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Chapter 3 (3/14)

Chapter 3

요 근래 생긴 카톡 친구 정지운은 이제 주말 친구까지 그 영역을 넓혀 나가고 있었다. 토요일이나 일요일 오후에 만나 이른 저녁을 먹고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게 우리의 일정이다.

지금 다시 생각해봐도 정지운은 나랑 영 맞질 않는다. 처음에는 메뉴 하나를 정하는 데에도 전쟁이었다. 생면 파스타라던가? 파스타 면을 수타면처럼 바로 해서 먹는 곳이 있다며 굳이 그걸 먹으러 가자는 거다. 내 소원은 그냥 백반집이었다. 집을 나와 살면 나만 이러는 게 아니라 다들 이렇게 집 밥을 찾게 된다. 내가 무려 휴대폰으로 검색까지 해서 맛있다는 밥집을 찾았건만, 운전대는 정지운이 잡고 있었기에 결국 나는 그날 정통 이탈리안 파스타 집에 발을 들이고야 말았다.

허연 식탁보와 은은한 불빛이 흐르는 가게의 구석에 앉아있는 내내 입을 불퉁하니 내밀고 파스타를 먹었다. 심지어 내가 아는 기다란 파스타 면이 아니라 무슨 수제비처럼 짜리몽땅하기까지 했다. 한참 투덜거리고 나니 찔려서 어떻게든 내가 계산하려 했는데 계산대 앞에서 치열한 몸싸움 끝에 정지운은 자기 카드를 먼저 직원에게 건네주는 데 성공하고야 말았다. 음식점에는 사람이 좀 있었기에 커다란 선글라스를 끼고 있던 정지운은 나오는 길에 굳이 선글라스를 내리고 나를 흘겨봤다. 그 눈빛을 견디다 못해 주차장에 가서야 나는 한마디 했다.

“왜?”

“아니다.”

아니기는. 굉장히 할 말이 많은 사람처럼 굴면서 저런다. 나는 조수석에 양발을 가지런히 한 채 백팩을 끌어안았고 정지운은 다 들리는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차의 시동을 걸었다.

“이렇게까지 사주는 보람 없는 건 니가 처음이다.”

“정지운 씨. 다 들려.”

“들으라고 하는 소린데?”

“나 내릴래.”

“알아서 내려.”

어느 누구께서 오랜만에 사생에게 쫓기신 덕분에 멀고 먼 서울 끄트머리까지 밥을 먹으러 왔는데, 뭐가 어째? 나도 대놓고 운전하는 정지운의 옆모습을 노려보다가 도로 조수석에 얌전히 몸을 접고 앉았다. 저놈의 옆선이 잘생겨서 화가 풀리려는 게 짜증난다.

그리고 무엇보다 저놈이 나를 진짜 여기다 두고 가면 안 되잖아. 여기서 나 혼자 집에 가다 보면 내일 점심쯤 넉넉하게 도착할걸? 조용히 구겨져 앉아 가방만 끌어안았다. 억울하다. 성공해서 좋은 차 몰아야지.

그래도 완전히 글러먹은 놈은 아니라 서울 안에 들어와서도 우리 집 앞까지 착실하게 나를 데려다줬다. 사람이 드문 학교 근처 골목길 앞에 내리는데 운전석 쪽의 유리창이 내려갔다. 그리고는 작은 머리통이 쑥 나와 나를 불렀다.

“재현아. 너 자취방 구경해도 돼?”

“내 방? 정지운 씨 차 못 대.”

“주차장 없어?”

“주차장이 왜 있어. 우리 집 앞 정문 옆 골목이라 차 대면 바로 딱지 붙이거나 끌고 가. 안녕.”

정지운은 아까보다 더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선글라스를 도로 쓰고는 차를 후진해서 나가버렸다. 은색 차가 좁은 골목을 빠져나가는 사이 어디 긁힐까 아슬아슬하다. 나는 그 뒷모습을 오래오래 지켜보며 손도 흔들었다. 같이 놀고 싶었던 모양인데 미안하네. 하지만 저런 차를 대기에는 너무 위험하다.

그리고 일주일 뒤. 정지운은 제 차를 어디다 버려둔 채 우리 집 앞 카페에 왔다.

“그래서 여기 있잖아. 헤닝의 넘버 두 번째.”

“두 개로 분리된 도시. 내가 태어난 곳. 절망은 나와 함께 걸음을 시작했지. 지금도 내 발목에 걸려 있지만. 여기?”

“응, 거기. 이거 이해돼?”

“무슨 이해?”

두 개로 분리된 도시. 내가 태어난 곳. 주인공인 헤닝이 태어난 독일의 분단 상황을 설명해주는 구절이다. 절망은 나와 함께 걸음을 시작했지. 헤닝의 어려웠던 유년 시절에 대한 설명이고.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기에 눈만 깜빡이며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런데 정지운도 내 말을 기다리고 있었는지 우리는 서로를 멍하게 바라보며 눈만 깜빡였다. 학교 근처 제일 사람이 없는 카페 구석에 앉아있던 터라 다른 소리가 섞이지도 않은 채 정적이 흘렀다. 내가 할 말이 없음을 알고 정지운이 제 턱 끝을 쓰다듬듯 만지작거리다 말했다.

“나는 헤닝 자체가 이해가 안 돼.”

“왜?”

“여기 봐. 이런 상황에서 자꾸 무대에 매달리는 게 이해되질 않아. 뮤지컬 마지막에서 진짜 성공한 배우가 되는 것도 아니고.”

극 중의 헤닝은 어린 시절 부모님의 이혼으로 인해 어머니와 단둘이 살아가는 키가 작은 소년이었다. 하루를 살아가기도 벅찬 이 소년의 꿈은 뮤지컬 무대에 서는 것. 하지만 뮤지컬은 승전국에서 열리는 화려한 무대이지, 패전의 기운이 깔린 동독에서 가질 만한 꿈이 아니었다.

조각처럼 흩어져 돌아다니는 포스터를 모으고, 동독으로 돌아온 군인들에게 이야기를 전해 듣던 헤닝은 결국 신분을 위장해 영국으로 건너간다. 그 후 영국에서의 삶은 작은 연극 무대를 전전하고, 큰 무대의 표를 사지 못해 공연장 너머에서 흘러나오는 넘버를 엿듣고 외우는 것이 전부다.

이 노래는 헤닝이 그날 엿들은 뮤지컬의 넘버를 외우며 다락방으로 돌아가다가 런던의 텅 빈 밤거리를 자신만의 무대로 삼아 부르는 노래다. 그런데 왜 이게 이해가 안 된다고 하는 건지 모르겠다.

“정지운 씨. 이게 가장 하고 싶은 뮤지컬이라고 하지 않았어?”

“맞아.”

“그런데 왜 이거야?”

차마 이해도 하지 못하는 뮤지컬을 왜 콕 집어다가 하고 싶어 하느냐. 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정지운과 둘이 있다 보면 기본적인 사회생활의 일환으로써 자기 이야기를 할 때가 있는데, 그때 들어서 왜 뮤지컬을 하고 싶어 하는지는 알고 있다. 군대를 최대한 일찍 다녀온 뒤 대학로 연극판에 들어갔는데 배우로 데뷔시켜준다고 해서 소속사에 들어갔단다. 갑자기 어느 날부터인가 춤이랑 노래도 같이 연습시키더니 아이돌로 내보내 버렸다고. 그래서 영화나 드라마보다도 연극과 비슷한 뮤지컬이 좋단다.

그런데 헤닝과는 직업도 같은 배우이니 이해가 잘 되어야 하는 거 아닐까. 내 물음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길어지기 전 정지운의 대답이 그 끈을 툭 잘라버렸다.

“이게 제일 화려했어.”

“아.”

“이게 혼자 끌고 나가는 것 중에 가장 화려해.”

“아하…… 그래, 그러셨구나.”

숭고한 이유까지 있을 필요는 없지만, 너무하지 않냐. 나는 들고 있던 뮤지컬 넘버를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설마 싶지만 이 사람 혹시.

“살면서 힘들었던 적 있어?”

“많지. 블래스트 활동 시작하면 새벽부터 새벽까지 날 돌려대는데.”

“그거 말고. 절망이나, 상황이 너무 불리했던 순간 같은 거. 연극판 처음 들어왔을 때 힘들거나 그런 거 말이야.”

“그런 거?”

“절망. 막막함. 이런 종류.”

내 말에 맞은편에 앉아있던 정지운의 눈동자가 아래로 한 번 굴렀다. 고개를 살살 젓는 대로 머릿결이 흔들린다.

“없는데.”

“이전에 연애하다가 실패한 적이라도 없어?”

“연애?”

이 질문에는 아주 당당하게 고개를 저었다.

“없는데.”

“그래. 거참 좋겠다.”

내가 비꼬는지도 모르고 이야기를 계속한다.

“상황이 이렇게 안 좋은데 왜 여기서 런던 거리를 기쁘게 휘저으면서 노래하는 거지.”

“상황이 안 좋으니까 희망을 가지는 거잖아.”

“그러니까 그게 이해가 안 돼. 헤닝 역을 맡은 배우는 많았어. 그리고 이 뮤지컬은 헤닝이 끌고 나가기 때문에 배우 스타일에 따라 극이 갈려. 영국에서 처음 헤닝을 맡았던 배우는 시종일관 밝았어. 앞부분인 동독에서의 삶을 연기할 때도, 런던에서 작은 배역을 맡으며 다락방에 숨어 지낼 때도. 마지막에 작은 뮤지컬에서 드디어 처음으로 주연을 맡아 노래할 때도. 마지막은 이해된다고 해도 앞부분은 뭐가 그렇게 신난 거야. 그리고 한국에서 헤닝을 맡았던 배우는 약간 신경질적이었지. 동독에서의 삶을 진절머리 내서 도망치고, 그리고 이 부분에서는 희망에 들뜨고, 마지막 노래에서는 불안감에 흔들려. 드디어 맡게 된 뮤지컬 주연의 압박감을 못 이겨서. 그런데 배우들이 다 제멋대로 연기해도 이 부분만큼은 같아. 런던에서 자기가 보지도 못하는 뮤지컬을 엿듣고 다니는 걸 왜 행복하게 표현해?”

나는 정지운이 길게 늘어놓는 이야기를 들으며 음료를 쪽쪽 빨았다. 여기 과일 주스 정말 너무한다. 과일 맛은 거의 안 나고 설탕물만 들이부었네. 사람이 괜히 없는 게 아니었어. 이런 실없는 생각을 하며 들려오는 말들을 흘려들은 거다. 아무래도 정지운 씨는 작품에 대한 이해와 깊이 있는 연기를 하시려면 삶을 좀 더 다이나믹하게 사셔야겠는데.

“요즘 소소하게라도 어려운 거 없어?”

“소소하게? 아, 하나 있지.”

거슬리는 게 정말 있긴 한지 손에 쥐고 있던 종이를 테이블에 휙 던지듯 내려놓고 키위 주스를 든다. 아, 그거 맛없을 텐데.

아니나 다를까 입을 대고 한 번 빨자마자 바로 내려두고 짜증냈다.

“다음에는 다른 데 가.”

“응.”

“그거 먹지 마.”

“아까워.”

집요하게 빼앗으려는 손을 피해 키위 주스를 들고 다시 한 모금 마셨다. 커피도 한 잔 있지만, 아까 맛본 결과 커피는 아예 못 먹을 맛이라는 결론이 나왔기 때문이다.

“내가 어릴 때 우리 집이 망했었거든?”

“뭐?”

“중학교 때. 아버지께서 뭘 잘못하셨었는데, 잘 몰라. 어쨌든 그랬어. 학교 급식비 내는 걸 고민할 정도였단 말이야.”

“응.”

“그래서 집에 있기 싫어서 항상 엄마에게서 버스비를 받아서 도서관에 갔었어. 도서관까지 여덟 정거장이었는데 매일 걸어 다녔어. 버스비도 안 모아두면 쓸 수 있는 게 없었거든.”

“…….”

“도서관 가는 내 기분이 어땠을 거 같아?”

“글쎄.”

정지운은 그걸 제 입으로 말하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지만, 시선만은 피하지 않은 채 내 이야기를 들었다. 가끔 이런 이야기를 하면 상대방이 더 불편해해서 말할 수가 없는데 역시 이 인간은 적당한 정도만 불편해한다. 내가 저런 놈의 공감 능력을 길러주기 위해 이런 이야기까지 해야 하다니. 세상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네.

“좋았어.”

“좋았다고?”

“응. 좋지. 집안, 학교, 미래에 대한 생각 다 막막한데 그나마 내가 좋아하는 책을 보러 가는 길이었으니까.”

“생각나지 않아?”

“무슨 생각?”

내 반문에 정지운은 흔치 않게 주저했다.

“안 좋은 일.”

“잊으려고 하지. 좋은 것만 생각하고. 그때 집에서부터 도서관까지 여덟 정거장이 굉장히 멀었던 걸로 기억하거든. 지금 걸어가라면 절대 안 걸어갈 거리야. 그래도 그 순간 좋은 것에 집중해야 해. 그렇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어.”

“…….”

“아마 헤닝도 그랬던 거 아닐까. 상황은 여전히 절망스럽지만 이 순간 하나 나아진 게 있지. 새로운 뮤지컬 넘버를 외웠다는 사실. 그거 하나에 집중하고 런던 거리를 자기 무대로 삼은 걸 거야. 자기 행복을 위해서.”

“…….”

“정지운 씨. 내 해석이 그렇다는 거니까 이제 그만 진지해도 돼. 헤닝만 이해하면 되거든?”

“응. 그래.”

그렇기는 무슨. 정지운의 복잡해진 표정은 세상의 온갖 고뇌를 얹어놓은 듯 심오해져 있다. 그 뒤는 영 재미가 없었다. 다른 뮤지컬 넘버를 더 읽어보려 했지만, 정지운은 자꾸 어딘가에 정신이 팔린 듯 입 모양만 따라 읽는 게 보였다. 그냥 포기하고 의자에 구겨져 앉아있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지운은 다시 모자와 선글라스까지 꼭꼭 챙겨 자기 얼굴을 가렸다. 더운 여름이 저렇게 돌아다녀야 한다니. 쯧쯧.

내 자취방 앞까지 걸어왔을 때였다. 그냥 안으로 들어갈까 하다가 택시 타는 곳까지는 데려다줄까 싶어 뒤를 돌았다. 막 내가 입을 열려던 순간이었다. 갑자기 정지운의 손이 불쑥 내 정수리 위로 얹혀졌다. 순간 때리려나 싶어 눈을 움찔거렸다가 떴다. 다행히 때리는 건 아니고, 그냥 손을 내 정수리 위에 올려놓고 가만히 서 있었다. 나는 꼭꼭 숨겨진 정지운의 얼굴을 볼 수 없어서 무슨 의미인지 가늠하지 못했다. 뭐야, 이거.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그대로 서 있는데 손아귀가 부드럽게 내 머리를 한 번 쓸고는 내려갔다. 마스크 너머로 답답한 목소리가 들렸다.

“지금은 괜찮아?”

“뭐?”

“아까 그거.”

“아까 그거? 괜찮아. 지났어. 왜 이래.”

갑자기 왜 이렇게 공감 능력 넘치는 사람이 된 건지 설명해주면 좋겠다. 내 속마음을 읽은 듯 정지운은 휙 몸을 돌려 걸음을 빨리해 가버렸다. 택시 타는 곳까지 데려다줄까 했던 생각은 조금 전의 어색함으로 인해 싹 지워진 상태다. 그저 뒤에서 손을 흔들며 할 말만 했다.

“그리고 나 다음 주는 토익 볼 거라 안 돼.”

“끝나고 와.”

“피곤해.”

“우리 집 올래?”

“뭐?”

“편하게 대본 보자.”

인사하느라 허공에 들려 있는 내 손끝이 흔들렸다. 토익 시험을 보고 오는 날은 장난 아니게 피곤하다. 벼락치기를 위해 밤을 새우니까. 하지만 저 집도 궁금하기는 하다.

예전에 정지운이 사는 집이 티브이에 나왔던 거 같은데. 숙소 생활 정리하고 어디 산다고 했더라? 어쨌든 집 안에 복도와 드레스룸 같은 게 있는 것은 확실했지. 일단 받아들여 놓고 거절해야지 싶어서 고개를 끄덕했다.

그렇게 정지운은 택시를 타고 사라졌고 나는 건물 현관을 넘어 계단을 올랐다. 2층의 내 자취방으로. 비밀번호를 누르고 방 안에 들어와서도 신발을 벗지 않은 채 우두커니 서 있었다. 아까 손길이 스쳤던 머리카락을 괜히 만지작거리면서 말이다. 이게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다.

∞ ∞ ∞

토익 시험장의 종이 12시 7분에 울렸다. 그와 동시에 나는 연필을 던졌다. 더 이상 못 하겠다. 두뇌가 더는 움직이질 않아. 뒤에서부터 걷어지는 답안지에 미련은 없다. 그저 빨리 나가고 싶을 뿐.

입실하며 제출했던 휴대폰을 도로 찾은 사람들이 우르르 교실을 빠져나간다. 나 역시 빨리 나가고 싶지만 현관 앞에 사람이 꽉 막혀 있을 것을 알아서 앉아있는 중이었다. 하루 이틀 온 시험장이 아니다. 그동안 점수 하나 똑바로 못 받은 나는 뭘까.

모두 나가고 가장 마지막에 휴대폰을 받아 들고 나와 화장실로 들어갔다. 세수하고 고개를 들어보자 얼굴이 찬물 때문에 하얗게 질려 있다. 얼굴이 핼쑥해 보이는 것 같기도 하고. 밤을 새우고 잠깐이라도 자면 못 일어날까 봐 그대로 왔더니 이렇다. 학교 현관을 나가는데 그사이 정지운은 열심히도 연락을 해뒀다.

[끝났지?]

[출발해?]

나 오늘 가서 꼭 물어볼 거다. 정지운 씨 친구 몇 명 있냐고 말이다. 우리가 주말마다 본 지도 두 달이 되어가는데 아무도 주말 약속이 이렇게 고정적인 것에 대해 불평을 말하지 않는 걸까.

그사이 여름방학은 끝났고 나는 개강을 앞두고 있다. 수연이도 영한이도 요즘 내게 왜 이리 바쁘냐고 한다. 집에 있는 엄마까지도 그렇다. 누구 만나는 사람이라도 있냐고. 이제 조금만 더 친해지면 애들에게 나의 새로운 친구를 소개해도 될 것 같다. 여기 봐. 정지운 씨라고 내 새로운 친구야. 너희가 아는 그 사람 맞아.

맥없는 생각을 하며 학교 정문에 다다르자마자 손을 들어 택시를 잡아탔다. 정지운이 알려준 주소는 시험장에서 멀지 않았다. 그게 내가 이 약속을 결국 가게 된 이유 중 하나다. 피곤하다 하고 가지 말까 하는 생각이 아침에도 몇 번이나 들었지만 꾹 참고 미뤘다. 대본 보는 건 오늘이 마지막일 거라고 했으니 마지막까지 잘 마무리하는 게 좋겠다 싶다. 여름 방학 내내 참 많이도 봤다. 다음 학기 예술 관련된 강의라도 하나 들으면 좋겠다. 나 학점 잘 받을 자신 있는데.

택시기사 아저씨는 내게 어디서 내리겠냐고 물으셨고 나는 아파트의 정문을 말했다. 아파트는 금색으로 칠해져 있고 정문은 뭔지 모를 돌로 크게 아치형 입구를 만들어뒀다. 택시는 그 입구 바로 앞에 나를 내려줬다. 문을 열고 택시 밖으로 몸을 빼자 입구의 기둥에 기대서 있는 키 큰 남자가 보였다. 얇은 청바지를 입고 파란색의 스트라이프 티셔츠를 걸친 채 날렵하게 생긴 선글라스를 꼈다. 눈매는 보이지 않아도 선글라스를 걸친 콧대의 높이와 턱선의 조화만 봐도 어느 정도 생김새인지 가늠할 수 있었다. 흐느적거리며 그 앞으로 걸어가자 정지운이 습관대로 선글라스를 약간 내려쓰며 나를 봤다. 손바닥을 내 이마에 댔다.

“아파?”

“아니. 피곤하다니까.”

“이 정도일 줄 몰랐네.”

혹시 다음에 보자고 하면 가만 안 둘 거다. 여기까지 오기 전에 말을 했어야지. 하지만 내 기대 같은 말은 나오지 않았다.

“올라가서 일단 쉬어.”

“그래. 몇 층이야?”

“24층.”

“우와.”

올라가면 서울을 내려다볼 수 있을까? 약간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입구를 지나 아파트 단지 안을 걸었다. 짧은 길을 걸어 도착한 아파트 1층은 호텔 로비처럼 생겼다. 검은 양복을 입은 사람 몇이 돌아다니고 벽에는 큰 그림이 걸려 있다. 저 소파 옆 협탁 위의 화병이 생화를 담고 있을 거라고 나는 확신했다.

이제 보니 내가 못 들어올까 봐 데리러 나왔나 보다. 아파트 단지를 들어오면서 한 번 카드 찍고, 지금 아파트 안으로 들어오면서 한 번 더 찍고 엘리베이터를 타기 전 통로에서 또 찍는다.

24층까지 단숨에 올라간 엘리베이터의 문이 갈라지자 한 층에는 두 개의 문이 양옆에 있다. 그중 오른쪽 문의 비밀번호를 누르고 문을 연다. 신발장 너머로 아이보리색 대리석이 깔린 복도가 눈에 들어왔다. 신발을 벗고 그 위에 조심스럽게 발을 올리고 뒤따라 들어가며 정지운의 등에 대고 물었다.

“혹시 가족이랑 사는 건 아니지?”

“그럼 안 데려오지.”

물론 그럴 것 같은데 복도의 길이를 보니 혼자 사는 집이 왜 이렇게 큰지 나는 모르겠기에 한번 물어봤다. 복도를 걸어 끝에 다다르자 왼쪽에는 방문 몇 개가 보이고 오른쪽은 탁 트인 거실이 나왔다. 거실의 한쪽 벽은 유리로 되어 햇볕이 가득 들어오고 있었다.

이 넓은 거실 안에 있는 건 오직 거대한 벽걸이 티브이와 기다란 흰색 소파뿐이다. 엄청난 공간 낭비에 질려 걸음을 유리 벽 앞으로 가져갔다. 창 아래로 작아진 도로 위를 지나다니는 차들이 조그맣게 보였다. 낮은 건물 사이사이의 길도. 저 멀리 서울 너머인 것 같은 산을 보고 있는데 정지운의 몸이 등 뒤에 가까이 다가왔다. 시원하게 식혀진 집 안 온도에서는 따끈하게 느껴진다.

“뭐 봐?”

“스모그.”

“어휴, 됐다.”

발소리가 저 너머 주방으로 멀어지는 동안 나는 유리 벽 너머를 멍하게 바라봤다. 나도 내일부터 마스크를 쓰고 다닐까. 서울의 공기는 생각보다 안 좋아 보인다.

가방을 바닥에 내려두고 소파에 털썩 앉았다. 이게 어떤 가죽이고 안에 무엇을 넣었는지 모르겠지만, 앉는 순간 내 몸은 녹아내렸다. 어, 이거 뭐지. 늪 같아. 완전히 늘어져 있는데 정지운이 양손에 유리잔을 들고 왔다. 오렌지 주스다.

냉큼 받아 마시자 달달한 상큼함이 입안에 확 퍼졌다. 맛있네. 멈추지 않고 꿀꺽꿀꺽 먹고 나서야 아까워졌다. 그런 내 꼴을 물끄러미 보다가 정지운은 자기 몫으로 들고 있던 오렌지 주스와 내 빈 컵을 바꿔줬다. 사양하지 않고 받아 들었다. 냉장고 안에 이런 게 많을 테니까 내가 더 먹어도 될 거다.

이번에는 절반 정도 남겨놓고 소파 앞 투명한 테이블에 내려뒀다. 그 옆에는 지난번에 정지운이 가져간 내 프린트물들이 이미 자리 잡고 있다. 그 이외에는 집이 휑하다. 물론 좋은 집이고 여백의 미라는 것이 있을 수도 있지만, 내 눈에는 그렇다. 따뜻한 색의 대리석이 바닥과 벽을 이루고 있고, 어두운 곳은 없지만 있는 게 별로 없다. 그 흔한 카펫이나 커튼도 없고.

“정지운 씨. 곧 이사 가?”

“아니. 왜.”

“있는 게 없어서.”

“들일 만한 게 없어. 딱히 필요한 것도 없고.”

“그래? 나라면 많을 텐데.”

“어떤 거.”

막상 그렇게 물어보니 또 모르겠네. 테이블에 올려진 프린트물을 들고 만지작거리는데 정지운의 손이 제지했다. 쉬다가 이따 보라며. 그래서 나는 사양 않고 그것들을 내려두고 등받이에 몸을 눕혔다. 몸이 편안하고 마실 것도 마셔서인지 졸음이 쏟아진다. 내가 이럴 줄 알았지. 눈을 부비다가 결국 포기하고 항복을 선언했다.

“나 미안한데 잠깐만 잘게.”

“자기 전에 뭐 들였으면 좋겠는지만 말해봐.”

“글쎄…… 카페트랑, 쿠션도 없네. 그리고.”

그리고 그 뒤는 잘 모르겠다. 입을 다무는 것보다 눈이 감기는 게 빨랐다. 내 몸이 왼쪽으로 기울고 정지운의 딱딱한 몸인 것을 알면서도 온기에 기대 잠들었다.

그렇게 얼마나 졸았는지 알 수 없었다.

눈을 감고 있는데도 앞이 환하다. 몸은 따뜻하고. 일어나기 싫은 마음에 가만히 있다가 기대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떠올라 눈을 조금 떠 봤다. 넓은 거실엔 오후의 붉은빛이 가득 들어왔다.

정지운은 제게 기댄 나를 소파에 눕히기라도 할 것이지, 그대로 앉아 팔로 나를 감싸 안아 고정시켜놨다. 다른 손으로는 대본을 들어 넘겨보는 중이다.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이마의 머리카락이 살랑 움직였다. 자세가 불편해 보이는데도 용케 읽고 있다. 내가 저거 도와주기로 하고 왔었지. 앓는 신음과 함께 몸을 움직이자 어깨 근처의 손이 도닥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오랫동안 말하지 않은 목이 뻑뻑했다. 이마 근처에 정지운의 숨결이 느껴졌다.

“더 자.”

“아니. 같이 보기로 했잖아.”

말은 이렇게 했지만 자세는 아까와 하나도 달라지지 않았다.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싫다. 기대 있는 몸이라도 일으켜야지. 허리에 힘을 주고 일어나려는데 어깨가 휙 당겨져 소파 등받이로 넘어갔다. 그런 내 위로 정지운의 얼굴이 가까이 왔다. 결 좋은 피부는 가까이서 봐도 좋네.

“재현아.”

“응?”

“원래 연기 연습 맞춰달라고 했잖아.”

“어.”

“지금 하자.”

“어떤 거.”

정지운의 얼굴이 더 가까이 내려왔다. 이제는 눈동자의 홍채 색까지 보일 정도다. 몸을 일으켜야 한다는 걸 아는데 이상하게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잠이 덜 깨서 그런가. 상체가 눌려서 그런가. 모든 의미가 불확실하고 이해되지 않았다. 살짝 벌어진 입술이 마지막으로 말했다.

“키스신.”

닿아서는 안 될 것이 내 입술에 닿았다. 들어와서는 안 될 것도 내 입안으로 들어왔다. 혀에 닿는다. 목 뒤에 단단한 팔이 나를 받치고 온몸이 내리눌렸다. 그렇게 정지운과 키스했다.

모든 감각을 이해하는 데에는 시간이 걸렸다. 눈부시고, 정지운의 콧대가 자꾸 내 코에 부딪혔다. 거슬리는지 아예 각도를 틀어 입술을 누르자 볼에 숨결이 닿았다. 놀랐다. 씨발, 너무 놀라서 움직이지도 못했다. 벌려진 입안에는 느릿느릿 혀가 파고들고. 무게에 눌린 상체가 점점 밀려나는데 뒷목은 붙잡혀서 움직이질 않는다. 그래서 계속 키스했다. 정지운과. 그러니까 정지운과… 키스하고 있……. 잠깐. 비켜봐야…….

뒤늦게 정신이 들고 몸을 버둥거리자 내 혀와 엉켜 있던 무언가가 물러났다. 너무 놀라니 코로 숨 쉬는 법을 잊었다. 입술과 입술 사이에 틈이 생기자 나는 그 사이로 겨우 공기를 들이마셨다. 다시금 숨결이 섞인다. 기절할 것 같은 나와 달리 이 미친놈은 내 아랫입술을 아프게 깨물고 물러났다. 통각이 느껴지고 나서야 나는 온몸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밀어내려 정지운의 가슴팍을 밀었는데 꿈쩍도 안 한다. 늦어도 너무 늦은 비명이 목 밖으로 나왔다.

“으아악! 미쳤어?”

“키스신 연습.”

“무슨 개소리야! 저리 비켜.”

뒤늦은 당황으로 얼굴이 달아오른다. 붉어진 얼굴을 내려다보던 시선이 입술로 내려가 턱선 아래까지 떨어졌다. 그리고는 천천히 물러나 내 옆에 다시 앉았다. 아직 닿아있는 어깨를 멀찍이 떨어트린 채 노려보다가 입술을 슥슥 닦았다. 입술만의 문제가 아니라 입안까지…… 아. 그만 생각하자. 방금까지 문질러지던 혀의 돌기가 소름 돋도록 선명…… 아냐. 그만! 그만 생각할 거야.

내가 이렇게 혼란스러워하는 와중에도 이놈은 눈만 깜빡이며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다. 다리를 꼬고 앉은 모양새에는 여유마저 넘쳐흘렀다.

“그냥 키스신 연습인데 왜 그래.”

“뭐가 그냥이야. 하지 마, 알았어?”

자꾸 작은 일로 몰고 가려는 게 짜증나서 버럭 성질을 냈다. 아니 사람을 잡아다가 입에다가, 어? 그런 짓을 하고도 지금 아무렇지 않아? 연습이라고 하기도 이상한 게, 너무 많이 했잖아!

흥분한 내 숨소리와 정지운의 담담한 시선이 엇갈렸다. 그래도 이 순간 사과하면 이해해줄 생각은 있었다. 연예인들은 이런 거 별거 아닐 수도 있잖아. 뮤비 찍을 때 키스신 해봤을 수도 있고. 합리화를 위한 노력이 머릿속에서 뚝 끊긴 건 웃고 있던 정지운이 담담하게 내뱉은 말 때문이었다.

“안 넘어가네.”

“뭐?”

“그냥 넘겨보려고 했는데 안 되겠다.”

“정지운 씨. 빨리 사과해. 사과하면 다음 주쯤 잊어줄게.”

“아니야. 사과 안 할 테니까 좀 더 고민하고 다음 달에 알려줘.”

“대체 뭘?”

눈매를 살살 접으며 미소 짓던 정지운은 벼락같은 소리를 했다.

“나랑 만날지 말지.”

“뭐어어어?”

너무 놀란 심장이 바닥에 툭 떨어지는 줄 알았다. 왜? 왜왜?

내가 얼마나 착하고 선량한 사람이냐면 말이다. 이런 말을 듣고도 상황을 돌이켜보겠다고 발버둥 친 점이 그렇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어색한 표정이 되어 손짓 발짓까지 모조리 동원했다.

“그러니까 말이야. 이미 만나고 있는데 만날지 말지를 왜 정해?”

“그 뜻이 아니라 키스하고 섹스하고…,”

“아아악! 그만! 왜 그래?”

내 귀! 지금 뭘 들은 거야! 몰라! 다 망했어! 머리를 쥐어뜯으며 절망했다. 요즘 우리 괜찮았었잖아. 뮤지컬 작품 이야기하다가 자기 이야기 하면서 나름 친해지기도 했고. 그런데 왜 저런 결론이 나온 거지. 여기가 무슨 토익 학원 스터디야? 공부는 안 하고 연애하는? 그 순간 설마 싶어 떨리는 손으로 테이블 위의 뮤지컬 자료를 들고 나를 보고 있는 남자의 눈앞에 흔들었다.

“정지운 씨, 설마 이거 관심도 없는데 보고 있었던 거야? 그, 나…, 나한테…….”

“너한테 작업 걸려고 본 거냐고? 시작은 그랬는데 이야기하는 동안 좋았어.”

“그래. 우리 요즘 좋았잖아. 그런데 나한테 그…, 그걸 왜 해.”

억울함마저 담고 있는 내 외침에 정지운은 입술을 우물거리다 말했다.

“좋았지. 그런데 잘해줘도 모르는데 어떻게 하냐. 일단 질러야지.”

“뭘 몰라?”

“내가 작업 거는 거.”

“누가 그렇게 생각해! 그리고 그렇다고 자고 일어나는 사람한테 이래?”

“싫어하지도 않았으면서 그런다.”

“잠이 덜 깨서 그랬다, 이 미친놈아.”

이제는 될 대로 되라는 마음이었다. 이게 뭐야. 남자끼리 자주 보고 밥 사준다고 누가 그런 쪽으로 생각이 튀어. 그냥 좋은 친구가 되고 잘 지낼 수 있겠다 생각하지. 내 말에 선뜻 말을 이어가지 못하는 정지운의 얼굴에는 훤한 햇살이 비친다. 그 순간 눈을 살짝 내리까는 표정에 그늘이 져 보였다. 그럴 리가 없는데도 말이다. 심장이 덜컹했다.

그냥 좀 넘어오면 안 되나 하고 중얼거리는 것만 못 들었어도 괜찮았을 텐데. 충격을 너무 많이 받았어. 더 이상은 오늘의 수용 범위가 아니야. 나는 더듬더듬 테이블을 짚고 일어서 걸음을 옮겼다. 내가 뻣뻣하게 움직이는 모양새를 물끄러미 보며 자세를 옮기길래 짜증스럽게 말했다.

“화장실 간다. 나 진정 좀 하게.”

“응. 저쪽.”

손가락이 가리키는 문을 향해 걸음을 빠르게 했다. 짚어주지 않았으면 그 옆의 다른 방문을 열 뻔했다. 손에 잡히는 금색의 손잡이를 돌려 열고 하얀 욕실 타일 바닥을 바로 디뎠다. 쾅 닫히는 욕실 문소리를 무시하며 비틀비틀 걸어가 떨리는 손으로 세면대 수도꼭지의 물을 틀었다. 쏴아아 하는 물소리가 욕실을 가득 메우고 그제야 나는 숨을 몰아쉬었다.

방금 이게 뭐야. 진짜야? 욕실 거울에 비치는 내 얼굴을 손바닥으로 툭툭 때리다가 이마를 가리는 검은 머리카락을 쭉쭉 잡아당겼다. 멀쩡하게 생긴 남자 한 명이 멍한 표정으로 나를 본다. 정신 차려, 윤재현. 그러니까 정신을 차려서.

아, 몰라. 일단 집에 가자.

포기는 빨랐다. 집에 갈래. 얼굴이 얼얼해질 정도의 찬물로 세수를 거듭하다가 턱 밑으로 뚝뚝 흐르는 물을 손등으로 훔쳤다. 아무것도 모르겠으니 집에 가련다. 젖은 얼굴을 걸려 있던 수건에 대충 문질러 닦고 숨쉬기 운동을 하다가 밖으로 나왔다. 정지운의 길쭉한 몸이 아까 내가 마지막으로 본 자세 그대로 앉아있다. 쭈뼛쭈뼛 그 옆을 지나쳐 바닥에 내려뒀던 가방을 들어 올렸다. 가방을 등에 메고는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한 채 말했다.

“나 갈게.”

“알았어. 나가자.”

나 혼자 가겠다고 강력하게 주장하려다가 나가는 데도 혹시 비밀번호 같은 게 필요할까 무서워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나는 뒤도 보지 않은 채 앞장서서 현관 쪽으로 향했다. 뒤를 따라오는 조용한 발소리를 들으면서도 무슨 말을 할 용기가 안 났다. 벗어둔 신발에 다시 발을 끼워 넣고 현관 여는 법을 몰라 쳐다보고만 있으려니 뒤에서 정지운의 팔이 불쑥 나와 문을 열어줬다. 그냥 문고리를 아래로 내려 열기만 하면 되는 거라 창피하더라.

엘리베이터는 하필 1층에 있었고 올라오는 동안 적막이 흘렀다. 엘리베이터에서 나란히 타서도 그랬고, 내려서 아파트 1층의 홀을 걸어가는 때에도 그랬다. 어디까지 따라올지 몰라 걸음을 멈추고 정지운을 돌아봤다. 그리고 재빠르게 말했다.

“나 이제 갈게. 들어가.”

“그래. 다시 연락해.”

“응.”

언제 연락할지 모르겠지만, 일단은 알겠다고 했다. 정지운은 별 미련 없이 몸을 돌려 안으로 들어갔다. 천천히 걸어가는 뒷모습을 보다가 나도 걸음을 밖으로 옮겼다. 생각해보자. 내가 앞으로 어떻게 할지. 아니, 어떻게 하기는 뭘 어째. 당분간 안 보든가 해야지.

과거 고백받았던 때를 되짚어봤다. 물론 다 여자였지 남자였던 적은 없다. 거절하면 사이가 더할 나위 없이 이상해지던 것이 보통이었다. 어색하게 거절하든, 앞으로 변함없이 지내자며 웃으며 대답하든 항상 그랬다. 앞으로 정지운과도 그렇게 되는 걸까.

이 관계를 뚝 끊는 것은 같은 학교에 다니는 여자애들과 관계를 끊는 것보다 쉬울 거다. 애초에 접점이 없던 사이였다. 지금껏 관계가 이어져 온 게 이상했던. 같이하는 것도 없고 사는 곳도 다르다. 생각보다 말은 잘 통했고 같이 있으면 재밌긴 했지만…….

괜히 이상한 기분이 들어 고개를 흔들었다. 정신 차리자. 말려들지 말고. 대중교통을 이용하기에는 마음이 너무나 심란했기에 다시 택시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8월 말의 더위는 잠시도 걷고 싶지 않은 더위다. 은색의 택시 안에 몸을 실은 채 멍청하게 자취방으로 향했다.

자취방 앞에 도착하고서 가방 안에서 머니 클립을 꺼냈다. 현금 만 원짜리를 한 장 드리고 택시에서 내렸는데 무언가 이상한 점이 느껴졌다. 유리문 앞에 서서 설마 하는 마음에 머니 클립을 천천히 열어봤다. 현금의 금액은 다를 게 없다. 만 원짜리 한 장, 천 원짜리 두 개.

그리고 카드가…… 이상한데……?

맨 아래 칸에 꽂혀 있는 보라색 카드를 손가락으로 집어 꺼냈다. 진짜 모르는 카드가 들어있다. 이게 내 지갑이 아닌가? 다시 뒤집어본 표면은 갈색 가죽의 밋밋한 디자인인 내 머니 클립이 맞다. 이 카드 뭐야. 그 위의 카드를 하나 더 꺼내 봤는데 이것도 모르는 카드다. 그리고 맨 위에 내 학생증 어디 갔어.

나는 진짜 당황했다. 모르는 사이에 소매치기라도 당한 건가? 소매치기가 카드를 바꿔 넣기도 해? 알록달록한 내 체크카드 다 어디 간 거지? 얼빠진 채로 카드에 찍힌 이름을 더듬더듬 읽었다. Jeong Jiun. 부족한 내 영어 실력으로도 읽을 수 있을 만큼 쉬운 이름이 아닌가. 믿을 수가 없어서 멍청하게 서 있다가 등줄기를 타고 열이 머리끝까지 뻗쳐올랐다. 휴대폰을 들어 전화를 걸었다. 당분간 안 보네 마네 하던 건 머릿속에 남아있질 않았다. 신호음이 끊기자마자 골목이 울리도록 버럭 소릴 질렀다.

“이 미친놈아아악! 내가 그래도 형이라서 욕은 안 하려고 했는데! 너 미쳤냐? 니 카드가 왜 여깄어!”

―이제 봤냐? 가기 전에 보고 쫓아올까 봐 걱정했네.

미친놈이 개소리로 짖었다. 답답한 가슴을 주먹으로 치다가 다시 소리쳤다.

“이걸 왜 바꿔놔!”

―너 가고 이제 안 볼까 봐.

헉. 순간 말이 막혔다. 이런 미친. 돌았어. 대체 왜 이래, 나한테. 말려들면 안 돼. 안 된다고. 주문처럼 외우며 재차 목소리를 높였다.

“게다가! 이제 곧 개강인데 학생증도 빼 가? 아니, 카드 가져가면 난 뭐 어쩌라는 거야?”

―그래서 내 카드 넣어놨잖아. 그거 쓰고 있으면 다음에 돌려줄게.

“그게 아니잖아. 그리고 남에 지갑에 손을 대냐?”

―미안해. 다음 주에 만나서 화내.

“다음 주? 당장 와서 카드 바꿔!”

―아니야. 다음 주까지 내 생각 많이 하고.

“왜 마무리 인사같이 말하냐? 나 아직 안 끊을 거거든?”

―삼각김밥 말고 초밥도 사 먹고, 옷도 사 입어. 책도 많이 사. 일요일에 집 앞으로 갈게. 연애 좀 하자?

“야아아아아악!”

디리링. 하는 소리와 함께 전화가 끊겼다. 나는 믿을 수가 없었다. 지가 먼저 끊어? 이런 짓을 해놓고? 다시 통화 버튼을 눌러 전화를 걸었지만, 끊임없는 연결 음만 이어지며 받지를 않았다. 끊고 다시 걸었다. 또다시. 세 번을 씹혔다.

지금 정지운이. 지 카드를 내게 떠넘기고 잠수를 탄 거 맞지? 일요일에 보자고? 그래, 보자. 보고 한 대만 패자. 정지운의 얼굴을 떠올리니 가슴이 거세게 쿵쾅거렸다.

나는 물론 복수를 했다. 착한 아이가 되어 그 카드를 곱게 보관하는 짓 따위는 하지 않고 곧장 편의점으로 달려갔다. 음료수, 화장지, 양말, 육포, 아이스크림, 휴대폰 충전기까지. 필요해 보이는 것마다 집어서 계산했다. 계산대 위에 쌓인 물건을 기계적으로 찍던 아르바이트생이 마지막 금액을 알려줬는데 126,800원이다. 거기에 어떤 할인카드도 제시하지 않은 채 정지운의 카드를 내밀었다. 시원하게 긁혔다.

양손에 비닐봉투를 들고 낑낑거리며 집에 들어갔다. 사 온 물건들을 하나씩 집 안에 정리하자 마음이 든든하다. 도토리를 쟁여둔 다람쥐처럼 말이다. 신용카드 결제 내역이 문자로 갈까? 혹시나 싶어 휴대폰을 계속 신경 썼는데 연락은 안 오더라.

음료수를 꺼내 마시고 그러고도 가라앉지 않은 분노로 방 안을 서성거렸다. 진정되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렸다. 인터넷 서핑도 하고, 뒤늦게 오늘 치른 토익 답을 맞춰보며 절망하던 중 완전한 밤이 됐다. 피시 카톡으로 수연이의 투정을 듣고 있는데 미약한 진동 소리가 들렸다. 번개같이 고개를 돌리니 침대 위에 던져둔 휴대폰이 울리고 있었다.

정지운이다! 단번에 몸을 날려 전화를 받았다.

―재현아.

“정지운 씨 지금 당장 카드랑 학생증 가져오면 용서해줄게.”

―재현아.

“안 가져오면 내일 더 긁는다?”

―윤재현 씨.

“……뭐.”

―편의점에서 사 먹지 말고 다른 거 먹어.

“…….”

대답할 말이 없어서 먼저 전화를 끊어버렸다.

밤새 에어컨을 켜둘 수는 없기에 밤마다 가벼운 열대야에 시달리곤 했다. 오늘 저녁은 그래도 나은 게 열어둔 창밖에서 시원한 바람이 들어온다. 침대에 눕자 발치로 바람이 스친다. 밖에서 가벼운 소음들도 섞여든다. 불편한 정도는 아니었다. 오히려 너무 조용하면 어색하니 이 정도가 딱 좋지.

잠들기 좋은 온도인데도 잠이 오질 않았다. 왜 그러지. 밖에서 들어온 주황색 가로등 불빛이 천장에 그림자와 함께 드리워졌다. 그걸 보다가 목덜미를 손바닥으로 문질렀다. 헐렁한 티셔츠를 입어 걸릴 게 없는데도 자꾸 목덜미가 간질거렸다.

머리끝까지 이불을 덮었다가 답답함에 다시 고개를 내밀었다. 잠이 안 온다. 어젯밤에는 날을 샜고 낮에도 불편한 자세로 잠깐 잠들었던 것뿐인데. 낮에 앉아서 졸았던 걸 생각하다가 그 뒤에 있었던 일까지 생각나 버렸다. 배 위에 올려뒀던 손을 들어 올려 손등으로 입술을 벅벅 닦았다. 입술만의 문제는 아니지만 더 이상은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다.

다른 감각을 생각하자. 아까 양치질했던 거라든가. 양치질, 칫솔, 치약…… 아, 안 돼. 망했어. 너무 충격적인 기억이라 지워지질 않아.

자세를 바꿔 모로 누웠다. 자꾸 머릿속에 정지운의 표정 같은 게 떠오른다. 아까 전화로 들려왔던 목소리도. 충격 요법이라는 건 이렇게나 대단하다.

∞ ∞ ∞

아침에 눈을 뜨고 멍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도서관에 갈까. 아니다. 오늘은 영한이도 안 올 거다. 시험은 어제 끝났고, 이제 개강까지는 한 손에 셀 만큼의 날짜밖에 남지 않았다. 그리고 어느 누구께서 내 학생증을 가져가 주신 덕에 들어갈 때마다 데스크에서 신분을 확인하고 입장해야 하는데 그러고 싶지도 않다. 일으킨 상체를 도로 풀썩 침대 위로 던졌다.

할 일이 없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할 일은 매우 많지만, 하고 싶은 일은 없다. 아. 옷 사야 되는데. 여름옷. 그리고 내 카드 어쩌냐. 머리맡에 손을 뻗어 휴대폰을 얼굴 가까이 끌어 내렸다. 눈 뜨고 처음 켜본 휴대폰에는 오늘도 여전히 수많은 광고가 와 있다. 쓸데없는 단카방의 이야기도 쌓여 있고. 다른 말들은 다 넘기고 정지운에게 온 연락이 없나 봤는데 깨끗하다. 휴우. 어디 갈 데까지 가보자. 나는 마지막 통보 같은 문자를 남겼다.

[카드 진짜 안 주냐? 나 이걸로 오늘도 결제한다]

그리고 답장은 한낮이 다 지나도록 없었다. 그때까지 침대에서 뒹굴거리던 나는 기다릴 만큼 기다렸다는 판단이 서자마자 집 밖으로 뛰쳐나갔다. 대학가 중에서도 큰 번화가다 보니 웬만한 매장은 다 들어와 있다.

그중에서도 스포츠 의류 매장의 유리문을 열고 들어갔다. 고르는 건 재빠르다. 브랜드 로고가 들어간 회색 티셔츠 한 장과 밋밋한 흰색 티셔츠 한 장, 그리고 카키색의 카고 반바지까지. 피팅룸에서 갈아입고 전신거울에 내 모습을 비춰 보았다. 어깨선도 잘 맞고 어디 부족한 점은 없다. 반바지는 무릎 위 적당한 높이까지 잘 가리고 있고.

그런데도 뭔가 어색한 느낌에 뒤로 돌고 앞으로 돌고 거울에 이리저리 몸을 비춰 보았다. 내가 지금껏 살면서 내 생김새에 대해 고민해본 적이 없는데 직업이 연예인인 사람을 잠깐 보고 살았다고 그새 눈이 높아졌다. 내 몸을 보는데 이렇게 눈이 높아져서 뭐에 쓴담. 괜히 옷감에 관심 있는 척 옷을 만지작거리다가 직원의 말에 정신이 돌아왔다.

입고 왔던 옷으로 갈아입고 나왔는데 이번에는 운동화가 눈에 들어왔다. 흰색의 운동화는 메쉬 소재가 신발의 대부분을 둘러 시원해 보인다. 손에 들어봤더니 가볍기도 했다. 만지작거리다가 15만 원에 가까운 가격을 보고 도로 내려뒀다. 옷값만 해도 장난 아닐 텐데 더 긁기는 좀 그렇지 않나. 옆으로 다가와 운동화에 대해 이것저것 자랑하는 점원의 이야기를 듣다가 옷만 계산하고 나왔다.

집으로 돌아가 쇼핑백을 바닥에 내려놓고 서서 휴대폰을 멍하게 바라봤다. 아마 뭘 샀는지 문자가 갔을 텐데, 이제 연락이 오지 않을까.

아. 왔다.

[뭐 샀어?]

[옷 샀다 더 긁기 전에 카드 내놔]

[예쁜 거 샀어? 보여줘]

허. 나는 헛웃음이 나왔다. 우리가 지금 그렇게 다정하게 서로의 쇼핑 목록을 확인해줄 때가 아니지.

[싫은데]

[다음에 볼 때 입고 와]

다음에 만나면 묻고 싶은 게 하나 있기는 하다. 정지운의 머릿속이 얼마나 꽃밭인지 말이다. 왜 내가 보여준 반응은 생각하지 않고 썸 타는 사이인 양 이렇게 간지럽게 구는 것인가. 아는데 외면하는 것일까, 아니면 정말 내가 자기와 연애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는 것일까.

대부분은 전자를 생각하지만 정지운의 보통 이상인 자존감과 자신감을 생각하면 후자에도 가능성이 있다. 이때까지만 해도 당당하게 문자를 보내던 나는 다음 말에서 아주 놀라버리고 말았다.

[너 뮤지컬 언제 또 보러 와?]

이 문장에 문제점이 무려 두 가지나 있다. 하나는 내가 아직 보러 간 적이 없으니 ‘또’라는 단어가 성립하지 않고. 다른 하나는 내가 보러 갈 것이라고 생각하는 저 가정이다. 왜 내가 자기 뮤지컬을 봤다고 생각하지? 기억을 더듬어보니 수연이 만나러 공연장에 갔다가 얼떨결에 마주쳤던 것이 생각났다. 상식적으로 공연장 안에서 누군갈 만나면 그 공연을 봤다고 여기는 게 기본이기는 하지.

어어. 그냥 안 봤다고 대답해버리면 그만인데, 그 말을 만들어내는 손가락이 자꾸만 느려진다. 그냥 눈을 딱 감고 말하는 거야. 나는 너의 뮤지컬을 보지 않았고. 앞으로도 보지 않을 생각이다, 라고!

너는 할 수 있다, 윤재현. 자, 어서 손가락을 움직이자.

액정 위를 신나게 움직이던 손가락이 느려지고야 말았다.

………….

휴우. 못 하겠다.

나 안 봤는데? 라고 쓰여졌던 문자를 지우고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액정에 떠 있는 문자를 원수인 양 노려보았다. 어제부터 생각한 건데 말이다. 이 사태의 가장 큰 문제는 아직 정지운을 좋은 친구로서 남겨두고 싶은 내 마음인 듯하다. 저렇게까지나 대놓고 친구 할 생각이 없다고 외치는 놈을 데리고 말이다. 카톡 창을 나가 수연이에게 연락했다.

[수연아]

[엉]

다행히 수연이의 답장은 빨랐다.

[너 보러다니는 뮤지컬 말이야]

[두남자? 왜?]

[그거 요즘 표 예매할 수 있어?]

[지운오빠 회차? 양도 거의 안올라와 다음 예매때 해봐]

[뒷자리도 상관없는데 없나 스토리만 보고싶어서]

[없엉 지운오빠 티켓파워쩔어 개인활동 처음이라 애들 다달려들어서 난리임]

티켓파워라니. 그래도 예매가 한 번은 남았다니 다행이다. 예의상 한 번 봐주도록 하자. 지금껏 내게 먹인 칼로리가 얼만데. 그동안 얻어먹었던 밥의 의도를 떠올리고는 다시 괴로워졌지만, 재빠르게 마음 구석으로 밀어냈다. 학교에서 애들이 동아리 공연을 해도 가주는 게 예의잖아. 저렇게 큰 공연장에서 뮤지컬을 하는데……. 그래. 한 번만 가서 보고 정지운의 터무니없는 요구는 단념시켜서 친구로 좀 지내보자.

정지운에게 ‘예매 밀려서 못 했어. 다음에 할 거야.’라는 아주 좋은 답변을 보낸 뒤에야 수연이가 보낸 다음 카톡을 보았다.

[다음 예매 막공이라서 제일 박터질거야 그러니까 내가 같이 보쟀잖아ㅋㅋㅋㅋ]

티켓팅에 패배 역사가 없는 정수연마저 이렇게 말하니 불길하기는 하다. 하지만 못 보면 못 보는 거지 어쩌겠는가.

화요일에는 자잘하게 결제해서 문자가 계속 가게 하고 싶지 않았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예능 프로를 틀었다가 시골집에서 하루 세끼를 만들어 먹는 방송을 봤더니 아이디어가 떠오르더라. 그래서 근처 도시락집을 가서 도시락 세끼 분량을 사 왔다. 아침 점심 저녁으로 고기가 왕창 들어간 풍족한 도시락이었다. 매장에서 판매하는 생수나 음료수도 끼워 사고 집에 돌아와 도시락을 까먹으며 하루를 보냈다.

집에 있는 책을 보고 밀린 예능이나 방송을 챙겨 보는데 저녁에 정지운에게서 또 전화가 왔다. 받을까 말까 하다 결국 받고야 말았다. 그래도 카드 주인께서 연락을 하시는데 전화 정도는 받아주지. 꽤 너그러운 마음이 되어 보고 있던 영상의 소리를 줄인 채 누워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너 오늘 뭐 먹었어.

물어보는 목소리가 이상하게 팍팍하다.

“문자 안 갔어?”

―그러니까 어떤 거.

“도시락집.”

―그거 말고.

“한 번에 사 와서 없는데.”

아직 도시락 하나는 까지도 않았다. 좀 더 늦은 밤에 먹을지 내일 아침에 먹을지 고민 중이라 말이다. 휴대폰 건너편의 정지운은 여기까지 들리도록 짧은 한숨을 내쉬고 목소리를 높였다.

―너 시위해?

“뭘?”

―좀 사 먹어. 내가 이렇게 되라고 카드 준 거 아니잖아.

“왜 성질이야. 정지운 씨, 나 원래 이렇게 먹고 살아.”

―…….

이번에는 건너편에서 말이 없다. 나는 자세를 바로 앉은 채 말을 쏟아냈다. 어디서 성질이야.

“나 먹고 싶은 거 잘 먹고 있거든?”

―다른 거 먹고 싶은 것도 없냐?

“어…… 술?”

무심코 내뱉은 말인데 대답하는 목소리는 빨랐다.

―그건 나랑 마실 때까지 기다려.

“싫어. 정지운 씨랑 술 안 마셔.”

한 번 더 같이 마셨다간 내 혈중알코올농도가 걱정될 판이다. 그날 이후로 간이 제대로 동작하지 않는 것 같아서 문제야. 이런 의도를 가지고 한 대답이었건만, 정지운의 그다음 말은 기겁할 만한 것이었다.

―나도 자존심이 있어서 먼저 안기는 거 아니면 안 덮쳐.

“아니야, 그런 거!”

순간 팔뚝에 오소소 돋은 소름을 문지르며 휴대폰을 귓가에서 멀찍이 떨어트렸다. 저 자존감 진짜 누가 좀 눌러줬으면 좋겠네. 왜 아무렇지도 않게 저런 작업 멘트를 해? 건드리기만 해봐라, 진짜. 너랑 나의 다음 만남의 장은 경찰서가 될 거다. 선전포고를 하려 당당히 입을 열려는데 정지운의 목소리가 한발 빨랐다.

―나 이제 무대 올라갈 준비 해야겠다. 끊을게.

“그게 아니라 나…,”

디리링. 하는 소리와 함께 전화가 끊겼다. 이제는 낯설지도 않다, 이 소리. 하하하. 나는 휴대폰을 꽉 쥔 채 기계적으로 영상의 재생 버튼을 눌렸다. 영상이 다시 시작되고 평화로운 시골의 풍경이 화면에 잡힌다. 흔들리는 초록색 풀들. 물안개. 시골집의 마당…… 화난다.

내 기분의 회복을 위해 저 카드로 진짜 술이라도 마셔야 하나 고민하던 찰나 다시 휴대폰이 진동했다. 손안의 휴대폰 액정을 바라보니 엄마다. 목소리를 가다듬고 조심스럽게 통화 버튼을 눌렀다. 잔잔한 어머니의 음성이 내게 말을 걸었다.

―재현아, 바빠?

“아니요. 공부하다가 저녁 먹는 시간이었어요.”

어머니 죄송합니다. 꼭 성공하겠습니다.

―다행이다. 지금 누구 옆에 있니?

“혼자 있어요. 하실 말씀 있으세요?”

―아니. 그냥 목소리 들으려고 그렇지.

아니라고 하는 어머니의 말에도 나는 무슨 할 말이 있음을 느끼고 영상을 도로 껐다. 어머니는 꼭 이러신다. 무언가 할 말이 있으시면 다정한 목소리로 전화를 하고, 주변에 누가 있는지를 물어보신 뒤 천천히 주제를 꺼내신다. 집의 이야기, 평소 어머니께서 다니시는 교회, 그리고 동생 이야기까지. 하나하나 듣던 주제의 끝에 하실 말씀이 나올 기미가 보였다.

―그래서 말인데 재현아. 이번에는 어떨 거 같니?

“어떤 거요?”

반문하면서도 무엇을 묻는 것인지 알았기에 담담하게 다음 말씀을 기다렸다. 조금 전처럼 알 수 없는 일에 정신 팔려 있지 말고 지금 신경 써야 할 것에 대해 말씀하시려는 것이겠지. 차분하게 이어지는 어머니의 말씀을 들으며 나는 천천히 어깨를 폈다.

문제의 일요일까지 시간은 멈추지 않고 흘렀다.

이날이 오기까지 남은 오 일간은 평소와 다를 바 없이 학교 도서관에 출근 도장을 찍었다. 들어갈 때마다 카운터에 말해서 신원을 확인하고 들어가야 했던 탓에 의도치 않게 학교 도서관에서 꼼짝도 못 하는 결과가 나왔다. 한 번 나갔다 올 때마다 번거로워서 말이다. 아주 많이 고맙다, 정말.

간간이 정지운에게서 걸려오는 전화는 그냥 받지 않았고 문자도 무시했다. 어차피 일요일에 오겠다고 마음을 굳힌 놈에게 내가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냐 싶어서 그런 거다.

그리고 오늘 아침에 문자가 왔기에 짧게 답장을 했다. 이따 저녁에 보자고. 그랬더니 알겠다고 저도 짧게 답장을 보냈다. 그사이 혼자 삐친 거 같은데 나는 어떻게 해줄 수가 없다.

오늘은 내 카드와 학생증을 돌려받을 수 있을 것인가. 가벼운 긴장감과 함께 저녁이 되기를 기다리며 내 방 창가 옆에 의자를 끌어다 앉아 밖을 내다봤다. 우리 집 앞으로 오겠다고 하길래 알겠다고 해뒀다. 오면 내려가서 받을 것만 받고 바로 올라와야지.

자취방 창문에서 보이는 길 건너편 담장 안쪽은 학교다. 학교에서 나가는 사람을 열 명 넘게 세고 있는데 골목 앞쪽에 검은색 차 한 대가 주차됐다. 블래스트가 활동할 때 끌고 다니는 벤 대신 가볍게 타고 다니는 카니발이다. 늦게 오지 않은 걸 보니 오늘 공연은 낮에 끝났나 보네.

나는 느릿하니 일어나 지갑을 챙겨서 내려갔다. 건물의 현관을 다 나가기 전에 선글라스를 끼고 들어오는 정지운과 마주쳤다. 나는 아무 말 않고 그를 바라봤다. 정지운도 천천히 유리문을 열고 들어와서는 내 앞에 섰다. 아무런 말 없이 팔짱을 낀다. 눈살을 찌푸리자 선글라스를 벗고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는 나를 내려다보다가 말했다.

“왜 전화 안 받아?”

“어차피 할 말도 없잖아. 카드 바꿔주고 얼른 가.”

막상 선글라스를 벗으니 뚫어져라 보는 눈을 마주하기가 어려웠다. 나는 이미 꺼내 손에 들고 있던 카드를 정지운 앞에 내밀었다. 다시 침묵이 흘렀다. 내 시선은 내가 내민 정지운의 카드들 위에 고정되어있고 정지운은 말이 없었다.

마침내 손이 움직였다. 내 손 위에 뻗어지는 게 아니라 내 볼을 꼬집었지만. 나는 왼쪽 볼이 쭈욱 잡아당겨진 채 강제로 고개가 들려졌다. 에? 입 모양이 이상하게 벌려진 탓에 발음이 샌다. 정지운은 진짜 짜증난다는 듯 눈썹까지 구기며 내 볼을 잡아당겨 흔들었다. 아, 아파…….

“넌 진짜 왜 그러냐?”

“내가 뭘?”

“갑자기 왜 그래. 화요일까지는 괜찮은 거 같더니.”

“장난치지 마. 나 바빠.”

“아, 그러셔?”

정지운의 남은 한 손도 내 오른쪽 볼에 왔다. 양 볼을 쭈욱 늘려 잡아당긴다. 고개를 흔들어 피하려다가 꼬집힌 자리가 아파서 그만뒀다. 놔, 이 미친놈아. 그 와중에도 나는 정지운에게 여전히 카드를 내밀고 있었다. 얘는 내가 뭐 장난치자고 이러는 줄 아네. 나도 인상을 팍 쓰며 말했다.

“자꾸 장난치지 말고 가져가.”

“장난?”

“어. 나 바빠. 할 일도 많고. 그러니까 이런 거 그만하자.”

정지운의 하얀 얼굴에서 웃음기가 천천히 지워졌다. 올라갔던 입꼬리도 제자리로 내려가고. 그제야 표정이 진지해졌다. 이번에는 나도 시선을 돌리지 않고 쳐다봤다. 꽉 다물고 있던 턱에 힘을 풀고 정지운이 내 손바닥 위의 카드를 낚아채듯 쥐었다. 그리고 휙 돌아서 유리문을 열고 나갔다. 멀어지는 등이 순식간에 모퉁이를 꺾어 시야에서 사라졌다.

………….

야, 내 카드는 내놓고 가야지.

급하게 따라 나가려는데 사라졌던 정지운이 도로 모퉁이를 돌아 건물로 다가왔다. 성큼성큼 걸어와 계단을 두 개 오르고, 유리문이 다시 열렸다. 표정이 심상치 않았지만 나는 손을 내밀며 정당하게 내가 받을 것에 대해 말했다.

“내 카드…,”

“그냥 가려니까 성질나서 못 가겠네. 야, 너는 애가 왜 그러냐?”

“나? 나 말이야?”

“왜 이렇게 싸가지가 없어?”

나는 내밀었던 손바닥을 천천히 오므려 주먹을 꾹 쥐었다. 살아오면서 억울한 순간은 많았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보다 억울했던 적이 있던가. 내 카드를 훔쳐 갔던 정지운이 나더러 싸가지가 없단다. 내가요? 어이가 없어 멍하니 정지운이 하는 꼴을 보고 있는데, 이 미친놈은 감히 지가 더 화나 보였다.

“장난치지 말라고? 너 내가 장난으로 보여?”

“그게,”

“똑바로 말해봐. 내가 지금 뭐 하는 걸로 보이는데. 니 말대로 내가 별생각도 없는 애 건드려서 장난치는 거 같아? 너 귀찮으라고 밥 먹이고, 태우고 다니고, 카드 쥐여주고!”

건물 안에 정지운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나는 이 와중에도 누가 나와 이걸 내다볼까 걱정했다. 그런데 정작 걱정해야 할 놈은 지 성질대로 소리를 지르다 막혔는지 머리를 몇 번 쓸어 올리다 헝클어트린다.

미친놈. 미친 새끼. 꽉 쥐었던 주먹을 폈다 쥐었다 하고 나도 목소리를 냈다.

“그래. 그래서.”

“그래서?”

“나 정지운 씨랑 그럴 여유 없어. 나한테 왜 그러는데?”

“내가 뭐, 별거 하자고 했어? 잠깐 만나자는 거잖아.”

“그럴 여유도 없다고!”

내가 병신도 아니고 아예 모른다고 잡아뗄 수는 없는 일이다. 아이돌도 하고, 잘생기고, 잘난 놈이 나에게 대체 왜 그러는 걸까. 어디 더 예쁜 여자애 만나거나 아니면 잘생긴 남자를 만나지. 아니면 하다못해 너랑 연애할 만한 여유라도 있는 애를 만나지. 나한테 왜! 일주일간 응어리진 울분이 터졌다.

“미친놈아. 남자가 갑자기 이러는데 내가 당황을 하겠냐 안 하겠냐!”

“그게 그렇게 중요해?”

“어! 중요해! 엄청나게 중요해! 니가 아무렇지 않다고 나도 그럴 거라고 믿지 마!”

나는 거칠게 나오는 숨소리를 진정하려고 애썼다. 너무 답답해서 가슴도 손바닥으로 눌렀다. 정지운이 보고 있는 동안만큼은 동요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진짜 못 참겠다.

나는 말이다. 정말, 진짜 여유가 없다. 취업도 해야 하고 앞날도 막막해. 뭘 해야 할지도 몰라. 좋아하는 게 뭔지도 잘 모르겠어. 뭘 하려고 이러는 건지도 모르겠고. 이젠 어머니도 걱정하고 있다고.

그런데 내게 진지하게 생각해보라고 한 게 고작 일주일 전이다. 무려 남자인 자기랑 연애를 하자고. 그사이에 내 머릿속이 얼마나 뒤죽박죽으로 엉켰는지 모른다. 신경 쓰이고, 다른 일도 할 수가 없어. 심지어 태도가 가볍기마저 하다. 여기서 내가 뭘 어쩌겠어? 정지운을 잘라내고 내 갈 길을 가는 게 정상적인 사람들의 판단 아니겠냐고.

헐떡이는 숨이 진정되지 않아서 어깨가 들썩였다. 억울하다. 나쁜 놈. 누구는 뭘 몰라서 모른 척을 하겠냐. 모르는 척 안 하면 내가 뭘 어쩔 건데. 배배 꼬인 내 삶에다 너까지 집어넣어서 더 무겁게 만들게?

계속 노려보느라 눈이 다 뻑뻑할 지경이다. 혹시라도 처운다고 오해할까 봐 눈을 비비지도 못했다. 정지운은 이런 내 꼴을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서서 바라보고 있었다. 건물의 현관에는 내 숨소리만 울렸다. 나와 보는 사람조차 없다.

정지운이 내 머리카락 위로 다시 손을 뻗었다. 이번에는 진짜 어디 얻어맞는 줄 알았다. 얘 표정이 워낙 짜증에 가득 차 있어서 말이다. 예상과는 다르게 정수리 위로 손바닥이 올라왔다. 쓰다듬듯 가볍게 머리카락을 헝클어트린 정지운은 천천히 뒷걸음질 치며 내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표정은 온 세상의 상처를 자기 혼자 다 받은 듯 먹먹하다.

“그럼 받아주지나 말지 그랬냐.”

“…….”

“자기도 같이해놓고 나만 나빴다.”

“내가 언제?”

반박하는 말에 날이 섰다. 정지운은 내 말이 상관없는 듯 대꾸도 하지 않았다. 느릿하게 발을 끌며 밖으로 나갔다.

“이런 기분이었구나.”

그렇게 유리문을 열고 사라졌다. 내가 그 자리에서 멍하니 넋을 놓고 서 있는 동안 정지운은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정말로 갔다.

∞ ∞ ∞

“형, 이번 주에…,”

“안준영.”

“응, 형.”

“너 뭔데 자꾸 물어봐.”

“어? 평소에도…….”

“잤으면 어쩔 거고 예쁘면 뭐 어쩔 건데. 너도 하게?”

“아니. 형 그게 아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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