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
2월의 새벽 아침은 단순히 춥다고 말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다른 표현은 없을까 생각해봤는데 고통이라는 단어가 제일 맞는 거 같다. 그래. 이게 맞는 거 같다. 발끝이 얼다 못해 아파오는 찰나에 바람이 세게 불자 머리털 안쪽까지 시린 기운이 끼쳤다. 사람들끼리 한군데 모여 있기는 한데 내가 그 무리의 맨 앞에 서 있어서, 그리고 남들보다 키가 머리 하나는 더 커서 온 바람을 몸으로 맞고 있는 중이다.
그렇다고 내가 대한민국 남자 키의 평균보다 월등히 크다는 건 아니고. 여기 두 줄로 서서 모여 있는 사람들이 다 여자라 그렇다. 아, 진짜 여자밖에 없나? 무서운 생각에 목도리를 둘둘 두른 채 눈만 내놓고 나란히 서 있는 수연이를 팔꿈치로 툭 쳤다.
“오늘 남자는 진짜 나밖에 없어?”
“어. 너 완전 눈에 띈다.”
“집에 갈게.”
“아, 왜 그러실까.”
반쯤 장난으로 몸을 빼려는데 수연이의 팔이 잽싸게 팔짱을 껴 왔다. 썸이 오가는 낭만적인 그런 상황은 아니고 옥죄여오듯 팔을 꽉 끼어오는 거다. 어디 한 걸음도 못 가도록 말이다. 나도 말만 이렇게 하지 여기서 집으로 갈 생각은 없다. 여길 여섯 시까지 오려고 내가 몇 시 버스를 탔더라. 네 시 반이었던가.
서울의 대중교통은 위대했고 나와 정수연은 방송국 앞 여섯 시까지 집결이라는 과제를 훌륭하게 수행해냈다. 그리고 이 공터에는 나와 수연이 같은 사람들로 가득하다. 여기 지금 모인 사람들이 백 명은 족히 넘을 거다. 이 새벽부터 사람들이 온몸에 담요까지 칭칭 두르고 기다리는 이유는 간단하다. 블래스트의 멤버 이민석이 솔로 앨범을 냈고 그 사전 녹화를 위해 이렇게 모여 있는 중이다.
생방송같이 보이는 음악 방송들을 진짜 생방송이라고 믿어서는 안 된다. 이렇게 팬들을 끌어모아 새벽부터 가수별로 스케줄을 잡아 공연 장면을 생방송처럼 녹화하는 것이다. 그리고 본 방송 때는 이 녹화 방송을 틀어주고 가수들은 무대에서 자기 하고 싶은 걸 한다. 물론 이런 사전 녹화도 어느 정도 이름이 있어야 해주는 것이지 신인은 얄짤없이 생방송을 들어가기도 한다.
처음 사전 녹화 시간이 팬카페에 떴을 때 나는 쌍욕을 했고 정수연은 환호성을 질렀다. 이 시간대면 애들이 조금이나마 걸러질 테니 신청이 쉬울 거라나 뭐라나. 그리고 그 말이 맞았는지 선착순으로 댓글을 달아 신청하는 사전 녹화 방청에 덜컥 1등과 2등을 나란히 해버리고야 말았다. 같은 피시방 컴퓨터에 나란히 앉아 클릭해서 그랬던 것이라 추측하고 있다.
바람이 다시 한 번 불어 사람들 사이를 휩쓸고 지나갔다. 여자들의 작은 비명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리고 나는 묵묵히 손을 패딩 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저 소리가 엄살이 아니라는 걸 안다. 나도 목 놓아 소리치고 싶을 지경이니까. 망할 방송국.
우리의 앞에 있는 거대한 방송국은 그 크기만큼이나 안의 공간도 넓다. 저 유리 벽 너머 1층이 이 공터만큼이나 넓은데 애들 좀 들여보내서 기다리게 하면 안 되나. 안 될 걸 알면서도 괜히 속으로 욕을 해봤다. 화장실 가고 싶다고 해도 못 들어가게 하는 놈들이다. 아이돌 쫓아다니는 게 죄지. 수연이는 내 옆에서 아까부터 염불 외우듯 욕을 중얼거리는 중이다.
“짜증나. 얼어 죽겠어. 민석 오빠 사녹 왜 이렇게 아침에 해? 다른 애들처럼 열한 시쯤 하면 좀 좋아?”
“이 시간에 해서 좋다며.”
“좋긴 좋은데. 이런 아침에 왜 우리 오빠가 하냔 말이야.”
그건 민석이 형이 인기라는 파워게임에서 좀 밀린 게 아닐까. 이 말을 했다가는 정강이라도 걷어차일 게 뻔해서 입을 다물었다. 수연이뿐이겠는가. 이 공터의 모든 여자애가 나를 짓밟고 스테이지 앞에 제물로 바쳐버릴 거다. 오늘 나를 포함한 이 모든 사람이 모인 이유. 이민석은 블래스트의 보컬 멤버로서 인기가 좀 애매모호하다. 다섯 명 중 세 번째 인기라는 중간의 애매모호함.
그 애매모호함은 이번 솔로 앨범의 순위에서도 나타나는 중이다. 음원사이트 10위. 앨범 판매량도 몇천 장 정도로 애매해서 영 음방(음악방송) 순위를 올리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매일 밤 스트리밍에 지친 팬들은 독이 바짝 올라 있었다. 스트리밍하는 걸 생각해보니 이 사람들이 이 시간에 늦지 않고 다 줄 서 있을 수 있는 이유를 알겠다. 다들 밤새 스트리밍을 돌리다가 잠들지 않고 그대로 나온 거겠지.
“정수연. 너 몇 시에 잤냐.”
“나 안 잤어.”
“그럴 거 같았다.”
바로 이렇게 말이다. 버스 안에서부터 계속 비벼 벌겋게 된 눈에 또 손을 대려 하길래 내가 잡아 내렸다. 제 나름대로는 나를 노려보려는 듯 돌아봤는데 졸음이 가득해서 영 아니다. 손목을 끌어내려 놔주며 말했다.
“너 눈가 빨개.”
“간지러워.”
“건드리면 더 그럴걸.”
“아, 오빠. 오빠 빨리 보고 싶어. 오빠 보면 다 잊을 텐데!”
“어, 나온다.”
다행히 수연이의 성질이 폭발하기 전 스태프가 문을 열고 나와 우리 앞에 섰다. 이제 들어갈 것이며 사적인 촬영은 절대 금지. 기타 주의사항 등등. 나는 그것을 한 귀로 흘리며 눈을 감았다. 어차피 하루 이틀 들은 게 아니다. 아, 춥다. 빨리 녹화장 문 앞에서 대기시켜줬으면.
길고 긴 당부가 끝나고 드디어 스태프가 자기를 따라 들어오라며 방송국 건물 유리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를 따라 터벅터벅 걸어가려니 수연이가 제 목의 목도리를 풀며 환호성이다. 등 뒤에서도 비슷한 비명들이 계속 터졌다.
“드디어! 오빠! 오빠아아아!”
누가 보면 인생에 한 번 있는 오빠인 줄 알겠지만, 두 번째 모시는 오빠인 것을 나는 알고 있다. 별 감흥도 없이 회전문을 통과해 앞의 나무 계단을 딛고 2층으로 올라갔다. 녹화장 앞에서 또 대기하겠지만 그래도 여기는 좀 나은 편이다. 이제야 나도 얼어붙어 있던 숨을 내쉬며 손을 주머니에서 꺼냈다. 오늘은 특히 더 추위가 혹독하다. 다른 사람들도 손을 풀고 주섬주섬 야광봉이나 플래카드를 꺼내 든다.
2층의 커다란 문 앞에서 우리들은 다시 한 번 서서 대기했다. 살짝 열린 문 너머로 화려한 조명이 꺼졌다 켜졌다를 반복하며 체크 중이다. 이 시간에 나와 일하는 사람들을 생각하니 졸음이 좀 가시는 것 같았다. 멀뚱하니 팔짱 낀 채 눈앞의 문만 응시하고 있는데 지나가던 남자 하나가 나를 보고 걸음을 멈췄다. 아는 척하려는 자세다.
아, 창피한데. 눈을 깜빡이며 시선을 내려 봤지만 대놓고 내 앞에 선 남자는 헛웃음을 지으며 말을 걸었다. 30대 초반의 통통하게 인상 좋지만 애들 사이에서는 두꺼비 닮았다며 놀림을 많이 받는 매니저다. 괜히 그런 소리를 하는 건 아니고 멤버들 퇴근길에 팬들이 줄 서서 기다리고 있는 것도 안 봐줘서 그렇다.
“재현이 너 또 왔냐.”
“안녕하세요.”
“여자 친구랑 왔어?”
“여자 친구 아니에요.”
“그럼 뭔데.”
“같은 취미를 가진 오랜 친구?”
내빼지 말라며 호탕한 웃음을 지어 보인 형은 내 어깨를 툭툭 치고는 녹화장 안으로 들어갔다. 남팬이라는 것이 이렇다. 여자들만 바글바글한 데에 이렇게 한 명 껴 있으면 자꾸 눈에 띄는. 수연이가 내 팔을 툭툭 치며 또 이 소리다.
“아, 쫌. 매니저 오빠들이 친한 척하면 같이 친한 척도 하고! 친해지고 그럼 얼마나 좋겠냐.”
“뭐가 좋아. 나 창피해.”
뒤에서 팬들이 지금 얼마나 제 지인들이랑 수군거리고 있을지 뻔하다. 내가 그나마 남자라 다행이지. 이 무리에서 여자가 이렇게 눈에 띄면 진작 죽어났을 거다.
“친해지면 좋지.”
“도대체 어떤 측면에서?”
내가 질문을 되돌려주자 자기 손가락을 들어 플래카드를 툭툭 쳤다.
“같이 술이라도 먹다 보면 친해지지 않을까?”
“그만하자.”
꿈도 크네. 이런 실없는 소리들이 지나가고 몇 분 뒤 녹화장의 문마저 열렸다. 높게 쌓인 장비들과 맨 뒤의 녹화용 카메라, 우리가 서 있을 스테이지 아래마저도 죄다 어둡다. 그리고 위쪽 무대의 한가운데만이 조명으로 밝게 빛나고 있었다. 아직 시작된 건 아니라 조명은 계속 테스트 중이지만.
뒤에서부터 떠밀려 달리듯이 안으로 들어가 맨 앞의 펜스를 잡았다. 가끔 뒤에서 누가 밀고 들어오는 듯 훅 밀릴 때마다 팔로 버티는데 힘이 장난 아니다. 이젠 더워질 차례네. 다시 눈앞의 무대를 둘러봤다.
아, 역시 난 공연 보는 게 좋다. 나는 공연은 뭐든 좋다. 그것이 엠카운트 다운이건 유희열의 스케치북이건. 콘서트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무대랑 간격이 너무 멀어서 그렇다. 이렇게 가까운 거리가 내 취향에 맞고. 그리고 이 취미를 아는 정수연은 제가 모시는 오빠를 보겠다고 이렇게 질질 끌고 다니는 중이다. 나도 좋긴 하다. 블래스트 화이팅. 올해 꼭 대상 받자.
“야아아, 너무 가까워. 나 죽을 거 같아. 창피해. 화장하고 올걸.”
“화장해도 다를 거 없으니까 괜찮아.”
“아니거든.”
오른쪽에서 수연이가 펜스에 대롱대롱 매달려 말하는 동안 왼쪽 여자애는 이 좁은 틈바구니에서 백팩을 앞으로 돌려 열었다. 그리고 안의 파우치를 꺼내서는 제 얼굴을 미친 듯이 두드리며 확인한다. 항상 봐오던 광경이지만 신기하다. 새우젓 안의 새우가 예뻐 봤자 얼마나 예뻐 보이겠는가. 저 위에서 개개인이 잘 보이기는 할까?
이 말을 한 번 입 밖에 냈다가 정수연이 시들시들해지는 걸 본 이후로 자제하는 중이다. 왼쪽의 여자애가 기어코 제 피부를 다 덮고 입술을 바르는 동안 나는 그 모습과 무대를 번갈아 보며 멍하게 있었다. 빨리 시작했으면 좋겠다. 이거 끝나면 바로 집에 가서 자야지. 들어가는 길에 먹을 거라도 사 들고 갈까.
거의 하품이 나올 때쯤 왼쪽 끄트머리 무대 들어오는 통로 쪽의 여자애들이 자지러진다. 이제 들어오려는 모습이 보였나 보다. 덩달아 비명이 번져 온 사방이 시끄러워져 간다. 나는 언제부터인가 내 손에 들려 있는 야광봉을 흔들며 무대를 올려다봤다.
옅은 갈색으로 염색한 머리카락에 컬을 넣어 분칠한 흰 얼굴을 더 어려 보이도록 만든 남자가 손을 흔들며 환한 얼굴로 걸어 나왔다. 무대의 중앙에 오는 내내 온 녹화장에 MS를 외치는 팬들의 함성이 가득했다. 민석의 약자로써 MS인데 인터넷에 검색하면 그 유명한 인터넷 회사가 자꾸 섞여 나오는 게 팬들의 또 다른 한이다.
형이라고 해봤자 나보다 두 살 많은 그는 무대가 완전히 준비되고 마이크를 연결하는 동안 제 앞의 팬들에게 하나씩 말을 걸었다. 이렇게 이른 시간에 와줘서 고맙다고. 그 옆의 팬에게는 밥 먹었냐고. 일상적인 이야기들이지만, 아래의 팬들에게는 그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다 기적이며 인생의 업적인 거다.
무대의 오른쪽에서부터 찬찬히 훑어 팬들을 보던 그의 시선이 내 앞에서 딱 멈췄다. 잠깐 옆의 수연이도 본 것 같고. 수연이는 이미 호흡 곤란이라도 온 것처럼 팔을 파들파들 떨어댔다. 그리고 내가 불길한 웃음을 지어 보이며 시선을 돌리려는데.
“어. 여자 친구랑 또 왔어?”
아. 결국 말을 걸어버리고 말았다. 외면하지 못한 채 나는 어색한 웃음을 지어 보이며 대답했다.
“아뇨. 여자 친구 아니에요.”
“아니야?”
“네. 절대.”
여기서 민석이 형과의 대화가 종료되고 넘어갈 줄 알았건만, 그가 입술을 오므리며 나를 빤히 보는 게 아닌가. 렌즈를 꼈는지 부담스럽게 반짝거리는 눈이 나를 응시하자 진짜 어디로든 도망쳐버리고 싶었다. 저기, 이민석 씨. 저는 아이돌이 아니고 단지 새우젓과 같은 팬일 뿐이니 이런 주목은 원치 않습니다. 나는 조용히 묻혀서 당신 공연만 보고 가고 싶단 말이야. 어서 사녹 시작해주면 안 될까?
내 바람과 달리 사람들 사이에 껴 옴짝달싹 못 하는 나에게 그가 다시 말을 붙어왔다.
“그럼 너 누구 팬이야?”
아. 그 순간 온 사람들의 시선이 내게 좌르륵 꽂히는 걸 느꼈다. 간질간질한 뒤통수. 그래도 이 질문은 괜찮다. 당당하게 대답할 수 있어.
“형이요.”
“진짜?”
“그러니까 이 시간에 왔죠.”
이건 진짜다. 다른 멤버였으면 정수연의 발작이고 뭐고 절대 안 왔다. 그나마 이민석. 그룹에서 가장 무대를 잘하는 당신이니까 내가 보러 온 거지. 내 대답이 진짜 의외였는지 형은 나를 내려다보며 계속 웃고 있다. 왜 저렇게 웃나 싶어 눈만 깜빡거리고 있는데 그제야 할 말을 생각했는지 또다시 말을 붙여온다.
“우리 중에는 지운이가 너 제일 좋아하는데.”
“예에?”
나의 삐끗하는 목소리보다 더 큰 함성이 팬들 사이에서 터져 나왔다. 저게 무슨 소리야. 형은 그런 팬들을 진정시키려는 듯 손을 들어 살살 흔든다. 그러자 또 귀신같이 녹화장이 조용해진다. 나는 그 와중에도 문득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기 손짓 하나에도 이렇게 반응해주는 사람들이 많다는 건 어떤 기분일까. 아니, 이게 중요한 게 아니고.
“지운이가 볼 데 없이 부담스러우면 너 노려보면서 노래한대.”
“예에에?”
“지운이한테 전해줘야겠다. 니가 제일 좋아하는 팬은 날 좋아한다고. 고맙다?”
그러고는 장난스레 눈을 찡긋해 보이며 그 옆으로 시선을 돌리는 게 아닌가. 아마 습관적 팬 서비스인 것 같은데 나는 손등에 오소소 오른 소름을 문질렀다. 예쁜 남자의 윙크라니. 엄청 위험하네.
진정되지 않는 내 손 위로 정수연의 손이 철썩 내리쳐졌다. 나는 화들짝 놀라 주춤거렸다. 정수연이 민석이 형을 눈앞에 두고도 날 보다니? 이글이글 불타는 듯 올려다보는 눈동자에 나는 진심으로 집에 가고 싶어졌다. 오늘 여기 오는 것 자체가 아니었나 보다.
“너 다음 달 정규 활동……,”
“나 같이 못 와. 학기 중이잖아.”
“조금만!”
“나 있으면 내가 눈에 띄어서 널 보지도 않잖아. 너 다른 애들이랑 다녀.”
“어차피 너 있으나 없으나 오빠들은 내 쪽 볼 일 없거든?”
“…….”
너무 슬픈 말을 들어서 눈물 날 뻔했다. 장하다, 정수연. 그래도 니가 새우젓이라는 것만큼은 잊지 않고 있었구나.
“사녹은 바라지도 않으니까 방청이라도! 퇴근길만!”
“아, 시작한다.”
마침 불이 꺼지며 시작되는 노래에 나 역시 열심히 야광봉을 흔들며 함성에 파묻혔다. 그런 내 옆에서 지지 않는 정수연의 고함이 귓가에 계속 울렸다.
“알바비라도 줄까?!”
진짜 알바비 주면 생각해봐야지. 함성을 다 묻어버리는 전주가 시작되고 무대의 불이 한 사람을 비추어 내렸다.
사전 녹화는 세 번 만에 오케이가 났고 팬들은 목 놓아 ‘한 번 더!’를 외쳐댔다. 팬들 입장에서는 자기 오빠가 잘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다. 한 번이라도 더 실수해서 다시 녹화하고 그렇게 조금이라도 오래 보는 게 좋은 거라 항상 이렇다. 민석 형은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고 쏙 들어가 버렸다. 들어갔다가 다시 하얀 얼굴을 빼꼼 내밀어서 한마디 남기기는 했다.
“이따 본방 때 지금 사녹 해둔 거 틀어도 한 번 더 해줄게. 이따 봐.”
거기에 얼마나 큰 비명 소리가 터졌는지 나는 잠시 양 귀를 틀어막았다. 내 귀는 소중하지. 겨우 진정된 아이들이 제 목의 목소리를 체크할 때쯤 시간이 다르게 흘러가는 것 같던 녹화장의 문이 열리고 팬들은 미련 없이 빠져나갔다.
조금만 생각해보면 사녹보다 훨씬 적은 사람들이 들어오는 본방에서 공연 한 번 더 해주는 게 자기들에게 큰 이득도 아닐 텐데, 아직 거기까지는 생각이 안 드나 보다. 이 안의 사람들은 다들 이렇게 정신을 반쯤 놓고 다니는 게 보통이다. 수연이는 내 옆에 붙어 사람들에게 밀려 나오면서 제 가슴 위에 손을 얹었다. 크게 심호흡하는 중이다. 그리고 내게 말을 걸어오는 목소리의 끝이 벌써 갈라져 있었다.
“너 본방 볼 거야?”
“아니. 가서 잘래.”
한 번 맨 앞에서 봤으니 이 정도면 됐지. 요즘 나오는 가수 중에 딱히 본방에서 볼만한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고. 무엇보다 본방은 오후 늦게 저녁쯤 시작하니 시간이 남아도 너무 남았다. 이대로 수연이랑 밥을 한 끼 먹고, 카페에 가고. 또 밥을 먹고, 또 시간을 죽이고. 그렇게 기다리기는 너무 길지 않은가.
우리는 계단을 천천히 밟고 내려와 밖으로 나가는 무리에서 멀어진 뒤 홀을 가로질렀다. 몇 번 와봤던 곳이라 지리는 익숙하다. 다른 곳으로 나가기보다는 1층의 카페로 향했다. 졸려서 커피 한 잔 정도는 마시고 들어갈 생각이었다.
아침이라 사람이 드문드문 앉아있는 카페에서 우리는 나란히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받아 든 채 창가에 앉았다. 본방까지 버텨보겠다는 수연이도 눈이 퉁퉁 부은 채 이대로 엎드려 잘 것만 같은 표정이다. 긴 생머리를 끈으로 질끈 묶는 것을 보며 무심코 커피를 들었다가 입술이 뎄다.
“나도 죽겠는데 1번은 본방 당연히 들어가는 번호잖아. 아까워.”
“넌 남아. 본방은 줄 섰다가 바로 들어가니까 심심할 것도 없잖아.”
같이 남았으면 하는 기색이 가득했지만, 선 그어 말하는 내 태도에 수연이는 별 기대가 없어 보인다.
“너무 오래 걸려.”
“아까 그 번호 그대로 가지고 가면 된대?”
“응. 30번까지.”
“31번에게 전해줘. 앞에 한 명 빠지니까 들어갈 수 있을 거라고.”
“트위터에 올릴게.”
손을 녹이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나는 자리에서 일어날 준비를 했다. 다행히 수연이는 잡고 늘어질 생각은 없는 모양이다. 휴대폰으로 시간을 한 번 체크하고, 돌아가는 버스는 어디서 타야 할지 창밖을 보며 생각 중인데 손가락이 내 손등을 톡톡 두드려온다.
“정규 앨범도 같이 다닐 거지?”
“학기 중이잖아. 몰라.”
“시간 되면.”
“그래. 시간 되면.”
이 얼마나 기약 없이 가벼운 말인가. ‘시간 되면.’이라니. 학기 중에는 팀플과 과제로 점철된 일상인데 그 속에서 무슨 시간이 나겠어. 나 이제 간다. 라고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나다가 문득 기억난 것을 물었다.
“너 이번 주 EBS 방청 신청했어?”
“응. 안 잊어버렸어. 니가 좋아하는 밴드 나오지?”
“어. 되면 말해줘.”
수연이는 내게 팔을 쭉 뻗어 흔들어 보이더니 그대로 테이블에 철퍼덕 엎어졌다. 저렇게 두고 가도 되나 싶었지만, 훤한 카페에서 엎드려 자봤자 무슨 일이 생기겠나 싶어 그냥 두고 나왔다. 밤에 택시 타고 쫓아다니던 시절보다는 훨씬 안전하니 됐다.
유리문을 열고 나오자마자 따뜻해진 몸이 싸늘하게 식어간다. 두 손을 주머니에 챙겨 넣은 채 공터 앞 색색깔 옷을 입은 여자애들을 피해 걸었다. 이번 싱글 활동은 이 정도만 봐두면 충분하다. 다음 앨범은 노래 들어보고 생각해보자.
버스를 내려 대로변의 햄버거 가게 앞에서 한참을 고민했다. 지금은 배고프지만 자취방에 들어가면 바로 잘 거 같다. 그렇다고 안 사 가면 이따 배고파도 먹을 게 없고. 한참 고민하다가 결국 햄버거 세트 하나를 포장해서 자취방으로 가져갔다.
잠깐 나갔다고 그새 찬 기운이 감도는 방의 보일러부터 켰다. 콜라는 냉장고에 넣어두고, 햄버거와 감자튀김은 책상 위에 올려둔 채 맞은편 침대에 앉아 한참을 노려봤다. 그러다 결국 졸음을 못 이겨 패딩만 휙 벗어 던진 채 이불 속으로 기어들어갔다. 일단은 자고, 자고 일어나서 생각하자.
추위에 얼었던 몸이 노곤해지자마자 곧장 잠에 빠져들었다. 눈을 뜬 건 짧은 겨울 해가 지고 있는 오후 늦은 시간이었다. 창이 서향으로 난 탓에 원룸 안에는 햇빛이 가득했다. 다시 눈을 감고 이불을 얼굴 위까지 끌어 올렸다가 결국 일어났다. 오늘도 이렇게 늦게까지 잤으니 밤에 자기는 글렀군.
목이 말라 냉장고 문을 열어봤더니 아까 사 온 콜라가 보였다. 얼음이 녹고 김이 다 빠졌지만 그럭저럭 마실 만하다. 콜라를 쪽쪽 빨며 책상 앞에 털썩 앉았다. 식은 햄버거는 영 맛이 없었다. 그래도 배고픈 김에 다 해치우고 감자튀김만은 저 멀리 밀어둔 채 휴대폰을 들었다. 그새 온 몇 개의 카톡과 엄마의 문자가 있었다. 급한 건 없어서 슥슥 열어보는데 수연이의 카톡이 눈에 띄었다.
[방송봤어?]
안 봤을 걸 알면서도 묻는 게 궁금해 대답해봤다.
[아니 왜]
[나 방송 나옴!!!]
[좋겠다ㅋ]
난 또 뭐라고. 바로 대답 오는 걸 보니 아직 휴대폰 만질 수 있나 보네. 그 와중에도 카톡 알림은 계속 손안에서 울렸다.
[나너믿을거야 같이정규앨범다녀줄거지???]
[과제하고 팀플하고 시험공부하고도 시간 남으면]
[나쁜놈]
[ㅇㅇ]
나도 여유롭게 보내고 싶지만, 스물여섯 대학교 4학년의 삶은 바쁘다. 그중에서도 나는 남들보다 더 바빠야만 한다. 딱히 무엇을 할지 아직도 감을 못 잡았으니까. 이렇게 있다가 스펙 쌓고, 취업으로 그렇게 넘어가는 걸까. 나도 잘 모르겠다.
남은 콜라를 바닥까지 빨아 마신 다음 내려놓고 휴대폰의 음악을 틀었다. 조용한 방 안에 음악이 가득 차면서 나는 개강하면 할 일에 대해 천천히 세어봤다. 도서관에 책을 반납하고. 학교에서 아르바이트가 있는지 찾아보고. 학점도 잘 받아야 할 텐데. 추상적으로 그려지는 할 일들만 머릿속을 빙빙 맴돌았다.
∞ ∞ ∞
개강은 3월의 꽃샘추위와 함께 시작됐다.
가끔 티브이에서 드라마 같은 걸 보면 입학을 벚꽃과 함께 표현하던데, 나는 단 한 번도 흩날리는 벚꽃과 학교 정문을 통과해본 적이 없다. 나와 함께하는 것은 추위를 막아줄 과잠과 등에 메인 백팩. 끊임없이 울려대는 과 친구들의 단체 카톡방이다. 그리고 이틀 전부터 개강과 상관없이 계속 카톡을 보내는 수연이.
수연이는 어린 시절 옆집에 살았던 애라 같은 대학교는 아니다. 나와 다르게 여대를 다니고 있고 서로의 개강 날도 다르건만, 이렇게 끊임없이 카톡을 보내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수연이가 목숨 걸고 쫓아다니는 블래스트의 컴백 날짜가 정해졌기 때문이지.
그에 더해 지난 공방 때 이민석의 이상한 발언으로 묘한 확신을 얻은 정수연은 평소보다 더 가열차게 나를 꼬셔대는 중이다. 같이 컴백 무대 보러 가자. 같이 공방 뛰자. 같이 오빠들 돌아다니는 가게 술 먹으러 가자. 콘서트도 같이 가자, 등등. 열 번 정도 무시하다가 한 번 대답하는 데도 지치질 않는다. 요즘 내 휴대폰의 배터리를 빨리 닳게 만드는 원흉이랄까.
단체 카톡방에서 서로 언제 밥 시간이 맞느냐고 이리저리 맞춰보는 친구들의 대화를 보며 도서관에 들렀다. 방학 동안 한산하던 로비에 사람들 몇몇이 보인다. 도서관 구석 벽보에 다가가 아르바이트 공고를 들여다보는데, 또 카톡이 왔다. 무심코 내려본 검은 액정에는 수연이의 말이 와 있었다.
[대답좀해라 지운오빠의 사랑을 받는 윤재현씨]
이 말은 그냥 넘어가고 싶지 않아서 멈춰 있던 손가락을 움직여 문장을 완성했다.
[무슨 개소리야]
[민석오빠가 그랫으니까]
[근데 개소리라니
너희엄마한테이른다? 나한테욕했다고?]
[니가 한 말을 욕했지 널 욕한거아니다]
수연이는 툭하면 우리 엄마에게 이르겠다며 협박이다. 이건 좀 억울한 일이다. 나는 수연이가 다른 일을 걷어치우고 블래스트를 쫓아다녀도 수연이네 어머니께 전해드린 적이 없는데. 심지어 밤늦게 전화 와서 어디 있는지 아느냐고 물어보시면 꼬박꼬박 변명도 해줬단 말이다.
그사이 주제는 다시 도돌이표가 되어있었다. 천천히 도서관 유리문을 밀고 나와 경영관으로 향하며 휴대폰을 바라봤다. 월요일 아침 열 시 반 수업. 투자론. 학기를 이렇게 보람차게 시작할 줄이야.
[너 지운오빠는 별로임?]
[내가 별로고 말고 할 게 뭐가 있어]
[근데 너 지운오빠 이야기는 별로 안하는 듯]
애초에 블래스트 이야기를 별로 안 한다는 점부터 짚어줘야 하는 걸까. 그리고 수연이의 말이 맞는 구석도 있다. 블래스트에서 제일 좋아하는 멤버가 이민석이라면 다른 사람들에 대한 관심은 고만고만하고 특히 정지운에 대해서는 생각해본 적이 없다.
일단 정지운은, 뭐랄까. 좀 가수 같지가 않다. 아이돌이 아닌 것 같냐고 하면 그건 아니고. 키도 크고 가수라기보다는 배우 쪽에 가까운 얼굴이다. 오후의 음악 방송에서 만나기보다는 저녁 열 시 미니시리즈 방영 시간에 딱 어울리는 그런 얼굴. 무대 위에서 춤추고 노래하는데도 그걸 즐기며 보기보다는 한 씬 한 씬을 이어 붙여 돌려보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결과적으로 말하면 내가 좋아하는 가수 스타일은 아니다. 나는 능숙하고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무대를 압도하는 그런 느낌이 좋다. 정지운 같은 얼굴은 그냥 티브이에서 보는 걸로 충분하지. 그래도 잘생겨서 인기가 많으니 그거면 된 거 아닐까.
3층의 강의실로 걸어 올라가 문을 열어보자 이미 사람들이 거의 다 와서 맨 앞자리 근처만 한산했다. 오늘은 간단히 끝날 테니 맨 앞에 앉았다. 자리에 앉아 가방을 내려놓고 교수님이 들어오시는 것을 보고 마지막 카톡을 남겼다.
[내가 가고 싶은 공방은 다 떨어졌으니까 안가]
책상 위에 뒤집어둔 휴대폰은 끊임없이 진동이 울렸다. 시끄러워서 무음으로 바꾼 채 가방 안에 던져 넣고, 그사이 나눠주신 강의계획서를 확인했다. 중간고사 40%, 과제 20%, 기말고사 40%. 팀플은 없고 레포트 제출 4회. 이 정도면 최고지.
첫날이니 짧게 끝내겠다며 강의 설명만 하고 나가신 교수님의 뒷모습이 문밖으로 사라지자마자 벌떡 일어나 강의실을 나섰다. 그렇게 학교 식당에 도착해 미리 시간을 맞춰둔 친구들과 밥을 먹고 헤어질 때까지, 수연이와의 대화는 새까맣게 잊고 있었다.
“야. 이따 저녁에 정문에서 보자.”
학식으로 점심을 때운 뒤 교내 카페에서 노닥거리던 중 갈 때가 되자 영한이 이런 말로 내 발걸음을 잡았다. 무슨 말인지 가방을 메며 생각해보다가 곁에 앉은 지영이와 선아를 쳐다봤다. 우리 오늘 모이기로 했었나? 내 표정을 본 지영이가 인상을 확 찌푸렸다.
“너 또 까먹었지.”
“언제 말했어?”
“지난주에 말했잖아. 지금도 단카방에서 오늘 어디 갈지 계속 말하고 있거든?”
아, 휴대폰. 가방 깊은 곳에 던져뒀던 휴대폰을 꺼내 확인해보니 카톡이 200개도 넘게 와 있다. 내가 안 본 사이 많은 말이 오간 대화방은 그냥 눌렀다가 나오는 게 습관이라 잘 보질 않는다. 오늘 저녁에 뭘 할지 생각해봤는데 딱히 할 것도 없어서 알겠다고 끄덕였다.
다른 자리는 나가기 귀찮고 불편한 감이 좀 있는데 그래도 얘들은 제일 나은 편이다. 다 같은 학번이고 스무 살부터 봐온 사이라. 나도 1학년 때 신나게 놀 때는 이런 자리에 잘 안 나오고 귀찮아하는 선배들이 이해 안 됐는데, 요즘에는 좀 알겠다. 해놓은 것도 없고 뭘 할 거라고 말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그런 거다. 내 꾸물거리는 행동을 아직도 주시하고 있는 지영이에게 대답했다.
“자꾸 카톡 오는 거 있어서 안 보고 있었어. 여섯 시에 갈게.”
“누구?”
“수연이라고 전에 말했었는데. 기억나?”
그냥 던진 말이었는데도 지영이는 알아들었는지 고개를 끄덕한다.
“너 같이 공연 보러 다니는 애. 근데 왜?”
“너무 자주 가자고 해서.”
“귀엽다. 이번에 그 블래스트 컴백하지 않나?”
“너도 아네.”
“어. 걔가 또 음반 많이 사서 너 나눠주면 나도 주라.”
“생기면 가져다줄게. 이따 봐.”
고개를 끄덕이기 전에 가늠해봤는데 수연이는 내게 앨범을 한 아름 안겨주고도 남을 게 뻔해서 알겠다고 했다. 내가 어디 돈 주고 파는 건 아니니까 괜찮을 거 같다.
이번에는 무슨 수업이더라. 휴대폰에 저장되어있던 시간표를 열어보니 또 경영관이다. 생산운영관리. 수연이에게 온 마지막 카톡은 그래도 좀 괜찮은 말을 하고 있었고.
[주말에 술먹으러 가자 압구정]
수연이가 술 마시러 우리 둘 중 누구도 관계없는, 그 멀고 먼 압구정까지 가는 이유도 간단하다. 그 근처에 소속사와 연습실 같은 것들이 즐비하니 어쩌다 마주칠 기회를 노리는 거다.
실제로 몇 번 쫓아다닌 수연이는 그 수많은 가게 중에서 블래스트 멤버들이 자주 가는 술집을 몇 개 알아내는 데 성공했다. 그중 제일 확실한 건 멤버 중 한 명의 가족이 운영하는 가게다. 가서 술 마시다가 멤버들이 오면 좋은 거고, 아니면 마는 거고.
내가 아주 진지하게 그건 사생팬 아니냐고 물었더니 그 정도는 괜찮단다. 우연을 노리고 가는 거지 절대 쫓아서 가는 건 아니라고. 자기가 그렇다고 하니 나도 그냥 알겠다고 했다. 제발 수연이가 ‘그것이 알고 싶다’ 같은 프로그램에 사회문제로써 출연하지 않기만을 바랄 뿐. 그래도 생각은 있는 애니까. 집을 들어간다든가 차 문을 따서 털어본다든가 하는 짓은 안 하겠지. 나는 술이나 마시자. 답장을 꾹꾹 누르며 강의실로 걸음을 향했다.
[나제육볶음안주시켜줘]
[콜]
[근데너남자 친구가아무말안해?]
[곧헤어질거같아 아 만나면 그거도 이야기할거야 짜증나]
그날 술을 얼마나 마시려고 얘가 이렇게 벼르는 걸까. 불안하긴 했지만 사준다니 그냥 알겠다고 넘겼다. 이때 안 간다고 냉정한 거절을 해야 했던 거다.
3월의 첫 주는 개강과 술자리가 함께 어우러져 지나갔다. 과 친구들끼리의 모임. 동아리 모임. 수업에 대한 성토들. 지금은 나름 점심시간을 맞춰 사람들을 보지만, 곧 수강신청 변경 기간이 지나면 흩어질 것을 알았다. 나는 어쩌다 보니 그 모든 모임에 참가해 얼굴을 비쳤다. 학교 근처에서 자취하다 보니 연락받으면 생각 없이 걸음 하게 돼서 그렇다. 안 나가고 방 안에 있어봤자 하는 일도 없고.
금요일까지 술을 마신 탓에 토요일 아침에는 눈을 뜨자마자 느낌이 왔다. 또 먹었다가는 딱 죽을 것 같다는 느낌. 수연이에게 슬쩍 일요일에 봐도 되냐고 물었더니 의외로 흔쾌히 그러자고 답변이 왔다. 얘도 복학한 기념으로 그렇게 마시고 다닌 건가 싶어 물었더니 그런 건 아니더라.
[오빠들 앨범준비할때는 일요일까지 연습하고 월요일에 쉬거든 그래서 일욜에 많이 먹어 내일밤에 보자]
거기다가 곧 헤어질 남자 친구 이야기까지 가져오겠다며 벼르고 있는 걸 보니 일요일에 쉽게 풀려날 느낌이 아니었다. 월요일 수업이 열 시 반이니 대충 자고 수업 듣다가 휴게실 가서 졸아야겠다. 벌써부터 월요일의 내 꼴이 눈앞에 훤하게 그려졌다.
그렇게 돌아온 일요일 아침은 우중충한 날씨였다. 아직 해야 할 과제나 팀플도 없고. 괜히 노트북을 두드려보다가 친구들과 피시방에 나란히 앉았는데 게임 몇 판 해보지도 않았건만 전화가 왔다. 대충 어깨와 귀 사이에 끼우고 자판을 두드렸다. 수연이의 쨍한 목소리가 귀를 울렸다. 고음이라 어지간히 튀는 게 아니다.
―너 뭐해? 피시방이야?
“어. 이따 보자며.”
바깥과 차단된 피시방이었지만, 햇볕 들어오는 창문이 하나쯤은 있기 마련이다. 입구 앞 복도 쪽 창 하나가 그렇다. 밖이 쨍한 건 아니더라도 밝은 거 같은데.
―예쁘게 입고 나와.
“너나 그렇게 입어.”
―난 당연히 그럴 건데, 너도 쫌.
“왜.”
―원래 예쁘고 잘생기면 다 관대해지거든. 너 백화점에서 산 회색 맨투맨이랑 청바지 제일 예쁜 거 입고, 운동화 흰색 신어. 머리는 만져서 차분하게만 하면 돼.
“아, 귀찮게.”
―믿는다?
뒤에 무슨 대꾸를 하기도 전에 전화는 툭 끊겼다. 그리고 고개를 내려 내 옷 상태를 봤다. 이것도 나름 브랜드 있는 트레이닝복인데. 어떻게 안 될까. 옆에서 컵라면을 해치우고 있는 영한이를 툭 쳤다. 얘는 나보다 더한 게 회색 추리닝으로 위아래를 걸쳤다. 청청 패션보다 흉측한 게 있다면 바로 이게 아닐까 생각한다.
“영한아. 너 압구정 갈 때 트레이닝복 입고 갈 수 있냐?”
“거긴 좀 그렇지. 누가 오래?”
“친구가 술 사준대.”
“그럼 청바지라도 입고 나가라, 짜샤.”
영한이마저 이렇게 거들자 할 말이 없다. 그래. 버스 타고 그 멀리 가는데 이 꼴은 좀 그렇지. 게임을 휙 꺼버리고 지갑을 든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영한이는 맞은편 다른 애들과 담배 피우려는지 일어나던 중이었다.
“나 먼저 간다.”
“누구 보러 가. 여자? 오올.”
“정수연.”
“아. 힘내라.”
어깨를 뒤에서 감싸 누르며 위로하는 목소리에 고개를 끄덕였다. 수연이를 만나는 건 큰 힘을 내야 할 일이지. 카운터에서 내 몫을 계산하고는 손을 흔들고 내려왔다. 샤워하고 준비하고 나가려면 시간이 영 빠듯했다.
어찌어찌 시간에 맞춰 준비하고 압구정 로데오거리 앞 정류장에 내렸을 때. 나도 나름대로 신경 쓰고 왔다고 생각했는데, 수연이를 보고 그게 아님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뾰족한 검은 구두와 짧은 검은색 미니스커트까지. 후드티 모자로 감지 않은 머리를 감춘 채 나를 보러 오던 평소와는 사뭇 다르다. 게다가 무려 체인 핸드백까지 어깨에 챙겨 멘 것을 보고 이것이 진정한 사랑의 힘임을 느꼈다. 사랑이 이렇게 위대하다. 버스에서 내려 도로에 멍하니 서 있다가 인도 위로 올라섰다. 수연이는 내 눈빛에 퍽 쑥스러운 듯 이런 말을 했다.
“왜? 반했어?”
“아니.”
아무리 놀라워도 말은 똑바로 하자. 그건 아니다. 괜히 단호하게 이야기했다가 한 대 얻어맞았다. 아픈 어깨를 문지르며 술집으로 질질 끌려갔다.
술집은 골목을 걷다가 꺾고 또 꺾으면 그 끄트머리에 있었다. 입구의 맞은편은 무슨 공원 같은 곳의 담벼락이 있고 그 앞에 주차된 차들이 몇 대 있다. 입지가 좋다고 할 수는 없는 이 술집이 운영될 수 있는 이유의 팔 할은 분명 수연이처럼 알음알음 찾아오는 팬들 때문일 거다.
우리는 문을 열고 들어가 가게의 중간쯤 벽 바로 옆에 자리 잡았다. 술을 마시는 아저씨들이 저 끝에 한 테이블. 남녀 섞인 테이블 하나가 문간 근처에 있을 뿐이다. 어째 팬들이 잘 보이질 않네. 제육볶음과 소주 맥주를 섞어 주문하고 자리에 앉았다.
“팬들 없네.”
“활동 기간 아니면 잘 안 오지.”
“넌 왔잖아.”
“난 마침 술 먹고 싶은 거 오빠 통장에 보탬이라도 됐으면 해서.”
사랑이야. 이게 바로 사랑이 아니면 무엇을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그런 거치고는 너무 꾸몄다.”
“아이. 어쩌면 볼 수도 있잖아.”
“됐다. 남자 친구는 뭐.”
내가 이 이야기를 먼저 꺼낸 것은 빨리 해치우고 술이나 마실 생각으로 그런 거였다. 하지만 이 말을 했을 때 수연이의 동그란 얼굴에 퍽이나 속상한 기색이 가득해졌다.
“윤재현. 너 연애할 때 막 좋았었어?”
“그때는…… 좋았지. 안 좋으면 왜 사귀냐.”
“헤어질 때는 싫어져서 헤어졌어?”
“깨는 행동을 봐서 헤어진 적도 있고. 그냥 덜 좋아져서 헤어진 적도 있고.”
갑자기 몰아치는 대화가 진지해서 좀 당황했다. 오늘 진짜 블래스트보다 자기 연애 이야기가 우선이란 말이야? 이건 좀 대단한 일인데.
수연이는 자기 남자 친구를 스무 살에 처음 만났다. 그때부터 사귄 건 아니고. 썸 타다 삐끗하고, 그러다 다시 만나면 또 누군가가 실수하고. 그렇게 엎치락뒤치락하다가 연애를 시작한 지 2년 차다.
덕분에 나는 군대 있을 무렵 수연이에게 전화하면 내 이야기는 하나도 못 하고 저 스토리를 줄줄 들어야 했다. 꼼짝 않고 들어줬던 이유는 정수연의 실수 중 몇 가지는 내가 잘못 조언한 것도 있었기 때문이다. 수연이는 남자 마음이니 니가 잘 알지 않겠냐고 물어본 거였는데, 몇 번의 조언 실패 끝에 나는 보통 한국 남자가 아닌 걸로 결론 내렸다.
어린 시절의 연애라는 게 그랬다. 이상은 높은데 어떻게 할 줄 몰라서 자꾸 삐끗하는. 그래도 요즘에는 잘 만나는 것 같길래 잊고 있었는데, 아닌가 보다. 수연이는 이제 어깨까지 오는 자기 머리카락의 끝을 손가락으로 빙빙 꼬고 있었다. 침묵이 감도는 사이 자리에는 우리가 시킨 안주와 술이 깔렸다. 나는 침착하게 술잔에 소주를 먼저 붓고 맥주를 채웠다. 짠 하고 힐끔 눈치 보다가 한 모금 넘기고 내려뒀다.
“재현아.”
“어.”
“싫은 건 아닌데, 안 맞는 것 때문에 자꾸 싸워. 좋은 게 뭐지?”
“…….”
난 그 질문의 답을 모른다. 그 단계까지 가지도 못하고 헤어졌었으니까. 어디쯤에서 걸려 넘어지냐면, 잘 싸우질 못해서 헤어졌다. 연애 중에 싸우는 것도 중요한데, 나는 남들 다 잘하는 그 싸움을 못 하겠더라. 싫은 소리가 왜 그렇게 입 밖에 안 나오던지. 그렇게 겉으로만 좋은 척, 잘 지내는 척하다가 한계가 오면 헤어졌다. 상대방이 먼저 지치는 경우도 있었고. 어색하게 내 목만 쓸어내리다가 다시 술잔을 들었다. 그런 내 행동에 수연이는 뻔히 보인다는 듯 웃었다.
“너 모르겠어서 그러지?”
“응. 너가 먼저 해보고 다음에 나한테 알려줘. 대신 술은 같이 먹어줄게.”
내가 우정의 힘으로 해줄 수 있는 건 이 정도인 것 같네. 그렇게 술 비워가는 속도가 서서히 올라갔다.
술은 계속해서 들어갔다. 소주와 맥주의 비율은 규칙 없이 들이 부어졌고 나랑 수연이는 별의별 이야기를 늘어놓으며 술자리를 계속했다. 기본 안주로 나오는 콩나물국도 리필하고 서로의 온 가족 이야기까지 줄줄 늘어놓은 끝에야 지쳤다. 취해서 졸린 건지 피곤해서 졸린 건지 가늠도 안 된다. 둘 다 머리를 한쪽 벽면에 기댄 채 이야기를 계속했다. 수연이는 제 눈을 반쯤 감은 채 용케 이야기를 이어간다.
“아버지는 잘 계셔?”
“잘 계시겠지.”
시큰둥하게 대답하긴 했지만, 정말 잘 모른다. 아마 잘 계시지 않을까. 어린 시절 옆옆옆집 살았던 수연이는 나보다 우리 집 안부를 더 걱정한다. 수연이네 가족은 내가 걱정할 것도 없이 잘 지내니 물어볼 필요도 없다. 여기서 이야기가 또 자기 남자 친구로 바뀌어서 중얼중얼 불만이다. 그런데 듣다 보니 궁금한 게 있긴 하다.
“원준이는 너 블래스트 쫓아다니거나 나랑 술 마셔도 뭐라고 안 해?”
“응. 안 해. 그냥 알겠다네. 이태원 놀러 간다고 해도 그러래.”
“…….”
아, 모르겠다. 나는 모르겠다. 저러면서 기념일이나 그런 건 또 잘 챙기는 거 같고. 눈을 부비며 생각 중인데 내가 같이 잔 들 새도 없이 수연이가 제 앞의 술을 원샷해버렸다. 걱정스럽다 싶더니 결국 비틀거리며 테이블에 엎드린다. 야, 자냐? 몸을 기울여 정수리를 톡톡 찔러봤는데도 웅얼거리는 소리만 낸다.
“잠깐만…….”
“너 여기서 토하면 죽는다.”
“알아…….”
깨워 보내는 것보다는 차라리 조금 자다 나가는 게 낫겠지. 나도 엎드려 잘까 하다가 그 정도는 아니라서 턱을 괸 채 눈을 감았다 떴다. 시간은 열두 시가 되어가고 버스나 지하철로 돌아가기는 이미 글렀다. 그래서인지 어두운 술집에는 우리 말고 아까 그 아저씨들 테이블밖에 없었다. 안을 휘둘러보다가 앞쪽의 술집 유리문 밖을 보고 있는데 큰 키의 남자 둘이 들어왔다. 문 열리는 소리가 술집의 음악 소리 사이로 끼어들었다.
둘 다 위아래로 시커먼 옷을 둘러 입은 데다 모자를 푹 눌러써서 누군지 알아볼 수 없었다. 들어와 긴 다리로 술집을 활보하는 두 사람을 멀거니 보다가 엎드려 뻗어버린 수연이의 팔을 흔들어 깨웠다. 아니, 깨우려고 했다. 내 노력은 가상했으나 결과가 미비했던 탓에 이렇게 표현하는 거다. 수연이는 가슴속에서 끓어오르는 신음만 웅얼대며 꿈틀거렸다. 안쓰러운 마음이 들어 관뒀다.
두 명의 남자는 우리와 한 테이블 건너에 자리 잡았고 메뉴판을 보며 뭘 시키는 걸 보니 한참 후에 가지 않을까 싶었다. 아르바이트생 여자애가 우리를 대할 때와는 사뭇 다르게 공손한 태도로 주문을 받아갔다. 그리고 한 남자가 제 모자를 벗어다 테이블 위에 올려뒀다. 노랗다 못해 흰색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탈색한 머리가 날렵한 턱선을 덮었다. 요즘 드라마에 나오는 모델 겸 배우다. 본명은 기억이 안 나고 극 중 이름만 기억이 나네. 이어서 그 맞은편의 남자가 모자를 벗는 걸 보고 나는 다시 수연이의 팔을 흔들었다.
“수연아.”
“…….”
“일어나. 니 꿈이 이뤄졌다.”
수연이가 모시는 오빠는 아니지만, 그래도 같은 멤버이니 이 정도면 꿈이 이루어졌다고 할 만하다. 정지운은 모자에 눌린 갈색 머리를 손으로 털며 모양을 잡았다. 검은 후드티 탓에 더 허여멀건 하게 보이는 얼굴이 고운 선으로 똑 떨어진다. 콧날에서 도톰한 입술까지 이어진 그 선을 맥없이 보고 있으려니 정면을 응시하던 정지운의 고개가 천천히 내 쪽으로 돌아왔다. 재빨리 모른 척 고개를 돌려야 했는데 타이밍을 놓쳐 시선을 마주해버리고 말았다.
색소가 옅은 갈색 눈동자가 정면으로 마주쳐서 내 얼굴을 뜯어본다. 그 시선을 견디다 못해 한껏 긴장된 자세로 어색하게 웃었다. 하하. 하하하. 왜 저러지……. 가슴에 차오르는 긴장감이 펑 터져버릴 것 같은 순간 정지운 맞은편의 남자가 끼어들어줬다. 천만다행이었다.
“지운아, 너 아는 사람이야?”
그 말에 갈색 눈동자가 내 발끝까지 훑다가 제자리로 돌아갔다. 그리고 늦게 대답이 나온다.
“아니. 내 팬.”
아닌데…….
“남팬?”
“어.”
“여기서 먹어도 돼?”
“괜찮아. 애는 착해.”
내가 또 타이밍을 놓친 채 입만 뻐끔거리는 사이 대화는 벌써 끝나 있었다. 팬? 내가? 애는 착해……? 그렇게 말하는 목소리가 얼마나 부드럽던지, 내용만 아니면 무슨 드라마 촬영 중에 대사 치는 줄 알았을 거다. 이거 몰래카메라인가? 멍청한 생각을 지웠다. 아니지. 그런 걸 왜 나한테 하겠어.
두 남자는 자기들만의 대화에 빠져들었고 나는 다시 한 번 수연이의 팔을 흔들었다. 일어나서 얼른 니가 호들갑을 떨란 말이다. 너 때문에 내가 우주 최강 극성 남팬이 되고 있잖아.
“수연아. 눈 좀 떠봐.”
“으음…….”
“아이 씨. 정수연!”
크게 불러도 소용이 없다. 얘가 언제 이렇게 많이 마신 걸까. 다급한 내 목소리에 건너 테이블의 시선이 이쪽으로 쏠리는 게 느껴졌다. 정지운은 더할 나위 없이 다정한 눈빛으로 한 번 고개를 끄덕이고는 고개를 돌렸다. 이 자리에 있는 걸 허락해준다는 듯이. 나는 순간 내가 쟤네 집 강아지라도 된 줄 알았다. 뭐지. 오늘의 이 오해는 도대체 어디서 온 걸까.
정지운. 블래스트 멤버 전원이 나가는 프로그램이 아니면 예능에 얼굴을 비치지도 않고 말수가 그렇게 많은 편도 아닌 사람이다. 한국에서의 인기는 손꼽히는 정도로 끝나지만, 중국인지 일본인지 어디서 인기가 그렇게 많다고 한다.
그래. 물론 인기가 많도록 생기긴 했다. 길게 뻗은 시원한 눈매는 옅은 쌍꺼풀로 부담스럽지 않고 흰 얼굴이 매끄럽게 모양 지어졌다. 그러면서도 길쭉하고 탄탄한 몸이 한데 어우러져 있다니. 하늘은 불공평하고 정지운은 잘났다. 그것에 대해서는 인정하는 바다.
하지만 그게 내가 정지운을 쫓아다닌다는 결론으로 비약되는 것은 너무한 일이지 않을까.
엎어져 잠든 수연이가 뒤척일 때마다 그 뒤통수를 쓰다듬어주며, 그리고 옆 테이블에서 간간이 팬들이 어쩌네 저쩌네 하는 이야기를 들으며 생각해봤다. 누가 옆 테이블 음소거 좀 해주세요. 저 때문에 저런 이야기 하는 거 같은데 창피해 죽겠습니다.
침착하게 생각해보자. 내가 그렇게 많이 쫓아다녔던가? 일단 나도 블래스트를 아이돌 그룹 중에 제일 좋아하기는 하니까 자주 갔었지. 하지만 개인 활동 때는 민석이 형이 활동할 때만 갔는데? 정지운 개인 활동은……. 아, 정지운은 아직 개인 활동이 없었다.
짧은 시간 내 과거를 돌이켜보고 결론 내렸다. 내가 블래스트 팬인 것까지는 인정하고 넘어갈 수 있다. 하지만 개인 팬으로 분류하자면 민석이 형의 개인 팬이고, 정지운의 개인 팬은 아니며, 무엇보다 난 그렇게 쫓아다닌 적 없어.
결심이 서고 입술을 굳게 한 번 깨물었다. 그리고 내 나름대로 단호한 표정으로 옆의 두 사람을 돌아봤다. 밝은 머리의 남자는 얼마 전 술집에서 자기를 뻔히 알아보고도 누구시냐고 물어본 사람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신나게 하는 중이었다. 몇 초쯤 그렇게 보고 있으려니 내 기척을 느낀 정지운이 나를 돌아봤다.
손가락으로 집고 있던 소주잔을 내려놓고 천천히 나를 향해 돌아보는 얼굴을 보는데, 그게 무슨 슬로우 모션인 줄 알았다. 나와 정지운이 눈을 마주치는 그 순간의 시간만큼은 느리게 흘러가는 것만 같아서. 느긋하게 나를 보는 얼굴을 마주하고도 나는 잠깐의 텀을 두고 말을 꺼낼 수가 있었다.
“……저, 민석이 형…,”
그리고 내가 어렵게 꺼낸 문장이 채 완성되기도 전에 정지운이 끼어들었다.
“민석이한테 들었어.”
“예?”
“내 팬이라고.”
“……예에?”
내 대답은 물음도 긍정도 아닌 애매한 높이의 음으로 나왔다. 민석이 형은 도대체 뭘 전한 거야. 나는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정리해보자. 지금 이 상황에서의 내 입장은 말이다. 극성 사생 남팬이 되기는 싫다, 아 근데 저렇게 믿고 있는 사람에게… 니 팬이 아니라고 하기는 좀…….
양자택일의 갈림길에서 머리 터지게 고민하는 찰나 정지운은 그런 내 표정 변화가 꽤나 웃겼던지 눈의 힘을 풀고 웃음 지었다. 아이돌 외모 순위권 경쟁할 때마다 꼬박꼬박 순위에 드는 그 얼굴이 내게 말했다.
“앞으로 그만 쫓아다니고.”
“안 쫓아다니는데요?”
“괜찮아. 그래도 할 일은 하고 다녀야지.”
“네?”
나는 여기서 아무 말 못 하고 입만 벙긋거리고 있다가 눈웃음이나 한번 받고 우리의 대화는 그렇게 마무리 지어졌다. 다시 정지운과 나는 각자의 술자리에 관심을 돌렸다. 나는 내 머리를 벽에 한 번 박았고 말이다.
그래, 뭐. 정지운 팬이라고 여기서 말한다고 내 인생이 얼마나 달라지겠냐……. 옆에서 노란 머리의 남자는 오늘따라 내숭이네 어쩌네 하며 나를 시끄럽게 손가락질했다.
나는 우울하고, 좀 답답해서 테이블 위에 던져뒀던 휴대폰을 집었다. 카톡을 열려다가 술기운에 젖은 뇌가 마지막 이성은 챙겼다. 이런 한탄을 여기다 하는 건 아니라고. 나는 오랫동안 열지 않아 어디 있는지도 잊고 있었던 트위터를 열었다. 아무 생각 없이 트위터 멘션을 눌렀다.
《술집에서 정지운 만났는데 내가 자기팬인줄 안다. 그만 쫓아다니란다. 사생아닌데》
아무 생각 없이 올렸는데 바로 누가 맨션을 올렸다.
《구라치지마요》
눈살이 찌푸려졌다. 그 가수에 그 팬이라고, 왜 다 나를 못 믿는 거야?
《맞는데요》
《웃기네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별거 아닌 문장인데도 기분 나쁜 건 어쩔 수 없다. 휴대폰을 들어 이것저것 만지는 척하다가 동영상 버튼을 눌렀다. 사진을 누르면 소리가 크게 나지만, 동영상 촬영은 알림음이 작은 편이다. 음악 소리에 묻힌 알림음과 함께 휴대폰을 옆으로 살짝 흔들었다가 다시 돌렸다. 자세히 들여다봐야 하지만 팬이라면 알아볼 수 있을 만큼 얼굴 윤곽이 나왔다. 나는 그 동영상 중 일부를 캡쳐해 트위터에 게시했다.
《맞다니까요. 여기 사진》
그리고 옆 테이블의 관심을 더 이상은 받고 싶지 않았기에 분위기를 환기시킬 수 있는 존재를 깨우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일어나라, 정수연. 이제부터는 너의 단독 팬 미팅 타임이다. 테이블을 돌아 수연이가 엎드려 있는 뒤로 가 서서는 양어깨를 잡아 벌떡 일으켰다. 니가 이러고도 안 깨나 보자. 내 힘으로 상체는 들어 올려졌지만 고개를 축 늘어뜨린 채 뭐라고 중얼거리길래 귀를 가까이 가져다 대봤다.
“뭐라고?”
“물, 으으…….”
“야. 일어나. 정지운 왔어.”
순간 수연이는 마치 지금껏 취한 척했던 것처럼 제 손으로 테이블을 밀치듯 내려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 기세에 눌린 내가 뒤로 물러서고, 몇 안 되는 술집 사람들의 시선을 받으며 고개를 두리번거리던 수연이가 제 옆 건너 테이블을 보고 도로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는 부들부들 떨리는 시선으로 뒤돌아 나를 바라봤다.
“헉, 야. 어, 언제 왔어?”
“얼마 안 됐어.”
“흐어어…… 오빠. 아. 나 싸인. 어쩌지.”
그래, 이거지. 수연이는 아주 전형적인 팬의 모습을 보여줬고, 호들갑과 난리를 떤 결과 사인까지 얻어낸 다음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 품에는 정지운의 사인뿐만 아니라 그 일행의 사인까지 고이 안겨 있었다.
나는 그것을 의자에 앉아 지켜보고, 정지운이 젓가락질 한 번 할 때마다 내 손을 부여잡아오는 수연이를 감당하다가 얘가 잠깐 화장실 간 사이에 술값을 계산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버렸다. 얻어먹기보다는 얼른 정리하고 도망치는 게 우선이다.
가게를 나가기 전 무심코 뒤를 돌아봤다가 의자 등받이에 기대앉아있는 정지운과 또 눈이 마주쳤다. 이것도 나름 아는 사이라는 듯 뚫어지게 봤다. 연갈색의 눈동자가 내게서 떨어지지 않길래 나는 어색하게 고개를 살짝 숙여 보았다. 과에서 얼굴만 아는 선배에게 어색하게 인사하듯이. 그런 내 행동을 보고는 옅은 미소와 함께 내게 이런 인사를 했다.
“다음에 보자.”
거기에 화답하는 내 미소는 세상에서 가장 어색한 미소였을 거라고 확신한다. 비틀거리며 나오는 수연이를 낚아채서는 곧장 가게를 나왔다. 조금 반항하는 듯했지만, 시간이 시간이니만큼 결국 순순히 따라와 줬다. 발이 아프다며 구두를 벗어 던지기 전 서둘러 잡은 택시에 밀어 넣은 뒤에야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아, 드디어 끝났다. 난 자유다. 어색해 돌아버리는 줄 알았네. 팔을 쭈욱 뻗어 기지개를 켠 뒤 길을 따라 걷는데 휴대폰을 넣어둔 주머니에서 자꾸 진동이 울렸다. 이 시간에 전화가? 싶었는데 알림이었다. 트위터 알림 말이다. 이때까지는 별생각 없이 파랑새의 아이콘을 눌러 켰다.
트위터가 난리 났다. 나는 사진을 지우고 앱 설정에 들어가 알림을 껐다. 택시를 잡아타고 집에 오면서 내게 온 맨션을 하나하나 읽어봤는데, 정말 생난리다.
정말 거기 있는 거 맞냐. 어디냐. 이렇게 밝혀버리면 오빠 어떡하냐. 너는 뭐하는 놈이냐, 등등.
욕이 너무 많아서 하나하나 읽다 보니 상처였다. 집에 들어와 휴대폰을 던지기 전 우울한 마음으로 계정을 삭제했다. 나름 친한 사람도 몇 명 있었는데 이렇게 떠나게 될 줄이야.
휴대폰을 대충 던져놓고 잠들었다가 깨어난 것은 생각보다 이른 아침이었다. 목이 말라 일어났다가 무심코 휴대폰을 들었을 때 열 몇 개가 와 있는 수연이의 카카오톡을 보았다.
[헐 너 계펑함?
너 트위터에 무슨말했어
언니들이 너 사고치고 계펑했다는데?
너 어제 사진 올렸어? 미쳤냐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우리 가고 술집에 사생들 들이닥치고 난리났대
어쩌자고 그랬냐ㅋㅋㅋㅋㅋ]
내가 그럴 줄 알고 그랬냐. 아, 몰라 나도 상처받았어. 머리를 벅벅 긁으며 할 말을 생각해봤는데 떠오르는 게 없었다. 그러게. 내가 어쩌자고 트위터에 사진을 올린 걸까. 아무리 고민해봐도 답이 없길래 그냥 모르는 척 휴대폰을 휙 던져버렸다.