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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4 (4/14)

Chapter 4

이사 갈까.

현관문을 닫고 들어와 멍청하게 서 있다가 생각했다. 아까 건물에서 내내 소리 지르던 대화 내용이 뭐였지. 내 이름이 들어갔던가. 정지운의 이름은 들어갔던가. 치정 싸움 같은 내용이었지 아마.

휴우. 한숨을 쉬고 침대 가에 걸터앉았다. 냉정하게 말해야겠다고 생각은 했지만, 저렇게까지 반응할 줄은 몰랐다. 내가 뭐라고 저렇게까지 화를 내. 저 성질머리로 어떻게 아이돌을 하는 걸까. 개인 활동이나 따로 예능을 안 나가는 게 진짜 다행이다.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냐. 애초에 정신 못 차리게 밀어붙인 게 누군데.

됐다. 그만 따지자. 이상하게 죄책감이 자극된다. 내가 그렇게 잘 어울려줬던가. 아니라고 부정할 수는 없지만, 억울한 것도 있고……. 이제 연락 안 오겠지. 마지막에 가라앉았던 분위기를 생각하면 답답하지만 이제는 무슨 변명을 덧붙일 기회도 없는걸.

괜한 상실감 때문에 자꾸 되짚어보게 된다. 이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어떤 의도였든 그렇게 잘해주던 사람이 사라졌는데 아무렇지 않을 수는 없잖아. 연락 하나 오지 않는 휴대폰을 괜히 만지작거리다가 불현듯 번개같이 머릿속을 스친 생각이 있었다.

아. 내 카드랑 학생증…….

학생증을 재발급 받았다.

학교 사무실에 찾아가 학생증을 재발급 받는 절차는 쉽다. 그냥 학교 과 사무실에 들어가서, 신분증을 제출하고 서류를 작성하면 되는 거다. 이걸 돌려받겠다고 아등바등했던 게 웃기기도 하다. 책상에 앉아있는 직원에게 서류를 내고 그것을 멀뚱하게 내려다보며 정지운을 생각했다.

그래, 밥값으로 내 학생증 제출한 셈 치자. 어디다 써먹거나 학교에서 내 신분을 도용할 사람도 아니니, 뭐. 이제는 지나가버린 인연에 잠깐 애도를 보내는 사이 도장을 쾅쾅 찍은 직원은 내가 낸 서류를 서랍 안에 수납하고 사무적인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3주 후에 찾으러 오시면 됩니다.”

“네? 그렇게 오래 걸려요?”

“요즘 학생증은 들어가는 기능이 많아서 오래 걸려요. 문자 받고 오시면 돼요.”

그리고는 나를 이미 지나간 업무로써 취급하며 다른 서류뭉치를 들고 창가의 나이 지긋한 중년 직원에게 가버렸다.

웃으며 나오는데도 이가 갈렸다. 정지운. 3주. 내 건 주고 가지, 좀.

체크카드도 재발급 받았다. 다행히 자본주의와 운명을 같이하는 기업체 은행께서는 내게 바로 새로운 체크카드를 발급해줬다. 기스 하나 없이 반질반질한 카드를 머니클립에 채워 넣고 건물 밖을 나왔다. 학교 앞 은행이라 딱 봐도 우리 학교 학생들이 삼삼오오 모여 돌아다닌다. 이번 학기는 금요일 공강은 실패했지만, 월요일 공강에 성공했다. 그러니까 다시 말하면 나는 오늘 더 이상 일정이 없다는 뜻이다. 카드로 교재나 사러 가야지.

나의 기념비적인 첫 소비를 위해 보도블록으로 한 발짝 발을 내디뎠을 때 좁은 이 차선 도로 건너편 파란 간판의 카페 앞에서 여학생 하나가 나를 향해 손을 흔들며 불렀다. 누구더라. 아, 두 살 후배인 유정이다.

단발머리를 앞머리까지 말고 예쁘게 화장한 유정이가 차 없는 틈을 타 이쪽으로 건너왔다. 더운지 손바닥으로 얼굴에 부채질하기 바쁘면서도 웃음이 밝았다. 친구들 말로는 나를 좋아한다네 뭐 어쩐다네 했다는데, 확실하지 않고 와 닿지도 않는다. 마주 보며 나도 웃었다.

“재현 오빠! 오늘 동아리 모임 와요?”

“아니.”

“왜요? 가요. 우리 이따 일곱 시라 시간도 넉넉할 텐데.”

말끝을 늘이며 슬쩍 매달리는 유정이를 보며 생각했다. 오늘 동아리 모임 있는 줄도 몰랐다. 아마도 읽지 않은 카톡 중 몇 개가 이 이야기를 하고 있었겠지. 요즘 신경이 이상한 곳에 팔려 몰랐다. 그리고 도서관도 가고 용돈도 아껴야……

“선배들이 와서 내준대요. 고깃집 간대.”

“그래? 어디 고깃집?”

“삼월관!”

돈가네에 비하면 육질이 좋지. 돈가네가 지나치게 문제가 많은 것도 있지만……. 잠깐 고뇌했으나 결정은 빨랐다.

“이따 시간 되면 갈게.”

“오는 줄 알고 있을게요. 오빠, 수업 이번에 뭐 들으세요?”

재잘재잘 이야기하는 유정이의 말 끊을 타이밍을 놓쳐 학교까지 같이 들어가 경영관 앞에서 보내주고서야 다시 서점으로 나올 수 있었다. 이따가 물론 시간이 될 예정이다. 공짜 고기에게 내줄 시간은 많다.

여덟 시의 자그마한 이벤트, 바로 티켓팅을 제외한다면 말이다. 어제 갑자기 정지운과의 관계가 그따위로 파탄 날 줄은 몰랐지만, 이미 계획은 짜놨기에 시간이 되자 자리에 앉았다. 궁금한 마음도 있었다. 니가 어디까지 하나 보자 싶은 생각. 하지만 피시방에 갈 의욕까지는 없어서 그냥 자취방에서 노트북을 켜놓고 수연이와 카톡으로 대화하는 중이다.

남은 회차 중 정지운이 나오는 회차는 열 몇 번 정도. 나는 그중에 막공을 노리는 것도, 무대 바로 앞을 노리는 것도 아니다. 그저 어딘가 볼만하고 적당히 싼 가격의 자리를 찾을 뿐이다. 수연이는 막공부터 덤벼들겠다고 벼르고 있다.

찬장에 쌓아뒀던 과자 중 하나를 뜯어 허기를 달래며 클릭 연습을 했다. 접속해서, 시간 되면 새로고침, 안 되면 다른 창 바로 새로고침, 그리고 2층 1열 한 자리만 잡고 바로 무통장으로 걸어버리기. 1분이 남았다며 서버 시계 사이트가 빨갛게 변하자 수연이는 야단법석이다.

[아 아 아아아아ㅏㅏ 아ㅏ아아 떨려!!!아!!아!!]

[민석이형도 아닌데 왜 그래]

[니가 몰라서 그래! 지운오빠 개쩐단말이야!!]

그래, 하도 그러니까 내가 궁금해서 보겠다는 거잖아. 서버 시계가 정각을 가리키자마자 바로 새로고침을 했다. 첫 번째 창 실패. 두 번째 창도 실패. 세 번째 창과 네 번째 창이 새로고침에 성공했다. 예매하기 클릭. 가장 빠른 9월 13일 화요일 회차 저녁 8시 타임. 주저 없이 2층을 눌렀는데 1열 중앙 두 자리 정도가 이미 나간 게 보였다. 무서워서 가장 가장자리의 좌석 하나를 클릭해 넘겼다. 그 뒤는 다행히 넘어갔다.

휴우, 성공이네. 남은 과자는 입맛이 떨어져서 잘 싸서 책상 구석에 뒀다. 손을 씻고 노트북을 끄려고 돌아왔더니 수연이의 눈물겨운 연락이 와 있다.

[나 실패ㅋㅋㅋㅋ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너 언제예매했니 ㅠㅠㅠㅠㅠㅠㅠㅠ]

[나 13일]

[됐어?]

[응 좋은자리 노린건 아니라]

[나도 13일 자리 남은거 있거나 양도 있나 볼게 같이보자ㅠㅠ]

[알았어 나 이제 간다]

수연이는 지금껏 몇 번을 보고도 또 본단다. 그걸 대체 왜 계속 보냐고 물었더니 그날그날 배우들의 감정선과 애드리브가 다르다던가 뭐라던가. 수연이가 그렇게까지 섬세하게 잡아낼 능력이 있다고 생각지는 않고 그냥 습관처럼 보러 다니는 것 같다. 당연히 예매하고 예매하지 못하면 허전한 그런 거 말이다. 슬리퍼를 신고 나가려다가 그래도 선배들이 온다니 양말에 운동화까지 갖춰 신고 밖으로 나갔다.

골목을 지나 학교 정문도 지나 얼마 걷지 않으면 삼월관이라고 기와 장식을 붙인 간판이 보였다. 이름은 거창하지만 학생들이 기분 낼 때나 가는 고깃집이다. 장판에 방석 깔고 앉아야 해서 가끔 다리가 저리면 곤란하기도 한 그런 곳 말이다.

유리문을 열고 들어가자 한쪽 구석에 우리 동아리 사람들이 열 몇 명가량 모여 떠들썩하게 이야기 중이다. 이미 고기도 구워 먹고 술도 마실 만큼 마신 모양이었다. 반겨주는 사람들 사이로 신발을 벗고 노란 장판에 올라서자마자 그대로 털썩 끌려 내려 앉았다. 후배들, 동기. 그리고 선배들까지. 올해 상반기에 취업해 나갔던 상현이 형이 맞은편에서 하얀 셔츠를 입고 어색하지 않은 모양새로 앉아 반겨주었다.

“재현이 너 왜 이렇게 늦게 왔어!”

“할 일 있어서요. 형, 안녕하세요.”

“자, 받아 인마.”

“네. 주세요. 너무 많은데?”

맥주잔에 소주를 들이붓고는 맥주를 채워 넣었다. 이건 색만 봐도 위험하다. 이렇게 맑은 색의 소맥을 내가 어떻게 먹냐? 찡그린 표정으로 들어 보였지만, 사람들은 분위기에 휩쓸려 원샷하라고 난리가 났다. 내려놓으려 했더니 목소리가 더 커졌다. 중간에 누가 말려주는 사람도 있는 듯했지만 저 끄트머리 멀리에 있고.

나는 결국 눈을 딱 감고 원샷하고 말았다. 숨을 참고 마시자 탄산이 거의 없는 술은 목에 걸리는 것 없이 넘어간다. 나 죽는 거 아닐까? 빈 유리잔을 내려놓자마자 입으로 고기가 들이닥쳤다. 뜨거운 고기를 우물우물 씹으며 식도를 타고 내려가는 알코올의 적나라한 느낌을 느꼈다. 오늘 죽겠다. 나는 미리 대비하기 위해 휴대폰을 주머니에 단단히 챙겨 넣었다.

나만 이렇게 퍼먹인 건 아니고 늦게 도착하는 사람들은 모두 이렇게 술이 들이부어졌다. 나 다음에 도착한 영한이도 양팔이 붙들린 채 소맥이라는 탈을 쓴 소주를 기어코 마시고야 말았고, 그다음에 온 여자애들은 그나마 맥주를 좀 더 타주기는 했지만 용서해주는 법은 없었다.

한 번에 오른 취기 때문에 열이 올라 얼굴이 뜨겁다. 나는 모양 빠지게 옆에 누가 시켜둔 사이다병을 아예 얼굴에 대고 굴리는 중이다. 이걸 보고 다들 웃음이 터졌지만 나는 꿋꿋하다. 조금만 더 열이 오르면 얼굴이 터져버릴 것 같단 말이야.

시끄러운 사람들의 목소리가 귀에 웅웅 울린다. 상현이 형 가면 나도 가야지. 아까 내 꼴을 비웃었던 영한이가 내 옆에 털썩 앉아 사이다병을 빼앗아간다. 얘는 정말 무슨 일이 날 것처럼 얼굴이 벌겋다. 순순히 들려주고 옆에 놓인 물컵을 들고 물을 마시려 했다. 혀에 닿은 맛이 써서 깜짝 놀라 외쳤다.

“아, 누가 여기 소주 따라뒀어?”

“그거 소주야?”

으, 입맛만 버렸어. 쓰디쓴 소주를 내려놓고 다른 물컵을 찾는데 온전한 잔이 어디 없다. 결국 포기한 채 맥주만 담긴 컵을 찾아 마셨다. 이렇게까지 날뛰는 자리인 줄 알았으면 안 왔지, 에라이.

마음 같아서는 그냥 이대로 테이블에 엎드려 자고 싶다. 진짜 엎드려버릴까 고민하며 테이블을 뚫어져라 노려보는데 갑자기 또 큰 소리가 났다. 상현이 형이 여자 후배들과 무슨 이야기 중인 듯하다. 연애 이야기. 아. 그래, 많이 해라. 멍하니 그걸 보는데 우연히 눈을 마주친 상현이 형이 내게 손가락질했다.

“그래, 우리 재현이!”

“네?”

“지금 누구 만나는 사람 있어?”

“없습니다.”

“우리 재현이가 만나는 사람이 없어? 이야. 이거 안 되겠네. 형이 소개팅이라도 해줘?”

주변에서 가벼운 웃음이 터지고 내가 입을 다문 채 가만히 있자 옆에서 유정이가 형을 말려줬다. 됐어요, 오빠나 사귀세요. 라고. 그 말에는 나도 피식 웃음이 새어버렸다.

“바빠요.”

“연애는 인마. 바빠도 하고 안 바빠도 하는 거야.”

아, 그럼 형 먼저……. 나까지 이렇게 말하면 상현이 형 정말 울지도 모른다. 애매한 웃음으로 흘리려는데 오늘따라 질문이 집요하게 붙었다.

“재현이 어떤 스타일 좋아해?”

“네?”

“귀엽고 착한 애 좋아, 아직도?”

에이, 그게 언제 적 이야기인데. 아직 누굴 좋아하는지도 모르던 1학년 시절에 대답했던 걸 가지고 저렇게 평생 우려먹는다. 재현이는 귀여운 스타일 좋아한다. 재현이는 애교 좋아한대, 뭐 그런 걸로. 대충 넘기려는데 나를 보는 시선들이 여전히 집중되어있길래 그냥 흘리듯 말했다. 왜 이렇게 말했는지 두고두고 후회했지만.

“예쁘면 좋죠.”

“예쁘고? 또.”

“예쁘고…?”

여기서 잠깐 말이 막혔다. 예쁘고……. 그런데 예쁘고 잘생기기만 하면 큰일이다. 성격도 좀 좋으면 좋겠는데…, 라고 말하려는데 이미 형과 여자 후배들은 테이블을 내려치며 난리가 났다.

“재현 오빠가 예쁜 여자가 좋으시단다!”

“예쁜 여자 친구를 위해 건배!”

“아니, 그게 아니라…,”

뒤를 말할 새도 없이 내 손에는 잔이 들렸고 또 술이 채워졌다. 짠 하고 손이 높이 올라가 술잔들이 부딪쳤다.

“재현 오빠 예쁘면 다 된대.”

“야! 그거 아니야!”

이거 봐라. 몇 자리 건너가기도 전에 벌써 말이 저렇게 전해졌다. 내가 미쳤지, 어휴. 유정이가 퍽 진지한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재현 오빠, 진짜 예쁘면 장땡이에요?”

“아니라고!”

장난과 섞인 놀림이 계속되는 동안 나는 예쁜 여자만 밝히는 죄로 술잔을 몰아 받았다. 얼마간 술이 더 오가고 상현이 형이 계산하겠다고 일어서기에 같이 일어나다가 머리가 핑 돌아 뒤로 넘어간 것이 마지막 기억이다.

∞ ∞ ∞

사람이 가끔 술을 너무 많이 마시면 말이다. 푹 자는 게 아니라 앓느라 깬다. 바로 오늘 아침처럼. 목이 마르다 못해 갈라질 것 같은 고통에서 몸부림치다가 어딘가를 발에 부딪히고 깼다. 눈을 뜨니 나는 내 방 바닥에 엎드려 자고 있었다. 몸도 찼다.

눈앞에는 올라가지 못한 침대 다리가 보인다. 짓눌린 턱이 아프다. 으으. 몸을 웅크려 움직이다가 꾸물꾸물 기어 냉장고까지 갔다. 물이다. 물병에 반 정도 남은 물을 마시기 전에 혹시 이것도 소주가 아닐까 혀끝에 대봤다. 어제 하도 속아서 무서워 죽겠네.

영한이를 여기 같이 밀어 넣지 않은 걸 보면 어제는 나만 죽었나 보다. 빈속에 마시니까 그렇지. 내가 혹시 토했을까. 끔찍한 가정과 함께 흰색 티셔츠를 내려다보았지만, 다행히 무사하다. 어디 찢어지거나 멍든 것 같은 곳도 없고.

몇 시일까. 휴대폰이 꺼져 있어서 충전기에 꽂은 뒤 전원을 켰다. 밖은 해가 떠서 새소리가 지저귄다. 좋은 아침이네. 부스스한 머리를 벅벅 긁다가 켜진 휴대폰에서 쉴 새 없이 진동이 오는 것을 보고 고개를 돌렸다. 왜 그러지. 고장 났나.

아니다. 부재중 전화가 찍혀 있다. 문자도.

나 혹시 또 술 처먹고 어디다 전화라도 했던 걸까. 떨리는 손으로 휴대폰을 들어 올렸다.

1학년 때 몇 번 혼나고 고쳐진 버릇이기는 한데, 나는 술이 과하면 어디다 전화를 해댄다. 이상한 말을 하는 건 아닌데 그래도 남 귀찮게 하는 버릇임은 맞기에 어떻게든 이를 악물고 고쳐놨건만, 가끔 이렇게 정신 나갈 때까지 마시면 꼭 전화를 해서는 웅얼웅얼 말을 해댄다.

보통 그 상대가 수연이라서 다음 날 디지게 욕을 얻어먹는다. 초반에는 정신 줄 끊어먹고 엄마에게 했던 적도 있다. 아주 잘하는 짓이지. 수연이가 오늘은 과연 어떤 욕을 보내놨을까. 약간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통화 내역과 문자를 열어봤다가……

“으악, 이런 씨발!”

정지운에게 와 있는 부재중 목록을 보고 기겁했다. 거기다 살벌하기마저 한 문자까지.

[너 안받냐]

[그딴 말을 하고 전화를 안 받아?]

[어디냐고 술을 누구랑 그렇게 마셔 죽고싶어?]

문자와 통화 내역을 거슬러 올라가 보자. 젠장, 내 이럴 줄 알았다. 제일 먼저 건 게 나다. 이런, 미친. 죽어버려, 윤재현. 나가 죽어. 당장 뛰어내려버려! 으아아아. 수연이를 냅두고 왜 정지운에게 전화질을 한 거야!

맨 위에 찍혀 있는 정지운과의 통화 시간, 심상치 않은 삼십 초를 보며 나는 절망했다. 저 정도면 충분히 개소리를 했을 만한 시간이다. 눈물이 앞을 가릴 것만 같다. 난 도대체 무엇을 잘못했을까. 나의 원죄는 무엇일까.

차마 정지운에겐 묻기조차 무서워서 문자를 남겨둔 상현이 형에게 통화 버튼을 눌렀다. 아침에 출근 시간일 게 뻔해 전화하기 미안했지만, 지금 그걸 가릴 때가 아니었다. 너무 궁금하다. 내가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것일까. 상현이 형은 왜 깨면 꼭 전화를 하라고 한 것일까……. 신호음이 뚝 끊기고 상현이 형의 목소리가 바로 들렸다.

―재현아. 너 깼냐?

“네. 형, 저 문자 봤어요…. 깨면 꼭 전화하라고…….”

―그래, 너 괜찮냐?

“뭐가요?”

아. 도대체 무슨 말이 나올까 무서워 눈을 질끈 감았다.

―너 어제 전화해서 울었잖아.

이것 봐. 내가 무섭다고 했잖아.

“제가, 많이 울었나요.”

―잠깐?

“언제요…?”

―너 전화했을 때.

상황은 더 이상 알 수 없는 무저갱으로 빠져들고 있다. 반쯤 포기한 마음이 되어 다시 물었다.

“제가, 전화를 했나요?”

―너 말리려고 했는데 내가 너를 업고 있느라 양손이 부족했거든. 니가 갑자기 어디 통화 버튼을 누르더니 우는 거야.

“네…….”

―그렇게 막 우니까 전화 너머에서 너 어디냐 왜 우냐 묻는데 니가…… 야, 이게 아침 출근길이라 말하기 좀 그런데.

상현이 형은 목소리를 있는 대로 낮추어 속삭였다. 그래도 들릴 건 다 들려 내 가슴에 비수처럼 박혔다.

―너 때문에 세상이 좆같아서 운다! 하고 끊었거든.

“……아. 네…….”

―무슨 일 있어, 재현아?

“아니요. 없어요. 그냥…… 저 어쩌죠?”

너무 당황한 나머지 상현이 형에게 물어봐 버리고 말았다. 상현이 형의 대답하는 목소리도 당황스러운 기색이 묻어나왔다.

―친한 사람이야?

“아니요. 아니에요, 형. 제가 알아서 할게요. 하하하….”

―그래, 인마. 무슨 일 있으면 좀 말하고. 애가 어릴 때부터 무슨 말을 안 하고 다 끌어안아. 적당히 착하게 살아, 인마.

“아니에요, 그런 거. 형, 출근 잘하시고 어제 죄송했습니다.”

―됐다. 연락해라.

전화는 끊겼고 방 안은 고요해졌다. 바깥의 새소리는 이제 싱그럽게 들리는 게 아니라 나를 비웃는 것만 같다. 니가 그러고도 잠이 오더냐 하며 비웃는 것처럼 지저귄다. 나는 이제 정말 울고 싶어졌다. 나 왜 그랬지? 대체 왜?

윤재현 씨. 뭐가 그렇게 힘드셔서 우셨나요. 나 자신도 모르겠네요. 양손을 들어 머리를 쥐어뜯어보아도 모르겠다.

아니, 아침부터 새벽까지 아르바이트하던 시절도 아니고, 뭐가 그렇게 슬프고 억울하더냐. 그리고 그걸 왜 매번 걸어대던 수연이나 영한이도 아니고 하필 정지운에게 전화해서 소리 지르고 울어? 왜 그런 데 화풀이했냐고! 윤재현! 대답해! 어서! 머리를 쥐어뜯다 못해 바닥에 박아버렸다. 그 자세 그대로 울부짖었다. 아아아! 모르겠다! 이젠 몰라. 망했어!

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며 고통스러워했지만,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그게 더 고통스럽다. 휴대폰에 고스란히 찍혀 있는 나의 통화 내역. 밤늦게 갑자기 전화 받고 욕을 먹은 정지운. 얼마나 성질을 냈을까. 수습을… 어떻게…….

꼼짝도 않고 바닥에 누워 있다가 몸을 벌떡 일으켰다.

이건 수습이 불가능하다. 그만두자.

휴대폰을 들어 올려 할 말을 머릿속으로 고심했다. 그동안 짧은 만남이었지만 즐거웠다. 정말 미안하며. 살면서 마주치지 말자.

문자를 누르려다가 일단 사과하려고 전화했다는 증거라도 남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통화 살짝 눌렀다가 신호 가면 바로 끊어버리자. 그리고 나는 직접 전화를 해 사과하려고 했는데, 정지운 씨가 전화를 받지 않아 부득이하게 문자로 사과를 대신한다며. 이렇게 말하는 거야. 그래, 좋았어.

치졸한 짓인 거 다 안다. 하지만 세상에는 복구되지 않는 관계도 있는 법. 떠나야 할 때 과감하게 떠나는 것도 사람의 미덕 아니겠는가.

방황하던 손가락 끝에 온 힘을 끌어모아 통화 버튼을 눌렀다. 자, 이게 마지막일 거야. 통화 버튼. 한 번만 누르자.

통화 버튼을 누르고 전화 신호음이 두 번 가기 전에 끊으려 했건만, 화면이 갑자기 전환되며 상대방이 전화를 받아버렸다. 안 돼! 마음속의 외침이 완성되기도 전에 목소리가 휴대폰에서 흘러나왔다.

―윤재현 너냐?

“……어…… 정지운 씨…….”

왜 받지? 왜 받아버린 거지, 이 아침에! 정지운의 목소리는 듣던 중 가장 싸가지가 없고 바닥을 긁었다. 으르렁거리는 것 같기도 했다. 아, 할 말. 할 말…….

―이 씨발…,

“정지운씨 어제정말죄송했습니다 제가큰실수를저질렀습니다.”

―됐고 너 지금,

“정지운씨에게큰실수를저지른저는더이상뵐면목이없어연락을끊을까합니다.”

―뭐? 너 미쳤냐?

“그동안짧은만남이나마즐거웠구요 살면서다시는마주치지맙시다! 안녕히가세요!”

전화를 끊자마자 다급한 손놀림으로 전화번호부를 열었다. 수신거부. 수신거부! 버벅거리는 사이에 전화가 다시 올까 무서웠지만, 그 짧은 사이에는 전화가 오지 않았다. 마지막 수신거부 확인 버튼까지 눌러버리고 나니 이제야 마음이 놓였다. 아. 끝났다. 이제 됐어. 나는 멍청한 짐승처럼 머리만 침대 위 이불 안에 밀어 넣고 웅얼거렸다.

내가 치사해 보여도 어쩔 수 없다. 다시 말하지만 세상에는 복구될 만한 실수가 있고 쪽팔리며 답이 없는 실수가 있다. 내가 정지운에게 어제 한 것은 후자다. 저걸 어떻게 수습해.

일을 저지르고 나니 마음은 가벼워졌다. 지나치게 가벼워진 마음이 탈력감을 주기도 하지만.

그래, 애초에 이렇게 되어야 했던 일이다. 내가 정지운과 뭘 더 하겠다고 만나고 연락하고 그러겠는가. 원하는 걸 알아도 해줄 수가 없는걸. 아쉬움은 아쉬움이고 어쩔 수 없는 건 어쩔 수 없는 것이다. 무거운 몸을 이끌고 이 강의실 저 강의실을 옮겨가면서 하루 종일 이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 와중에 피곤한 몸은 축축 늘어지고 친구들을 만날 때마다 국물 있는 음식만 챙겨다 먹었다. 점심은 순대국밥, 저녁은 뼈해장국. 아직 더운 날씨에 무슨 그런 걸 먹느냐고 난리 치다가도 정작 내 얼굴을 보면 다들 무슨 말 없이 내가 먹자고 하는 음식을 먹어줬다. 어제 알코올의 여파가 이렇게나 강력하다.

저녁인 뼈해장국은 영한이와 먹는 중이다. 영한이는 집에 가서 밥을 먹겠다며 발버둥 치다가 나의 힘없는 매달림에 결국 굴복해서 같이 국물을 뜨고 있다. 김이 펄펄 나는 뚝배기를 휘휘 젓는데 영한이가 공깃밥 뚜껑을 열며 말했다.

“너 괜찮냐?”

“아니.”

“그래 보인다. 어제 그렇게 많이 먹었어?”

“응. 장난 아니었어.”

“먹고 들어가.”

“아냐, 도서관 갈래.”

집에 있어봤자 늘어지기만 하는걸. 도서관에 있을 때까지 있다가 가야지. 결국 밥은 반 공기도 못 비운 채 남겼고 영한이와는 가게 앞에서 헤어졌다. 나는 가방을 고쳐 메고 내려오는 학생들을 스쳐 학교 위로 올라갔다.

늦여름의 밤은 공기마저 시원하다. 특히 산을 뒤에 끼고 있는 우리 학교는 공기의 시원함이 남다르다. 걸어 올라가던 중 진동하는 휴대폰을 주머니에서 꺼냈다. 이제 올 일이 없지만 혹시 정지운의 전화일까 무서웠다. 하지만 안전한 수연이에게서 온 전화였다. 통화 버튼을 꾹 누르고 귓가에 가져다 댔다.

―야아아아아아아!

“왜?”

―나 양도받았어!

“뭘?”

―뭐긴 뭐야, 너 13일에 예매한 거! 나 1층 8열 양도받았지롱.

“아! 그거.”

나 그거 아직 입금 안 했는데……. 수연이에게 말한다는 걸 깜빡했다. 이제 안 보러 가도 되는데. 어쩌지?

“입금했어?”

―응. 양도자 이름으로 티켓 부스 가서 찾으면 된대.

“그렇구나…….”

―뭐야. 너 아직 입금 안 했어?

“응.”

숨겨봤자 금방 들킬 것 같아 실토했다. 수연이의 목소리가 가파르게 올라가기 시작했다. 끝없이.

―내가 누구 때문에 뜬금없는 13일을 양도받았는데! 너 빨리 입금해. 오늘 열두 시까지야.

“나란히 앉아서 보는 것도 아닌데, 왜 그러냐.”

―이미 양도받았단 말이야! 빨리 입금해! 빨리!

“그래. 알았어. 할게.”

―언제 할 거야?

“지금 도서관 들어가기 전에 ATM기에서 할게. 좀 조용히 해라.”

―너 안 오면 진짜 가만 안 둘 거야. 알았어?

“오냐.”

훈계가 더 길어지기 전에 재빠르게 전화를 끊었다. 얘는 그사이에 냉큼 표를 구해왔냐, 제기랄. 무통장 입금으로 걸어둔 탓에 그냥 내버려 두면 흘러갈 표라서 취소도 안 했다. 에이, 모르겠다. 2층이라 그렇게 비싼 것도 아니던데 그냥 한 번 봐주고 말지.

도서관으로 바로 접어들려던 걸음을 틀어 그 옆의 ATM기 앞에 섰다. 무통장입금 계좌번호. 입금액 8만 원. 손톱만큼 돈이 아깝다는 마음이 들었지만 그냥 입금했다. 지금껏 정지운이 내줬던 밥값과 기프티콘에 대한 예의로써. 그래, 보고 털어버리자. 사람이 기브앤테이크랬어.

입금 내역을 확인하고는 도서관에 앉아 멍하게 책을 넘겼다. 책을 읽었다고 표현하지 않는 이유는 책을 정말 넘기기만 했지 머릿속에 들어온 게 없어서 그렇다. 열두 시에 가까운 시간이 될 때까지 수많은 번뇌와 씨름하며 버티던 나는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고야 말았다. 나의 패배다. 내일 보자, 책아.

나도 꽤 늦게 나오는 편인데 구석 자리에는 아직 몇몇 학생이 자리에 앉아 책과 씨름하는 중이다. 저들은 책이 머릿속에 잘 들어오는 걸까. 궁금하지만 물어볼 수도 없고.

도서관을 나오는데 수연이는 입금을 했냐고 카톡으로 난리를 쳐놨다. 나는 자판을 치는 것조차 귀찮아 전화를 걸었다.

―재현아, 입금했어?

“응, 했어. 입금 내역도 확인했어.”

―아, 다행이다. 그래, 좀 보고 이야기도 하자. 너 요즘 왜 이렇게 바빠? 누구 만나?

“만나기는.”

나를 아는 모든 사람들은 나에게 자꾸 이런 걸 묻는다. 너 요즘 누구 만나냐. 연애하냐. 그때마다 절대 아니라고 고개를 저었다. 바쁘면 다 연애하는 거냐고 다른 사람들에게 면박을 줬는데, 수연이까지 이렇게 말하니 새롭다.

―근데 왜 연락도 안 해!

“하잖아, 지금.”

―씨이. 심심하게.

“원준이랑 잘 만나냐.”

―몰라. 주말에 또 싸웠더니 전화 안 와. 내일쯤 오겠지.

아오. 나 이제 정수연 연애 상담 진짜 안 들을래. 항상 이러네 저러네 하다가 결국 잘 만나고 저런다.

“그래. 그럼 됐다.”

―너 진짜 뭐 없어? 누구 괜찮은 사람이라도?

“있었는데 그만뒀어.”

―어? 왜?

“생각해보기도 전에 그냥 끝냈어.”

―그게 뭐야.

“너무 어려워서.”

늦은 밤 조용한 학교에는 걸어가는 사람이 저 멀리 한 명 보일 뿐이다. 어둡고 가로등 불빛만 드문드문 켜진 길을 걸으며 나는 되는대로 입을 움직였다.

어렵다, 라는 말만으로 표현이 가능할까. 걸리는 것을 대충 세어보자. 일단 남자다. 남자라고. 처음부터 탁 걸려 넘어진다. 이 길은 통행금지입니다. 다시 돌아가세요. 온 사방에 빨간 경보등이 울린다.

그 금지구역을 기어코 열어젖히고 들어간다고 따져도 나와 정지운의 격차는 다각도에서 다양하다. 일단 생각의 단계가 그렇다. 나는 이제서야 아, 예쁘게 잘생겼다. 옆에 있으면 재밌네. 좀 더 보고 싶다. 정도인데, 정지운은 저 혼자 앞서나가서는 내게 손을 흔든다. 빨리 오라고. 그냥 연애 한 번 해보는 게 무슨 대수냐는 태도다. 나는 느리고 깊은데 정지운은 빠르고 가볍다. 내가 어설프게 따라갔다가 감정에 겨우 잠길 때쯤 정지운은 손 털고 나가지 않을까.

묻지 않아도 뻔하게 알 수 있는 결말 아닌가. 나는 태어나서 처음 남자 만난다고 온갖 생각을 다 하고 신경 쓰겠지만, 쟤는 가볍게 놀다가 가버릴 거 같아. 그리고…… 연애하면. 그, 그, 만나서 뭘 하는 건지도 도저히 상상할 수가 없고.

여러모로 생각해도 그냥 있던 자리에서 맞는 사람을 만나는 게 좋을 것 같다. 나는 나대로 일상을 살아가고 정지운은 스포트라이트 아래에서 행복하게 살아가는 게 낫지. 생각을 시작해볼 필요조차 없는 거다.

―왜? 왜에?

“그런 게 있어.”

―뭐지.

“성격이 나빠.”

―뭐야. 얼굴만 봤어? 니가 웬일이야.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어.”

대한민국 인기 순위 다섯 손가락 안에 꼬박꼬박 들어가는 외모라는 것은 확실히 파괴력이 강력했다. 나도 내가 이렇게 될 줄 몰랐지. 정말 정지운의 얼굴이 아주 조금만 덜 잘생겼다면 내가 이렇게 생각할 일조차 절대 없었을 텐데.

학교의 정문에 다다르자 가로등 불빛뿐만 아니라 간판의 불빛마저 거리를 훤하게 비추고 있다. 그 오른쪽의 골목으로 접어들며 이야기 계속하려는 수연이를 말렸다. 다음에 정리되면 이야기해주겠다고. 순순히 끊으려 한 것은 결코 아니었지만, 어쨌든 끊어주기는 했다.

사람 하나 없이 조용한 건물 앞으로 노란 얼룩무늬의 고양이 한 마리가 재빠른 속도로 지나갔다. 나는 그 계단을 올라서 유리문을 열고 올라갔다. 방에 들어와 샤워를 하자마자 알람을 확인하고 몸을 침대에 눕혔다. 밖에서는 선선한 바람이 들어온다. 창문을 닫으며 손가락 한 마디만큼만 열어놓았다. 그날 밤은 깊게 잠들지 못하고 얕은 잠에 시달렸다.

어쨌든 그렇게 정지운에게서 연락은 오지 않게 되었다.

그 후 일주일 동안 내 일상 위로 가벼운 무력감이 드리워졌다. 옆에 잠깐 둔 것만으로도 나를 롤러코스터 태우던 인간이 하나 사라져서 그런 걸까. 이것 봐. 역시 빨리 잘라내기를 잘했어. 가끔 그 얼굴이 떠오를 때마다 나는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 진상을 부리고 멀어진 건데도 내 마음가짐은 이 모양 이 꼴이다. 보면 어쩔 거고 무슨 변명을 할 건데, 윤재현.

다시 생각해보면 말이다. 그날 술을 마시고 진상 부린 그대로가 내 마음이다. 그 정도로 강력하게 말하려는 의도는 결코 없었지만, 그래도 맥락은 같다. 정지운은 내 가라앉은 일상을 좆같이 만든다. 그렇잖아도 답답하고 빛나는 것 하나 없는 내 삶을 고작 그런 성격 나쁘고 잘생긴 놈 하나 받아들여 보자고 갈아엎어야겠냐.

그날의 술주정은 나름대로 올바른 사람에게 길을 잘 찾아갔던 것이다. 물론 그렇게까지 강력한 파워로 스파이크를 때려버릴 생각은 결코 없었지만, 지금껏 고민하느라 내 위장에 구멍 낼 뻔한 대가라고 생각하자, 정지운 씨.

밤낮으로 도서관에 틀어박혀 있다가 주말에는 집에 내려가 어머니의 곁에 붙어 삼시 세끼를 잘 받아먹고 월요일 아침에서야 올라왔다. 서울로 올라오는 동안 수많은 광고판이 스쳐 지나갔고 정지운은 그사이 어디에나 박혀 있었다. 대학로의 뮤지컬 광고 포스터에도, 지난주에 찍은 화장품 CF의 한 장면으로도.

피하려 해도 자꾸만 보이길래 버스정류장 대형 광고판 앞에서는 아예 대놓고 노려봤다. 내가 보지 못한 표정으로 낯선 음료를 들고 있는 모습은 생소했다. 그러다 이게 뭐하는 짓인가 싶어 그만두었다. 정지운은 저렇게 나 없이도 잘만 산다.

그렇게 화요일이 오고야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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