다. 건물 사람들 누가 나 왔다는 걸 알까 봐 걸음도 살금살금 걸었다. 현관문도 조심스럽게 열고 들어갔다. 조금 우울하다. 내 평판이라든가, 인권이라든가 그런 건 다 어디로 간 걸까.
그리고 정지운이랑 다시 봐서 어쩔 생각인 걸까. 앓는 소리를 내며 현관에 서 있다가 머리를 쥐어뜯었다. 이제는 정말 대답을 해야만 한다. 세상에. 내가 정지운에게 무려 그렇고 그런 감정에 대한 답을 해야만 한다는 거다.
∞ ∞ ∞
나를 밤새 괴롭히던 고민은 다음 날이 되어도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하루 종일 생각이 자꾸 어제로 뒷걸음질 쳐 돌아가려 한다. 친구들 사이에 끼어 학교를 돌아다닐 때에도, 강의를 들으려 강의실에 앉아있는 동안에도 그랬다. 교수님의 목소리가 웅웅 울리는 마이크 소리를 들으면 어제의 공연장으로 생각이 뻗어 나간다. 공연을 연상하는 것까지는 괜찮다. 무대, 춤, 대사, 막스.
여기서 멈추지 못한 생각이 그 뒤까지 거침없이 달려 나간다. 뮤지컬, 공연, 막스, 차 안에서, 키스. 아아악.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안절부절못해진다. 또 떠올려버린 머리를 저주하며 머리카락을 쥐어뜯는데 옆에서 필기 중이던 유정이가 내 이상한 행동에 펜을 멈추고 바라봤다.
“오빠 왜 그래요?”
“수업, 수업이 어려워서.”
“필기 이따 보여드릴까요.”
“괜찮아. 그냥…… 공부할게.”
강의는 이렇게 또 나를 두고 다른 학생들과 함께 진도를 나간다. 정신 차려야 하는데. 그래. 정신을 차려야지. 다짐만 수없이 반복하다 끝날 때까지 하나도 집중 못 했다. 강의가 끝나고 다들 짐을 챙겨 나가는데 나는 멍청하게 앉아있다가 겨우 샤프 하나만 정리했다.
“오빠, 저녁밥 같이 먹어요?”
“아니. 나 집에 갈 일 있어. 먼저 갈게.”
“네에. 내일 봐요.”
아쉬운 목소리로 인사한 유정이의 구두 소리마저 강의실 밖을 향하고 나는 천천히 가방을 메고 일어났다. 밥을 먹어야지. 그래. 아침도 거르고 점심은 애들이 먹던 과자 뺏어 먹고. 허한 위장이 이제는 식사를 해야 한다고 외쳤지만, 발걸음은 학교 근처 번화가의 아이스크림 가게로 나를 이끌었다.
멍한 표정이 되어서 기계적으로 유리 너머의 아이스크림을 골랐다. 초코 맛, 체리 맛, 치즈케잌 들어있는 맛, 민트초코 맛도. 항상 월말 사이즈업이나 할인을 할 때만 와서 한 아름씩 사 가는 아이스크림 가게인데, 오늘은 그냥 사 먹을 생각이다.
가장 큰 사이즈를 포장해 집으로 들고 와서는 가방을 바닥에 휙 던졌다. 그리고는 침대 아래 털썩 주저앉아 무릎을 세우고 아이스크림 통을 끌어안았다.
뚜껑을 열고 보니 아이스크림을 얼마나 많이 넣어준 건지 뚜껑 넘어 넘쳐흐를 것만 같았다. 그것을 봉투 안에 챙겨준 아이스크림 스푼으로 퍼먹기 시작했다. 혀가 시릴 듯이 달다. 단 아이스크림을 계속 입안에 밀어 넣었다.
생각할 게 많거나 고민이 생겼을 때 단 걸 찾는 건 수연이에게서 배운 버릇이었다. 매번 끌려 다니며 아이스크림이나 케이크 등등을 먹었더니, 이제는 습관처럼 익숙하게 내가 찾고 있다. 초코 맛을 다 해치우고 나서야 습관적으로 주섬주섬 휴대폰을 찾아 꺼냈다.
와 있는 연락들을 줄줄이 눌러 확인하고 답장하다 보니 단 하나만 남았다. 정지운. 낮에 일어났는지 그때부터 카톡이 드문드문 와 있다. 중간에 보는 거 다 아니까 답장하는 게 신상에 좋을 거라는 반협박도 있다. 입술을 씹다가 다시 한 번 아이스크림을 퍼먹고 대답했다.
[오늘 수업 제일 많은 날이야 진짜 이제 봤어]
역시 몇 번을 생각해봐도 이렇게 반응하는 내가 문제야. 휴대폰을 내려놓고 아이스크림을 또 한 번 떠먹으니 답장이 온다.
[저녁은]
[아이스크림 먹는중]
[점심]
[과자]
[아이스크림 덮어라]
이게 누구 때문에 먹는 아이스크림인데. 괜스레 혼자 억울해졌다.
[그런데 나]
[?]
[만약 거절하면 어떻게 돼? 그냥 궁금해서 물어본 거니까 성질내지 말고 사실 명시만 해주면 고마울 거 같아]
이제는 나도 뻔뻔해질 만큼 뻔뻔해졌다. 이 정도 말은 그냥 물어볼 수 있다, 이거지. 하지만 어느 누구만큼 뻔뻔하지는 못한 탓에 숟가락을 입에 물고 휴대폰 액정을 만지작거렸다. 답변까지 시간이 좀 걸릴 거라 생각했건만, 그건 내 착각이었고 곧바로 답이 왔다.
[어떻게 되긴 밥 먹고 드라이브 갔다가 키스 더 하고 그다음 달에 대답해]
아, 노답이야. 말이 안 통해. 어떻게든 도망칠 구석이 없다. 사귀든지, 아예 끝장을 내든지. 그 어디에도 좀 더 좋은 관계를 유지하며 우정으로 방향을 전환한다든가 하는 차선책이 없다. 입에 물고 있던 숟가락을 들고 다시금 아이스크림을 푹 떠서 입에 넣었다. 딱딱하던 아까와 달리 말랑해진 아이스크림이 부드럽게 녹는다.
[그래 알았어.....]
[일요일에 뭐해]
[친구 볼 거야]
[누구]
[나 공연장 같이 다니는 그 여자애]
[만나서 뭐해]
[정지운씨 너한테 할 대답 고민하러 가는 거니까 그만 괴롭혀주라]
[뭘 그렇게까지 고민하는 건지 모르겠다]
[고민은 내 자유다]
이렇게 말은 해뒀지만 아직 수연이에게 물어보지도 않았다. 일요일에 시간 되냐고 지금 물어봐야겠다. 카톡 창에 수연이를 불렀다.
[수연아]
[왜]
[일요일에 시간 됨?]
[뭐하게 술먹게?]
얘 혹시 알코올중독은 아니겠지. 가끔 걱정된다. 수연이네 부모님께 일러버릴까.
[아니 나 고민상담]
[헐 뭐야 여자 문제임?]
[아닌데 그냥]
[아니긴 뭐가 아냐 대박이다 언제부터 볼까 낮 저녁? 개재밌겠네]
[아니라니까]
[ㅋㅋㅋㅋㅋㅋ 알았어 그냥 재밌겠다 일요일에 보자]
삶에 도움 되는 사람이 이렇게나 없다. 어쨌든 일요일 약속은 잡혔다. 그런데 도대체 수연이에게 이걸 어떻게 상담해야 하지? 다시 막막해져서 아이스크림을 퍼먹었다. 속이 다디단 아이스크림으로 꽉 차서 느끼했지만, 뭐 하나 내게 스트레스를 풀어주는 요소가 없다. 슬프다.
수연이는 전에 본 적 없는 부지런을 떨며 약속을 잡았다. 일요일 낮 열두 시. 점심식사로써 잡을 수 있는 가장 빠른 시간 말이다. 우리 학교 근처로 와줄 것이며, 마침 주말에는 집에 다녀올 테니 가져올 반찬을 나눠 주겠다는 말도 덧붙였다. 이렇게 친절할 수가 없다. 점점 무거워지는 부담감 때문에 나는 급하게 말을 바꾸기도 했다.
[별거아니야 내 일 아니고 내 친구 고민이야]
[아 알았으니까 12시에 보자고 지하철역 근처로 나와있어라]
[응 근데 진짜 내 친구 일인데]
[알았다고 좀 반찬 무거우니까 지하철역 근처로 나와있어]
[응 어머니께 고맙다구 전해드려]
정말 알아들은 게 맞겠지. 그 후에 더 이상 무슨 말을 붙일 수가 없었다. 내가 그러니까 내 친구 이야기…, 까지만 꺼내도 수연이는 알겠다고 대답했다. 나중에는 내가 다른 말을 하려고 말 걸어도 알겠다고 하더라. 알아들었다고 하니 더 이상 할 수 있는 말은 없었다. 그리고 그 와중에 정지운은 진짜 기가 막힌 걸로 속을 썩이는 상황이었다.
사건의 발단은 무심결에 하던 대화 중에 있다. 나는 나름대로 정지운의 직업적 활동인 뮤지컬 공연에 큰 감명을 받은 상태였다. 원래 잘생긴 줄은 알았지만 가끔 정지운의 카카오톡 프로필 사진을 넋 놓고 들여다보기도 했다. 금발을 늘어뜨린 막스 분장을 하고서 눈을 감고 있는 걸 정면에서 찍은 사진이 프로필 사진이라 더 그랬다.
원래도 흰 피부는 더욱 반질반질했고 짙은 눈썹, 그 아래 감은 눈, 높게 선 콧대와 모양 좋은 입술까지. 공연 날 보았던 막스의 환영이 덧씌워져 기분이 말랑해질 때쯤 되면 귀신같이 알아채고 내게 말을 걸어오곤 했다. 그 내용은 내 환상을 깨주기 아주 충분하다만, 그랬다.
그래도 어제는 뮤지컬 표에 대한 이야기를 했기 때문에 나름대로 잘 경청하고 있었다. 내가 초대권 같은 것을 원한 것은 결코 아니다. 그냥 제 돈 내고 볼 수 있는 자리 하나만 어떻게 안 될까. 어떻게든 그 말을 꺼내고 싶어 말을 빙빙 돌리고 있었는데 정지운이 먼저 말을 꺼냈다.
[혹시 뮤지컬 표 필요해?]
[왜?]
왜 물어보는지 알면서도 괜히 한 번 이렇게 반문했다. 아, 드디어 물어봐 주는구나. 스스로 너무 방긋 웃는 것이 느껴졌지만, 보는 사람도 없는데 뭐 어떤가.
[보러 올 일 있으면 줄게]
[응 날짜 알려줘]
[확인해보고 이번주는 민석이랑 준영이 온다고 해서 줘버린 거 같아]
[민석이형 와?]
아, 좋겠다. 나도 내 직업이 블래스트이고 내 친구가 블래스트 멤버면 좋겠다. 이렇게 실없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그다음에 온 카톡은 진짜 기가 막힌 내용을 담고 있었다.
[민석이형? 너 민석이 본 적 있어?]
[그냥 그렇게 부르는데 애들이 오빠오빠 하는것처럼]
[나는 정지운씨라며]
[그냥 그렇게 부르는 거라니까?]
[나도 지운이형이라고 해봐]
나는 여기서 아무 생각 없이 장난을 한 발자국 더 나갔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잘 모르겠네요 정지운씨]
[야]
[그럼 이만 줄이겠습니다 안녕히계세요]
저렇게 말했더니 내 카톡을 읽기만 하고 답장을 안 했다. 그날 저녁까지도 연락이 오지 않아 약간 당황했다. 내가 뭐 욕을 한 것도 아니고 그냥 장난 좀 친 거 가지고 인간이 진짜. 그런데 초대권은 주겠지? 안 주는 거 아니겠지……?
∞ ∞ ∞
“재계약 조건 뭐 따로 달 거 없어?”
이미 몇 번을 이 회의실에 모여 따지고 회의한 내용이었다. 앞으로도 몇 번을 더 만나고 조율하겠지만, 계약의 내용은 아마 적당한 선에서 조율이 될 것이다. 이것을 블래스트의 멤버 모두가 알고 있었다. 어차피 그룹으로써의 발전 방향을 정하기보다는 개인 활동과 예의상의 그룹 활동이 앞으로의 목표였다.
그렇다 보니 개인마다 계약 조건이 달라 그 조율에 한참의 시간이 걸렸다. 특히 다른 소속사에서도 빼 가려 물밑 접촉이 많은 정지운 같은 경우에는 회사에서 들어줘야 할 것도 많았다.
오늘 회사 측에 전달할 계약상의 변경 사항을 다시 한 번 정리하던 리더 태원은 예의상 질문하며 멤버들을 둘러보았다. 회의 테이블을 둘러앉은 것은 블래스트 멤버뿐이었고, 매니저들이나 실장은 벽 근처의 의자에 앉아 따로 계약에 대해 이야기 중이었다. 이제는 끝날 시간이 되었다.
이때 태원의 왼편에 앉아 눈앞의 계약서를 건성으로 훑어보던 정지운이 불쑥 왼손을 들어 올렸다. 멤버들의 시선이 쏠렸고 조용해진 분위기에 실장과 매니저의 눈길도 쏠렸다. 그것을 태연하게 받으며 정지운이 입을 열었다.
“개인적인 불만 사항 있어.”
“또 뭔데, 이놈아. 거기서 우리가 뭘 더 물러주냐?”
탄식과 같은 말을 내뱉으며 실장은 머리를 벅벅 긁었다. 양심도 없는 놈 같으니라고. 거기서 퍼센티지를 더 올려주랴, 아니면 계약금을 더 얹어주랴. 이번엔 또 어디 소속사에서 연락을 받았냐. 나오는 말은 거의 한탄이나 다름없었다. 심각하기만 한 실장과 달리 정지운은 꽤나 차분하게 요구 사항을 말했다.
“그런 거 말고. 블래스트에서 이민석 빼면 안 돼?”
“뭐?”
“어?”
“야! 나는 왜!”
모두의 입에서 탄식 같은 신음성이 나왔지만, 가장 큰 목소리는 이민석에게서 터져 나왔다. 정지운의 반대편, 태원의 오른편에 앉아있던 이민석은 벌떡 일어나다시피 하며 소리쳤다. 그런 이민석을 물끄러미 보며 입술을 오므리는 정지운을 보고 실장은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이 망할 놈이 뭐가 불만인지는 모르겠지만, 진짜 이민석을 빼겠다고 드러눕는 것까지는 아닌 모양이었다. 이민석은 정말 영문을 몰라 주변을 둘러보며 물었다.
“나 모르는 사이에 내가 정지운이랑 싸웠냐? 저거 왜 저래?”
“우리가 어떻게 아냐. 지운아, 뭐 있어?”
“민석이 형 뭐 잘못했어요?”
“나 뭐 한 거 없어.”
이민석은 진짜 억울했다. 철없던 때야 하는 거 없이 의욕 떨어져 보이는 정지운에게 시비도 몇 번 털어봤다지만, 이제는 서로 그러려니 하며 살고 있었다. 오히려 서로 갈 길 가라고 내버려 두니 요즘은 제법 사이가 좋았던 거 같기도 하고 그랬건만. 지난주에 비록 매니저가 줬다지만 자기 나오는 뮤지컬 보러 오라고 표도 줬던 놈이 왜 저럴까.
스스로도 생떼를 쓰고 있음을 알았기에 가볍게 한숨을 쉰 정지운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손을 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도 문을 나서기 직전 결국 이민석에게 말을 하고야 말았다.
“민석이 너 일본 진출 안 하냐?”
“뭐.”
“중국이나. 북미 투어 같은 거 안 가?”
“가지도 않고 순위 꼬박꼬박 드는 너나 중국 진출해.”
“안 그래도 그럴 거다. 근데 너 한국 계속 있을 거냐고.”
“너 진짜 왜 이래.”
“아, 짜증나.”
놀랍게도 성질은 제가 다 부려놓고 정지운은 짜증난다며 휙 나가버렸다. 이민석은 어이없다는 듯 피식 웃고는 당황한 얼굴로 엉거주춤 서 있는 막내 매니저를 돌아봤다. 분명 웃기는 웃는데 평소 살살 접히던 눈웃음은 걷어치운 채 입술 모양만 삐뚜름하게 움직였다.
“창식아. 저거 나한테 왜 저러는지 이해 가게 설명해봐.”
“아. 그게. 형.”
“이해 안 되면 지금 가서 멱살 잡을 거니까 빨리.”
“아니요, 형. 그건 진짜 아니신 거 같구요.”
“야, 민석아. 니가 참아라. 저거 성격 저 모양인 거 알잖냐.”
“아니, 이유 없이 시비를 털잖아.”
처음 블래스트가 결성되던 해 치고받고 싸웠던 것처럼 덤벼들 기세의 이민석을 보고 실장까지 나서서 말렸다. 다른 멤버들도 말을 꺼내지는 않았지만, 이민석을 말리는 손길이 강하지는 않았다. 이번에는 확실히 정지운이 이유 없는 시비를 걸고 나간 것이 맞았다. 근래 전혀 그러지 않던 태도로 말이다.
겨우 이민석을 제자리에 앉히자 다른 매니저 하나가 정지운을 쫓아 따라 나갔다. 그리고 실장은 안절부절못하고 서 있는 막내 매니저를 다그쳤다.
“창식아. 지운이 뭐 있지. 뭐냐?”
“그게……, 저, 말하면 지운이 형이 죽여버릴 거 같은데…….”
“빨리 적당히 말해, 인마. 민석이 쫓아 나가야 정신 차릴래?”
이번에는 모두의 시선이 모였다. 안타깝게도 막내 매니저는 정지운처럼 시선을 받는 데에 익숙하지 않았기에 버티기에도 입을 떼기에도 심각한 부담감이 왔다. 무엇보다 제가 이것을 발설했을 시 정지운이 자신을 어떻게 할지 감조차 잡히지 않았다. 무언의 압박이 온 사방에서 죄어들어올 때쯤 그의 입이 결국 열리고야 말았다.
“지운이 형이, 쫓아다니는 사람 있잖아요.”
“자꾸 잘 거라고 하던 애?”
“네…….”
“뭐야. 아직 못 잤어?”
태원의 놀람 섞인 발언이 모두에게 충격을 주며 퍼져나갔다. 정지운이 이렇게까지 오랜 시간 공을 들여도 안 넘어갔다니. 같은 놀라움을 느끼면서도 민석은 아직 짜증을 걷어내지 못한 채였다.
“설마 지 연애 안 된다고 나한테 저러고 나간 거야? 왜 나야?”
“아니……, 그게…… 민석이 형. 그러니까, 그분이요. 지운이 형이 무슨 말 하는데 잘 안 들어주시거든요.”
“그런데.”
“그분이 민석이 형 팬이래요.”
“뭐? 아이 씨, 이런 미친놈이 진짜.”
“아니. 단순히 팬이라서가 아니라 지운이 형은 형이라고 안 부르고 민석이 형만 형이라고 불러서…….”
말끝마다 씨발 거리며 욕을 중얼거리던 민석의 목소리 빼고는 방이 조용해졌다. 마침내 민석의 중얼거림마저 잦아들었다. 그 침묵의 끝에서 궁금증을 참지 못한 텐이 결국 묻고야 말았다. 이해하지 못한 사람들이야 정지운의 성질머리를 감탄하던 중이었지만, 그 의미를 이해한 사람들은 차마 무서워 묻지 못한 질문이었다.
“그런데 창식아.”
“네.”
“왜 호칭이 형이야?”
“네?”
“방금 니가 그랬잖아, 지운이 형은 형이라고 안 하고 민석이 형만 형이라고 한다고.”
“……어. 그게…….”
“오빠 아니야?”
“…….”
차라리 여기서 재빨리 변명이라도 했으면 말실수로 넘어갔으련만, 창식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 아무런 말도 내뱉지를 않았다. 그 순간 두 번째 충격이 회의실 안을 휩쓸고 지나갔다. 정지운이. 남자를. 세상에.
장난처럼 남자도 된다고 말한 적이 있지만 당연히, 정말로 장난인 줄로만 알았던 실장은 천천히 뒷목으로 손을 가져가 꾹꾹 주물렀다. 갑자기 뒷골이 당겼다. 혈압이 치솟는 것 같기도 하고.
가장 뒤늦게 그 의미를 이해한 이민석마저도 한참을 멍하게 있다가 자리에서 다시 한 번 벌떡 일어났다. 창식을 손가락질하는 손끝이 떨렸다.
“야! 그! 그 남팬! 걔 아니야?”
“형. 이제 저 몰라요. 나 진짜 지운이 형이 알면 죽일지도 몰라요.”
“그 걔 있잖아! 그 애!”
“너 알아?”
멍한 태원의 질문에 민석도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손짓까지 동원해가며 소리쳤다.
“키 이 정도 되고. 항상 여자애랑 오던 남자애 있잖아! 얼굴 작고 착해 보이게 잘생긴 애!”
“……어?”
“준영이 너 기억났지. 예전에 혜지 누나가 어릴 때 봤으면 낚아채 왔을 거라고 말하던 그 남자애 있잖아!”
“아…, 그 사람. 아니, 그래도 설마.”
준영은 애써 현실을 부정하려 설마라는 단어만 내뱉었다. 기억이 금방 나기는 했다. 애초에 남팬이 얼마 되지도 않았고, 아무리 무대 아래가 어둡다 해도 아예 보이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키도 작은 편은 아니라서 머리 하나가 다른 팬들보다 쑥 올라와 있었지. 새카만 머리카락에 눈동자도 남다르게 새카만 남자였던 걸로 기억하는데. 안 그래도 눈에 띄는 남팬에게 눈길을 한 번이라도 더 줬던 이유는 가끔 코디도 하며 캐스팅 매니저를 뛰는 혜지 누나의 말이 워낙 많았기 때문이었다. 아이돌 멤버 중 막내로 넣으면 딱일 텐데 나이가 이미 지난 것 같아서 아쉬워 죽겠다며 한탄한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그녀는 직업적 아쉬움보다도 그 남자가 마음에 들어 자꾸 입에 올리는 듯했다. 다른 코디들이 부추기는 말도 했지만, 항상 같이 오는 여자가 있는 걸 보니 여자 친구 아니겠냐며 입맛만 다셨었다.
다른 멤버들도 미친 듯이 머리를 굴리며 기억을 뒤졌다. 남팬. 잘생긴 애. 한 명씩 머릿속에 떠오르는 희고 말끔하게 생긴 얼굴을 연상하며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갔다. 그래, 그 정도면 팬 중에 정지운이 눈독 들일 만한 인재이기는 했다. 아니, 그래도 그게…… 그러니까……
“갑자기 왜 남자야? 지금까지 여자 사귀던 거 아니었어?”
도대체 그 남자에게 정지운이 홀랑 넘어가 정신 줄을 못 잡는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왜 같은 남자일까. 잘생겨서? 지가 더 잘생겨놓고 왜 그럴까. 그 결과 이해할 수 없는 짜증을 몰아 받게 된 이민석은 더 이상 성질 내기도 웃겨진 분위기에 바람 빠진 웃음만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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